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新기술] 정부 예산 1000억원 들여 개발한 ‘스마트 플로 라우터’ : 월간조선

지난 10월 23일 국무총리실을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에서 김종훈(金宗壎) 새누리당 의원은 임종용(任鍾龍) 총리실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간 정부에서 900억원 넘게 투입해 라우터라는 것을, 보안성이 좋은 것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함께 개발했는데 활용이 아주 미흡합니다. 더군다나 지금 세종시에 새로운 청사들이 많이 들어서게 되면 많은 형태의 전산장비가 들어갈 텐데, 우리가 개발한 기기라면 적극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임 실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네, 스마트 라우터, 이게 국비 727억원, 민간자본도 한 1000억원을 투입해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상용화도 했고요. 굉장히 우수한 제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제품들이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원방안을 강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국감장에서 언급된 ‘스마트 라우터’는 과연 무슨 장비일까. 또 이 기계를 개발한 정책적 의미는 무엇일까. 8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차세대 인터넷 기술 확보 위해 국가 전략사업 설정

2004년 당시 정부는 차세대 인터넷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수립했다. 각종 전략 사업 중에서 ‘중대형 라우터 국산화’가 핵심 사업으로 부각됐다. 중대형 라우터는 광대역융합망(유무선 통신망)에 가장 많이 쓰이는 장비로, 차세대 네트워크의 핵심장치다. 라우터(Router)란 인터넷상에서 최적의 경로(Route)로 정보를 주고받는 교환장비를 말한다. 쉽게 말해 ‘정보 교환기’인 셈이다. 길을 알려주는 차량 내비게이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 정부는 인터넷 신기술을 갖고 있던 미국 캐스피안사(社)를 전략적 공동개발 파트너로 선정했다. 국내 파트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었다.

500여억원의 예산을 투입하면서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광대역융합망에 적합한 라우터 원천기술도 개발했다. 그런데 2006년 들어 미국 회사 캐스피안의 경영수지가 악화되면서 마침내 파산했다. 그 결과 중대형 라우터 국산화 사업은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국내 기업이 캐스피안의 지식재산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동안 투입됐던 자금과 기회비용을 그대로 날릴 지경에 이르렀다. 아울러 차세대 인터넷 자립과 주도권 확보전략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최악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내 대기업을 접촉, 캐스피안 인수를 제의했으나 관심을 보인 회사는 없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모바일컨버전스’라는 국내 신생업체에 캐스피안 인수를 전격 제의했다. 모바일컨버전스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출신의 공학박사 이상화씨가 설립한 네트워크 전문업체였다.

이상화 사장은 “국부(國富) 유출을 최대한 막아 보겠다는 차원에서 캐스피안 인수를 결정했다”며 “캐스피안이 갖고 있던 라우터 원천기술과 기타 지적재산권을 모두 인수해 차세대 인터넷 기술 개발 포기라는 최악의 상황은 막았다”고 했다. 이 사장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자(子)회사 ‘세이블 네트웍스’도 설립했다. 라우터 국산화 사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던 것이다.

모바일컨버전스는 별도 자금 300여억원을 투입해 차세대 라우터 기술 개발에 몰두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도 추가예산을 투입했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이 사업에 들어간 정부 출연금은 총 973억원에 달했다.

라우터(Router)란?
인터넷상에서 최적의 경로(Route)로 정보를 주고받는 교환장비, 즉 정보교환 장치이다. 인터넷은 수많은 네트워크가 거미줄처럼 연결된 가상공간이다. 여기서 각각의 네트워크를 연결해 주는 것이 라우터인데, 지름길로 가느냐 아니면 둘러서 가느냐는 라우터의 성능에 따라 결정된다. 기존 라우터는 패킷 방식을 활용했다. 이는 정보를 전송하기 쉽게 일정 분량(패킷)만큼 잘라서 보내는 방식이다. 최신 기술은 플로(flow) 방식의 라우터이다. 네트워크가 정체되고 있는지 원활한지를 스스로 판단해 최적의 지름길로 정보를 교환하는 방식이다.

스마트 라우터, 네트워크戰에 최적화

미(美)공군 통제요원들이 경기도 오산 공군기지 지하벙커(전구항공통제본부)에서 컴퓨터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모바일컨버전스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마침내 ‘스마트 플로(Flow) 라우터’라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상용화에 성공했다. 스마트 플로 라우터는 기존 패킷 방식(정보를 일정 분량만큼 잘라서 전송하는 방식)의 라우터와 달리, 네트워크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해 막히는 곳을 피해 원활한 길을 찾아 정보를 주고받는 신(新)개념의 라우터이다. 접속제어 기능을 통해 보안성도 한층 강화했다. 이상화 박사는 “최근에는 차세대 IP 네트워크 솔루션도 개발했고 라우터의 암호화 기술도 고도화시켰다”며 “이 과정에서 3건의 원천기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모바일컨버전스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새로운 라우터를 개발하자, 세계적인 네트워크 장비업체인 시스코와 ALU, 에릭슨 등도 플로 기반의 라우터를 개발했다. 중국의 네트워크 개발업체 화웨이도 제품을 개발, 출시를 앞두고 있다고 한다. 이상화 사장은 “전 세계적으로 네트워크 장비 시장의 규모는 1500억 달러가량 되는데 국내 업체가 지금 해외시장에 뛰어들지 않으면 외국 기업을 따라잡기 더욱 힘들다”고 했다.

현재 세계 네트워크 장비 시장은 소수 글로벌 업체가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2010년 8월 작성된 정부 관계부처 합동회의 자료에 따르면, 인터넷 데이터를 전달하는 네트워크 장비는 북미(北美) 시스코와 중국 화웨이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동전화와 무선인터넷 데이터를 전달하는 네트워크 장비는 유럽의 에릭슨이, 광케이블 및 무선랜 시장은 일본 회사가 시장을 주무르고 있다.

국내 라우터 시장도 몇 개의 다국적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그러나 신개념의 플로 기반 라우터 시장은 경쟁 초기 상황이라고 한다. 이상화 사장은 “우리 회사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다국적기업의 국내 시장 잠식을 막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며 “현재 일부 군(軍)부대와 우정사업본부 네트워크망에 우리가 개발한 라우터를 설치,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운용·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신기술을 토대로 보안 통신을 가능케 하는 솔루션을 개발했고, 좀비 등 유해(有害) 트래픽을 라우터에서 선제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을 최초로 개발해 서울시에 구축했다”고 전했다. 모바일컨버전스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공동으로 개발한 네트워크 장비의 성능이 시장에서 검증됐다는 것이다.

이상화 사장에 따르면, 국내 기술로 개발한 스마트 플로 라우터는 향후 국방부가 구현할 NCW(Net Centric Warfare·네트워크 중심의 戰鬪)에 적용될 최적의 기술이라고 한다. 기존 라우터로는 이 같은 전투 수행이 불가능하며 차세대 라우터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기관, 외국 장비 過多 사용

문제는 2014년부터 2020년까지 4조6000억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군(軍) 전략사업인 TICN(전술정보통신체계) 구축사업. 국방부와 방위사업청, 한국국방과학연구소가 주도하고 있는 TICN은 군 네트워크 시스템과 관제 체계, 통신 단말기 등을 혁신하는 대형 국책사업이다. 이 사업에 각종 네트워크 장비가 투입되는데 라우터 부문의 경우, 국내 제품이 배제되고 인지도가 높은 외국 장비가 들어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0월 국회 국방위의 국군기무사령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김진표(金振杓) 민주당 의원은 기무사에 설치된 외국산(産) 네트워크 장비의 보안상 문제점을 거론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소속 전병헌(田炳憲) 의원도 방송통신위원회의 외국산 장비 과다(過多) 구매를 문제 삼았다. 방통위는 지난 3년간 239건의 네트워크 장비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국산장비 구매실적은 단 한 건에 불과했다. 전병헌 의원은 “네트워크 장비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며 “정보통신 분야를 관장하는 방통위의 보안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상화 모바일컨버전스 사장은 “미국과 중국은 국가안보와 정보통신산업 보호를 위해 자국(自國) 회사에 특혜까지 준다”며 “외국산 네트워크 장비에 크게 의존하는 국내상황을 조속히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