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민-최순실 스캔들] 독대(獨對)의 정치학 : 월간조선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독대(獨對)’ 발언이 화제를 모았다. 조 장관은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임한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한 일이 없다고 했다. “정무수석이 대통령과 그 정도로 불통(不通)이었느냐”는 여론의 비판이 일었다. 독대는 제도다.

벼슬아치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임금을 알현해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일이었다. 중국 당(唐)·송(宋)시대에 만연했고 우리는 세종·성종·숙종 등 비교적 관료조직이 탄탄하고 민의를 잘 수렴했던 시대에 이에 대한 기록이 많다. 특히 세종의 경우 독대를 잘 활용했다.

세종은 위민(爲民·백성을 위하여)과 여민(與民·백성과 더불어)을 실천하기 위해 아침에 하루 두 시간씩 윤대(輪對)했다. 윤대란 누군가와 돌아가며 독대하는 것이다. 미관말직에 있는 사람들도 수시로 불러 독대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독대가 꼭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둘만의 밀담(密談)’으로 변질하면 폐해가 큰 탓이다. 독대는 잘하면 소통이지만 잘못하면 밀실 대화가 되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독대의 폐해를 차단하기 위해 독대 매뉴얼을 만들었다. 김중권 전 비서실장을 만난 이유는 이 매뉴얼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노태우 대통령, 경호실장부터 독대하더라”

김대중 정권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 실장은 대통령 독대 매뉴얼을 만들었다.

― 독대 매뉴얼이 실제 존재하나요.

“물론이죠. 제가 만들었는걸요.”

― 언제 마련한 겁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15대 대선에서 승리한 바로 다음날 전화를 주셨어요. 집에서 보자고 해서 갔더니 대뜸 ‘새 정부의 비서실장을 맡아달라’는 겁니다. 저는 사양했습니다. 노태우 정권의 정무수석을 했던 제가 새 정부의 비서실장을 맡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죠. 김 대통령께서 이틀 후에 또 불러 실장직을 권유하시더군요. 더는 거절하지 말라면서요. 1997년 12월 27일 당선자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는데, 곧장 독대 매뉴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 서두를 이유가 있었나요.

“김대중 정부는 독대 매뉴얼대로 대통령과 독대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노태우 정부 때 정무수석을 하면서 보니까 잘못된 점이 보였거든요. 취임식 전에 매뉴얼을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죠.”

― 잘못된 점이 뭐였습니까.

“노태우 정부 때 일해보니, 대통령의 비자금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돈 관리를 경호실에서 하더군요. 예전에는 다 그랬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통령이 비서실장보다 경호실장을 더 가까이하는 겁니다. 노 대통령의 경우 관저에서 아침 8시 되면 집무실로 등청하시는데, 가장 먼저 독대하는 사람이 경호실장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비서실장을 만났죠.”

― 비서실장보다 경호실장을 먼저 독대하는 것이 잘못된 건가요.

“대통령은 국정 최고 책임자잖아요. 비서실장으로부터 국정에 관한 보고를 먼저 받는 게 정상이죠. 본인의 비자금이나 신변에 대한 보고를 먼저 받으면 되겠습니까.”

― 우선 신변이 보호돼야 국정을 책임질 수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의 경우, 누구를 처음 독대하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가장 처음 입력한 정보를 신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선입견이 생겨 버리면 다른 사람이 와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 비서실장이 첫 번째로 독대해도, 잘못된 보고를 하면 똑같은 것 아닙니까.

“비서실장의 경우는 경호실장과 많이 다르죠. 왜냐하면 비서실장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합니다. 회의에서는 어제 일어났던 일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대통령의 일정, 메시지를 결정하죠. 이것을 대통령께 보고하는 것과 개인적인 의견을 보고하는 것은 다르죠.”

― 경호실장과의 독대는 밀담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솔직히 그렇죠. 돈 이야기 하면서 본인이 싫은 사람 씹을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 비서실장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독대 때 한 번도 개인적 감정이 섞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요.

“전혀 안 했죠.”

― ‘실장 덕분에 영전(榮轉)했다’ ‘실장에게 찍혀서 요직(要職)에 가지 못했다’는 말이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런가요?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스타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A, B, C 중 한 명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결정하면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세 명에 대한 검증 자료를 가져옵니다. 그러면 그 자료를 가지고 제가 대통령께 보고합니다. 대통령은 자료를 보면서 저에게 물어요. 제 생각을. 제가 주관적으로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공직기강비서관실 자료를 비교해서 가장 나은 사람을 추천합니다. 그럼 알았다고 하세요. 나중에 결과를 보면 제 의견을 존중해 줄 때가 잦았죠. 아마 이런 김 대통령의 인사방식 때문에 ‘내 덕분에 승진했다, 나한테 찍혀서 못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독대 매뉴얼 내용

조윤선 장관은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임한 11개월 동안 대통령을 독대한 일이 없다고 했다.

― 매뉴얼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습니까.

“우선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등청하자 마자 독대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설명한 구체적인 매뉴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이 관저에서 출발하는 동시에 비서실장에게 알린다—비서실장은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청와대 본관 현관 앞에서 대기한다—대통령이 현관 앞에 도착하면 영접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무실로 간다—집무실에서는 오전 수석비서관 회의 때 난 결론만을 보고 한다—이렇게 매일 대통령의 첫 독대 대상자는 비서실장이다.〉

― 비서실장만 독대할 수 있었습니까.

“총리와 수석, 장관의 경우 언제라도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전제가 있었습니다.”

― 언제라도 보고할 수 있다 했지만, 실제 제약이 있었던 겁니까.

“대통령이 총리와 수석이 보고할 때는 저를 거쳐서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저에게 왜, 어떤 내용으로 독대하려고 하는지 설명하고 올라오라는 뜻이었죠. 저한테 힘을 많이 실어주셨어요. 대통령께서는 제가 수석들의 보고 내용을 알고 있어야지, 수석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다만 세월호나 연평해전, 북핵실험과 같이 분초를 다투는 일이 벌어졌을 시에는 저한테 먼저 말할 필요 없이 바로 보고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죠.”

― 총리가 보고할 때도 비서실장이 배석했나요. 당시 총리는 김종필이라는 거물이었는데요.

“처음에는 배석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두 분이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두 분만 나눠야 할 이야기도 있겠고…. 그래서 나중에는 배석했다가 중간에 자리를 비워 드렸습니다. 그래도 김 총리께서는 대통령을 만나고 나오면 꼭 저에게 와서 나눈 말씀을 얘기해 주고 가셨죠. 김 대통령께서도 나중에 저에게 대화 내용을 얘기해 주셨고요.”

― 매뉴얼 내용은 이게 전부인가요.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저와 수석 외에 법무비서관, 민정비서관, 행사기획비서관, 국정상황실장도 독대가 가능했죠. 방식은 수석과 같았습니다.”

― 국정원장은 독대 기회가 없었나요.

“당연히 있죠. 아무리 보고할 내용이 없어도 1주에 한 번은 무조건 대통령과 독대하게 했습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아무 때나 할 수 있고요. 대통령 입장에서 국정 전반에 대한 정보를 가진 사람과의 독대는 무엇보다 중요하죠. 정치가 정보 아닙니까. 다만 너무 정치적인 보고가 되면 안 되니까 관련 수석을 배석시켰어요. 국정원장이 독대할 때는 외교·안보수석 배석, 감사원장 독대에는 민정수석 배석, 이런 식으로요.”

― 국세청장은 독대 멤버에 없네요.

“매뉴얼상 국세청장의 독대는 없었습니다.”

“매뉴얼 어긴 박지원 혼냈다”

공보수석이었던 박지원 의원은 독대 매뉴얼을 어겼다가 김중권 비서실장에게 질책을 받았다.

― 매뉴얼 내용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까.

“공무원 출신의 수석들이 직접 대통령과 독대하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정치인 출신과는 다르더라고요. 저한테 애로를 자주 호소하는 분도 계셨죠.”

― 매뉴얼은 잘 지켜졌습니까.

“제가 파악하는 한 잘 지켜졌습니다.”

― 업무시간 이외의 독대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었습니까.

“다 알 수 있었습니다. 의전비서관이 제 직속 산하에 있었으니까요.”

― 의전비서관도 모르는 극비 만남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대통령이 저에게 힘을 실어주니, 제 정보라인이 강했습니다.”

― 김 전 대통령이 동교동계의 핵심과는 비밀리에 만나지 않았나요.

“대통령이 독대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보수석이었던 박지원을 통해 의견을 전달하곤 했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박지원이 아침에 저보다 먼저 대통령과 독대를 한 것입니다. 전날 기자들과 술 한잔 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에요. 그 사람이 대단한 게 기자들과 새벽까지 술을 먹더라도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출근했어요. 어쨌든 제가 박지원을 불러서 ‘이 사람아, 사석(私席)에서 술을 먹다 나눈 이야기를 보고하면 어떡하느냐. 대통령께는 정제되고 공론화된 정보를 보고해야 한다’고 나무랐습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박지원이 제 방에 오더니 ‘실장님, 청와대에서는 실장님 뜻을 어기고는 하루도 근무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충성’이라고 말하고 가더군요. 박지원이야 워낙 김 전 대통령의 측근이니까 몰래 독대를 했겠지만, 이 사건 이후 몰래 한 적은 없습니다. ”

― 서면 보고와 독대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뭡니까.

“재택근무와 사무실에 나가서 근무하는 것이 같나요. 누구라도 집에서는 흐트러지죠. 그리고 서면으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느낄 수 없어요. 대화는 다르죠. 대화를 통해서는 진실, 상황 파악이 빨리 되잖아요. 대통령이 독대를 안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 노태우, 김대중 정부 청와대에서 활동하셨는데, 최순실 같은 비선 실세가 대통령과 독대할 수가 있었나요.

“저는 보도를 보고 믿지 못했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