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추적] 서남표의 카이스트에 무슨 일이… : 월간조선

7월 8일과 9일 기자가 찾은 카이스트 대전캠퍼스. 서남표(徐南杓) 총장의 연임을 둘러싸고 한차례 폭풍이 휩쓸었지만 겉으로는 평온했다. 360억원 이상을 들여 새로 지은 ‘KI(Kaist institute)빌딩’ 앞으로 오리들이 느린 걸음을 걷고 있었고 거대한 ‘류근철 스포츠 콤플렉스’도 여전히 위용을 과시했다. 카이스트의 지킴이인 ‘장영실(蔣英實) 동상’ 역시 ‘안녕’하였으며 지나가는 학생과 연구생의 표정에서도 별다른 ‘전투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기자와 대화를 나눈 교수와 학생들에게서는 치열한 전쟁의 후유증을 느낄 수 있었다. ‘국내 공대(工大) 개혁의 최전선’ 카이스트의 자부심에는 금이 갔고 ‘서남표 효과’로 불리던 카이스트 프리미엄도 이제 한때의 무용담처럼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총장 연임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던 대학교수협의회 측 교수를 사전예고 없이 찾아갔다. 그러나 만날 수 없었다. “서울에서 왔으니 차 한 잔 하자”고 했지만 “서울로 출장을 떠나야 한다”며 외면했다. 무작정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학생회관을 찾았다. 대학 본관에 들러 보직교수와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 총장 연임이 역풍(逆風)을 낳을지, 봉합(封合)될지, 정반합(正反合)의 진보를 이룰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총장 측과 교수, 학생 모두 깊은 상처로 신음하고 있었다. 교수들은 “서 총장의 연임 시비가 대학 내 개혁과 반(反)개혁 세력의 다툼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학생들 역시 “타 대학 친구들이 우리 총장을 ‘엔지니어 총장’이 아니라 ‘정치 총장’으로 보더라”며 걱정했다.

카이스트의 한 관계자는 모 교수가 쓴 글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카이스트는 이제부터다. 카이스트 내부인들은 2010년 초여름에 일어난 일을 길이길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쓰린 가슴으로 누가 되고 누가 안 되고를 떠나, 이렇게 상처받은 선임과정은 없었다. 이기기 위한 야바위와 야비한 술수가 난무한, 언론 등 외부 세력이 조직적으로 동원된 선출로 기록될 것이다.”

기자는 이 글을 통해 카이스트에 몰아닥친 폭풍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었다.

‘서남표式 개혁’과 그늘

최근에 완공한 ‘류근철 스포츠 콤플렉스’.

서남표 총장이 부임하고 지난 4년간 카이스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왜 일부 교수들이 총장의 연임을 반대했을까. 과연 ‘서남표식(式) 개혁’의 실체는 무엇인가.

2006년 7월 서 총장이 취임한 뒤 카이스트는 안팎에서 크게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 더타임스 세계대학평가에서 2006년 198위였던 카이스트는 2009년에 69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대학 기부금은 1300억원이나 걷혔고 과학고 학생을 주로 뽑던 입학전형을 손질해 일반계고 학생들에게 문호를 열었으며 모든 신입생을 ‘입학사정관제’로 선발, 주목을 받았다.

2007학번부터 100% 영어강의를 도입했고, 전원 수업료 면제 방식을 바꿔 일정 성적에 미달하면 등록금을 받거나, 교수 정년심사를 강화해 4년간 35명을 탈락시켰다. 이전에는 탈락한 교수가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서남표식 개혁’은 ‘30년 강의 노트’, ‘먹고 대학생’으로 조롱받던 한국 대학 교육의 현실에 신선한 충격이 됐다. ‘지방에 있는 조용한 국립공대’였던 카이스트가 중앙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의 대상이 됐다. “그래, 한국 대학도 이렇게 가야 하는 거야”라는 찬사 일색이었다. 기부금도 카이스트로 몰렸다. 서남표 개혁▶언론 보도▶기부금▶서남표 개혁▶기부금… 이런 식의 선순환(善循環) 구조였다.

외부에선 서남표 총장을 선장(船長)으로 한 카이스트호(號)가 하늘과 바다의 지원 속에서 순항(順航)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서 총장이 연임한다고 하자 카이스트호가 갑자기 암초를 만난 듯했다. 서남표식 개혁이 외부의 찬사를 받는 동안 학내의 불만이 숨죽인 탓일까. 그렇다면 그 불만은 어떤 것일까. 개혁에 피곤해하는 교수와 학생들의 저항은 아닐까. 아니면 서 총장의 리더십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 것일까.

일부 교수, “종신교수가 연임에 반대하는 의미 새겨야”

360억원 이상을 들여 건축한 ‘KI빌딩’.

서 총장 연임을 둘러싸고 갈라져 있는 카이스트에서 한 중립적인 교수를 만났다. 그의 말이다.

“(서 총장은) 카이스트의 장기적인 발전 역량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눈에 보이는 단기적 실적에 치중했다는 견해가 적지 않아요. 정년심사를 해 교수 몇 명을 탈락시키고 무조건 영어강의를 지시하는 등 팽창에만 성급하게 치중하지 않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그 결과, 카이스트 교육의 질적 측면에서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곰곰이 살펴봐야 합니다. 100% 영어강의 외에도 서 총장이 부임하고 07학번 학생에게 적용된 ‘재수강 제한 정책’이나 ‘성적에 따른 수업료 차등 징수’ 등도 결과적으로 어떤 교육적 성과를 냈는지 평가해볼 필요가 있지요. 그러니 일부 교수나 학생들은 ‘어느 날 불도저가 갑자기 나타나 구획정리를 해 버린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중립을 자처했지만 기자의 느낌에는 반 서남표파로 보이는 한 교수는 이런 지적을 했다.

“취임 후 처음에는 총장이 교수들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어요. 강당에 전체 교수들을 불러놓고 공개의견을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지요. 처음에는 300~400명 교수가 참여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소통이 안되고 다양한 의견교환이나 합의점 도출이 이뤄지지 않아 참석하는 교수들 수가 줄어들었어요.”

이 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

“연임에 반대하는 교수는 반 개혁적이고, 찬성하는 교수는 개혁에 순응하는 교수인 양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이 안타깝습니다. 대학을 정치판의 이미지로 덧칠해서 되겠습니까. 카이스트 교수들이 개혁에 반대하는 수구적 집단이라 생각하세요? 언론도 각성하세요.”

화학과 한 교수는 서 총장의 연임이 확정된 뒤 동료 교수에게 이런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연임 반대의견을 개진한 교수들은 대부분 영어권에서 유학했고 이들 중 많은 이들은 더 이상 승진이 필요없는 영년직(永年職) 교수들입니다. 이들은 변화된 승진제도와 영어강의에 전혀 어려움과 거부감이 없습니다. 카이스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개혁 선전에 탄성을 자아내고 마치 처음으로 카이스트에서 강도 높은 개혁이 진행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겠지만, 카이스트에서는 지난 40여 년 동안 꾸준히 유사한 개혁이 단계적 발전을 거듭하며 행해지고 있습니다. 카이스트 교수들에게는 현 총장의 개혁이 새로울 것도 없고 큰 충격도 결코 아닙니다.”

테크노대학 모 교수도 전체 교수들에게 메일을 보내 답답한 심경을 전했다.

“20여 년 전 부임한 이래 지금같이 참담한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카이스트는 개혁실험의 대상으로 전락하더니 이제는 특정인을 지원하는 신문 사설까지 보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총장 선출과 같은 교내 문제에 교수들은 입을 다물어 버리고 어중이떠중이들이 책임 없이 한마디씩 하는 기가 막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략)… 다만 작금의 사태가 혹여 언론에 기대려는 분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라면, 그분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카이스트가 그동안 쌓아 온 명예와 자긍심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인지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서 총장식 교육개혁을 직접 피부로 느끼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기계공학과 학부생의 이야기다.

“영어강의를 하려면 학생이나 교수의 영어실력이 우선돼야 하는데, 학생 입장에서 보면 입학 당시 사전 정보를 몰라 영어강의를 두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지요. 교수님들도 겉으로는 절대평가를 한다면서 공공연히 상대평가를 한다고 말씀하세요. 또 입학할 때 학점이 3.0만 넘기면 전액 공짜라는 얘길 들었는데 입학하고서 3.0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어도 장학금 대상(3.3 이상)이 안됩니다. 계절학기를 듣는데 다른 대학은 과목당 2만원인데 우리는 45만원입니다. 세계적 대학으로 가는 것은 좋은데 준비과정 없이 밀어붙이니 처음에는 반반(半半) 정도 서 총장 개혁에 수긍하던 학생들도 점점 반대의견이 많아졌어요.”

일부 교수들은 서남표 총장 연임의 반대 이유로 소통 부재를 꼽는다. 지난 2006년 6월 교직원과 함께 대전시립미술관을 찾은 서 총장.

보직 교수, “목표나 방향이 옳다면 밀어붙이는 스타일 때문”

이런 교수와 학생의 견해에 대해 한 보직교수는 서 총장을 두둔하며 “목표나 방향이 옳다면 밀어붙이는 스타일”때문이라고 했다.

“서남표 총장의 생각이 뭐냐, 좋은 대학을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그럼, 좋은 대학을 만들기 위해선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의견이 다를 수 있지요. 서 총장은 목표지향적이어서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 서로가 힘든 길이라 해도 (그 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당연히 손해 보는 사람도, 힘들어하는 이도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긴 하지만 목표를 바꿀 정도가 아니라면, 그 목표를 밀고 나가다 보니까 그런 오해가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방향이 옳다 해도, 지나치게 밀어붙이거나 민주적 절차를 무시했기에 연임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한쪽에서는 과업 중심적이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일을 열심히 한다고 말합니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시각이 다를 수 있잖아요. 서 총장의 경우 어린 시절 유학을 떠나 고생 끝에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MIT 학과장으로 10년 넘게 재직하며 혁신조치를 취해 10~15년 뒤 미국 주류사회에서 긍정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카이스트 개혁도 향후 좋은 성과를 낼 것이라는, 성공경험에서 오는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서 총장의 경륜과 커리어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고요.”

이 보직교수는 “자아비판을 하겠다”며 “총장을 보좌하는 보직교수들이 잘못한 점도 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서 총장이 디테일한 점까지 지시하지는 않습니다. ‘일반고 학생을 뽑자’고 지시하면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고등교육의 질적 문제나 입시개혁, 고교나 대학교육 변화 등 다양한 층위의 교육문제를 모두 다뤄야 할 정도로 사안이 복잡해요. 실무를 맡은 보직교수가 총장에게 ‘이것은 이렇게 하면 어떤가요?’라고 말하면 총장은 귀담아듣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보직교수가) 그것을 ‘내가 이 얘기 하면 점수 깎이는 것 아니야?’라며 소위 ‘알아서 긴다’고 할까요? 그런 면이 있었다고 봅니다. 이 과정에서 겉으로 보기에 입시개혁이 신선하게 보일 수도 있고, 기자의 착시현상도 생겨날 수 있지요. 하지만 (입시제도를 다루는) 교육과학기술부 입장에서 보면, 죽일 놈인 거예요. 자기하고 상의도 잘 안 하니 소통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요. 그런데 ‘입시개혁의 답이 완벽하지 않은데 왜 터뜨렸느냐’고 물으면, ‘총장이 하라고 해서 했다’고 말합니다. 그게 잘못됐다는 겁니다. 자아비판을 하면 그렇습니다. 총장께 ‘이것은 제가 검토해 보니 이게 필요하다’고 자꾸 설득하면 좋은데, 일이 잘 안 풀리면 총장 탓으로 돌리지 않았나 생각돼요. 그런데 제가 감동한 점은 서 총장이 ‘다 카이스트가 잘되라고 하는데’라며 리셋(reset·작동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을 작동 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 버튼을 누릅니다. 잘못하면 리셋 버튼을 눌러 용서하고 끌고 가면 되지, 상처 난 것을 자꾸 긁지 말라는 것입니다.”

“서 총장은 생각을 영어로 하는 사람”

일부 카이스트 교수들은 서 총장의 성급한 팽창과 성과 지상주의 때문에 교육의 비효율화와 학생의 질 저하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카이스트 연구원 모습.

카이스트 관계자는 “서 총장이 외국에서 52년을 살았던 사람임을 간과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반세기를 외국에서 보냈던 사람의 시각차를 4년 만에 메우기가 어렵다. 어쩌면 소통 부재가 당연하다. 문화적 접근방법, 문제인식 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분은 생각을 영어로 하는 사람입니다. 영어식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교수 입장에서 보면, 서 총장의 말을 한글로 옮기면 직설법이 됩니다. 또 고사성어(故事成語)나 한국식 표현이 서툴 수도 있어요. 이해하는 입장에서 보면 전혀 문제가 아니지만 고깝게 생각하면 (총장과 교수의 관계가) 어려워질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간접적인 동양적 사고방식과 달리 미국식 사고방식은 직선적이란 얘기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한국인은 대화할 때 ‘예스’나 ‘노’가 불분명하지만, 미국인은 아무리 토론이 격해도 의사표현은 일도양단(一刀兩斷)하듯 분명합니다. 카이스트 구성원 누구도 서 총장의 열정에는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 열정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예를 들어 듣기 편하게 말할 수 있지만, 접근방법에서 갭(gap)이나 오해를 낳은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듣기 싫은 얘기를 안 할 수도 있는데 총장은 듣기 싫은 소리도 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인은 능구렁이지만 그분은 아닙니다. ‘예스 노’로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서 총장을 미국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싫은 소리나 ‘노’라고 말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민주적 절차나 반론제기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느냐가 문제 아닌가요.

“어떻게 보면 그게 아쉬운 점이죠. 양쪽의 관계를 맺어 주는 사람이 보직교수들인데 그게 조금, 보필을 못했던 점이 있어요.”

―미국식 사고라는 게 뭔가요.

“(인간)관계보다는 업무 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것도 환상 아닌가요. 미국사회도 맥락을 중시하지 않습니까. 총장의 서구식 스타일에 교수들이 무조건 따라갈 순 없잖아요.

“일방적 방향으로 ‘따라와라’가 아니라, 그런 것(한국식 사고)을 감안해 말을 안 해도 됐던 것을 말하는 바람에 오해를 불러오고, 그 오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오해를 하도록 했다는 것이죠.”

올해 74세인 서 총장(1936년생)은 서울사대부고 2학년 때 도미(渡美), 미국에서 52년을 살았다. 1955년 미국 브라운 앤드 니컬스 스쿨(Browne and Nichols Schools)을 졸업했다. 1959년 MIT 기계공학과 학사와 1961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카네기 멜론(Carnegie Mellon)대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는 아무래도 미국식 사고와 언어에 더 익숙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미국식 사고방식의 기저에 ‘한국인과 미국인이 결코 동격일 수 없으며 미국식 가치가 반드시 선(善)하다’는 가치관이 깔려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이 나올 법하다. 일부 교수들이 “총장과 보직자의 의지가 일사불란하게 이뤄지는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는 것도 서 총장의 미국식 기능주의 사고에 대한 비판과 관련이 있다.

한 교수는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며 이와 관련한 부연설명을 했다.

“미국식 언어와 사고를 무어라 딱 규정할 순 없어도, ‘컴퓨터 영어(일종의 컴퓨팅글리시)’처럼 프로그램 실행을 지시하는 간명하고 직설적인 명령어투가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요? 언어의 모호성과 다의성, 다양한 뉘앙스와 표현과는 분명히 다르지요. 사실, 상당수 카이스트 교수들이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미국식 사고나 언어에 익숙하지 않다고 볼 수도 없지요. 오히려 과업중심의 조급함이나 개인의 성품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정말 잘났어’라는 생각이 화근일 수도

서 총장의 연임 과정에서 이런 얘기가 불거져 나왔다. 국내 과학계를 무시하는 듯한 그의 독선적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예컨대 서 총장이 ‘한국 과학계가 지난 30년간 뭘 했느냐’는 취지로 발언해 과학계 원로들의 원성과 반감을 샀다는 것이다.

서 총장은 가까운 교수나 교직원에게 미국에서 고생했던 시절을 곧잘 말했다고 한다. 대학 때, 학비를 벌려고 ‘잡(job)’을 3개씩 가졌다거나 화장실 청소와 페인트칠 아르바이트 경험, 특히 “침대정리에 나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경제평론가 공병호(孔柄淏)씨는 서 총장에게서 풍기는 이미지를 분석하며 ‘나는 정말 잘났어’라는 오만함을 경계하라고 했다.

“명문대학을 나오고 일생 승승장구해 온 사람들은 자신감이 아주 강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자신감을 넘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 전체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낮게 볼 가능성, 즉 하대할 가능성이 남게 됩니다. 그 점을 매우 주의해야 하지요. 제가 사회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보면,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거나 조기유학 등 특별한 교육을 받았던 분, 외자(外資)계 기업의 수장으로 근무했거나 학문적 업적이나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이들은, 일률적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얘기는 못해도, 평균적으로 오만하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리고 그 오만함은 자주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으로부터 무시당한다는 그런 대접을 받을 때 기분이 상하게 되지요. 행여 서남표 총장이 그런 이미지를 남겨 주지는 않았을까 우려됩니다. 고2 때 도미해 치열한 정년심사를 뚫고 MIT 정교수를 역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정말 잘났어’라는 믿음이 믿음 이상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있지요.”

서 총장의 경우도 자신의 평생 업적이 대인관계에 ‘칸막이’가 되지 않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과거(성공신화)’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칸막이’ 말이다.

정부출연연구소에 몸담은 한 인사는 이런 유(類)의 퍼스낼리티를 이렇게 분석했다.

“자수성가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은 자신만의 성공신화에 빠져 있는 경향이 있지요. 중견기업 사주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인데, 자신이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을 일궈냈듯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라고 다그칩니다. ‘왜 못해. 나는 했는데’라며 경쟁과 효율의 논리를 강제합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조직원이 힘들어지지요.”

이번 논란도 서 총장의 목표지향적인 신념 혹은 독선이 발단이 됐다는 주장이 제법 퍼져 있었다. 교수협의회 한 교수의 언급이다.

“이전의 총장 선임 절차에 있지도 않았던 ‘총장후보발굴위원회’라는 기구를 신설하고 개인적인 친분을 바탕으로 ‘총장후보선임위원회’를 만든 것도 카이스트 구성원의 내부 목소리를 담지 않은 겁니다. 일종의 독선인 셈이지요. 또 이사회 정관을 바꾸면서 이사 숫자를 30% 정도 늘려 구미에 맞는 인사들로 이사회를 보강하는 등 총장 연임을 위한 정지작업을 면밀히 준비한 느낌이 듭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했다고 볼 수 있는데, 독재 시절 체육관 선거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카이스트 교수들이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교수협의회에서 오죽하면 ‘다양한 의견교환이나 합의점 도출과 같은 민주적 절차를 폄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많은 교수가 학교 행정에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했다’고 했겠습니까.”

이사회 구성을 두고는 학생들도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었다. ‘총장선임위’에 서 총장의 학교 선후배(박병준·이기준), 총장 부인의 경기여고 동창(장영신)이 들어 있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산업공학과 한 학생은 “총장이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을 중심으로 선임위원회를 만드니 불공정한 구도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09년 9월 27일 KAIST에서 열린 ‘학교장 추천전형 합격자 간담회’ 모습. 왼쪽 끝이 서남표 총장과 이주호 과학기술부 차관.

서 총장의 대응 주목

이제 논란의 폭풍은 지나갔다. 서 총장은 연임이 됐고, 교수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서 총장은 연임이 된 후 ‘내 부덕의 소치’라는 동양적 논평을 내놨다. 연임 과정에서 불거진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한 보직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쁘게 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제가 총장을 곁에서 지켜보며 안타깝게 느낀 점은 ‘대한민국에 어른이 없다’는 겁니다. 정치적으로 제거하고 모함합니다. 외국사람을 조직의 장으로 앉힐 때는 그 사람의 장점만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단점만 부각시켜선 곤란합니다. 사실 카이스트처럼 단기간에 대학순위를 올리기가 쉽지 않아요. ‘서남표 효과’가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네거티브한 것을 들춰서 좋을 게 없습니다. 장점만 쫓아가도 1등 하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총장이 부덕의 소치라고 했으니 달라질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그렇다면 정말 서 총장이 변할 경우, 카이스트는 과거의 ‘영화(榮華)’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건 바로 이번 논란의 핵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즉, 반 서남표파의 문제 제기가 서 총장의 독주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개혁에 대한 피로 때문인지가 명확해져야 할 것이다.

현재로선 감정의 골만 남아 있지 사실 관계가 규명된 상태가 아니다. 이 때문에 카이스트의 진통이 끝나지 않을 것이란 진단도 나오고 있다. 외부와 학내에서 모두 찬사를 받는 개혁은 불가능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