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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통령(大統領)이란?

북한, 천안함 사과 직전까지 갔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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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6~12월 국정원-보위부 간 남북대화…, 2011년 류경 보위부 부부장 서울 방문
⊙ “이후 남북관계 경색된 것과 비교하면, (천안함 사과, 정상회담 논의)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전이 됐었다” (당시 북한과 접촉했던 국정원 고위인사)
⊙ 이명박, 원자바오에게 남북접촉에서 논의된 북한의 사과 수준 설명, 원자바오 통해 이 얘기 들은 김정일 격노… 북한 대남부서, 책임 모면하려고 베이징 접촉 관련 내용 폭로
  이명박(李明博) 정권 시절이던 2010년 6월 이후 국가정보원과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사이에 비밀접촉이 있었고 이를 통해 북한이 천안한 폭침 사건에 대한 사과 직전까지 갔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국정원과 보위부 간의 비밀접촉은 2015년 나온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언급이 된 바 있다. 다만 이 회고록에는 당시 남북한 접촉 라인의 실명이나 논의 내용에 대해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북한 보위부, 2009년 6월 대화 제의
 
  먼저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을 보자.
 
  〈2009년 11월,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의 비공식적 접촉과 통일부-통일전선부 접촉이 결렬되자 북한은 곧바로 ‘탄탄한 비선(秘線) 구축’을 제안해 왔다. 나 역시 비공식적인 비선 접촉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협의를 진행했다.
 
  2009년 연말부터 서로의 메시지가 오갔다. 그러나 논의가 진행되고 있던 와중에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졌다. 2010년 5월 북한 어뢰의 잔해가 발견되고 북한의 소행이란 증거가 드러남에 따라 5·24 조치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북한은 2010년 6월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 고위급 인사 명의로 메시지를 보내 왔다. … 2010년 7월 국정원 고위급 인사가 방북했다. 당시 우리 입장은 확고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기존에 우리가 제시한 원칙 이외에도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북측은 “(당사자가 아닌) 동족으로서는 유감이라 생각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같은 제3국처럼 유감을 표시하겠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남의 상갓집에 들러 조의를 표하는 수준의 사과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였다.
 
  나는 그 같은 애매한 표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 젊은이 46명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천안함 사태를 그같이 넘어갈 수는 없었다. 향후 우리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악순환의 고리는 반드시 끊어야 했다. 그것이 북한의 ‘유감’ 수준의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였다. 우리 측이 천안함 폭침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자 북한은 쌀 50만톤을 요구했다. 그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류경, 연평도 포격 직후 서울 다녀가
 
  여기서 말하는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4가지 원칙’이란 다음 네 가지였다.
 
  첫째, 남북정상회담을 국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
 
  둘째, 회담 성사를 조건으로 북한을 선(先)지원할 수 없다.
 
  셋째, 북핵(北核) 문제 진전과 남북관계의 현안 해결에 중대한 계기가 되어야 한다.
 
  넷째, 지금까지 회담이 북한의 식량난, 비전향 장기수 등 북쪽의 인도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면, 앞으로의 남북정상회담은 납북자, 국군포로 등 우리의 인도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언급한 북한 보위부 ‘고위급 인사’는 2011년 5월 숙청된 류경 보위부 부부장이었다.
 
  이후에도 국정원-보위부 접촉은 이어졌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직후인 그해 12월 5일 류경이 서울을 방문했다. 대좌 1명, 상좌 1명, 통신원 2명을 대동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의 만남을 원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류경은 “장군님 메시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 대통령이 왜 우리를 만나지 않느냐”고 거칠게 항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온 메시지는 ‘친서’가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결국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양측은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는 예정보다 하루 더 서울에 머문 후에 돌아갔다.
 
  어떻게 해서 남북은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는 수준까지 갔을까?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한 인사는 “당시 남북대화에 참여했던 이들로부터, ‘북한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과 관련해 거의 자신들의 책임을 상당한 정도로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수준까지 갔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상당히 구체적 진전 있었다” (국정원 고위인사)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명박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언급된 ‘국정원 고위급 인사’와 통화를 했다. 그는 “국정원법상 재직 중 알게 된 사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면서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북한과 접촉했던 ‘국정원 고위급 인사’가 맞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국정원에서 있었던 일을 나와서 얘기할 수 없어서 공식적으로 인터뷰할 수는 없습니다.”
 
  — 당시 북에서 내려왔던 ‘보위부 고위급 인사’가 숙청된 류경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 당시 북한이 상당한 수준으로 천안함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수준의 표현까지 합의를 했었습니까.
 
  “모두가 궁금해하는 사안이라는 건 알지만, 그거야말로 얘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된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전이 됐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북한의 사과 수준에 대해 ‘천안함 폭침에 대해 북한이 제3자적 입장에서 유감을 표시해서는 안 되며, 북한이란 주체가 드러날 만한 문구여야 한다’는 기준을 언급했습니다. 그 정도 수준까지 갔었습니까.
 
  “스무고개 하는 것 같아 미안한데, 구체적인 내용은 얘기할 수 없습니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의하면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진전됐습니까.
 
  “결국 성사되진 않았지만 상당한 진전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국정원 내에서 극소수에게만 알렸고, 이명박 대통령 주변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현 정권에서도 궁극적으로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현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는지 여부를 떠나서 민간에 나와 있는 사람으로서 정상회담과 관련해 누(累)가 되는 말은 삼가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 이후 북한은 남북대화에 늘 반대급부를 요구해 왔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원칙을 세우려 노력했습니다. 그런 노력은 알리는 것이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아주 좋은 얘기입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북한을 대했습니다. 지금도 보세요. 리선권인가 나와서 하는 말이 ‘남북한 간에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북한이 하는 말은 우리와 용어는 같아도 뜻하는 바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이 말하는 분위기 조성은 ‘뭘 달라’는 얘기입니다. 북한은 이번에도 필경 남북경협이니 뭐니 하면서 뭘 달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과 접촉할 때에도 북한은 ‘분위기 조성’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남북대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분위기 조성용으로 뭘 준다고 하면 그건 유연성이 아니라 원칙이 훼손되는 것입니다.”,
 
  — 류경이 2010년 12월에 와서 며칠이나 있다 갔습니까.
 
  “그건 물어보지 마세요.”
 
  — 혹시 그때 류경과 함께 왔던 북한군 대좌 중에 리선권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리선권은 안 왔습니다.”
 
 
  류경의 숙청
 
  류경은 서울을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듬해 1월 초 갑자기 체포, 처형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1년 초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와 접촉한 북측 인사가 공개 처형됐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가 북한 관계자를 만나 그의 소식을 물었더니 “교통사고로 당분간 운신할 수 없다”거나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후 그의 처형과 관련해 “한국에 기밀을 누설했다”거나 “서울에 가서 이명박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가 실패했는데, 즉각 평양으로 돌아오지 않고 하루 더 머물러 있었고, 이에 따라 김정일 위원장이 크게 화를 냈다”는 보고가 있었다. 당시 권력세습을 준비하고 있던 김정은 측과 군부에 의해 제거됐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류경의 숙청 사실은 2011년 5월 20일 자 《조선일보》에서도 확인된다. 이날 《조선일보》는 〈류경이 1월 초 김정일의 호출을 받고 관저에 들어가다가 호위총국 친위대에 체포된 뒤 호위총국 내에서 취조를 받고 극비리에 처형됐다〉고 보도했다. 이듬해 7월 28일 《조선일보》는 〈류 부부장은 평양으로 돌아간 후 반대파로부터 ‘대남전략을 남측에 노출했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자택에서 거액의 달러가 발견돼 간첩으로 몰려 곧바로 총살됐다〉고 보도했다. 류경의 숙청을 주도한 것은 김정은 집권을 위한 정지(整地)작업을 하고 있던 장성택 및 군부 강경파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위부를 장악한 류경을 제거하기 위해 남북대화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빌미로 삼았다는 것이다.
 
 
  김정은, 베이징 접촉에 대해 듣고 격노
 
2011년 5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정상회담. 왼쪽부터 원자바오 중국 총리, 간 나오토 일본 총리, 이명박 대통령.
  류경의 숙청 이후에는 베이징에서 고위급 접촉이 있었다. 2011년 5월 양측의 고위급 실무자들이 중국에서 만나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에 대한 북한의 사과 수준과 표현 문제를 논의했다. 북한측은 좀 더 논의하겠다며 돌아갔다.
 
  하지만 이 논의는 곧 파탄이 났다. 그해 5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렸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권유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원자바오에게 남북한 간에 실무자 접촉이 진행됐다고 알려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나오는 얘기다.
 
  〈사흘 후인 2011년 5월 25일, 원자바오는 베이징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오찬을 가졌다. 그날 밤 하루만 묵은 후 김정일은 평양으로 돌아갔다. 평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김정일은 우리 측과의 베이징 접촉에 대해 매우 화를 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원자바오가 내게 들은 남북 간의 정상회담과 천안함 폭침 사과 논의를 김정일에게 전달한 것이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북한은 천안함 폭침을 자신들이 자행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해 왔는데, 원자바오로부터 천안함 폭침 사과 얘기를 들었다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원자바오와 김정일이 만나고 일주일 뒤 북한은 남북간에 진행됐던 베이징 비공개 회담의 내용을 왜곡하여 발표했다. 남한이 정상회담을 구걸하며 돈 봉투를 건넸다고 억지를 썼다. 또한 천안함과 연평도 관련 사과를 애걸했다고 주장했다. …
 
  정부는 비공개 회담에 대한 북한의 주장이 왜곡됐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자 북한은 회담 내용 녹취록을 공개하겠다고 수차례 협박했다. 이에 우리 정부가 녹취 내용을 공개하라고 대응하자, 북한은 더 이상 공세를 펴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는 “당시 대북접촉에 관계했던 인사들로부터,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김정일과 만난 자리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남북간 접촉 과정에서 북한이 천안함 폭침에 대한 책임을 상당히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자, 그때까지 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보고를 받지 못하고 있던 김정일이 격노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베이징 접촉에 대해 폭로하고 나선 것은 이 문제로 김정일로부터 질책을 받은 후 자기들이 살겠다고 한 일”이라고 말했다.
 
 
  남북대화는 다시 시작됐지만…
 
  이명박 정권 시절의 남북대화는 이렇게 해서 끝났다. 그로부터 8년이 흘렀다.
 
  1월 9일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사이에 열린 이 회담에서는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군사적 긴장상태 해소 노력 등에 합의했다. 지난 1월 1일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대화를 제안한 지 열흘도 안 돼서 이루어진 일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어 온 대화 호소에 북한이 드디어 응답한 것이다. 그에 대한 청구서는 바로 날아왔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회담 다음 날인 1월 10일 〈군사적 대결은 긴장격화의 근원〉이라는 정세 논평을 통해 〈남조선 당국은 외세와의 모든 핵전쟁 연습을 그만둬야 하며 미국의 핵장비들과 침략 무력을 끌어들이는 일체의 행위를 집어치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이 대화라는 ‘시혜(施惠)’를 베풀었으니, 반대급부를 내놓아야 마땅하다는 투다. 이런 버릇을 심어 준 것은 김대중 정권이었다. 6·15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비밀송금을 해 준 이후, 북한은 이를 당연시하게 된 것이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내려 했다. 이명박 정권이 내세웠던 요구는 독립자존의 정신을 가진 국가라면 당연한 원칙이었다. 그 원칙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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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조썬    (2018-01-21)     수정   삭제 찬성 : 97   반대 : 32
거짓조썬 믿고 거른다. 천안함 폭침이 거짓이란거 너만 모르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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