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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한반도

대한민국 무너지다(1948~20XX) (3/3)

“서울 시민 여러분! 백두산의 김정은이 왔습네다”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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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정찰위성 평안북도 구성에서 이상 징후 발견
⊙ 위기 때 한국 대통령은 장기간의 유럽 순방 떠나 지휘부 공백
⊙ 백악관, 주한 미국인 철수 결정 … 영국·일본도 뒤따라
⊙ 중국·러시아, 미국의 북한 억제 요청 무시
⊙ KTX 예매표 동나고 인천공항 등에 외국인 대피객 몰려
⊙ 증권 폭락 … 전쟁 냄새 맡은 외국 종군기자들 서울로 입성
⊙ 국무총리의 대(對)국민담화에도 불안 가중
⊙ 대연평도·백령도 초토화, 원전(原電)·포스코 등 주요 기간산업망도 미사일 맞아
⊙ 한미 공군의 반격 … 참수작전 시작
⊙ 평양 김일성 동상과 만수대 김일성 시신 폭격 … 북한 주요 갱도 파괴
⊙ 작전계획 5015 발동
⊙ 은신했던 김정은 나타나 ‘핵 보복’ 위협
⊙ 흔들리는 민심 … 평화 원하는 촛불집회 시작, 미국 여론도 돌아서
⊙ 북한, 방사포와 장사정포로 반격 … 한 광역시에 핵 미사일 투하
⊙ 대통령은 항복 선언 후 외국 망명

첫째, 이 시나리오의 스토리는 허구(虛構)다.
둘째, 이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전부 가상이며 특정인과 관련이 없다.
셋째, 이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문서들, 예를 들어 작전계획 5015 같은 것들은
        모두 군사기밀로서, 인터넷이나 언론에 공개된 것들을 이용한 것이다.
        무기의 제원(諸元)들도 공개된 것들이다.
훈련 중인 미국의 B-1 폭격기와 한국군의 F-15K, F-16 전투기.
  # D데이 오전 10시
 
  괌의 미군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새벽 6시부터 스텔스 전략폭격기 B-2 6대가 차례로 발진했다. 길이 5km의 활주로 2개를 보유한 앤더슨 공군기지에는 이날 비상이 걸렸다. 한국의 2개 섬과 주요 산업시설을 북한이 미사일로 공격했다는 사실이 즉각 전해졌다.
 
  스텔스 전략폭격기 B-2에 이어 ‘죽음의 백조’라고 불리는 B-1B ‘랜서’가 60t의 폭탄을 싣고 B-2의 뒤를 이었다. 채 4시간이 안 돼 한반도 영공에 진입했을 때 한국군의 F-15K, F-16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사전에 수차례 훈련한 대로 김정은을 제거하기 위한 ‘참수(斬首)작전’을 시작했다.
 
 
  # D데이 오전 11시
 
  미군은 평양 공습의 선봉을 한국공군 F-15K에 맡겼다. 한국공군 1호기 조종사는 슬램(SLAM-ER) 미사일 첫발을 평양 만수대 김일성 동상에 겨냥했다. 잠시 후 높이 20m인 이 황금색 동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종사는 두 번째 발을 김일성의 시신이 있는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으로 쏘았다. 시신 부패를 막는 데 연간 8억원을 쏟아부었다는 궁전과 액체 용액 냄새로 가득한 김일성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한국공군 F-15K가 선공(先攻)을 하자 미 공군 B-2가 사전에 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 일제히 J-Dam미사일을 발사했다. 정오가 되기 전 북한의 군사 목표물 1016곳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이어 B-1B ‘죽음의 백조’ 2대가 나란히 비행하며 북한을 융단폭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의 무도(舞蹈)였다.
 
  한국공군의 F-15K, KF-16과 미 공군의 B-1B, B-2 폭격기가 북한 상공을 유린하는 동안 이를 막고 나선 북한 공군기는 한 대도 없었다. 북한의 SA미사일 사정권 밖인 6만~7만 피트 이상 상공에서 미군 AWACS가 쟁반 레이더를 돌리고 있었고 U-2기나 한국공군의 E-737 글로벌 호크 등이 매의 눈처럼 북한 전역을 샅샅이 훑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 공군은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북한 방공망(防空網)을 무력화시켰고 수년 동안 훈련해 왔던 것처럼 북한 전쟁지휘소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동서 해안에는 한미 해군의 이지스함과 오하이오급 핵추진 잠수함이 토마호크 순항(巡航)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게다가 괌기지에서는 곧 또다른 B-2폭격기 편대가 F-22 스텔스 전투기와 전자전기의 엄호와 AWACS 공중경보통제기의 지휘를 받으며 2차 공세를 위해 날아올 예정이었다. 이제 한미 공군과 해군은 김정은과 북한군 수뇌부의 생사(生死)를 확인하는 순간 종전(終戰)을 선언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한미 공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교량을 비롯해 주요 항구도 무력화시켰다. 손대지 않은 북한의 유일한 시설은 영변 등지의 원자로와 핵시설이었다. 잘못 폭격했다가는 다량의 방사능이 유출돼 한반도가 죽음의 땅으로 변할 우려가 있어 그 임무는 해병대 등 지상군에 맡길 예정이었다.
 
 
  # D데이 오후 1시
  CP탱고

 
  한미연합사 수뇌부가 CP탱고에 모였다. 한미연합사령관은 전쟁 발발 후 지금까지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초기에 백령도와 연평도에 미사일이 떨어지고 한국의 주요 기간산업이 큰 피해를 봤습니다. 당초에 미국 주장대로 사드 포대를 증강하고 한국군이 가진 PAC-2 미사일보다 훨씬 성능이 좋은 PAC-3 미사일을 도입했다면 피해를 크게 줄였을 겁니다.”
 
  이 말에 한국 측 장성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미연합사령관은 그 모습을 흘낏 살피더니 이내 그들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미연합군은 압도적인 공군 전력을 바탕으로 북한의 전쟁지휘소를 일거에 격멸했습니다. 북한은 반격하지 못할 겁니다. 작계 5015도 예정대로 발동하고 있습니다.”
 
  CP탱고에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 작전계획 5015
 
  미공군과 한국공군이 평양을 비롯해 북한의 주요 목표물을 폭격하고 돌아오는 순간 한미연합군은 데프콘이나 워치콘의 상향 없이 바로 5015를 가동한다. 이를 위해 양국 대통령에게 사전 승인을 받아 놓는다.
 
  작전계획 5027(영어: Operational Plan 5027; OPLAN 5027)은 1974년 처음 만들어진 대한민국 국군의 단계별 작전계획이다. 주로 짧게 작계 5027이라 부르며 숫자에서 50은 태평양 지역을 가리킨다.
 
  한반도 내에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군의 전쟁 재개 상황에서 한미연합군이 조선인민군을 이기고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이루기까지의 내용이다. 전부 6단계로 구성돼 있으며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반격·수복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과거 2010년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계획 5027에는 미군이 전쟁 후 90일 안에 병력 69만명, 5척의 항공모함, 함정 160여척, 항공기 2500여대를 한반도에 파견하는 걸로 나와 있다.
 
  작계 5015는 북한의 국지도발과 핵·미사일 등 대량파괴무기 위협의 증가 등 군사 안보상의 환경 변화에 대한 한미연합전력의 군사적 대응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기존의 작계 5027은 주로 북한의 남침에 따른 전면전 상황을 가정해 시나리오에 따른 6단계 대응으로 구성돼 있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 발생하면 서울 북쪽의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한 뒤 미군의 증원 전력이 도착하면 전열을 정비해 반격에 나선다는 개념이다
 
  반면 작계 5015에서는 북한의 국지도발의 확전 가능성이 커짐에 따라 한미연합전력이 국지도발에 어떤 절차를 거쳐 대응할지 등이 검토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미 군당국은 이미 2013년 3월 ‘한미 공동 국지도발 대비계획’을 수립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작계 5015에는 당시 합의된 내용이 이후 상황 변화까지 업데이트돼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작계 5027이 주로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 대비에 맞춰졌다면 이번 작계 5015는 북한의 전면전 도발 이전에 미리 국지도발 상황부터 한미연합방위 체제를 어떻게 가동할지 등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 징후가 포착되면 30분 안에 선제 타격한다는 한국군의 ‘킬 체인’ 개념도 작계에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막상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할 징후를 알고도 한미연합군은 북한을 선제 타격하지 못해 백령도·연평도가 큰 피해를 입었고 기간산업망도 마비됐다.
 
  작계 5015가 알려지자 일부 종북세력은 ‘작계 5015는 유엔이 금지한 예방전쟁을 하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예방전쟁은 상대가 나를 공격할 의사를 보일 때, 먼저 상대를 공격해 승리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전쟁을 말하는데 종북세력은 죽으면 죽었지 북한과 싸울 수 없다고 한 것이다.
 
 
  # D+1 새벽 1시
 
  한미연합사령부가 북한의 미사일에 대해 보복응징을 완료하고 모처럼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때 휴전선 인근의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금속제 포신(砲身)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17년 7월 초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거론했던 북한 방사포 부대가 출현한 것이다.
 
 
  # 《뉴욕타임스》 2017년 7월 6일 자 보도
 
  제목=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미국의 무력대응 가능성이 언급되는 상황에서 ‘정밀 타격(surgical strike)도 최악의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제하의 한반도 전쟁 가상 시나리오 기사
 
  내용=이 신문은 미국 민간 연구기관인 노틸러스연구소의 2012년 보고서를 토대로 북한이 이런 재래식 무기로 한국의 군사시설을 조준한다면 한 번의 일제사격으로 3000여 명, 민간인을 겨냥한다면 3만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올 수 있다고 보도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의 군사공격을 받더라도 곧바로 핵무기에 손을 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견해를 보였다. 북한은 미국의 핵 보복을 우려하기 때문에 핵·생화학 무기의 즉각적인 사용은 자제할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예상이다.
 
  문제는 이런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더라도 북한이 한국에 줄 수 있는 피해가 심대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휴전선 근방에 배치한 재래식 무기만 동원하더라도 한반도는 엄청난 피해가 불가피하고 전황의 예측 또한 어렵다고 지적했다.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앤서니 코즈먼 연구원은 미국의 북한 공격 후 단기간에 벌어지는 상황을 예상하는 것은 “3차원 체스(three-dimensional chess)와 같은 아주 복잡한 게임”이라고 묘사했다.
 
  NYT는 남북 양측 모두에 확전으로 치달을 요소가 많아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멈추기가 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의 공격을 받는다면 의도적으로 ‘제한적 대응’을 하기보다는, 미국과 한국의 북침에 대비해 단시간에 화력을 집중시켜 큰 피해를 안기려 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랜드연구소의 제프리 호르넝 연구원은 “끝장내기 전쟁(the end war)이라는 것을 북한도 안다”며 “일제 사격(barrage)을 퍼부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북한이 수도권을 겨냥한 170mm 자주포, 240mm와 300mm 방사포 공격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가 초기 피해를 가름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노틸러스연구소는 북한이 예고 없이 서울과 수도권의 군사시설을 향해 포 공격을 할 경우 첫날 만 하루 동안 6만명의 사망자가 날 수 있다고 예견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사용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북한 군사문제 전문가 조지프 버뮤데즈는 “탄도미사일은 (서울이 아닌) 주일 미군기지 등 군사시설을 겨냥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했다. 한국 측의 방어전략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뾰족한 수가 없다(little they can do)”는 회의적인 견해를 내놨다.
 
  한국에 배치된 사드(THAAD)나 패트리엇 등 미사일 방어체계는 일부 탄도미사일을 격추할 순 있겠지만, 이스라엘의 대공방어 체계인 ‘아이언 돔’처럼 저고도로 날아오는 포탄이나 로켓을 막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과 미국은 레이더로 북한의 포를 탐지한 후 공습으로 궤멸시키는 전통적인 대포병 전략에 집중할 것으로 봤다.
 
  노틸러스연구소는 이라크전을 토대로 한미가 이 전략을 구사하면 북한이 시간당 1%의 포를 잃고 만 하루 동안 포 전력의 5분의 1 정도를 상실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신문은 인명피해 규모는 한국 정부의 국민보호 능력에 달렸다면서도 피상적인 민방위훈련, 일반 주민의 ‘전쟁 불감증’은 문제라는 시각을 보였다.
 
 
  # D+2
  북한의 장사정포·방사포, 서울 초토화

 
북한의 방사포. 300㎜ 방사포는 최대 사정거리가 200㎞에 달한다.
  미 국방정보국(DIA)은 1995년부터 북한의 지상전력 가운데 한국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 휴전선 바로 북쪽에 배치한 240mm 및 300mm 방사포(다연장로켓) 5500여 문과 170mm 장사정포 등 모두 1만3000여 문이라고 분석했다. 240mm 방사포는 조선인민군 제620포병군단에, 170mm 장사정포는 독립중포병 여단 소속이다.
 
  1994년 당시 미군은 이 재래식 야포가 전쟁 초기 24시간 안에 5만 발을 서울을 향해 쏠 수 있다고 계산했다. 같은 해 미 국방부의 고위 관리는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발생하면 개전 90일 안에 미군 사상자만 5만2000명, 한국군 사상자만 49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노동당 군수공업부가 작성한 극비자료에 따르면 GPS시스템을 장착한 방사포는 주력이 240mm이고 최근 300mm까지 개발했다. 정확도는 70% 정도이며 최대 사거리가 300mm 방사포의 경우 최대 200km다. 발사대에 여러 개의 발사관을 장착해 동시에 포탄을 퍼붓는 300mm 방사포는 비행고도가 낮게 질주하는 탄도로 한꺼번에 많은 포탄이 날아오기 때문에 요격이 불가능하다.
 
  북한 방사포와 장사정포가 일제히 포탄을 쏘아대자 한미연합군도 방사포·장사정포의 위치를 확인해 반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무차별로 쏘아대는 북한 야포에 서울의 절반가량이 마치 불도저로 밀어 놓은 듯 폭삭 무너지고 말았다. 마치 6·25 때 같은 풍경이 재현됐다.
 
  대표적으로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가 반파됐고 일제가 지어 놓은 것을 헐고 다시 지은 서울시 신청사는 유리로 만들어져 포탄 반동에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경복궁과 덕수궁에서 화재가 일어났고 거미줄처럼 서울 지하를 잇던 지하철은 곳곳에서 푹썩 주저앉아 통행이 마비됐다.
 
  놀라운 것은 그간 북한에 비판적이던 신문사들이 북한 방사포와 장사정포의 집중 타깃이 됐다는 사실이었다. 서울 광화문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포격을 당해 건물이 전파(全破)됐고 같은 건물에 있던 TV조선과 채널A도 보도 기능을 순식간에 상실하고 말았다. 기자 수십 명이 사상을 당했다.
 
  방사포나 장사정포에 아파트는 끄떡없을 것이라는 말과 달리 곳곳에서 고층 건물들이 붕괴해 수많은 시민들이 매몰됐지만 그 누구도 구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쟁 개시 이틀째, 미확인 사상자만 20만명에 달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서울의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공포가 확산됐다.
 
 
  # 비슷한 시각
  서울 남산 1호 터널과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눈치 빠른 사람들 일부가 가족을 데리고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사이에 있는 방공호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방공호는 포탄 한 발을 맞아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공포에 질린 서울시민들은 서울 남산 1호 터널로 향했다.
 
  이 터널은 1968년 1·21사태 때 북한 124군 부대 소속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뒷산까지 나타난 데 경악한 정부가 ‘서울 요새화’ 계획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었다. 길이 1.5km의 이 터널에 5000명 정도가 들어찼을 때 갑자기 남북 입구(入口) 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고정간첩이 초강력 다이너마이트로 시민들을 생매장한 것이다.
 
 
  # D+3
  김정은이 모습을 드러내다

 
2017년 신년사를 하는 김정은.
  오전 10시 조선중앙방송에 김정은의 연설이 생중계되기 시작했다. 김정은의 목소리가 TV를 통해 울려 퍼지자 대한민국은 동요했다. 한미연합공군의 폭격에 사망한 것처럼 보였던 김정은은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북조선의 무자비한 반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정은은 극비리에 건설한 지하갱도로 피신했으며 북한의 군사 지휘부 역시 지하갱도에 분산해 은닉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에 대해 예리한 관찰자였다면 이 같은 경우를 상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 훨씬 전 북한의 지하갱도 관리원 출신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전쟁지휘소는 미국 정찰위성을 따돌릴 수 있다”며 지하갱도의 구조, 조직구성, 전쟁 시 활용 등을 공개했다. 그는 또 “전쟁 지휘소 갱도 입구의 철문은 전파 흡수물질로 도색했기 때문에 미 정찰위성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가 말한 내용이다.
 
  “(전쟁)지휘소 갱도 입구 철문은 바르는 전파 흡수물질로 칠해 놓았기 때문에 미국의 정찰위성 사진에서도 전혀 잡히지 않는다.”
 
  “전시 식량을 보관하는 2호갱도는 북한에서 생산된 햅쌀을 넣고 묵은 쌀을 꺼내 주민 식량과 군부대 식량으로 공급한다. 이 갱도에 식량을 훔치러 들어올 경우 현역군인도 즉시 사살한다.”
 
  이 관리원에 따르면 전쟁지휘소 갱도는 유사시 주민 전체를 조직적으로 동원, 지휘하는 전시 참모부로서 모든 시, 군마다 한 개씩 있다. 1호갱도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동상과 1호물자를 보관하며 ○○시의 1호갱도에는 유사시 김정숙 동상을 운반할 수 있는 전용 차량이 보관돼 있다.
 
  북한은 전쟁을 대비해 지하갱도에 민방위부를 조직, 전시를 대비한 군사훈련과 갱도굴착, 전략물자의 보관과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전시를 대비한 북한의 지하갱도는 작전지휘용, 전략물자 보관, 전시 군수물자 생산시설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지하갱도 공사는 1970년대 전당(全黨)·전군(全軍)·전민(全民)·전국(全國)의 요새화와 무장화 방침이 나온 뒤 시작됐다. 갱도 형식은 영구화 갱도, 반영구화 갱도, 자연 갱도 등 3가지다. 유사시를 대비하는 갱도는 전기 공급이 끊기면 물과 습기가 차, 반드시 전기를 지원한다.
 
  북한은 식량난이 최악에 달했던 1995~1997년경에도 66호갱도(민간인 대피용)를 비롯해 모든 지하갱도 공사를 진행했다. 식량난이 아무리 심해도 시당(市黨) 책임비서를 포함해 누구도 2호갱도(식량창고)의 식량과 물자에 손댈 수 없다. 2호 창고(식량 보관)는 보위대가 실탄을 장전하고 경비를 서는데 실수로 잘못해서 들어온 사람이라도 곧바로 사살한다.
 
  북한의 요청으로 러시아 정찰위성이 북한의 해당 지역에 대한 위성사진을 찍어 북한군 총참모부에 제공한다. 이를 토대로 전국의 지휘소 갱도 출입문이 노출된 곳을 찾아 출입문에 새로운 전파흡수제를 칠하도록 명령서를 내려보내기도 한다.
 
 
  # D+3
  김정은의 최후 통첩

 
  김정은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한 연설 말미에서 무시무시한 협박을 해 한국과 미국을 당황케 한다. 그는 “48시간 이내로 우리를 공격한 한국군의 국방부장관·합참의장·공군참모총장을 처벌하라. 공화국 주민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고 원상복구하라. 인민군대가 당한 시설 피해를 보상하고 사상자에 대해서도 위로금을 내놓아라. 다시는 공화국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남조선 대통령이 각서(覺書)를 써라. 다시는 미군이 공화국 상공에 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만일 48시간 내에 우리 요구를 전면 수용하지 않으면 서울을 비롯한 5개 광역시 가운데 한 도시를 지도상에서 지워 버리겠다”며 “미국 역시 이 문제에 개입하면 서부지역 중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시애틀 가운데 한 도시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날리겠다”고 협박했다.
 
 
  # D+3
  김정은 협박 3시간 뒤

 
  독일에서 전용기를 타고 귀국 중인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과 화상(畵像)회의를 한 뒤 대책을 논의했다. 두 정상은 다음과 같은 합의문을 발표했다.
 
  첫째, 미국이 한국에 약속해 온 핵우산 정책, 즉 확장된 억지 전략을 적용하기로 했다.
 
  둘째, 한미연합군은 북한의 위협에 전혀 굴하지 않고 참수작전과 작계 5015에 따른 조치를 계속 취하겠다.
 
 
  # D+3
  한미 정상회담 합의문 발표 1시간 뒤

 
  중국은 만일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반도에 핵 추진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전개할 경우 중조(中朝)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에 따라 해군을 총동원하고 항공모함 및 원자력잠수함을 서해에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 D+3
  중국의 협박 2시간 뒤 김정은의 2차 공갈

 
  김정은이 또다시 조선중앙방송에 등장했다. 그는 예의 협박을 다시 언급하면서 “한반도 상공에 요격기를 띄워 남조선 대통령 전용기가 발견되면 즉시 격추하겠다. 수정된 요구사항을 말하겠다. 즉시 무조건 항복하라”고 말했다.
 
  이 소식은 즉각 대통령이 타고 있는 공군 1호전용기에 전달됐다. 대통령을 비롯한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당황했다.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한민국 땅을 밟기도 전에 북한 미사일을 맞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게다가 비행기 연료 게이지도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 D+4
  정치권 분열

 
  전쟁 초기 단결을 외쳤던 정치권이 마침내 분열하기 시작했다. 전쟁 당시 진보·보수당의 의석 비율은 7대3으로, 보수당이 절대 열세였다. 보수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6년 최순실 사태로 치명상을 입은 뒤 두 차례 연속 대통령선거에서 패했고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2당으로 전락했다.
 
  집권 진보당은 “백령도와 대연평도가 공격받고 주요 기간산업 시설에 피해가 있었더라도 대한민국이 형의 입장에서 동생 같은 북한과 대화를 해 문제를 플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진보당 의원 중에는 “한미연합군의 원점타격 보복이 과잉대응이었으며 ‘참수작전’도 성급했다”는 말도 나왔다.
 
 
  # D+5
  미국 내 반전(反戰)여론

 
  북한의 협박은 미국민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국민들이 불안해하자 미국 의회와 언론에서도 “서울을 지키기 위하여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을 버려야 한다’는 여론은 세 가지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첫째,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이나 잠수함 탑재 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핵공격할 때 이를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은 8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이는 ‘한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국인의 안전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둘째, 한국이 그동안 보여온 태도에 대한 불만으로, 이는 전통적인 한국 지지층이었던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확산됐다. 그들은 “한국은 미국 때문에 생존해 왔으면서 중국에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공공연하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세번째는 항상 등장하는 반핵·반전 단체들이었다. 이 단체들은 “미국의 서부 도시들이 제2의 히로시마가 되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다. 여론의 추이에 민감한 미국 행정부가 고민에 빠지자 미국만 바라보고 있던 한국 정부도 딜레마에 빠졌다. 특히 공군 1호기상에서 내릴 곳이 없어 연료가 떨어질 때마다 미 공군의 공중급유기의 도움을 받은 뒤 창공을 선회하고만 있는 한국 대통령은 스스로 자괴감에 빠졌다.
 
 
  # D+6
  중국의 휴전 제의

 
북한의 SLBM 미사일은 한국군의 킬체인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전략무기이다.
  이 틈을 타 중국이 6자회담을 제의한다. 핵전쟁을 막기 위해 남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담판을 짓고 휴전하자는 것이다. 중국은 회담을 제의하면서 중·북(中北) 접경 남쪽 50km까지를 ‘비행 및 무력사용 금지구역’으로 설정한다는 발표를 한다.
 
  이는 미국의 공격을 피해 북한이 핵심 시설을 옮기려 할 때 피난처를 제공하겠다는 뜻이었다. 5개국이 중국의 제안을 수락하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앞으로 12시간 내에 우리의 요구조건을 무조건적으로 받으라”고 협박했다.
 
 
  # D+7
  D시에 피어난 버섯구름

 
D시에 투하된 핵무기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것보다 10배 더 강력한 것이었다.
  북한 남포항을 출발한 잠수함이 군산 앞 100km 해상에 접근했다. 북한 잠수함은 머뭇거리지 않고 SLBM, 즉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각각의 탄도미사일에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것보다 10배 더 강력한 핵탄두가 장착돼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D시 상공에는 거대한 두 개의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강력한 열풍(熱風)이 폭풍처럼 도시 전체를 휩쓸더니 낙진이 검은 비에 섞여 이 도시를 적셨다. 대한민국 교통의 중심이자 행정신도시 부근에 있던 D시는 유령도시처럼 변하고 말았다.
 
 
  # D+7 이후
 
  D시가 핵공격을 받은 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연일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모임인 것 같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을 공격한 한미연합군을 반대하는 시위로 변질됐다. 촛불시위 참가자는 갈수록 늘었다. 이들은 “미군 철수” “한국군 책임자 처벌”을 외쳤다.
 
  부근에 있는 대한문 앞에서 한미동맹만이 살길이라는 보수단체의 태극기 집회가 열렸지만 각 언론엔 “촛불집회 참가자, 태극기 집회보다 10배 많아” “촛불집회 참가자 10일 만에 1000만 돌파”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 때보다 더 활활 타올라” 같은 왜곡 선동 기사가 봇물을 이뤘다.
 
  급기야 촛불집회장에는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우리 민족끼리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개 보이던 김정은 대형 초상화가 수백 개씩 등장했다. 김일성 대(代)부터 남쪽에 심어 놓은 고정간첩들이 눈치 안 보고 활개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 D+10
  무조건 항복

 
  아직도 대한민국 영공에 진입하지 못했던 대통령은 전용기 내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했다. 작전계획 5015의 철회를 미국에 요청했으며 국방부장관·합참의장·공군참모총장을 해임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또 북한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겠으며 자신은 대통령 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차기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식에 대해 대통령은 시민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통일한국의 지도자를 뽑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사실상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대통령의 발표가 있은 지 2시간 만에 김정은은 조선중앙방송에 다시 나와 “남조선 대통령의 뜻을 수락하며 더 이상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서울 광화문과 종로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거리에는 누가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인공기(人共旗)가 나부꼈다. 평양의 급한 요청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간 한국의 기자들은 평양의 분위기를 생방송으로 전했다. 주민들이 흐느끼며 ‘통일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고스란히 안방까지 전해졌다. 한때 남한에서 유행했던 북한 가요 ‘반갑습니다’를 부른 리경숙도 방송에 나와 목이 터져라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를 반복했다.
 
 
  # D+20
 
  통일한국의 대통령에 김정은이 취임했다. 그가 서울로 와 대중 앞에 서서 터뜨린 일성(一聲)은 “서울시민 여러분! 백두산의 김정은이 왔습네다”였다.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한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준비했던 것과 똑같은 멘트였다. 김정은은 말을 이어 갔다.
 
  “북조선은 주먹이 강하고 대신 남조선은 잘삽니다. 이 둘을 합치면 우리 민족은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범식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새 공화국 출범식이 열렸다. 김정은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좌중을 둘러봤다. 우측에는 남조선의 역대 고위 관리들, 좌측에는 북한의 김정은 심복들이 도열해 있었다. 김정은은 새 헌법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다.
 
  “나는 국헌(國憲)을 준수하고 ….”
 
  그날 밤 경회루에서 새 공화국 출범 파티가 열렸다. 이날을 김정은은 너무도 고대해 왔다. TV나 인터넷 혹은 사진으로만 보던 남조선 걸그룹들이 총출동했다. 김정은은 ‘루이13세 코냑’이 가득 찬 잔을 들고 시혜를 베풀 듯 말했다.
 
  “동무들은 이제 보천보 전자악단 남조선 분국(分局)에 소속되는 것이오. 아! 그리고 몇 개 더 만들어야갔다. ‘광명성 댄스악단’과 ‘화성12호 경음악단’도 만드시오.”
 
  밤이 이슥해지자 김정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걸그룹 멤버 셋을 한꺼번에 옆에 끼고 청와대 본관 침실로 사라졌다.
 
 
  # 망명 대통령
 
  한국의 대통령은 결국 자신이 통치하던 나라를 밟지 못하고 미국 망명을 택했다. ‘대한민국’이 사라진 후 한참 뒤 그에게 미국 고위 관리가 찾아왔다. 식사를 함께 한 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그 미국 관리는 전직 대통령에게 작심한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한미 관계는 정상화되는 듯하였으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정부가 굴복하는 데 우리는 놀랐습니다. 가짜 뉴스에 한국의 정치·언론이 다 속더군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때 당시의 미국 정부는 내심 한국군의 태도를 주목했습니다만, 한국군은 전투기를 출격시키고도 폭격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복수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요청으로 한미연합사 해체 시기를 연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임기 말에 미국과 한국과 일본이 북핵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데 꼭 필요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서명을 직전에 취소한 뒤에 독도를 방문했습니다. 그 결과 아베 정권이 등장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뒤를 이은 박근혜 대통령은 친중(親中)정책을 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2015년 중국의 전승절(戰勝節) 행사에 박 대통령이 자유 진영 지도자로선 유일하게 참석하는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한국은 북핵 위협에도 핵무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생존이 걸린 문제를 다른 나라에 물어보고 결정할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도 미국의 허가를 받고 핵무장을 한 것은 아니죠. 2016년 여름 한국에서 벌어진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은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시각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드 배치는 적의 핵미사일을 막겠다는 것이고 동맹국인 미국이 자국(自國) 부담으로 하겠다는데 이를 막고 나서는 세력이 그토록 강하고 더구나 여당 의원까지 가세하면서 국방장관을 시위대가 감금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한국은 과연 동맹국인가, 미국이 지켜 줄 가치가 있는가 라는 회의(懷疑)가 지도부에 확산되었습니다.
 
  1994년에 이어 2017년 우리는 북핵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또 다시 놓쳤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마지막 찬스였습니다. 북한이 예상 외로 장거리 미사일과 잠수함 발사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보고 우리도 심각한 대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사드를 비롯하여 PAC-3, SM-3 등 다층적 방어망을 건설하고 이를 미국의 MD(미사일방어망)와 연결시켜 두었더라면 설사 북한이 얻어맞은 뒤 남은 핵폭탄으로 보복을 가해 와도 대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한국 국민들 스스로 안보에 대한 의식이 희미한 게 더 문제였지만요.”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6개월 뒤 서울광장

 
  서울광장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사기총 소리가 들려 온다. 촛불이 사라진 자리를 이 요란한 살인무기의 총성(銃聲)이 대체한 것이다. 처음에는 구경꾼들이 있었으나 그 잔인한 장면에 이제는 발길을 끊었다. 고사기총 연발사격으로 지금까지 사망한 인물은 10만명이 넘었다.
 
  처음에는 국군 수뇌부, 경찰 간부, 공안부 출신 검사들, 고위 관리, 언론사 간부들이었다. 생존해 있던 6·25전쟁의 영웅들도 마침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북한 수뇌부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던 역대 대통령들의 시신과 호국영령 가운데 특히 미워했던 인물들의 시신을 꺼내 부관참시했다.
 
  한때 ‘자유’와 ‘민주’라는 단어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던 서울광장은 이제 회색빛으로 변했다. 겨울이면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던 곳의 잔디는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도 보위부원들을 피해 숨어 지내던 국군의 가족과 언론사 간부의 가족들이 굴비처럼 엮여 나왔다.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년 뒤 요덕수용소

 
  함경남도 요덕군에 있는 요덕수용소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곳이다. 탈북자들이 그곳의 혹독하고도 비인간적인 상황을 여러 차례 폭로했기 때문이다. 최근 이곳에 1만명 이상의 남한 출신 인사들이 한꺼번에 수용됐다. 자세히 살펴보면 뉴스에서 몇 번씩 보았던 유명 인물들이었다.
 
  사드 반대를 외치던 종교인과 환경단체 간부들, 차별철폐를 외치며 수십 년간 귀족노조 생활을 해 왔던 노동단체 간부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통일이 되자 중용되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사상개조를 한다며 북한 평양에서 개조교육을 받은 뒤 간첩으로 몰려 요덕수용소로 끌려온 것이다.
 
  영락(零落)한 한때의 민주투사들을 꽤 낯익은 정치인들이 맞았다. 그들은 시민사회단체 간부들보다 6개월 앞서 이곳에 수용됐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까칠했으며 번지르르하게 윤이 나던 머리는 허옇게 색이 바래 있었다. 이 어색한 만남을 개마고원의 삭풍(朔風)이 두들기고 있었다.
 
 
  # 그 다음 날 요덕수용소
 
  다음 날 잘 알려진 민중예술가 한 명이 요덕수용소로 들어왔다. 그는 남한에서 대통령들을 성적으로 비하하거나 동물로 묘사해 이름을 얻은 인물로, 통일이 된 뒤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산하 미술동맹에 소속돼 있었다. 모두가 잘 먹고 잘살 것이라고 했던 그의 출현에 놀랐다.
 
  그가 말했다.
 
  “수령님 얼굴에서 미소를 뺐지요. 업적 위주보다는 인간적인 수령님을 그리려고요. 그랬더니 자격을 박탈당하고 지방으로 쫓겨났습니다. 이번에는 수령님 대신 인민들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낙원을 형상화하는 화폭에 등장한 인물에게서 미소를 지워 버린 것은 체제의 오늘과 내일의 의미까지 지워 버린 염세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저는 미술가 자격을 박탈당했어요. 그래서 먹고살기 위해 웃는 동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웃는 동물은 없지 않습니까? 예상대로 대박이 났어요.”
 
  사람들이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
 
  미술가가 답했다.
 
  “너무 기분 좋아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수령 얼굴을 그릴 때보다 동물의 얼굴을 그리는 지금이 더 풍족하다’고 말한 걸 누군가 일러바친 겁니다.”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년 뒤 조갑제와 한 종북주의자의 대화

 
  12월. 추운 계절이다. 이곳에 들어온 지 몇 해나 되었을까? 풍성하던 백발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한때 남들이 올려다보던 키는 이제 어린아이처럼 줄어들었다. 뻔질나게 불러내 못살게 굴던 시절이 오히려 그리워진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그립다. 젊은 시절에는 사람을 만나러 다니고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게 일이었다. 그들 중에는 박정희의 딸도 있었고, 박정희의 군대 시절 부관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박정희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한 사람도 있었다. 젊은 시절 석유에 대한 기사를 썼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나서 중앙정보부 지부에 불려 가 조사를 받았었다.
 
  그때 나를 조사했던 사람이 나중에 박정희 암살에 가담했다. 그의 이름이 뭐였더라? 박, 박, 선 …. 마지막 글자가 생각이 잘 안 난다. 효였나, 호였나 …. 보위부 조사실하고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박은 신사적이었다. 그 얌전하던 사람이 대통령을 쏘는 일에 가담했다.
 
  잡지를 만드는 일은 즐거웠다. 신문에서 잡지로 옮겨간 것은 내 뜻이 아니었지만, 거기서 나는 활짝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다. 편집장을 지내고, 사장을 지냈지만, 나는 기자였다. 은퇴를 하고 난 후에도 늘 사람을 만나러 다녔고, 글을 썼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는 글로 옮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인터넷 뉴스사이트를 만든 것도 그래서였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 똑, 똑, 또독, 똑 …. 벽에서 들리는 소리다. 아하! 통방이로구나. 영어로는 ‘Tap Code’, ‘Knuckle Voice’라고 한다. 아서 쾨슬러의 《백주(白晝)의 어둠》에서도 옆방의 죄수와 통방하는 얘기가 나온다. 소련 전체주의 사회의 잔인함을 다룬 이 소설을 참 많이도 인용했었는데 ….
 
  나도 한 번 해 볼까? 옛날 범죄자들을 취재하면서 통방하는 방법을 배운 기억이 난다. 군대에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모스신호 치는 법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을 그때는 했었다. 이상도 하다. 박정희를 쏘는 데 가담했던, 그 사람의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나하고 같이 일했던 후배 기자들의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어쩌다 재미로 배운 통방하는 법은 생각이 난다.
 
  또, 똑, 또도독. 똑, 똑 ….
 
  ‘누구요’라는 단어 하나 옮기기가 이렇게 힘들었나? 컴퓨터 자판으로 치면 금방인데 ….
 
  ‘옆방이오’라는군. 제길, 누가 옆방인 줄 모르나?
 
  똑, 똑, 똑 ….
 
  누구…냐고? 내 이름을 말해야 하나?
 
  ‘정치범이오. 악질 극우반동.’
 
  똑, 똑, 똑 ….
 
  뭐 했느냐고?
 
  적화 전에 기자를 했다고 대답해야겠는데 …. 적화 전이라고 하면 탈이 날까? 통일 전이라고 해야 하나? 하긴 통일은 통일이지 …. 그냥 전에 기자를 했다고 하고 말지.
 
  ‘전에 기자를 했소. 대한민국이 있던 시절에 …. 당신은.’
 
  답이 온다. ‘교수였소. 나는 빨갱이 소리를 들었지. 대한민국이 있던 시절에 …. ㅎㅎㅎ.’
 
  하이에크의 말이 생각난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을 때 아들이 그 소식을 알리자 “거봐, 내가 뭐라 했어?”라고 했다던가? 내가 늘 그랬지. 적화통일이 되면, 남쪽의 종북좌파부터 수용소행이 될 거라고 말했잖아.
 
  또 신호가 온다. ‘당신 이름이 뭐요’라고 하네. 참 빨리도 묻는다. 통방 시작한 지 네 시간 만에 이름을 묻네. ‘조갑제요. 당신 이름은 …?’
 
  답이 없다. 나 같은 반동이랑은 얽히기 싫다는 건가?
 
  똑, 또도도옥, 똑 ….
 
  ‘장… 장인가, 동…, 규…. 장동규.’
 
  장동규, 장동규, 장동규 …. 생각이 난다. 그 종북학자, 입만 열면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던 ….
 
  ‘그 장동규 교수요?’
 
  ‘그렇소. 조 선생.’
 
  ‘나야 그렇다 쳐도… 당신이 어떻게 여길…. 무슨 죄목으로 ….’
 
  답이 없다. 아, 이제야 답이 오는군.
 
  ‘바보였소. 난… 바보였소. 그게 내 죄요.’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년 뒤 초등학교 력사교과서

 
  남조선은 1948년 건국해 20xx년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해방됐다. 남조선은 통일조선을 건설하자는 김일성 수령님의 제의를 거절하고 역도 리승만이 남반부 단독 선거를 실시하면서 수립됐다. 김일성 수령님은 이런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해방전쟁을 벌였으나 미 제국주의자들의 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남조선은 군인 출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경제를 건설해 군인 출신 전두환·노태우 대를 거쳐 북조선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 나갔다. 다행히도 그 이후 친북(親北) 대통령들이 잇따라 나오고 북조선의 공작 결과 자생적인 종북주의자들이 배양되면서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
 
  북조선은 30년에 걸쳐 교육계·언론계·노동계·시민사회계·종교계에 집요하게 주체사상을 전파하였다. 거기에 발맞춰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최순실이라는 여편네의 농간에 놀아나다 탄핵당하면서 통일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하였다.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핵폭탄과 핵미사일을 개발해 오던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조선의 백령도·대연평도에 불벼락을 내리고 주요 기간산업망을 마비시켰다. 남조선 역도들은 미제의 힘을 빌려 북조선의 강토에 침략했으나 김정은 장군의 호령 한마디에 굴복하고 말았다.
 
 
  #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0년 뒤 중학교 교실

 
  사회교사가 각 나라별 경제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통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한때는 세계 10위에 드는 경제강국이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지금은 세계 200여 개국 가운데 180위로 짐바브웨, 앙골라와 같은 순위라는데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까?”
 
  남조선 출신의 선생님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기억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분명히 있었습니다.”
 
  선생의 눈망울이 점점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 그날 오후
  그 학생의 집

 
  학생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물었다.
 
  “오늘 선생님께 들었는데 우리 조선이 한때 세계에서 열 번째로 잘살았다면서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 아이가 또 물었다.
 
  “우린 지금 아프리카 짐바브웨, 앙골라와 비슷한데 ….”
 
  아버지는 아이를 골방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오늘 본 것을 절대 남에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몇 차례나 다짐을 받은 뒤 낡은 잡지 한 권을 꺼내 보여줬다. 거기엔 이런 글이 있었다.
 
  *
 
  1961년 박정희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살았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52년간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 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2589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2800달러로서 세계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 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 10배, 한국은 약 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미(美), 중(中), 일(日), 독(獨)에 다음가는 5대 공업국, 7대 수출국, 8대 무역국, 12위의 경제대국(구매력기준 GDP)이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 유신기(維新期)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70년대 말에 우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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