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특집 / 위기의 민주주의

이슬람국가로 회귀하는 터키

에르도안, 2016년 불발 쿠데타 이후 ‘제왕적 대통령’으로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이슬람주의자 에르도안, 아타튀르크 이후의 세속주의 노선 이탈… 2071년까지 이슬람 국가로 복귀 추구
⊙ 2016년 불발 쿠데타 후 ‘쿠데타 세력’ 소탕 명목으로 15만명 해직, 5만명 체포
⊙ 아들과 돈세탁에 대해 통화한 내용 공개되자 관련 경찰·검찰·판사 해임
⊙ 나토 회원국이면서도 러시아에 접근, 미국과 신경전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現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터키공화국 건립 96주년 기념일인 지난 10월 29일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국부 아타튀르크의 靈廟를 참배했다. 사진=AP/뉴시스
  1997년 12월 12일 터키 남동부 도시 시이르트에서 당시 이스탄불 시장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현 터키 대통령)은, 터키를 아타튀르크(무스타파 케말・터키 초대 대통령)의 세속적 개혁을 따르는 사람들과 이슬람법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는 무슬림 공동체라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19세기 터키의 민족주의자 시인 지야 괴칼프의 시를 읊었다.
 
  “모스크는 우리의 막사, 돔은 우리의 헬멧, 미나렛은 우리의 총검(銃劍), 신자(信者)는 우리의 군인.”
 
  이 시 네 구절 낭송의 파장은 컸다. 에르도안은 터키의 세속적 정체성(正體性)을 위반한 죄로 기소되어 형법상 ‘종교와 인종에 바탕을 둔 혐오와 증오 선동죄’가 인정되어, 시장직을 잃고 10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4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20년이 조금 지난 2018년 2월 6일, 대통령 에르도안은 여자아이 둘과 남자아이 한 명을 앞세우고 국회 연단에 섰다. 그리고 놀랍게도 머리를 히잡으로 가린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로 말문을 열더니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시구가 생각나지 않자 잠시 멈춰 울먹였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에르도안은 계속하라고 격려했다. 아이는 이내 에르도안을 20년 전 감옥으로 보낸 문제의 그 구절을 생각해내고 이어갔다. 아이가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를 두 번 반복하면서 암송을 마치자 참석자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터키는 이렇게 바뀌었다.
 
 
  무스타파 케말의 독립전쟁
 
아타튀르크는 아랍 문자 대신 라틴 문자를 도입하는 등 급진적인 서구화 노선을 추구했다.
  터키의 전신 오스만튀르크는 이슬람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오늘날 아라비아반도 대부분과 이라크・시리아・이집트・이스라엘을 아우르는 중동(中東) 지역, 알제리까지 이어진 북아프리카, 헝가리・발칸반도・그리스・우크라이나 일부를 포함해서 오스트리아 빈 코앞에 이르기까지 남동유럽 대부분을 장악한, 말 그대로 근대 이전 최강의 무슬림제국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할 듯하던 오스만제국은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지 못한 채 ‘유럽의 환자’로 조롱받으며 쇠락하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지배하던 땅을 모조리 상실했다. 1920년 승전국이 세브르조약으로 요리한 오스만제국은 아나톨리아(소아시아)만 간신히 유지하는 처지로 몰락했다. 말 그대로 휴지 조각처럼 제국이 분해되었다. 터키어를 쓰는 사람들이 사는 터키민족국가 건립의 가능성이 다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나톨리아반도는 열강(列强)과 열강이 인정한 여러 민족이 나누어 가졌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중 갈리폴리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 대군의 이스탄불 진격을 좌절시킨 무스타파 케말(1881~1938)은 앙카라를 기반으로 세브르조약을 거부하면서 열강의 터키 나눠 갖기를 막고 실지(失地) 수복에 나섰다. 무스타파 케말의 군대는 동부에서 아르메니아를 물리치고 남부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세력을 축출했으며, 그리스인도 몰아냈다.
 
  그 결과 굴욕적인 세브르조약 대신 1923년 7월 로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와 함께 새로운 터키민족국가가 성립되었다. 그해 10월 의회는 터키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무스타파 케말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600년에 걸친 기나긴 오스만제국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에게는 서구(西歐)는 배척해야 할 이교도(異敎徒)가 아니라 배워야 할 선진 문명 세계였다. 1926년 10월 그는 “문명의 세계가 우리 앞에 있다. 따라잡는 수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서구처럼 산업화를 목표로 하고 서구 배우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오스만제국 몰락의 주된 원인이 낡은 과거의 이슬람 문화라고 보았다.
 
  케말은 개혁을 위해 예언자 무함마드의 계승자로서, 예언자가 남긴 공동체의 정치적 지도자로 존속된 칼리파 제도를 없앴다. 남성의 전통적인 모자 착용이나 터번, 여성의 히잡을 금지했다. 이슬람법 대신 스위스・이탈리아・독일을 모델로 한 민법・형법・상법을 도입하고, 아랍어 문자 대신 라틴 문자를 채택했다. 서양처럼 성(姓)을 도입하여 모두가 성을 갖도록 했다. 그 본보기로 자신이 제일 먼저 아타튀르크, 즉 ‘튀르크의 아버지’라는 성을 만들었다. 예배를 알리는 소리도 아랍어가 아니라 터키어로 하도록 규정했다.
 
 
  軍部, 케말주의의 수호자
 
  아타튀르크의 새로운 터키는 울라마(이슬람 신학자・법학자)를 ‘게리지’, 즉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서 미개해 미신(迷信)에 좌지우지된다고 보았다. 오스만제국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세속적인 기관이나 제도도 모두 종교에 복속시켰다. 울라마는 신심(信心)의 상징이었고, 국가 업무에서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1925년 2월 25일 의회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다. 미신적이고 구태의연하고 개화되지 못한 울라마의 행위를 제어하고, 전통적으로 이들이 맡아오던 일을 이제는 문명화(서구화)된 방식을 익힌 새로운 엘리트들이 이끌어가게 했다.
 
  아타튀르크는 새로운 터키를 공화주의・국가주의・국민주의・세속주의・민족주의・개혁주의라는 6가지 원칙 위에 세웠다. ‘케말주의(Kemalism)의 6가지 화살’로 불린 이 원칙은 1935년 공화인민당 강령에 실렸고, 1937년 헌법에 포함되어 1980년대까지 적용되었다.
 
  〈1. 공화주의: 술탄과 측근이 권력을 쥐었던 과거 오스만제국의 엘리트 정치구조를 모두가 참여하는 구조로 바꾼다.
 
  2. 국가주의: 국가가 경제와 사회 발전을 주도한다.
 
  3. 국민주의: 계급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
 
  4. 세속주의: 종교의 힘을 제어하고 공공의 영역에서 분리하고, 서구의 과학적 사유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종교학교와 기관을 폐쇄하고 음주를 합법화하며 아랍이나 이슬람적 제도나 문화를 축출한다.
 
  5. 민족주의: 오스만제국의 범이슬람주의를 버리고 터키 민족 정체성을 대의로 채택한다.
 
  6. 개혁주의: 오스만제국의 구태의연한 제도와 관습을 일소한다.〉
 
  “공격이 아니라 죽으라고 명령한다. 우리가 죽어가는 동안 다른 부대와 사령관이 와서 우리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라며 부하들에게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을 역설한 갈리폴리전투의 영웅 아타튀르크의 열렬한 추종세력인 군부(軍部)는, 아타튀르크 사후(死後)에도 케말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했다. 정치인들이 조금이라도 아타튀르크의 건국정신을 흔들기라도 하면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혼란을 정리하고 다시 병영으로 돌아갔다(1960, 1971, 1980, 1997년). 무엇보다도 세속주의는 금과옥조(金科玉條)였다.
 
 
  복지당의 등장
 
  그러나 지금 아타튀르크의 터키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보는 군부도 어쩌지 못하고 있다.
 
  1954년 2월 26일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가난한 집안 출신 에르도안은 방과 후에 터키식 베이글로 불리는 시미트를 팔았다. 그는 축구를 좋아하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3년 종교학교인 이스탄불 하티프학교를 졸업한 데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인물이고, 이때부터 청년학생회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에르도안은 22세(1976년) 때 훗날 이슬람주의자로서 터키 최초의 총리가 된 네지메틴 에르바칸이 이끄는 이슬람민족구원당의 지역 청년조직을 맡았다. 정치활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무슬림 문화에 대한 애착은 ‘이스탄불 교통 당국에서 일할 때 턱수염을 밀고 오라는 상사의 요구를 거부해 직장을 잃었다’는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1983년 에르바칸이 복지당을 만들자 합류한 에르도안은 1984년 베이올루 지구당위원장, 1985년 이스탄불 지구당위원장이 되었다. 1991년에는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의원으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아타튀르크의 터키는 1995년 총선에서 이슬람주의를 표방한 복지당이 제1당이 되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복지당은 1996년 연립정권을 구성하여 터키 역사상 처음으로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화살’을 피해 집권당이 되었다. 그러자 군부가 경고장을 날렸다. 네지메틴 에르바칸 총리는 이에 굴복해 군부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학교에 등록하지 못하도록 8년 의무교육 실시, 대학에서 여성의 히잡 착용 금지처럼 이슬람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이런 양보에도 불구하고 에르바칸 총리는 군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사임했다.
 
  복지당은 1998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해산되었다. 집권당을 위헌정당으로 해산하는 결정 뒤에는 군부의 쿠데타 위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르바칸은 5년 동안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1994년 복지당 소속으로 이스탄불 시장이 된 에르도안은 전국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시내 주류(酒類) 판매 금지 조치를 취해 논란을 일으켰다. 앞서 언급한 시 낭송 때문에 세속주의 위반으로 기소되어 징역형을 살아야만 했다. 그 역시 에르바칸과 마찬가지로 5년 동안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2071년까지 이슬람 국가로 복귀 목표
 
  복지당이 해산되자 에르도안은 2001년 새로운 이슬람주의 정당으로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했다. 그러나 논란을 피하고자 새로운 당은 종교적 정당이 아니라 ‘보수주의’ 노선의 정당이라고 강조했다. 당의 상징도 전구로 채택했다.
 
  정의개발당은 2002년 총선에서 역사적인 압승을 거두고 집권당이 되었다. 에르도안은 정치활동 금지령 때문에 정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다가 이듬해 아내의 고향인 시이르트에서 열린 재선거에서 당선되어 화려한 성공가도에 들어섰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아타튀르크가 맞춰놓은 세속주의 터키 시계를 되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에르도안은 정의개발당을 두고 이슬람 정당이 아니라면서, 자신들을 ‘무슬림민주주의자’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정의개발당은 보수적인 민주주의 정책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주변의 우려를 잠재우려는 언변에 불과하다.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이 터키를 장악한 이래 걸어온 역정을 보면 방점은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가 아니라 그 반대의 길에 찍혀 있다.
 
  1071년 만지케르트전투에서 로마노스 4세의 비잔티움제국 군대를 물리치고 아나톨리아반도로 진입한 셀주크튀르크는 이후 전개된 오스만제국의 영광의 초석을 닦았다. 아나톨리아반도의 튀르크화(化)를 시작한 것이다. 지금 오스만튀르크 범(汎)이슬람제국의 영광은 색이 바랬지만, 이를 다시 살리려는 의지가 에르도안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에르도안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그러한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에르도안은 ‘2071년 세대’를 키우고자 한다. 2071년 세대는 적어도 아이를 셋은 낳도록 장려한다. 그의 지지자들이 내건 플래카드는 “1071년 아나톨리아, 2071년 세계”라는 구호를 담고 있다. 에르도안은 ‘경건한 세대’를 길러 2071년 선조(先祖) 셀주크와 오스만 수준으로 터키의 수니 이슬람을 확장시킨다는 목표가 있다.
 
 
  최초의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를 모르고 승리의 질주를 한 에르도안은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총리직을 지켜왔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의개발당이 나름 경제성장과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 확충에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은 의회에서 선출하던 대통령을 국민 직선(直選)으로 뽑도록 개정한 헌법에 따라 실시된 2014년 대선(大選)에서 승리해, 터키 역사상 최초의 국민 직선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대통령의 권한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에르도안은 2017년 헌법을 다시 개정해 더 많은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그 결과,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라는 ‘제왕적 대통령’이 됐다. 그에게는 ‘술탄’(이슬람 국가의 군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행정, 사법, 비상사태 선포(최대 6개월), 국회 해산 등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한 권한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었다. 미국・프랑스 같은 선진국의 대통령제와 달리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는 무한(無限)권력을 에르도안이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냈다.
 
  이렇게 강력한 대통령직에 다시 도전한 에르도안은 2018년 선거에 승리해 새로이 5년 임기를 시작했다. 대통령직은 모두 3회 연임(連任)할 수 있는데, 2014~2018년 임기를 마쳤기에 이번 두 번째 임기가 끝나는 2023년 다시 도전하면 2028년까지 대통령직에 머물 수 있다. 에르도안에게 도전할 만큼 유력한 경쟁자를 찾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여당 내에서 에르도안의 후임을 꼽기는 더욱 힘들다. 그 누구도 에르도안의 무한질주를 막기 어려운 현실이다. ‘경건한 세대’를 길러 2071년까지 과거 오스만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에르도안의 비전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 것은 현재 그가 매우 강력한 힘을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발 쿠데타
 
지난 2016년 7월 15일 군부 쿠데타 당시, 이스탄불 시내에 진주한 쿠데타군의 뒤에서 터키 국기를 흔들며 쿠데타 반대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이 불발 쿠데타는 에르도안이 절대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사진=AP/뉴시스
  에르도안의 정치 역정을 돌아보면 위기를 맞이해도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몰려도 너무나 당당하게 빠져나온다. 그리고 지지자를 휘어잡는 카리스마, 자기 중심적인 언행(言行), 적을 끝까지 분쇄하는 집요함을 보면 그가 왜 아타튀르크가 정초(定礎)한 터키의 세속주의 국시를 몹시 심하게 흔들고 있음에도 스러지지 않고 무려 16년째 권좌(權座)를 지키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1994년 이스탄불 시장 선거에 출마할 때 에르도안은 손가락에서 결혼반지를 빼서 청중과 취재기자들에게 보이더니 “이 반지가 내 전(全) 재산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5년 후인 1999년 누군가 내가 대단히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내가 죄악을 범한 것으로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만큼 자신이 청렴하고 정직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2014년 2월 돈세탁과 관련해 아들과 전화통화한 녹취가 공개됐고, 이를 부인하면서 관련 경찰・검찰・판사를 해임했다.
 
  2016년 7월 불발된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군의 체포를 모면한 에르도안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어나 달라”고 호소했다. 수많은 국민이 국기를 흔들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쿠데타군은 전차(戰車)로 차량을 깔아뭉개고, 무장 헬기로 국회 의사당에 로켓포를 쏘았다. 하룻밤 사이에 300여 명이 죽었다. 결국 쿠데타는 ‘민중의 힘’에 의해 좌절됐다. 에르도안과 주요 인사들이 쿠데타군의 체포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 지난 100년간 국가를 주도해온 군부가 그렇게 어설픈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 등에 대해 풍설이 난무했다. 하지만 어쨌든 여기까지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였다. 하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에르도안은 쿠데타 세력의 척결을 외치면서 반대세력 일소(一掃)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정적(政敵)인 이슬람 신학자 펫훌라흐 귈렌과 그 추종자들을 ‘펫훌라흐 테러조직(FET)’으로 낙인을 찍고, 그들을 모조리 쿠데타 세력으로 몰았다.
 
  현재까지 귈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정치적 탄압은 상상을 초월한다. 15만명 이상의 교사・교수・공무원・군인・법조인・언론인 등이 해직되었고, 5만명이 쿠데타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들 모두가 가담자가 아닌 것은 더 말할 필요 없다. 비판 언론들은 폐간되거나, 정부 혹은 친(親)정부 기업에 인수됐다.
 
  해외에 거주하는 터키인들 사이에 “터키 정부가 반(反)정부 인사라고 자의적(恣意的)으로 판단할 경우에는 여권 갱신이나 새로운 여권 신청을 거주지 대사관에서 해주지 않는 경우가 적잖다”는 풍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불이익을 두려워해 귀국을 포기하고 캐나다같이 망명을 잘 받아주는 곳으로 난민 신청을 하러 가는 터키인 수가 늘어나고 있다.
 
 
  대학 졸업장을 둘러싼 의혹
 
  현재 귈렌은 미국에서 영주권자로 거주 중인데, 2016년 쿠데타 이후 에르도안이 미국 정부에 귈렌을 터키로 강제 출국시키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에르도안이 기존 이슬람주의 정당을 떠나 정의개발당을 만들도록 설득한 사람도, 그를 중동의 변화를 이끌 개혁의 희망으로 서구 세계에 소개한 사람도 바로 귈렌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지지층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귈렌은 종교 간 대화와 다문화(多文化) 공존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며 터키 무슬림의 성숙한 내적 변화를 교육을 통해 이끌어왔고, 그의 미래 지향적 교육의 혜택을 받고 지지한 사람들은 사회 곳곳에서 지도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에르도안이나 지지층은 고등 교육 혜택을 그다지 받아보지 못한 채 거칠고 투박한 삶을 살아온 보통 사람 내지 가난한 사람들이다. 에르도안의 최종 학력 역시 2년제 아크사라이 상업고등학교다. 이 학교는 1983년에 마르마라대학교와 병합하지만, 에르도안은 그 전인 1981년에 졸업했다. 그럼에도 대통령 출마 자격 중 고등교육, 즉 4년제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규정에 맞추기 위해 그는 끝까지 마르마라대학교 졸업장을 내밀었고, 의혹을 품은 기자들의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았다. 혹자는 귈렌에 대한 집요한 공격은 어쩌면 에르도안이 귈렌과 추종자들에 대해 평소 갖고 있는 열패감(劣敗感)의 발로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미국과의 신경전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에르도안은 시리아의 쿠르드를 두고 미국과 오랜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결국 본인이 원하는 대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어 시리아 북동부에 안전지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토(NATO) 회원국이라는 터키 지위에는 신경 쓰지 않고 러시아 제어에 긴요한 인지르릭 공군기지를 두고 미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2016년 쿠데타 때 미국이 쿠데타를 도왔다고 비난하면서, 미국 공군기의 이착륙을 통제해 훈련에 불편을 끼치고 있다고 한다. 핵무기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라 미국은 고민이 깊다.
 
  게다가 에르도안은 러시아 푸틴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S-400 방공시스템 구매를 희망해, 이를 제지하려는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터키가 나토를 이미 떠났다고 평가하면서 자유 세계의 안보를 걱정하는 전문가들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서구를 향해 달려온 아타튀르크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에르도안. 지난 11월 10일은 아타튀르크 사망 81주년 애도일이었다. 에르도안은 기념식에서 “모든 힘을 다해 그로부터 물려받은 우리 공화국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고 강화할 것”이라며 국부(國父)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지만, 두 사람의 터키가 같은 것인지 수군거리는 소리는 잦아들지 않는다. 지금 터키의 현실을 보면서 “더 이상 뒤처지지 않아요. 다시는 뒤처지지 않아요. 나를 믿으세요, 무스타파 케말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라는 할림 야즈올루의 시심(詩心)에 동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
조회 : 1038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9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도서출간 배너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