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圭炯의 클래식 음악 이야기] 현대카드 수퍼콘서트Ⅵ 빈 필하모닉 & 조수미 공연을 보고 : 월간조선

필자가 클래식 음악에 눈뜨고 즐기기 시작했던 소시적에는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가 來韓(내한)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그러나 경제사정이 좀 나아진 1970년대에는 이화여대 대강당과 세종문화회관을 중심으로 몇몇 세계 정상급의 오케스트라가 내한 공연을 했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이끈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현재 이름은 로열 콘세르트헤보우, 원래 발음은 허바우라고 한다), 유진 오먼디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레너드 번스타인과 에리히 라인스도르프의 뉴욕 필하모닉, 볼프강 자발리쉬가 지휘한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그리고 로린 마젤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언뜻 기억나는 악단들이다.

필자 일생에 가장 훌륭한 연주회 경험은 바로 오먼디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였다.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공연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들은 애국가 연주부터 청중을 압도했다. 외국 교향악단이 음악회 직전에 첫 리허설을 해봤다는 애국가를 어찌 저리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틀에 걸쳐 벨라 바르토크의 ‘현과 타악기와 첼레스타를 위한 협주곡’,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1번, 그리고 바흐의 ‘파사칼리아와 푸가’(레오톨드 스토코프스키 편곡) 등 흔치 않은 레퍼토리를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유려한 ‘필라델피아 사운드’로 유감없이 들려줬다.

소위 얘기하는 최정상급 오케스트라는 당시 유럽에 5개, 미국에 5개가 존재했다.

빈 필(비엔나 필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런던 심포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베를린 필,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의 스위스 로망드, 그리고 오이겐 요훔과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육성한 암스테르담이 유럽의 대표 주자였다. 미국에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뉴욕 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유진 오먼디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피에르 몽퇴가 주도한 보스턴 심포니, 조지 셸이 조련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그리고 프리츠 라이너와 게오르그 숄티의 시카고 심포니가 있었다.

오케스트라 랭킹

요즘도 이들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대체로 유지되고 있지만, 적지 않은 변동이 있었다. 세계적인 음악권위지인 <그라모폰>이 2008년 12월호에 선정한 세계 오케스트라 순위는 30~40년이 흐른 지금 오케스트라 계의 현황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 역할을 한다.

유럽 전통의 악단인 콘세르트헤보우와 베를린 필, 빈 필의 건재가 확연하고, 바이에른 방송과 로스앤젤레스 필의 약진, 그리고 스위스 로망드의 몰락이 눈에 띈다.

필라델피아 대신 사이토 키넨이 순위에 오른 것은 의외다. 일본 교향악단으로는 NHK가 선정될 것으로 예상됐었다. 빈 필과 베를린 필은 창단 이래 일류의 위치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유서 깊은 선도적인 오케스트라다. 그래서 초청 개런티가 가장 비싼 교향악단이기도 하다. 관람료도 가장 비싼 축에 속하니, 작년 베를린 필의 서울 공연 R석은 45만원에 달했다.

지난 9월 29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 초청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842년에 창단돼 160여 년 동안 정통성과 보수성을 고집하며 세계의 최정상을 지키고 있는 오케스트라다. 빈 필하모닉은 악단 자체의 독립성을 보존하기 위해 상임 지휘자를 두지 않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그러나 빈 필의 역대 한국공연은 악단의 명성에 미치지 못한 감이 다소 없지 않다. 빈 필의 비싼 개런티 때문에 운동장 공연을 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2003년에는 ‘주빈 메타-사라장’의 조합으로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공연했고, 2006년에는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로 ‘예술의 전당’과 상암경기장에서 번갈아 공연을 했다. 표 값도 매우 비쌌던 기억이 난다.

몇몇 축제적인 성격의 연주회를 제외하곤 이렇게 체육관이나 대형운동장에서 마이크와 스피커를 이용해 공연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다.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는 기여하는 바가 있지만, 예술적으로나 음향적으로 매우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집에서 DVD를 보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운동장 공연은 주빈 메타가 ‘쓰리 테너’와 같이 한 공연이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유행된 경향이 있다.

주빈 메타 건강악화로 갑자기 지휘자 교체

주빈 메타 대신 지휘봉을 잡은 투간 소키예프는 안전운행 위주로 공연을 했다.

빈 필의 올해 내한 공연은 다행히 음향사정이 비교적 좋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만 열렸고, 가격도 조금 싸게(R석 35만원) 책정됐다. 현대카드 수퍼콘서트의 여섯 번째 공연으로 열린 이 공연은 과거 체조경기장 등에서 열렸던 것과 달리 이 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음악당에서 진행된 기록도 갖게 됐다.

게다가 한국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성악가 조수미씨가 협연을 하니, 예매 시작 한 시간도 안돼 전석이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주최 측은 표를 못 구한 음악팬들이나 주머니 사정이 가벼워 표를 구입할 수 없었던 음악팬들을 위해 ‘예술의 전당’ 비타민스테이션 야외무대에 선착순 700석을 배정하고 생중계를 했다. 이런 형식의 공연중계는 적어도 상암경기장에서 비싼 돈을 내고 보는 것보다 더 좋은 음향과 비주얼, 그리고 만족감을 제공한다. 주최 측의 결단에 찬사를 보낸다.

好事多魔(호사다마)랄까. 원래 지휘를 맡기로 했던 주빈 메타가 건강사정으로 모든 스케줄을 갑자기 취소해 혼선이 빚어졌다. 한국 공연과 함께 10월 3~4일 양일간 빈에서 예정되어 있던 빈 필하모닉 2009~2010 시즌 오프닝 공연 지휘도 취소됐다.

빈 필이 대신 택한 지휘자는 러시아 출신의 신예인 투간 소키예프였다. 그는 이 공연뿐 아니라 메타 대신 빈필의 2009~2010 시즌 오프닝 공연의 지휘도 맡게 됐다. 메타도 이제 나이가 나이다 보니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기 버거울 것이리라. 며칠 후인 10월 12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뉴욕 필하모닉 공연 후에 무대 뒤에서 만난 뉴욕 필의 회장인 자린 메타(주빈 메타의 친동생)에게 물어 보니 주빈이 완쾌됐다고 한다.

이렇게 갑자기 지휘자가 바뀌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대리 지휘를 통해 혜성처럼 스타로 등장한 경우도 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레너드 번스타인의 성공적인 代打(대타) 공연은 이제는 전설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소키예프는 번스타인이 아니었다. 적은 머리 숱 때문에 실제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소키예프는 워낙 급박한 스케줄 변동에 의해 지휘대에 서게 돼서인지 모험보다는 안전운행을 택했다. 번뜩인다기보다는 무난한 지휘로 빈 필을 이끌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빈 필이 소키예프를 이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 첫 번째 곡인 빈 고전파의 巨星(거성)이었던 하이든의 교향곡 104번 ‘런던’은 비교적 평이한 곡이고 빈 필이 자주 연주하는 레퍼토리이기에 편안하게 들을 수 있었다.

조수미의 변신

전반부의 두 번째 순서부터는 조수미의 무대였다. 빈 필의 반주로 부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중 아델레의 경쾌한 아리아 ‘여보세요 후작님’은 조수미의 목소리에 딱 어울리는 곡이다. 그녀는 자신의 장기인 콜로라투라(오페라 아리아 등에서 빠른 연속음이나 떨리는 음 등 고도의 기교를 통해 노래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기법)를 뽐내며 이 화사한 곡을 멋지게 불렀다.

두 번째 곡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중 비올레타의 아리아 ‘아, 그이인가?…언제나 자유라네’였다. 비올레타는 사실 조수미가 일반 무대에서 부르는 역할이 아니다. 그러나 나이가 듦에 따라 리리코-콜로라투라(서정적인 콜로라투라)에서 조금 더 심각한 역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그녀로서는 도전해 볼 만한 곡이었다.

청중의 열화와 같은 커튼 콜 속에서 그녀는 인심좋게도 두 곡의 앙코르곡을 불렀다. 첫 번째 앙코르는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 크로스오버적으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유행이라 그런지 조수미는 마이크를 사용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스피커에서 나는 잡음은 곡 감상을 방해할 정도였다.

다음 앙코르곡은 김바로의 ‘오! 대한민국’. 다소 생뚱맞은 선택이었다. 흥겹긴 했지만 빈 필과의 협연에서 앙코르곡으로 사용되기에 적당한 곡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휴식 후 후반부의 레퍼토리는 브람스 교향곡 ‘4번’. 인생의 가을을 맞은 52세의 브람스가 쓴 그의 마지막 교향곡은 침잠하면서 내면적인, 그래서 가을적인 곡이다.

그런데 소키예프는 놀랍게도 이 곡을 화사하게 표현해 내고 있지 않은가? ‘브람스 4번이 이렇게 화사해도 되는가?’라는 의문을 내내 품으며 이 곡을 감상했다.

앙코르곡으로 소키예프와 빈 필은 유명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과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트리치 트라치 폴카’를 선사했다. 두 곡 다 빈 필이 앙코르곡으로 즐겨 연주하는 곡이기에 마치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슈트라우스 가문의 흥겨운 음악으로 장식되는 빈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가 세계의 명물이 된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특히 그들이 수백 번도 더 연주해서 눈을 감고도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은 ‘트리치 트라치 폴카’는 물 흐르듯이 연주된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