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의 민주통합당 안은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어 ‘대선용 포퓰리즘’이란 비판받아
⊙ ‘서울대’ 명칭 없앤 후에도 우수한 학생들이 서울대 캠퍼스로 몰린다면 통합안은 실패
⊙ 명문 사립대학들이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서울대의 연구중심대학 전환도 불가능
⊙ 프랑스 대학개혁의 실패는 ‘그랑제콜’을 聖域으로 남겨놓았기 때문
朴富權
⊙ 64세. 서울대 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교육사회학)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교육정책학 박사.
⊙ 現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 동국대 사범대 학장·교무처장, 대학설립 심사위원, 교육부 정책심의위원,
대통령직인수위 사회문화여성분과위원,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역임.
⊙ ‘서울대’ 명칭 없앤 후에도 우수한 학생들이 서울대 캠퍼스로 몰린다면 통합안은 실패
⊙ 명문 사립대학들이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서울대의 연구중심대학 전환도 불가능
⊙ 프랑스 대학개혁의 실패는 ‘그랑제콜’을 聖域으로 남겨놓았기 때문
朴富權
⊙ 64세. 서울대 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교육사회학)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교육정책학 박사.
⊙ 現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 동국대 사범대 학장·교무처장, 대학설립 심사위원, 교육부 정책심의위원,
대통령직인수위 사회문화여성분과위원,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역임.
- 민주통합당은 향후 대선 공약으로 서울대를 사실상 폐지하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 방안을 추진 중이다.
지난 7월 1일 민주통합당 이용섭(李庸燮) 정책위의장은 각 지역의 국립대와 서울대를 하나로 묶는 국립대 통합방안을 대선(大選)공약으로 내놓았다. 이 통합방안의 특징은 서울대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위, 역할, 영향력을 견인차로 하여 지방의 국립대학을 한 단계 끌어올리자는 데 있다. 즉 서울대의 학부는 인문, 자연분야의 기초학문만 남겨두고 공학·의학 등 전문분야는 각 지방 국립대학을 특성화하여 분산시키고, 통합체제에 속한 각 국립대학은 학점·교수·졸업장까지 공유하도록 하여 마치 하나의 대학인 것처럼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론적으로는 국립대 전체를 하나의 틀로 묶을 수도 있고, 서울대를 별도로 하고 나머지만을 묶을 수도 있고, 서로 합의한 몇몇 국립대끼리 2~3개교씩 묶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충격요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서울대’ 명칭을 없애면 서울대에 갈 학생들이 지방 국립대학으로 갈 것인가?
현재로선 지방 국립대보다는 연·고대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명칭을 없앤 후에도 계속 우수 학생들이 서울대 캠퍼스로 몰린다면 이것도 통합안이 기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지방 국립대 9곳을 서울대와 연합하여 서울대 지방 캠퍼스로 묶어” 공동 학위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본다.
각 국립대학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체제처럼 하나의 체제로 통합하려면 이를 통괄하는 이사회(理事會)가 필요하다. 이 경우에도 이사회의 구성, 국립대학 체제 총장, 운영의 주도권, 재정과 자원의 배분에서 각 캠퍼스가 날카롭게 대립할 가능성이 있고, 이 싸움에서 정치·사회 환경, 동원할 수 있는 자원 등이 상대적으로 우수하고 풍부한 서울대가 유리할 가능성이 있다. 또 캘리포니아처럼 이사회에서 교수들을 제외한다면 지방 국립대학 교수들이 반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주통합당의 국립대학 통합안이 ‘대선용 포퓰리즘’으로 보수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은 것은 그런 발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그 안에 이르는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정책적 발상이 아니라 로드맵이다. 아무리 ‘노다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심해(深海)의 바닥에 있어 캘 수 있는 방도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민주통합당이 문제로 삼고 있는 서울대와 지방 국립대학의 격차 문제는 대학서열화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지역균형발전의 문제로 풀어가야 할 사안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우수한 인재가 지방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 혹은 수도권대학으로 진학한다는 점이다.
지역균형발전이 대학서열화 무너뜨릴까
사람은 임금(賃金)이 높은 곳으로 흐르고, 기업은 임금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이 현상은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통합되고 있는 과정에서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학생들의 수도권대학 집중현상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역균형의 문제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의 협조가 없다면, 각 지역의 대학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성공하기 어렵다. 그러나 역으로 유능한 인재는 일자리를 스스로 창출한다. 미국경제의 침체 원인 중의 하나를 ‘유능한 인재가 임금 수준이 높은 금융 쪽으로 집중한 탓에 그들이 창출했어야 할 새로운 일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지역균형의 문제는 여하(如何)히 유능한 인재들을, 여하히 각 지역에 고르게 분포하도록 하느냐의 문제가 되고, 이는 ‘사람은 임금이 많은 곳으로 흐른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를 거스르는 어려운 과제가 된다.
전 정부에서 시작하여 현재 진행 중인 행정수도와 각급 국가기관의 지방이전은 양반과 상민만큼이나 견고했던 지역 간의 상징격차를 해소하는 것과 함께 일자리 창출을 선도하는 효과를 동시에 노리고 있다. 지역균형발전과 국립대 통합네트워크가 성공하기 위해선 유능한 인재들이 지방으로 흘러갔을 때 비로소 온전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사립대 동참도 관건
인재의 지역 간 균형분산은 국립대학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하다. 수능상위 4% 이내의 학생 수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입학정원 수와 비슷하다. 사실 고교 졸업생 중 성적이 우수한 상위권 학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 소재 대학 대부분이 사립대라는 점이다.
사립대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대학 적령인구다. 대학에 입학하는 18세 인구는 2020년에는 현재의 입학자 수보다 12만명이 줄어든다. 이는 해당 인구 전체가 대학에 진학한다고 하더라도 신입생 3000명 규모의 대학 40개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서울 캠퍼스 학부 신입생 수만 양교가 똑같이 4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 대학들이 경쟁해야 할 미국 사립대학들의 신입생 수는 1500명을 넘지 않는다. 프린스턴의 4개 학년 전체 학부생 수는 5000명, 하버드는 6700명, 예일대는 5322명, 그리고 스탠퍼드는 6927명이다. 반면 대학원생 수가 학부생 수를 웃도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하버드의 대학원생 수는 1만4500명으로 학부생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이 단순한 비교가 시사하는 바는 학부를 축소하고 대학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의 초일류 대학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서울대를 연구중심대학으로 전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명문 사립대학이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서울대의 연구중심대학으로의 전환은 성공하기 어렵다. 학부학생 수를 교세(校勢)로 생각하는 우리의 풍토에서 서울대 학부생만 줄이라고 하면 서울대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연·고대와 같은 사립대학이 스스로 학부 정원을 줄이고 연구중심대학으로 전환하도록 만드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한다’는 옛말대로 연구중심대학이 더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신설하는 것이 더 빠른 해결방법일지 모른다. 이는 비교적 최근에 설립하여 연구중심대학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는 포스텍, 광주과기대, 그리고 울산과기대의 예에서 쉽게 알 수 있다.
프랑스 대학개혁이 실패한 이유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 최고의 인재를 길러내는 곳은 대학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다르다. 최첨단 연구와 각 분야를 이끄는 최고의 전문가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 프랑스에서는 대학이 아니라 ‘그랑제콜’이다. 그 결과 프랑스를 이끌어가고 있는 대통령과 장관, 유명 정치인, 군(軍)장성, 고급관료, 산업지도자,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공학기술자들이 한결같이 그랑제콜 출신이다.
그랑제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흔히 프레파(pr?pas)라고 부르는 그랑제콜 준비반(les classes pr?paratoires)에 들어간다. 이 프레파는 명문 리세(Lyc?es)에 설치되어 있는데 교육기간은 2년이고, 이 과정을 마치면 경쟁시험을 거쳐 그랑제콜에 진학하고 대학진학을 원하면 3학년에 편입할 수 있다.
프랑스 고등교육의 특징은 프레파와 그랑제콜이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에 설치된 대학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대학원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그랑제콜로 진학하는 ‘프레파-그랑제콜 체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고등학교 성적 상위 4% 이내에 들어가는 우수학생들만을 허용하는 ‘프레파-그랑제콜’이라는 이 별도의 교육통로는 프랑스 대학과 사회에 다음 두 가지 폐해를 야기하고 있다.
첫째, 프랑스 대학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인재(人材)가 없는 대학은 대학이라고 보기 어렵다. 거의가 국립으로 운영되고 있는 프랑스 대학의 고질병은 대학재정의 빈곤이다. 그랑제콜에 가는 인재들이 대학으로 가지 않는 한, 국가의 대학투자는 획기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대학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학 출신들이 아니라 거의 예외 없이 그랑제콜 출신이다. 그러므로 보르도 대학(University of Bordeaux) 등이 현재 시도하고 있는 대학과 대학, 대학과 연구소(laboratory)의 통합도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랑제콜이 함께하지 않는 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타임과 QS(Quacquarelli Symonds)사가 공동으로 선정한 세계 100대 대학 속에 프랑스 대학 중에는 ‘국립행정학교’와 ‘에콜 폴리테크니크’ 두 그랑제콜만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프랑스 고등교육의 현실을 말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프레파-그랑제콜의 별도 통로가 프랑스의 지배 엘리트와 일반 국민 사이에 견고한 벽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우수학생들이 각 대학에 분산되어 있으면 보통학생들도 우수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미국대학은 신입생을 선발할 때 ‘학생들이 서로 배울 수 있도록 학습집단을 다양한 경제적·문화적·계층적·지역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로 구성하는 것’을 항상 고려한다.
교사와 책뿐만 아니라 우수학생 그 자체가 교육의 중요한 자원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우수학생들을 프레파에만 분리 수용하는 것은 프랑스 대학의 입장에서 볼 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 국립대학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서열화의 문제는 없다. 그러나 재정 빈곤과 과도한 국가통제가 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1984년 사바리(Savary) 장관의 개혁에서부터 시작해 대학에 행·재정적, 교육적 자율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페리(Ferry) 장관이 2003년 제출한 ‘대학 자율법안’은 대학을 사립화하려는 시도라는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지만, 2007년 국립학교 운영에서 대학총장에게 더 많은 결정권을 부여하는 대학자율법이 통과되었다.
프랑스는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 새 대통령은 교육부 장관의 단명(短命)을 미리 걱정할 만큼 교육이 정치쟁점화되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그랑제콜을 범접할 수 없는 성역(聖域)으로 놓고 대학만을 문제 삼는 고등교육 개혁은 온전한 개혁이 되기 어렵다고 본다.
독일, ‘대학공부를 해낼 수 있는 사람만’ 입학
독일의 근대대학은 1809년에 설립된 베를린대에서 시작한다. ‘국립대학의 광범위한 내부자율, 정교수(Ordinarien)에 의한 자치, 연구중심, 모든 직접적·사회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 대학교육과 학교수업의 구분, 전문실습, 교수·학습의 자유, 연구와 교수의 통합’이 대학운영의 핵심원리다.
독일대학은 국립대학이고 원칙적으로 무상(無償)이다. 그리고 독일대학을 이해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전통 독일대학에는 ‘학부(undergraduate)’가 없다는 것이다. 훔볼트의 베를린대에서부터 고등교육에 필요한 기초소양은 대학과정에서 후기 중등학교로 내려갔다. 그러므로 대학은 우수한 정예 엘리트가 전문 직종(의사, 교사, 약사, 고급관료 등)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거나 학자가 되기 위해서 가는 곳이다. 대학 졸업자가 받는 학위는 디플롬(Diplom) 혹은 마기스터(Magister)라고 불리는데 둘 사이에 큰 차이는 없고, 독일에서는 이들을 ‘1차 학위’라고 부르지만 우리나라 학위와 비교하면 석사학위에 가깝다.
대학교육이 무상이라는 것, 그리고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취득하면 졸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졸업자격시험’에 합격해야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은 독일 대학생의 수업연한을 늘리는 원인이 되어 평균 졸업연한이 6~7년에 이른다. 만년(晩年) 학생들의 증가는 독일 대학교육의 질을 지속적으로 저하시켰다. 가장 큰 문제가 대학 강의의 과밀(過密)이다. 소규모로 이루어져야 할 세미나에 100명, 200명의 수강생이 넘쳐나는 예가 적지 않다.
만년 대학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독일 정부가 도입한 정책 중의 하나가 학사·석사 이원분리 과정이다. 독일 정부는 ‘볼로냐 선언’을 앞세워 1999년 이후 지금까지 교육과정의 이수 가능성을 높이고, 학업량과 시험의 수를 줄이는 등 끈질기게 공을 들인 결과 2011년 현재 전체 1만4000개의 대학과정 중에서 1만1500개(82%) 과정을 이원분리 과정으로 전환하였다. 국가 자격시험을 거쳐야 하는 2600개(18%) 과정은 종전 제도로 운영하고 있다.
독일에서 대학준비 학교인 김나지움에 진학하는 학생의 비율은 동일 연령층에서 약 30% 정도다. 실제 대학진학자 비율도 30%를 크게 넘지 않는다. 대학교육이 무상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처럼 진학자 수가 많지 않은 것은 국가가 대학의 수용능력을 감안하여 정원을 통제하고 있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대학에는 대학공부를 해낼 수 있는 사람만 가야 한다’는 상식이 국민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 상식은 원칙을 따르는 독일인의 모범생 기질에도 연유하지만, 수험자들의 이해의 깊이를 바닥까지 들여다보려는 독일시험제도에도 상당한 원인이 있다. 독일의 김나지움 졸업자격고사인 ‘아비투어’에는 객관식, 선다형 문제가 없다. 주어진 문제에 만점을 받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이 품고 있는 원리를 자유자재로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사(類似)문제의 풀이연습으로, 그리고 단순한 암기로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 그리고 이런 시험관행은 독일뿐만 아니라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일반화되어 있다.
독일대학이 수렁에 빠지게 된 원인
독일 고등교육이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교수자격을 취득하는 데 너무나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사람들의 평균연령은 약 32세, 교수자격시험(Habilitation)에 통과하는 평균연령은 약 39세다. 이는 4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식으로 대학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계속되는 교육과 훈련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선발된 철인 후보자가 마지막 현장경험과 실습을 마치는 때가 50세이다. 이 철인의 교육기간에 비하면 독일의 교수양성 과정은 10년이나 단축된 것이다.
독일의 교수자격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구주제를 가져야 하고 연구의 범위와 수준에서 박사학위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40세가 되어야 교수가 되도록 한 원래의 구상은 오히려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20세기 초부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독일학자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구주제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가시적인 업적을 요구하는 교수자격 요건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교수자격 취득에 걸리는 기간이 너무 길다는 비판은 이공계 학자들로부터 먼저 나왔다. 이 분야의 지식은 구식화(obsolescence)가 빠르고 거의 대부분의 학자가 자신의 최고 기량을 40대 전에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의 벽에 부딪힌 독일 이공계 학도들은 영국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독일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존의 교수자격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미국 교수 임용제도를 모델로 한 ‘주니어 교수제(Junior professur)’를 도입했다. 그러자 인문·사회계 학자들이 이 제도의 도입에 비판적이었고, 독일연방법원이 ‘교수자격제도의 폐지가 독일 기본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해 종전의 교수자격제도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 되어버렸다.
캘리포니아 대학체제 총장이었던 클라크 커(Clark Kerr)는 독일대학이 수렁에 빠지게 된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한다. 하나는 정교수 체제에 대한 과도한 의존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교수자격제도는 《공화국》의 철인처럼 세상의 이치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그것이 운행하는 원리를 밝혀낼 수 있는 최고의 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하여 훔볼트의 베를린대는 정교수에 의한 자치(自治)를 대학운영의 기본원리 중 하나로 채택하고 있다. 대학을 국가의 지배하에 놓되 학문의 자유, 교수와 학습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하고, 대신 대학은 ‘모든 직접적, 사회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즉 정치적인 현안 문제에는 초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막스 웨버의 ‘가치중립의 원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지만 그 결과, 국가의 지배를 불편해 하지 않는 절대적인 교수권력을 갖게 되었다.
오랜 전통을 가진 독일의 학위제도와 교수자격제도가 정부와 정치계로부터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저항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5월 6일 독일대학교수협의회 회장 그리가트(Felix Grigat)는 “전통적 독일대학의 기초였던 훔볼트의 이념은 사라졌고, 대학의 교육은 학구적 연구에서 기술훈련으로 전락하고, 정부가 기대했던 수학기간 단축과 외국 유학생의 증가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대하여 루르대 메르카토르(Mercator) 연구센터는 “독일대학이 대중화된 지금에 와서는 과거 상위 5%에게 주던 교육과 똑같은 교육을 40%에게까지 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박하고 있다.
미국 주립대는 ‘외부자’가 지배
우리나라 국립대학의 한 비교준거가 될 수 있는 미국의 주립대학은 19세기 중반 미의회를 통과하고 링컨이 서명한 ‘모릴 대학 토지 불하법(Morrill Land-Grant Colleges Act)’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법에 따라 각 주가 대학을 설립하였지만 초기에는 대학에 들어올 학생이 없었다. 당시에만 해도 ‘대학 예비교’라고 할 수 있는 고등학교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립대학 교수들은 학생선발을 위하여 고등학교에 직접 찾아갔다. 이들은 교육과정의 편성, 수업방법, 교육의 질 관리 등을 지도하고 자신들의 기준에서 대학공부가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학생들을 선발하였다. 이러한 관행이 파국을 맞게 된 것은 소련의 스푸트니크(Sputnik)호 발사에 의해서다. 놀란 미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각 대학에 쏟아붓자, 대학교수들은 연구비 수주와 연구실적을 위해 고교 현장 방문지도에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 주 내에 있는 주립대학이라도 캘리포니아와 미시간의 예에서처럼 법적 지위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캘리포니아 주립대는 캘리포니아 대학,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캘리포니아 전문대학의 3층 구조(University of California, California State University, California Community College)로 되어 있다. 이 중 캘리포니아 대학은 주 헌법으로 설치된 것이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미시간주의 1963년 헌법은 미시간 대학(University of Michigan), 미시간 주립대학(Michgan State University), 그리고 웨인 주립대학(Wayne State University)의 이사회 명칭과 이사 수를 규정하고, 미시간 대학 이사는 주 전체 유권자가, 나머지는 그 주립대학이 소재하고 있는 지역의 주민들이 일반선거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미시간주에도 주 교육부가 있지만 이들 대학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미국주립대학 이사회도 미국 사립대학 이사회의 전통을 따라 외부자(layman) 지배가 대세로 되어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체제(University of California System)의 이사는 7명의 당연직 이사와 18명의 지명이사로 구성된다. 법정 정이사 25명 중, 학생 이사 1명은 정이사로 투표권을 가지고 있지만, 캘리포니아 체제 전체 교수평의회 의장과 부의장은 정이사에 포함되지 않고 투표권이 없다. 이는 캘리포니아 대학체제가 대학 내부의 교수와 직원에 의하여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외부 인사로 통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주립대학 이사회는 교수와 주정부의 중간지점에 있다. 이 이사회에는 원칙적으로 교수와 학생은 참여하지 않는다. 미국 주립대학의 외부자 지배전통은 칼뱅의 교의(敎義)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다. 원죄(原罪)를 바탕으로 하는 칼뱅주의의 교의는 국가의 관료권력이든, 대학의 학문권력이든, 교회의 성직권력이든,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이런 믿음에서 칼뱅이 1559년에 세운 아카데미의 평의회(lay board)는 교수와 학생의 참여를 배제하고 성직자와 일반 시민으로 구성한다. 칼뱅의 교의를 금과옥조로 받아들인 것은 그의 고향 유럽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이 현재와 같은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클라크 커 총장(재임 1958~1967)에 의해서였다. 다른 주와는 달리 모선(母船)대학(flagship university)을 따로 두지 않은 것도 그의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대학 중에서도 버클리대는 학생의 수준, 연구실적, 사회적 평판 등에서 다른 캘리포니아 대학을 압도한다. 사실 캘리포니아에서도 버클리가 모선대학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과 교수를 강제 배정하지 않는 한 모선대학의 출현을 막을 수 없다.
대학개혁, 교육의 內的 원리 따라야
훔볼트 대학과 그랑제콜은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대의 총아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는 독일과 프랑스의 대학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양국은 수십 년간을 노력해 왔지만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버릴 수 없다.
유럽대학의 장단점에 대한 충분한 분석에서 새로운 대학을 설계할 수 있었다는 것은 후발 주자인 미국의 행운이었다. 1867년 길만(Daniel, C. Gilman) 총장이 베를린 대학을 모델로 하여 존스홉킨스대를 설계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코넬대(1865), 스탠퍼드(1885), 시카고대(1890) 등이 설립된다. 이렇게 미국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부을 수 있었고, 이러한 신생대학들이 그때까지 전문대학 수준에 머물러 있던 기존의 하버드, 예일 등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미국의 주립대학이 터를 잡고 제도의 골격을 형성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우리는 독일, 프랑스와 같이 어떤 일관된 원리와 이념에 의하여 고등교육 체제를 구축한 적이 없다. 광복 후 지금까지 처음은 일본의 체제를, 그 다음은 미국의 체제를, 그리고 때로는 유럽의 체제를 옮기고 덧붙였다. 또한 우리 사회가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지난 1990년대 초까지 대학은 공부하고 연구하는 공간이기보다는 비민주적인 정권과 맞서야 하는 투쟁 기지였다.
이제는 우리도 사회 변화에 걸맞은 대학체제, 우리의 미래를 선도할 수 있는 대학체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체제는 국립대학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립대도 함께 아우르는 것이 되어야 하고, 단기적인 안목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또 정치적인 필요보다는 교육의 내적 원리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국민 대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일관된 원리와 이념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
사실 이론적으로는 국립대 전체를 하나의 틀로 묶을 수도 있고, 서울대를 별도로 하고 나머지만을 묶을 수도 있고, 서로 합의한 몇몇 국립대끼리 2~3개교씩 묶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충격요법’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서울대’ 명칭을 없애면 서울대에 갈 학생들이 지방 국립대학으로 갈 것인가?
현재로선 지방 국립대보다는 연·고대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명칭을 없앤 후에도 계속 우수 학생들이 서울대 캠퍼스로 몰린다면 이것도 통합안이 기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지방 국립대 9곳을 서울대와 연합하여 서울대 지방 캠퍼스로 묶어” 공동 학위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본다.
각 국립대학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체제처럼 하나의 체제로 통합하려면 이를 통괄하는 이사회(理事會)가 필요하다. 이 경우에도 이사회의 구성, 국립대학 체제 총장, 운영의 주도권, 재정과 자원의 배분에서 각 캠퍼스가 날카롭게 대립할 가능성이 있고, 이 싸움에서 정치·사회 환경, 동원할 수 있는 자원 등이 상대적으로 우수하고 풍부한 서울대가 유리할 가능성이 있다. 또 캘리포니아처럼 이사회에서 교수들을 제외한다면 지방 국립대학 교수들이 반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주통합당의 국립대학 통합안이 ‘대선용 포퓰리즘’으로 보수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은 것은 그런 발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그 안에 이르는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정책적 발상이 아니라 로드맵이다. 아무리 ‘노다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심해(深海)의 바닥에 있어 캘 수 있는 방도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민주통합당이 문제로 삼고 있는 서울대와 지방 국립대학의 격차 문제는 대학서열화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지역균형발전의 문제로 풀어가야 할 사안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우수한 인재가 지방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 혹은 수도권대학으로 진학한다는 점이다.
지역균형발전이 대학서열화 무너뜨릴까
사람은 임금(賃金)이 높은 곳으로 흐르고, 기업은 임금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이 현상은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통합되고 있는 과정에서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학생들의 수도권대학 집중현상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역균형의 문제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의 협조가 없다면, 각 지역의 대학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성공하기 어렵다. 그러나 역으로 유능한 인재는 일자리를 스스로 창출한다. 미국경제의 침체 원인 중의 하나를 ‘유능한 인재가 임금 수준이 높은 금융 쪽으로 집중한 탓에 그들이 창출했어야 할 새로운 일자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지역균형의 문제는 여하(如何)히 유능한 인재들을, 여하히 각 지역에 고르게 분포하도록 하느냐의 문제가 되고, 이는 ‘사람은 임금이 많은 곳으로 흐른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를 거스르는 어려운 과제가 된다.
전 정부에서 시작하여 현재 진행 중인 행정수도와 각급 국가기관의 지방이전은 양반과 상민만큼이나 견고했던 지역 간의 상징격차를 해소하는 것과 함께 일자리 창출을 선도하는 효과를 동시에 노리고 있다. 지역균형발전과 국립대 통합네트워크가 성공하기 위해선 유능한 인재들이 지방으로 흘러갔을 때 비로소 온전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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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는 명문사립대까지 포함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사진은 올해 졸업식이 있던 2월 24일 서울대 캠퍼스의 모습. |
사립대 동참도 관건
인재의 지역 간 균형분산은 국립대학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하다. 수능상위 4% 이내의 학생 수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입학정원 수와 비슷하다. 사실 고교 졸업생 중 성적이 우수한 상위권 학생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 소재 대학 대부분이 사립대라는 점이다.
사립대를 동시에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대학 적령인구다. 대학에 입학하는 18세 인구는 2020년에는 현재의 입학자 수보다 12만명이 줄어든다. 이는 해당 인구 전체가 대학에 진학한다고 하더라도 신입생 3000명 규모의 대학 40개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서울 캠퍼스 학부 신입생 수만 양교가 똑같이 4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 대학들이 경쟁해야 할 미국 사립대학들의 신입생 수는 1500명을 넘지 않는다. 프린스턴의 4개 학년 전체 학부생 수는 5000명, 하버드는 6700명, 예일대는 5322명, 그리고 스탠퍼드는 6927명이다. 반면 대학원생 수가 학부생 수를 웃도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하버드의 대학원생 수는 1만4500명으로 학부생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이 단순한 비교가 시사하는 바는 학부를 축소하고 대학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국의 초일류 대학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서울대를 연구중심대학으로 전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명문 사립대학이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서울대의 연구중심대학으로의 전환은 성공하기 어렵다. 학부학생 수를 교세(校勢)로 생각하는 우리의 풍토에서 서울대 학부생만 줄이라고 하면 서울대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연·고대와 같은 사립대학이 스스로 학부 정원을 줄이고 연구중심대학으로 전환하도록 만드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한다’는 옛말대로 연구중심대학이 더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신설하는 것이 더 빠른 해결방법일지 모른다. 이는 비교적 최근에 설립하여 연구중심대학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는 포스텍, 광주과기대, 그리고 울산과기대의 예에서 쉽게 알 수 있다.
프랑스 대학개혁이 실패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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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CELSA의 수업 장면. 파리 4대학(소르본대)의 그랑제콜이다. 장단기 과정이 있으며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저널리스트 등의 전문가 양성을 위한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다. |
그랑제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흔히 프레파(pr?pas)라고 부르는 그랑제콜 준비반(les classes pr?paratoires)에 들어간다. 이 프레파는 명문 리세(Lyc?es)에 설치되어 있는데 교육기간은 2년이고, 이 과정을 마치면 경쟁시험을 거쳐 그랑제콜에 진학하고 대학진학을 원하면 3학년에 편입할 수 있다.
프랑스 고등교육의 특징은 프레파와 그랑제콜이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에 설치된 대학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대학원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그랑제콜로 진학하는 ‘프레파-그랑제콜 체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없다. 고등학교 성적 상위 4% 이내에 들어가는 우수학생들만을 허용하는 ‘프레파-그랑제콜’이라는 이 별도의 교육통로는 프랑스 대학과 사회에 다음 두 가지 폐해를 야기하고 있다.
첫째, 프랑스 대학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인재(人材)가 없는 대학은 대학이라고 보기 어렵다. 거의가 국립으로 운영되고 있는 프랑스 대학의 고질병은 대학재정의 빈곤이다. 그랑제콜에 가는 인재들이 대학으로 가지 않는 한, 국가의 대학투자는 획기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대학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학 출신들이 아니라 거의 예외 없이 그랑제콜 출신이다. 그러므로 보르도 대학(University of Bordeaux) 등이 현재 시도하고 있는 대학과 대학, 대학과 연구소(laboratory)의 통합도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랑제콜이 함께하지 않는 한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타임과 QS(Quacquarelli Symonds)사가 공동으로 선정한 세계 100대 대학 속에 프랑스 대학 중에는 ‘국립행정학교’와 ‘에콜 폴리테크니크’ 두 그랑제콜만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프랑스 고등교육의 현실을 말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프레파-그랑제콜의 별도 통로가 프랑스의 지배 엘리트와 일반 국민 사이에 견고한 벽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우수학생들이 각 대학에 분산되어 있으면 보통학생들도 우수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미국대학은 신입생을 선발할 때 ‘학생들이 서로 배울 수 있도록 학습집단을 다양한 경제적·문화적·계층적·지역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로 구성하는 것’을 항상 고려한다.
교사와 책뿐만 아니라 우수학생 그 자체가 교육의 중요한 자원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우수학생들을 프레파에만 분리 수용하는 것은 프랑스 대학의 입장에서 볼 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 국립대학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서열화의 문제는 없다. 그러나 재정 빈곤과 과도한 국가통제가 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1984년 사바리(Savary) 장관의 개혁에서부터 시작해 대학에 행·재정적, 교육적 자율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페리(Ferry) 장관이 2003년 제출한 ‘대학 자율법안’은 대학을 사립화하려는 시도라는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지만, 2007년 국립학교 운영에서 대학총장에게 더 많은 결정권을 부여하는 대학자율법이 통과되었다.
프랑스는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 새 대통령은 교육부 장관의 단명(短命)을 미리 걱정할 만큼 교육이 정치쟁점화되는 사례가 많다. 그러나 그랑제콜을 범접할 수 없는 성역(聖域)으로 놓고 대학만을 문제 삼는 고등교육 개혁은 온전한 개혁이 되기 어렵다고 본다.
독일, ‘대학공부를 해낼 수 있는 사람만’ 입학
독일의 근대대학은 1809년에 설립된 베를린대에서 시작한다. ‘국립대학의 광범위한 내부자율, 정교수(Ordinarien)에 의한 자치, 연구중심, 모든 직접적·사회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 대학교육과 학교수업의 구분, 전문실습, 교수·학습의 자유, 연구와 교수의 통합’이 대학운영의 핵심원리다.
독일대학은 국립대학이고 원칙적으로 무상(無償)이다. 그리고 독일대학을 이해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전통 독일대학에는 ‘학부(undergraduate)’가 없다는 것이다. 훔볼트의 베를린대에서부터 고등교육에 필요한 기초소양은 대학과정에서 후기 중등학교로 내려갔다. 그러므로 대학은 우수한 정예 엘리트가 전문 직종(의사, 교사, 약사, 고급관료 등)에 필요한 자격증을 따거나 학자가 되기 위해서 가는 곳이다. 대학 졸업자가 받는 학위는 디플롬(Diplom) 혹은 마기스터(Magister)라고 불리는데 둘 사이에 큰 차이는 없고, 독일에서는 이들을 ‘1차 학위’라고 부르지만 우리나라 학위와 비교하면 석사학위에 가깝다.
대학교육이 무상이라는 것, 그리고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취득하면 졸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졸업자격시험’에 합격해야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은 독일 대학생의 수업연한을 늘리는 원인이 되어 평균 졸업연한이 6~7년에 이른다. 만년(晩年) 학생들의 증가는 독일 대학교육의 질을 지속적으로 저하시켰다. 가장 큰 문제가 대학 강의의 과밀(過密)이다. 소규모로 이루어져야 할 세미나에 100명, 200명의 수강생이 넘쳐나는 예가 적지 않다.
만년 대학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독일 정부가 도입한 정책 중의 하나가 학사·석사 이원분리 과정이다. 독일 정부는 ‘볼로냐 선언’을 앞세워 1999년 이후 지금까지 교육과정의 이수 가능성을 높이고, 학업량과 시험의 수를 줄이는 등 끈질기게 공을 들인 결과 2011년 현재 전체 1만4000개의 대학과정 중에서 1만1500개(82%) 과정을 이원분리 과정으로 전환하였다. 국가 자격시험을 거쳐야 하는 2600개(18%) 과정은 종전 제도로 운영하고 있다.
독일에서 대학준비 학교인 김나지움에 진학하는 학생의 비율은 동일 연령층에서 약 30% 정도다. 실제 대학진학자 비율도 30%를 크게 넘지 않는다. 대학교육이 무상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처럼 진학자 수가 많지 않은 것은 국가가 대학의 수용능력을 감안하여 정원을 통제하고 있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대학에는 대학공부를 해낼 수 있는 사람만 가야 한다’는 상식이 국민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 상식은 원칙을 따르는 독일인의 모범생 기질에도 연유하지만, 수험자들의 이해의 깊이를 바닥까지 들여다보려는 독일시험제도에도 상당한 원인이 있다. 독일의 김나지움 졸업자격고사인 ‘아비투어’에는 객관식, 선다형 문제가 없다. 주어진 문제에 만점을 받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이 품고 있는 원리를 자유자재로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사(類似)문제의 풀이연습으로, 그리고 단순한 암기로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 그리고 이런 시험관행은 독일뿐만 아니라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일반화되어 있다.
독일대학이 수렁에 빠지게 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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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훔볼트 베를린대 전경. 독일은 아비투어(고교졸업 및 대학입학 자격증)에 합격하면 원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다. 학과에 따라 랭킹이 공개되고 일부 인기학과에 학생이 몰리기도 한다. |
독일의 교수자격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구주제를 가져야 하고 연구의 범위와 수준에서 박사학위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40세가 되어야 교수가 되도록 한 원래의 구상은 오히려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20세기 초부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독일학자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구주제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가시적인 업적을 요구하는 교수자격 요건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교수자격 취득에 걸리는 기간이 너무 길다는 비판은 이공계 학자들로부터 먼저 나왔다. 이 분야의 지식은 구식화(obsolescence)가 빠르고 거의 대부분의 학자가 자신의 최고 기량을 40대 전에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의 벽에 부딪힌 독일 이공계 학도들은 영국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독일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존의 교수자격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미국 교수 임용제도를 모델로 한 ‘주니어 교수제(Junior professur)’를 도입했다. 그러자 인문·사회계 학자들이 이 제도의 도입에 비판적이었고, 독일연방법원이 ‘교수자격제도의 폐지가 독일 기본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해 종전의 교수자격제도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 되어버렸다.
캘리포니아 대학체제 총장이었던 클라크 커(Clark Kerr)는 독일대학이 수렁에 빠지게 된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한다. 하나는 정교수 체제에 대한 과도한 의존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교수자격제도는 《공화국》의 철인처럼 세상의 이치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그것이 운행하는 원리를 밝혀낼 수 있는 최고의 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하여 훔볼트의 베를린대는 정교수에 의한 자치(自治)를 대학운영의 기본원리 중 하나로 채택하고 있다. 대학을 국가의 지배하에 놓되 학문의 자유, 교수와 학습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하고, 대신 대학은 ‘모든 직접적, 사회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즉 정치적인 현안 문제에는 초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막스 웨버의 ‘가치중립의 원리’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지만 그 결과, 국가의 지배를 불편해 하지 않는 절대적인 교수권력을 갖게 되었다.
오랜 전통을 가진 독일의 학위제도와 교수자격제도가 정부와 정치계로부터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저항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5월 6일 독일대학교수협의회 회장 그리가트(Felix Grigat)는 “전통적 독일대학의 기초였던 훔볼트의 이념은 사라졌고, 대학의 교육은 학구적 연구에서 기술훈련으로 전락하고, 정부가 기대했던 수학기간 단축과 외국 유학생의 증가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대하여 루르대 메르카토르(Mercator) 연구센터는 “독일대학이 대중화된 지금에 와서는 과거 상위 5%에게 주던 교육과 똑같은 교육을 40%에게까지 줄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박하고 있다.
미국 주립대는 ‘외부자’가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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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는 대학특성별(예: 지역중심국립대, 교육대 등), 권역별(국립교양대학안), 국립대 전체를 한 틀로 묶는 연합체제 등 다양한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사진은 대구에 소재한 경북대 본관 모습. |
이 법에 따라 각 주가 대학을 설립하였지만 초기에는 대학에 들어올 학생이 없었다. 당시에만 해도 ‘대학 예비교’라고 할 수 있는 고등학교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립대학 교수들은 학생선발을 위하여 고등학교에 직접 찾아갔다. 이들은 교육과정의 편성, 수업방법, 교육의 질 관리 등을 지도하고 자신들의 기준에서 대학공부가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학생들을 선발하였다. 이러한 관행이 파국을 맞게 된 것은 소련의 스푸트니크(Sputnik)호 발사에 의해서다. 놀란 미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각 대학에 쏟아붓자, 대학교수들은 연구비 수주와 연구실적을 위해 고교 현장 방문지도에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 주 내에 있는 주립대학이라도 캘리포니아와 미시간의 예에서처럼 법적 지위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캘리포니아 주립대는 캘리포니아 대학,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캘리포니아 전문대학의 3층 구조(University of California, California State University, California Community College)로 되어 있다. 이 중 캘리포니아 대학은 주 헌법으로 설치된 것이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미시간주의 1963년 헌법은 미시간 대학(University of Michigan), 미시간 주립대학(Michgan State University), 그리고 웨인 주립대학(Wayne State University)의 이사회 명칭과 이사 수를 규정하고, 미시간 대학 이사는 주 전체 유권자가, 나머지는 그 주립대학이 소재하고 있는 지역의 주민들이 일반선거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미시간주에도 주 교육부가 있지만 이들 대학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미국주립대학 이사회도 미국 사립대학 이사회의 전통을 따라 외부자(layman) 지배가 대세로 되어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체제(University of California System)의 이사는 7명의 당연직 이사와 18명의 지명이사로 구성된다. 법정 정이사 25명 중, 학생 이사 1명은 정이사로 투표권을 가지고 있지만, 캘리포니아 체제 전체 교수평의회 의장과 부의장은 정이사에 포함되지 않고 투표권이 없다. 이는 캘리포니아 대학체제가 대학 내부의 교수와 직원에 의하여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외부 인사로 통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주립대학 이사회는 교수와 주정부의 중간지점에 있다. 이 이사회에는 원칙적으로 교수와 학생은 참여하지 않는다. 미국 주립대학의 외부자 지배전통은 칼뱅의 교의(敎義)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다. 원죄(原罪)를 바탕으로 하는 칼뱅주의의 교의는 국가의 관료권력이든, 대학의 학문권력이든, 교회의 성직권력이든,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이런 믿음에서 칼뱅이 1559년에 세운 아카데미의 평의회(lay board)는 교수와 학생의 참여를 배제하고 성직자와 일반 시민으로 구성한다. 칼뱅의 교의를 금과옥조로 받아들인 것은 그의 고향 유럽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이 현재와 같은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클라크 커 총장(재임 1958~1967)에 의해서였다. 다른 주와는 달리 모선(母船)대학(flagship university)을 따로 두지 않은 것도 그의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대학 중에서도 버클리대는 학생의 수준, 연구실적, 사회적 평판 등에서 다른 캘리포니아 대학을 압도한다. 사실 캘리포니아에서도 버클리가 모선대학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과 교수를 강제 배정하지 않는 한 모선대학의 출현을 막을 수 없다.
대학개혁, 교육의 內的 원리 따라야
훔볼트 대학과 그랑제콜은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대의 총아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는 독일과 프랑스의 대학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양국은 수십 년간을 노력해 왔지만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버릴 수 없다.
유럽대학의 장단점에 대한 충분한 분석에서 새로운 대학을 설계할 수 있었다는 것은 후발 주자인 미국의 행운이었다. 1867년 길만(Daniel, C. Gilman) 총장이 베를린 대학을 모델로 하여 존스홉킨스대를 설계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코넬대(1865), 스탠퍼드(1885), 시카고대(1890) 등이 설립된다. 이렇게 미국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부을 수 있었고, 이러한 신생대학들이 그때까지 전문대학 수준에 머물러 있던 기존의 하버드, 예일 등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미국의 주립대학이 터를 잡고 제도의 골격을 형성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우리는 독일, 프랑스와 같이 어떤 일관된 원리와 이념에 의하여 고등교육 체제를 구축한 적이 없다. 광복 후 지금까지 처음은 일본의 체제를, 그 다음은 미국의 체제를, 그리고 때로는 유럽의 체제를 옮기고 덧붙였다. 또한 우리 사회가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지난 1990년대 초까지 대학은 공부하고 연구하는 공간이기보다는 비민주적인 정권과 맞서야 하는 투쟁 기지였다.
이제는 우리도 사회 변화에 걸맞은 대학체제, 우리의 미래를 선도할 수 있는 대학체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체제는 국립대학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립대도 함께 아우르는 것이 되어야 하고, 단기적인 안목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또 정치적인 필요보다는 교육의 내적 원리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국민 대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일관된 원리와 이념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