⊙ “국민들은 ‘혁명에 대한 피로감’ 느끼고 있었다”(柳根一 전 조선일보 주필)
⊙ “5·16은 4·19의 시대적 요구를 더욱 심화시킨 것”(李榮一)
⊙ “독재는 독재일 뿐이고 惡, ‘善意의 독재’라는 말 인정 못해”(柳世熙 한양대 명예교수)
⊙ “5·16은 4·19의 시대적 요구를 더욱 심화시킨 것”(李榮一)
⊙ “독재는 독재일 뿐이고 惡, ‘善意의 독재’라는 말 인정 못해”(柳世熙 한양대 명예교수)
- 5·16 당시 중앙청에 진주하는 혁명군.
<1년 전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들은 그 꿈 많은 청춘을 바쳐, 부패와 탐욕과 수탈과 부정에 도취한 이승만(李承晩)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사경(死境)에서 회생(回生)시켰다.
그러나 정치생리와 정치적 행상과 사고방식에 있어서 자유당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 정부는 혁명 직후의 정치적 공백기를 기화로 지나치게 비대해진 나머지 스스로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정권을 마치 전리품(戰利品)처럼 착각하고, 혁명과업의 수행은커녕 추잡하고 비열한 파쟁(派爭)과 이권(利權)운동에 몰두하여 그 바쁘고 귀중한 시간을 부질없이 낭비해 왔음은 우리들이 바로 며칠 전까지 목격해 온 바이다.
그러는 동안 국민경제는 황폐화하고 대중의 물질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고 사회적 부(富)는 소수자(少數者)의 수중으로만 집중하였다. 그 결과로 절망, 사치, 퇴폐, 패배주의의 풍조가 이 강산을 풍미하고 있었으며 이를 틈타서 북한의 공산도당들은 내부적 혼란의 조성과 붕괴를 백방으로 획책하여 왔다.
절정에 달한 국정(國政)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活路)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
4·19혁명이 입헌(立憲)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은 정치권력이 단지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하고 고식적(姑息的)인 집권당과 정치가 수행하지 못한 4·19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혁명의 적극적 의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혁명은 4·19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후략)
이 글이 실린 것은 《사상계》(思想界) 1961년 6월호이다. 당시 《사상계》 기자였던 손세일(孫世一) 전 의원에 의하면, 이 글을 발행인 장준하(張俊河) 선생이 썼다고 한다.
‘1년 전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들은’ 운운하는 대목만 아니라면, 이 글은 ‘박정희(朴正熙) 전도사’의 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4·19 이후 들어선 장면(張勉) 민주당 정권의 무능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5·16군사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대목은 5·16을 4·19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4·19와 5·16, 불과 1년 사이에 일어난 이 두 사건은 이후 민주화(民主化)와 산업화(産業化)라는, 대한민국을 이끈 두 갈래 물줄기의 원류(源流)가 됐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4·19 당시 혈기 넘치던 학생들은 70대 중반의 노인이 됐다. 5·16을 일으켰던 청년장교들은 80대 중반이 됐다. 5·16 주체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이던 가난한 나라는 G20의 일원으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 5·16 50주년을 맞아, 어떤 의미에서는 5·16의 대척점(對蹠點)에 섰던 4·19 주역들, 그리고 그 세대 지식인들로부터 4·19와 5·16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증언자들의 호칭은 4·19, 5·16 당시의 상황을 기술한 대목에서는 존칭 없이, 그들의 발언을 직접 옮긴 대목에서는 그들의 전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직함을 붙이기로 한다.)
4·19
4·18 高大生 시위
1960년 4월, 막 개학(開學)한 대학가는 들끓고 있었다. 3·15 부정선거와 마산에서의 학생시위, 시위에 참여했다가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김주열(金朱烈) 군의 죽음이 그들을 분노케 했다. 마음 깊은 곳에는 대학을 졸업해도 전재(戰災)에서 복구된 지 얼마 안되는,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이던 가난한 나라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암담함도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이던 이세기(李世基·국회의원·국토통일원 장관 역임)는 정경대 학생회(학도호국단) 회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고려대에는 총학생회가 없었다. 그는 상대(商大) 학생회장이던 이기택(李基澤·현 민주평통 상임부의장) 등과 함께 데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4월 18일 신입생환영회를 기화로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세기 전 장관의 회고다.
“단상에 올라가 박찬세(朴贊世·법대·통일연수원장 역임)가 작성한 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정문을 나가려는데 유진오(兪鎭午) 총장이 방송으로 ‘몸조심하라. 학생의 본분을 잃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안암동 로터리 앞에 쳐진 경찰의 1차 저지선은 쉽게 뚫었는데, 대광고 앞에서 경찰의 두 번째 저지선에 가로막혔어요. 대광고 학생들이 ‘형님들, 싸우세요’라면서 뛰쳐나와 경찰을 협공한 덕에 2차 저지선을 뚫고 시내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대생들은 서울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본관) 앞까지 진출했다. 유진오 총장, 고려대 선배인 이철승(李哲承) 의원, 장택상(張澤相) 의원 등이 나와 연설을 했다. “학생 여러분의 의기(義氣)는 전달됐으니, 일단 돌아가라”는 얘기였다.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은 광장시장 부근에서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이 동원한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이세기 전 장관은 “40, 50명이 쓰러졌는데, 다음날 《동아일보》에 ‘고대생 1명 사망’이라는 보도가 나갔다. 오보(誤報)였지만, 시민들이 흥분했다”고 회고했다.
서울대 文理大生들의 4·19
4월 14일경부터 학내 서클 신진회 등을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 중이던 서울대생들도 이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강의실에서 선언문을 준비하던 정치학과 류세희(柳世熙·한양대 명예교수)는 이수정(李秀正·전 문화부 장관)을 만나 그의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위 준비에 대한 걱정에 글이 안 써져서 고민하던 류세희는 이수정에게 자기 대신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 전 장관은 곧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엎드린 채로 선언문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鐘)을 난타(亂打)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는 구절로 유명한 서울대 4·19 선언문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류세희가 문장을 조금 손본 후 황선필(黃善必·전 청와대 대변인)이 이를 정서했다.
4월 19일 아침, 시위 주동자 중 한 명이던 정치학과 3학년 이영일(李榮一·전 국회의원)은 강의실을 돌면서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교수들은 한 사람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왜 앉아 있느냐’는 태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시위대와 함께 동대문까지 나갔다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난 4월 26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하야(下野)했다. 이영일 전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은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나 발포(發砲)명령도 85세의 노(老)인을 둘러싼 집단이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통령은 실상을 보고받고 ‘젊은 사람들을 더 이상 희생시킬 수 없다’면서 권좌(權座)에서 물러난 것이죠.”
4·19에서 5·16까지
통일논의의 물꼬가 트이다
4·19혁명 후 세상은 달라졌다. 하지만 혁명의 주체인 학생들의 입장은 애매했다. 류세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학생들은 혁명의 주체였지만 조직화·체계화되어 있지는 않았고, 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정권을 장악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길은 갈렸다.
이영일 전 국회의원은 그때의 분위기에 대해 “4·19혁명 후 한국 대학사회에는 학생운동의 큰 흐름이 신생활운동, 후진성 극복운동, 민족통일운동의 세 가지로 집약됐다”면서 “나는 후진성 극복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후진사회연구회를 결성했다”고 말했다.
일부 학생들은 그해 여름 실시된 7·29선거에 나선 민주당 후보의 선전대(宣傳隊)로 동원됐다. 그런가 하면 그런 꼴이 보기 싫다고 학업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이세기(李世基) 전 장관은 “학생들의 주가(株價)가 오르면서 국회의원 후보들이 저마다 학생들을 모셔갔고, 공명선거실천운동, 새생활운동 등으로 학생들의 힘이 흩어져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말이 있었다. 바로 ‘통일(統一)’ 이었다. ‘통일’이 화두(話頭)가 된 이유에 대해 류세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임정(臨政)세력이나 중간파를 용공(容共)으로 몰아 탄압했어요. 자유민주주의를 정면에 내걸 수 없었던 이승만 정권은 반공(反共)과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중심가치로 내세웠어요. 마치 공산주의반대=자유민주주의인 것처럼 말이죠. 그러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이제 북진통일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다른 통일방안도 얘기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 거죠.”
류세희 교수는 “당시 경제난, 근대화에 대한 욕구도 학생들이 통일논의에 나선 한 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정말 암담하던 시절이었어요. 대학생들도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됐고…,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어요. 지금처럼 기술혁신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고…. ‘통일이 되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나아지기 어렵다’는 생각들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남한에는 쌀은 좀 여유가 있었지만, 전기가 없었거든. 남한의 쌀과 북한의 전기를 바꾸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남 전기 이북 쌀’이라는 구호도 나왔어요.”
이영일 전 의원은 “‘독재정권을 타도했던 열정으로 남북을 가르는 38선을 타도하는 데도 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성세대가 독재체제에 안주했던 것처럼 분단체제에도 안주하여 통일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분단체제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우리 학생들이 남북통일의 주역이 되어야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통일논의에 불을 댕긴 것은 1960년 9월 고려대 정경대 학생회가 개최한 ‘민족통일에 관한 제(諸)문제’라는 주제의 ‘전국대학생 시국토론대회’였다. 이 행사를 주최했던 이세기(李世基) 전 통일원 장관의 회고다.
“‘4·19는 민주화운동이자 민족혁명이고, 민족혁명은 통일을 통해 완성된다. 4·19는 민족통일로 완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60년 여름방학 때부터 시국토론대회를 준비했습니다. 통일한반도의 지도를 크게 집어넣은 포스터를 서울시내 곳곳에 붙였어요.”
中立化 통일방안 등장
‘전국대학생 시국토론대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기존의 통일방안을 비판하고 새로운 통일방안 마련을 요구하는 한편, ‘중립화 통일방안’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세기 전 장관은 “토론대회에서는 동아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이 반공(反共)통일론 비슷한 얘기를 했을 뿐, 나머지 참석자들은 중립화통일 내지 좌경적(左傾的)인 통일방안을 많이 얘기했다”고 말했다. 보수(保守)언론을 비롯한 기성(旣成)세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영일 전 의원은 “1960년 10월경 동경에 망명 중이던 중립화통일운동가 김삼규 전 동아일보 주필이 귀국, 고려대학교에서 중립화통일론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여기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서울대에서 4·19를 주도했던 이영일, 윤식(尹埴·정치학과), 황건, 류세희(정치학과) 등은 서울대 민족통일연맹 결성에 나섰다. 윤식이 위원장, 황건이 조직위원장, 류세희(정치학과)가 학술위원장 겸 통일문제연구회장을 맡았다. 당시 발표된 서울대 민통련의 기본 방침은 다음과 같다.
“대내적으로 조직을 강화하고 통일문제에 관한 학술연구활동을 활발히 하며 현재까지의 여러 가지 통일방안을 검토하고 실현성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며, ①통일에 대한 일반의 의식을 고취한다. ②통일 분위기 성숙에 진력한다. ③사회악 제거활동에 노력하며, ④정부와 사회에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통일여론을 조성한다. ⑤4·19의 민주자유 정신을 받들어 정부에 양심적인 압력단체 구실을 한다.”
이를 시작으로 민통련은 경희대·건국대·고려대·단국대·동국대·성균관대·부산대 등으로 확산됐다. 1961년 조직된 ‘전국학생 한미경제협정반대 투쟁위원회’, ‘악법반대 전국학생투쟁위원회’ 등은 이 민통련 조직들이 모태(母胎)가 됐다. 4·19 1주년 무렵에 가서 학생운동은 거의 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대 민통련은 1961년 5월 3일 아침 서울법대 구내식당에서 대의원 총회를 열고 남북학생회담제안 결의안을 채택하기로 했다. 그런데 대의원총회 의장이었던 서울법대 4년 윤용남이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영일은 윤용남을 찾기 위해 밖에 나갔다가 대학본부에서 신학기 등록을 마치고 법대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류근일을 만났다. 류근일은 민통련 일에 대해 가끔 이야기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직접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이영일은 대의원총회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임시의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류근일은 임시의장으로 남북학생회담 결의문 채택 시 의사진행을 맡았다. 짧은 시간 동안 ‘임시의장’을 맡았던 것 때문에 그는 나중에 7년여의 옥고(獄苦)를 치르게 된다.
“가자 北으로, 오라 南으로”
하지만 학생들에 의해 한번 통일논의의 물꼬가 터지자 상황은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혁신계(革新系)’라고 불리던 좌파(左派)세력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나섰다. 이영일 전 의원의 회고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라는 단체에서 민통련의 남북학생회담제안을 지지하기 위한 군중대회를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한다고 하면서 나와 류근일 선배를 이 행사의 연사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더군요. 우리는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왜곡할 우려가 있는 정당 사회단체 행사에 불참할 것을 결의하고 그 행사에 불참했어요. 그 군중대회에서 채택한 구호가 유명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였어요. 그건 혁신계의 구호였지 우리의 구호가 아니었어요.”
이영일 전 의원은 1961년 5월 14일 《민국일보》 남재희(南載熙·제11~13대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 역임)기자의 주선으로 민주당 대변인이던 신상초(申相楚·5,9~11대 국회의원) 의원과 만나 학생회담에 대한 대담을 했다. 이 전 의원은 “이 자리에서 ‘백색(白色) 독재정권을 타도한 한국의 대학생처럼 북한 대학생들도 적색(赤色) 독재타도에 나서야 분단체제에 안주하지 않는 순수한 민족운동으로서의 통일운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솔직히 북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북한에도 우리와 같은 학생들이 있으리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혁신계의 통일논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서울대 민통련은 5월 20일로 예정했던 남북학생회담을 무기(無期)연기 및 철회하기로 하고 그런 뜻을 밝힌 유인물을 만들었다. 그게 1961년 5월 15일이었다.
여기서 보듯 당시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했던 학생들의 성향은 급진적이 아니었다. 류근일 전 주필은 “서신교류, 학생체육대회 등을 통해 남북한 간에 교류의 물꼬를 트자는 정도였지, 학생들이 정치적 회담을 제안했던 것은 아니었다”면서 “1980년대 주사파(主思派)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고 말했다.
柳原植 대령
‘전국대학생 시국토론대회’를 통해 통일논의의 단초를 제공했던 이세기 전 장관은 이 토론회를 끝으로 학생회장 임기를 마치고 대학원 진학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1961년 봄부터 ‘군인들이 나온다더라’ ‘쿠데타가 난다더라’하는 얘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류세희 교수에게는 류원식(柳原植)이라는 5촌 아저씨가 있었다. 류원식은 당시 육군 대령이었다. 5·16군사혁명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을 지낸 바로 그 사람이다. 류원식 대령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류림(柳林) 선생이었다.
이 집안 내력은 기구하다.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였던 류림 선생은 상하이(上海)임시정부 계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아들 류원식은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에서 복무했다. 류세희 교수에 의하면 류림 선생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는데, 어떻게 아들놈이 왜놈 군대를 하느냐?”면서 아들과 의절(義絶)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류림 선생은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면서 부인과도 인연을 끊었다. 가족과 인연을 끊은 류림 선생은 조카인 류세희 교수의 아버지에게 의탁했다.
류세희 교수는 “아저씨(류원식)도 할 말은 있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독립운동하느라고 그랬다고 하자. 가족은 뭐냐. 어머니는 만날 일본 형사에게 시달리고…. 할 수 없이 먹고살 길을 찾아서 만군(滿軍)에 갔는데, 그랬다고 의절까지 할 수 있느냐’는 게 아저씨 얘기였어요. 아저씨에게는 아버지 때문에 군내(軍內)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6·25 중에 이미 대령이었는데, 그때까지도 대령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었어요. 그런 아저씨를 나는 경멸했습니다.”
“기관총 세례를 받을 줄 알아라”
1961년 3월경, 대학생 류세희는 “한번 만나자”는 류원식 대령의 연락을 받고 서울 삼선교에 있던 류 대령의 집으로 갔다.
류원식 대령은 시국에 대한 얘기 끝에 “한국에서 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무엇인가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류세희는 “한국군은 독립군이 전신(前身)인 미얀마군과는 달리 일본군에 갔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군대 아니냐. 경찰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유당의 통치도구 노릇을 했는데, 그런 군대가 나선다는 게 될 말이냐”고 받아쳤다.
류원식 대령도 흥분했다.
“그런 소리를 하다가는 너희들 기관총 세례를 받을 줄 알아라.”
언쟁을 벌이고 류원식 대령의 집을 나선 류세희는 서울대 민통련 조직위원장을 하던 황건을 찾아가 류 대령과 나눈 이야기에 대해 말했다.
얼마 후 류세희는 윤식(서울대 민통련 위원장), 황건 등과 함께 이용희(李用熙)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이용희 교수님께 쿠데타 가능성에 대해 물었더니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한다’는 투로 ‘한국군은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는 미군의 허락 없이 1개 중대도 움직일 수 없다’고 단언하시더군요.”
이영일 전 의원도 같은 얘기를 했다.
4·19 1주년을 며칠 앞두고 류원식 대령이 다시 류세희를 불렀다. 장면 정권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류세희는 지난번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장면 정권에 대한 불만은 많지만, 더 이상 장면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김일성을 유리하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류원식 대령은 “네 생각이 많이 건실해졌구나”라면서 “그래도 4·19 1주년이 가까워 오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5·16세력이 4·19세력을 부추겨서 혼란을 조성한 후,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계엄령이 선포되면 이를 기화로 쿠데타를 단행하려 했다는 얘기는 《5·16군사혁명사》 등에도 나온다. 류원식 대령이 류세희 교수에게 접근한 것도 그 일환인 셈이다.
柳根一 전 주필의 회고
지난 2월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은 이때의 이야기를 자신의 인터넷카페에 올렸다.
<5·16 세력은 4·19혁명 1주년에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를 바랐다.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으로 투입되는 척하다가 여차하는 순간 일약 쿠데타 군으로 내뻗자는 속셈이었다. 5·16 세력은 일제하 항일독립 무정부주의자 류림 선생의 아들 류원식 대령을 그의 조카 류세희에게 파견했다. 류세희는 이것을 동료 운동 학생들에게 보고했다. 4·19 학생 동료들 사이에 논의가 일었다. 나도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공식적인 모임 같은 것은 없었다. 나와 다른 학생들의 입장은 분명했다. “쿠데타가 오느니 장면 정권이 100년 가기를 원한다.” 이 통고를 받은 류원식 대령은 실망하면서 류세희에게 이렇게 분통을 터뜨렸다. “너희들 가슴에 깜장 콩알이 박힐 것이다.”>
류 전 주필은 기자에게 “류세희 교수와 그런 이야기를 나눈 곳이 서울대 학생회관인지, 학림다방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신진회와 민통련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얘기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류세희 교수의 얘기를 들으면서 모두들 입맛이 쓴 표정이었어요. 4·19 후 1년 만에 쿠데타 얘기가 나오는 현실이 답답했던 거죠. 특히 류 교수는 자신의 친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안색이 몹시 어두웠어요.”
류세희 교수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그는 “기억에 없다”면서 “오며 가며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수는 있지만, 크게 의미를 둘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난 솔직히 한국군이 쿠데타를 할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아저씨(류원식 대령)는 ‘혁명 후에는 군인들이 조국재건위원회를 만들어 통치할 것’이라는 얘기를 한 적도 있지만, 귀담아 듣지는 않았어요. 원래 ‘군대 내 3대(大) 대포 중 하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허풍이 센 사람이어서 ‘자기만의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아저씨가 쿠데타 세력에 그렇게 깊이 간여하고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쿠데타 관련 소문이 돌고 있을 때였다. 군(軍)이 ‘비둘기작전’이라는 이름의 폭동진압 훈련을 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결국 학생들은 4·19 1주년을 맞아 장면 정권의 무능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장면 정권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입을 다문 채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5·16
“딱 세 가지 질문 받고 감옥으로”(柳根一)
4·19 주역들의 5·16 당일 느낌은 대개 비슷하다. 류근일 전 주필은 5·16 당일 아침 늦잠을 자다가 아침 8~9시경 방송을 들은 어머니로부터 “쿠데타가 났단다!”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류 전 주필의 회고다.
“침통한 생각뿐이었어요. ‘내 신상에나, 사회적으로나 이제 큰일이 닥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류 주필은 “그때 국민들은 ‘혁명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에서는 <지평선>이라는 칼럼을 통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느니 ‘교도(敎導)민주주의’니 하는 얘기를 하고 있던 때였어요. 반봉건 근대화 혁명을 하고 있던 이집트의 나세르 등이 멋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걸 우리의 나아갈 길로 인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쿠데타 직후 용공(容共)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류 전 주필은 부산까지 도망쳤다가 돈도 떨어지고 해서 5월 30일 서울 을지로 입구 치안국에 있던 합동수사본부에 자수했다.
류 전 주필은 “조사를 받으면서 별다른 고초를 겪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취조시간이라야 2~3시간밖에 안됐어요. 딱 세 가지 물어보더군요. ‘민통련에 가입한 사실이 있느냐’ ‘민통련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느냐’ ‘민통련에서 무슨 활동을 했느냐’.”
이영일 전 의원은 친구집에 있다가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민주당의 무능이 군인들에게 기회를 주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제 다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모집으로 피신했다가 3~4일 후에 집으로 돌아오니 윤식이 체포됐다고 하더군요. 7월 초에 체포됐습니다.”
이영일 전 의원은 장면 정부에 대해 “국가를 이끌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면서 “민주주의를 이용해서 나라를 발전시켰어야 하는데, ‘민주주의 원칙’에만 매달리다가 국법(國法)질서를 장악하지 못하고 쿠데타를 불러들이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류세희 교수는 “5·16 새벽 서울 을지로4가 인근 인현동에 있는 집에서 총소리를 들었지만, 쿠데타라는 생각은 못했다”고 회고했다.
“방송을 듣고서야 ‘정말 쿠데타가 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동대문경찰서와 중부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그해 7월 17일 풀려났다. 그는 “예비검속 차원에서 체포됐던 것이어서 이렇다 할 조사도, 재판도 없었다. 어머니가 아저씨(류원식 대령)에게 구명(救命)운동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듬해 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이던 류원식 대령은 제2차 화폐개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세기 전 장관은 쿠데타 뉴스를 병원에서 들었다.
“축농증 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워 있는데 쿠데타 뉴스가 나오더군요. 학생운동을 접은 상태였지만, 4·19 상이(傷痍)학생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잘못 가고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라, 쿠데타 뉴스를 듣는 순간 ‘올 것이 왔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민주화가 역행(逆行)하겠구나. 이제 학생들은 숨을 못 쉬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에 답답해졌습니다.”
이세기 전 장관도 예비검속 차원에서 검거돼 40여 일 동안 남대문경찰서에 잡혀 있다가 풀려났다. 그는 “쿠데타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불편했지만, 군사정부가 1960년 4월 18일 고대생들을 습격했던 이정재 등 깡패들을 잡아들이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면서 “근대화 깃발을 드는 것을 보면서도 ‘방향은 잘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류근일과 이영일은 혁명정부가 용공분자 처벌을 위해 제정한 소급입법(遡及立法)인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으로 재판정에 섰다. 심판관(재판관)은 당시 공군대위였던 이회창(李會昌) 현 자유선진당 총재였다.
구형(求刑)공판에서 주진학(朱鎭鶴) 검찰관은 이영일에게는 징역 7년을 구형했지만, 류근일에게는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민통련을 주동하고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던 나는 징역 7년인데, 대의원 총회에서 임시의장을 맡았던 게 전부인 류근일 선배는 무기징역을 받았어요. 나는 최후진술에서 ‘이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류근일 선배에게 구형한 형을 내가 떠맡겠다’며 강력히 항의했어요. 이회창 심판관이 꾸짖으며 ‘앉으라’고 했고, 류근일 선배도 나를 잡아끌어 앉혔습니다.”
이영일 전 의원은 “혁신계 등에게 악용당할 우려가 있어 5월 20일로 예정됐던 남북학생회담을 무기연기하기로 하고 그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찍어 두었던 것을 증거로 제출한 것이 받아들여져, 검찰관도 우리의 ‘동기의 순수성’은 인정했다”고 회고했다.
이영일 전 의원은 징역 7년, 류근일 전 주필은 15년을 선고(宣告)받았다. 류 전 주필이 중형(重刑)을 선고받은 데에는 자유당 말기에 있었던 ‘문리대 필화(筆禍)사건’ 등이 작용했다. 서울대 필화사건이란 류 전 주필이 서울대 문리대(文理大)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7년 서울대 동인지 《우리의 구상》에 민주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무산(無産) 대중을 위한 체제로의 지향>을 썼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됐던 사건. 1심과 2심에서 무죄(無罪)선고를 받았지만, 5·16 후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1·2심 판결마저 뒤집어졌다.
그 이후의 삶과 5·16에 대한 평가
감옥에서의 8년3개월
류근일 전 주필은 교도소에서 7년4개월을 보냈다. 그는 “교도소에 들어가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지더라”고 말했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급진화됐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교도소에 들어가 정치철학사 관련 책들을 많이 읽으면서 내 무지(無知)를 많이 깨우쳤습니다. 내 진보성이라야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진보성, 그것도 당시 서울 도시 청년지식인의 의식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었지 현실 사회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었어요.”
교도소에서 류 전 주필은 아버지(류응호 전 서울대 교수,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를 지내다가 숙청됨)의 친구를 만났다. 4·19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홍진기(洪璡基)씨였다. 그 인연으로 류 전 주필은 출감(出監) 후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됐다. 중앙일보 사장으로 있던 홍진기씨는 중앙정보부 요로에 선을 대 “류근일을 내게 맡기라”고 했다고 한다. 요주의 인물들에게는 예외 없이 공안기관의 감시가 따라붙는 서슬 퍼렇던 시절이었다. 출감하던 해에 결혼도 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운동권’이었다는 업(業)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서울대 후배들은 ‘문리대 필화사건’의 주인공인 선배 류근일을 찾아오곤 했다. 이미 운동권과는 거리를 두고 있던 그는 후배들의 민주화 의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이렇게 충고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빨갱이로 몰리면 가장 곤란하더라. 그러니 색깔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도저히 빨갱이로 낙인 찍을 수 없는 ‘민주회복’ 리더― 윤보선 함석헌 천관우 같은 분들을 지도부로 모셔라.”
하지만 긴급조치4호가 선포되면서 그를 찾아왔던 학생들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엮여 들어갔다. 비상군법회의에 회부된 그는 대법원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10개월간 복역한 후 출감했다. ‘문리대 필화사건’ 이래 세 번 투옥을 거치면서 그가 선고받은 징역형의 총계는 37년, 실제로 산 것은 합이 8년3개월이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도 류 전 주필의 생각은 점점 변해 갔다.
“사회가 점점 발전하고, 우리집 살림이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이더군요. 이걸 보면서 ‘선(先)민주 후(後)건설’이라는 것이 반드시 객관적인 적실성(適實性)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후민주 선건설도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非命)에 갔다.
“나중에 큰아들에게 들으니 10월 27일 아침, 마루를 왔다 갔다 하면서 ‘박정희가 죽었어, 박정희가…’ 하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고 있더랍니다. 나 역시 갑작스런 그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죠.
어머니와 큰애를 동반하고 부천시청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박 대통령, 우리 둘의 악연(惡緣)을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柳根一, “결국 우리 역사는 잘된 것 아닌가”
류근일 전 주필은 1980년대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공부를 하면서 보니, 좌파의 한국진단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종속이론은 한국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마음이 편해지면서 우리의 현대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이 무렵 대학 운동권에서는 주사파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류근일 전 주필은 이러한 현상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4·19 직후에도 이미 그런 흐름의 싹을 보았습니다. ‘민족’ ‘민주’ 운운하면서 전에 듣도 보도 못하던 낯선 총잡이들이 운동지평의 일각에 나타나더니, 웬만한 혁신파는 아예 혁신으로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꼭 옛날 남로당 같은 소리들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가 되니 그런 자들이 운동권을 장악하더군요. 동료 조선일보 논설위원들과 ‘이런 흐름을 비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민주화를 해야 하는 지금은 아직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결국 1987년 민주화 이후부터 주사파 운동권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9월 10일 류근일 전 주필은 5·16 직후 혁명재판소에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처벌받았던 데 대해 재심(再審)을 청구, 무죄(無罪)판결을 받았다. 재심 재판에서는 이영일 전 의원이 그를 위해 증언을 해 주었다.
재판부는 “불법적인 수사와 분명하지 않은 증거에 의해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이를 50년간 바로잡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면서 “법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류 전 주필은 “당시 행동이 20대의 설익은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민주 선진국에 도달하기 위한 진통이었다고 생각한다”면서 “패자부활전(敗者復活戰)이 가능한 대한민국에 긍지를 가진다”고 말했다.
류근일 전 주필은 “지금은 한국의 현대사를 전폭적으로 사랑하는 상태다. 자긍심을 느낀다”면서 “살아 생전에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지금 보면 결국 우리 역사는 잘된 거 아닌가요. 그러면 된 거죠. 누군 이렇게 생각이 바뀐 걸 두고 ‘변절’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자기가 가졌던 생각으로부터 졸업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까.”
柳世熙, “南南갈등 조장한 것은 5·16세력”
류세희 교수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거치는 내내 학자의 길을 걸었다. 196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1974년 한국으로 돌아와 한양대 정치과 교수가 됐다. 그는 1976년 한양대에 소련문제연구소(1980년 중소문제연구소로 개칭)를 만들어 22년간 소장을 지냈다. 1990년대 초 한·소(韓蘇)수교에 일조했고,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뉴라이트(New Right) 계열의 북한인권운동단체인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이사장으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그의 평가는 여전히 차갑다. 그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남남(南南)갈등을 조장한 것은 결국 이승만 정권과 5·16세력”이라고 비판했다.
“이북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도 문제죠. 그들 가운데는 이북의 사주(使嗾)를 받은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비판세력을 ‘관제(官制) 빨갱이’로 만들고 탄압했던 것도 사실이죠. 이승만 정권이나 5·16세력은 그런 점에서 죄가 큽니다.”
그는 “좌파가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고, 과거 권위주의 세력이 산업화 세력을 대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분법(二分法)에도, 산업화 세력의 공이 민주화 세력보다 크다는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는 전(全) 국민이 한 것이지 특정 세력이 전유(專有)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에 대해서도 “독재는 독재일 뿐이고 악(惡)”이라면서 “‘선의(善意)의 독재’라는 말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의 종조부인 류림 선생의 말이라고 한다.
李榮一, “4·19와 5·16은 相衝하지 않는다”
이영일 전 의원은 혁명재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1년간 복역하다가 나왔다. 그는 “용공사범으로 감옥에 갔다오니 취직도 안됐다”면서도 “당시 박정희 정권이 내걸었던 ‘민족적 민주주의론’이나 근대화 주장에는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4·19를 이끌어 낸 힘의 바탕에는 ‘빈곤으로부터의 탈피’ ‘후진성 극복’이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한 실현수단으로 이승만 독재와 싸운 것이었죠. 빈곤으로부터의 탈피가 더 절실한 과제였는데,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에만 매달렸어요. 우리도 불법 불의 부정에 항의할 줄만 알았지, 국민들이 더 절실하게 생각하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한때 4·19가 5·16의 피해자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점차 시야가 넓어지면서 양자 간에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신생국 정치발전이라는 면에서 보면 4·19와 5·16은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 세계대학봉사회에서 각 대학의 4·19대표 학생들을 모아 연 4·19 10주년 세미나에서 이런 뜻을 밝혔어요.”
이영일 전 의원은 “그러면서 당시 정치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던 ‘개발독재’(開發獨裁)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68년 《사상계》 10월호에 <개발독재발상법서설>(開發獨裁發想法序說)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가나의 앵크루마, 이집트의 나세르 등 제3세계 개발독재 체제의 성립배경과 현황에 대해 고찰했다.
이어 이영일 전 의원은 “4·19와 5·16은 상충(相衝)하는 것이 아니며, 5·16은 같은 시대적 요구를 더욱 심화시킨 것”이라는 내용의 <4·19혁명의 발전론적 고찰>이라는 글을 써서 《사상계》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미 박정희 정권과 대척점에 서 있던 《사상계》에서는 이 글을 거부했다. 이 글은 1971년 《세대》지에 실렸다.
이후 이영일 전 의원은 1970년 국토통일원에 들어가 교육홍보실장, 통일연수원장 등을 거친 후 1981년 민주정의당(민정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전두환 정권에 참여한 것은 박정희 시대에 시작한 근대화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였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미 1960년대 후반에 박정희의 근대화론에 공감했기 때문인지 이영일 전 의원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 후하게 평가했다. 그는 “국력신장이라는 목표 아래 국민을 하나로 묶은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은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1987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것도 물질적 토대가 확충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4·19 덕분에 지도자는 국민을 두려워하게 됐다”
1968년 이영일 전 의원은 《사상계》에 발표했던 <개발독재발상법서설>에서 제3세계 개발독재 체제에 대해 “국민들의 건전한 기대증가는 실정과 억압 속에 위축당했고, 빈곤의 문제는 조금도 해결 향상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제3세계 국가들이 여전히 억압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고, 이집트 리비아 예멘 등에서 민주화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 대한민국만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영일 전 의원은 산업화의 측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민주화의 측면에서는 4·19를 꼽았다.
“역사발전의 어느 단계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점은 중남미(中南美)의 군사독재자들처럼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지 않고 국력신장이라는 대의(大義)에 충실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4·19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에게 정부를 변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후 집권자들은 국민들을 두려워하게 됐다”고 말했다.
“내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비서실장(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을 해 봐서 아는데,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이 국민을 얼마나 두려워했는 줄 아십니까. 4·19와 같은 경험이 없는 나라, 집권자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는 발전이 없습니다. 4·19와 5·16, 이 두 노력이 집요하게 맞물리면서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영일 전 의원은 “4·19를 통해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역사가 만들어졌다”면서 “이제 4·19세대의 마지막 과업은 북한 주민들에게 주권을 찾아주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세기 전 장관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고려대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하다가 5공 시절 정치에 입문, 민정당 원내총무, 통일원·체육부 장관을 지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밖에 안되던 시절이었으니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4·19는 3·15 부정선거가 발단이 되기는 했지만, ‘부패 무능한 정권은 더 이상 안된다’는 생각의 발로이기도 했습니다.
4·19는 이후의 집권자들에게 자유당 말기처럼 부패 무능하면서 독재를 하고 민심(民心)을 망각하면 제2, 제3의 4·19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지금 중동(中東)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우리는 벌써 50년 전에 한 것입니다. 당시 ‘엽전’이라고 자학(自虐)하곤 했지만, 우리 국민의 수준이 참 높았어요.”
그는 5·16에 대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 수준의 나라에서 학생들이 국회로 쳐들어가는 무질서 속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만 고집했다면,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5·16은 그 자체로만 보면 쿠데타고 민주화에 대한 반동(反動)이지만, 근대화·산업화에 기여한 공로는 인정하고 계승·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세기 전 장관은 중국 얘기를 했다.
李世基, “역사는 기본적으로 계승하는 것”
“마오쩌둥(毛澤東)이 죽은 후 마오쩌둥 격하운동이 벌어질 소지가 있었어요. 하지만 덩샤오핑(鄧小平)은 마오쩌둥에 대해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는 ‘마오쩌둥의 과오 속에는 내 과오도 포함돼 있다. 과오는 내가 고쳐 나가면 된다’면서 마오쩌둥에 대한 격하운동을 가로막았습니다.”
이 전 장관은 “중국인들은 ‘역사는 일진일퇴(一進一退)하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강한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임자(前任者)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창업주(創業主) 의식’이 강합니다. 심지어 권력을 승계한 사람도 자신을 ‘중시조’(中始祖)로 의식합니다. ‘신(新)한국창조’니 ‘제2건국’이니 하는 것들이 그 예입니다. 기관장들도 마찬가지예요. ‘○○원년(元年)’이라는 말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우리는 너무 단절의 연속이에요.
우리가 지금 G20, 국력으로 따지면 G10 안에 들어가는데, 4·19 당시와 비교하면 엄청난 성공 아닙니까.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벽돌을 하나씩 쌓아 가면서 여기까지 온 것인데, 그렇게 단절만 해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도 4·19세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공로,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공로를 인정하면서 미래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치생리와 정치적 행상과 사고방식에 있어서 자유당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 정부는 혁명 직후의 정치적 공백기를 기화로 지나치게 비대해진 나머지 스스로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정권을 마치 전리품(戰利品)처럼 착각하고, 혁명과업의 수행은커녕 추잡하고 비열한 파쟁(派爭)과 이권(利權)운동에 몰두하여 그 바쁘고 귀중한 시간을 부질없이 낭비해 왔음은 우리들이 바로 며칠 전까지 목격해 온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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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당시 서울 태평로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
절정에 달한 국정(國政)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 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活路)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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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에 대해 긍정적 견해를 보인 《사상계》 6월호 권두언. |
따라서 5·16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開花)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은 정치권력이 단지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하고 고식적(姑息的)인 집권당과 정치가 수행하지 못한 4·19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5·16혁명의 적극적 의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혁명은 4·19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후략)
이 글이 실린 것은 《사상계》(思想界) 1961년 6월호이다. 당시 《사상계》 기자였던 손세일(孫世一) 전 의원에 의하면, 이 글을 발행인 장준하(張俊河) 선생이 썼다고 한다.
‘1년 전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들은’ 운운하는 대목만 아니라면, 이 글은 ‘박정희(朴正熙) 전도사’의 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4·19 이후 들어선 장면(張勉) 민주당 정권의 무능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5·16군사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대목은 5·16을 4·19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4·19와 5·16, 불과 1년 사이에 일어난 이 두 사건은 이후 민주화(民主化)와 산업화(産業化)라는, 대한민국을 이끈 두 갈래 물줄기의 원류(源流)가 됐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다. 4·19 당시 혈기 넘치던 학생들은 70대 중반의 노인이 됐다. 5·16을 일으켰던 청년장교들은 80대 중반이 됐다. 5·16 주체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이던 가난한 나라는 G20의 일원으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 5·16 50주년을 맞아, 어떤 의미에서는 5·16의 대척점(對蹠點)에 섰던 4·19 주역들, 그리고 그 세대 지식인들로부터 4·19와 5·16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증언자들의 호칭은 4·19, 5·16 당시의 상황을 기술한 대목에서는 존칭 없이, 그들의 발언을 직접 옮긴 대목에서는 그들의 전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직함을 붙이기로 한다.)
4·19
4·18 高大生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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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4월 18일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이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은 사건은 4·19를 촉발시켰다. |
당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이던 이세기(李世基·국회의원·국토통일원 장관 역임)는 정경대 학생회(학도호국단) 회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고려대에는 총학생회가 없었다. 그는 상대(商大) 학생회장이던 이기택(李基澤·현 민주평통 상임부의장) 등과 함께 데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4월 18일 신입생환영회를 기화로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세기 전 장관의 회고다.
“단상에 올라가 박찬세(朴贊世·법대·통일연수원장 역임)가 작성한 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정문을 나가려는데 유진오(兪鎭午) 총장이 방송으로 ‘몸조심하라. 학생의 본분을 잃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안암동 로터리 앞에 쳐진 경찰의 1차 저지선은 쉽게 뚫었는데, 대광고 앞에서 경찰의 두 번째 저지선에 가로막혔어요. 대광고 학생들이 ‘형님들, 싸우세요’라면서 뛰쳐나와 경찰을 협공한 덕에 2차 저지선을 뚫고 시내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대생들은 서울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본관) 앞까지 진출했다. 유진오 총장, 고려대 선배인 이철승(李哲承) 의원, 장택상(張澤相) 의원 등이 나와 연설을 했다. “학생 여러분의 의기(義氣)는 전달됐으니, 일단 돌아가라”는 얘기였다.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은 광장시장 부근에서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이 동원한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이세기 전 장관은 “40, 50명이 쓰러졌는데, 다음날 《동아일보》에 ‘고대생 1명 사망’이라는 보도가 나갔다. 오보(誤報)였지만, 시민들이 흥분했다”고 회고했다.
서울대 文理大生들의 4·19
4월 14일경부터 학내 서클 신진회 등을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 중이던 서울대생들도 이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강의실에서 선언문을 준비하던 정치학과 류세희(柳世熙·한양대 명예교수)는 이수정(李秀正·전 문화부 장관)을 만나 그의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위 준비에 대한 걱정에 글이 안 써져서 고민하던 류세희는 이수정에게 자기 대신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 전 장관은 곧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엎드린 채로 선언문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鐘)을 난타(亂打)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는 구절로 유명한 서울대 4·19 선언문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류세희가 문장을 조금 손본 후 황선필(黃善必·전 청와대 대변인)이 이를 정서했다.
4월 19일 아침, 시위 주동자 중 한 명이던 정치학과 3학년 이영일(李榮一·전 국회의원)은 강의실을 돌면서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교수들은 한 사람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왜 앉아 있느냐’는 태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시위대와 함께 동대문까지 나갔다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난 4월 26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하야(下野)했다. 이영일 전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은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나 발포(發砲)명령도 85세의 노(老)인을 둘러싼 집단이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통령은 실상을 보고받고 ‘젊은 사람들을 더 이상 희생시킬 수 없다’면서 권좌(權座)에서 물러난 것이죠.”
4·19에서 5·16까지
통일논의의 물꼬가 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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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世基 전 통일원 장관. ⊙ 75세. 고려대 정외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고려대 정경대 교수, 11·12·14·15대 국회의원, 국토통일원·체육부 장관, 민정당 원내총무 역임. 現 한중친선협회 회장. 사진=배진영 |
이영일 전 국회의원은 그때의 분위기에 대해 “4·19혁명 후 한국 대학사회에는 학생운동의 큰 흐름이 신생활운동, 후진성 극복운동, 민족통일운동의 세 가지로 집약됐다”면서 “나는 후진성 극복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후진사회연구회를 결성했다”고 말했다.
일부 학생들은 그해 여름 실시된 7·29선거에 나선 민주당 후보의 선전대(宣傳隊)로 동원됐다. 그런가 하면 그런 꼴이 보기 싫다고 학업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이세기(李世基) 전 장관은 “학생들의 주가(株價)가 오르면서 국회의원 후보들이 저마다 학생들을 모셔갔고, 공명선거실천운동, 새생활운동 등으로 학생들의 힘이 흩어져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말이 있었다. 바로 ‘통일(統一)’ 이었다. ‘통일’이 화두(話頭)가 된 이유에 대해 류세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임정(臨政)세력이나 중간파를 용공(容共)으로 몰아 탄압했어요. 자유민주주의를 정면에 내걸 수 없었던 이승만 정권은 반공(反共)과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중심가치로 내세웠어요. 마치 공산주의반대=자유민주주의인 것처럼 말이죠. 그러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이제 북진통일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다른 통일방안도 얘기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 거죠.”
류세희 교수는 “당시 경제난, 근대화에 대한 욕구도 학생들이 통일논의에 나선 한 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정말 암담하던 시절이었어요. 대학생들도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됐고…,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어요. 지금처럼 기술혁신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고…. ‘통일이 되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나아지기 어렵다’는 생각들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남한에는 쌀은 좀 여유가 있었지만, 전기가 없었거든. 남한의 쌀과 북한의 전기를 바꾸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남 전기 이북 쌀’이라는 구호도 나왔어요.”
이영일 전 의원은 “‘독재정권을 타도했던 열정으로 남북을 가르는 38선을 타도하는 데도 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성세대가 독재체제에 안주했던 것처럼 분단체제에도 안주하여 통일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분단체제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우리 학생들이 남북통일의 주역이 되어야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통일논의에 불을 댕긴 것은 1960년 9월 고려대 정경대 학생회가 개최한 ‘민족통일에 관한 제(諸)문제’라는 주제의 ‘전국대학생 시국토론대회’였다. 이 행사를 주최했던 이세기(李世基) 전 통일원 장관의 회고다.
“‘4·19는 민주화운동이자 민족혁명이고, 민족혁명은 통일을 통해 완성된다. 4·19는 민족통일로 완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60년 여름방학 때부터 시국토론대회를 준비했습니다. 통일한반도의 지도를 크게 집어넣은 포스터를 서울시내 곳곳에 붙였어요.”
中立化 통일방안 등장
‘전국대학생 시국토론대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기존의 통일방안을 비판하고 새로운 통일방안 마련을 요구하는 한편, ‘중립화 통일방안’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세기 전 장관은 “토론대회에서는 동아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이 반공(反共)통일론 비슷한 얘기를 했을 뿐, 나머지 참석자들은 중립화통일 내지 좌경적(左傾的)인 통일방안을 많이 얘기했다”고 말했다. 보수(保守)언론을 비롯한 기성(旣成)세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영일 전 의원은 “1960년 10월경 동경에 망명 중이던 중립화통일운동가 김삼규 전 동아일보 주필이 귀국, 고려대학교에서 중립화통일론에 대한 강연을 했는데, 여기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서울대에서 4·19를 주도했던 이영일, 윤식(尹埴·정치학과), 황건, 류세희(정치학과) 등은 서울대 민족통일연맹 결성에 나섰다. 윤식이 위원장, 황건이 조직위원장, 류세희(정치학과)가 학술위원장 겸 통일문제연구회장을 맡았다. 당시 발표된 서울대 민통련의 기본 방침은 다음과 같다.
“대내적으로 조직을 강화하고 통일문제에 관한 학술연구활동을 활발히 하며 현재까지의 여러 가지 통일방안을 검토하고 실현성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며, ①통일에 대한 일반의 의식을 고취한다. ②통일 분위기 성숙에 진력한다. ③사회악 제거활동에 노력하며, ④정부와 사회에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통일여론을 조성한다. ⑤4·19의 민주자유 정신을 받들어 정부에 양심적인 압력단체 구실을 한다.”
이를 시작으로 민통련은 경희대·건국대·고려대·단국대·동국대·성균관대·부산대 등으로 확산됐다. 1961년 조직된 ‘전국학생 한미경제협정반대 투쟁위원회’, ‘악법반대 전국학생투쟁위원회’ 등은 이 민통련 조직들이 모태(母胎)가 됐다. 4·19 1주년 무렵에 가서 학생운동은 거의 이들에 의해 주도되고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대 민통련은 1961년 5월 3일 아침 서울법대 구내식당에서 대의원 총회를 열고 남북학생회담제안 결의안을 채택하기로 했다. 그런데 대의원총회 의장이었던 서울법대 4년 윤용남이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영일은 윤용남을 찾기 위해 밖에 나갔다가 대학본부에서 신학기 등록을 마치고 법대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류근일을 만났다. 류근일은 민통련 일에 대해 가끔 이야기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직접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이영일은 대의원총회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임시의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류근일은 임시의장으로 남북학생회담 결의문 채택 시 의사진행을 맡았다. 짧은 시간 동안 ‘임시의장’을 맡았던 것 때문에 그는 나중에 7년여의 옥고(獄苦)를 치르게 된다.
“가자 北으로, 오라 南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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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회원들이 남북학생회담 지지 군중대회가 끝난 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라는 단체에서 민통련의 남북학생회담제안을 지지하기 위한 군중대회를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한다고 하면서 나와 류근일 선배를 이 행사의 연사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하더군요. 우리는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왜곡할 우려가 있는 정당 사회단체 행사에 불참할 것을 결의하고 그 행사에 불참했어요. 그 군중대회에서 채택한 구호가 유명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였어요. 그건 혁신계의 구호였지 우리의 구호가 아니었어요.”
이영일 전 의원은 1961년 5월 14일 《민국일보》 남재희(南載熙·제11~13대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 역임)기자의 주선으로 민주당 대변인이던 신상초(申相楚·5,9~11대 국회의원) 의원과 만나 학생회담에 대한 대담을 했다. 이 전 의원은 “이 자리에서 ‘백색(白色) 독재정권을 타도한 한국의 대학생처럼 북한 대학생들도 적색(赤色) 독재타도에 나서야 분단체제에 안주하지 않는 순수한 민족운동으로서의 통일운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솔직히 북한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북한에도 우리와 같은 학생들이 있으리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혁신계의 통일논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서울대 민통련은 5월 20일로 예정했던 남북학생회담을 무기(無期)연기 및 철회하기로 하고 그런 뜻을 밝힌 유인물을 만들었다. 그게 1961년 5월 15일이었다.
여기서 보듯 당시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했던 학생들의 성향은 급진적이 아니었다. 류근일 전 주필은 “서신교류, 학생체육대회 등을 통해 남북한 간에 교류의 물꼬를 트자는 정도였지, 학생들이 정치적 회담을 제안했던 것은 아니었다”면서 “1980년대 주사파(主思派)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고 말했다.
柳原植 대령
‘전국대학생 시국토론대회’를 통해 통일논의의 단초를 제공했던 이세기 전 장관은 이 토론회를 끝으로 학생회장 임기를 마치고 대학원 진학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1961년 봄부터 ‘군인들이 나온다더라’ ‘쿠데타가 난다더라’하는 얘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류세희 교수에게는 류원식(柳原植)이라는 5촌 아저씨가 있었다. 류원식은 당시 육군 대령이었다. 5·16군사혁명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을 지낸 바로 그 사람이다. 류원식 대령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류림(柳林) 선생이었다.
이 집안 내력은 기구하다.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였던 류림 선생은 상하이(上海)임시정부 계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아들 류원식은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에서 복무했다. 류세희 교수에 의하면 류림 선생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는데, 어떻게 아들놈이 왜놈 군대를 하느냐?”면서 아들과 의절(義絶)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류림 선생은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면서 부인과도 인연을 끊었다. 가족과 인연을 끊은 류림 선생은 조카인 류세희 교수의 아버지에게 의탁했다.
류세희 교수는 “아저씨(류원식)도 할 말은 있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독립운동하느라고 그랬다고 하자. 가족은 뭐냐. 어머니는 만날 일본 형사에게 시달리고…. 할 수 없이 먹고살 길을 찾아서 만군(滿軍)에 갔는데, 그랬다고 의절까지 할 수 있느냐’는 게 아저씨 얘기였어요. 아저씨에게는 아버지 때문에 군내(軍內)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6·25 중에 이미 대령이었는데, 그때까지도 대령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었어요. 그런 아저씨를 나는 경멸했습니다.”
“기관총 세례를 받을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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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후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서울시내 백화점을 시찰하고 있는 柳原植 최고위원(맨 오른쪽). |
류원식 대령은 시국에 대한 얘기 끝에 “한국에서 쿠데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무엇인가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류세희는 “한국군은 독립군이 전신(前身)인 미얀마군과는 달리 일본군에 갔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군대 아니냐. 경찰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유당의 통치도구 노릇을 했는데, 그런 군대가 나선다는 게 될 말이냐”고 받아쳤다.
류원식 대령도 흥분했다.
“그런 소리를 하다가는 너희들 기관총 세례를 받을 줄 알아라.”
언쟁을 벌이고 류원식 대령의 집을 나선 류세희는 서울대 민통련 조직위원장을 하던 황건을 찾아가 류 대령과 나눈 이야기에 대해 말했다.
얼마 후 류세희는 윤식(서울대 민통련 위원장), 황건 등과 함께 이용희(李用熙)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를 찾아갔다.
“이용희 교수님께 쿠데타 가능성에 대해 물었더니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을 한다’는 투로 ‘한국군은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는 미군의 허락 없이 1개 중대도 움직일 수 없다’고 단언하시더군요.”
이영일 전 의원도 같은 얘기를 했다.
4·19 1주년을 며칠 앞두고 류원식 대령이 다시 류세희를 불렀다. 장면 정권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류세희는 지난번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장면 정권에 대한 불만은 많지만, 더 이상 장면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김일성을 유리하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류원식 대령은 “네 생각이 많이 건실해졌구나”라면서 “그래도 4·19 1주년이 가까워 오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5·16세력이 4·19세력을 부추겨서 혼란을 조성한 후,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계엄령이 선포되면 이를 기화로 쿠데타를 단행하려 했다는 얘기는 《5·16군사혁명사》 등에도 나온다. 류원식 대령이 류세희 교수에게 접근한 것도 그 일환인 셈이다.
柳根一 전 주필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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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4·19 1주년을 맞아 침묵시위를 벌이는 서울대학생들. |
<5·16 세력은 4·19혁명 1주년에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를 바랐다.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으로 투입되는 척하다가 여차하는 순간 일약 쿠데타 군으로 내뻗자는 속셈이었다. 5·16 세력은 일제하 항일독립 무정부주의자 류림 선생의 아들 류원식 대령을 그의 조카 류세희에게 파견했다. 류세희는 이것을 동료 운동 학생들에게 보고했다. 4·19 학생 동료들 사이에 논의가 일었다. 나도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공식적인 모임 같은 것은 없었다. 나와 다른 학생들의 입장은 분명했다. “쿠데타가 오느니 장면 정권이 100년 가기를 원한다.” 이 통고를 받은 류원식 대령은 실망하면서 류세희에게 이렇게 분통을 터뜨렸다. “너희들 가슴에 깜장 콩알이 박힐 것이다.”>
류 전 주필은 기자에게 “류세희 교수와 그런 이야기를 나눈 곳이 서울대 학생회관인지, 학림다방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신진회와 민통련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얘기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류세희 교수의 얘기를 들으면서 모두들 입맛이 쓴 표정이었어요. 4·19 후 1년 만에 쿠데타 얘기가 나오는 현실이 답답했던 거죠. 특히 류 교수는 자신의 친척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안색이 몹시 어두웠어요.”
류세희 교수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그는 “기억에 없다”면서 “오며 가며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수는 있지만, 크게 의미를 둘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난 솔직히 한국군이 쿠데타를 할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아저씨(류원식 대령)는 ‘혁명 후에는 군인들이 조국재건위원회를 만들어 통치할 것’이라는 얘기를 한 적도 있지만, 귀담아 듣지는 않았어요. 원래 ‘군대 내 3대(大) 대포 중 하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허풍이 센 사람이어서 ‘자기만의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아저씨가 쿠데타 세력에 그렇게 깊이 간여하고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쿠데타 관련 소문이 돌고 있을 때였다. 군(軍)이 ‘비둘기작전’이라는 이름의 폭동진압 훈련을 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결국 학생들은 4·19 1주년을 맞아 장면 정권의 무능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장면 정권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입을 다문 채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5·16
“딱 세 가지 질문 받고 감옥으로”(柳根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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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柳根一 전 조선일보 주필. ⊙ 73세.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선일보 논설위원·논설위원실장·주필 역임. 現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 |
“침통한 생각뿐이었어요. ‘내 신상에나, 사회적으로나 이제 큰일이 닥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류 주필은 “그때 국민들은 ‘혁명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에서는 <지평선>이라는 칼럼을 통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느니 ‘교도(敎導)민주주의’니 하는 얘기를 하고 있던 때였어요. 반봉건 근대화 혁명을 하고 있던 이집트의 나세르 등이 멋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걸 우리의 나아갈 길로 인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쿠데타 직후 용공(容共)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류 전 주필은 부산까지 도망쳤다가 돈도 떨어지고 해서 5월 30일 서울 을지로 입구 치안국에 있던 합동수사본부에 자수했다.
류 전 주필은 “조사를 받으면서 별다른 고초를 겪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취조시간이라야 2~3시간밖에 안됐어요. 딱 세 가지 물어보더군요. ‘민통련에 가입한 사실이 있느냐’ ‘민통련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느냐’ ‘민통련에서 무슨 활동을 했느냐’.”
이영일 전 의원은 친구집에 있다가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민주당의 무능이 군인들에게 기회를 주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제 다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모집으로 피신했다가 3~4일 후에 집으로 돌아오니 윤식이 체포됐다고 하더군요. 7월 초에 체포됐습니다.”
이영일 전 의원은 장면 정부에 대해 “국가를 이끌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면서 “민주주의를 이용해서 나라를 발전시켰어야 하는데, ‘민주주의 원칙’에만 매달리다가 국법(國法)질서를 장악하지 못하고 쿠데타를 불러들이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류세희 교수는 “5·16 새벽 서울 을지로4가 인근 인현동에 있는 집에서 총소리를 들었지만, 쿠데타라는 생각은 못했다”고 회고했다.
“방송을 듣고서야 ‘정말 쿠데타가 났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습니다.”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동대문경찰서와 중부경찰서에 갇혀 있다가 그해 7월 17일 풀려났다. 그는 “예비검속 차원에서 체포됐던 것이어서 이렇다 할 조사도, 재판도 없었다. 어머니가 아저씨(류원식 대령)에게 구명(救命)운동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듬해 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이던 류원식 대령은 제2차 화폐개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세기 전 장관은 쿠데타 뉴스를 병원에서 들었다.
“축농증 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워 있는데 쿠데타 뉴스가 나오더군요. 학생운동을 접은 상태였지만, 4·19 상이(傷痍)학생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잘못 가고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라, 쿠데타 뉴스를 듣는 순간 ‘올 것이 왔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민주화가 역행(逆行)하겠구나. 이제 학생들은 숨을 못 쉬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에 답답해졌습니다.”
이세기 전 장관도 예비검속 차원에서 검거돼 40여 일 동안 남대문경찰서에 잡혀 있다가 풀려났다. 그는 “쿠데타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불편했지만, 군사정부가 1960년 4월 18일 고대생들을 습격했던 이정재 등 깡패들을 잡아들이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면서 “근대화 깃발을 드는 것을 보면서도 ‘방향은 잘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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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후 혁명재판을 받고 있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회원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이영일 전 의원 등 민통련 관계자들도 혁명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다. |
구형(求刑)공판에서 주진학(朱鎭鶴) 검찰관은 이영일에게는 징역 7년을 구형했지만, 류근일에게는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민통련을 주동하고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던 나는 징역 7년인데, 대의원 총회에서 임시의장을 맡았던 게 전부인 류근일 선배는 무기징역을 받았어요. 나는 최후진술에서 ‘이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류근일 선배에게 구형한 형을 내가 떠맡겠다’며 강력히 항의했어요. 이회창 심판관이 꾸짖으며 ‘앉으라’고 했고, 류근일 선배도 나를 잡아끌어 앉혔습니다.”
이영일 전 의원은 “혁신계 등에게 악용당할 우려가 있어 5월 20일로 예정됐던 남북학생회담을 무기연기하기로 하고 그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찍어 두었던 것을 증거로 제출한 것이 받아들여져, 검찰관도 우리의 ‘동기의 순수성’은 인정했다”고 회고했다.
이영일 전 의원은 징역 7년, 류근일 전 주필은 15년을 선고(宣告)받았다. 류 전 주필이 중형(重刑)을 선고받은 데에는 자유당 말기에 있었던 ‘문리대 필화(筆禍)사건’ 등이 작용했다. 서울대 필화사건이란 류 전 주필이 서울대 문리대(文理大)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7년 서울대 동인지 《우리의 구상》에 민주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무산(無産) 대중을 위한 체제로의 지향>을 썼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됐던 사건. 1심과 2심에서 무죄(無罪)선고를 받았지만, 5·16 후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1·2심 판결마저 뒤집어졌다.
그 이후의 삶과 5·16에 대한 평가
감옥에서의 8년3개월
류근일 전 주필은 교도소에서 7년4개월을 보냈다. 그는 “교도소에 들어가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지더라”고 말했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급진화됐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교도소에 들어가 정치철학사 관련 책들을 많이 읽으면서 내 무지(無知)를 많이 깨우쳤습니다. 내 진보성이라야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진보성, 그것도 당시 서울 도시 청년지식인의 의식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었지 현실 사회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었어요.”
교도소에서 류 전 주필은 아버지(류응호 전 서울대 교수,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를 지내다가 숙청됨)의 친구를 만났다. 4·19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홍진기(洪璡基)씨였다. 그 인연으로 류 전 주필은 출감(出監) 후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됐다. 중앙일보 사장으로 있던 홍진기씨는 중앙정보부 요로에 선을 대 “류근일을 내게 맡기라”고 했다고 한다. 요주의 인물들에게는 예외 없이 공안기관의 감시가 따라붙는 서슬 퍼렇던 시절이었다. 출감하던 해에 결혼도 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운동권’이었다는 업(業)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서울대 후배들은 ‘문리대 필화사건’의 주인공인 선배 류근일을 찾아오곤 했다. 이미 운동권과는 거리를 두고 있던 그는 후배들의 민주화 의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이렇게 충고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빨갱이로 몰리면 가장 곤란하더라. 그러니 색깔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도저히 빨갱이로 낙인 찍을 수 없는 ‘민주회복’ 리더― 윤보선 함석헌 천관우 같은 분들을 지도부로 모셔라.”
하지만 긴급조치4호가 선포되면서 그를 찾아왔던 학생들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엮여 들어갔다. 비상군법회의에 회부된 그는 대법원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10개월간 복역한 후 출감했다. ‘문리대 필화사건’ 이래 세 번 투옥을 거치면서 그가 선고받은 징역형의 총계는 37년, 실제로 산 것은 합이 8년3개월이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도 류 전 주필의 생각은 점점 변해 갔다.
“사회가 점점 발전하고, 우리집 살림이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이더군요. 이걸 보면서 ‘선(先)민주 후(後)건설’이라는 것이 반드시 객관적인 적실성(適實性)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후민주 선건설도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非命)에 갔다.
“나중에 큰아들에게 들으니 10월 27일 아침, 마루를 왔다 갔다 하면서 ‘박정희가 죽었어, 박정희가…’ 하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횡설수설하고 있더랍니다. 나 역시 갑작스런 그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죠.
어머니와 큰애를 동반하고 부천시청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박 대통령, 우리 둘의 악연(惡緣)을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柳根一, “결국 우리 역사는 잘된 것 아닌가”
류근일 전 주필은 1980년대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공부를 하면서 보니, 좌파의 한국진단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종속이론은 한국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마음이 편해지면서 우리의 현대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이 무렵 대학 운동권에서는 주사파가 대두하기 시작했다. 류근일 전 주필은 이러한 현상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4·19 직후에도 이미 그런 흐름의 싹을 보았습니다. ‘민족’ ‘민주’ 운운하면서 전에 듣도 보도 못하던 낯선 총잡이들이 운동지평의 일각에 나타나더니, 웬만한 혁신파는 아예 혁신으로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꼭 옛날 남로당 같은 소리들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가 되니 그런 자들이 운동권을 장악하더군요. 동료 조선일보 논설위원들과 ‘이런 흐름을 비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민주화를 해야 하는 지금은 아직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결국 1987년 민주화 이후부터 주사파 운동권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9월 10일 류근일 전 주필은 5·16 직후 혁명재판소에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처벌받았던 데 대해 재심(再審)을 청구, 무죄(無罪)판결을 받았다. 재심 재판에서는 이영일 전 의원이 그를 위해 증언을 해 주었다.
재판부는 “불법적인 수사와 분명하지 않은 증거에 의해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이를 50년간 바로잡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면서 “법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류 전 주필은 “당시 행동이 20대의 설익은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민주 선진국에 도달하기 위한 진통이었다고 생각한다”면서 “패자부활전(敗者復活戰)이 가능한 대한민국에 긍지를 가진다”고 말했다.
류근일 전 주필은 “지금은 한국의 현대사를 전폭적으로 사랑하는 상태다. 자긍심을 느낀다”면서 “살아 생전에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지금 보면 결국 우리 역사는 잘된 거 아닌가요. 그러면 된 거죠. 누군 이렇게 생각이 바뀐 걸 두고 ‘변절’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자기가 가졌던 생각으로부터 졸업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까.”
柳世熙, “南南갈등 조장한 것은 5·16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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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柳世熙 한양대 명예교수. ⊙ 71세.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美컬럼비아대 정치학 박사. ⊙ 한양대 교수·중소문제연구소장·사회과학대학장·부총장, 4월회 회장 역임. |
하지만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그의 평가는 여전히 차갑다. 그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남남(南南)갈등을 조장한 것은 결국 이승만 정권과 5·16세력”이라고 비판했다.
“이북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도 문제죠. 그들 가운데는 이북의 사주(使嗾)를 받은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비판세력을 ‘관제(官制) 빨갱이’로 만들고 탄압했던 것도 사실이죠. 이승만 정권이나 5·16세력은 그런 점에서 죄가 큽니다.”
그는 “좌파가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고, 과거 권위주의 세력이 산업화 세력을 대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분법(二分法)에도, 산업화 세력의 공이 민주화 세력보다 크다는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민주화와 산업화는 전(全) 국민이 한 것이지 특정 세력이 전유(專有)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독재에 대해서도 “독재는 독재일 뿐이고 악(惡)”이라면서 “‘선의(善意)의 독재’라는 말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의 종조부인 류림 선생의 말이라고 한다.
李榮一, “4·19와 5·16은 相衝하지 않는다”
이영일 전 의원은 혁명재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1년간 복역하다가 나왔다. 그는 “용공사범으로 감옥에 갔다오니 취직도 안됐다”면서도 “당시 박정희 정권이 내걸었던 ‘민족적 민주주의론’이나 근대화 주장에는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4·19를 이끌어 낸 힘의 바탕에는 ‘빈곤으로부터의 탈피’ ‘후진성 극복’이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한 실현수단으로 이승만 독재와 싸운 것이었죠. 빈곤으로부터의 탈피가 더 절실한 과제였는데,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에만 매달렸어요. 우리도 불법 불의 부정에 항의할 줄만 알았지, 국민들이 더 절실하게 생각하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한때 4·19가 5·16의 피해자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점차 시야가 넓어지면서 양자 간에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신생국 정치발전이라는 면에서 보면 4·19와 5·16은 같은 맥락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 세계대학봉사회에서 각 대학의 4·19대표 학생들을 모아 연 4·19 10주년 세미나에서 이런 뜻을 밝혔어요.”
이영일 전 의원은 “그러면서 당시 정치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던 ‘개발독재’(開發獨裁)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68년 《사상계》 10월호에 <개발독재발상법서설>(開發獨裁發想法序說)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가나의 앵크루마, 이집트의 나세르 등 제3세계 개발독재 체제의 성립배경과 현황에 대해 고찰했다.
이어 이영일 전 의원은 “4·19와 5·16은 상충(相衝)하는 것이 아니며, 5·16은 같은 시대적 요구를 더욱 심화시킨 것”이라는 내용의 <4·19혁명의 발전론적 고찰>이라는 글을 써서 《사상계》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미 박정희 정권과 대척점에 서 있던 《사상계》에서는 이 글을 거부했다. 이 글은 1971년 《세대》지에 실렸다.
이후 이영일 전 의원은 1970년 국토통일원에 들어가 교육홍보실장, 통일연수원장 등을 거친 후 1981년 민주정의당(민정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전두환 정권에 참여한 것은 박정희 시대에 시작한 근대화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였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미 1960년대 후반에 박정희의 근대화론에 공감했기 때문인지 이영일 전 의원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 후하게 평가했다. 그는 “국력신장이라는 목표 아래 국민을 하나로 묶은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은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1987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것도 물질적 토대가 확충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사상계》와 5·16 5·16 직후 《사상계》의 분위기에 대해 당시 《사상계》 기자이던 손세일 전 의원은 “‘아, 우리나라도 이제 이렇게 해서 근대화(近代化) 혁명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나는 어린 마음에 ‘민주주의가 이런 식으로 짓밟혀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얘기를 했어요. 하지만 장준하 선생은 ‘네가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는 투로 얘기하는데, 군사쿠데타와 그들이 내건 근대화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었어요. 그러면서도 균형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던 것이, 그다음 호에는 5·16을 비판하는 함석헌 선생의 글을 실었어요.” 어떻게 보면 5·16혁명은 《사상계》가 선동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50년대 말 이래 《사상계》는 이집트의 나세르,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버마의 네윈 등이 일으킨 제3세계의 군사혁명들을 열심히 소개했다. 손세일 전 의원은 “‘아, 우리는 언제나 이런 근대화 혁명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선망(羨望)의 심정으로 그런 글들을 실었다”고 회고했다. 1961년 초 《사상계》는 “한국군은 당분간 군사혁명을 일으킬 능력이 없다”는 내용을 담은 <콜론보고서>를 소개한 바 있다. 나중에 혁명군의 주력부대가 된 해병 1여단을 이끌고 혁명에 참여했던 김윤근 장군은 “《사상계》에 <콜론보고서>가 실리자 부하장교들이 여단장실로 찾아와 ‘<콜론보고서>가 한국군 장교들이 기개가 없다고 비웃었다’며 흥분했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5·16 주체인 김종필 전 총리, 이석제 전 감사원장 등도 5·16에 대해 회고할 때마다 《사상계》에 실린 글들이 자신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고 말하곤 했다. 후일 장준하 선생은 한일회담, 3선개헌 등을 거치면서 박정희 정권과 대척점(對蹠點)에 선다. 그때 가서 장준하 선생은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는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식의 독설을 퍼붓는다. 더 후일에 가서 그는 철저한 반공민주주의자에서 통일지상주의자로 변모한다. 하지만 적어도 5·16군사혁명 초기, 장준하 선생은 ‘근대화’에 관한 한 5·16혁명 주체들과 인식을 공유(共有)하고 있었다. ‘근대화’는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
“4·19 덕분에 지도자는 국민을 두려워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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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계》 1968년 10월호에 실린 李榮一 전 의원의 <개발독재발상법서설>. |
이영일 전 의원은 산업화의 측면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민주화의 측면에서는 4·19를 꼽았다.
“역사발전의 어느 단계에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점은 중남미(中南美)의 군사독재자들처럼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지 않고 국력신장이라는 대의(大義)에 충실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4·19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에게 정부를 변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후 집권자들은 국민들을 두려워하게 됐다”고 말했다.
“내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비서실장(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을 해 봐서 아는데,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이 국민을 얼마나 두려워했는 줄 아십니까. 4·19와 같은 경험이 없는 나라, 집권자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는 발전이 없습니다. 4·19와 5·16, 이 두 노력이 집요하게 맞물리면서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영일 전 의원은 “4·19를 통해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역사가 만들어졌다”면서 “이제 4·19세대의 마지막 과업은 북한 주민들에게 주권을 찾아주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세기 전 장관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고려대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하다가 5공 시절 정치에 입문, 민정당 원내총무, 통일원·체육부 장관을 지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밖에 안되던 시절이었으니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4·19는 3·15 부정선거가 발단이 되기는 했지만, ‘부패 무능한 정권은 더 이상 안된다’는 생각의 발로이기도 했습니다.
4·19는 이후의 집권자들에게 자유당 말기처럼 부패 무능하면서 독재를 하고 민심(民心)을 망각하면 제2, 제3의 4·19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지금 중동(中東)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우리는 벌써 50년 전에 한 것입니다. 당시 ‘엽전’이라고 자학(自虐)하곤 했지만, 우리 국민의 수준이 참 높았어요.”
그는 5·16에 대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면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 수준의 나라에서 학생들이 국회로 쳐들어가는 무질서 속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만 고집했다면,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5·16은 그 자체로만 보면 쿠데타고 민주화에 대한 반동(反動)이지만, 근대화·산업화에 기여한 공로는 인정하고 계승·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세기 전 장관은 중국 얘기를 했다.
李世基, “역사는 기본적으로 계승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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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榮一 전 의원. ⊙ 72세.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동국대 행정학 석사. ⊙ 통일부 교육홍보실장·통일연수원장, 11·12·15대 국회의원 역임. 現 한중문화협회 총재. 사진=배진영 |
이 전 장관은 “중국인들은 ‘역사는 일진일퇴(一進一退)하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강한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임자(前任者)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창업주(創業主) 의식’이 강합니다. 심지어 권력을 승계한 사람도 자신을 ‘중시조’(中始祖)로 의식합니다. ‘신(新)한국창조’니 ‘제2건국’이니 하는 것들이 그 예입니다. 기관장들도 마찬가지예요. ‘○○원년(元年)’이라는 말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우리는 너무 단절의 연속이에요.
우리가 지금 G20, 국력으로 따지면 G10 안에 들어가는데, 4·19 당시와 비교하면 엄청난 성공 아닙니까.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벽돌을 하나씩 쌓아 가면서 여기까지 온 것인데, 그렇게 단절만 해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도 4·19세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공로,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화 공로를 인정하면서 미래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성이
(2011-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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