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3년 정치권에 처음 등장한 세대교체론 4년마다 반복
⊙ 초선 일색인 18대 국회는 최악의 폭력국회
⊙ “형님만 남겨놓고 65세 이상 중진을 대부분 도려낸 이명박 대통령의 위기는 自業自得”
(이종찬 전 국정원장)
⊙ 초선 일색인 18대 국회는 최악의 폭력국회
⊙ “형님만 남겨놓고 65세 이상 중진을 대부분 도려낸 이명박 대통령의 위기는 自業自得”
(이종찬 전 국정원장)
- 여야의 공천은 이번에도 공천 보복, 밀실 결정으로 얼룩졌다.
세대교체(世代交替)라는 단어가 정치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3년이다. 3월4일자 《경향신문》은 ‘세대교체라는 새 단어’라는 제목의 기사로 민주공화당 내 노(老)ㆍ소(小)장 간의 대립을 보도했다.
당시 기사의 내용이다.
“공화당은 지난 2일 당 기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구인 당무회의 인선을 둘러싸고 당내 노(老)ㆍ소(小)장 간 단순치 않은 대립을 빚어냈다. 노장층이 내놓은 안(案)에 대해 소장층은 세대교체의 본보기로 좀 더 새로운 신진을 내세우자고 주장해 분위기가 기묘하게 돌아갔다.”
보도 이후 세대교체론은 정치권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3월9일자 《동아일보》는 세대교체론이 5·16 직후 군정(軍政)반대를 위해 김병로(金炳魯)와 윤보선(尹潽善)이 주도한 민정당(民政黨)에서도 급부상했다면서 그에 반대하는 노익장(老益壯)들은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이 뭉쳐서 일하려는 것이 민정당의 생리인데 세대교체는 무슨 세대교체란 말이요. 제이선으로 물러서라니요? 늙은이들은 다 죽어버리라는 말이요. 강하게 항변(抗辯)했다”고 썼다.
반세기가 지난 현재 정치권의 세대교체론은 총선 때마다 60세 용퇴(勇退)론, 중진 물갈이, 정치적 고려장(高麗葬) 등 다소 직접적이고 원색적인 용어로 바뀌어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단지 ‘고령(高齡)’, ‘다선(多選)’이라는 이유만으로 낙천(落薦)되는 인위적(人爲的) 교체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정치에 갓 입문한 신인에게는 중진의원의 가르침이 성장의 자양분이 될 수 있어서다. 신망받는 전ㆍ현직 국회의원들을 통해 이를 진단했다.
“젊은 사람들, 힘이 넘쳐 싸우나”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은 인위적인 중진 용퇴론에 대한 질문을 받자마자 “빠른 세대교체를 통해 들어온 젊은 친구들이 혈기왕성해서 만날 치고받고 싸우는 터에 국회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하기 이르렀다”며 한탄했다. 이 전 의장은 그간 수차례 중진이라고 무조건 물러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대교체는 반드시 해야 한다. 단 연령이 아니라 의식과 마음 자세에 기준을 둬야 한다. 미국은 90세가 넘어도 상원의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부정부패한 사람, 비리에 관련된 사람, 나라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사람을 걸러내야 한다. 18대 국회는 너무 젊은 사람들로 세대교체가 됐다. 힘이 넘치고 발산할 곳이 없어서 그런지 국회만 들어오면 여야가 싸운다. 군데군데 원로가 끼어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국회를 냉각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방부 장관을 지내고 18대 총선을 통해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한 새누리당 김장수(金章洙) 의원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그는 중진 용퇴론과 관련 “중진의원들을 감싸려는 것이 아니다”고 전제한 뒤 “내가 하면 경륜이고 남이 하면 구태라는 식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중진과 초재선 의원들이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만 생고무 튀듯 탄력성 있는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19대 국회는 중진과 초ㆍ재선 의원들이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뤘다고 봅니까.
“군(軍)과 정치는 차이가 크더군요. 토의를 할 때 상하가 없는 것은 군이나 정치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군은 의견을 한 곳으로 모으면 성공을 위해 끝까지 가는데 정치권은 그렇지 못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기 때문이죠. 중간에서 ‘중진’들이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인위적인 교체로 중진의원들이 부족했기 때문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사실 중진의원들은 교체지수가 초ㆍ재선보다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식상하니까요. 하지만 지지율은 매우 높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중진들은 정치상황에 대한 맥을 정확히 짚고, 초선 의원들을 포용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초선들만 있어서 럭비공 튀듯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초선 일색인데 국회가 잘 돌아갈 리 있겠나”
―신인들의 무절제한 ‘튀기’ 경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지명직 최고위원을 하면서 느낀 것은 최고위원 회의 때 잠깐 공개회의를 갖는데 그때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현 정부, 당 대표를 강하게 비판하면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되니까. 무례하기가 그지없더라고요. 남들한테만 면도칼 같은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포퓰리즘 아닌가요.”
14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다툰 4선 경륜의 이종찬(李鍾贊) 전 국가정보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초부터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근본적 원인을 ‘중진 학살’에서 찾았다.
이 전 원장의 이야기다.
“다선의원들이 초선의원들에게 많은 것을 지도하고 이끌어줘야 국회가 조화롭게 운영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18대 국회를 보십시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자기 형님만 남겨놓고 65세 이상 다선의원을 대부분 도려내지 않았습니까. 초선의원 일색(一色)인데 국회가 잘 돌아갈 리 없지요. 고참, 다선의원이 있어야 국회가 안정감 있게 돌아갑니다. 국민으로부터 신뢰도 엄청나게 잃었죠. 자신은 공정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는데 형님만 살렸는데 누가 믿을까요? 다 자업자득입니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웃긴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나꼼수가 탄생한 겁니다. 정확하고 공정하다면 나꼼수가 나올 여백이 없었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지역구 주민들의 심판을 받아 당선된 의원들은 심각한 범죄 사실 등의 문제가 있지 않은 한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낙선하게 될 테니까요.”
“한광옥 공천 탈락은 안타까워”
친박계 좌장을 자임해 온 새누리당 홍사덕(洪思德) 의원은 공천을 신청하지 않았다. 공천 마감 전날인 2월 14일 홍 의원은 “애초부터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친박 좌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마당에 자칫 다른 중진들의 불출마를 유도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어 공천 마감일까지 기다렸다”며 “‘친박계 희생론’은 더는 안 나와야 한다”고 했다.
당시 당 안팎에서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인적 쇄신과 정당개혁 구상을 과감하게 펼칠 수 있도록 친박 중진들이 용퇴해 ‘길’을 터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친박계 다선·고령 의원들은 ‘모르쇠’로 일관해 비판을 초래했다. 하지만 홍 의원은 서울 종로에 출마하게 됐다. 공천 발표 직후 홍 의원을 그의 의원회관 사무실(736호)에서 만났다.
―물갈이 대상이었다가 공천을 받았는데 중진 용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진 용퇴는 일종의 계절풍처럼 몰아쳐 왔습니다. 이번 경우에는 제가 당사자 중의 하나였는데, 사실 제가 공천을 받아서 하는 말이 아니고 총선 이후 대선을 흔들림 없이 치르기 위해서는 중진들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중진들의 일방적인 퇴진은 논리적으로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공천에 탈락한 중진의원 중 아까운 인재가 있다면요.
“제 친구 한광옥이요. 공천을 못 받고 노기충천해서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던데 나는 온 마음으로 이해합니다. 민주통합당이 공천이 아니라 사천(私薦)을 했습니다.” 서울 관악갑에 공천을 신청했던 민주통합당 한 상임고문은 공천에서 탈락, 구(舊)민주계를 주축으로 한 정통민주당(가칭)을 창당했다.
―언론보도를 보니 홍 의원의 공천을 시대에 역행하는 결정이라며 달갑지 않게 여기는 여론도 상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 여론에 대해서는 전혀 유감이 없습니다. 제가 왜 종로에 전략공천되었는지는 저절로 전말이 드러날 것이니까요.”
《중앙일보》 조사연구팀과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이 지난 5~6일 종로구 유권자 500명을 대상으로 지지율을 조사한 결과로는 새누리당 홍사덕 의원과 민주통합당 정세균 의원이 각각 32.7%, 32.0%의 지지율로 초박빙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며칠 뒤 《국민일보》가 여론조사기관 GH코리아에 의뢰, 9~10일 12개 지역구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정 의원(41.5%)이 홍 의원(40.6%)을 근소하게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虛舟가 그립다”
취재차 만난 인사들은 “국회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중진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국회 질서 유지의 대전제(大前提)는 쟁점현안과 관련한 여야의 ‘협상과 타협’이다. 그러나 인위적 물갈이로 인해 그만한 정치력을 갖춘 인사들이 물러나게 됐고 그 결과 18대 국회가 불통국회, 역대 최악의 폭력국회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실제 18대 국회는 2008년 이후 4년 연속 예산안 합의 처리에 실패하는 등 자신들의 세비 인상안 외에는 쟁점 사안들에 대해 깔끔하게 합의한 전력이 없다.
5선을 지낸 허주(虛舟) 고(故) 김윤환(金潤煥) 전 의원이 그립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허주는 힘의 논리가 지배했던 5, 6공 군사정권에서 성장한 정치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공존의 논리’를 강조했다.
허주의 동생인 새누리당 김태환(金泰煥) 의원은 “형님이 집권당인 민정당의 원내총무 당시 파트너가 김원기(金元基) 전 국회의장이었다. 2004년 형님의 묘비 제막식 참석을 요청하기 위해 당시 김원기 국회의장님을 찾았는데 요즘처럼 싸움질로 허송세월하는 때엔 허주가 그립다고 하더라”면서 “두 분은 정치적으로 적이었지만 국회와 국민을 위해 타협하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다.
유흥수(柳興洙) 전 의원은 “정치란 대화와 타협이 본질인데 그 점에서 보면 허주는 정치 위기 때마다 야당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대화한 정치인”이라며 “사고의 폭이 넓은 허주 스타일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허주 말고도 과거에는 고비마다 가교역할을 하며 경색된 여야 관계를 헤쳐나가는 데 역할을 한 정치인들이 꽤 된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대표적이다. 홍사덕 의원은 “이만섭 의장은 참을성 있게 끊임없이 대화를 해 결과를 도출해 냈다. 당시 제가 부의장이었는데 여야가 절충점을 찾지 못하면 국회의장이 협상해서 중재안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지혜”라고 전했다.
이 전 의장이 의장으로 재임한 제14대 전반기, 16대 전반기 국회에선 예산안은 물론 다른 안건에 대해서도 단 한 번의 ‘날치기’나 직권상정이 없었다.
권한 없이 중진도 없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도 과거 협상을 통해 막혔던 정국의 숨을 트이게 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1985년 4월 3일 12대 국회 개원문제를 놓고 민정당의 원내총무였던 저와 12대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등장한 신민당 김동영(金東英) 총무가 논의했지만, 도무지 이견(異見)의 폭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신민당이 개원에 앞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면 복권 등 선결 정치현안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언론에서는 쌍방이 평행선만을 달리고 있다고 비판이지, 협상은 타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지,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한 한 달 정도 물밑에서 만났을까요. 김 총무가 자기가 상도동은 설득하겠는데 동교동은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저보고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마음을 좀 열었던 거죠. 당장 동교동의 대표격인 김녹영(金祿永) 의원을 찾아가 ‘선배 국회 개원 좀 시켜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랬더니 ‘상도동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하기에 거기는 이야기가 다 됐으니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고, 결국 5월 12일 12대 국회가 개원하게 됐죠. 지금도 예전처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협상이 잘될 텐데 그런 게 없어요.”
―현 정치권에도 중진의원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왜 과거 중진들의 중재력을 갖고 있지 못할까요.
“지금은 정치권에 풍류와 낭만이 남아 있지 않아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타협을 하려면 강력한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다선의원들 말입니다. 예전에는 중진들에게 강한 권한을 줬습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마음대로 하라죠. 민정당 원내총무 시절 전두환 대통령은 저에게 막강한 협상권을 줬습니다. 후에 같이 정치를 하게 된 DJ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재와는 차원이 다르군요.
“제가 제15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회의 공천심사위원을 맡게 됐습니다. 심사를 하고 있는데 권노갑(權魯甲)씨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내용인즉슨 조홍규(趙洪奎) 의원 공천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DJ의 오더(Order)라고 하더군요. 워낙 똑똑해서 미운털이 박힌 경우지요. 그런데 조 의원이 우리 당에서는 보배였거든요. 대화 타협의 귀재였어요. 그래서 이야기했죠. 저는 반대라고. 그리고 밀어붙였습니다. 결국 조 의원은 공천을 받았죠. DJ가 눈감아주더군요. 저의 권한을 인정한 셈이죠.”
4선 고지를 향해 뛰는 민주통합당 박병석(朴炳錫) 의원도 “리더십의 변화가 집중형에서 협조형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전권을 위임받아야 책임감을 갖고 협상자들이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 당내에서 협상자로 나선 사람의 위치, 영향력에 따라 협상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동의했다.
브레이크 없는 初選, 중진 권위 상실의 시대
물론 구(舊)정치질서를 그대로 대입하기에 현 정치풍토의 변화가 크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당시 허주의 타협정치를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막후(幕後)정치, 일본식 계보정치” 등으로 볼 수도 있다.
민주통합당에서 처음으로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3선의 정장선(鄭長善) 의원은 “정치권이 많이 민주화됐기 때문에 ‘막후정치’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돈’으로 계보를 운영했기 때문에 초선의원들이 중진의원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허주만 해도 그렇지 않으냐”면서 “하지만 정치자금법 개정에 정치권도 민주화된 만큼 ‘돈’을 쓰는 정치를 할 수가 없다. 상하관계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과거 허주의 별명은 ‘정거장’이었다. 모은 정치자금을 여당은 물론 야당 일부 의원들에게도 풀었기 때문이다.
―돈 이외에 중진들의 권위가 실종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는 여당 지도부는 사실상 대통령이, 야당은 당 총재가 임명했습니다. 그들이 공천권을 행사했으니 힘이 대단했죠. 하지만 지금은 모두 의원들이 투표로 선출합니다. 때문에 당 대표나 원내대표, 정책위의장을 맡으려면 초ㆍ재선 의원들에게 평상시에 잘 보여야 합니다. 대표가 된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제왕적’ 대표가 아닌 관리자, 사회자 수준의 대표니 정치권 관례인 선수(選數)는 의미가 없어질 수밖에 없지요.”
―초ㆍ재선들이 당의 전면에 나서면서 중진들의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사실 제가 처음 국회에 들어왔을 때는 의총에서 발언도 거의 못하고, 대부분 선배의 결정에 따랐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중진들보다 초선들이 발언을 훨씬 많이 합니다. (중진들의) 지도력 발휘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다수의 의견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SNS가 발전하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강경’한 초ㆍ재선 의원들의 논리를 반박하면 당장 ‘회색’이라는 화살이 날아오지요.”
“전두환, ‘예산편성은 국회 권한’이라며 전권 줘”
대통령이 국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도 중진들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에 차이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를 노조 비슷하게 생각하다 보니 국회의 위상이 낮아지고 덩달아 고참의원들의 힘도 빠지게 됐다”며 “뒤돌아보면 국회 경험이 많은 분이 대통령이 되고 국회를 존중해 줬을 때 신구(新舊) 간의 조화가 잘 이뤄졌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 전 원장도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국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이었다. 대통령 자신이 비정치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일만 하겠다고 했는데 이 자체가 잘못됐다. 대통령이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정치인데 국회를 거수기 노릇이나 하는 곳으로 생각하니 초ㆍ재선 의원들이 국회의장이나 고참들의 말을 따르겠느냐”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는 곧 예전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다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폭군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전 전 대통령은 국회의 권한을 인정해 줬습니다.
전 전 대통령이 취임하고 첫 번째 예산 심의를 할 때였는데 당시 민한당의 고재청(高在淸) 총무가 절 보더니 ‘야 너희 다 해먹어라. 난 보이콧(Boycott)이다’하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전경환(全敬煥ㆍ전두환 전 대통령 동생)이가 자기가 사무총장으로 있는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예산을 5배나 올려놨다’고 하더군요. ‘전경환이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하느냐’고 쏘아붙이는데 제가 찔리더군요.
그래서 오후 8시쯤 청와대에 전화를 걸어 들어간다고 하니 허화평 정무수석이 하는 말이 각하께서 청와대 숙소로 들어갔기 때문에 못 만난다고 자기한테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경환씨 예산 때문에 국회가 난장판이 됐다고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 허 수석이 전화를 걸어 저에게 ‘각하께서 예산편성은 국회 권한인데 누구 눈치를 보느냐. 국회에서 맘대로 하라고 했다’고 전하더군요. 그래서 예산을 왕창 삭감했습니다. 그 뒤로 전씨가 저를 아는 척 안 하더라고요.”
중진에도 품질이 있다!
여러 이유로 다선의원들의 영향력이 약화됐지만, 대립과 갈등이 구조화된 정치권에 신구 융합정치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 인위적인 중진의원 물갈이가 단행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수의 전ㆍ현직 의원들은 지역주의·지역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원인으로 꼽았다. ‘공천은 곧 당선’인 텃밭의 다선은 무조건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인위적 물갈이’의 모태가 됐다는 것이다.
박병석 의원은 “물갈이 대상은 지역주의에 편승해 정치를 한 사람들이다. 가령 경상도 지역의 새누리당, 전라도의 민주당, 일부 충청도의 자유선진당 의원 중에는 당에 충성해서 공천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솔직히 많다. 하지만 이들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열세 지역에서 열심히 한 중진의원들도 물갈이 대상에 속할 때가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고 말했다.
정치권 관계자도 “존재감 없는 중진의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수는 중진인데 의정활동 등에서 뚜렷한 업적이 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의원들이 많다. 텃밭에서 손쉽게 선수를 쌓아 봉사보다는 자리만 누려왔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한국 정치의 목줄을 움켜쥔 상수(常數)인 지역당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현재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꿔야 하는데 선거제도 개편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꼽히는 새누리당 박근혜(朴槿惠) 위원장부터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에 부정적이다.
“공천권이 유권자에게 돌아가면 중진도 정당한 평가받을 것”
한 친박계 의원은 “박 전 대표가 정치학자들에게 들어보니, ‘대통령 책임제 아래서는 소선거구제가 적합하다’고 하더라”고 했다.
실제 박 위원장은 평소에도 ‘소선거구제 유지론’을 피력해 왔다. 야당인 한나라당을 이끌던 2005년 7월 18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했던 중·대선거구제로 개편하는 방안에 “선거구제 개편으로 지역구도를 타파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얘기”라고 일축했다.
결국 인위적 물갈이의 문제는 현재 한국 정당의 공천제도 개선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박찬종(朴燦鍾) 전 의원은 “공천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정치적 ‘고려장’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여야는 ‘계파 공천’으로 유권자들로부터 ‘밀실 공천’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의 얘기다.
“우리의 정당구조는 영국의 보수당 100만명이나 노동당 200만명 그리고 일본 자민당이나 민주당의 수백만 명하고 비교해 볼 때 머리는 많고 당원은 없는 역(逆)피라미드 구조로 돼 있기 때문에 실력자 몇 사람이 명분을 내걸고 공천 장사를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유권자 2~3%를 연령,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무작위로 추출해 각 정당이 후보자로 내세우는 사람 중 정책이나 자기 기호에 맞는 후보자들을 공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작위로 추출된 선거인단이 투표를 안 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선거인단으로 선정된 인원이 투표에 불참할 시에는 처벌한다는 규정을 만들어야겠지요. 싱가포르,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이러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천권이 유권자들에게 돌아간다면 중진들도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시 기사의 내용이다.
“공화당은 지난 2일 당 기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구인 당무회의 인선을 둘러싸고 당내 노(老)ㆍ소(小)장 간 단순치 않은 대립을 빚어냈다. 노장층이 내놓은 안(案)에 대해 소장층은 세대교체의 본보기로 좀 더 새로운 신진을 내세우자고 주장해 분위기가 기묘하게 돌아갔다.”
보도 이후 세대교체론은 정치권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3월9일자 《동아일보》는 세대교체론이 5·16 직후 군정(軍政)반대를 위해 김병로(金炳魯)와 윤보선(尹潽善)이 주도한 민정당(民政黨)에서도 급부상했다면서 그에 반대하는 노익장(老益壯)들은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이 뭉쳐서 일하려는 것이 민정당의 생리인데 세대교체는 무슨 세대교체란 말이요. 제이선으로 물러서라니요? 늙은이들은 다 죽어버리라는 말이요. 강하게 항변(抗辯)했다”고 썼다.
반세기가 지난 현재 정치권의 세대교체론은 총선 때마다 60세 용퇴(勇退)론, 중진 물갈이, 정치적 고려장(高麗葬) 등 다소 직접적이고 원색적인 용어로 바뀌어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단지 ‘고령(高齡)’, ‘다선(多選)’이라는 이유만으로 낙천(落薦)되는 인위적(人爲的) 교체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정치에 갓 입문한 신인에게는 중진의원의 가르침이 성장의 자양분이 될 수 있어서다. 신망받는 전ㆍ현직 국회의원들을 통해 이를 진단했다.
“젊은 사람들, 힘이 넘쳐 싸우나”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은 인위적인 중진 용퇴론에 대한 질문을 받자마자 “빠른 세대교체를 통해 들어온 젊은 친구들이 혈기왕성해서 만날 치고받고 싸우는 터에 국회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하기 이르렀다”며 한탄했다. 이 전 의장은 그간 수차례 중진이라고 무조건 물러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대교체는 반드시 해야 한다. 단 연령이 아니라 의식과 마음 자세에 기준을 둬야 한다. 미국은 90세가 넘어도 상원의원을 하는 경우가 있다. 부정부패한 사람, 비리에 관련된 사람, 나라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사람을 걸러내야 한다. 18대 국회는 너무 젊은 사람들로 세대교체가 됐다. 힘이 넘치고 발산할 곳이 없어서 그런지 국회만 들어오면 여야가 싸운다. 군데군데 원로가 끼어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국회를 냉각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방부 장관을 지내고 18대 총선을 통해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한 새누리당 김장수(金章洙) 의원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그는 중진 용퇴론과 관련 “중진의원들을 감싸려는 것이 아니다”고 전제한 뒤 “내가 하면 경륜이고 남이 하면 구태라는 식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중진과 초재선 의원들이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만 생고무 튀듯 탄력성 있는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19대 국회는 중진과 초ㆍ재선 의원들이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뤘다고 봅니까.
“군(軍)과 정치는 차이가 크더군요. 토의를 할 때 상하가 없는 것은 군이나 정치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군은 의견을 한 곳으로 모으면 성공을 위해 끝까지 가는데 정치권은 그렇지 못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기 때문이죠. 중간에서 ‘중진’들이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인위적인 교체로 중진의원들이 부족했기 때문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사실 중진의원들은 교체지수가 초ㆍ재선보다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식상하니까요. 하지만 지지율은 매우 높습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중진들은 정치상황에 대한 맥을 정확히 짚고, 초선 의원들을 포용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초선들만 있어서 럭비공 튀듯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초선 일색인데 국회가 잘 돌아갈 리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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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5 공화국 출범과 함께 구성된 국회 원내 총무단인 국민당 이동진, 민한당 고재청, 민자당 이종찬 의원(왼쪽부터)이 원내총무실에서 회동하고 있다. |
“지명직 최고위원을 하면서 느낀 것은 최고위원 회의 때 잠깐 공개회의를 갖는데 그때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현 정부, 당 대표를 강하게 비판하면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되니까. 무례하기가 그지없더라고요. 남들한테만 면도칼 같은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포퓰리즘 아닌가요.”
14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다툰 4선 경륜의 이종찬(李鍾贊) 전 국가정보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초부터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은 근본적 원인을 ‘중진 학살’에서 찾았다.
이 전 원장의 이야기다.
“다선의원들이 초선의원들에게 많은 것을 지도하고 이끌어줘야 국회가 조화롭게 운영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18대 국회를 보십시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자기 형님만 남겨놓고 65세 이상 다선의원을 대부분 도려내지 않았습니까. 초선의원 일색(一色)인데 국회가 잘 돌아갈 리 없지요. 고참, 다선의원이 있어야 국회가 안정감 있게 돌아갑니다. 국민으로부터 신뢰도 엄청나게 잃었죠. 자신은 공정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는데 형님만 살렸는데 누가 믿을까요? 다 자업자득입니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이런 웃긴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나꼼수가 탄생한 겁니다. 정확하고 공정하다면 나꼼수가 나올 여백이 없었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지역구 주민들의 심판을 받아 당선된 의원들은 심각한 범죄 사실 등의 문제가 있지 않은 한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낙선하게 될 테니까요.”
“한광옥 공천 탈락은 안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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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진용퇴론으로 인해 19대 공천신청을 하지 않은 새누리당 홍사덕 의원은 정치1번지인 서울 종로에 전략공천돼 부활했다. |
당시 당 안팎에서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인적 쇄신과 정당개혁 구상을 과감하게 펼칠 수 있도록 친박 중진들이 용퇴해 ‘길’을 터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친박계 다선·고령 의원들은 ‘모르쇠’로 일관해 비판을 초래했다. 하지만 홍 의원은 서울 종로에 출마하게 됐다. 공천 발표 직후 홍 의원을 그의 의원회관 사무실(736호)에서 만났다.
―물갈이 대상이었다가 공천을 받았는데 중진 용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진 용퇴는 일종의 계절풍처럼 몰아쳐 왔습니다. 이번 경우에는 제가 당사자 중의 하나였는데, 사실 제가 공천을 받아서 하는 말이 아니고 총선 이후 대선을 흔들림 없이 치르기 위해서는 중진들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중진들의 일방적인 퇴진은 논리적으로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공천에 탈락한 중진의원 중 아까운 인재가 있다면요.
“제 친구 한광옥이요. 공천을 못 받고 노기충천해서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던데 나는 온 마음으로 이해합니다. 민주통합당이 공천이 아니라 사천(私薦)을 했습니다.” 서울 관악갑에 공천을 신청했던 민주통합당 한 상임고문은 공천에서 탈락, 구(舊)민주계를 주축으로 한 정통민주당(가칭)을 창당했다.
―언론보도를 보니 홍 의원의 공천을 시대에 역행하는 결정이라며 달갑지 않게 여기는 여론도 상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 여론에 대해서는 전혀 유감이 없습니다. 제가 왜 종로에 전략공천되었는지는 저절로 전말이 드러날 것이니까요.”
《중앙일보》 조사연구팀과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이 지난 5~6일 종로구 유권자 500명을 대상으로 지지율을 조사한 결과로는 새누리당 홍사덕 의원과 민주통합당 정세균 의원이 각각 32.7%, 32.0%의 지지율로 초박빙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며칠 뒤 《국민일보》가 여론조사기관 GH코리아에 의뢰, 9~10일 12개 지역구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정 의원(41.5%)이 홍 의원(40.6%)을 근소하게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虛舟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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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이 된 김윤환 전 원내총무는 생전에 공존의 논리를 강조했다. 왼쪽부터 김원기(평화민주당), 김윤환(민주정의당), 최형우(통일민주당), 김용채(신민주공화당) 원내총무. |
실제 18대 국회는 2008년 이후 4년 연속 예산안 합의 처리에 실패하는 등 자신들의 세비 인상안 외에는 쟁점 사안들에 대해 깔끔하게 합의한 전력이 없다.
5선을 지낸 허주(虛舟) 고(故) 김윤환(金潤煥) 전 의원이 그립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허주는 힘의 논리가 지배했던 5, 6공 군사정권에서 성장한 정치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공존의 논리’를 강조했다.
허주의 동생인 새누리당 김태환(金泰煥) 의원은 “형님이 집권당인 민정당의 원내총무 당시 파트너가 김원기(金元基) 전 국회의장이었다. 2004년 형님의 묘비 제막식 참석을 요청하기 위해 당시 김원기 국회의장님을 찾았는데 요즘처럼 싸움질로 허송세월하는 때엔 허주가 그립다고 하더라”면서 “두 분은 정치적으로 적이었지만 국회와 국민을 위해 타협하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다.
유흥수(柳興洙) 전 의원은 “정치란 대화와 타협이 본질인데 그 점에서 보면 허주는 정치 위기 때마다 야당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대화한 정치인”이라며 “사고의 폭이 넓은 허주 스타일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허주 말고도 과거에는 고비마다 가교역할을 하며 경색된 여야 관계를 헤쳐나가는 데 역할을 한 정치인들이 꽤 된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대표적이다. 홍사덕 의원은 “이만섭 의장은 참을성 있게 끊임없이 대화를 해 결과를 도출해 냈다. 당시 제가 부의장이었는데 여야가 절충점을 찾지 못하면 국회의장이 협상해서 중재안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지혜”라고 전했다.
이 전 의장이 의장으로 재임한 제14대 전반기, 16대 전반기 국회에선 예산안은 물론 다른 안건에 대해서도 단 한 번의 ‘날치기’나 직권상정이 없었다.
권한 없이 중진도 없다!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도 과거 협상을 통해 막혔던 정국의 숨을 트이게 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1985년 4월 3일 12대 국회 개원문제를 놓고 민정당의 원내총무였던 저와 12대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등장한 신민당 김동영(金東英) 총무가 논의했지만, 도무지 이견(異見)의 폭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신민당이 개원에 앞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면 복권 등 선결 정치현안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언론에서는 쌍방이 평행선만을 달리고 있다고 비판이지, 협상은 타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지,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한 한 달 정도 물밑에서 만났을까요. 김 총무가 자기가 상도동은 설득하겠는데 동교동은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저보고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마음을 좀 열었던 거죠. 당장 동교동의 대표격인 김녹영(金祿永) 의원을 찾아가 ‘선배 국회 개원 좀 시켜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랬더니 ‘상도동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하기에 거기는 이야기가 다 됐으니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고, 결국 5월 12일 12대 국회가 개원하게 됐죠. 지금도 예전처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협상이 잘될 텐데 그런 게 없어요.”
―현 정치권에도 중진의원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왜 과거 중진들의 중재력을 갖고 있지 못할까요.
“지금은 정치권에 풍류와 낭만이 남아 있지 않아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타협을 하려면 강력한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다선의원들 말입니다. 예전에는 중진들에게 강한 권한을 줬습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마음대로 하라죠. 민정당 원내총무 시절 전두환 대통령은 저에게 막강한 협상권을 줬습니다. 후에 같이 정치를 하게 된 DJ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재와는 차원이 다르군요.
“제가 제15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회의 공천심사위원을 맡게 됐습니다. 심사를 하고 있는데 권노갑(權魯甲)씨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내용인즉슨 조홍규(趙洪奎) 의원 공천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DJ의 오더(Order)라고 하더군요. 워낙 똑똑해서 미운털이 박힌 경우지요. 그런데 조 의원이 우리 당에서는 보배였거든요. 대화 타협의 귀재였어요. 그래서 이야기했죠. 저는 반대라고. 그리고 밀어붙였습니다. 결국 조 의원은 공천을 받았죠. DJ가 눈감아주더군요. 저의 권한을 인정한 셈이죠.”
4선 고지를 향해 뛰는 민주통합당 박병석(朴炳錫) 의원도 “리더십의 변화가 집중형에서 협조형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전권을 위임받아야 책임감을 갖고 협상자들이 테이블에 앉을 수 있다. 당내에서 협상자로 나선 사람의 위치, 영향력에 따라 협상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동의했다.
브레이크 없는 初選, 중진 권위 상실의 시대
물론 구(舊)정치질서를 그대로 대입하기에 현 정치풍토의 변화가 크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당시 허주의 타협정치를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막후(幕後)정치, 일본식 계보정치” 등으로 볼 수도 있다.
민주통합당에서 처음으로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3선의 정장선(鄭長善) 의원은 “정치권이 많이 민주화됐기 때문에 ‘막후정치’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돈’으로 계보를 운영했기 때문에 초선의원들이 중진의원들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허주만 해도 그렇지 않으냐”면서 “하지만 정치자금법 개정에 정치권도 민주화된 만큼 ‘돈’을 쓰는 정치를 할 수가 없다. 상하관계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과거 허주의 별명은 ‘정거장’이었다. 모은 정치자금을 여당은 물론 야당 일부 의원들에게도 풀었기 때문이다.
―돈 이외에 중진들의 권위가 실종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는 여당 지도부는 사실상 대통령이, 야당은 당 총재가 임명했습니다. 그들이 공천권을 행사했으니 힘이 대단했죠. 하지만 지금은 모두 의원들이 투표로 선출합니다. 때문에 당 대표나 원내대표, 정책위의장을 맡으려면 초ㆍ재선 의원들에게 평상시에 잘 보여야 합니다. 대표가 된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제왕적’ 대표가 아닌 관리자, 사회자 수준의 대표니 정치권 관례인 선수(選數)는 의미가 없어질 수밖에 없지요.”
―초ㆍ재선들이 당의 전면에 나서면서 중진들의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사실 제가 처음 국회에 들어왔을 때는 의총에서 발언도 거의 못하고, 대부분 선배의 결정에 따랐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중진들보다 초선들이 발언을 훨씬 많이 합니다. (중진들의) 지도력 발휘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다수의 의견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SNS가 발전하면서 더욱 그렇습니다. ‘강경’한 초ㆍ재선 의원들의 논리를 반박하면 당장 ‘회색’이라는 화살이 날아오지요.”
“전두환, ‘예산편성은 국회 권한’이라며 전권 줘”
대통령이 국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도 중진들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에 차이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를 노조 비슷하게 생각하다 보니 국회의 위상이 낮아지고 덩달아 고참의원들의 힘도 빠지게 됐다”며 “뒤돌아보면 국회 경험이 많은 분이 대통령이 되고 국회를 존중해 줬을 때 신구(新舊) 간의 조화가 잘 이뤄졌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 전 원장도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국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이었다. 대통령 자신이 비정치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일만 하겠다고 했는데 이 자체가 잘못됐다. 대통령이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정치인데 국회를 거수기 노릇이나 하는 곳으로 생각하니 초ㆍ재선 의원들이 국회의장이나 고참들의 말을 따르겠느냐”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는 곧 예전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다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폭군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전 전 대통령은 국회의 권한을 인정해 줬습니다.
전 전 대통령이 취임하고 첫 번째 예산 심의를 할 때였는데 당시 민한당의 고재청(高在淸) 총무가 절 보더니 ‘야 너희 다 해먹어라. 난 보이콧(Boycott)이다’하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전경환(全敬煥ㆍ전두환 전 대통령 동생)이가 자기가 사무총장으로 있는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예산을 5배나 올려놨다’고 하더군요. ‘전경환이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하느냐’고 쏘아붙이는데 제가 찔리더군요.
그래서 오후 8시쯤 청와대에 전화를 걸어 들어간다고 하니 허화평 정무수석이 하는 말이 각하께서 청와대 숙소로 들어갔기 때문에 못 만난다고 자기한테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경환씨 예산 때문에 국회가 난장판이 됐다고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 허 수석이 전화를 걸어 저에게 ‘각하께서 예산편성은 국회 권한인데 누구 눈치를 보느냐. 국회에서 맘대로 하라고 했다’고 전하더군요. 그래서 예산을 왕창 삭감했습니다. 그 뒤로 전씨가 저를 아는 척 안 하더라고요.”
중진에도 품질이 있다!
여러 이유로 다선의원들의 영향력이 약화됐지만, 대립과 갈등이 구조화된 정치권에 신구 융합정치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 인위적인 중진의원 물갈이가 단행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수의 전ㆍ현직 의원들은 지역주의·지역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원인으로 꼽았다. ‘공천은 곧 당선’인 텃밭의 다선은 무조건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인위적 물갈이’의 모태가 됐다는 것이다.
박병석 의원은 “물갈이 대상은 지역주의에 편승해 정치를 한 사람들이다. 가령 경상도 지역의 새누리당, 전라도의 민주당, 일부 충청도의 자유선진당 의원 중에는 당에 충성해서 공천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솔직히 많다. 하지만 이들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열세 지역에서 열심히 한 중진의원들도 물갈이 대상에 속할 때가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고 말했다.
정치권 관계자도 “존재감 없는 중진의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선수는 중진인데 의정활동 등에서 뚜렷한 업적이 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의원들이 많다. 텃밭에서 손쉽게 선수를 쌓아 봉사보다는 자리만 누려왔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한국 정치의 목줄을 움켜쥔 상수(常數)인 지역당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현재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꿔야 하는데 선거제도 개편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꼽히는 새누리당 박근혜(朴槿惠) 위원장부터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에 부정적이다.
“공천권이 유권자에게 돌아가면 중진도 정당한 평가받을 것”
한 친박계 의원은 “박 전 대표가 정치학자들에게 들어보니, ‘대통령 책임제 아래서는 소선거구제가 적합하다’고 하더라”고 했다.
실제 박 위원장은 평소에도 ‘소선거구제 유지론’을 피력해 왔다. 야당인 한나라당을 이끌던 2005년 7월 18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했던 중·대선거구제로 개편하는 방안에 “선거구제 개편으로 지역구도를 타파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얘기”라고 일축했다.
결국 인위적 물갈이의 문제는 현재 한국 정당의 공천제도 개선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박찬종(朴燦鍾) 전 의원은 “공천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정치적 ‘고려장’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여야는 ‘계파 공천’으로 유권자들로부터 ‘밀실 공천’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의 얘기다.
“우리의 정당구조는 영국의 보수당 100만명이나 노동당 200만명 그리고 일본 자민당이나 민주당의 수백만 명하고 비교해 볼 때 머리는 많고 당원은 없는 역(逆)피라미드 구조로 돼 있기 때문에 실력자 몇 사람이 명분을 내걸고 공천 장사를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유권자 2~3%를 연령,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무작위로 추출해 각 정당이 후보자로 내세우는 사람 중 정책이나 자기 기호에 맞는 후보자들을 공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작위로 추출된 선거인단이 투표를 안 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선거인단으로 선정된 인원이 투표에 불참할 시에는 처벌한다는 규정을 만들어야겠지요. 싱가포르,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이러한 규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천권이 유권자들에게 돌아간다면 중진들도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