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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시대 - 역대 대통령들에게 배워라

전두환의 용인술

스탠퍼드대 경제학박사 김재익 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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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보다 유능한 부하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고 방우영 명예회장)
⊙ 10·26 이후 격동기 끈끈한 스킨십으로 허화평 등 부하 5인방과 함께 5공화국 열어
⊙ 유머감각도 용인술의 하나로 생각 … 대학입시에 낙방한 아들이 백담사 찾아오자,
    “너만 잘되면 되겠어?”
⊙ “한국적 특수상황에선 안보지식이 풍부해야”(1988년 이임 기자회견)
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참석자들에게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고 있다.
  역사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최근 《전두환 회고록》 1, 2, 3권이 교보문고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각각 1, 4, 5위에 오르는 것을 보면 전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여전하다. 역사는 전두환씨를 다는 저울의 한쪽에 12·12사태, 5·17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 5공비리를 올려놓을 것이고, 반대쪽에는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경제성장, 단임실천 등을 올려놓을 것이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어느 각도로 기우느냐 하는 것은 보는 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고 방우영(方又榮)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저서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김영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람을 기막히게 쓸 줄 아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머리가 상당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적어도 ‘나보다 유능한 부하를 써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청와대 비서관이나 각료에 훌륭한 사람들이 발탁됐다. 이 바람에 아웅산 사태 후 “인재가 고갈됐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카네기 묘비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부하로 하고 그와 더불어 일하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 이곳에 잠들다’란 글귀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전두환 대통령을 지켜보면서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사람 하나는 잘 쓴다’고 느꼈다. 그는 넉살도 좋은 사람이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부둥켜안고 어깨를 두드렸을 정도다.(p.261)〉
 
  전두환 전 대통령의 용인술은 사관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타고난 보스 기질과 부지런함은 그의 지능을 보완하고도 남을 만하였다. 전두환은 “육사 입학시험을 쳤는데 성적이 엉망이었다. 수학은 빵점을 받았을 텐데 마침 외우고 있던 피타고라스 정리가 문제로 나와 영점을 면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전두환은 육사 11기의 200명 모집정원에 28명의 예비합격자를 추가하는 바람에 꼴찌에서 두 번째인 227등으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고 실토한 적도 있다. 일단 육사에 들어간 뒤 전두환 생도는 남다른 노력을 폈다고 한다.
 
  아침 기상점호 40분 전에 일어나 변소에 들어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공부를 할 정도였다. 전 생도는 또 영어는 영어를 잘하는 생도를, 수학은 수학을 잘하는 생도를 찾아가 개인지도를 받는 식으로 공부를 했다. 이것도 일종의 사람관리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전두환 생도의 성적은 해마다 조금씩 올랐으나 졸업 때의 성적은 여전히 하위권이었다. 그 뒤 고등군사반, 육군대학을 거치면서도 그의 성적은 계속 올라갔다고 한다.
 
 
  전두환과 《주신구라》
 
육사 11기 생도 시절의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10·26사건 뒤 전두환 소장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권을 한 손에 쥐고 공백이 생긴 권력 중심부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게 됐다. 그는 합동수사본부라는 공적인 조직과 정규 육사 출신 장교단 및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동시에 지휘하고 있었다. 전 본부장은 거의 마음대로 최규하(崔奎夏) 대통령권한대행, 노재현(盧載鉉) 국방부장관, 정승화(鄭昇和) 계엄사령관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그는 똑똑하고 야심만만한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10·26사건에서 12·12사태 사이에 전두환 본부장과 함께 권력에의 의지를 다져 가고 있던 핵심 측근으로는 다섯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전두환이라는 핵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릴 때 가장 가까운 궤도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허화평(許和平) 합수본부 비서실장, 허삼수(許三守) 총무국장, 이학봉(李鶴捧) 수사국장. 그 다음 궤도에는 장세동(張世東) 수경사령부 30단장과 김진영(金振永) 33단장. 이 다섯 사람이야말로 5공화국의 씨앗을 뿌리고 배태시킨 권력의 원천이었다.
 
  장세동 대령은 육사16기, 1김2허 대령은 육사17기, 이학봉 중령은 육사18기였다. 이 5명은 하나회라는 공통점 이외에 전두환 소장과는 깊은 인간적 유대를 쌓은 사이였다. 장세동 대령은 베트남전 때부터 사선(死線)을 함께 넘어 온 사이였고, 김진영 대령은 전두환 소장과 세 번이나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다. 2허1이는 고참 보안사 요원으로서 전 소장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함으로써 처음으로 같이 일하게 되었으나, 인간적 유대는 그 훨씬 이전부터였다.
 
  1979년 3월 초 전두환 소장은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자 육본 특명검열단에 있던 허화평 대령을 불러들여 비서실장에, 허삼수 수도군단 보안부대장을 인사처장에 임명해 두 심복을 핵심부서에 심었다. 10월 27일 전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기로 돼 있었던 ‘시국수습 대책안’의 기안책임자도 허 실장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와 5·17 반란 주도 혐의로 조사를 받을 때, 고전소설 《주신구라(忠臣藏)》에서 주군(主君) 아사노 나가노리를 위해 복수하고 할복한 47명의 사무라이들처럼 이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위해 몸을 던졌다.
 
 
  유머감각도 용인술의 하나
 
  ‘전두환’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신군부, 쿠데타, 철권통치, 백담사, 감옥 등 총구의 화약 냄새와 권력의 쓰라린 종말을 연상한다. 10·26사건의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군복 차림의 육군 소장 전두환 합수부장의 매서운 눈초리, “본인은 …”이라고 시작되는 대통령 전두환의 권위적인 목소리, 일반 국민의 시선에 비친 공인(公人)으로서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차가운 권위의 화신이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았던 이들은 사인(私人) 전두환에 대해 정반대의 평가를 하고 있다. 그는 구수한 말투와 다감한 화법, 유머러스한 분위기는 그의 용인술의 하나로 부하들의 마음을 샀다. 김용갑(金容甲) 전 한나라당 의원은 전두환의 인간미를 이렇게 소개했다.
 
  〈안기부 기조실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미국으로 1년간 유학을 떠났다. 그 후 한국에 돌아오는데 청와대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전 대통령이 나에게 민정수석직을 맡길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그 일을 맡을 마음이 없었다. 청와대에 들어서자 전 대통령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야, 용갑이. 너 얼굴 참 많이 좋아졌어. 미국 양식이 좋은 모양이지”라고 말했다. 전 대통령의 구수한 말투에 ‘절대로 일을 맡지 않겠다’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용갑이, 민정수석 자리 너를 위해 비워 뒀어.”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 알아. 열심히 하고 충성스러우면 되는 거야.”
 
  대통령이라는 체면도 내세우지 않고 친근한 선배처럼 권유했다.
 
  “일주일 여유만 주십시오. 짐도 싸고 미국의 지인들에게 인사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갑이, 짐은 부인이 알아서 꾸리라 그러고, 미국 사람들한테는 그냥 편지로 때워. 지금 얼마나 급한데 일주일을 주나.”
 
  나는 거절은커녕 그날부터 민정수석이 되어 버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 재임 당시 통치사료 담당도 했던 김성익(金聲翊) 공보비서관은 이런 말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인재들을 등용,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함으로써 국정수행 능력을 높여 나갔다.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유머를 점차 구사해 나갔다. 전 대통령의 화법은 서민적이고 개방적이다. 투박한 말투와 구수한 입담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해 준다. 화술이나 순발력 등에 스스로 자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부터 군 지휘관으로 남 앞에 나서서 얘기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 대통령은 말을, 사람을 다스리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로 생각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석에서 자주 만나 비교적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소설가 고 이병주(李炳注) 선생은 이런 인물평을 했다.
 
  “작가의 입장에서 저는 인간 전두환을 인간 박정희보다 훨씬 좋게 느끼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술자리에서도 자신을 좀처럼 열어 놓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농담을 해도 그 농담 뒤에 있는 저의를 캐고 있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엘리트 의식은 대단해서 대구사범에 들어간 사실을 자주 자랑합디다. 전 대통령은 어떠냐 하면 우직하고 순진합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콤플렉스가 없어요.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도 ‘제가 경제를 뭐 알아야지요’라는 식이에요. ‘경험도 준비도 없이 대통령을 하다 보니까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실토하는 것이 꼭 구김살 없는 어린아이 같아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연세대 법학과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막내 재만(宰滿) 군이 백담사를 찾아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무 실망하지 마! 내가 이렇게 돼 있는데 너만 잘되면 되겠어? 그런 점에서 우리 앞으로 친해 보기로 하자.”
 
 
  압축성장 비결은 용인술
 
김재익 수석비서관(왼쪽)이 1981년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제현안을 설명하며 결재를 받고 있는 모습.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정치는 상당 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전두환 정권은 1980~1988년 사이 세계 1위의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2.3배로 늘었고, 무역적자 구조는 무역흑자로 바뀌었다. 두 자리 수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안정됐다. 외채도 크게 줄었고 국민저축률은 일본을 앞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달했다. 이 경제성장으로 해서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 70%가 됐다. 이들이 민주화의 주력부대가 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12년 3월 14일 예일대 신지웅 교수와 만난 자리에서 1980년대 한국경제가 압축성장한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본인은 군인이라 무식한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대신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대한 서포트해 주었지. 뭐 말년에는 삼저호황(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현상)으로 국제경제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남한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확실히 눌러 버렸던 때도 이때였다. 나는 원래 군사작전 이외엔 전문가가 아니니까 여러 분야를 선발해 보좌진을 쓰고 주요 직을 맡겼다. 개인적으론 전혀 인연 없는 사람을 …. 내가 아는 사람보다 내 보좌진이 아는 사람들을 추천받아 썼고 그 사람들 덕을 많이 봤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안사령관 시절부터 경제교사로부터 경제를 배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보고 받는 일반정보 가운데 경제정보의 물가, 금리, 환율, 저축률, 경기변동 등 거시경제지표에 관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전 사령관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고 장덕진(張德鎭)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농림수산부장관 역임)에게 가정교사를 추천해 달라고 했고, 장 장관은 박봉환(朴鳳煥) 경제과학심의회 사무국장을 소개했다. 박 국장이 재무부차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바빠지자 한국개발연구원 김재익(金在益) 박사를 소개했던 것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스탠퍼드대학 경제학박사 출신의 김재익을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매일 아침 2시간씩 경제공부를 시작했다. 김재익이 경제의 기본원리부터 당면 문제까지 명쾌하게 설명하는 데 감복한 전두환은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를 청와대 경제수석에 임명했다. 이때 김재익이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락조건을 말하자, 전두환이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하고 내맡겼다는 이야기는 세인의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들》 p.268)〉
 
  경제 성공의 공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닌 김재익 경제수석한테 모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김재익 수석은 1983년 10월에 아웅산 테러로 타계, 그 뒤의 경제관리엔 참여하지 못했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전 대통령의 단임 실천을 가능케 했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준비한 이도 전두환 대통령이다. 이런 호재로 안보 면에서도 대북 우위를 확보했다.
 
 
  지도자의 덕목
 
1988년 11월 23일 대국민사과 담화문을 발표하고 설악산 백담사에 도착한 전두환, 이순자 부부.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2월 3일 연설문 담당 김성익 비서관을 불러 이임 기자회견 문안에 대한 지침을 내리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 가운데 첫째는 건강이라고 본다. 건강하고 체력이 강하면 매사에 자신이 있고 상황 판단이나 분석을 할 때 명확하게 할 수가 있다. 두 번째 요건은 결단력이다. 지도자는 적시(適時)에 결심하고 결단할 수 있는 판단력과 용기, 그리고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셋째는 신뢰감이 있어야 한다. 지도자는 접촉을 통해서 상대방이 믿음직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네 번째 요건은 표현능력이다. 최소한 자기의 뜻을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할 수 있는 표현능력이 필요하다. 다섯째는 인내심이다. 여섯째는 한국적 특수상황하에서는 안보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욕심을 부린다면 인간적인 매력이 있으면 좋다. 지도자는 항상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이것이 곧 국민을 위하는 마음가짐이다.〉
 
  리더들에게 용인술은 필수다. 《한비자(韓非子)》를 보면, 하군(下君)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만, 중군(中君)은 타인의 힘을 사용하고, 상군(上君)은 남의 능력을 사용한다는 말이 나온다. 바꿔 말하면, 훌륭한 리더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타인의 능력을 활용해 메우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19대 대통령에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도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용인술을 벤치마킹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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