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丹州(단주)의 사신이 대궐에 나와 하직했다. 回回(회회) 사문(이슬람 승려) 都老(도로)가 처자를 데리고 함께 와서 조선에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집을 주어 정착하도록 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7년(1407년) 1월 17일의 기록이다. 조선 초기, 이 땅에 머물렀던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록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조선이란 나라가 결코 ‘鎖國(쇄국)’이란 틀 안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도로’란 인물의 일대기를 추적해 보면 태종 12년(1412년) 2월 24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발견된다.
“회회 사문 도로에게 금강산 순흥, 김해 등지에서 수정을 캐도록 했다. 도로가 일찍이 우리나라의 수정으로 여러 물건을 만들어 바쳤는데 임금이 좋다고 칭찬했다. 도로가 아뢰기를 ‘조선은 산천이 수려하여 진귀한 보화가 많으니 저에게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도록 허가하면 얻을 게 많을 것입니다.’”
이슬람 지도자가 조선에 와서 광산업 면허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임금은 이 요청을 허락했고, 도로는 한 달 후 수정 300근을 캐서 임금에게 바쳤다(태종 12년 3월 29일).
도로 외에도 이슬람 지도자 多羅(다라)와 이슬람 사람 西地(서지) 등은 임금에게 쌀을 하사받았다. 이들은 조선 초기 우리 사회 도처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고, 고유의상과 풍습,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으며 살았다. 이들의 흔적은 世宗(세종)의 즉위식 석상에서도 발견된다.
“종실과 문무백관이 경복궁 뜰에 늘어섰다. 임금(세종)이 근정전에 나오니 여러 신하가 절을 올려 하례하고, 성균관 학생과 회회 노인, 회회 승도들도 모두 참여했다.”
태조 2년(1393년) 6월 16일엔 暹羅斛國(섬라곡국)이란 나라에서 張思道(장수도) 외 20명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와 소목과 한약재인 속향 1000근과 토인(원주민) 2명을 조정에 바쳤다. 섬라곡국은 오늘날의 태국이다. 사신이 태국 원주민을 선물로 바치자 太祖(태조) 李成桂(이성계)는 그들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요즘 용어로 설명하면 외국인에게 청와대 경호 업무를 맡긴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엔 동남아인과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중국인, 왜인(일본인), 野人(야인·만주 여진족)들이 귀화해 정착한 向化人(향화인)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당시 동북쪽 국경선 지역에선 조선과 여진 부족 간 무력 충돌이 잦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야인들은 우리나라와 접경한 지가 오래되었고 국경 안에 사는 자도 있지만 衣食(의식)에 욕심이 있을 뿐이다. 우리 태조께서는 잠저(즉위 전에 살던 집) 때부터 개국에 이르도록 야인들을 어루만져 여진, 올량합, 올적합 등의 무리 중 시위를 삼은 자가 자못 많았다. 우리도 성질이 순량하고 무술 재주가 뛰어나며 그 친족이 국경 안에 사는 자이면 시위를 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세종 9년 9월 18일)
조선 조정은 여진족들을 달래기 위해 여진족 추장 가족 중 건강하고 무예가 뛰어난 인물을 볼모로 서울에 보내도록 협약을 맺었고, 보내온 이들을 왕실 수비를 담당하는 시위대에 배치했다.
조선 처녀와 결혼하고 과거에도 급제
부작용도 있었다. 조선에서 융숭한 대접을 해 준다는 사실이 여진에 알려지면서 각 부락이 너도나도 한양으로 가겠다며 몰려온 것이다. 오늘날 중국 거주 조선족들이 한국에 오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계속 야인들의 수가 증가했고, “귀화 오랑캐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광해군 1년 4월 10일)”란 말까지 나오자, 조선은 결국 출입국 심사를 강화해 유자격자에게만 ‘비자’를 발급, 자질이 불량한 자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범죄자는 가차없이 송환하기 시작했다.
편법 사례까지 발생했다. 광해군 6년(1614년) 7월 25일 실록엔 우리 백성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오랑캐 마을에 들어가 사는 사례가 기록됐다. 숙종 26년(1700년) 10월 12일 고창 선비 유신우는 “향화인도 우리 백성과 똑같기 때문에 세금과 요역을 부과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향화인은 옛날 중국 사람으로서 표류하여 우리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우리 백성 된 지가 몇백 년이 되었는데 늘 향화인이라 일컬으며 어업을 하는 자나 농사를 짓는 자 모두 身役(신역·몸으로 치르는 노역)이 없습니다. 호적을 정리하여 갯가에 거주하는 자는 수군에, 육지 거주자는 육군으로 입대시키면 수만 명의 정예 병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조선 처녀와 외국인들의 혼인 사례도 숱하게 등장한다.
“임금이 명하기를 ‘서울에 머물러 시위하고 있는 금서징아와 금오광아 등에게 아내를 얻도록 하라.’”(세종 5년 12월 12일)
외국인 중 일정한 학문의 경지에 오르면 과거 응시를 허락해 관직을 제수받은 사례가 상당수에 이른다.
태조 5년(1396년) 11월 23일에는 조선에 귀화한 위구르인 長壽(설장수)를 계림(경주)의 관향으로 삼게 했다. 설장수는 위구르의 고창(천산산맥 남쪽 기슭)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 승문감 벼슬을 살았던 아버지 遜(설손)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설씨 가문은 문장이 뛰어나 여러 편의 시를 남겼고, 그 시의 일부가 金宗直(김종직)의 시선집 <靑丘風雅(청구풍아)>에 기록돼 있다.
태종 초기 귀화인인 唐誠(당성)도 조정으로부터 성씨를 받았다. 절강성 명주 출신으로, 원나라 말기에 귀화해 통역관으로 활약한 그는 태종 13년(1413년) 11월 3일 사망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된 그의 卒記(졸기·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다.
귀화 외국인을 청와대 경호실장에 임명한다면?
“당성이 죽었다. 당성은 절강의 명주 사람이었는데 원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해 동쪽으로 왔다. 성질이 부지런하고 조심스러웠으며 나이 70이 넘어도 정력이 쇠퇴하지 않았다. 무릇 사대 문자가 있을 때는 직접 살피고 가다듬어 조금도 실수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믿고 맡겼다. 본향을 밀양으로 내려주었으며, 죽을 때 나이가 77세였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문하고 쌀과 콩 각각 40석과 종이 150권을 내려주었다.”
귀화 후 창원을 본향으로 삼은 왜인 平順(평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로 활동했다. 귀화한 위구르인 설장수의 친척 설순은 그의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설순은 慶壽(설경수)의 아들이다. 성품이 질박하고 성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책을 많이 읽고 사물을 잘 기억하여 임금이 그를 존중했다. 병을 앓고 있어 의원 평순에게 치료하게 했더니 평순이 뜸을 잘못 떠서 죽었다. 임금이 노하여 평순을 조사하니, 형률에 의하면 참형이지만 임금이 ‘평순은 귀화한 사람의 아들이니 형률대로 죄를 줄 수는 없다’ 하여 곤장 100대를 쳤다. 평순은 귀화 왜인 평원해의 아들이다.”
귀화 외국인 중 고위 관직에 오른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성종 즉위년(1469년) 12월 19일 기록에 의하면 향화인으로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으로 金尙美(김상미), 童淸周(동청주), 浪三波(낭삼파), 太好時乃(태호시내) 등의 이름이 보인다. 여진족 김파다상은 성종 3년(1472년) 조선에 귀화, 첨지 벼슬을 얻었고, 성종 5년(1474년) 가선대부 도만호(각 도의 수군을 거느리던 종3품 무관)에 올랐다.
외국인 중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은 童淸禮(동청례) 장군이다. 그는 조선에서 시위로 살던 여진족 동소로가무의 아들로, 조선에 귀화한 후 성종 시절 무과에 급제했고, 연산군 시절엔 왕실 경호대장,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경호실장에 올랐다.
연산군 3년(1497년) 6월 12일 임금은 여진족 추장들을 회유하기 위해 동청례를 북방에 파견하면서 선물로 부채 130자루를 준비했다. 그는 당시 衛將(위장·조선 전기 중앙군인 오위에 속해 있던 종2품의 무관직)에 임명됐는데, 궁에서 쫓겨난 궁녀와 간통하는 바람에 사헌부가 “오랑캐에게 위장 직책을 맡길 수 없다”는 보고를 임금에게 올리기도 했다.
연산군이 쿠데타로 물러나고 중종 정권이 출범한 후, 그는 여러 사람에게 차별대우를 받았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와중에 도가 지나친 발언을 해 역모죄로 체포됐다. 중종은 “엄히 국문하라”는 명을 내렸고, 동청례는 결국 중종 3년(1508년) 12월 3일 능지처참을 당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지난 5월 1일 기준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지난 7월, 독일 출신의 귀화 한국인 李參(이참)씨가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임명돼 한국 최초의 외국계 공기업 사장이 됐다. 月刊朝鮮 이번호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임원” 기사에 따르면, 국내 상위 50대 기업의 총 임원 4370명 중 외국인은 53명(1.2%)이라고 한다.
동청례의 말로는 비록 비참했지만, 조선 조정의 요직에 올라 국정을 논하는 등 여진족들에겐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 만약 현재 한국에서 귀화한 외국인이 청와대 경호실장에 올랐다면 우리 국민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동청례를 비롯한 수많은 外人(외인)의 인생은 조선시대가 오늘날에 비해 인종적 차원에서 훨씬 더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글로벌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7년(1407년) 1월 17일의 기록이다. 조선 초기, 이 땅에 머물렀던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록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조선이란 나라가 결코 ‘鎖國(쇄국)’이란 틀 안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도로’란 인물의 일대기를 추적해 보면 태종 12년(1412년) 2월 24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발견된다.
“회회 사문 도로에게 금강산 순흥, 김해 등지에서 수정을 캐도록 했다. 도로가 일찍이 우리나라의 수정으로 여러 물건을 만들어 바쳤는데 임금이 좋다고 칭찬했다. 도로가 아뢰기를 ‘조선은 산천이 수려하여 진귀한 보화가 많으니 저에게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도록 허가하면 얻을 게 많을 것입니다.’”
이슬람 지도자가 조선에 와서 광산업 면허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임금은 이 요청을 허락했고, 도로는 한 달 후 수정 300근을 캐서 임금에게 바쳤다(태종 12년 3월 29일).
도로 외에도 이슬람 지도자 多羅(다라)와 이슬람 사람 西地(서지) 등은 임금에게 쌀을 하사받았다. 이들은 조선 초기 우리 사회 도처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고, 고유의상과 풍습,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으며 살았다. 이들의 흔적은 世宗(세종)의 즉위식 석상에서도 발견된다.
“종실과 문무백관이 경복궁 뜰에 늘어섰다. 임금(세종)이 근정전에 나오니 여러 신하가 절을 올려 하례하고, 성균관 학생과 회회 노인, 회회 승도들도 모두 참여했다.”
태조 2년(1393년) 6월 16일엔 暹羅斛國(섬라곡국)이란 나라에서 張思道(장수도) 외 20명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와 소목과 한약재인 속향 1000근과 토인(원주민) 2명을 조정에 바쳤다. 섬라곡국은 오늘날의 태국이다. 사신이 태국 원주민을 선물로 바치자 太祖(태조) 李成桂(이성계)는 그들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요즘 용어로 설명하면 외국인에게 청와대 경호 업무를 맡긴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엔 동남아인과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중국인, 왜인(일본인), 野人(야인·만주 여진족)들이 귀화해 정착한 向化人(향화인)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당시 동북쪽 국경선 지역에선 조선과 여진 부족 간 무력 충돌이 잦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야인들은 우리나라와 접경한 지가 오래되었고 국경 안에 사는 자도 있지만 衣食(의식)에 욕심이 있을 뿐이다. 우리 태조께서는 잠저(즉위 전에 살던 집) 때부터 개국에 이르도록 야인들을 어루만져 여진, 올량합, 올적합 등의 무리 중 시위를 삼은 자가 자못 많았다. 우리도 성질이 순량하고 무술 재주가 뛰어나며 그 친족이 국경 안에 사는 자이면 시위를 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세종 9년 9월 18일)
조선 조정은 여진족들을 달래기 위해 여진족 추장 가족 중 건강하고 무예가 뛰어난 인물을 볼모로 서울에 보내도록 협약을 맺었고, 보내온 이들을 왕실 수비를 담당하는 시위대에 배치했다.
조선 처녀와 결혼하고 과거에도 급제
부작용도 있었다. 조선에서 융숭한 대접을 해 준다는 사실이 여진에 알려지면서 각 부락이 너도나도 한양으로 가겠다며 몰려온 것이다. 오늘날 중국 거주 조선족들이 한국에 오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계속 야인들의 수가 증가했고, “귀화 오랑캐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광해군 1년 4월 10일)”란 말까지 나오자, 조선은 결국 출입국 심사를 강화해 유자격자에게만 ‘비자’를 발급, 자질이 불량한 자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범죄자는 가차없이 송환하기 시작했다.
편법 사례까지 발생했다. 광해군 6년(1614년) 7월 25일 실록엔 우리 백성이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오랑캐 마을에 들어가 사는 사례가 기록됐다. 숙종 26년(1700년) 10월 12일 고창 선비 유신우는 “향화인도 우리 백성과 똑같기 때문에 세금과 요역을 부과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향화인은 옛날 중국 사람으로서 표류하여 우리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우리 백성 된 지가 몇백 년이 되었는데 늘 향화인이라 일컬으며 어업을 하는 자나 농사를 짓는 자 모두 身役(신역·몸으로 치르는 노역)이 없습니다. 호적을 정리하여 갯가에 거주하는 자는 수군에, 육지 거주자는 육군으로 입대시키면 수만 명의 정예 병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조선 처녀와 외국인들의 혼인 사례도 숱하게 등장한다.
“임금이 명하기를 ‘서울에 머물러 시위하고 있는 금서징아와 금오광아 등에게 아내를 얻도록 하라.’”(세종 5년 12월 12일)
외국인 중 일정한 학문의 경지에 오르면 과거 응시를 허락해 관직을 제수받은 사례가 상당수에 이른다.
태조 5년(1396년) 11월 23일에는 조선에 귀화한 위구르인 長壽(설장수)를 계림(경주)의 관향으로 삼게 했다. 설장수는 위구르의 고창(천산산맥 남쪽 기슭)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 승문감 벼슬을 살았던 아버지 遜(설손)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설씨 가문은 문장이 뛰어나 여러 편의 시를 남겼고, 그 시의 일부가 金宗直(김종직)의 시선집 <靑丘風雅(청구풍아)>에 기록돼 있다.
태종 초기 귀화인인 唐誠(당성)도 조정으로부터 성씨를 받았다. 절강성 명주 출신으로, 원나라 말기에 귀화해 통역관으로 활약한 그는 태종 13년(1413년) 11월 3일 사망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된 그의 卒記(졸기·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다.
귀화 외국인을 청와대 경호실장에 임명한다면?
“당성이 죽었다. 당성은 절강의 명주 사람이었는데 원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해 동쪽으로 왔다. 성질이 부지런하고 조심스러웠으며 나이 70이 넘어도 정력이 쇠퇴하지 않았다. 무릇 사대 문자가 있을 때는 직접 살피고 가다듬어 조금도 실수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믿고 맡겼다. 본향을 밀양으로 내려주었으며, 죽을 때 나이가 77세였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문하고 쌀과 콩 각각 40석과 종이 150권을 내려주었다.”
귀화 후 창원을 본향으로 삼은 왜인 平順(평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로 활동했다. 귀화한 위구르인 설장수의 친척 설순은 그의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설순은 慶壽(설경수)의 아들이다. 성품이 질박하고 성실하여 거짓이 없으며, 책을 많이 읽고 사물을 잘 기억하여 임금이 그를 존중했다. 병을 앓고 있어 의원 평순에게 치료하게 했더니 평순이 뜸을 잘못 떠서 죽었다. 임금이 노하여 평순을 조사하니, 형률에 의하면 참형이지만 임금이 ‘평순은 귀화한 사람의 아들이니 형률대로 죄를 줄 수는 없다’ 하여 곤장 100대를 쳤다. 평순은 귀화 왜인 평원해의 아들이다.”
귀화 외국인 중 고위 관직에 오른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성종 즉위년(1469년) 12월 19일 기록에 의하면 향화인으로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으로 金尙美(김상미), 童淸周(동청주), 浪三波(낭삼파), 太好時乃(태호시내) 등의 이름이 보인다. 여진족 김파다상은 성종 3년(1472년) 조선에 귀화, 첨지 벼슬을 얻었고, 성종 5년(1474년) 가선대부 도만호(각 도의 수군을 거느리던 종3품 무관)에 올랐다.
외국인 중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은 童淸禮(동청례) 장군이다. 그는 조선에서 시위로 살던 여진족 동소로가무의 아들로, 조선에 귀화한 후 성종 시절 무과에 급제했고, 연산군 시절엔 왕실 경호대장,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경호실장에 올랐다.
연산군 3년(1497년) 6월 12일 임금은 여진족 추장들을 회유하기 위해 동청례를 북방에 파견하면서 선물로 부채 130자루를 준비했다. 그는 당시 衛將(위장·조선 전기 중앙군인 오위에 속해 있던 종2품의 무관직)에 임명됐는데, 궁에서 쫓겨난 궁녀와 간통하는 바람에 사헌부가 “오랑캐에게 위장 직책을 맡길 수 없다”는 보고를 임금에게 올리기도 했다.
연산군이 쿠데타로 물러나고 중종 정권이 출범한 후, 그는 여러 사람에게 차별대우를 받았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와중에 도가 지나친 발언을 해 역모죄로 체포됐다. 중종은 “엄히 국문하라”는 명을 내렸고, 동청례는 결국 중종 3년(1508년) 12월 3일 능지처참을 당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지난 5월 1일 기준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지난 7월, 독일 출신의 귀화 한국인 李參(이참)씨가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임명돼 한국 최초의 외국계 공기업 사장이 됐다. 月刊朝鮮 이번호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임원” 기사에 따르면, 국내 상위 50대 기업의 총 임원 4370명 중 외국인은 53명(1.2%)이라고 한다.
동청례의 말로는 비록 비참했지만, 조선 조정의 요직에 올라 국정을 논하는 등 여진족들에겐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 만약 현재 한국에서 귀화한 외국인이 청와대 경호실장에 올랐다면 우리 국민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동청례를 비롯한 수많은 外人(외인)의 인생은 조선시대가 오늘날에 비해 인종적 차원에서 훨씬 더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글로벌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