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壽煥 추기경의 죽음은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었다. 죽음을 통해서도 우리 가슴에 희망을 전달했다. 張英嬉 교수도 ‘좋은 죽음’을 통해 커다란 울림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노무현의 죽음은 이 사회가 극력 기피해 온 자살이었다. 어느 종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다.
⊙ 盧武鉉의 자살이 이제 뿌리내리기 시작한 존엄사 정책 흔들어
⊙ 말기환자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무의미한 생명연장 치료에 반대하는 여론 높아져
⊙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의료현장에서 과잉진료 만연
崔喆周 前 중앙일보 논설고문
⊙ 1942년 전남 광주 출생.
⊙ 한양대 화학공학과 졸업.
⊙ 중앙일보 일본특파원·경제부장·편집국장·논설실장 역임, 국립암센터 호스피스 아카데미 수료.
⊙ 저서 <해피 엔딩-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 盧武鉉의 자살이 이제 뿌리내리기 시작한 존엄사 정책 흔들어
⊙ 말기환자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무의미한 생명연장 치료에 반대하는 여론 높아져
⊙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의료현장에서 과잉진료 만연
崔喆周 前 중앙일보 논설고문
⊙ 1942년 전남 광주 출생.
⊙ 한양대 화학공학과 졸업.
⊙ 중앙일보 일본특파원·경제부장·편집국장·논설실장 역임, 국립암센터 호스피스 아카데미 수료.
⊙ 저서 <해피 엔딩-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 이탈리아에서 존엄사 논란을 일으킨 근위축증 환자 피에르지오르지오 웰비.
盧武鉉(노무현) 前(전) 대통령의 國民葬(국민장)이 치러진 다음날인 5월 30일. 한 달 전에 예정됐던 죽음학 심포지엄이 서울 신촌에 있는 연세의료원 본관에서 열렸다. ‘인간의 생명과 존엄사’를 다루기 위한 이날 모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 불교, 유교 등 종교인들과 인문 사회학 관계자들, 그리고 호스피스 활동을 벌여온 전문가들을 포함해 120여 명이 회의장에 나타났다.
한국죽음학회가 오랜만에 마련한 심포지엄이었지만 예전과 달리 현장에서의 부산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참석자들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노무현의 자살 충격으로 ‘존엄사’를 다뤄야 하는 이날의 주제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이다. 그들은 그 그늘을 걷어낼 수 없었다.
접수창구에서 만난 한 수녀의 얼굴에서 민망스러워하는 표정을 읽었다. 그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며 수많은 말기 암 환자들의 죽음을 돌봐 왔던 성직자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 때문에 정말 혼란스러워요. 저희 병동 환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물어보는 거 있죠. 마음이 무겁고 고통스러우면 노무현 대통령처럼 저렇게 자살해도 되느냐고요.”
“그래서 뭐라고 답변하셨어요?”
“아, 그야 뭐 아니라고 했지요. 그래선 안된다며 머리를 흔들었어요. 그건 노무현 대통령이 크게 실수한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대답을 하고 나니 가슴이 두근두근했어요. 내가 잘못 이야기한 건 아닌지, 또 그렇게 설명한 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 헷갈렸어요. 또 다른 환자들이 같은 화제에 끼어들 눈치면 얼른 자리를 피해야 했습니다. 오늘 심포지엄에서는 혹시 그 이야기가 어떻게 나오나 궁금해서 나왔어요.”
18년 동안 ‘좋은 삶, 좋은 죽음’ 운동을 펼쳐 온 각당복지재단의 한 여성 회원도 당혹스러워했다. 대통령을 지낸 분의 자살로 ‘좋은 죽음’을 말하기가 겁나고, 앞으로 어떻게 ‘존엄사’ 논리를 꿰맞춰 가야 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盧武鉉의 죽음은 ‘촉수엄금’의 위험물
5월 21일 존엄사에 관한 대법원의 역사적 판결을 예상하고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던 이 심포지엄이 이틀 후에 발생한 ‘노무현의 자살’이라는 예상치 못한 사태로 죽음의 모습은 더욱 복잡해졌다.
심포지엄 개회사에 이어 격려사가 나오고 주제발표가 시작됐지만 어느 누구도 노무현의 자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자살’뿐 아니라 ‘逝去(서거)’라는 단어도 등장하지 않은, 마치 엄격히 규율된 장소로 여겨졌다.
노무현 추모 열기는 회의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무현의 죽음은 ‘촉수엄금’의 위험물이었고 출입금지 푯말이 붙은 위험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최근 대법원의 존엄사 판결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분석하고 전망하는 심포지엄에 충실할 뿐이었다.
오히려 조심스러운 개회사와 기도, 격려사 등을 통해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짚어 갔으며 참석자들은 행간의 의미를 잡아 가는 재치를 살렸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이지요. 생명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 생명을 버릴 권한은 없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도, 더 크게 즐기려는 사람도 생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2009년의 화두는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혹독한 경기침체와 함께 ‘죽음’으로 시작했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있는 한 식물인간의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청구 소송에서 서울고등법원이 1심과 같은 내용의 존엄사 인정 판결을 내렸다. 죽음이 우리 사회의 현실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지난 2월이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숨겨 두었던 죽음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화제에 등장하고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들을 내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항소심 판결은 연명치료 중단의 요건으로 환자가 회생 가능성이 없고, 그 환자가 합리적으로 치료 중단의 뜻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하며, 의료진에 의해 치료중단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존엄사가 일부 반대자들이 우려하는 소극적 안락사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아름다운 죽음
존엄한 죽음에 관심이 더욱 쏠린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에 있었던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이었다. 그는 음식 섭취를 위해 배에 꽂은 관을 제외하고 마지막까지 모든 기계적 치료를 거부했다. 최후까지 스스로 호흡하면서 존엄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각막을 기증했다. 삶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듯 죽음의 모습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억누를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나도 저런 모습으로 떠나고 싶다’고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선종은 우리가 따르고 싶은 좋은 존엄사의 모델이었다.
우리에게는 외롭거나 고통스러울 때 추억하고 싶은 ‘좋은 죽음’이 별로 없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일 만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찾는 것을 우리는 게을리했다.
암을 포함한 불치병 말기환자들에게는 무작정 기계적인 연명치료를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현실이 우리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사실상 죽음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두려운 話頭(화두)였다.
더욱이 우리를 이끌어온 지도자들의 죽음은 비극적이었다.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이 그랬다. 생전의 업적이나 역사적 평가는 죽음의 추억과 또 다르다. 1979년 가을, 현직 대통령이었던 그가 비운의 총탄에 쓰러진 청와대 주변 궁정동 현장에는 아직까지 안내판조차 없다. 그런 죽음을 우리는 감추고 싶은 것이다.
2005년 정월. 대법원장을 지낸 兪泰興(유태흥)씨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겨울 밤 한강 다리 난간을 넘어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한때 대한민국의 법을 지휘했던 86세 노인이 투신자살을 감행했다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비극성과 참담함이 죽음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올 2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어두운 죽음의 추억을 걷어내고 아름답고 가슴에 껴안고 싶은 그림을 그려 주었다.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좋은 죽음의 추억은 힘의 원천이며 사랑의 샘물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의미 있는 삶의 열매다. 그런 죽음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까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사람들은 깊이 헤아리지 못한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마음을 읽는 데 독특한 시선을 갖고 있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유권자들이 좋은 삶과 마찬가지로 좋은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존엄사와 관련된 법안을 서둘렀다.
한나라당 金忠環(김충환) 의원이 ‘호스피스 완화의료 법률안’을 발의했다. 발의자는 그를 포함해서 40명이었다. 그의 발의에 앞서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金炯旿(김형오) 국회의장은 격려사를 통해 자신의 회한을 털어놓았다.
“제가 오래전에 어머님을 암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때 생명이 꺼져 가는 어머니 치료를 위해 수술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헛된 일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돌아가셨지요. 한참 후에 내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필요 없는 수술을 해서 어머님을 더욱 힘들게 하지 않았나 하고 늘 후회했습니다.”
김충환 의원에 이어 민주당의 全賢姬(전현희) 의원 등 12명이 ‘암 관리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그리고 한나라당의 申相珍(신상진) 의원 등 22명이 ‘존엄사법’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당의 金世淵(김세연) 의원도 ‘마지막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에 관한 법률’을 발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좋은 죽음을 바라는 국민의 삶을 지원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이 최근 6개월 사이에 경쟁적으로 입법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이들의 움직임은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지난 1월 ‘존엄사법’을 입법 청원하면서 발걸음이 빨라지는 듯했다. 경실련의 관련법안은 말기환자의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위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환자 스스로 중단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대법원이 존엄사와 관련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판결 속도전에 나선 것은 작년 여름부터였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인 식물인간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오기 훨씬 전이었다.
인공호흡기를 뗄 것인가, 말 것인가
피고가 관련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하기 8개월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들은 학계 등 관련 전문가들과 함께 존엄사 연구와 각국의 판례를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다. 존엄사가 이미 우리의 삶과 이 사회를 관통하는 주요 화두가 될 것이라는 것을 감지한 것이었다.
수많은 환자의 죽음을 직접 대면하고 있는 의료계의 현실은 더욱 급박했다. 존엄사 소송 당사자인 환자가 입원해 있는 세브란스병원 의사들은 잦은 모임을 가졌다. 지난 2월 연세의료원의 생명윤리위원과 자문위원들이 총집결했다. 제1, 제2 진료부원장이 나타났고 이어서 응급진료센터 소장, 간호담당 부원장, 중환자실장, 내과학 교수, 병원 사무국장, 인사팀장, 법무팀장까지 자리를 채웠다.
이날의 모임이 더욱 특이한 것은 전국의사협회와 병원협회의 부회장, 윤리학 교수와 철학교수 등의 모습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변호사와 목사, 한국죽음학회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고등법원의 존엄사 판결에 대항해 대법원에 상고할 것인지, 상고할 경우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됐다. 한 환자의 생명을 간신히 이어 주고 있는 인공호흡기를 뗄 것인가, 말 것인가. 뗀다면 어떤 기준에서 판단할 것인가를 놓고 병원당국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孫明世(손명세) 연세의료원 윤리위원장(연세대 의과대 예방의학교실 교수)은 한국 최초의 존엄사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하기 이전에 관련 위원회에서 이를 신중히 검토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의학적으로 볼 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망 과정에 있는 한 명의 환자를 놓고 연세의료원이 고뇌하고 있는 것은 그가 전국 3000~5000명으로 추정되는 식물인간과 6만여 명에 이르는 말기환자들의 운명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조직의 윤리위원회를 가동시킨 것도 그 같은 번민의 한 단면이다.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제1의 가치로 생각한다. 그래서 환자의 마지막 삶의 마무리를 둘러싸고 그들의 고뇌는 겹겹이 쌓이고 있다. 말기 암환자는 급격히 늘어나고 죽음을 둘러싼 갈등이 환자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눈감을 수 없는 긴박감이 쌓이고 있다.
‘죽음’에 대한 토론장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해 15년여 동안 현장에서 뛰어온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許大錫(허대석) 교수는 최근 100여 명의 의대 교수들과 머리를 맞대고 죽음이라는 화두를 토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환자들의 ‘좋은 죽음’에 대한 견해들이 쏟아졌다. 환자에게 아름다운 삶이 무엇이며 또 아름다운 죽음은 어떠해야 되느냐고 스스로 묻고 답했다. 서울대병원 역사상 최초의 죽음의 토론장이었다.
이 모임에 이어 5월에 열린 서울대병원 의료윤리위원회는 말기 암환자의 심폐소생술 및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의료지시서를 공식적으로 통과시켰다. 이 의료지시서는 암환자가 생명을 연장시키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치료를 계속 받을 것인지에 대해 본인의 선택을 명시하게 되어 있으며, 환자가 특정인을 대리인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사전의료지시서가 마련된 것은 서울대병원이 처음이었다.
서울대병원에 이어 삼성서울병원과 아산병원 등도 비슷한 절차를 밟기 위해 내부 검토에 들어갔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등을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찾아 왔던 각 지방의 국립대학병원들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 21일에 있었던 대법원의 존엄사 판결은 우리 사회에 존엄사를 정착시키기 위한 절차의 시작을 알렸다.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바로 그날 그 시각에 필자는 윤영호 박사(국립암센터 기획조정실장), 이인영 교수(홍익대학교 법과대학)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청 상황실에서 ‘존엄한 죽음, 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영등포 구민 등 참석자들이 200여 석의 자리를 메우고도 넘쳐흘러 복도 쪽 출입문까지 이어졌다. 사회자가 말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인데도 우리는 입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죽음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됐으니 세상이 너무 달라졌습니다.”
참석자들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세상은 이토록 변했다.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틀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자살했다는 뉴스는 이들의 가슴에 대혼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나는 이 소식을 전남 화순에 있는 전남대학병원에서 듣고 멍해졌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일부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워매, 자살이 무슨 말이랑가. 대통령이….”
자살을 ‘존엄한 죽음’으로 포장할 수는 없다
모두의 슬픔과 충격은 짧은 외침으로 압축됐다. 의사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살이라니.”
이 병원의 장례식장 조문객들도 차분했다. 이곳에서 6명의 망자를 모시고 있었던 빈소는 각자의 혼령을 위로하는 조문객들에게 죽음의 방식을 생각하는 기회를 주었다. 관리사무실 직원이 말했다.
“사람들이 오늘 유달리 차분해 보여요.”
노무현의 자살은 이제 뿌리내리기 시작한 존엄사 정책을 흔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게 죽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민들을 위해 실시하고 있는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 교육 담당자들도 덤덤한 상태다.
죽음을 둘러싼 갈등을 풀어 나가는 가이드라인이 존엄사였는데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로 혼란을 겪었다. 노무현에 대한 비리 혐의 수사의 정당성 여부에 관계없이 자살을 존엄한 죽음으로 포장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투신자살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슴 떨리고 마음이 저려 오며 불면증을 일으키는, 정말 거칠기 한량없는 생명의 포기 방법이었다.
어느 종교도 자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도 그랬고 부처도, 성모 마리아도, 그리고 마호메트도 그랬다. 가톨릭 신도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가톨릭에서 영세를 받았다는 전직 대통령의 자살로 충격을 받았다. 국민장에서 그를 위한 추도 미사가 열린 데 대해 궁금증도 남아 있다.
전국에 있는 주요 사찰에는 일제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마련됐다. 전남 순천 송광사의 지장전에 마련된 분향소도 그중 하나였다. 아침 예불이 끝난 한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불교에서 자살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아, 부처님도 자살을 몹시 꾸짖었어요. 자살은 안되지요. 그러나 그분(노무현)은 이미 떠난 분 아닙니까. 영가가 구천을 헤매지 않도록 기도해 드릴 뿐이지요.”
젊은 스님과의 대화는 짧게 끝났다. 그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웅전으로 사라졌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노무현의 자살을 ‘정치적 존엄사’라고 표현하는 글이 떠돌아 다닌다. 그의 자살을 마음 아파하는 네티즌의 순수한 감정에서 나왔건, 또는 이른바 추종 세력들이 자살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냈건 이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장난이다.
말기환자들의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오랫동안 의료계와 학계, 일부 시민단체들이 쏟아 부은 엄청난 노력에 커다란 상처를 내고 있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결과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은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었다. 죽음을 통해서도 우리 가슴에 희망을 전달했다. 결국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결과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존엄사라 부르고 종교적으로는 선종이라고 즐겨 쓴다.
張英嬉(장영희) 서강대 교수도 최근 ‘좋은 죽음’을 통해 커다란 울림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노무현의 죽음은 이 사회가 극력 기피해 온 자살이었다. 어느 종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다.
노무현의 죽음이 ‘정치적 존엄사’라면 그의 집권 기간에 자살한 수만 명의 자살자들은 각각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南相國(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도 ‘정치적 또는 경제적 존엄사’라고 불러야 옳은가.
그렇다면 2005년 유태흥 전 대법원장의 자살은 또 무엇인가. 자연인이 된 그를 어떤 스캔들과 연결시켜 ‘사회적 존엄사’로 일컬어야 하는가.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통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이들의 불행한 죽음은 또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우리는 그런 억지를 쓸 수 없는 것이다.
존엄사에 ‘정치적’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존엄사’의 ‘존엄’을 해치는 행위에 가장 분노하는 그룹은 의료계 인사들이다. 그들은 일부 언론마저 노무현의 자살을 ‘멋있게 포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름 있는 정신과 의사들과 예방의학, 심리학 교수들이 참여하고 있는 한국자살예방협회의 곤혹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창립 6년을 맞은 이 협회가 그동안 벌여 온 자살예방 활동은 노무현 사태로 자유롭게 입을 열 수 없게 됐다. 개인을 넘어 사회병리의 문제로까지 영역을 확대해 왔던 자살 연구에 ‘전직 대통령 노무현 자살의 경우’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카렌 퀸란 사건
존엄사를 놓고 한국은 지난 10여 년 동안 소모적인 논쟁을 벌여 왔다. 그 논쟁에 끼어든 국내 언론과 일부 종교인들은 존엄사의 실체를 제대로 짚어 주지 못한 채 겉으로 빙빙 돌기만 해 많은 억측과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존엄사 내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197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카렌 퀸란 사건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뉴저지州(주)에 살고 있던 카렌은 어느 날 파티에 참석해 술을 마시고 그 후 정신안정제를 복용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뇌의 일부가 파괴되어 회복불능 판정이 내려졌고 인공호흡기 지원과 영양공급만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이른바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가톨릭 신자인 환자의 아버지는 딸이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인공호흡기 제거를 병원 측에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관할 고등법원은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내는 권한이 의사에게만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뉴저지 대법원은 상고심에서 카렌의 ‘죽을 권리’를 아버지에게 넘겨주었다. 아버지를 카렌의 후견인으로 인정하고, 후견인으로서 아버지가 다시 의사를 선정할 권리를 주었다. 담당 의사가 카렌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회복 가능성이 없어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도 된다는 의견에 이른다면 이 문제를 병원의 윤리위원회에 넘겨야 하고, 이 위원회에서 같은 결론이 나올 경우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도 좋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이 경우 아버지의 행위에 대해 법률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딸인 카렌에게 헌법상 보장된 프라이버시에 관한 권리에는 치료거부권도 포함되어 있으며, 아버지를 그녀의 대리인으로 보았다. 개인의 죽을 권리를 법률상의 이익보다 우선한 1976년의 존엄사 판결은 그해 내내 각국 주요 언론의 관심거리였다.
당시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존엄사라는 용어 대신 안락사라는 단어가 굵은 활자로 보도됐다. 미국이나 영국, 네덜란드, 일본, 호주 등에서 안락사를 인정하자는 운동이 펼쳐졌으며, 이와 반대로 종교 문화계에서는 생명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는 풍조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 의회가 세계 최초로 自然死(자연사)법(California Natural Death Act)을 만들면서 존엄사(Dying with Dignity)에 대한 오해도 풀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의료 현장에서 말기환자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자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무의미한 생명연장 치료에 반대하는 여론층이 두터워졌다. 생전 유언도 이때부터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존엄사의 조건 까다로워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2009년 5월에야 우리나라 서울대병원에서 인정한 사전의료지시서와 비슷한 제도가 미국에서 실시된 것이다. 당시 미국인들은 말기환자들이 임종 시기에 다가갈수록 그들이 마지막 시간을 편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래서 안락사라는 용어 대신 존엄사 또는 자연사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89년에 생전 유언(Living Will, 또는 사전의료지시서, 혹은 존엄사 선언서로 불림)을 전국 각주에서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표준 말기환자권리법(Uniform Rights of the Terminally III Act)이 제정됐다.
이 법의 제2조 생명유지 치료 실시에 관한 선언서(Declaration relating to use of life-sustaining treatment)에 따라 미국의 모든 주에 거주하는 18세 이상인 사람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게 연장시키는 조치를 보류 또는 중지해 줄 것을 의료진에게 당부할 수 있다. 원한다면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존엄사를 요청하는 생전 유언에 관한 서식을 다운받아 의료진에게 제출한다. 의료 대리인은 이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이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작성한 것임을 확인한 후 문서의 끝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다.
그러나 의료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존엄사의 조건은 매우 까다롭다.
▲생명유지 조치를 하지 않으면 단기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담당의사의 판단이 있어야 한다.
▲환자의 상태가 치료 불가능할 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확인이 앞서야 한다.
▲갖가지 생명유지 조치에 대해 환자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진단이 있어야 한다.
이 같은 확인 과정을 거쳤다면 언젠가 말기환자가 될 자신에게 생명연장 조치를 중단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존엄사 논의를 안락사로 몰아가는 일부 계층의 오해와 편견은 미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관련 용어나 법률 이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94년 오리건주 의회가 통과시킨 존엄사법(The Oregon Death with Dignity Act)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1997년에 발효된 이 법은 말기환자가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을 크게 넓혔다. 환자의 죽을 권리를 확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의사가 도와준 자살이나 자살 방조까지 존엄사로 인정한 것이다. 워싱턴주 의회도 작년에 오리건주와 거의 동일한 내용의 존엄사법을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의사의 이 같은 행위를 규정한 오리건주의 관련법은 분명 안락사 허용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오리건주는 법률의 이름을 존엄사법이라고 확실하게 못 박았다.
오리건주의 이 같은 돌출현상은 1993년 네덜란드에서 먼저 나타났다. 이 나라는 더욱 적극적인 안락사를 인정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관련법은 보통 안락사법(Law on Euthanasia)으로 불린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우 법의 정식 이름은 ‘생명의 종언과 자살방조에 관한 법률(Termination of Life on Request and Assisted Suicide Act)’이다.
한국인의 문화나 감성으로 이 법률 조문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잠시 숨을 멈추게 된다. 의사가 말기환자의 자살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여러 가지 의무사항이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권사상의 역사나 문화적 배경 및 생활의식이 판이하게 다른 그 나라에서는 우리와 다르게 ‘죽음의 質(질)’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의료계나 호스피스 운동을 펼치고 있는 관계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존엄사의 개념은 미국이나 유럽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말기환자가 마지막 임종 순간에 이를 때까지 환자에 대한 영양공급과 통증 치료 등을 계속하되 무작정 기계적인 인공호흡을 계속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존엄사라는 용어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자연사와 동일한 개념으로 거론되고 있다.
“선진 기술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연장”
연세의료원이 존엄사 소송과 관련해 논의를 거듭하면서 지난달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 낸 것은 존엄사의 일반적 요건과 절차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에 앞서 서울대병원이 자체적으로 사전의료지시서 제도를 도입한 것도 같은 의도에서다. 자연사, 즉 존엄사를 받아들이는 데 따른 세간의 오해와 우려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추구하고 있는 존엄사는 서구에 비해 낮은 수준의 개념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높은 수준의 인간의 존엄이며 생명을 다루는 데 더욱 신중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과 미국의 존엄사 개념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난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2007년의 일이다.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존경하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아내의 뜻을 받아들여 선택한 죽음의 방법이었다. 그는 폐렴으로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진 그의 아내에 대해 영양공급 중단 결정을 내렸다. 가족과 상의한 후 그는 고통스러워 하는 아내를 위해 물과 음식 공급마저 끊어 달라고 의료진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음의 아픔을 토로했다.
“선진 기술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연장시키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과 같은 위대한 신앙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은 보통의 미국 시민들에게도 쉽게 다가온다.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하는 일이 없었다. 존엄사 선택은 미국인들의 일상사였다. 그가 아내에게 취한 행동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극적 안락사’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를 ‘존엄사’라고 본다.
우리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무작정 미국이나 유럽의 존엄사 개념을 들이밀면서 “한국에서도 소극적 안락사 제도를 실시할 참이냐”라고 따지는 것은 논의의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한국에서 존엄사 논의가 몰매를 맞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이 터지면서부터다. 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환자를 퇴원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가족과 의사가 살인 및 살인방조죄 혐의로 기소됐다.
보라매병원 사건의 파장
아이로니컬하게도 담당 검사들이 우수 수사사건으로 표창받는 사이, 의료현장에서는 과잉진료 현상이 나타났다. 현대의학으로 치료 불가능한 말기환자에게 연명치료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환자들과 가족들의 고통은 더욱 커졌다.
의학적으로 자연사의 시기를 훨씬 넘긴 환자들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계속되고 식물인간도 늘어났다. 주요 대학병원 등의 응급실은 말기환자들의 대기실로 바뀌어갔다. 진짜 위급한 환자들의 치료가 매우 어려워졌다.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문제가 발생한 날로부터 무려 8년의 세월이 지난 2004년에 나왔다. 예상대로 담당 의료진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 판결 이후 의사들이 맹목적인 말기환자 연명치료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고, 이에 화가 난 일부 환자 가족들은 병원이 매출을 올리기 위해 말기환자들에게 불필요한 과잉진료를 거듭하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존엄사 논의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언론이었다. 2001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의사협회의 산하 단체인 대한의학회가 ‘임종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의료윤리지침’을 발표했을 때 언론은 이를 ‘소극적인 안락사’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의료계가 제기한 존엄사 문제가 초반부터 몰매를 맞자 의료계는 백기를 들었다. 언론은 의료계가 말하는 존엄사와 소극적인 안락사의 차이를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언론은 수많은 말기환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실태에 눈을 감았고, 그것이 언젠가는 자신들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을 같이 생각하는 이른바 生死(생사) 저널리즘에 눈을 뜨지 못한 한국 언론의 무지가 때로는 의료계와의 갈등을 가져왔다. 의료인들은 언론의 비판 대상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한국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지 벌써 13년째다. 선진국 문턱에서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오르내리고 세계 경기침체 속에서도 4만 달러 시대의 비전을 입에 달고 있다. 7년 전부터 웰빙 시대를 구가하면서 삶의 질을 찾기 시작한 우리는 지금까지 전혀 겪어 보지 못한 長壽(장수) 사회의 길목에서 암 등 불치병의 공포를 피해 다녔다. ‘삶의 질’ 틀 안에 ‘죽음의 질’이 있다는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해 왔다.
이런 습성은 고속성장 시대를 지나 중속 또는 저속성장 시대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정부가 죽음의 논의에 물꼬를 트지 못했고 정치가 눈을 감았으며 언론이 이를 바로 보지 못했다. 존엄사 논의가 수면 으로 떠오를 때마다 이를 망치로 내려치는 ‘두더지 잡기 게임’이 벌어져 합리적인 토론마저 불가능했다. 그러나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제야 우리는 ‘죽음의 질’을 찾아 나선 것이다.
2009년이 던진 ‘죽음’의 화두는 우리가 좀 더 진지하고 겸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법원의 존엄사 판결에 이어 나타난 노무현의 자살은 생명에 관한 문제,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보도록 요구한다. 한 나라의 國格(국격)과 각 개인의 인격에 관한 주요 이슈다. 문화의 수준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그저 정치적 수사로 갖춰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고통과 번민 속에서 이뤄진다. 여기에 의문이 있다면 당신이 직접 말기환자의 병동을 지켜보기 바란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의 간절한 눈빛을 읽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한 현장 학습을 마칠 수 있다.
전립선 말기암의 아버지를 간호하고 있는 딸을 본 적이 있는가. 요도관이 삽입된 아버지의 페니스를 소독하고 있는 딸의 마음도 헤아려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 아비의 눈물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존엄사를 거론할 자격이 있다.
죽음의 경계선에서 헤매고 있는 수많은 임종환자를 보고 있는 의사들이 정치적·이념적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냉정하게 생명을 다룬다. 그리고 환자의 존엄을 생각한다. 환자와 그들의 가족이 존엄 문제로 여전히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일부 의사들도 그런 경우가 있다. 한마디로 혼란스러운 상태다.
죽음을 둘러싼 포퓰리즘의 악용도 나타난다. 병원에서도 그렇고 거리에서도 그렇다. 자살을 존엄사로 둔갑시키는 선진국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만한 그릇에서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존엄사건 자살이건 죽음을 정치 도구화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 뿐이다. 존엄사는 존엄사고 자살은 자살이다. ‘실용정부’가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그의 자살을 존엄으로 위장 또는 포장하려는 움직임이야말로 위장된 실용 노선이다.
자살을 존엄사로 둔갑시키는 선진국은 없다
원리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존엄사도 소극적 안락사라고 주장하며 이를 생명 경시 현상으로 드높이 비판해 왔던 일부 종교인들마저 노무현의 자살을 추모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의 본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존엄사 정책이 뿌리내리는 시기에 우리나라는 당분간 OECD 국가 중 제1위의 ‘자살 선진국’이라는 오명을 계속 뒤집어쓰게 됐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과 죽음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죽음 교육’을 시작하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르치는 삶과 죽음에 관한 교육은 뜰에 핀 한 떨기 장미나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의 인생에서부터 시작한다.
꽃은 며칠 후에 지고 애완견도 10여 년이 지나면 우리 곁을 떠난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생명의 끝인 죽음도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자살예방 교육이기도 하다. 그런 바탕이 마련돼야 우리나라의 존엄사 정책도 뿌리내릴 수 있다.⊙
한국죽음학회가 오랜만에 마련한 심포지엄이었지만 예전과 달리 현장에서의 부산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참석자들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노무현의 자살 충격으로 ‘존엄사’를 다뤄야 하는 이날의 주제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이다. 그들은 그 그늘을 걷어낼 수 없었다.
접수창구에서 만난 한 수녀의 얼굴에서 민망스러워하는 표정을 읽었다. 그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며 수많은 말기 암 환자들의 죽음을 돌봐 왔던 성직자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 때문에 정말 혼란스러워요. 저희 병동 환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물어보는 거 있죠. 마음이 무겁고 고통스러우면 노무현 대통령처럼 저렇게 자살해도 되느냐고요.”
“그래서 뭐라고 답변하셨어요?”
“아, 그야 뭐 아니라고 했지요. 그래선 안된다며 머리를 흔들었어요. 그건 노무현 대통령이 크게 실수한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대답을 하고 나니 가슴이 두근두근했어요. 내가 잘못 이야기한 건 아닌지, 또 그렇게 설명한 것이 정말 맞는 것인지 헷갈렸어요. 또 다른 환자들이 같은 화제에 끼어들 눈치면 얼른 자리를 피해야 했습니다. 오늘 심포지엄에서는 혹시 그 이야기가 어떻게 나오나 궁금해서 나왔어요.”
18년 동안 ‘좋은 삶, 좋은 죽음’ 운동을 펼쳐 온 각당복지재단의 한 여성 회원도 당혹스러워했다. 대통령을 지낸 분의 자살로 ‘좋은 죽음’을 말하기가 겁나고, 앞으로 어떻게 ‘존엄사’ 논리를 꿰맞춰 가야 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盧武鉉의 죽음은 ‘촉수엄금’의 위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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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昌一 연세대 의료원장이 존엄사 소송 관련 기자회견문을 발표하고 있다. |
심포지엄 개회사에 이어 격려사가 나오고 주제발표가 시작됐지만 어느 누구도 노무현의 자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자살’뿐 아니라 ‘逝去(서거)’라는 단어도 등장하지 않은, 마치 엄격히 규율된 장소로 여겨졌다.
노무현 추모 열기는 회의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무현의 죽음은 ‘촉수엄금’의 위험물이었고 출입금지 푯말이 붙은 위험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최근 대법원의 존엄사 판결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분석하고 전망하는 심포지엄에 충실할 뿐이었다.
오히려 조심스러운 개회사와 기도, 격려사 등을 통해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짚어 갔으며 참석자들은 행간의 의미를 잡아 가는 재치를 살렸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이지요. 생명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 생명을 버릴 권한은 없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도, 더 크게 즐기려는 사람도 생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2009년의 화두는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혹독한 경기침체와 함께 ‘죽음’으로 시작했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있는 한 식물인간의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청구 소송에서 서울고등법원이 1심과 같은 내용의 존엄사 인정 판결을 내렸다. 죽음이 우리 사회의 현실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지난 2월이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숨겨 두었던 죽음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화제에 등장하고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들을 내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항소심 판결은 연명치료 중단의 요건으로 환자가 회생 가능성이 없고, 그 환자가 합리적으로 치료 중단의 뜻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하며, 의료진에 의해 치료중단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존엄사가 일부 반대자들이 우려하는 소극적 안락사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아름다운 죽음
존엄한 죽음에 관심이 더욱 쏠린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에 있었던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이었다. 그는 음식 섭취를 위해 배에 꽂은 관을 제외하고 마지막까지 모든 기계적 치료를 거부했다. 최후까지 스스로 호흡하면서 존엄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을 하직하는 자리에서 각막을 기증했다. 삶의 모습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듯 죽음의 모습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억누를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나도 저런 모습으로 떠나고 싶다’고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선종은 우리가 따르고 싶은 좋은 존엄사의 모델이었다.
우리에게는 외롭거나 고통스러울 때 추억하고 싶은 ‘좋은 죽음’이 별로 없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일 만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찾는 것을 우리는 게을리했다.
암을 포함한 불치병 말기환자들에게는 무작정 기계적인 연명치료를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현실이 우리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사실상 죽음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두려운 話頭(화두)였다.
더욱이 우리를 이끌어온 지도자들의 죽음은 비극적이었다.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이 그랬다. 생전의 업적이나 역사적 평가는 죽음의 추억과 또 다르다. 1979년 가을, 현직 대통령이었던 그가 비운의 총탄에 쓰러진 청와대 주변 궁정동 현장에는 아직까지 안내판조차 없다. 그런 죽음을 우리는 감추고 싶은 것이다.
2005년 정월. 대법원장을 지낸 兪泰興(유태흥)씨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겨울 밤 한강 다리 난간을 넘어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한때 대한민국의 법을 지휘했던 86세 노인이 투신자살을 감행했다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비극성과 참담함이 죽음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올 2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어두운 죽음의 추억을 걷어내고 아름답고 가슴에 껴안고 싶은 그림을 그려 주었다.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좋은 죽음의 추억은 힘의 원천이며 사랑의 샘물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의미 있는 삶의 열매다. 그런 죽음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까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사람들은 깊이 헤아리지 못한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마음을 읽는 데 독특한 시선을 갖고 있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유권자들이 좋은 삶과 마찬가지로 좋은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존엄사와 관련된 법안을 서둘렀다.
한나라당 金忠環(김충환) 의원이 ‘호스피스 완화의료 법률안’을 발의했다. 발의자는 그를 포함해서 40명이었다. 그의 발의에 앞서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金炯旿(김형오) 국회의장은 격려사를 통해 자신의 회한을 털어놓았다.
“제가 오래전에 어머님을 암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때 생명이 꺼져 가는 어머니 치료를 위해 수술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헛된 일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돌아가셨지요. 한참 후에 내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필요 없는 수술을 해서 어머님을 더욱 힘들게 하지 않았나 하고 늘 후회했습니다.”
김충환 의원에 이어 민주당의 全賢姬(전현희) 의원 등 12명이 ‘암 관리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그리고 한나라당의 申相珍(신상진) 의원 등 22명이 ‘존엄사법’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당의 金世淵(김세연) 의원도 ‘마지막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에 관한 법률’을 발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좋은 죽음을 바라는 국민의 삶을 지원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이 최근 6개월 사이에 경쟁적으로 입법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이들의 움직임은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지난 1월 ‘존엄사법’을 입법 청원하면서 발걸음이 빨라지는 듯했다. 경실련의 관련법안은 말기환자의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위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환자 스스로 중단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대법원이 존엄사와 관련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판결 속도전에 나선 것은 작년 여름부터였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인 식물인간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오기 훨씬 전이었다.
인공호흡기를 뗄 것인가,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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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엄사 인정을 위해 노력하는 의사들. 왼쪽부터 윤영호 박사, 허대석 교수, 손명세 교수. |
수많은 환자의 죽음을 직접 대면하고 있는 의료계의 현실은 더욱 급박했다. 존엄사 소송 당사자인 환자가 입원해 있는 세브란스병원 의사들은 잦은 모임을 가졌다. 지난 2월 연세의료원의 생명윤리위원과 자문위원들이 총집결했다. 제1, 제2 진료부원장이 나타났고 이어서 응급진료센터 소장, 간호담당 부원장, 중환자실장, 내과학 교수, 병원 사무국장, 인사팀장, 법무팀장까지 자리를 채웠다.
이날의 모임이 더욱 특이한 것은 전국의사협회와 병원협회의 부회장, 윤리학 교수와 철학교수 등의 모습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변호사와 목사, 한국죽음학회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고등법원의 존엄사 판결에 대항해 대법원에 상고할 것인지, 상고할 경우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됐다. 한 환자의 생명을 간신히 이어 주고 있는 인공호흡기를 뗄 것인가, 말 것인가. 뗀다면 어떤 기준에서 판단할 것인가를 놓고 병원당국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孫明世(손명세) 연세의료원 윤리위원장(연세대 의과대 예방의학교실 교수)은 한국 최초의 존엄사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하기 이전에 관련 위원회에서 이를 신중히 검토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의학적으로 볼 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망 과정에 있는 한 명의 환자를 놓고 연세의료원이 고뇌하고 있는 것은 그가 전국 3000~5000명으로 추정되는 식물인간과 6만여 명에 이르는 말기환자들의 운명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조직의 윤리위원회를 가동시킨 것도 그 같은 번민의 한 단면이다.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제1의 가치로 생각한다. 그래서 환자의 마지막 삶의 마무리를 둘러싸고 그들의 고뇌는 겹겹이 쌓이고 있다. 말기 암환자는 급격히 늘어나고 죽음을 둘러싼 갈등이 환자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 현실을 눈감을 수 없는 긴박감이 쌓이고 있다.
‘죽음’에 대한 토론장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해 15년여 동안 현장에서 뛰어온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許大錫(허대석) 교수는 최근 100여 명의 의대 교수들과 머리를 맞대고 죽음이라는 화두를 토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환자들의 ‘좋은 죽음’에 대한 견해들이 쏟아졌다. 환자에게 아름다운 삶이 무엇이며 또 아름다운 죽음은 어떠해야 되느냐고 스스로 묻고 답했다. 서울대병원 역사상 최초의 죽음의 토론장이었다.
이 모임에 이어 5월에 열린 서울대병원 의료윤리위원회는 말기 암환자의 심폐소생술 및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의료지시서를 공식적으로 통과시켰다. 이 의료지시서는 암환자가 생명을 연장시키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치료를 계속 받을 것인지에 대해 본인의 선택을 명시하게 되어 있으며, 환자가 특정인을 대리인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사전의료지시서가 마련된 것은 서울대병원이 처음이었다.
서울대병원에 이어 삼성서울병원과 아산병원 등도 비슷한 절차를 밟기 위해 내부 검토에 들어갔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등을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찾아 왔던 각 지방의 국립대학병원들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 21일에 있었던 대법원의 존엄사 판결은 우리 사회에 존엄사를 정착시키기 위한 절차의 시작을 알렸다.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바로 그날 그 시각에 필자는 윤영호 박사(국립암센터 기획조정실장), 이인영 교수(홍익대학교 법과대학)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청 상황실에서 ‘존엄한 죽음, 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영등포 구민 등 참석자들이 200여 석의 자리를 메우고도 넘쳐흘러 복도 쪽 출입문까지 이어졌다. 사회자가 말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인데도 우리는 입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죽음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됐으니 세상이 너무 달라졌습니다.”
참석자들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세상은 이토록 변했다. 그런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틀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자살했다는 뉴스는 이들의 가슴에 대혼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나는 이 소식을 전남 화순에 있는 전남대학병원에서 듣고 멍해졌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일부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워매, 자살이 무슨 말이랑가. 대통령이….”
자살을 ‘존엄한 죽음’으로 포장할 수는 없다
모두의 슬픔과 충격은 짧은 외침으로 압축됐다. 의사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살이라니.”
이 병원의 장례식장 조문객들도 차분했다. 이곳에서 6명의 망자를 모시고 있었던 빈소는 각자의 혼령을 위로하는 조문객들에게 죽음의 방식을 생각하는 기회를 주었다. 관리사무실 직원이 말했다.
“사람들이 오늘 유달리 차분해 보여요.”
노무현의 자살은 이제 뿌리내리기 시작한 존엄사 정책을 흔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게 죽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민들을 위해 실시하고 있는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 교육 담당자들도 덤덤한 상태다.
죽음을 둘러싼 갈등을 풀어 나가는 가이드라인이 존엄사였는데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로 혼란을 겪었다. 노무현에 대한 비리 혐의 수사의 정당성 여부에 관계없이 자살을 존엄한 죽음으로 포장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투신자살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슴 떨리고 마음이 저려 오며 불면증을 일으키는, 정말 거칠기 한량없는 생명의 포기 방법이었다.
어느 종교도 자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도 그랬고 부처도, 성모 마리아도, 그리고 마호메트도 그랬다. 가톨릭 신도들은 어리둥절해 한다. 가톨릭에서 영세를 받았다는 전직 대통령의 자살로 충격을 받았다. 국민장에서 그를 위한 추도 미사가 열린 데 대해 궁금증도 남아 있다.
전국에 있는 주요 사찰에는 일제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마련됐다. 전남 순천 송광사의 지장전에 마련된 분향소도 그중 하나였다. 아침 예불이 끝난 한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불교에서 자살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아, 부처님도 자살을 몹시 꾸짖었어요. 자살은 안되지요. 그러나 그분(노무현)은 이미 떠난 분 아닙니까. 영가가 구천을 헤매지 않도록 기도해 드릴 뿐이지요.”
젊은 스님과의 대화는 짧게 끝났다. 그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웅전으로 사라졌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노무현의 자살을 ‘정치적 존엄사’라고 표현하는 글이 떠돌아 다닌다. 그의 자살을 마음 아파하는 네티즌의 순수한 감정에서 나왔건, 또는 이른바 추종 세력들이 자살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냈건 이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장난이다.
말기환자들의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오랫동안 의료계와 학계, 일부 시민단체들이 쏟아 부은 엄청난 노력에 커다란 상처를 내고 있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결과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은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었다. 죽음을 통해서도 우리 가슴에 희망을 전달했다. 결국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결과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죽음을 존엄사라 부르고 종교적으로는 선종이라고 즐겨 쓴다.
張英嬉(장영희) 서강대 교수도 최근 ‘좋은 죽음’을 통해 커다란 울림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노무현의 죽음은 이 사회가 극력 기피해 온 자살이었다. 어느 종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다.
노무현의 죽음이 ‘정치적 존엄사’라면 그의 집권 기간에 자살한 수만 명의 자살자들은 각각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南相國(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자살도 ‘정치적 또는 경제적 존엄사’라고 불러야 옳은가.
그렇다면 2005년 유태흥 전 대법원장의 자살은 또 무엇인가. 자연인이 된 그를 어떤 스캔들과 연결시켜 ‘사회적 존엄사’로 일컬어야 하는가. 인터넷 자살 사이트를 통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이들의 불행한 죽음은 또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우리는 그런 억지를 쓸 수 없는 것이다.
존엄사에 ‘정치적’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정치적이다. ‘존엄사’의 ‘존엄’을 해치는 행위에 가장 분노하는 그룹은 의료계 인사들이다. 그들은 일부 언론마저 노무현의 자살을 ‘멋있게 포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름 있는 정신과 의사들과 예방의학, 심리학 교수들이 참여하고 있는 한국자살예방협회의 곤혹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창립 6년을 맞은 이 협회가 그동안 벌여 온 자살예방 활동은 노무현 사태로 자유롭게 입을 열 수 없게 됐다. 개인을 넘어 사회병리의 문제로까지 영역을 확대해 왔던 자살 연구에 ‘전직 대통령 노무현 자살의 경우’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카렌 퀸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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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존엄사 논란을 야기했던 카렌 퀸란. |
뉴저지州(주)에 살고 있던 카렌은 어느 날 파티에 참석해 술을 마시고 그 후 정신안정제를 복용했다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뇌의 일부가 파괴되어 회복불능 판정이 내려졌고 인공호흡기 지원과 영양공급만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이른바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가톨릭 신자인 환자의 아버지는 딸이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인공호흡기 제거를 병원 측에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관할 고등법원은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내는 권한이 의사에게만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뉴저지 대법원은 상고심에서 카렌의 ‘죽을 권리’를 아버지에게 넘겨주었다. 아버지를 카렌의 후견인으로 인정하고, 후견인으로서 아버지가 다시 의사를 선정할 권리를 주었다. 담당 의사가 카렌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회복 가능성이 없어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도 된다는 의견에 이른다면 이 문제를 병원의 윤리위원회에 넘겨야 하고, 이 위원회에서 같은 결론이 나올 경우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도 좋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이 경우 아버지의 행위에 대해 법률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딸인 카렌에게 헌법상 보장된 프라이버시에 관한 권리에는 치료거부권도 포함되어 있으며, 아버지를 그녀의 대리인으로 보았다. 개인의 죽을 권리를 법률상의 이익보다 우선한 1976년의 존엄사 판결은 그해 내내 각국 주요 언론의 관심거리였다.
당시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존엄사라는 용어 대신 안락사라는 단어가 굵은 활자로 보도됐다. 미국이나 영국, 네덜란드, 일본, 호주 등에서 안락사를 인정하자는 운동이 펼쳐졌으며, 이와 반대로 종교 문화계에서는 생명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는 풍조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 의회가 세계 최초로 自然死(자연사)법(California Natural Death Act)을 만들면서 존엄사(Dying with Dignity)에 대한 오해도 풀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의료 현장에서 말기환자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자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무의미한 생명연장 치료에 반대하는 여론층이 두터워졌다. 생전 유언도 이때부터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존엄사의 조건 까다로워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2009년 5월에야 우리나라 서울대병원에서 인정한 사전의료지시서와 비슷한 제도가 미국에서 실시된 것이다. 당시 미국인들은 말기환자들이 임종 시기에 다가갈수록 그들이 마지막 시간을 편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래서 안락사라는 용어 대신 존엄사 또는 자연사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89년에 생전 유언(Living Will, 또는 사전의료지시서, 혹은 존엄사 선언서로 불림)을 전국 각주에서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표준 말기환자권리법(Uniform Rights of the Terminally III Act)이 제정됐다.
이 법의 제2조 생명유지 치료 실시에 관한 선언서(Declaration relating to use of life-sustaining treatment)에 따라 미국의 모든 주에 거주하는 18세 이상인 사람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게 연장시키는 조치를 보류 또는 중지해 줄 것을 의료진에게 당부할 수 있다. 원한다면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존엄사를 요청하는 생전 유언에 관한 서식을 다운받아 의료진에게 제출한다. 의료 대리인은 이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이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작성한 것임을 확인한 후 문서의 끝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다.
그러나 의료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존엄사의 조건은 매우 까다롭다.
▲생명유지 조치를 하지 않으면 단기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담당의사의 판단이 있어야 한다.
▲환자의 상태가 치료 불가능할 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확인이 앞서야 한다.
▲갖가지 생명유지 조치에 대해 환자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진단이 있어야 한다.
이 같은 확인 과정을 거쳤다면 언젠가 말기환자가 될 자신에게 생명연장 조치를 중단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존엄사 논의를 안락사로 몰아가는 일부 계층의 오해와 편견은 미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관련 용어나 법률 이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94년 오리건주 의회가 통과시킨 존엄사법(The Oregon Death with Dignity Act)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1997년에 발효된 이 법은 말기환자가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을 크게 넓혔다. 환자의 죽을 권리를 확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의사가 도와준 자살이나 자살 방조까지 존엄사로 인정한 것이다. 워싱턴주 의회도 작년에 오리건주와 거의 동일한 내용의 존엄사법을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의사의 이 같은 행위를 규정한 오리건주의 관련법은 분명 안락사 허용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오리건주는 법률의 이름을 존엄사법이라고 확실하게 못 박았다.
오리건주의 이 같은 돌출현상은 1993년 네덜란드에서 먼저 나타났다. 이 나라는 더욱 적극적인 안락사를 인정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관련법은 보통 안락사법(Law on Euthanasia)으로 불린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우 법의 정식 이름은 ‘생명의 종언과 자살방조에 관한 법률(Termination of Life on Request and Assisted Suicide Act)’이다.
한국인의 문화나 감성으로 이 법률 조문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잠시 숨을 멈추게 된다. 의사가 말기환자의 자살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여러 가지 의무사항이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권사상의 역사나 문화적 배경 및 생활의식이 판이하게 다른 그 나라에서는 우리와 다르게 ‘죽음의 質(질)’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의료계나 호스피스 운동을 펼치고 있는 관계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존엄사의 개념은 미국이나 유럽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말기환자가 마지막 임종 순간에 이를 때까지 환자에 대한 영양공급과 통증 치료 등을 계속하되 무작정 기계적인 인공호흡을 계속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존엄사라는 용어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자연사와 동일한 개념으로 거론되고 있다.
“선진 기술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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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부흥전도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위해 존엄사를 선택했다. |
지금 우리나라에서 추구하고 있는 존엄사는 서구에 비해 낮은 수준의 개념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높은 수준의 인간의 존엄이며 생명을 다루는 데 더욱 신중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과 미국의 존엄사 개념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난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2007년의 일이다.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존경하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아내의 뜻을 받아들여 선택한 죽음의 방법이었다. 그는 폐렴으로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진 그의 아내에 대해 영양공급 중단 결정을 내렸다. 가족과 상의한 후 그는 고통스러워 하는 아내를 위해 물과 음식 공급마저 끊어 달라고 의료진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음의 아픔을 토로했다.
“선진 기술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연장시키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과 같은 위대한 신앙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은 보통의 미국 시민들에게도 쉽게 다가온다. 어느 누구도 그를 비난하는 일이 없었다. 존엄사 선택은 미국인들의 일상사였다. 그가 아내에게 취한 행동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극적 안락사’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를 ‘존엄사’라고 본다.
우리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무작정 미국이나 유럽의 존엄사 개념을 들이밀면서 “한국에서도 소극적 안락사 제도를 실시할 참이냐”라고 따지는 것은 논의의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한국에서 존엄사 논의가 몰매를 맞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이 터지면서부터다. 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환자를 퇴원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가족과 의사가 살인 및 살인방조죄 혐의로 기소됐다.
보라매병원 사건의 파장
아이로니컬하게도 담당 검사들이 우수 수사사건으로 표창받는 사이, 의료현장에서는 과잉진료 현상이 나타났다. 현대의학으로 치료 불가능한 말기환자에게 연명치료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환자들과 가족들의 고통은 더욱 커졌다.
의학적으로 자연사의 시기를 훨씬 넘긴 환자들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계속되고 식물인간도 늘어났다. 주요 대학병원 등의 응급실은 말기환자들의 대기실로 바뀌어갔다. 진짜 위급한 환자들의 치료가 매우 어려워졌다.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문제가 발생한 날로부터 무려 8년의 세월이 지난 2004년에 나왔다. 예상대로 담당 의료진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 판결 이후 의사들이 맹목적인 말기환자 연명치료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고, 이에 화가 난 일부 환자 가족들은 병원이 매출을 올리기 위해 말기환자들에게 불필요한 과잉진료를 거듭하고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존엄사 논의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언론이었다. 2001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대한의사협회의 산하 단체인 대한의학회가 ‘임종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의료윤리지침’을 발표했을 때 언론은 이를 ‘소극적인 안락사’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의료계가 제기한 존엄사 문제가 초반부터 몰매를 맞자 의료계는 백기를 들었다. 언론은 의료계가 말하는 존엄사와 소극적인 안락사의 차이를 알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언론은 수많은 말기환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실태에 눈을 감았고, 그것이 언젠가는 자신들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을 같이 생각하는 이른바 生死(생사) 저널리즘에 눈을 뜨지 못한 한국 언론의 무지가 때로는 의료계와의 갈등을 가져왔다. 의료인들은 언론의 비판 대상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한국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지 벌써 13년째다. 선진국 문턱에서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오르내리고 세계 경기침체 속에서도 4만 달러 시대의 비전을 입에 달고 있다. 7년 전부터 웰빙 시대를 구가하면서 삶의 질을 찾기 시작한 우리는 지금까지 전혀 겪어 보지 못한 長壽(장수) 사회의 길목에서 암 등 불치병의 공포를 피해 다녔다. ‘삶의 질’ 틀 안에 ‘죽음의 질’이 있다는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해 왔다.
이런 습성은 고속성장 시대를 지나 중속 또는 저속성장 시대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정부가 죽음의 논의에 물꼬를 트지 못했고 정치가 눈을 감았으며 언론이 이를 바로 보지 못했다. 존엄사 논의가 수면 으로 떠오를 때마다 이를 망치로 내려치는 ‘두더지 잡기 게임’이 벌어져 합리적인 토론마저 불가능했다. 그러나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제야 우리는 ‘죽음의 질’을 찾아 나선 것이다.
2009년이 던진 ‘죽음’의 화두는 우리가 좀 더 진지하고 겸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법원의 존엄사 판결에 이어 나타난 노무현의 자살은 생명에 관한 문제,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보도록 요구한다. 한 나라의 國格(국격)과 각 개인의 인격에 관한 주요 이슈다. 문화의 수준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그저 정치적 수사로 갖춰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고통과 번민 속에서 이뤄진다. 여기에 의문이 있다면 당신이 직접 말기환자의 병동을 지켜보기 바란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의 간절한 눈빛을 읽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한 현장 학습을 마칠 수 있다.
전립선 말기암의 아버지를 간호하고 있는 딸을 본 적이 있는가. 요도관이 삽입된 아버지의 페니스를 소독하고 있는 딸의 마음도 헤아려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 아비의 눈물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존엄사를 거론할 자격이 있다.
죽음의 경계선에서 헤매고 있는 수많은 임종환자를 보고 있는 의사들이 정치적·이념적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냉정하게 생명을 다룬다. 그리고 환자의 존엄을 생각한다. 환자와 그들의 가족이 존엄 문제로 여전히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일부 의사들도 그런 경우가 있다. 한마디로 혼란스러운 상태다.
죽음을 둘러싼 포퓰리즘의 악용도 나타난다. 병원에서도 그렇고 거리에서도 그렇다. 자살을 존엄사로 둔갑시키는 선진국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만한 그릇에서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존엄사건 자살이건 죽음을 정치 도구화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 뿐이다. 존엄사는 존엄사고 자살은 자살이다. ‘실용정부’가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그의 자살을 존엄으로 위장 또는 포장하려는 움직임이야말로 위장된 실용 노선이다.
자살을 존엄사로 둔갑시키는 선진국은 없다
원리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존엄사도 소극적 안락사라고 주장하며 이를 생명 경시 현상으로 드높이 비판해 왔던 일부 종교인들마저 노무현의 자살을 추모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의 본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존엄사 정책이 뿌리내리는 시기에 우리나라는 당분간 OECD 국가 중 제1위의 ‘자살 선진국’이라는 오명을 계속 뒤집어쓰게 됐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과 죽음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죽음 교육’을 시작하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르치는 삶과 죽음에 관한 교육은 뜰에 핀 한 떨기 장미나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의 인생에서부터 시작한다.
꽃은 며칠 후에 지고 애완견도 10여 년이 지나면 우리 곁을 떠난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생명의 끝인 죽음도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자살예방 교육이기도 하다. 그런 바탕이 마련돼야 우리나라의 존엄사 정책도 뿌리내릴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