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 金一榮 교수를 떠나보내며

그대들, 그 사람을 가졌는가?

  • : 강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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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金一榮 같은 학자를 키워 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김도종 명지대 교수)

⊙ <건국과 부국>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등 秀作 펴낸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큰 별,
    간암으로 세상 떠나
⊙ ‘품격 있는 사회’ 추구했던 학자. 수준 낮은 좌파들이 날뛸 때 준엄한 비판을 했고,
    저질스런 우파가 잘못된 길을 갈 때도 통렬하게 꾸짖어

金一榮(1960~2009)
⊙ 1960년 강원 동해 출생.
⊙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
⊙ 성균관대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운영위원, 성균관대 사회과학연구소장,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 조선일보 아침논단 필진 역임.
⊙ 저서: <건국과 부국> <주한미군-역사, 쟁점, 전망>(공저), <1960년대의
    정치사회의 변동>(공저) <195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공저) 등.

姜圭炯
⊙ 서울 출생.
⊙ 연세대 사학과 졸업. 美 인디애나대 역사학 석사, 오하이오대 역사학 박사.
⊙ 現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전 KBS교향악단 운영위원.
⊙ 저서: <21세기 첫 십년의 기록> <21세기에서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다>.
김일영 교수는 2005년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건국과 부국>을 펴냈다.
金一榮(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가 2009년 11월 23일 영면했다. 향년 만 49세. 故人(고인)은 1960년 1월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의 어린 나이에 서울로 유학 와 성균관대에서 윤근식 교수님과 張乙炳(장을병) 교수님의 지도로 학사·석사·박사(1991)를 받고, 母校(모교)에서 1992년 9월부터 교수 생활을 했다.
 
  교수 생활 중에 성균관대 사회과학연구소장, 미국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방문학자(visiting scholar), 일본 규슈(九州)대 법학부 방문학자를 역임했고, 재직 중 여러 번 최우수 연구교수, 우수 강의교수로 선정됐다.
 
  2007년에는 성균관대 총동창회와 성균경영인포럼에서 공동으로 주는 ‘성균학술상’을 수상했다. 한국정치학회·한국국제정치학회·한국국제정치사학회의 임원으로 활발한 학회 활동을 했고, 여러 정부·사회기관의 자문, 바른사회시민회의·교과서포럼·<시대정신> 등의 사회참여, 그리고 여러 언론매체에의 활발한 기고 활동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고인은 학생들에게는 자상하고 성실한 스승이었다. 교수의 3대 책무를 교육·연구·(사회)봉사라고 했을 때, 이 세 분야에서 모두 빼어난 활동을 한 분이었다.
 
  2009년 초 간암 확진을 받고 투병 중이긴 했지만 젊고, 워낙 회복의지가 강해서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몰랐다. 돌아가기 며칠 전 병원으로 찾아뵀을 때도 비교적 건강했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서 같이 웃었다. 일요일날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니 의식이 없고, 그날을 못 넘긴단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고인은 돌아가기 사흘 전 병문안 오신 연세대 金世中(김세중) 교수에게 “선생님, 염려 마세요. 저 일어납니다”라고 말했다. 이철우 교수와 내가 “저 알아보시겠어요?”라고 물으니 눈을 번쩍 뜨고 뭔가를 얘기하려 안간힘을 쓰기에 “말씀 안 하셔도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도 노력을 했는지….
 
  고인은 일요일 자정 무렵에 사랑하는 가족(조인진 총신대 교수와 1남1녀)과 평소에 좋아하던 趙全赫(조전혁) 의원의 손을 잡고 세상을 떠났다. 빈소에 있는 그의 영정은 평소의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예전처럼 “강 교수~ 오늘 나랑 얘기 좀 나눠요”라고 얘기하며 밖으로 나올 것처럼 보였다.
 
 
  닮고 싶었던 완벽한 롤 모델
 
  빈소에는 평소 고인을 좋아했던 분들의 조문행렬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학자로서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따듯했던 분이기에 조문객들의 슬픔 또한 컸다.
 
  영결식을 마치고 당신께서 거의 일평생을 보낸 성균관대의 연구실에 가족이 모셔온 고인의 영정과 함께 들어갔었다.
 
  고인이 “이전 쓰던 연구실이 좁았었는데, 요번에 나온 연구실이 넓고 깨끗해서 좋다”며 “꼭 놀러오라”고 한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리고 “많은 책을 소장할 수 있게 이중으로 된 책장을 마련했다”고 좋아했는데…. 고인이 자랑하던 이중책장을 어루만지며 마음이 아팠다.
 
  고인을 처음 만난 것은 국제정치학회의 외교사분과 모임에서였다. 하얀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빛, 해맑은 성품, 젠틀한 몸가짐, 그리고 유려한 언변이 인상 깊었다. 이후 고인과는 學緣(학연)·血緣(혈연)·地緣(지연) 등 어느 부분에서도 겹치는 곳이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 마음 터놓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인생 선배이자 선배 학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필자에게 행운이었다. 서로의 고민도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고, 고인의 군더더기 없는 성격과 외모를 꼭 닮은 고인의 명쾌한 글을 읽으며 행복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
 
  고인과 대화를 나누면 언제나 배우는 것이 있어서 좋았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유쾌했던 것은 고인의 온화한 인품 덕이었다. 필자에겐 진지함과 열정, 냉철한 논리와 뜨거운 가슴을 적절한 비율로 가진, 그래서 닮고 싶은 완벽한 롤 모델(role model)이었다.
 
  많은 학업과 일을 하시면서도 언제나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것에 대해선 경이의 마음으로 바라봤다. 필자 같으면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짜증이 났을 법한데도 언제나 한결같은 표정과 말투로 세상을 살았다. 필자보다 불과 몇 살 위였지만, 고인은 필자에게 마음의 스승이었고, 선비의 상징이었고, 인생의 벗이었다.
 
  고인은 현대한국정치사, 한국외교사, 동아시아 정치경제발전모델, 국제관계론의 젊은 碩學(석학)이었고, 법정치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젊은 나이에 이미 많은 업적을 내고 大家(대가)로의 자리에 한발짝 한발짝 다가서고 있었으며, 한국정치학계와 한국현대사학계를 이끌 차세대 리더였다.
 
  명지대 김도종 교수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김일영 같은 학자를 키워 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지를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실로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큰 손실이라 아니할 수 없고, 한국사회 자체의 불운이라 할 수밖에 없다.
 
 
  ‘품격 있는 사회’ 추구
 
  고인의 학문적 성향은 언제나 합리적이고 학구적이었다. 우리 세대 대부분의 학자가 그렇듯이 학창시절 진보좌파의 길을 모색하다가, 학문이 무르익으면서 이성적인 보수의 길을 가며 한국사회의 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고인은 파당적인 이데올로그가 아닌 균형 잡힌 이론가이자 역사가였다. 학자가 성실함과 총명함을 공히 갖기란 매우 어렵지만, 고인은 두 가지를 겸비한 드문 예였다. 2008년에만 12편의 논문을 발표한 것만 봐도 고인의 성실성과 생산성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서만 공부하신 분들이 자칫 가질 수 있는 식견의 협소함도 고인에게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어떤 유학파보다 더 넓은 통찰력을 갖고 있고, 최신 이론에 해박했다. 고인은 정치학자들이 1차사료에 대해 등한시하는 것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성실히 1차사료를 섭렵했다.
 
  그 결과는 이론과 史實(사실)의 조화 속에서 탄생하는 독창적인 논리였다. 그래서 무작정적인 찬미가 아닌 학구적 분석을 통해 李承晩(이승만) 시기와 朴正熙(박정희) 시기에 대한 再(재)평가를 시도했다. 방일영문화재단에서 펴낸 <건국과 부국>은 이승만·박정희 시기에 대한 그의 연구결과를 집대성한 책이다.
 
  고인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편집출간을 통해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을 한 단계 더 높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연구와 저술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편향되지 않게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했고, 앞으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끊임없이 제시했다.
 
  고인이 추구했던 사회는 한마디로 ‘품격 있는 사회’였다. 그래서 수준 낮은 좌파들이 날뛸 때도 준엄한 비판을 했고, 저질스런 우파가 잘못된 길을 갈 때도 통렬하게 꾸짖었다. 자유주의와 책임에 기반한 성숙한 시민사회를 갈구했기에, 생전에 좌건 우건 정치권력화를 추구하는 또는 정치권력과 밀착하려는 시민단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인은 투병 생활에 들어가기 전까지 기존 저서인 <건국과 부국>을 수정보완해서 학술적으로 더 탄탄한 책으로 만드는 한편, 그 책을 읽기 쉬운 대중용으로도 출간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국제정치경제학 이론, 만주국에 대한 연구, 냉전사에 대한 연구·번역 등을 심화해 나가고 있었다.
 
  全相仁(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영결식 조사에서 “반백년을 채 못 살았어도, 업적으로는 100년 이상을 산 사람”이라고 고인을 평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고인의 애송시는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였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고인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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