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군정당국에 西獨 분할 제안한 아데나워
⊙ 토지개혁 실패, 부정부패, 독재로 자신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 응오 딘 지엠
⊙ 아일랜드자유국 독립 놓고 행보 엇갈린 데 벌레라와 마이클 콜린스
⊙ 의회민주주의 대신 敎導민주주의 내세워 독재체제 구축한 수카르노
⊙ 國父에서 권위주의 헌법의 대명사가 된 피우수트스키
⊙ 토지개혁 실패, 부정부패, 독재로 자신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 응오 딘 지엠
⊙ 아일랜드자유국 독립 놓고 행보 엇갈린 데 벌레라와 마이클 콜린스
⊙ 의회민주주의 대신 敎導민주주의 내세워 독재체제 구축한 수카르노
⊙ 國父에서 권위주의 헌법의 대명사가 된 피우수트스키
- 왼쪽부터 이승만, 이어 시계방향으로 피우수트스키(폴란드), 아데나워(독일), 데 벌레라 (아일랜드), 아타튀르크(터키).
지난 1월 중순 정치권에서는 ‘이승만(李承晩) 국부(國父)’ 논란이 있었다. 발단은 한상진(韓相震) 국민의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이었다. 그는 1월 14일 안철수(安哲秀) 의원 등과 함께 국립 4·19묘지를 참배한 후 “어느 나라든 나라를 세운 분을 ‘국부’라고 평가한다”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과(過)를 이야기하려면 많은 걸 이야기할 수 있지만 과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공(功)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를 공정하게 양면을 같이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즉각 반발을 일으켰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월 19일 퇴임 기자회견에서 “부적절한 말”이라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말씀”이라고 비판했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1월 28일 “‘국부’의 정의라는 게 나라를 세운 사람이라고 하는 측면에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결과를 나쁘게 만들었다”면서 “(이 전 대통령이) 초기에 자기 스스로가 건국을 하면서 만든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부정선거 등으로 인해 파괴를 해서 결국 불미스럽게 퇴진했다”고 말했다.
‘이승만 국부’ 발언은 국민의당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시비로 이어졌다. 4·19나 5·18 관련 단체들도 비난에 가세했다. 한상진 위원장의 발언으로 당 지지율은 3.7% 하락(1월 18~20일, 리얼미터 조사)했다.
한상진 위원장도 결국은 후퇴했다. 그는 1월 19일 4·19민주혁명회, 4·19혁명희생자유족회, 4·19혁명공로자회 회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공식 사과했다. 안철수 의원도 지난 2월 1일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국부론’은 우리 당의 입장이 아니다”라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정부 초대(初代)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첫 번째 대통령으로 헌법체계를 만들어내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실패했다. 12년간의 장기집권과 부패, 선거부정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정치권이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이승만)이 국부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을 벌인 것 자체가 굉장히 낯선 풍경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승만’이라고 하면, ‘4·19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로 논란의 대상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 논란에서는 주로 이승만이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그 밖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논란은 많다. 분단에 대한 책임, 농지개혁, 친일 청산, 비(非)민주적 통치 등….
그런데 이승만을 둘러싼 논란들을 보면 한 가지 맹점(盲點)이 있다. 철저히 국내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이승만과 비슷한 고민을 안았던 분단국이나 신생국 지도자들과 비교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이승만에 대해, 우리의 현대사에 대해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분단국가의 지도자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共委)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撤退)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1946년 6월 3일, 이른바 남선순행(南鮮巡行)에 나선 이승만이 전북 정읍에서 한 발언이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최초로 시사(示唆)한 이 ‘정읍발언’으로 인해 이승만은 아직까지도 ‘분단의 원흉(元兇)’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그해 2월 북한에서는 이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정부가 수립되어 착착 공산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사실은 외면하고 말이다. 그럼 분단의 상황에 처한 다른 나라 지도자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통일’보다 ‘西方’을 선택한 콘라트 아데나워(독일)
1945년 5월 8일 나치가 항복문서에 서명한 후,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등 4대 전승국(戰勝國)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다. 당시 독일 정치인들의 첫 번째 과제는 독일의 재(再)통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 저항한 정치가가 있었다. 바로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初代) 총리를 지낸 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였다. 그는 독일의 통일은 먼 장래의 일로 간주하고, 그보다는 서독을 서방 자유진영 안으로 편입시키는 데 주력했다.
아데나워는 독일제국 말기이던 1917년부터 16년간 쾰른 시장을 지낸 원로(元老) 정치인이었다. 1926년에는 중앙당(가톨릭계 정당, 기독교민주당의 전신)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후 반(反)나치 인사로 낙인찍혀 시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나치 정권 시절 두 차례 게슈타포(비밀경찰)에 체포됐는데, 1944년 체포됐을 때에는 강제수용소로 이송될 뻔하기도 했다. 나치 패망 직전 쾰른에 진주(進駐)한 미군이 이런 아데나워를 쾰른 시장에 임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분리주의자’ 아데나워
아데나워는 쾰른 시장으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6월 이후 당시 쾰른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영국 군정청 몰래 인접한 프랑스 군정청 관계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아데나워는 그들에게 서쪽에 라인국(國)을 두고 서독 지역을 셋으로 분할한 후 이 세 지역을 느슨한 형태의 연방으로 묶고, 장차 만들어지는 유럽합중국(合衆國)의 핵이 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그의 전기 작가들 중에서는 이를 두고 ‘어리석은 일’ ‘군정과의 야합’이라고 비판한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그가 ‘라인국’에서의 최고권력자 자리를 노리고 그랬다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아데나워가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은 새로운 독일이 두 차례 독일을 세계대전으로 몰고 갔던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전통 및 공산전체주의와 단절하고 서방세계의 일원이 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작가 귀도 크놉은 “아데나워는 소련 통치자의 독일 국민에 대한 우정이 곧 한계를 드러내자 소련이 점령한 독일 지역(동독)은 ‘얼마 동안일지 알 수 없지만 분리해 놓고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은 얼마 안 되는 인사 축에 속했다”고 말한다.
영국 군정청은 아데나워가 자신들을 제쳐놓고 프랑스 군정청과 정치적 접촉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 그해 10월 그를 해임했다. 군정청 당국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아데나워에게는 일종의 ‘훈장’이 됐다.
73세에 총리가 되다
이후 아데나워는 기독교민주당(기민당) 창당에 매진했다.
1949년 8월 14일, 기본법(헌법)이 공포되고 실시된 첫 총선에서 기민당은 31%, 사회민주당(사민당)은 29%를 얻었다.
아데나워는 의회에서 총리 선출을 앞둔 1949년 8월 21일 뢴도르프에 있는 자택으로 기민당 지도부를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상징적 존재인 대통령직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일축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총리다. 나는 73세지만 총리직을 맡고 싶다”면서 “주치의가 2년은 더 일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덧붙였다.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마련하려고 하자 “그러면 나는 일체 공직을 맡지 않고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면서 국회를 압박해서 대통령제 헌법을 관철시킨 이승만처럼, 아데나워도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다른 기민당 지도자들은 고령의 아데나워를 ‘과도기적 지도자’로 생각하고, 아데나워를 총리 후보로 내세우는 데 동의했다. 아무도 그가 이후 14년이나 집권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몇몇 인사는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민당과의 대연정(大聯政)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데나워는 이에 반대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민당과 대연정을 할 경우, 자신이 구상하는 친(親)서방정책에 차질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西方세계 편입 위해 노력
그해 9월 15일 총리 선거에서 아데나워는 불과 한 표 차이로 총리에 당선됐다. 취임사에서 아데나워는 “독일의 분단은 언젠가 다시 사라질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출신과 성향을 볼 때 우리는 서유럽세계에 속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이는 이후 그의 대외(對外)정책, 그리고 독일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직후 아데나워는 각료들을 데리고 미국·영국·프랑스 군정장관을 예방(禮訪)했다. 군정장관들은 양탄자 위에 서서 그들을 맞았다. 독일인은 양탄자 위에 서지 말라는 의미였다. 아직 서독은 온전한 주권국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데나워는 모르는 척하고 양탄자 위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었다. 독일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언젠가 연합국과 동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독을 서유럽 내지 서방세계의 일원으로 확고하게 편입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독일의 재무장(再武裝)과 서유럽방위체제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그 유력한 수단이었다. 유럽방위공동체(EDC) 창설 시도(1952년)는 프랑스의 반대로 실패했지만, 결국 1955년 주권 회복과 함께 NATO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다. 1952년에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 가입했다. ECSC는 오늘날 EU(유럽공동체)로 가는 첫걸음이 됐다. 같은 해 5월에는 독일의 향후 주권 회복을 약속하는 독일조약을 체결했다. 1952년 9월 이스라엘과의 배상협정을 체결한 것도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적(宿敵)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이었다. 이를 위해 아데나워는 재직 중 26번이나 파리를 방문했다. 이러한 노력은 1963년 1월 독불(獨佛)우호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아데나워가 파리 다음으로 많이 방문한 곳은 워싱턴(10회)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외교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아데나워는 1955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 자신이 겸직하고 있는 외무부 장관뿐인 이 내각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푸념하면서….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외교문서까지 직접 구술(口述)해서 작성하고, 외무부 장관을 외교담당 비서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흡사하다.
스탈린의 中立化 통일 제안 거부
반면에 아데나워는 독일 통일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통일보다는 서독과 서방세계가 힘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통일’을 위해서는 서독이 서방세계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완강히 반대했다.
1952년 3월 스탈린은 ‘독일 전(全) 지역에서 자유선거를 통한 독일의 재통일’을 제안했다. 아데나워는 이를 거부했다. 스탈린의 제안에는 ‘통일 독일의 중립화(中立化)’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스탈린의 제안이 나온 직후 “독일 전 지역을 진공 상태로 만든 후 소련은 지리적 인접성과 권력수단을 이용, 독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려 한다”며 이를 일축했다. 야당인 사민당의 쿠르트 슈마허 총재는 “전승 4개국과 협상을 벌여 통일에 유일한 ‘기회’를 활용하라”고 촉구했다.
아데나워는 “서방이 힘을 충분히 키우는 것만이 소련으로 하여금 영향권(影響圈)을 내놓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냉전(冷戰) 상황 아래서 독일의 재통일은 날이 갈수록 요원해 보였다. “힘을 키워 재통일한다”는 아데나워의 주장은 ‘반(反)통일적’인 것으로 비쳤다. 반대자들은 ‘신생 공화국의 평생 거짓말’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1990년 독일 통일은 아데나워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아데나워는 공산주의와 맞서기 위해 ‘과거사 청산’을 유보했다. 나치 청산과 관련해 그는 ‘진짜 죄지은 사람들만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치 핵심분자들에 대한 처벌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등을 통해 일단락되었다고 보았다. 독일이 재무장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독일군(연방군)에 나치 독일군에 복무했던 고급장교들도 받아들일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런 질문을 받고 아데나워는 “내가 NATO를 방문했을 때, 18세 먹은 장군이 군대 사열에 동참할 수는 없지 않겠소?”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나치 독일군에서 육군 소장까지 지냈던 라인하르트 겔렌은 연방정보부장을 지냈다. 악명 높은 나치 인종차별법인 뉘른베르크법의 해설서를 썼던 내무관료 출신 한스 글로프케는 총리실장으로 중용됐다. 기민당 출신으로 제3대 서독 총리를 지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는 나치 시절 외무부 라디오정책국 부국장 출신이었다.
경제 재건이 시급하던 상황에서, 그리고 반나치인사로 투옥경력이 있는 아데나워의 카리스마 통치 시절에는, 과거사 문제는 덮어졌다. 하지만 아데나워 퇴진 이후, 68운동 시기에 젊은 세대들은 과거사 청산 문제를 들고나왔다.
국내 정치적으로 임기 말년이 될수록 아데나워는 고집불통이 되어갔다. 특히 후계자 선정을 미루었고, 후계자로 거명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를 못미더워해 못살게 굴었다. 그를 ‘영감’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던 국민들도 점차 그에게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1963년 아데나워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누가 독일에서 가장 큰 업적을 이루었는가’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33%는 아데나워라고 답했다. 2위는 8%를 얻은 비스마르크였다. 작가 귀도 크놉은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비스마르크의 체제는 이를 세운 건축가가 사망한 후 연약한 건물임에 불과했음이 판명되었으나, 아데나워의 그것은 사후 1989~90년에 독일이 통일되면서 정당성을 부여받았다”면서 “아데나워의 정적(政敵)조차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이 친서방정책을 취했던 것이 당시에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시인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패한 건국 지도자 ― 응오 딘 지엠(베트남)
콘라트 아데나워와 서독이 분단 후 체제경쟁에서 승리한 행복한 사례라면, 그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응오 딘 지엠(吳廷琰·1901~1963)과 그가 세운 월남공화국(남베트남)이 그 경우이다.
응오 딘 지엠(이하 지엠)이 태어났을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남부(코친차이나)는 직할령(直轄領), 북부(통킹)는 반보호령(半保護領), 중부(안남)는 보호령이었다. 중부에서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조(阮朝)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제 통치를 하는 것은 프랑스 총독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황실이 존속하고는 있었지만 실권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행사했던 대한제국의 상황을 연상하면 된다.
지엠은 대학 졸업 후 고향 쿠양빈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20대에 300개 마을을 관리하는 감독관과 지방군 대장을 지냈다. 당연히 프랑스 식민당국과는 어느 정도 협력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시기 농민반란 등을 겪으면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됐다.
1933년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바오다이(保大) 황제는 32세에 불과한 지엠을 내무장관으로 발탁했다. 하지만 지엠은 황제의 친불(親佛)정책에 항의해 3개월 만에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10년간 그는 야인(野人)생활을 했다.
1942년 지엠은 인도차이나반도에 진주한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어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반일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했다가 발각되자 그는 1944년 남부 사이공(현 호찌민)으로 탈출했다.
분단
일본이 패망한 후인 1945년 8월 19일 호찌민(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월맹·베트민)은 하노이를 장악했다. 8월 30일 바오다이는 황권(皇權)을 상징하는 황금보도(寶刀)를 베트민 대표에게 넘겨주고 퇴위했다.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현재의 국명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식민질서를 재건하려 했다. 그 바람에 1946년 11월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시작됐다. 사이공에서 언론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던 지엠은 호찌민으로부터 입각(入閣)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1949년 3월 프랑스는 통킹과 안남은 물론 코친차이나까지 아우르는 베트남국을 수립하고, 국가주석으로 바오다이를 옹립했다. 바오다이 아래 베트남의 우익 민족주의 세력을 묶어 호찌민에게 대항하게 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베트남 분단의 씨앗은 이때 뿌려진 셈이다. 이 시기 지엠은 바오다이 정권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미국, 프랑스, 벨기에 등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에서 2개월 동안 저항하던 프랑스군이 보 구엔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군(북베트남군)에게 항복했다. 그해 6월 제네바회의에서 프랑스, 미국, 중국, 소련 등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북에서 철수하는 프랑스군을 따라 60만명의 가톨릭 교도를 비롯해 80만~90만명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지엠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라는 보호자를 잃은 바오다이는 1954년 6월 지엠을 총리로 임명했다. 미국은 독실한 가톨릭교도이자 반공주의자인 지엠의 등장을 환영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존 F. 덜레스 국무장관, 존 F. 케네디 상원의원, 마이클 맨스필드 상원의원,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 등 미국의 유력인사들이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지엠은 1955년 10월 공화국 수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98.2%가 찬성했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당연히 지엠이었다. 이미 북쪽에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괴뢰정권이었던 바오다이 정권의 잔해(殘骸) 위에 수립된 지엠의 정권은 정통성 면에서 취약했다. 1956년 북베트남이 제네바회담에서 결정된 바에 따라 남북 간 총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했지만, 지엠 정권이 거절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조차 “당시 총선거가 실시됐다면 유권자의 80%는 틀림없이 호찌민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원조에 안주
그럼에도 지엠의 공화국이 출범 초기 비교적 순항했던 것은 미국의 원조 덕분이었다. 그가 집권했던 1956~63년에 미국은 70억 달러의 원조(이 중 3분의 2가 군사원조)를 제공했다. 미국의 원조는 전체 예산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원조가 소비재 부문과 군사 부문에 편중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이승만 정권 시절 한국의 경우와 유사하다. 1950~60년 미국은 한국에 24억1000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이승만 정부는 원조물자를 판매한 대충(對充)자금으로 나라살림을 꾸려나갔는데, 그것이 당시 정부수입의 70%를 넘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승만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비료·시멘트 공장 건설, 실험용 원자로 도입 등 산업화의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지엠 정권은 미국의 원조에 안주하면서 그러한 노력을 게을리했다.
지엠 정권과 이승만 정권의 결정적인 차이는 토지개혁이었다. 당시 토지개혁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던 아시아 국가들에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국·일본·대만 등에서의 토지개혁의 이념을 제공한 미국의 울프 라데진스키는 “러시아혁명 당시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줌으로써 단호하게 토지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면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정권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토지개혁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첩경이라는 인식 아래 이승만 정권, 대만으로 쫓겨간 장제스(蔣介石) 정권, 그리고 맥아더사령부의 점령 아래 있던 일본의 요시다 정권은 토지개혁을 서둘렀고, 성공했다.
토지개혁 실패
지엠 정권이 들어설 무렵,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에서도 과격한 토지개혁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5000~5만명이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남베트남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은 북에서 실시되고 있다는 토지개혁 소식에 들떴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지엠 정권은 토지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엠 정권은 1956년 10월 토지개혁법을 공포했다. 토지 소유를 100ha로 제한하고 그 이상 되는 토지는 국가가 사들여서 소작인,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 상이군인 등에게 분배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법에는 허점이 많았다. 이런 식으로 토지를 분배받아 자작농이 될 수 있는 농가는 전체 농가의 3분의 1에 불과했다는 것이 가장 큰 한계점이었다. 100ha 미만의 토지를 가진 지주들은 그대로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 소작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소작료도 여전히 높았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6년에 걸쳐 대금을 상환해야 했지만, 그 대금이 너무 높아서 소정의 기한 내에 납부하기 어려웠다.
결국 토지개혁은 농민들의 어려움이나 불만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 농민들은 토지개혁을 약속하는 베트콩의 지지자가 되었다. 1961년 가을 미국이 추산한 바에 의하면, 남베트남에는 인구의 2%에 달하는 20만명의 베트콩 동조자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베트남전 전황(戰況)이 악화되어 가던 1969년 구엔 반 티우(阮文紹) 정권은 보다 철저한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이는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과는 대조적이다. 농지개혁은 3정보(약 3ha) 이상의 농지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지주-소작제를 철저하게 해체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공포한 후,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며 농림부를 독려했다. 농림부는 시행령도 만들어지기 전에 농지분배에 들어가 1950년 6·25 발발 직전까지 70~80%의 농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다. 농민 한 사람 앞에 돌아간 농지는 평균 0.36정보에 불과했지만, ‘내 땅’을 가질 수 있게 된 농민들은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6·25 당시 인민군은 점령지 내에서 토지개혁을 요란하게 시행했지만, 대부분의 농민은 거기에 현혹되지 않았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지엠 정권의 독재와 부패였다. 지엠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이유로 자신을 비판하는 야당을 불법화하고, 언론을 탄압했으며, 정권의 비판자들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었다. 물론 남베트남 내에 공산주의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5년 분단 이후에도 5000~1만명가량의 공산주의자들이 남베트남에 남아 암약(暗躍)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6년 이후 지엠 정권이 공산주의자라고 체포한 이들의 숫자는 5만여 명이 넘었다.
더 나쁜 것은 족벌(族閥)통치였다. 동생인 응오 딘 누는 비밀경찰의 책임자로 악명 높았다. 작은동생은 주영대사, 동생의 처삼촌은 외무장관과 대법원장, 동생의 처제는 중부지역 군사령관, 동생의 장인은 주미대사, 장모는 주UN대사, 조카사위는 국방장관을 지냈다.
거기에다가 편협한 가톨릭 교도인 지엠은 국민의 90%를 차지하는 불교도들을 차별하고 탄압했다. 이에 항의해 1963년 6월 11일 66세의 노승(老僧) 틱꽝득(釋廣德)이 사이공 시내 한복판에서 분신(焚身)했다. 이 사실은 사진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를 보고 응오 딘 누의 아내(마담 누)는 “승려 한 명이 바비큐가 되었을 뿐”이라고 말해 공분(公憤)을 불러 일으켰다.
쿠데타로 피살
이런 혼돈 속에서 북베트남의 적화(赤化)공작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1959년 1월 베트남노동당(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적극적인 대남공세를 취하기로 결의하고, 남부 출신 공산당원과 무기, 물자들을 남파하기 시작했다.
1960년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야당, 불교도, 소수민족, 진보적 지식인 등 반(反)지엠 정권 세력을 묶어서 공산주의 전위(前衛)조직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다. 이들이 흔히 말하는 베트콩(‘베트남 공산주의자’라는 의미)이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공산주의 대신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미제(美帝)의 식민정부 지엠 정권 타도’를 외쳤다. 1963년 1월에는 사이공에서 불과 60km 떨어진 업박이라는 마을에서 남베트남군과 베트콩 간에 교전(交戰)이 벌어졌다. 1960년 11월에는 군부 내 우익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도 지엠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63년 9월 케네디 대통령은 지엠 정권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지엠 정권에 대한 원조를 줄였다.
남베트남 군부는 케네디 정부의 조치를 쿠데타 지지 사인으로 받아들였다. 1963년 11월 1일 즈엉 반 민(楊文明) 장군 등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지엠과 동생 누는 쿠데타군에게 체포되어 장갑차로 압송되던 도중 살해당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군인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쿠데타가 되풀이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했지만,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실패했다. 미국은 결국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 문제에서 손을 뗐다. 2년 뒤인 1975년 1월, 북베트남은 전면 남침(南侵)을 개시했다. 석 달 후인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전차(戰車)가 철문을 부수며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獨立宮)에 진입했다. 지엠이 세운 베트남공화국(월남공화국)은 이렇게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데 벌레라와 마이클 콜린스 ― 아일랜드의 이승만과 김구
이승만과 김구는 독립운동 기간 내내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승만은 외교·선전활동을 통해, 김구는 의열(義烈)투쟁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에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반공주의자였다. 해방 이후에도 두 사람은 때때로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신탁통치 반대 등에서 노선을 같이했다. 김구는 이승만을 ‘형’으로, ‘국부(國父)’로 존숭했고, 이승만도 그런 김구를 ‘아우님’이라고 불렀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는 1947년 9월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고, 그해 11월 유엔이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독립정부 수립을 결의한 후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이듬해 4월 19일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38선을 넘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 공산집단에게 이용만 당한 채 돌아왔고, 이후 국내 정치에서 소외되었다. 이듬해 6월 김구는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그리고 1950년 김일성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됐다.
우리처럼 오랜 독립 투쟁 끝에 건국을 앞두고 ‘완전독립-완전통일’이냐, 아니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독립과 통일이냐를 놓고 갈등과 동족상잔을 빚은 사례가 있다. 바로 아일랜드의 경우다.
영국 지배 740년
켈트족의 땅인 아일랜드를 게르만족(앵글로색슨족, 노르만족 등) 계열인 잉글랜드가 침공해 온 것은 1172년 헨리2세 때였다. 이후 잉글랜드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혹자는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가 740여 년에 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1541년에는 헨리8세가 아일랜드 국왕을 겸했다. 1641년에는 신교도 공화국을 이끌던 올리버 크롬웰이 침공해 와 대학살을 감행했다. 이와 함께 16세기경부터 영국 본토에서 스코틀랜드의 신교도들이 아일랜드로 이주, 북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에서 건너온 신교도들은 지주계급을 형성, 소작농으로 전락한 아일랜드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특히 1845~1850년 감자대기근 때에는 1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100만명이 넘는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으로 떠났다.
18세기 후반부터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영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은 1801년 합병법을 만들어 아일랜드 의회마저 영국 의회에 통합했다. 19세기 말 이후 글래드스턴 등 아일랜드 문제에 관심을 가진 자유당 정치인들은 여러 차례 아일랜드자치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보수 정치인들이나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은 아일랜드 자치에 완강히 반대했다.
부활절 봉기
1916년 4월 24일 부활절 아침 패트릭 헨리 피어스가 이끄는 아일랜드공화국형제단(IRB) 병력이 더블린에서 봉기했다. 6일간 계속된 이 봉기로 IRB, 영국군, 더블린 시민 450명이 죽고 26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사실 많은 아일랜드인은 봉기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영국의 식민통치도 싫지만, IRB 등의 과격투쟁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영국 정부의 사후 대처였다. 독일과 전쟁 중이던 영국은 후방에서의 무장봉기에 대해 극히 민감하게 대응했다. 주동자 15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해 처형했다. 과거에도 곧잘 있었던 작은 무력 분규의 하나로 생각하고 관대한 처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일랜드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처형된 사람들은 조지 버나드 쇼가 말한 것처럼 ‘성인(聖人)’이 되었다. 이후 독립을 외치는 아일랜드인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영국군이 봉기의 주동자들을 처형할 때 사형선고를 받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에이몬 데 벌레라(1882~1975)였다. 봉기군의 지대(支隊) 지휘관이었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 아일랜드인 어머니와 스페인계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였다. 미국 시민권이 그를 살렸다. 감옥에서 데 벌레라는 무장투쟁노선에 회의(懷疑)하게 되었다.
부활절 봉기로 많은 투사가 세상을 떠난 후,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때 등장한 또 다른 인물이 마이클 콜린스(1890~1922)였다. 부활절 봉기 당시 IRB의 말단 요원이었던 그는 지도부 처형 이후 급속히 부상(浮上)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의 정당인 신페인당의 정보부장이 된 그는 군대를 편성해 영국군과 정면 대결하는 방식을 지양(止揚)하고, 군경(軍警) 기습, 암살, 폭파 등으로 투쟁방식을 바꾸었다. 최근까지도 북아일랜드에서 반영무장투쟁을 벌였던 IRA(아일랜드공화국군)의 창설자가 바로 마이클 콜린스이다.
1918년 12월 총선에서 아일랜드 지역에서는 독립노선의 신페인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신페인당은 105석 중 73석을 차지했다. 데 벌레라, 마이클 콜린스, 아서 그리피스 등도 당선되었다. 신페인당 소속 당선자들은 웨스트민스터(영국 의회)로 등원(登院)하는 대신 아일랜드 의회 결성과 아일랜드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데 벌레라가 의회 의장, 아서 그리피스가 부의장이 되었다.
미국에서 외교독립운동
데 벌레라는 1918년 5월 영국 당국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지만, 얼마 후 탈옥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참석, 아일랜드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 벌레라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그는 미국 내 아일랜드인들과 정계 인사들에게 아일랜드의 독립을 호소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데 벌레라는 의회 의장(Priomh Aire)이라는 호칭 대신 대통령(President)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데 벌레라는 550만 달러나 모금했는데, 이들 중 4분의 1가량은 미국에서 자신이 소비하고 나머지 돈도 아일랜드 국내에서 자신의 세력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했다 하여 논란이 되었다. 데 벌레라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마이클 콜린스는 정부를 이끌고, 대영투쟁을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시기 데 벌레라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 이승만과 흡사하다. 이승만도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 미국 내 여론에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직함은 ‘집정관 총재’였지만 ‘대통령(President)’으로 자칭한 것도 비슷하다. 하와이 교민들로부터 모금한 돈의 용처를 놓고 구설에 오른 것도 흡사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이승만의 뒤에는 재미교포가 1만명 남짓에 불과했지만, 데 벌레라 뒤에는 2000만명이 넘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있었다. 윌슨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인들은 이들의 표를 의식해 데 벌레라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은 영국 정부에 대해 입장을 바꾸도록 압력을 가했다.
결국 오랜 무력분쟁과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영국은 1921년 7월 아일랜드 측에 휴전을 제안해 왔다. 데 벌레라는 영국으로 건너가 로이드 조지 총리, 윈스턴 처칠 식민장관 등과 만나 탐색전을 벌였다. 이후 데 벌레라는 마이클 콜린스, 아서 그리피스 등을 협상대표로 임명해 영국으로 보냈다. 데 벌레라는 “영국의 국가원수(元首)인 조지5세가 나오지 않는데, 아일랜드의 원수인 내가 나갈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만족스럽지 못한 협상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견하고 회담 참석을 기피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데 벌레라는 협상단에게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지침을 주었다.
20~30대인 아일랜드 협상단은 로이드 조지나 윈스턴 처칠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대영제국의 거물 정치인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일랜드 협상단은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은 영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드 조지는 “아일랜드가 이 협상안을 거부할 경우 다시 군대를 투입해 아일랜드를 점령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아일랜드 측의 무장투쟁 역량은 이미 바닥이 나 있었다. 투쟁의 총책임자였던 마이클 콜린스 자신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英-아일랜드 협정과 內戰
1921년 12월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협상이 타결됐다. 아일랜드는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아일랜드자유국으로 독립하되, 신교도들이 많이 사는 북부 6개 주(州)는 영국 통치 아래 남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이 협정을 통해 ‘자유를 성취하기 위한 자유’를 가져왔다”면서도 “이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사형선고장에 서명한 셈”이라고 자조(自嘲)했다.
협정은 북아일랜드까지 포괄하는 완전한 공화국 수립을 위해 투쟁해 왔던 많은 아일랜드인에게는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일랜드의 여론은 양분됐다. 데 벌레라는 “북아일랜드는 둘째치더라도 나는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내각과 의회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내각과 의회가 모두 협정을 승인하자 의장(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데 벌레라는 전국을 돌면서 “협정이 받아들여지면 내전(內戰)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2년 6월 실시된 총선에서도 조약 찬성파가 승리하자 내전이 발생했다. 어제의 동지들이 한편은 아일랜드정부군, 다른 한편은 IRA반란군이 되어 싸웠다. 마이클 콜린스는 내전이 발발한 지 두 달여가 지난 그해 8월 IRA에 의해 암살당했다. 콜린스의 암살 소식을 접한 데 벌레라는 “마이클 콜린스는 이제 성자(聖者)가 되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내전은 이듬해 5월까지 계속됐다. 부활절 봉기에서 아일랜드 내전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 리암 니슨 주연의 〈마이클 콜린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등을 보면, 이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고민과 참담함이 잘 나타나 있다. 벌레라는 내전이 정부군의 승리로 끝난 후인 1923년 8월 체포되어 1924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데 벌레라, “콜린스가 옳았다”
신생 아일랜드는 내전의 상처를 빨리 씻어버렸다. 아서 그리피스의 뒤를 이어 윌리엄 T. 코스그레이브가 집행위원회 의장(총리)이 됐다. 데 벌레라는 피아나 페일(Fianna Fáil. ‘신(神)의 투사들(Soldier's of Destiny)’이라는 뜻으로 흔히 ‘아일랜드공화당’으로 번역)을 창당, 야당 지도자가 됐다. 1932년 데 벌레라는 총선에서 승리, 집행위원회 의장(총리)이 됐다. 이후 데 벌레라는 헌법에서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 조항을 삭제하는 등 점진적으로 영국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1937년에는 헌법을 개정, 공화정을 선포했다.
이후 데 벌레라는 1937~1948년, 1951~54년, 1957~1959년 총리를, 1959~1973년에는 대통령을 지냈다. 독선적인 성격의 데 벌레라는 재임 중 다소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기는 했지만, 민주주의 원칙 자체를 훼손하지는 않았다. 그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다. 선거에 따라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데 벌레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영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중립정책을 고수했다.
결단의 순간에 이승만처럼 외교독립노선을 추구했던 데 벌레라가 ‘완전한 공화국 수립’이라는 원칙론을 고수한 반면, 테러투쟁을 했던 마이클 콜린스가 현실을 받아들인 것은 아이러니다. 마이클 콜린스도 김구처럼 암살을 당함으로써 ‘신화(神話)’가 됐다. 말년에 데 벌레라는 1921년 협정 당시 마이클 콜린스가 취한 입장이 옳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북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것을 한(恨)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에서]
이승만은 민족사상 처음으로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자유민주공화국을 건설했다. 이인호(李仁浩) 서울대 명예교수의 말처럼 ‘건국혁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업적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 것도, 6·25전쟁 중 지방선거를 실시한 것도 이승만이었다. 한상진 국민의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이 지난 1월 14일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은 원래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 분이었다. 그 공로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 만들어진 뿌리가, 잠재력이 성장해서 4·19혁명에 의해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가 우리나라에 확립됐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한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발췌개헌과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진보당 사건, 그리고 3·15부정선거 등은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이승만의 흠으로 지적된다. “자기 스스로가 건국을 하면서 만든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부정선거 등으로 인해 파괴를 해서 결국 불미스럽게 퇴진했다”고 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의 말은 그런 인식을 대변한다. 그러면 다른 신생국들의 지도자들은 어떠했을까?
의회민주주의에서 敎導민주주의로 ― 수카르노(인도네시아)
아메드 수카르노(1901~1966)는 1920년대 후반부터 네덜란드의 식민통치에 맞서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투쟁해 온 인물이었다. 1933년부터 10년간 유형생활을 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로 진주하자 이에 협력하면서 독립의 기회를 엿보았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네덜란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식민질서를 재건하려 했다. 이후 5년간 지루한 독립전쟁 끝에 인도네시아는 1950년 8월 17일 독립국가로 출범했다.
다른 신생국들처럼 1950년대 인도네시아는 경제난·빈곤·지역분리주의·지역갈등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서구의 제도를 모방한 의회민주주의가 실시되었지만, 정국(政局)은 좀처럼 안정되지 못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 수카르노와 내각의 갈등이었다. 1945년 임시헌법에서는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독립 후 제정된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갖고 있는 권한 가운데 상당 부분을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에 넘겨주었다.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수카르노는 대중선동 정치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6년 10월, “서구 선진국가들과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조건이 다른 인도네시아에서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교도(敎導)민주주의’를 제창했다. 인도네시아의 마을 공동체 회의에서 장로(長老)들이 주민들 사이의 토론을 지도, 조정하면서, 민주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전통을 국가 운영에 원용(援用)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였다. 물론 국민들을 ‘교도’하는 것은 수카르노 자신이어야 했다.
의회 해산, 終身 대통령
1959년 2월 수카르노는 제헌의회를 새로 소집,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던 1945년 헌법의 부활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수카르노는 같은 해 7월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비(非)합법적인 대통령 포고를 통해 1945년 헌법의 부활을 선언했다. 수카르노는 주(州)지사 임면권(任免權), 국민협의회(MPR·인도네시아의 최고 통치기구, 유신헌법하의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사) 의원 임면권, 정당 해산권 등을 손에 넣었다. 지방세력이 반발하자 계엄령을 선포해 억눌렀다. 1960년 3월에는 의회를 해산했다. 수카르노가 임명한 공산주의자, 직능 대표들로 구성된 ‘협동의회’가 의회를 대신했다. 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가기구는 사라지고, 반대 정당들이나 비판적인 언론사는 문을 닫았다. 1963년 수카르노는 꼭두각시 의회에 의해 종신(終身)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누적되자 수카르노는 외부의 적(敵)을 만드는 것으로 이를 무마하려 들었다. 옛 식민종주국이었던 네덜란드, 이웃 나라 말레이시아 등이 그 대상이 됐다. 이와 함께 수카르노는 비동맹(非同盟) 외교를 강화했다. ‘자카르타-프놈펜-베이징(北京)-평양’ 축선(軸線)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과는 인도네시아의 국제적 고립과 경제난이었다.
수카르노의 외교정책은 소련과 중국(중공)으로의 접근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수카르노가 이들로부터 얻어낸 원조는 민생이나 경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립경기장 건설 등 상징 조작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건강이 악화된 수카르노가 중국 의료진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도네시아의 친공(親共)·친(親)중국 노선은 더욱 강화되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당수 아이디트는 1962년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했다.
이에 고무된 군부 내 공산세력은 자기들의 위치를 굳히기 위해 1965년 9월 30일 밤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군은 야니 육군장관 등 반공적인 군 장성들을 습격, 살해했다.
선동 정치가의 최후
쿠데타를 진압한 것은 자카르타 주둔 전략예비군 사령관 모하마드 수하르토 소장(少將·1921~2008)이었다. 이 과정에서 반공적인 이슬람청년조직 등이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공산주의자, 그리고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학살당했다. 그 수는 25만~1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군부의 실권(實權)을 장악한 수하르토는 1967년 3월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1968년 3월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것은 새로운 독재의 시작이었다. 수카르노는 1970년 6월 21일 연금(軟禁) 상태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내정이나 외교 등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개인적 이상(?)을 추구하면서 자신과 나라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그의 저서 《지도자들》에서 수카르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혁명 지도자들 가운데서 사회체제를 해체시키는 데는 전문가였으나 그것을 재건할 줄 몰랐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고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수카르노는 지도력에 관한 불행한 사실 하나를 보여주었다. 이는 국민들의 감정을 사로잡는 데 가장 유능한 지도자는 때때로 가장 비참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는 점이다.
민중 선동은 효과가 있다. 책임감을 결여하였던 수카르노는 선동으로 가장 충동적인 힘을 만들어 그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신의 호소를 교묘하게 꾸밀 수 있었다. 두려움과 미움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선동은 이러한 감정들을 움직일 수 있다. 희망도 강력한 힘을 가지며, 선동은 그릇된 희망을 높인다.”
그래도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그를 기억해 주었다. 그의 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는 1983년 야당이던 인도네시아민주당에서 정치활동을 시작, 1993년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6년 수하르토 정권에 의해 당수직을 박탈당했다. 1999년 민주투쟁당을 창당해 제1당이 되었고, 그해 10월 대선에서 부통령이 됐다. 2001년 7월 압둘 라만 와히드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최고권력기구인 국민협의회(MPR)에서 부패와 실정으로 탄핵된 후 대통령직을 승계, 2004년까지 재임했다.
新대통령제 헌법의 元祖 ― 피우수트스키(폴란드)
헌법 교과서를 보면 ‘신(新)대통령제 헌법’이라는 말이 나온다. 형식적으로 3권 분립 등을 규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헌법을 말한다. 이런 신대통령제 헌법의 원조(元祖)가 바로 1935년 제정된 폴란드의 피우수트스키 헌법이다.
‘피우수트스키 헌법’이라는 말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1867~1935)에게서 나왔다. 그는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로 멸망한 이후 123년 만에 독립을 회복한 폴란드의 첫 번째 국가원수였다.
피우수트스키는 제정(帝政)러시아 치하에서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추구하던 폴란드사회당 지도자였다. 비록 사회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적 성향보다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일본을 방문, 반러시아 투쟁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소련의 침공 물리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인 부대를 편성,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협력했다. 1916년 그는 2개 폴란드군 사단을 편성했다. 독일군은 이 부대에 독일 황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요구했다.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정부 없이는 폴란드 군대도 있을 수 없다”면서 폴란드 독립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요구했다. 피우수트스키가 자신의 요구를 꺾지 않자 독일군은 그를 마그데부르크성에 구금했다. 이 사건 이후 피우수트스키는 일신의 안녕을 희생하면서까지 외세에 맞선 민족영웅으로 폴란드인들에게 각인되었다.
1918년 10월 종전이 가까워 오자 폴란드 정치인들은 바르샤바의 통치권을 갖고 있던 섭정위원회를 통해 독일에 피우수트스키의 석방을 요청했다. 좌우 갈등이 극심한 당시 상황을 타개해 나갈 사람은 피우수트스키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해 11월 10일 피우수트스키가 바르샤바로 돌아오자, 폴란드 내 모든 정치세력과 무장세력은 그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섭정위원회는 모든 권력을 피우수트스키에게 양도했다. 임시 국가원수가 된 피우수트스키는 “제헌의회가 구성되면 모든 권력을 의회에 양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듬해 1월 제헌의회가 구성되자 피우수트스키는 다음달에 권력을 의회에 양도했다. 의회는 그에게 국가원수 겸 군(軍) 최고사령관직을 다시 맡겼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피우수트스키는 이즈음에는 철저한 민족주의자, 국가주의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나는 독립이라는 정거장에서 붉은 열차에서 내렸다”고 공언했다. 당시 이웃 강국인 독일과 러시아는 패전과 혁명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 틈을 타서 중세 중동부 유럽의 강국이었던 폴란드의 영광을 재현해 보려 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백러시아), 리투아니아로 팽창정책을 펼쳤다. 1919~1921년에는 소련과 전쟁을 벌였다. 1920년 8월 폴란드군은 바르샤바 전투에서 소련군을 격퇴, 볼셰비키 세력의 서방 진출을 저지했다. 이때 소련군 지휘관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고, 정치위원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이러한 승리 덕분에 신생 폴란드는 38만8600km2의 영토와 2780만명의 인구를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구의 30%는 소수(少數)민족이었다. 이는 이후 폴란드 정치의 불안요인이 됐다.
1921년 제정된 폴란드 헌법은 대통령을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선출하되,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역할만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건국 과정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피우수트스키를 의식한 조치였다. 그러자 피우수트스키는 1922년 대선에 출마하는 것을 거절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G. 나루토비츠는 취임 이틀 만에 암살당했다.
유혈쿠데타로 집권
1923년 5월 피우수트스키는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어 7월에는 군사위원회 의장직도 내놓았다. 의회 및 집권 민족민주당과의 갈등이 주된 이유였다.
1921~1926년 사이에 내각이 9번이나 교체됐다.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은 의회민주주의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1926년 5월 12일 피우수트스키는 자신을 지지하는 국방장관 T. 젤리코프스키가 제공한 군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부군과 쿠데타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000여 명의 군인들이 전사(戰死)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어느 편에 섰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들이 사랑하고 똑같이 충성했던 조국 폴란드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애도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피우수트스키는 외형상 헌정 질서를 유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쿠데타 직후인 5월 31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지만, 스스로 사임했다. 그의 추종자인 I. 모시치스키가 대통령이 됐다. 대신 피우수트스키는 국방장관을 맡아 실권을 행사했다. 1926년 말에는 장군 및 대령급 장교들이 주축인 ‘전투내각’을 구성했다. 1932년 6월 크라쿠프에서 의회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반정부집회가 일어나자 피우수트스키는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해 재판도 없이 동부 지방의 성채에 감금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절대 권력자였지만 애국심이 강했고, 검소했으며, 부정부패를 미워했다. 하지만 국내 정치 발전이나 경제 발전을 위한 계획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국가안보와 대외정책이었다. 1932년에는 소련, 1934년에는 나치 독일과 불가침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러한 불가침협정이 나라의 안보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4월 헌법’
1935년 1월 국회는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헌법을 제정했다. 대통령에게 ‘신(神)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부과한 데서부터 권위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 상원의원 3분의 1에 대한 임명권, 전시(戰時) 후계자 임명권 등 절대권력을 부여했다. 한마디로 피우수트스키 한 사람을 위한 헌법이었다. 그해 4월 공포, 발효되었다고 해서 ‘4월 헌법’이라고도 하는 이 헌법은 후일 샤를 드골의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정작 피우수트스키 자신은 이 헌법에 따른 과실(果實)을 맛보지 못했다. 9년 전 쿠데타를 일으켰던 그 해 5월 12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몇 명의 후계자가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어 피우수트스키가 없는 피우수트스키 체제를 물려받았다. 겉보기에는 튼튼해 보였지만, 속은 곯은 체제였다. 취약한 경제력 때문에 군대를 현대화하는 데 실패했고, 30%에 달하는 소수민족들 때문에 사회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주변국들과는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와 스탈린이 동서 양쪽에서 쳐들어왔을 때 폴란드는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피우수트스키는 평생 나라의 안보를 걱정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만에 폴란드는 다시 망국(亡國)의 비운(悲運)을 겪어야 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에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해 44년간 질곡에 시달려야 했다.
공산정권 시절 피우수트스키는 잊혔다. 하지만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그는 ‘민족영웅’으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1당 독재와 계엄통치 ― 장제스(대만)
대만의 장제스(蔣介石・1887~1975) 총통은 흔히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대륙을 빼앗긴 부패하고 무능한 지도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중국계 미국 역사학자 레이황(黃仁宇)은 그를 신해혁명 이후 해체되었던 국가라는 상부구조를 재건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장제스와 국민당이 중국의 상부구조를 만들었고,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하부구조를 다시 꾸렸으며, 덩샤오핑(鄧小平)과 그의 추종자들이 개시한 경제개혁이 상부와 하부의 제도적인 연결을 다시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중국인이야기》의 저자인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도 “현대 중국을 만든 사람은 장제스”라고 말한다.
장제스는 대만으로 패퇴한 후에는 심기일전하여 농지개혁을 단행, 이후 대만 경제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대만의 농지개혁은 이승만의 그것 못지않게 성공적인 것으로 꼽힌다.
하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장제스는 무서운 독재자였다. 1927년 4월 12일에는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주의자 300여 명을 사살했다. 5000여 명이 실종됐다. 자기에게 반대했던 정치인을 체포해 왔다는 보고를 받자 “요참(腰斬)에 처하라”고 지시한 냉혈한이었다. 1947년 대만에 진주한 국민당군이 현지인들의 소요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2·28사변으로 3만여 명이 죽었다. 이 사건 이후 대만은 1987년까지 계엄령 아래 놓였다. 정치범들은 화소도에 있는 정치범수용소에 구금됐다. ‘자유중국’이라고 칭했지만, 야당이 허용된 것은 1986년, 여야 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은 2000년이었다.
거기에 더해 장제스는 아들 장징궈(蔣經國·1910~1988)에게 권력을 세습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장징궈는 야당을 허용하고, 계엄령을 해제하는 등 점진적으로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열었다.
여전한 國父 ― 아타튀르크(터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 1938)는 현대 터키의 건설자이다. 청년장교 시절부터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3월 갈리폴리(겔리볼루) 전투에서 영(英)연방군을 섬멸해 이름을 떨쳤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오스만튀르크제국은 국가 해체의 위기에 놓였다. 케말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독립군을 일으켜, 그리스군을 격퇴했다. 이를 바탕으로 케말은 튀르크 국가를 사실상 해체했던 1920년의 세브르조약을 폐기하고, 오늘날 터키공화국의 영토인 아나톨리아반도와 발칸반도 일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20년 1월에는 국민의회를 소집했고, 이듬해에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을 담은 기본법을 공포했다. 1922년에는 술탄(오스만제국의 황제)제도를, 1924년에는 칼리프(이슬람세계의 최고 종교 지도자)제도를 폐지했다. 1923년에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케말은 서구식 법률제도 도입, 정교분리, 여성참정권 인정 등 이슬람세계에서는 파천황(破天荒)에 가까운 개혁을 단행했다.
케말은 ‘6개의 화살’, 즉 공화주의, 민족주의, 국민주의, 국가통제주의, 세속주의, 개혁주의를 내걸었는데, 이를 흔히 ‘케말리즘’이라고 한다. 덕분에 터키는 오늘날 중동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민주적이고 서구화된 나라가 됐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튀르크인의 근대국민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종전의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오스만튀르크인이 중심이 된 다민족(多民族) 제국이었지, 국민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말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터키는 공화인민당의 1당 독재체제 아래 있었다. 의회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에 이르러서였다.
1934년 11월 터키 의회는 모든 국민에게 성(姓)을 사용하도록 하는 성씨법을 통과시킨 후, 케말에게 ‘아타튀르크’, 즉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성을 바쳤다. 에르도안 현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는 이슬람적 색채가 강해지고, 케말리즘에 입각한 기성 질서가 흔들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타튀르크는 대다수 국민에게 여전히 ‘국부’로 남아 있다. 터키의 관문인 이스탄불 국제공항의 이름은 아타튀르크 공항이다.
[그 밖의 지도자들]
그 밖에도 많은 지도자가 있다.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에 의회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적 경제제도를 고집하고, 비동맹 외교에 몰두하면서 인도를 한 세대 이상 세계사의 흐름에 뒤지게 만들었다.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배 아래서도 1930년대 중반부터 미국 의회가 제시한 스케줄에 따라 착실하게 독립을 준비해 왔다. 하지만 마누엘 케손, 세르지오 오스메냐 등 건국 초기의 국가 지도자들은 토지개혁 등 당면한 과제들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했다. 소수의 족벌지주가 농민을 지배했다. 근대적 시민계급이 형성되지 못한 필리핀은 이후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후퇴를 거듭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라는 소리를 들었던 필리핀은 오늘날에도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 수준의 저개발국으로 머물러 있다.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잠비아의 케네스 카운다 등 아프리카 신생국들의 지도자들도 반제국주의적 발상에서 사회주의의 미망(迷妄)에 빠져 나라를 혼돈에 빠뜨렸다.
1980년 오랜 게릴라 투쟁 끝에 백인인종차별주의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는 92세인 지금까지도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과 독재에 시달리고 있다.
일개 개인도 사는 동안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순간의 선택에 따라 희비(喜悲)가 엇갈리고 운명의 길이 달라진다. 하물며 정치 지도자, 그것도 한 나라를 세우는 건국 지도자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했던 선택에 따라 이후 수십 년간 나라의 운명이, 그리고 그 나라에 사는 국민들의 삶이 달라졌다.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만으로도 國父 자격 충분
앞에서 여러 나라의 건국 지도자들을 살펴보았다. 성공한 사람도 있었고, 실패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비난도 따라다녔다. ‘통일’보다 서방세계로의 ‘통합’을 선택했던 아데나워는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데 벌레라는 죽는 순간까지 북아일랜드와의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부채(負債)의식을 안고 살았다. 피우수트스키, 아타튀르크, 장제스 등에게는 독재자라는 비난이 따라다녔다.
공적(公的) 혹은 사적(私的) 잘못들에 눈을 감자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몇 가지 과(過)를 이유로 공(功)을 외면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도자로서 그 시대에 해야 할 큰일들을 해냈다면, 그걸로 평가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건국의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일은 ‘건국’이었다.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닦았으면 공이 더 큰 것이다.
마오쩌둥의 경우 토지개혁 과정에서 100만~500만, 대약진운동기간 중의 아사자 2000만~3000만, 문화대혁명 기간 중 40만명 등 엄청난 사망자를 냈다. 그러는 동안 중국은 한 세대 이상 후퇴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며 마오쩌둥을 감쌌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영수(開國領袖)’ 마오쩌둥의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톈안먼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승만에게도 당연히 공과(功過)가 있다. 특히 분단과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는 남다른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이승만은 ‘건국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큰 궤도를 놓았다. 이후 일탈과 시행착오는 없지 않았지만, 선거,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라는 큰 원칙은 훼손되지 않았다. 농지개혁을 통해 국민국가 형성과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경제의 나아갈 바를 시장경제로 잡아 오늘의 한국 경제를 있게 했다.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안보를 든든히 했다.
다른 나라의 건국 지도자들과 비교해 보면, 이승만만큼 할 일을 다 한 건국 지도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바탕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말년의 과오들을 가지고 건국의 큰 공적을 한사코 외면하는 것은 얼마나 좁은 생각인가?⊙
그의 발언은 즉각 반발을 일으켰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월 19일 퇴임 기자회견에서 “부적절한 말”이라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말씀”이라고 비판했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1월 28일 “‘국부’의 정의라는 게 나라를 세운 사람이라고 하는 측면에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결과를 나쁘게 만들었다”면서 “(이 전 대통령이) 초기에 자기 스스로가 건국을 하면서 만든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부정선거 등으로 인해 파괴를 해서 결국 불미스럽게 퇴진했다”고 말했다.
‘이승만 국부’ 발언은 국민의당의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시비로 이어졌다. 4·19나 5·18 관련 단체들도 비난에 가세했다. 한상진 위원장의 발언으로 당 지지율은 3.7% 하락(1월 18~20일, 리얼미터 조사)했다.
한상진 위원장도 결국은 후퇴했다. 그는 1월 19일 4·19민주혁명회, 4·19혁명희생자유족회, 4·19혁명공로자회 회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공식 사과했다. 안철수 의원도 지난 2월 1일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국부론’은 우리 당의 입장이 아니다”라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정부 초대(初代)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첫 번째 대통령으로 헌법체계를 만들어내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실패했다. 12년간의 장기집권과 부패, 선거부정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정치권이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이승만)이 국부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을 벌인 것 자체가 굉장히 낯선 풍경이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승만’이라고 하면, ‘4·19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로 논란의 대상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 논란에서는 주로 이승만이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그 밖에도 그를 따라다니는 논란은 많다. 분단에 대한 책임, 농지개혁, 친일 청산, 비(非)민주적 통치 등….
그런데 이승만을 둘러싼 논란들을 보면 한 가지 맹점(盲點)이 있다. 철저히 국내 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이승만과 비슷한 고민을 안았던 분단국이나 신생국 지도자들과 비교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이승만에 대해, 우리의 현대사에 대해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共委)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撤退)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1946년 6월 3일, 이른바 남선순행(南鮮巡行)에 나선 이승만이 전북 정읍에서 한 발언이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최초로 시사(示唆)한 이 ‘정읍발언’으로 인해 이승만은 아직까지도 ‘분단의 원흉(元兇)’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그해 2월 북한에서는 이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정부가 수립되어 착착 공산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사실은 외면하고 말이다. 그럼 분단의 상황에 처한 다른 나라 지도자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통일’보다 ‘西方’을 선택한 콘라트 아데나워(독일)
1945년 5월 8일 나치가 항복문서에 서명한 후,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등 4대 전승국(戰勝國)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다. 당시 독일 정치인들의 첫 번째 과제는 독일의 재(再)통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 저항한 정치가가 있었다. 바로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初代) 총리를 지낸 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였다. 그는 독일의 통일은 먼 장래의 일로 간주하고, 그보다는 서독을 서방 자유진영 안으로 편입시키는 데 주력했다.
아데나워는 독일제국 말기이던 1917년부터 16년간 쾰른 시장을 지낸 원로(元老) 정치인이었다. 1926년에는 중앙당(가톨릭계 정당, 기독교민주당의 전신)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후 반(反)나치 인사로 낙인찍혀 시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나치 정권 시절 두 차례 게슈타포(비밀경찰)에 체포됐는데, 1944년 체포됐을 때에는 강제수용소로 이송될 뻔하기도 했다. 나치 패망 직전 쾰른에 진주(進駐)한 미군이 이런 아데나워를 쾰른 시장에 임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분리주의자’ 아데나워
아데나워는 쾰른 시장으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6월 이후 당시 쾰른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영국 군정청 몰래 인접한 프랑스 군정청 관계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아데나워는 그들에게 서쪽에 라인국(國)을 두고 서독 지역을 셋으로 분할한 후 이 세 지역을 느슨한 형태의 연방으로 묶고, 장차 만들어지는 유럽합중국(合衆國)의 핵이 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그의 전기 작가들 중에서는 이를 두고 ‘어리석은 일’ ‘군정과의 야합’이라고 비판한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그가 ‘라인국’에서의 최고권력자 자리를 노리고 그랬다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아데나워가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은 새로운 독일이 두 차례 독일을 세계대전으로 몰고 갔던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전통 및 공산전체주의와 단절하고 서방세계의 일원이 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작가 귀도 크놉은 “아데나워는 소련 통치자의 독일 국민에 대한 우정이 곧 한계를 드러내자 소련이 점령한 독일 지역(동독)은 ‘얼마 동안일지 알 수 없지만 분리해 놓고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은 얼마 안 되는 인사 축에 속했다”고 말한다.
영국 군정청은 아데나워가 자신들을 제쳐놓고 프랑스 군정청과 정치적 접촉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 그해 10월 그를 해임했다. 군정청 당국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아데나워에게는 일종의 ‘훈장’이 됐다.
73세에 총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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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서독 총선 당시 기민당의 선거 포스터. “실험은 없다(Keine Experimente)”라는 선거 캐치프레이즈는 아데나워의 철학이기도 했다. |
1949년 8월 14일, 기본법(헌법)이 공포되고 실시된 첫 총선에서 기민당은 31%, 사회민주당(사민당)은 29%를 얻었다.
아데나워는 의회에서 총리 선출을 앞둔 1949년 8월 21일 뢴도르프에 있는 자택으로 기민당 지도부를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아데나워는 상징적 존재인 대통령직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일축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총리다. 나는 73세지만 총리직을 맡고 싶다”면서 “주치의가 2년은 더 일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덧붙였다.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마련하려고 하자 “그러면 나는 일체 공직을 맡지 않고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면서 국회를 압박해서 대통령제 헌법을 관철시킨 이승만처럼, 아데나워도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다른 기민당 지도자들은 고령의 아데나워를 ‘과도기적 지도자’로 생각하고, 아데나워를 총리 후보로 내세우는 데 동의했다. 아무도 그가 이후 14년이나 집권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몇몇 인사는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민당과의 대연정(大聯政)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데나워는 이에 반대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민당과 대연정을 할 경우, 자신이 구상하는 친(親)서방정책에 차질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西方세계 편입 위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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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에 나온 독불우호조약 체결 25주년 기념우표. 아데나워와 드골은 지난 수백 년간 앙숙이던 두 나라 사이의 화해를 이루어냈다. |
새 정부가 들어선 직후 아데나워는 각료들을 데리고 미국·영국·프랑스 군정장관을 예방(禮訪)했다. 군정장관들은 양탄자 위에 서서 그들을 맞았다. 독일인은 양탄자 위에 서지 말라는 의미였다. 아직 서독은 온전한 주권국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데나워는 모르는 척하고 양탄자 위에 서서 준비해 온 글을 읽었다. 독일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언젠가 연합국과 동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독을 서유럽 내지 서방세계의 일원으로 확고하게 편입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독일의 재무장(再武裝)과 서유럽방위체제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그 유력한 수단이었다. 유럽방위공동체(EDC) 창설 시도(1952년)는 프랑스의 반대로 실패했지만, 결국 1955년 주권 회복과 함께 NATO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다. 1952년에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 가입했다. ECSC는 오늘날 EU(유럽공동체)로 가는 첫걸음이 됐다. 같은 해 5월에는 독일의 향후 주권 회복을 약속하는 독일조약을 체결했다. 1952년 9월 이스라엘과의 배상협정을 체결한 것도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적(宿敵)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이었다. 이를 위해 아데나워는 재직 중 26번이나 파리를 방문했다. 이러한 노력은 1963년 1월 독불(獨佛)우호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아데나워가 파리 다음으로 많이 방문한 곳은 워싱턴(10회)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외교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아데나워는 1955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 자신이 겸직하고 있는 외무부 장관뿐인 이 내각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푸념하면서….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외교문서까지 직접 구술(口述)해서 작성하고, 외무부 장관을 외교담당 비서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흡사하다.
스탈린의 中立化 통일 제안 거부
반면에 아데나워는 독일 통일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통일보다는 서독과 서방세계가 힘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통일’을 위해서는 서독이 서방세계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완강히 반대했다.
1952년 3월 스탈린은 ‘독일 전(全) 지역에서 자유선거를 통한 독일의 재통일’을 제안했다. 아데나워는 이를 거부했다. 스탈린의 제안에는 ‘통일 독일의 중립화(中立化)’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데나워는 스탈린의 제안이 나온 직후 “독일 전 지역을 진공 상태로 만든 후 소련은 지리적 인접성과 권력수단을 이용, 독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려 한다”며 이를 일축했다. 야당인 사민당의 쿠르트 슈마허 총재는 “전승 4개국과 협상을 벌여 통일에 유일한 ‘기회’를 활용하라”고 촉구했다.
아데나워는 “서방이 힘을 충분히 키우는 것만이 소련으로 하여금 영향권(影響圈)을 내놓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냉전(冷戰) 상황 아래서 독일의 재통일은 날이 갈수록 요원해 보였다. “힘을 키워 재통일한다”는 아데나워의 주장은 ‘반(反)통일적’인 것으로 비쳤다. 반대자들은 ‘신생 공화국의 평생 거짓말’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1990년 독일 통일은 아데나워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아데나워는 공산주의와 맞서기 위해 ‘과거사 청산’을 유보했다. 나치 청산과 관련해 그는 ‘진짜 죄지은 사람들만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치 핵심분자들에 대한 처벌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등을 통해 일단락되었다고 보았다. 독일이 재무장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독일군(연방군)에 나치 독일군에 복무했던 고급장교들도 받아들일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런 질문을 받고 아데나워는 “내가 NATO를 방문했을 때, 18세 먹은 장군이 군대 사열에 동참할 수는 없지 않겠소?”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나치 독일군에서 육군 소장까지 지냈던 라인하르트 겔렌은 연방정보부장을 지냈다. 악명 높은 나치 인종차별법인 뉘른베르크법의 해설서를 썼던 내무관료 출신 한스 글로프케는 총리실장으로 중용됐다. 기민당 출신으로 제3대 서독 총리를 지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는 나치 시절 외무부 라디오정책국 부국장 출신이었다.
경제 재건이 시급하던 상황에서, 그리고 반나치인사로 투옥경력이 있는 아데나워의 카리스마 통치 시절에는, 과거사 문제는 덮어졌다. 하지만 아데나워 퇴진 이후, 68운동 시기에 젊은 세대들은 과거사 청산 문제를 들고나왔다.
국내 정치적으로 임기 말년이 될수록 아데나워는 고집불통이 되어갔다. 특히 후계자 선정을 미루었고, 후계자로 거명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를 못미더워해 못살게 굴었다. 그를 ‘영감’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던 국민들도 점차 그에게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1963년 아데나워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누가 독일에서 가장 큰 업적을 이루었는가’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33%는 아데나워라고 답했다. 2위는 8%를 얻은 비스마르크였다. 작가 귀도 크놉은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비스마르크의 체제는 이를 세운 건축가가 사망한 후 연약한 건물임에 불과했음이 판명되었으나, 아데나워의 그것은 사후 1989~90년에 독일이 통일되면서 정당성을 부여받았다”면서 “아데나워의 정적(政敵)조차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이 친서방정책을 취했던 것이 당시에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시인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패한 건국 지도자 ― 응오 딘 지엠(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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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반공지도자로 각광 받았던 응오 딘 지엠은 부패와 독재로 자멸했다. |
응오 딘 지엠(이하 지엠)이 태어났을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남부(코친차이나)는 직할령(直轄領), 북부(통킹)는 반보호령(半保護領), 중부(안남)는 보호령이었다. 중부에서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조(阮朝)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제 통치를 하는 것은 프랑스 총독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황실이 존속하고는 있었지만 실권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행사했던 대한제국의 상황을 연상하면 된다.
지엠은 대학 졸업 후 고향 쿠양빈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20대에 300개 마을을 관리하는 감독관과 지방군 대장을 지냈다. 당연히 프랑스 식민당국과는 어느 정도 협력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시기 농민반란 등을 겪으면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됐다.
1933년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바오다이(保大) 황제는 32세에 불과한 지엠을 내무장관으로 발탁했다. 하지만 지엠은 황제의 친불(親佛)정책에 항의해 3개월 만에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10년간 그는 야인(野人)생활을 했다.
1942년 지엠은 인도차이나반도에 진주한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어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반일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했다가 발각되자 그는 1944년 남부 사이공(현 호찌민)으로 탈출했다.
분단
일본이 패망한 후인 1945년 8월 19일 호찌민(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월맹·베트민)은 하노이를 장악했다. 8월 30일 바오다이는 황권(皇權)을 상징하는 황금보도(寶刀)를 베트민 대표에게 넘겨주고 퇴위했다.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현재의 국명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식민질서를 재건하려 했다. 그 바람에 1946년 11월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시작됐다. 사이공에서 언론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던 지엠은 호찌민으로부터 입각(入閣)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1949년 3월 프랑스는 통킹과 안남은 물론 코친차이나까지 아우르는 베트남국을 수립하고, 국가주석으로 바오다이를 옹립했다. 바오다이 아래 베트남의 우익 민족주의 세력을 묶어 호찌민에게 대항하게 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베트남 분단의 씨앗은 이때 뿌려진 셈이다. 이 시기 지엠은 바오다이 정권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미국, 프랑스, 벨기에 등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에서 2개월 동안 저항하던 프랑스군이 보 구엔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군(북베트남군)에게 항복했다. 그해 6월 제네바회의에서 프랑스, 미국, 중국, 소련 등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북에서 철수하는 프랑스군을 따라 60만명의 가톨릭 교도를 비롯해 80만~90만명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지엠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라는 보호자를 잃은 바오다이는 1954년 6월 지엠을 총리로 임명했다. 미국은 독실한 가톨릭교도이자 반공주의자인 지엠의 등장을 환영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존 F. 덜레스 국무장관, 존 F. 케네디 상원의원, 마이클 맨스필드 상원의원,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 등 미국의 유력인사들이 그의 후원자가 되었다.
지엠은 1955년 10월 공화국 수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98.2%가 찬성했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당연히 지엠이었다. 이미 북쪽에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괴뢰정권이었던 바오다이 정권의 잔해(殘骸) 위에 수립된 지엠의 정권은 정통성 면에서 취약했다. 1956년 북베트남이 제네바회담에서 결정된 바에 따라 남북 간 총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했지만, 지엠 정권이 거절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조차 “당시 총선거가 실시됐다면 유권자의 80%는 틀림없이 호찌민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원조에 안주
그럼에도 지엠의 공화국이 출범 초기 비교적 순항했던 것은 미국의 원조 덕분이었다. 그가 집권했던 1956~63년에 미국은 70억 달러의 원조(이 중 3분의 2가 군사원조)를 제공했다. 미국의 원조는 전체 예산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원조가 소비재 부문과 군사 부문에 편중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이승만 정권 시절 한국의 경우와 유사하다. 1950~60년 미국은 한국에 24억1000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이승만 정부는 원조물자를 판매한 대충(對充)자금으로 나라살림을 꾸려나갔는데, 그것이 당시 정부수입의 70%를 넘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승만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비료·시멘트 공장 건설, 실험용 원자로 도입 등 산업화의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지엠 정권은 미국의 원조에 안주하면서 그러한 노력을 게을리했다.
지엠 정권과 이승만 정권의 결정적인 차이는 토지개혁이었다. 당시 토지개혁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던 아시아 국가들에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국·일본·대만 등에서의 토지개혁의 이념을 제공한 미국의 울프 라데진스키는 “러시아혁명 당시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줌으로써 단호하게 토지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면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정권을 잡지 못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토지개혁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첩경이라는 인식 아래 이승만 정권, 대만으로 쫓겨간 장제스(蔣介石) 정권, 그리고 맥아더사령부의 점령 아래 있던 일본의 요시다 정권은 토지개혁을 서둘렀고, 성공했다.
토지개혁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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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부터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끈 호찌민은 정통성 경쟁에서 지엠을 앞섰다. |
지엠 정권은 1956년 10월 토지개혁법을 공포했다. 토지 소유를 100ha로 제한하고 그 이상 되는 토지는 국가가 사들여서 소작인,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 상이군인 등에게 분배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법에는 허점이 많았다. 이런 식으로 토지를 분배받아 자작농이 될 수 있는 농가는 전체 농가의 3분의 1에 불과했다는 것이 가장 큰 한계점이었다. 100ha 미만의 토지를 가진 지주들은 그대로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 소작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소작료도 여전히 높았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6년에 걸쳐 대금을 상환해야 했지만, 그 대금이 너무 높아서 소정의 기한 내에 납부하기 어려웠다.
결국 토지개혁은 농민들의 어려움이나 불만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 농민들은 토지개혁을 약속하는 베트콩의 지지자가 되었다. 1961년 가을 미국이 추산한 바에 의하면, 남베트남에는 인구의 2%에 달하는 20만명의 베트콩 동조자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베트남전 전황(戰況)이 악화되어 가던 1969년 구엔 반 티우(阮文紹) 정권은 보다 철저한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이는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과는 대조적이다. 농지개혁은 3정보(약 3ha) 이상의 농지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지주-소작제를 철저하게 해체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공포한 후,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며 농림부를 독려했다. 농림부는 시행령도 만들어지기 전에 농지분배에 들어가 1950년 6·25 발발 직전까지 70~80%의 농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다. 농민 한 사람 앞에 돌아간 농지는 평균 0.36정보에 불과했지만, ‘내 땅’을 가질 수 있게 된 농민들은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6·25 당시 인민군은 점령지 내에서 토지개혁을 요란하게 시행했지만, 대부분의 농민은 거기에 현혹되지 않았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지엠 정권의 독재와 부패였다. 지엠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이유로 자신을 비판하는 야당을 불법화하고, 언론을 탄압했으며, 정권의 비판자들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었다. 물론 남베트남 내에 공산주의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5년 분단 이후에도 5000~1만명가량의 공산주의자들이 남베트남에 남아 암약(暗躍)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6년 이후 지엠 정권이 공산주의자라고 체포한 이들의 숫자는 5만여 명이 넘었다.
더 나쁜 것은 족벌(族閥)통치였다. 동생인 응오 딘 누는 비밀경찰의 책임자로 악명 높았다. 작은동생은 주영대사, 동생의 처삼촌은 외무장관과 대법원장, 동생의 처제는 중부지역 군사령관, 동생의 장인은 주미대사, 장모는 주UN대사, 조카사위는 국방장관을 지냈다.
거기에다가 편협한 가톨릭 교도인 지엠은 국민의 90%를 차지하는 불교도들을 차별하고 탄압했다. 이에 항의해 1963년 6월 11일 66세의 노승(老僧) 틱꽝득(釋廣德)이 사이공 시내 한복판에서 분신(焚身)했다. 이 사실은 사진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를 보고 응오 딘 누의 아내(마담 누)는 “승려 한 명이 바비큐가 되었을 뿐”이라고 말해 공분(公憤)을 불러 일으켰다.
쿠데타로 피살
이런 혼돈 속에서 북베트남의 적화(赤化)공작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1959년 1월 베트남노동당(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적극적인 대남공세를 취하기로 결의하고, 남부 출신 공산당원과 무기, 물자들을 남파하기 시작했다.
1960년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야당, 불교도, 소수민족, 진보적 지식인 등 반(反)지엠 정권 세력을 묶어서 공산주의 전위(前衛)조직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다. 이들이 흔히 말하는 베트콩(‘베트남 공산주의자’라는 의미)이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공산주의 대신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미제(美帝)의 식민정부 지엠 정권 타도’를 외쳤다. 1963년 1월에는 사이공에서 불과 60km 떨어진 업박이라는 마을에서 남베트남군과 베트콩 간에 교전(交戰)이 벌어졌다. 1960년 11월에는 군부 내 우익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도 지엠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63년 9월 케네디 대통령은 지엠 정권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지엠 정권에 대한 원조를 줄였다.
남베트남 군부는 케네디 정부의 조치를 쿠데타 지지 사인으로 받아들였다. 1963년 11월 1일 즈엉 반 민(楊文明) 장군 등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지엠과 동생 누는 쿠데타군에게 체포되어 장갑차로 압송되던 도중 살해당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군인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쿠데타가 되풀이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했지만,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실패했다. 미국은 결국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 문제에서 손을 뗐다. 2년 뒤인 1975년 1월, 북베트남은 전면 남침(南侵)을 개시했다. 석 달 후인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전차(戰車)가 철문을 부수며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獨立宮)에 진입했다. 지엠이 세운 베트남공화국(월남공화국)은 이렇게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데 벌레라와 마이클 콜린스 ― 아일랜드의 이승만과 김구
이승만과 김구는 독립운동 기간 내내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승만은 외교·선전활동을 통해, 김구는 의열(義烈)투쟁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에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반공주의자였다. 해방 이후에도 두 사람은 때때로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신탁통치 반대 등에서 노선을 같이했다. 김구는 이승만을 ‘형’으로, ‘국부(國父)’로 존숭했고, 이승만도 그런 김구를 ‘아우님’이라고 불렀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는 1947년 9월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고, 그해 11월 유엔이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독립정부 수립을 결의한 후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이듬해 4월 19일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38선을 넘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 공산집단에게 이용만 당한 채 돌아왔고, 이후 국내 정치에서 소외되었다. 이듬해 6월 김구는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그리고 1950년 김일성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됐다.
우리처럼 오랜 독립 투쟁 끝에 건국을 앞두고 ‘완전독립-완전통일’이냐, 아니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독립과 통일이냐를 놓고 갈등과 동족상잔을 빚은 사례가 있다. 바로 아일랜드의 경우다.
영국 지배 740년
켈트족의 땅인 아일랜드를 게르만족(앵글로색슨족, 노르만족 등) 계열인 잉글랜드가 침공해 온 것은 1172년 헨리2세 때였다. 이후 잉글랜드의 영향권 아래 들어갔기 때문에 혹자는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가 740여 년에 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1541년에는 헨리8세가 아일랜드 국왕을 겸했다. 1641년에는 신교도 공화국을 이끌던 올리버 크롬웰이 침공해 와 대학살을 감행했다. 이와 함께 16세기경부터 영국 본토에서 스코틀랜드의 신교도들이 아일랜드로 이주, 북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에서 건너온 신교도들은 지주계급을 형성, 소작농으로 전락한 아일랜드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특히 1845~1850년 감자대기근 때에는 1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100만명이 넘는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으로 떠났다.
18세기 후반부터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영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은 1801년 합병법을 만들어 아일랜드 의회마저 영국 의회에 통합했다. 19세기 말 이후 글래드스턴 등 아일랜드 문제에 관심을 가진 자유당 정치인들은 여러 차례 아일랜드자치법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보수 정치인들이나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은 아일랜드 자치에 완강히 반대했다.
부활절 봉기
1916년 4월 24일 부활절 아침 패트릭 헨리 피어스가 이끄는 아일랜드공화국형제단(IRB) 병력이 더블린에서 봉기했다. 6일간 계속된 이 봉기로 IRB, 영국군, 더블린 시민 450명이 죽고 26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사실 많은 아일랜드인은 봉기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영국의 식민통치도 싫지만, IRB 등의 과격투쟁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영국 정부의 사후 대처였다. 독일과 전쟁 중이던 영국은 후방에서의 무장봉기에 대해 극히 민감하게 대응했다. 주동자 15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해 처형했다. 과거에도 곧잘 있었던 작은 무력 분규의 하나로 생각하고 관대한 처분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아일랜드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처형된 사람들은 조지 버나드 쇼가 말한 것처럼 ‘성인(聖人)’이 되었다. 이후 독립을 외치는 아일랜드인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영국군이 봉기의 주동자들을 처형할 때 사형선고를 받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에이몬 데 벌레라(1882~1975)였다. 봉기군의 지대(支隊) 지휘관이었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 아일랜드인 어머니와 스페인계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였다. 미국 시민권이 그를 살렸다. 감옥에서 데 벌레라는 무장투쟁노선에 회의(懷疑)하게 되었다.
부활절 봉기로 많은 투사가 세상을 떠난 후,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때 등장한 또 다른 인물이 마이클 콜린스(1890~1922)였다. 부활절 봉기 당시 IRB의 말단 요원이었던 그는 지도부 처형 이후 급속히 부상(浮上)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의 정당인 신페인당의 정보부장이 된 그는 군대를 편성해 영국군과 정면 대결하는 방식을 지양(止揚)하고, 군경(軍警) 기습, 암살, 폭파 등으로 투쟁방식을 바꾸었다. 최근까지도 북아일랜드에서 반영무장투쟁을 벌였던 IRA(아일랜드공화국군)의 창설자가 바로 마이클 콜린스이다.
1918년 12월 총선에서 아일랜드 지역에서는 독립노선의 신페인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신페인당은 105석 중 73석을 차지했다. 데 벌레라, 마이클 콜린스, 아서 그리피스 등도 당선되었다. 신페인당 소속 당선자들은 웨스트민스터(영국 의회)로 등원(登院)하는 대신 아일랜드 의회 결성과 아일랜드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데 벌레라가 의회 의장, 아서 그리피스가 부의장이 되었다.
미국에서 외교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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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 벌레라는 1916년 부활절 봉기 직후 체포되었지만, 미국시민권자여서 살아남았다. |
이 시기 데 벌레라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 이승만과 흡사하다. 이승만도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후 미국 내 여론에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직함은 ‘집정관 총재’였지만 ‘대통령(President)’으로 자칭한 것도 비슷하다. 하와이 교민들로부터 모금한 돈의 용처를 놓고 구설에 오른 것도 흡사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이승만의 뒤에는 재미교포가 1만명 남짓에 불과했지만, 데 벌레라 뒤에는 2000만명이 넘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있었다. 윌슨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인들은 이들의 표를 의식해 데 벌레라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은 영국 정부에 대해 입장을 바꾸도록 압력을 가했다.
결국 오랜 무력분쟁과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영국은 1921년 7월 아일랜드 측에 휴전을 제안해 왔다. 데 벌레라는 영국으로 건너가 로이드 조지 총리, 윈스턴 처칠 식민장관 등과 만나 탐색전을 벌였다. 이후 데 벌레라는 마이클 콜린스, 아서 그리피스 등을 협상대표로 임명해 영국으로 보냈다. 데 벌레라는 “영국의 국가원수(元首)인 조지5세가 나오지 않는데, 아일랜드의 원수인 내가 나갈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만족스럽지 못한 협상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견하고 회담 참석을 기피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데 벌레라는 협상단에게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지침을 주었다.
20~30대인 아일랜드 협상단은 로이드 조지나 윈스턴 처칠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대영제국의 거물 정치인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일랜드 협상단은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은 영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드 조지는 “아일랜드가 이 협상안을 거부할 경우 다시 군대를 투입해 아일랜드를 점령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아일랜드 측의 무장투쟁 역량은 이미 바닥이 나 있었다. 투쟁의 총책임자였던 마이클 콜린스 자신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英-아일랜드 협정과 內戰
1921년 12월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협상이 타결됐다. 아일랜드는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아일랜드자유국으로 독립하되, 신교도들이 많이 사는 북부 6개 주(州)는 영국 통치 아래 남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이 협정을 통해 ‘자유를 성취하기 위한 자유’를 가져왔다”면서도 “이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사형선고장에 서명한 셈”이라고 자조(自嘲)했다.
협정은 북아일랜드까지 포괄하는 완전한 공화국 수립을 위해 투쟁해 왔던 많은 아일랜드인에게는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일랜드의 여론은 양분됐다. 데 벌레라는 “북아일랜드는 둘째치더라도 나는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내각과 의회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내각과 의회가 모두 협정을 승인하자 의장(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데 벌레라는 전국을 돌면서 “협정이 받아들여지면 내전(內戰)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2년 6월 실시된 총선에서도 조약 찬성파가 승리하자 내전이 발생했다. 어제의 동지들이 한편은 아일랜드정부군, 다른 한편은 IRA반란군이 되어 싸웠다. 마이클 콜린스는 내전이 발발한 지 두 달여가 지난 그해 8월 IRA에 의해 암살당했다. 콜린스의 암살 소식을 접한 데 벌레라는 “마이클 콜린스는 이제 성자(聖者)가 되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내전은 이듬해 5월까지 계속됐다. 부활절 봉기에서 아일랜드 내전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 리암 니슨 주연의 〈마이클 콜린스〉,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등을 보면, 이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고민과 참담함이 잘 나타나 있다. 벌레라는 내전이 정부군의 승리로 끝난 후인 1923년 8월 체포되어 1924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데 벌레라, “콜린스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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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을 상대로 도시게릴라전을 펼친 마이클 콜린스. |
이후 데 벌레라는 1937~1948년, 1951~54년, 1957~1959년 총리를, 1959~1973년에는 대통령을 지냈다. 독선적인 성격의 데 벌레라는 재임 중 다소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기는 했지만, 민주주의 원칙 자체를 훼손하지는 않았다. 그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다. 선거에 따라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데 벌레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영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중립정책을 고수했다.
결단의 순간에 이승만처럼 외교독립노선을 추구했던 데 벌레라가 ‘완전한 공화국 수립’이라는 원칙론을 고수한 반면, 테러투쟁을 했던 마이클 콜린스가 현실을 받아들인 것은 아이러니다. 마이클 콜린스도 김구처럼 암살을 당함으로써 ‘신화(神話)’가 됐다. 말년에 데 벌레라는 1921년 협정 당시 마이클 콜린스가 취한 입장이 옳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북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것을 한(恨)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이승만은 민족사상 처음으로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자유민주공화국을 건설했다. 이인호(李仁浩) 서울대 명예교수의 말처럼 ‘건국혁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업적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한 것도, 6·25전쟁 중 지방선거를 실시한 것도 이승만이었다. 한상진 국민의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이 지난 1월 14일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은 원래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 분이었다. 그 공로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 만들어진 뿌리가, 잠재력이 성장해서 4·19혁명에 의해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가 우리나라에 확립됐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한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발췌개헌과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진보당 사건, 그리고 3·15부정선거 등은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이승만의 흠으로 지적된다. “자기 스스로가 건국을 하면서 만든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부정선거 등으로 인해 파괴를 해서 결국 불미스럽게 퇴진했다”고 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의 말은 그런 인식을 대변한다. 그러면 다른 신생국들의 지도자들은 어떠했을까?
의회민주주의에서 敎導민주주의로 ― 수카르노(인도네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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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를 건국한 수카르노. |
일제가 패망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네덜란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식민질서를 재건하려 했다. 이후 5년간 지루한 독립전쟁 끝에 인도네시아는 1950년 8월 17일 독립국가로 출범했다.
다른 신생국들처럼 1950년대 인도네시아는 경제난·빈곤·지역분리주의·지역갈등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서구의 제도를 모방한 의회민주주의가 실시되었지만, 정국(政局)은 좀처럼 안정되지 못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 수카르노와 내각의 갈등이었다. 1945년 임시헌법에서는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독립 후 제정된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갖고 있는 권한 가운데 상당 부분을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에 넘겨주었다.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수카르노는 대중선동 정치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6년 10월, “서구 선진국가들과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조건이 다른 인도네시아에서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교도(敎導)민주주의’를 제창했다. 인도네시아의 마을 공동체 회의에서 장로(長老)들이 주민들 사이의 토론을 지도, 조정하면서, 민주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전통을 국가 운영에 원용(援用)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였다. 물론 국민들을 ‘교도’하는 것은 수카르노 자신이어야 했다.
의회 해산, 終身 대통령
1959년 2월 수카르노는 제헌의회를 새로 소집,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던 1945년 헌법의 부활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수카르노는 같은 해 7월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비(非)합법적인 대통령 포고를 통해 1945년 헌법의 부활을 선언했다. 수카르노는 주(州)지사 임면권(任免權), 국민협의회(MPR·인도네시아의 최고 통치기구, 유신헌법하의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사) 의원 임면권, 정당 해산권 등을 손에 넣었다. 지방세력이 반발하자 계엄령을 선포해 억눌렀다. 1960년 3월에는 의회를 해산했다. 수카르노가 임명한 공산주의자, 직능 대표들로 구성된 ‘협동의회’가 의회를 대신했다. 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가기구는 사라지고, 반대 정당들이나 비판적인 언론사는 문을 닫았다. 1963년 수카르노는 꼭두각시 의회에 의해 종신(終身)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누적되자 수카르노는 외부의 적(敵)을 만드는 것으로 이를 무마하려 들었다. 옛 식민종주국이었던 네덜란드, 이웃 나라 말레이시아 등이 그 대상이 됐다. 이와 함께 수카르노는 비동맹(非同盟) 외교를 강화했다. ‘자카르타-프놈펜-베이징(北京)-평양’ 축선(軸線)을 제안하기도 했다. 결과는 인도네시아의 국제적 고립과 경제난이었다.
수카르노의 외교정책은 소련과 중국(중공)으로의 접근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수카르노가 이들로부터 얻어낸 원조는 민생이나 경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립경기장 건설 등 상징 조작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건강이 악화된 수카르노가 중국 의료진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도네시아의 친공(親共)·친(親)중국 노선은 더욱 강화되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당수 아이디트는 1962년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했다.
이에 고무된 군부 내 공산세력은 자기들의 위치를 굳히기 위해 1965년 9월 30일 밤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군은 야니 육군장관 등 반공적인 군 장성들을 습격, 살해했다.
선동 정치가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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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쿠데타를 진압하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수하르토. |
군부의 실권(實權)을 장악한 수하르토는 1967년 3월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1968년 3월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것은 새로운 독재의 시작이었다. 수카르노는 1970년 6월 21일 연금(軟禁) 상태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그는 내정이나 외교 등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개인적 이상(?)을 추구하면서 자신과 나라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그의 저서 《지도자들》에서 수카르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혁명 지도자들 가운데서 사회체제를 해체시키는 데는 전문가였으나 그것을 재건할 줄 몰랐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고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수카르노는 지도력에 관한 불행한 사실 하나를 보여주었다. 이는 국민들의 감정을 사로잡는 데 가장 유능한 지도자는 때때로 가장 비참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는 점이다.
민중 선동은 효과가 있다. 책임감을 결여하였던 수카르노는 선동으로 가장 충동적인 힘을 만들어 그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신의 호소를 교묘하게 꾸밀 수 있었다. 두려움과 미움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선동은 이러한 감정들을 움직일 수 있다. 희망도 강력한 힘을 가지며, 선동은 그릇된 희망을 높인다.”
그래도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그를 기억해 주었다. 그의 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는 1983년 야당이던 인도네시아민주당에서 정치활동을 시작, 1993년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6년 수하르토 정권에 의해 당수직을 박탈당했다. 1999년 민주투쟁당을 창당해 제1당이 되었고, 그해 10월 대선에서 부통령이 됐다. 2001년 7월 압둘 라만 와히드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최고권력기구인 국민협의회(MPR)에서 부패와 실정으로 탄핵된 후 대통령직을 승계, 2004년까지 재임했다.
新대통령제 헌법의 元祖 ― 피우수트스키(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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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의 피우수트스키는 집권 후 팽창정책을 추구했다. |
‘피우수트스키 헌법’이라는 말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1867~1935)에게서 나왔다. 그는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로 멸망한 이후 123년 만에 독립을 회복한 폴란드의 첫 번째 국가원수였다.
피우수트스키는 제정(帝政)러시아 치하에서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추구하던 폴란드사회당 지도자였다. 비록 사회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적 성향보다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일본을 방문, 반러시아 투쟁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소련의 침공 물리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인 부대를 편성,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협력했다. 1916년 그는 2개 폴란드군 사단을 편성했다. 독일군은 이 부대에 독일 황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요구했다.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정부 없이는 폴란드 군대도 있을 수 없다”면서 폴란드 독립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요구했다. 피우수트스키가 자신의 요구를 꺾지 않자 독일군은 그를 마그데부르크성에 구금했다. 이 사건 이후 피우수트스키는 일신의 안녕을 희생하면서까지 외세에 맞선 민족영웅으로 폴란드인들에게 각인되었다.
1918년 10월 종전이 가까워 오자 폴란드 정치인들은 바르샤바의 통치권을 갖고 있던 섭정위원회를 통해 독일에 피우수트스키의 석방을 요청했다. 좌우 갈등이 극심한 당시 상황을 타개해 나갈 사람은 피우수트스키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해 11월 10일 피우수트스키가 바르샤바로 돌아오자, 폴란드 내 모든 정치세력과 무장세력은 그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섭정위원회는 모든 권력을 피우수트스키에게 양도했다. 임시 국가원수가 된 피우수트스키는 “제헌의회가 구성되면 모든 권력을 의회에 양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듬해 1월 제헌의회가 구성되자 피우수트스키는 다음달에 권력을 의회에 양도했다. 의회는 그에게 국가원수 겸 군(軍) 최고사령관직을 다시 맡겼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피우수트스키는 이즈음에는 철저한 민족주의자, 국가주의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나는 독립이라는 정거장에서 붉은 열차에서 내렸다”고 공언했다. 당시 이웃 강국인 독일과 러시아는 패전과 혁명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 틈을 타서 중세 중동부 유럽의 강국이었던 폴란드의 영광을 재현해 보려 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백러시아), 리투아니아로 팽창정책을 펼쳤다. 1919~1921년에는 소련과 전쟁을 벌였다. 1920년 8월 폴란드군은 바르샤바 전투에서 소련군을 격퇴, 볼셰비키 세력의 서방 진출을 저지했다. 이때 소련군 지휘관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고, 정치위원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이러한 승리 덕분에 신생 폴란드는 38만8600km2의 영토와 2780만명의 인구를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구의 30%는 소수(少數)민족이었다. 이는 이후 폴란드 정치의 불안요인이 됐다.
1921년 제정된 폴란드 헌법은 대통령을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선출하되,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역할만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건국 과정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피우수트스키를 의식한 조치였다. 그러자 피우수트스키는 1922년 대선에 출마하는 것을 거절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G. 나루토비츠는 취임 이틀 만에 암살당했다.
유혈쿠데타로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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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5월 쿠데타에 성공한 후 부하들과 함께 바르샤바에 입성하는 피우수트스키. |
1921~1926년 사이에 내각이 9번이나 교체됐다.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은 의회민주주의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1926년 5월 12일 피우수트스키는 자신을 지지하는 국방장관 T. 젤리코프스키가 제공한 군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부군과 쿠데타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000여 명의 군인들이 전사(戰死)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어느 편에 섰든지 간에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들이 사랑하고 똑같이 충성했던 조국 폴란드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애도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피우수트스키는 외형상 헌정 질서를 유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쿠데타 직후인 5월 31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지만, 스스로 사임했다. 그의 추종자인 I. 모시치스키가 대통령이 됐다. 대신 피우수트스키는 국방장관을 맡아 실권을 행사했다. 1926년 말에는 장군 및 대령급 장교들이 주축인 ‘전투내각’을 구성했다. 1932년 6월 크라쿠프에서 의회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반정부집회가 일어나자 피우수트스키는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해 재판도 없이 동부 지방의 성채에 감금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절대 권력자였지만 애국심이 강했고, 검소했으며, 부정부패를 미워했다. 하지만 국내 정치 발전이나 경제 발전을 위한 계획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국가안보와 대외정책이었다. 1932년에는 소련, 1934년에는 나치 독일과 불가침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러한 불가침협정이 나라의 안보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4월 헌법’
1935년 1월 국회는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헌법을 제정했다. 대통령에게 ‘신(神)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부과한 데서부터 권위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 상원의원 3분의 1에 대한 임명권, 전시(戰時) 후계자 임명권 등 절대권력을 부여했다. 한마디로 피우수트스키 한 사람을 위한 헌법이었다. 그해 4월 공포, 발효되었다고 해서 ‘4월 헌법’이라고도 하는 이 헌법은 후일 샤를 드골의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정작 피우수트스키 자신은 이 헌법에 따른 과실(果實)을 맛보지 못했다. 9년 전 쿠데타를 일으켰던 그 해 5월 12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몇 명의 후계자가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어 피우수트스키가 없는 피우수트스키 체제를 물려받았다. 겉보기에는 튼튼해 보였지만, 속은 곯은 체제였다. 취약한 경제력 때문에 군대를 현대화하는 데 실패했고, 30%에 달하는 소수민족들 때문에 사회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주변국들과는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와 스탈린이 동서 양쪽에서 쳐들어왔을 때 폴란드는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피우수트스키는 평생 나라의 안보를 걱정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만에 폴란드는 다시 망국(亡國)의 비운(悲運)을 겪어야 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에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해 44년간 질곡에 시달려야 했다.
공산정권 시절 피우수트스키는 잊혔다. 하지만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그는 ‘민족영웅’으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1당 독재와 계엄통치 ― 장제스(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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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제스 전 대만 총통. |
장제스는 대만으로 패퇴한 후에는 심기일전하여 농지개혁을 단행, 이후 대만 경제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대만의 농지개혁은 이승만의 그것 못지않게 성공적인 것으로 꼽힌다.
하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장제스는 무서운 독재자였다. 1927년 4월 12일에는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주의자 300여 명을 사살했다. 5000여 명이 실종됐다. 자기에게 반대했던 정치인을 체포해 왔다는 보고를 받자 “요참(腰斬)에 처하라”고 지시한 냉혈한이었다. 1947년 대만에 진주한 국민당군이 현지인들의 소요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2·28사변으로 3만여 명이 죽었다. 이 사건 이후 대만은 1987년까지 계엄령 아래 놓였다. 정치범들은 화소도에 있는 정치범수용소에 구금됐다. ‘자유중국’이라고 칭했지만, 야당이 허용된 것은 1986년, 여야 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은 2000년이었다.
거기에 더해 장제스는 아들 장징궈(蔣經國·1910~1988)에게 권력을 세습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장징궈는 야당을 허용하고, 계엄령을 해제하는 등 점진적으로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열었다.
여전한 國父 ― 아타튀르크(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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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국부 케말 아타튀르크. |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오스만튀르크제국은 국가 해체의 위기에 놓였다. 케말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독립군을 일으켜, 그리스군을 격퇴했다. 이를 바탕으로 케말은 튀르크 국가를 사실상 해체했던 1920년의 세브르조약을 폐기하고, 오늘날 터키공화국의 영토인 아나톨리아반도와 발칸반도 일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20년 1월에는 국민의회를 소집했고, 이듬해에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을 담은 기본법을 공포했다. 1922년에는 술탄(오스만제국의 황제)제도를, 1924년에는 칼리프(이슬람세계의 최고 종교 지도자)제도를 폐지했다. 1923년에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케말은 서구식 법률제도 도입, 정교분리, 여성참정권 인정 등 이슬람세계에서는 파천황(破天荒)에 가까운 개혁을 단행했다.
케말은 ‘6개의 화살’, 즉 공화주의, 민족주의, 국민주의, 국가통제주의, 세속주의, 개혁주의를 내걸었는데, 이를 흔히 ‘케말리즘’이라고 한다. 덕분에 터키는 오늘날 중동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민주적이고 서구화된 나라가 됐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튀르크인의 근대국민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종전의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오스만튀르크인이 중심이 된 다민족(多民族) 제국이었지, 국민국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말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터키는 공화인민당의 1당 독재체제 아래 있었다. 의회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에 이르러서였다.
1934년 11월 터키 의회는 모든 국민에게 성(姓)을 사용하도록 하는 성씨법을 통과시킨 후, 케말에게 ‘아타튀르크’, 즉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성을 바쳤다. 에르도안 현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는 이슬람적 색채가 강해지고, 케말리즘에 입각한 기성 질서가 흔들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타튀르크는 대다수 국민에게 여전히 ‘국부’로 남아 있다. 터키의 관문인 이스탄불 국제공항의 이름은 아타튀르크 공항이다.
그 밖에도 많은 지도자가 있다.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인도라는 거대한 나라에 의회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적 경제제도를 고집하고, 비동맹 외교에 몰두하면서 인도를 한 세대 이상 세계사의 흐름에 뒤지게 만들었다.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배 아래서도 1930년대 중반부터 미국 의회가 제시한 스케줄에 따라 착실하게 독립을 준비해 왔다. 하지만 마누엘 케손, 세르지오 오스메냐 등 건국 초기의 국가 지도자들은 토지개혁 등 당면한 과제들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했다. 소수의 족벌지주가 농민을 지배했다. 근대적 시민계급이 형성되지 못한 필리핀은 이후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후퇴를 거듭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라는 소리를 들었던 필리핀은 오늘날에도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 수준의 저개발국으로 머물러 있다.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잠비아의 케네스 카운다 등 아프리카 신생국들의 지도자들도 반제국주의적 발상에서 사회주의의 미망(迷妄)에 빠져 나라를 혼돈에 빠뜨렸다.
1980년 오랜 게릴라 투쟁 끝에 백인인종차별주의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는 92세인 지금까지도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과 독재에 시달리고 있다.
일개 개인도 사는 동안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순간의 선택에 따라 희비(喜悲)가 엇갈리고 운명의 길이 달라진다. 하물며 정치 지도자, 그것도 한 나라를 세우는 건국 지도자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했던 선택에 따라 이후 수십 년간 나라의 운명이, 그리고 그 나라에 사는 국민들의 삶이 달라졌다.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것만으로도 國父 자격 충분
앞에서 여러 나라의 건국 지도자들을 살펴보았다. 성공한 사람도 있었고, 실패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비난도 따라다녔다. ‘통일’보다 서방세계로의 ‘통합’을 선택했던 아데나워는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데 벌레라는 죽는 순간까지 북아일랜드와의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부채(負債)의식을 안고 살았다. 피우수트스키, 아타튀르크, 장제스 등에게는 독재자라는 비난이 따라다녔다.
공적(公的) 혹은 사적(私的) 잘못들에 눈을 감자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몇 가지 과(過)를 이유로 공(功)을 외면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도자로서 그 시대에 해야 할 큰일들을 해냈다면, 그걸로 평가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건국의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일은 ‘건국’이었다.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닦았으면 공이 더 큰 것이다.
마오쩌둥의 경우 토지개혁 과정에서 100만~500만, 대약진운동기간 중의 아사자 2000만~3000만, 문화대혁명 기간 중 40만명 등 엄청난 사망자를 냈다. 그러는 동안 중국은 한 세대 이상 후퇴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며 마오쩌둥을 감쌌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영수(開國領袖)’ 마오쩌둥의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톈안먼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승만에게도 당연히 공과(功過)가 있다. 특히 분단과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는 남다른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이승만은 ‘건국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큰 궤도를 놓았다. 이후 일탈과 시행착오는 없지 않았지만, 선거, 다당제, 의회민주주의라는 큰 원칙은 훼손되지 않았다. 농지개혁을 통해 국민국가 형성과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경제의 나아갈 바를 시장경제로 잡아 오늘의 한국 경제를 있게 했다.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안보를 든든히 했다.
다른 나라의 건국 지도자들과 비교해 보면, 이승만만큼 할 일을 다 한 건국 지도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바탕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말년의 과오들을 가지고 건국의 큰 공적을 한사코 외면하는 것은 얼마나 좁은 생각인가?⊙
이진영
(201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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