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장은 계급장과 권총을 내던지면서 동족끼리 싸우는 이 더러운 전쟁을 무엇 때문에 하느냐며 통곡했다』(崔泰煥)
●『배를 채우기 위해 사과밭으로 갔다. 정신없이 사과를 따먹고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다. 국군이었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눈치만 보다 헤어졌다』(安鼎一)
●『가슴에 총을 맞아 입에서 시커먼 피가 쏟아져 나왔다. 국군 병사 둘이 나타나 「네 발로 걸어가지 않으면 쏴버리겠다」고 소리쳤다. 죽을 힘을 다해 걸었다』(金斗植·가명)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밤마다 親共·反共 양쪽의 테러가 벌어졌다. 내 유일한 목표는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황덕림)
●『배를 채우기 위해 사과밭으로 갔다. 정신없이 사과를 따먹고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다. 국군이었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눈치만 보다 헤어졌다』(安鼎一)
●『가슴에 총을 맞아 입에서 시커먼 피가 쏟아져 나왔다. 국군 병사 둘이 나타나 「네 발로 걸어가지 않으면 쏴버리겠다」고 소리쳤다. 죽을 힘을 다해 걸었다』(金斗植·가명)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밤마다 親共·反共 양쪽의 테러가 벌어졌다. 내 유일한 목표는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황덕림)
人民軍의 시각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컵도 보는 사람의 위치나 각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 차이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수록 개인이 처한 입장이나 가치관에 따라서 더 크게 나타난다. 같은 민족이 서로 敵(적)이 되어 싸웠던 6·25 전쟁을 보는 見解(견해)는 아직도 南(남)과 北(북), 양쪽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民族(민족)의 전쟁, 6·25 전쟁에 人民軍(인민군)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수소문 끝에 人民軍으로 참전했던 이들을 어렵게 찾아냈지만 몇몇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北에서 살았던 세월보다 南에서 살아온 시간이 더 길고 다들 간단치 않는 歷程(역정)을 거쳐 남쪽땅에 뿌리내리며 살고 있지만 한때나마 자신들이 人民軍이었다는 사실은 남쪽 땅에서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혹시 北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어떤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이름이 공개되는 것조차 사양할 정도였다.
말문을 연 인민군 출신들의 개인적인 체험을 중심으로 6·25 전쟁을 조명하다보면 또 다른 실수를 범할 가능성도 있다. 무릇 사람들이란 곧잘 자신이 보고 겪은 것만으로 전체를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민군이 보는 6·25 전쟁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참고할 점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6·25 전쟁의 裏面(이면)을 그들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안에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인민군 제13사단 통신병으로 참전했던 安鼎一(안정일·70·서울시 구로구 개봉동)씨. 그는 평안남도 남포 고급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50년 3월에 인민군에 입대했다.
『民靑(민청) 간부교육이 있다고 해서 소집되었는데 막상 가보니 인민군에 지원하지 않고서는 안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겉으로는 지원이었지만 실제로는 半(반)강제나 마찬가지였지요. 신의주에서 3개월 정도 통신병 훈련을 받고난 6월 중순경에 부대가 이동하더군요. 우리 같은 졸병들이야 목적지가 어딘 줄도 몰랐습니다. 처음엔 함경북도 쪽으로 훈련나가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우리가 탄 기차는 자꾸만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배속된 인민군 13사단은 신의주를 떠난 지 열흘 만인 6월24일 저녁쯤에 경기도 연천 북방의 1군단 예비사단으로 배치되었다.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로 참전한 崔泰煥(최태환·71·경기도 광명시 광명동)씨. 그는 多事多難(다사다난)한 인생경력의 소유자이다.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만주로 이주한 부모님을 따라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해방 이후 八路軍(팔로군) 軍政大學(군정대학)을 졸업한 그는 入北(입북)하여 少佐(소좌) 계급장을 달고 인민군 역사기록부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인민군 창건과정과 6·25 開戰(개전)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崔씨는 方虎山(방호산·팔로군 출신으로 후에 군단장이 되었다가 1953년 숙청됨)이 사단장으로 있던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로 6·25를 맞았다. 6사단은 6·25 이전에 夏季(하계) 전투훈련 명목으로 38선 가까이 이동해 있었고, 그가 배속된 13연대는 개성을 내려다보는 송악산 주능선에 배치되었다.
『1950년 6월23일 사단사령부에 대대장급 이상의 군관 소집이 있어 가보니 金枓奉(김두봉·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당시 정치국원)의 연설이 있더군요. 당시 시국에 대해서 얘기하던 그는 연설 말미에 「서울은 조선 반도의 심장부다. 심장을 장악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서울을 장악하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는 것과 똑같고 우리는 일주일 안에 서울을 장악해 그동안 남한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롭게 뽑아 남북통일을 이룬다」는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는 정말 일주일 안에 전쟁이 끝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은 일주일 만에 끝나지 않고 3년 넘게 계속되었다. 戰域(전역) 또한 서울을 制限(제한) 점령한 것이 아닌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한반도 전체로 확대되고 말았다.
참호 안의 술병
인민군 6사단의 骨幹(골간)은 원래 중국대륙의 國共(국공)내전에 참가해 전투경험이 많던 중국 인민해방군 166師(사)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국공내전이 毛澤東(모택동) 군대의 승리로 끝난 이후 166師는 중국과 북한의 협약에 의해 1949년 7월 말 북한으로 들어와 인민군 6사단으로 탈바꿈한다.
『팔로군 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우리 사단은 고향이 이북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이남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고향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심정이 컸습니다. 앞으로 내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초조한 생각에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우는데 6월25일 새벽이 되자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그런데 어디선가 하모니카 부는 소리가 애절하게 들리는데 가슴을 파고 듭디다』
軍官(군관)으로 참전한 崔泰煥씨와는 달리 일개 戰士(전사)로 참전한 安鼎一씨는 긴장된 6·25의 새벽을 어떻게 맞았을까?
『제가 그때 사단사령부 통신대에 있어서 아는데 원래 작전명령상에는 새벽 5시가 공격시간이었지만 실제론 새벽 4시에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군관들이 전사들을 소집하더니만 「국군이 38선을 북침 공격해서 반격작전을 실시한다」고 일장연설을 하더군요. 수류탄과 실탄 백 발을 휴대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그때의 심정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비록 입고 있는 군복은 달라도 전투에 투입되는 국군과 인민군 병사들의 심정은 모두 똑같았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가지는 것이고 어떠한 교육이나 이념으로도 쉽게 극복될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38선을 돌파해서 南進(남진)하는데 국군 참호 안에 술병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걸 보고 나서야 국군의 軍紀(군기)가 엉망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최전방 초소에 술병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국군의 방어선이 생각보다 쉽게 뚫린 것이 이해가 가더군요. 인민군의 진격속도가 빠른 탓에 미처 후퇴도 하지 못하고 포로로 잡힌 국군들도 많이 봤습니다. 우리 부대는 기차를 타고 임진강을 건넜는데 그때 국군 비행기가 우리가 탄 기차를 향해서 기총소사를 했습니다. 부상자가 여러 명 발생했고 그때 처음으로 시체를 목격했습니다』
「독약을 탔을지 모르니…」
開戰 초기 인민군에게 포로가 된 국군병사들의 처리방법은 증언자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먼저 崔泰煥씨의 증언이다.
『국군측 기록에는 좀 다르게 나와 있지만 6·25 첫날은 인민군이 거의 破竹之勢(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국군을 보니까 전쟁은 생각했던 대로 빠른 시일 내에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 무렵에 우리 부대는 이미 開城(개성) 시내를 점령했는데 선죽교 근처에서 국군이 수십여명 포로로 잡혀 있는 걸 발견하고 저는 그들에게 「이제 조국은 통일됐다. 여러분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조국 부흥에 이바지하라. 그리고 우리와 같이 행동하고 싶은 사람은 동참하라」는 연설을 하고 풀어주었습니다. 金枓奉이 연설할 때 포로가 필요없는 전쟁이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 부대는 포로를 현장에서 석방했습니다』
하지만 인민군 동부전선을 담당한 제2군단 工兵(공병) 참모로 참전했다가 그해 9월 김포에서 귀순한 주영복씨가 쓴 「내가 겪은 조선전쟁」이라는 책에는 「손이 묶인 채로 죽은 국군과 경찰의 시체 10여 구를 봤다」는 내용이 나온다. 전투 중 戰死(전사)했다면 굳이 손이 뒤로 묶여 있을 리가 없다.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해보면 어느 쪽 증언이 틀렸다기보다는 전쟁이라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포로에 대한 처리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부대별로 自意(자의)적으로 행해졌음을 추론할 수 있다.
개전 첫날에 대한 安鼎一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6월25일 오전에 목이 말라서 물을 얻어 먹으러 民家(민가)에 들어갔는데 그 집 마루에 태극기랑 이승만 박사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더군요.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좀 얻어먹자고 하니까 바가지에 물을 담아주는데 갑자기 北에서 교육받은 내용이 떠올라 멈칫거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北에서 남쪽에 가면 독약을 탔을지 모르니까 물과 밥 같은 것을 얻어먹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꺼림칙해서 멈칫멈칫하고 있으니까 그 노인이 알겠다는 듯이 자기가 먼저 마시고 난 다음 자기들이 먹던 밥도 먹으라고 내놓더군요. 그때서야 北에서 교육받은 것과 조금은 다르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뚜렷한 敵意(적의)를 표하지도, 환영도 하지 않는 무표정 그 자체였습니다』
『환영 인파는 없었다』
崔泰煥씨가 배속된 인민군 6사단 13연대는 개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계속 南進한 끝에 6월25일 밤을 개풍군 영정포라는 조그만 나룻가에서 보낸다. 이튿날 아침에는 인근에 있던 어선들을 징발해 한강 하류를 건너 아침 10시경 김포반도의 걸포리로 상륙한다. 국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12시경 김포읍을 점령한 그의 부대는 저녁 7시 무렵에는 현재 김포국제공항이 내려다보이는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까지 진출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진해 38선을 돌파한 지 이틀 만에 서울 남쪽까지 진출한 것이다.
『北에서 교육받을 때는 남쪽에 내려가면 환영행사가 있을 줄 알았는데 환영인파를 전혀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비관적인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저녁에 수색을 나갔다가 갑자기 「중대장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초들이 위협사격을 해서 체포해보니 1개 분대 가량의 국군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산쪽에서 후퇴한 국군 1사단 소속이었는데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기 전에 중대장과 헤어졌다는 거였습니다. 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설만 하고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우리 부대는 국군 포로를 전원 석방했습니다』
개화산에서 하룻밤을 보낸 崔씨의 부대는 6월27일 다시 전진하여 현재 인공폭포가 있는 영등포구 양화동까지 진출했다. 그때야 비로소 국군의 저항에 부딪쳤다. 그의 부대원 중에서도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의 전투였다. 6월28일 목동까지 진출한 崔씨의 부대는 현재 새마을 운동본부가 있는 근방에서 상부로부터의 명령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했다.
『승리는 우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7월2일 저녁에 상부로부터 영등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 날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오목교 근처 제방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국군 병사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안양천을 통해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며 투항을 권유하자 국군 병사들은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안 탓인지 크게 저항하지 않고 투항했습니다.
그때 포로로 잡힌 숫자가 약 5백명 되었는데 그 중 저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며칠전 행주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오다 개화산 인근에서 우리에게 붙잡힌 바로 그 병사였습니다. 개성이 고향이라는 그는 자칭 3代(대) 독자였는데 불행하게도 두 번이나 나에게 포로로 잡혔던 것입니다. 우리 부대는 거기에서 지체할 수가 없어 문화부 지도원에게 포로들을 인계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 뒤는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등포를 점령한 그날 밤 우리 부대는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살벌한 전쟁중임에도 동료들이 인근 맥주공장에서 맥주를 구해와 생일축하를 해주더군요』
崔泰煥씨의 경우처럼 安鼎一씨도 큰 전투 없이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 방위 임무를 부여받은 그의 부대가 주둔한 곳은 남산의 국군이 사용하던 부대였다.
『주로 부대 안에 있었기 때문에 밖에 나와 민간인들과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지만 가끔 두세명씩 組(조)를 이루어 외출을 해보면 서울 시민들의 얼굴에 그렇게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민간인 목욕탕에서 목욕을 할 정도였습니다. 부대는 일주일 정도 서울에 머물다가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미 국군이 후퇴한 다음이라 우리는 길가에서 참외를 먹기도 하고 때로는 들판에서 일하던 농민들이랑 같이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安鼎一씨의 13사단은 경부선을 따라 남진한 반면, 崔泰煥씨가 속한 인민군 6사단은 7월4일 새벽 인천으로 진출했다. 그가 속한 부대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市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인천시청 자리에 있던 인민위원회에 들렀던 그는 뜻밖의 사람을 만난다.
더러운 전쟁
인민위원회에 끌려와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를 당하고 있던 사람은 바로 6·25 전쟁 발발 전 인민군 4사단의 통계참모를 했던 팔로군 군정대학 동기생 한태윤이었다. 그는 해방 전 일제경찰을 했던 전력이 탄로나자 월남하여 6·25 전쟁이 나기 며칠 전에 인천 연안부두 파출소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다 좌익출신인 보도연맹원들을 돌에 매단 채 인천 앞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현장에 파출소장으로 입회를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국군을 따라 후퇴하지 못한 그는 학살당한 보도연맹원의 가족들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한태윤이 맞아죽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를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명목을 내세워 데리고 나왔는데 며칠 뒤 보도연맹의 유가족들이 사단사령부를 통해서 항의를 했다. 崔泰煥씨도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한태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이 안전하다 싶어 서울로 가는 통행증을 만들어서 보내주고 상부에는 도망쳤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비록 저랑 정반대편에 서 있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 아닙니까. 그 자리에서 피투성이가 된 그 친구와 부둥켜 안고 둘 다 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친구의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에 나도 그 보답을 받아 살벌한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수원과 평택을 거쳐 인민군 6사단은 충남 홍성과 서천을 지나 진격 방향을 전라도 방향으로 돌렸다. 7월19일 군산을 점령한 崔씨의 13연대는 각 대대별로 나뉘어 목포와 광주 그리고 임실 방면 3개 방향으로 출발했다. 각 대대의 최종 집결지는 경남 하동이었다. 마침 연대본부와 함께 행동하던 3대대장 이광빈 소좌의 고향이 전남 임실이었다.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고향을 떠난 그는 8년 만에 고향을 찾는 셈이었다. 학도병으로 떠나기 전 결혼을 한 그는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를 찾아가라」는 丈人(장인)의 말을 잊지 않고 일본군 부대를 탈출했지만 멀리 떨어진 臨政(임정) 대신 가까이 있던 팔로군에 귀순했고 해방되고 난 다음 北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한시가 급한 전쟁중이지만 8년 만에 지나는 고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그는 부대가 숙영하는 동안 잠시 틈을 내 고향집을 찾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다음날 새벽 약속 시간보다 몇시간 일찍 부대로 복귀했다.
『부대에 복귀하자마자 그는 계급장과 권총을 내던지고 동족끼리 싸우는 이 더러운 전쟁을 무엇 때문에 하냐면서 통곡하더군요. 그리고 차라리 자신을 군사재판에 회부해달라고 고함쳤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까 임실군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던 자신의 장인이 인민군이 진격해오자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가는 바람에 가족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전남과 경남의 경계에 있는 하동을 거쳐 7월 말경 진주를 점령한 인민군 6사단은 마산을 점령하기 위해 경남 함안군의 진동리 전투에서 美(미) 해병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이지만 우세한 화력과 美 공군기의 지원까지 받은 美 해병대에게 큰 타격을 입는다. 6·25 전쟁이 또다른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을 알리는 조짐이었다. 이제 전쟁은 국군이 아닌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美軍(미군)과의 싸움이었다.
『主敵은 국군이 아닌 미군이었다』
『그때 우리는 主敵(주적)을 국군이 아닌 미군이라고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더러운 전쟁은 못하겠다면서 차라리 군사재판에 회부해달라고 울부짖던 3대대장 이광빈 소좌는 진동리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관총을 들고 적진으로 돌진했다는 모습만 목격된 걸로 봐서 어쩌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美 공군기의 폭격과 해안에 배치된 군함에서의 함포사격,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쏴대는 미군의 포격으로 인민군 병사들의 전사자와 부상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다. 보급마저 제대로 되지 않아 전투력이 떨어진 인민군은 공격이 아닌 전선 방어에도 힘이 부쳤다. 하지만 金日成(김일성)은 전선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부산 함락 직전이다. 6사단은 마산 서쪽에서 부산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라』라는 督戰(독전)만을 거듭할 따름이었다.
최악의 상황임을 판단한 13연대에서는 8월31일 연대旗(기)를 사단 사령부로 호송한 다음 玉碎(옥쇄)를 각오한 최후의 혈전을 펼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했지만 빗발처럼 쏟아지는 폭격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 뒤 金日成의 독전이 다시 내려왔다. 崔씨는 敵情(적정)을 살피기 위해 다른 군관들과 함께 전방고지로 올라갔다.
『6부 능선쯤에 올라갈 무렵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더군요. 제 몇m 앞에서 올라가던 연대장 일행이 포탄에 날아가는 것을 보는 순간 몸을 피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른쪽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투지역에서 급히 후송된 그는 임시 야전병원에서 어깨에 박힌 파편 제거수술을 받았다. 며칠 동안 혼수상태를 넘나들었다. 그는 후송을 가야 한다는 군의관의 지시를 거부하고 전선을 死守(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지만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듣고서야 어쩔 수 없이 들것에 실려 후퇴길에 올랐다. 하지만 退路(퇴로)가 차단되어 어쩔 수 없이 전북도당 유격대와 합류하여 빨치산이 되었다. 포탄 파편에 맞은 부위가 완쾌되지 않아 오른쪽 팔을 쓸 수 없었던 그는 이후 외팔이 대장 혹은 한팔 대장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빨치산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사방이 막힌 상태에서의 빨치산 활동이란 결국 自滅(자멸)을 의미했다. 1951년 겨울 그는 지리산 자락에서 토벌대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형제끼리 총을 겨누고
『토벌대에게 쫓겨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게 되자 갖고 있던 수류탄으로 자폭을 하려고 했습니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니까 입으로 수류탄 안전핀을 뽑으려고 했는데 입술이 얼어 안전핀을 뽑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살도 못하고 생포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나는 분명히 인민군임에도 불구하고 정규군 포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교도소에서 9년 가까이 복역했습니다. 석방되고 난 다음에야 알았지만 그때 나를 생포했던 연대의 부연대장이 내 외사촌형이더군요. 형제끼리 서로 총을 겨눴던 겁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우리는 껴안고 통곡했습니다』
인민군 13사단의 安鼎一씨가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도 역시 낙동강 전선에서였다.
『그때 우리 부대는 상주 인근에 있는 낙동면 낙동리에 투입되었는데 소대장급 군관들이 많이 전사하자 저는 낙동강 전선에서 부소대장으로 현지 임관되었습니다. 이미 그 무렵부터 전사자들의 빈 자리는 주로 남쪽에서 징집해온 義勇軍(의용군)으로 메웠습니다. 그런데 北에서 내려온 인민군들은 죽으나 사나 위치를 고수했지만 의용군들을 진지에 배치시켜놓고 그 다음날 아침에 가보면 밤새 도망가고 없는 겁니다. 美 공군기의 폭격은 고개를 쳐들 수 없을 정도로 심했지만 공격명령이 떨어지면 병력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치며 돌격했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때는 워낙 많이 죽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조금은 무감각해졌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으면 살아 있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거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지고 생각이 단순해졌습니다. 그리고 매일 전투를 하다보니까 차츰 포탄을 피하는 요령이 생기더군요.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씨이익」 하면 멀리 떨어지는 거고 「쓰윽」 하는 소리가 들리면 근처에 떨어지는 거라는 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저절로 깨달았습니다』
대구 북방의 다부동은 국군과 인민군 모두 다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국군은 다부동을 포기하면 대구를 내줘야 할 판국이었고 인민군으로서는 다부동을 점령해야만 대구로 진격하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셈이었다.
『8월 초순경에 우리 부대의 모든 병사들은 8월15일 이전에 부산을 해방시키겠다는 서약서를 썼습니다. 그때 우리 부대는 다부동 근처의 가산면이라는 곳에서 국군과 일진일퇴를 되풀이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우리 소대원이 10여명밖에 남지 않더군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요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제가 국군과 몇m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사과밭에서 마주친 국군과 인민군 병사
그가 국군과 마주친 이야기는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무리 치열한 전투라지만 하루 24시간 내내 하는 건 아닙니다. 그날 밤은 보름이었는지 유난히 달빛이 밝게 비치더군요. 전투가 약간 소강상태를 보이는 틈을 이용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사과밭에 갔습니다. 정신없이 사과를 따먹고 있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저 같은 사람이 또 있더군요. 누군가 싶어 바라보니 국군이었습니다. 그도 멈칫 하더군요. 그렇게 서로 상대방의 눈치만 보다가 헤어졌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사격을 했다면 아마 저와 그 사람 둘 모두 다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전선이 낙동강에서 교착되면서 보급마저 시원치 않자 인민군 병사들은 전체적인 戰況(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부대에서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 전황을 알려주지 않았다. 전황을 알고 싶었던 安鼎一씨는 통신병이라는 자신의 직책을 최대한도로 이용했다.
『제가 휴대하고 있던 무전기로 남북한 양쪽 라디오 방송을 남몰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북 양쪽 다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전황을 조금씩 부풀렸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日本(일본) 방송이 제일 정확하게 전황을 보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 방송을 듣고 나서야 전황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인천 상륙작전이 있었다는 것도 일본 방송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 즈음에는 美 공군의 폭격이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도처에서 시체가 생기는데 나중에는 묻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사실은 묻어줄 겨를도 없었구요. 참호에서 시체를 옆에 두고 같이 먹고 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서 며칠 지나니까 코에서부터 구더기가 들끓기 시작하더군요. 보기 흉하니까 옷으로 가려진 몸은 놔두고 얼굴만 겨우 흙으로 덮어줄 따름이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일제히 攻勢(공세)를 취했고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은 부산 점령을 포기하고 후퇴를 하였다. 安씨는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병사들 속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 함께 낙동강을 건넌다.
살아서 낙동강을 건너오는 것도 힘들었지만 살아서 강을 건너가는 것은 더 힘든 일이었다. 국군의 포격과 美 공군기의 폭격이 낙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인민군 병력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인민군 병력이 대규모로 도하하는 지점에 포격이 집중될 것을 알고 일부러 한적한 지점을 택해 낙동강을 건넜다. 누가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전쟁 몇 개월만에 체득한 생존법칙이었다.
苦行의 후퇴
『겨우 낙동강을 건너서 어느 마을에 들어갔는데 동네 사람들이 인공기와 태극기 양쪽을 다 달아놨더군요. 워낙 混戰(혼전)중이니까 한쪽에서는 인민군 만세를 부르고 또 한쪽에서는 이승만 박사 만세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소속부대를 잃어버리고 낙오병이 된 그는 친구와 함께 후퇴한다. 北行(북행)길은 또다른 고행의 시작이었다. 국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민간인 복장을 하기도 하고 또 후퇴하는 인민군 병사들을 모아 방어선으로 내몰려는 인민군 督戰隊(독전대)를 피하기 위해 죽은 인민군의 옷으로 갈아입고 부상자 행세를 하기도 했다. 전진하던 한두 달 전만 하더라도 아무 마을에나 들어가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후퇴할 때는 남쪽 주민들의 시선마저도 피해야만 하는 二重(이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국군이 진주하면서 마을마다 우익인사들에 의해 自衛隊(자위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달빛이 휘황찬란한 것으로 봐 그때가 아마 음력으로 8월 추석 무렵이었을 겁니다.어느 집에 들어가 떡을 훔쳐먹다가 들켜 친구와 함께 줄행랑을 쳤죠. 마을 사람들이 뒤따라오는데 친구는 산으로 튀고 저는 다급한 김에 그냥 연못에 풍덩 뛰어들어 목만 내놓고 숨었습니다. 뒤따라온 사람들은 한참 동안 헤매다가 그냥 돌아가더군요. 하여튼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는 병사들은 거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고마운 사람을 만난다.
『친구와 함께 어느 외딴집에 들어가니까 노인이 나오더군요. 이북 말씨를 떨쳐버릴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고향이 강원도 양양인데 의용군으로 끌려나왔다」고 하면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 노인은 아들 같은 우리의 남루한 행색을 보더니만 안타까웠는지 하룻밤을 재워주고 그 다음날 아침에 떡까지 사주면서 양양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갖은 고생을 하며 상주 인근에 도착했을 때 安씨 일행은 「인민군들은 태백산으로 집결하라」는 포스터를 발견했다. 후퇴하는 인민군들에게 歸順(귀순)을 권유하는, 국군이 뿌린 삐라도 심심치 않게 목격했다.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귀순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이미 北에서 내려올 때 국군에게 잡히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단단히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부모형제가 있고 고향이 있는 北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北行을 계속하다가 그들은 경찰에 사로잡혔다.
『경찰이 총을 겨누고 있는데 총도 없이 빈몸인 우리는 저항하지도 못하고 그저 의용군으로 끌려나왔다는 변명만 되풀이 했습니다. 다행히 그게 통했는지 그 경찰은 우리를 의용군으로 믿어주더군요. 그런데 그에게 끌려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이미 그 마루에는 인민군 두 명이 앉아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순경이 「인민군은 고향이 38선 북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나왔겠지만 명색이 대한민국 물을 먹은 놈들이 의용군으로 나갈 수 있느냐. 마당에서 떡 몇 개를 얻어먹는 것도 감지덕지하라」더군요. 경찰서로 끌려갈 때도 인민군들은 경찰 지프를 타고 가는 반면에 우리들은 그 지방에서 잡힌 좌익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갔습니다』
경찰에 체포되어 상주 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그는 또 한 번의 죽음의 고비를 만난다.
『고개를 넘는 도중에 국군이 트럭을 세우면서 우리를 내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기들끼리 「아직 사람 못죽여 봤지」 하면서 한 놈씩 맡아 쏴버리자고 하더군요. 그때 우리를 잡아가던 경찰이 이 사람들을 죽여버리면 조사를 못한다고 만류하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대신 된통 얻어맞았죠.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인민군은 때리지 않는 겁니다. 그걸 보며 의용군이라고 거짓말 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남쪽 출신인 의용군보다 북쪽 출신인 인민군의 대접이 훨씬 좋다는 것을 안 그는 그때부터 다시 자신이 인민군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安씨는 상주와 청주 그리고 대전과 부산을 거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가 처음 들어간 곳은 親共(친공)포로가 장악하고 있던 77 포로수용소였다. 수용소 안으로 남쪽 신문은 물론 북쪽 신문도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놀랐다. 親共포로들에게 제거대상 리스트에 올려진 安씨는 구사일생으로 77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나 부산의 가야수용소로 옮겨졌다. 미군 작업대에서 작업을 하던 그는 반공포로 석방 때 수용소를 탈출하지 못하고 板門店(판문점)까지 이송되었다. 판문점에서 安씨는 북쪽 대신 남쪽을 택했다. 이미 親共포로들의 블랙 리스트에 올려진 그로서는 그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의 비상
아직도 北에 생존해 있을지 모르는 형제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金斗植(김두식·66)씨. 함경남도 영흥이 고향이었던 金씨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 강제 동원령에 의해 평북 철산의 광산으로 배치되어 광부로 일했다.
『1950년 10월 말쯤이었는데 한밤중에 비상이 걸리더니 무조건 열차에 태워졌습니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가는데 가는 방향으로 봐서 북쪽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열차를 타고 가다가 미군기의 폭격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몇 명은 열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가더군요. 저도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총을 든 경비병들이 감시하고 있어 도저히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신의주에 도착한 金씨는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다음 다시 이동을 했다. 압록강변을 따라 낮에는 자고 밤을 이용해 행군했다. 원래 목적지는 백두산이었지만 전황이 인민군에게 극히 불리해지면서 도중에 그가 속한 부대는 만주로 건너갔다. 통화를 거쳐 길림의 二道區(이도구)라는 조선족 마을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3개월간 훈련을 마치고 인민군 19사단 1연대에 배속되었다.
『훈련을 받긴 했지만 실제로 총은 훈련을 끝마칠 무렵에 딱 세 발을 쏴봤습니다.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총도 지급받지 못하고 필요할 때마다 지급받아 사용했습니다. 우리 부대는 음력으로 1951년 정월 초하룻날 평안북도 초산진으로 건너왔습니다. 북한 땅을 떠난 지 3개월 만이었습니다. 이동하면서 보니까 남북 어느 쪽이 학살했는지는 모르지만 민간인들이 손이 묶인 채 학살당한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언제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황해도 해주를 거쳐 그의 연대는 개성 남쪽인 개풍군 일대에 주둔했다. 압록강을 넘어올 때 金씨는 연대장 직속의 정찰소대 분대장이었지만 북한으로 들어온 이후 사상검토 끝에 당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供給(공급)소대로 전속되어 보급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필사의 탈출
『부식을 조달하기 위해 어떤 집에 들어가 부엌에서 김치 항아리를 찾아내 가지고 나오는데 집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항아리를 붙잡고 통곡하며 놓아주지를 않는 겁니다. 할머니의 울음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모여들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라 하늘에다 대고 공포를 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할머니가 항아리를 놓더군요. 할머니에게 뺏은 항아리를 가지고 부대로 돌아오면서도 마음이 영 개운치를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에게도 그게 유일한 반찬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주민들의 저항은 농가의 중요한 재산이자 농사를 짓는 데 없어서는 안될 소를 공출할 때 더욱 격렬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끌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1951년 5월 초 임진강을 도하한 그의 부대는 경기도 문산을 거쳐 파주에서 국군과 마주쳤다. 멀리 남쪽으로 삼각산이 바라보이는 지점이었다.
『5월20일 새벽부터 국군의 포격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겁니다. 저는 얼마나 피곤했던지 그 와중에도 참호에서 그만 잠이 깜박 들어버렸는데 잠에서 깨보니 사방이 조용하더군요. 전날만 하더라도 나무가 무성하던 나지막한 야산이 몇시간 사이에 벌거벗은 민둥산으로 바뀌어 있는 겁니다. 그만큼 포격이 심했던 거죠. 눈앞에 보이는 고지에는 철모를 쓴 군인들이 보였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부대는 철모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군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원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북한에서 성분 불량자로 찍혀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귀순하려고, 인민군들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국군이 살포한 삐라도 한 장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국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는 교육은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설마 죽이겠느냐」라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에서 그는 얼마 전부터 탈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틈을 이용해 金씨는 하얀 깃발을 단 작대기를 쳐들고 국군 쪽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를 향해 뒤에서 인민군의 총격이 가해지고 국군 쪽에서는 탈출을 엄호하는 사격으로 잠시 총격전이 벌어졌다. 5월경이라 새파랗게 핀 보리밭을 달리던 그는 끝내 뒤에서 날아온 총탄에 오른쪽 가슴을 맞지만 땅바닥을 기다시피하여 국군이 있는 쪽으로 넘어갔다.
『죄인인 우리야…』
『잠시 뒤에 국군 병사 둘이 나타나 피투성이가 된 저를 보더니 안되겠다는 듯이 「네 발로 걸어가지 못하면 쏴 버리겠다」 라고 하더군요. 가슴에 총을 맞은 탓에 이미 입으로 시커먼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려고 정말 죽을 힘을 다해 걸어갔습니다. 1백m도 안되는 나지막한 야산을 올라가는데 몇 번이나 쓰러질 정도였으니까요. 오로지 살겠다는 일념으로 올라갔습니다. 국군 장교 앞으로 끌려갔는데 갑자기 고향을 물어보더군요. 그제서야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일 거라면 굳이 고향 같은 건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金씨는 귀순을 한 점이 참작이 된 탓인지 서울로 후송되었다. 영등포에 도착한 그는 간단한 심사를 받고 곧 수원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때까지 인민군 복장 그대로였다.
『교실 바닥에 창가 쪽으로 매트리스를 깔아 두었는데 맞은편에는 국군 부상병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부상을 당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국군 병사들이 우리 인민군 병사들을 보더니만 원수들이 왔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국군 부상병으로서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만 하더라도 총을 겨누고 싸웠고 또 자신들을 불구의 몸으로 만든 인민군 병사들이 같은 병실에서 똑같이 치료를 받고 있으니까요. 죄인인 우리야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죠. 저도 화장실에 갔다오다가 국군병사에게 발길질을 당했습니다.
그 다음날은 오른쪽 다리가 잘려나간 병사가 맞은편에 있는 우리를 향해 대검을 던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심각하다고 파악한 군의관이 와서 「모두들 잘 들어라. 우리는 한 민족 한 형제다. 비록 저들은 얼마전만 하더라도 우리와 싸웠던 인민군들이지만 지금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총알받이로 강제로 끌려나온 것 뿐이다. 우리는 저들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유를 찾아 용감히 귀순했기 때문이다」라고 연설을 하더군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그날 이후 우리와 국군 사이에는 위생병이 보초를 섰습니다』
金씨는 며칠 후 국군 부상병들과 함께 대구 삼덕 초등학교에 설치된 27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수원에서 자기들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던 국군 부상병들과 친해졌다.
『자주 얼굴을 대하다보니 서로 인사도 하게 되고 때로는 국군 부상병들이 우리 인민군 부상병들이 있는 병실로 놀러오기도 했습니다. 화제는 주로 어느 전선에서 어느 부대랑 싸웠냐는 거죠. 가족이 면회를 온 국군 부상병들은 음식물과 과일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한때 국군과 인민군으로 갈라져 싸웠던 사람들이 함께 치료를 받으면서 화해를 해나가는 과정은 민족의 동일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강조해주는 부분이다.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기는 했지만 앞, 뒤 가슴의 갈비뼈를 하나도 스치지 않았습니다. 엑스레이를 검토하고 난 군의관도 천우신조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2개월 반 정도 지나니까 가슴의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되더군요.
그 무렵 우리들에게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누군가가 전쟁은 곧 국군의 승리로 끝나니까 고향으로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 좋은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곳에 가면 고향 친구들도 많이 만날 수 있다기에 저는 그곳이 포로수용소라고는 차마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저는 포로로 잡힌 게 아니고 귀순한 거니까 다르게 대우한다고 순진하게만 받아들인 거죠』
대구에서 트럭을 탄 金씨가 도착한 곳은 부산 동래에 있는 포로수용소였다. 그때가 1951년 8월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된다. 귀순한 사람과 포로로 잡힌 인민군을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함께 취급한 포로처리 과정은 그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親共포로와 反共포로 사이의 유혈극이라는 불씨로 남게 되었다. 아마 귀순병과 포로를 처음부터 구별해서 처리했다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의 혼란은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金씨는 親共 일색이었던 73 포로수용소에서 우여곡절 끝에 빠져 나와 反共 포로수용소인 96 포로수용소로 옮긴다. 반공포로 석방 때 金씨는 철조망을 끊고 탈출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던 남쪽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金씨와는 달리 南도 北도 선택하지 못하고 제3국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최인훈의 소설 「廣場(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바로 그들의 모델이다. 소설 속에서 현해탄에 투신자살하는 이명준과는 달리 그들은 살아남았다.
필자는 몇 년 전 某(모) 방송국의 초청으로 귀국한 그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신의주가 고향이라는 황덕림(브라질 거주)씨는 일제 때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해 해방이 될 때까지 산해관 인근 농촌에서 살았다. 해방이 되자 열여덟의 나이로 조선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가 소속된 부대는 중국 인민해방군 166師였다.
『무슨 이념 때문이라기보다는 군대에 들어가면 최소한 배고픔만은 벗어날 줄 알았기 때문이죠』
이후 黃씨가 속한 중국인민해방군 166師는 國共내전을 치르고 북한으로 들어와 인민군 6사단으로 탈바꿈했다. 6·25 전쟁 초기 개성을 거쳐 마산을 점령하기 위해 미군과 공방전을 펼치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기는 바람에 黃씨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950년 11월, 전투에 염증을 느낀 黃씨는 부대를 이탈해 귀순의 형태로 경찰에 체포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지막지한 폭력과 거제도 포로수용소 行(행)이었다.
『친공, 반공 양쪽에 의해 희생당한 포로들의 시체를 매장하는 작업에 밤마다 동원되었습니다. 제 유일한 목표는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했던 남쪽. 하지만 포로수용소 안에서 밤마다 벌어지는 테러를 목격하면서 黃씨는 남쪽마저도 자신이 선택할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절망했다. 南과 北,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는 판문점 근처의 중립국 수용소로 이송되고 그곳에서 우연하게 南도 北도 아닌 제3국으로 갈 수 있다는 소문을 접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택했다.
『6·25를 절대 잊지 말자』
살아온 인생역정과 체험은 개인에 따라서 조금씩 달랐지만 인민군 참전자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싶어했던 것은 6·25와 같은 전쟁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崔泰煥씨는 『우리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전쟁을 체험한 세대로서 어떠한 이념이나 명분을 가지고 있더라도 전쟁을 통한 문제해결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5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외세에 의해 빚어진 조국분단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 민족 모두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6·25 전쟁으로부터 빚어진 서로의 怨恨(원한)을 용서합시다. 대신 悲劇(비극)의 6·25를 절대로 잊지는 맙시다』
崔씨의 얘기는 결국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을 역사의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6·25 전쟁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인민군 참전자들. 북쪽에 가족을 남겨둔 채 남쪽에 남았던 그들 대부분은 남북화해 무드에 발맞추어 시작된 남북 이산가족찾기에도 신청서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北에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들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포성은 이미 그친 지 오래지만 인민군 출신들 중 몇몇은 아직도 南과 北, 양쪽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한때 인민군이었다는 사실을 멍에로 안고 살아가는 그들은 남북분단의 또다른 희생자였다. 평화적인 통일만이 그들의 가슴에 맺힌 恨(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컵도 보는 사람의 위치나 각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 차이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수록 개인이 처한 입장이나 가치관에 따라서 더 크게 나타난다. 같은 민족이 서로 敵(적)이 되어 싸웠던 6·25 전쟁을 보는 見解(견해)는 아직도 南(남)과 北(북), 양쪽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民族(민족)의 전쟁, 6·25 전쟁에 人民軍(인민군)으로 참전했던 사람들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수소문 끝에 人民軍으로 참전했던 이들을 어렵게 찾아냈지만 몇몇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北에서 살았던 세월보다 南에서 살아온 시간이 더 길고 다들 간단치 않는 歷程(역정)을 거쳐 남쪽땅에 뿌리내리며 살고 있지만 한때나마 자신들이 人民軍이었다는 사실은 남쪽 땅에서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혹시 北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어떤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이름이 공개되는 것조차 사양할 정도였다.
말문을 연 인민군 출신들의 개인적인 체험을 중심으로 6·25 전쟁을 조명하다보면 또 다른 실수를 범할 가능성도 있다. 무릇 사람들이란 곧잘 자신이 보고 겪은 것만으로 전체를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민군이 보는 6·25 전쟁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참고할 점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6·25 전쟁의 裏面(이면)을 그들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안에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인민군 제13사단 통신병으로 참전했던 安鼎一(안정일·70·서울시 구로구 개봉동)씨. 그는 평안남도 남포 고급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50년 3월에 인민군에 입대했다.
『民靑(민청) 간부교육이 있다고 해서 소집되었는데 막상 가보니 인민군에 지원하지 않고서는 안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겉으로는 지원이었지만 실제로는 半(반)강제나 마찬가지였지요. 신의주에서 3개월 정도 통신병 훈련을 받고난 6월 중순경에 부대가 이동하더군요. 우리 같은 졸병들이야 목적지가 어딘 줄도 몰랐습니다. 처음엔 함경북도 쪽으로 훈련나가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우리가 탄 기차는 자꾸만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배속된 인민군 13사단은 신의주를 떠난 지 열흘 만인 6월24일 저녁쯤에 경기도 연천 북방의 1군단 예비사단으로 배치되었다.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로 참전한 崔泰煥(최태환·71·경기도 광명시 광명동)씨. 그는 多事多難(다사다난)한 인생경력의 소유자이다.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만주로 이주한 부모님을 따라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해방 이후 八路軍(팔로군) 軍政大學(군정대학)을 졸업한 그는 入北(입북)하여 少佐(소좌) 계급장을 달고 인민군 역사기록부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인민군 창건과정과 6·25 開戰(개전)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崔씨는 方虎山(방호산·팔로군 출신으로 후에 군단장이 되었다가 1953년 숙청됨)이 사단장으로 있던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로 6·25를 맞았다. 6사단은 6·25 이전에 夏季(하계) 전투훈련 명목으로 38선 가까이 이동해 있었고, 그가 배속된 13연대는 개성을 내려다보는 송악산 주능선에 배치되었다.
『1950년 6월23일 사단사령부에 대대장급 이상의 군관 소집이 있어 가보니 金枓奉(김두봉·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당시 정치국원)의 연설이 있더군요. 당시 시국에 대해서 얘기하던 그는 연설 말미에 「서울은 조선 반도의 심장부다. 심장을 장악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서울을 장악하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는 것과 똑같고 우리는 일주일 안에 서울을 장악해 그동안 남한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롭게 뽑아 남북통일을 이룬다」는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는 정말 일주일 안에 전쟁이 끝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은 일주일 만에 끝나지 않고 3년 넘게 계속되었다. 戰域(전역) 또한 서울을 制限(제한) 점령한 것이 아닌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한반도 전체로 확대되고 말았다.
참호 안의 술병
인민군 6사단의 骨幹(골간)은 원래 중국대륙의 國共(국공)내전에 참가해 전투경험이 많던 중국 인민해방군 166師(사)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국공내전이 毛澤東(모택동) 군대의 승리로 끝난 이후 166師는 중국과 북한의 협약에 의해 1949년 7월 말 북한으로 들어와 인민군 6사단으로 탈바꿈한다.
『팔로군 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우리 사단은 고향이 이북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이남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고향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심정이 컸습니다. 앞으로 내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초조한 생각에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우는데 6월25일 새벽이 되자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그런데 어디선가 하모니카 부는 소리가 애절하게 들리는데 가슴을 파고 듭디다』
軍官(군관)으로 참전한 崔泰煥씨와는 달리 일개 戰士(전사)로 참전한 安鼎一씨는 긴장된 6·25의 새벽을 어떻게 맞았을까?
『제가 그때 사단사령부 통신대에 있어서 아는데 원래 작전명령상에는 새벽 5시가 공격시간이었지만 실제론 새벽 4시에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군관들이 전사들을 소집하더니만 「국군이 38선을 북침 공격해서 반격작전을 실시한다」고 일장연설을 하더군요. 수류탄과 실탄 백 발을 휴대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그때의 심정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비록 입고 있는 군복은 달라도 전투에 투입되는 국군과 인민군 병사들의 심정은 모두 똑같았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가지는 것이고 어떠한 교육이나 이념으로도 쉽게 극복될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38선을 돌파해서 南進(남진)하는데 국군 참호 안에 술병들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걸 보고 나서야 국군의 軍紀(군기)가 엉망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최전방 초소에 술병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국군의 방어선이 생각보다 쉽게 뚫린 것이 이해가 가더군요. 인민군의 진격속도가 빠른 탓에 미처 후퇴도 하지 못하고 포로로 잡힌 국군들도 많이 봤습니다. 우리 부대는 기차를 타고 임진강을 건넜는데 그때 국군 비행기가 우리가 탄 기차를 향해서 기총소사를 했습니다. 부상자가 여러 명 발생했고 그때 처음으로 시체를 목격했습니다』
「독약을 탔을지 모르니…」
開戰 초기 인민군에게 포로가 된 국군병사들의 처리방법은 증언자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먼저 崔泰煥씨의 증언이다.
『국군측 기록에는 좀 다르게 나와 있지만 6·25 첫날은 인민군이 거의 破竹之勢(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국군을 보니까 전쟁은 생각했던 대로 빠른 시일 내에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 무렵에 우리 부대는 이미 開城(개성) 시내를 점령했는데 선죽교 근처에서 국군이 수십여명 포로로 잡혀 있는 걸 발견하고 저는 그들에게 「이제 조국은 통일됐다. 여러분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조국 부흥에 이바지하라. 그리고 우리와 같이 행동하고 싶은 사람은 동참하라」는 연설을 하고 풀어주었습니다. 金枓奉이 연설할 때 포로가 필요없는 전쟁이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 부대는 포로를 현장에서 석방했습니다』
하지만 인민군 동부전선을 담당한 제2군단 工兵(공병) 참모로 참전했다가 그해 9월 김포에서 귀순한 주영복씨가 쓴 「내가 겪은 조선전쟁」이라는 책에는 「손이 묶인 채로 죽은 국군과 경찰의 시체 10여 구를 봤다」는 내용이 나온다. 전투 중 戰死(전사)했다면 굳이 손이 뒤로 묶여 있을 리가 없다. 두 사람의 말을 종합해보면 어느 쪽 증언이 틀렸다기보다는 전쟁이라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포로에 대한 처리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부대별로 自意(자의)적으로 행해졌음을 추론할 수 있다.
개전 첫날에 대한 安鼎一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6월25일 오전에 목이 말라서 물을 얻어 먹으러 民家(민가)에 들어갔는데 그 집 마루에 태극기랑 이승만 박사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더군요.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좀 얻어먹자고 하니까 바가지에 물을 담아주는데 갑자기 北에서 교육받은 내용이 떠올라 멈칫거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北에서 남쪽에 가면 독약을 탔을지 모르니까 물과 밥 같은 것을 얻어먹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꺼림칙해서 멈칫멈칫하고 있으니까 그 노인이 알겠다는 듯이 자기가 먼저 마시고 난 다음 자기들이 먹던 밥도 먹으라고 내놓더군요. 그때서야 北에서 교육받은 것과 조금은 다르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뚜렷한 敵意(적의)를 표하지도, 환영도 하지 않는 무표정 그 자체였습니다』
『환영 인파는 없었다』
崔泰煥씨가 배속된 인민군 6사단 13연대는 개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를 몰아 계속 南進한 끝에 6월25일 밤을 개풍군 영정포라는 조그만 나룻가에서 보낸다. 이튿날 아침에는 인근에 있던 어선들을 징발해 한강 하류를 건너 아침 10시경 김포반도의 걸포리로 상륙한다. 국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12시경 김포읍을 점령한 그의 부대는 저녁 7시 무렵에는 현재 김포국제공항이 내려다보이는 강서구 방화동 개화산까지 진출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진해 38선을 돌파한 지 이틀 만에 서울 남쪽까지 진출한 것이다.
『北에서 교육받을 때는 남쪽에 내려가면 환영행사가 있을 줄 알았는데 환영인파를 전혀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비관적인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저녁에 수색을 나갔다가 갑자기 「중대장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보초들이 위협사격을 해서 체포해보니 1개 분대 가량의 국군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산쪽에서 후퇴한 국군 1사단 소속이었는데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기 전에 중대장과 헤어졌다는 거였습니다. 개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설만 하고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우리 부대는 국군 포로를 전원 석방했습니다』
개화산에서 하룻밤을 보낸 崔씨의 부대는 6월27일 다시 전진하여 현재 인공폭포가 있는 영등포구 양화동까지 진출했다. 그때야 비로소 국군의 저항에 부딪쳤다. 그의 부대원 중에서도 부상자가 발생할 정도의 전투였다. 6월28일 목동까지 진출한 崔씨의 부대는 현재 새마을 운동본부가 있는 근방에서 상부로부터의 명령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했다.
『승리는 우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7월2일 저녁에 상부로부터 영등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 날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오목교 근처 제방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데 국군 병사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안양천을 통해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며 투항을 권유하자 국군 병사들은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안 탓인지 크게 저항하지 않고 투항했습니다.
그때 포로로 잡힌 숫자가 약 5백명 되었는데 그 중 저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며칠전 행주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오다 개화산 인근에서 우리에게 붙잡힌 바로 그 병사였습니다. 개성이 고향이라는 그는 자칭 3代(대) 독자였는데 불행하게도 두 번이나 나에게 포로로 잡혔던 것입니다. 우리 부대는 거기에서 지체할 수가 없어 문화부 지도원에게 포로들을 인계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 뒤는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등포를 점령한 그날 밤 우리 부대는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살벌한 전쟁중임에도 동료들이 인근 맥주공장에서 맥주를 구해와 생일축하를 해주더군요』
崔泰煥씨의 경우처럼 安鼎一씨도 큰 전투 없이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 방위 임무를 부여받은 그의 부대가 주둔한 곳은 남산의 국군이 사용하던 부대였다.
『주로 부대 안에 있었기 때문에 밖에 나와 민간인들과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지만 가끔 두세명씩 組(조)를 이루어 외출을 해보면 서울 시민들의 얼굴에 그렇게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민간인 목욕탕에서 목욕을 할 정도였습니다. 부대는 일주일 정도 서울에 머물다가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미 국군이 후퇴한 다음이라 우리는 길가에서 참외를 먹기도 하고 때로는 들판에서 일하던 농민들이랑 같이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安鼎一씨의 13사단은 경부선을 따라 남진한 반면, 崔泰煥씨가 속한 인민군 6사단은 7월4일 새벽 인천으로 진출했다. 그가 속한 부대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市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인천시청 자리에 있던 인민위원회에 들렀던 그는 뜻밖의 사람을 만난다.
더러운 전쟁
인민위원회에 끌려와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를 당하고 있던 사람은 바로 6·25 전쟁 발발 전 인민군 4사단의 통계참모를 했던 팔로군 군정대학 동기생 한태윤이었다. 그는 해방 전 일제경찰을 했던 전력이 탄로나자 월남하여 6·25 전쟁이 나기 며칠 전에 인천 연안부두 파출소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다 좌익출신인 보도연맹원들을 돌에 매단 채 인천 앞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현장에 파출소장으로 입회를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국군을 따라 후퇴하지 못한 그는 학살당한 보도연맹원의 가족들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한태윤이 맞아죽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를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명목을 내세워 데리고 나왔는데 며칠 뒤 보도연맹의 유가족들이 사단사령부를 통해서 항의를 했다. 崔泰煥씨도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한태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이 안전하다 싶어 서울로 가는 통행증을 만들어서 보내주고 상부에는 도망쳤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비록 저랑 정반대편에 서 있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 아닙니까. 그 자리에서 피투성이가 된 그 친구와 부둥켜 안고 둘 다 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친구의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에 나도 그 보답을 받아 살벌한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수원과 평택을 거쳐 인민군 6사단은 충남 홍성과 서천을 지나 진격 방향을 전라도 방향으로 돌렸다. 7월19일 군산을 점령한 崔씨의 13연대는 각 대대별로 나뉘어 목포와 광주 그리고 임실 방면 3개 방향으로 출발했다. 각 대대의 최종 집결지는 경남 하동이었다. 마침 연대본부와 함께 행동하던 3대대장 이광빈 소좌의 고향이 전남 임실이었다.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고향을 떠난 그는 8년 만에 고향을 찾는 셈이었다. 학도병으로 떠나기 전 결혼을 한 그는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를 찾아가라」는 丈人(장인)의 말을 잊지 않고 일본군 부대를 탈출했지만 멀리 떨어진 臨政(임정) 대신 가까이 있던 팔로군에 귀순했고 해방되고 난 다음 北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한시가 급한 전쟁중이지만 8년 만에 지나는 고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그는 부대가 숙영하는 동안 잠시 틈을 내 고향집을 찾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다음날 새벽 약속 시간보다 몇시간 일찍 부대로 복귀했다.
『부대에 복귀하자마자 그는 계급장과 권총을 내던지고 동족끼리 싸우는 이 더러운 전쟁을 무엇 때문에 하냐면서 통곡하더군요. 그리고 차라리 자신을 군사재판에 회부해달라고 고함쳤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까 임실군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던 자신의 장인이 인민군이 진격해오자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가는 바람에 가족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전남과 경남의 경계에 있는 하동을 거쳐 7월 말경 진주를 점령한 인민군 6사단은 마산을 점령하기 위해 경남 함안군의 진동리 전투에서 美(미) 해병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이지만 우세한 화력과 美 공군기의 지원까지 받은 美 해병대에게 큰 타격을 입는다. 6·25 전쟁이 또다른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을 알리는 조짐이었다. 이제 전쟁은 국군이 아닌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美軍(미군)과의 싸움이었다.
『主敵은 국군이 아닌 미군이었다』
『그때 우리는 主敵(주적)을 국군이 아닌 미군이라고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더러운 전쟁은 못하겠다면서 차라리 군사재판에 회부해달라고 울부짖던 3대대장 이광빈 소좌는 진동리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관총을 들고 적진으로 돌진했다는 모습만 목격된 걸로 봐서 어쩌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美 공군기의 폭격과 해안에 배치된 군함에서의 함포사격,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쏴대는 미군의 포격으로 인민군 병사들의 전사자와 부상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다. 보급마저 제대로 되지 않아 전투력이 떨어진 인민군은 공격이 아닌 전선 방어에도 힘이 부쳤다. 하지만 金日成(김일성)은 전선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부산 함락 직전이다. 6사단은 마산 서쪽에서 부산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라』라는 督戰(독전)만을 거듭할 따름이었다.
최악의 상황임을 판단한 13연대에서는 8월31일 연대旗(기)를 사단 사령부로 호송한 다음 玉碎(옥쇄)를 각오한 최후의 혈전을 펼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했지만 빗발처럼 쏟아지는 폭격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 뒤 金日成의 독전이 다시 내려왔다. 崔씨는 敵情(적정)을 살피기 위해 다른 군관들과 함께 전방고지로 올라갔다.
『6부 능선쯤에 올라갈 무렵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더군요. 제 몇m 앞에서 올라가던 연대장 일행이 포탄에 날아가는 것을 보는 순간 몸을 피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른쪽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투지역에서 급히 후송된 그는 임시 야전병원에서 어깨에 박힌 파편 제거수술을 받았다. 며칠 동안 혼수상태를 넘나들었다. 그는 후송을 가야 한다는 군의관의 지시를 거부하고 전선을 死守(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지만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듣고서야 어쩔 수 없이 들것에 실려 후퇴길에 올랐다. 하지만 退路(퇴로)가 차단되어 어쩔 수 없이 전북도당 유격대와 합류하여 빨치산이 되었다. 포탄 파편에 맞은 부위가 완쾌되지 않아 오른쪽 팔을 쓸 수 없었던 그는 이후 외팔이 대장 혹은 한팔 대장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빨치산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사방이 막힌 상태에서의 빨치산 활동이란 결국 自滅(자멸)을 의미했다. 1951년 겨울 그는 지리산 자락에서 토벌대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형제끼리 총을 겨누고
『토벌대에게 쫓겨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게 되자 갖고 있던 수류탄으로 자폭을 하려고 했습니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니까 입으로 수류탄 안전핀을 뽑으려고 했는데 입술이 얼어 안전핀을 뽑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살도 못하고 생포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나는 분명히 인민군임에도 불구하고 정규군 포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교도소에서 9년 가까이 복역했습니다. 석방되고 난 다음에야 알았지만 그때 나를 생포했던 연대의 부연대장이 내 외사촌형이더군요. 형제끼리 서로 총을 겨눴던 겁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우리는 껴안고 통곡했습니다』
인민군 13사단의 安鼎一씨가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도 역시 낙동강 전선에서였다.
『그때 우리 부대는 상주 인근에 있는 낙동면 낙동리에 투입되었는데 소대장급 군관들이 많이 전사하자 저는 낙동강 전선에서 부소대장으로 현지 임관되었습니다. 이미 그 무렵부터 전사자들의 빈 자리는 주로 남쪽에서 징집해온 義勇軍(의용군)으로 메웠습니다. 그런데 北에서 내려온 인민군들은 죽으나 사나 위치를 고수했지만 의용군들을 진지에 배치시켜놓고 그 다음날 아침에 가보면 밤새 도망가고 없는 겁니다. 美 공군기의 폭격은 고개를 쳐들 수 없을 정도로 심했지만 공격명령이 떨어지면 병력이 많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치며 돌격했습니다』
그것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때는 워낙 많이 죽으니까 죽음에 대해서 조금은 무감각해졌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으면 살아 있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거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지고 생각이 단순해졌습니다. 그리고 매일 전투를 하다보니까 차츰 포탄을 피하는 요령이 생기더군요.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가 「씨이익」 하면 멀리 떨어지는 거고 「쓰윽」 하는 소리가 들리면 근처에 떨어지는 거라는 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저절로 깨달았습니다』
대구 북방의 다부동은 국군과 인민군 모두 다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국군은 다부동을 포기하면 대구를 내줘야 할 판국이었고 인민군으로서는 다부동을 점령해야만 대구로 진격하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셈이었다.
『8월 초순경에 우리 부대의 모든 병사들은 8월15일 이전에 부산을 해방시키겠다는 서약서를 썼습니다. 그때 우리 부대는 다부동 근처의 가산면이라는 곳에서 국군과 일진일퇴를 되풀이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우리 소대원이 10여명밖에 남지 않더군요.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게 요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제가 국군과 몇m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사과밭에서 마주친 국군과 인민군 병사
그가 국군과 마주친 이야기는 영화 속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무리 치열한 전투라지만 하루 24시간 내내 하는 건 아닙니다. 그날 밤은 보름이었는지 유난히 달빛이 밝게 비치더군요. 전투가 약간 소강상태를 보이는 틈을 이용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사과밭에 갔습니다. 정신없이 사과를 따먹고 있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저 같은 사람이 또 있더군요. 누군가 싶어 바라보니 국군이었습니다. 그도 멈칫 하더군요. 그렇게 서로 상대방의 눈치만 보다가 헤어졌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사격을 했다면 아마 저와 그 사람 둘 모두 다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전선이 낙동강에서 교착되면서 보급마저 시원치 않자 인민군 병사들은 전체적인 戰況(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부대에서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 전황을 알려주지 않았다. 전황을 알고 싶었던 安鼎一씨는 통신병이라는 자신의 직책을 최대한도로 이용했다.
『제가 휴대하고 있던 무전기로 남북한 양쪽 라디오 방송을 남몰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북 양쪽 다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전황을 조금씩 부풀렸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日本(일본) 방송이 제일 정확하게 전황을 보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 방송을 듣고 나서야 전황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인천 상륙작전이 있었다는 것도 일본 방송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 즈음에는 美 공군의 폭격이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도처에서 시체가 생기는데 나중에는 묻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사실은 묻어줄 겨를도 없었구요. 참호에서 시체를 옆에 두고 같이 먹고 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서 며칠 지나니까 코에서부터 구더기가 들끓기 시작하더군요. 보기 흉하니까 옷으로 가려진 몸은 놔두고 얼굴만 겨우 흙으로 덮어줄 따름이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일제히 攻勢(공세)를 취했고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은 부산 점령을 포기하고 후퇴를 하였다. 安씨는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병사들 속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 함께 낙동강을 건넌다.
살아서 낙동강을 건너오는 것도 힘들었지만 살아서 강을 건너가는 것은 더 힘든 일이었다. 국군의 포격과 美 공군기의 폭격이 낙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인민군 병력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인민군 병력이 대규모로 도하하는 지점에 포격이 집중될 것을 알고 일부러 한적한 지점을 택해 낙동강을 건넜다. 누가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전쟁 몇 개월만에 체득한 생존법칙이었다.
苦行의 후퇴
『겨우 낙동강을 건너서 어느 마을에 들어갔는데 동네 사람들이 인공기와 태극기 양쪽을 다 달아놨더군요. 워낙 混戰(혼전)중이니까 한쪽에서는 인민군 만세를 부르고 또 한쪽에서는 이승만 박사 만세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소속부대를 잃어버리고 낙오병이 된 그는 친구와 함께 후퇴한다. 北行(북행)길은 또다른 고행의 시작이었다. 국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민간인 복장을 하기도 하고 또 후퇴하는 인민군 병사들을 모아 방어선으로 내몰려는 인민군 督戰隊(독전대)를 피하기 위해 죽은 인민군의 옷으로 갈아입고 부상자 행세를 하기도 했다. 전진하던 한두 달 전만 하더라도 아무 마을에나 들어가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후퇴할 때는 남쪽 주민들의 시선마저도 피해야만 하는 二重(이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국군이 진주하면서 마을마다 우익인사들에 의해 自衛隊(자위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달빛이 휘황찬란한 것으로 봐 그때가 아마 음력으로 8월 추석 무렵이었을 겁니다.어느 집에 들어가 떡을 훔쳐먹다가 들켜 친구와 함께 줄행랑을 쳤죠. 마을 사람들이 뒤따라오는데 친구는 산으로 튀고 저는 다급한 김에 그냥 연못에 풍덩 뛰어들어 목만 내놓고 숨었습니다. 뒤따라온 사람들은 한참 동안 헤매다가 그냥 돌아가더군요. 하여튼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는 병사들은 거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고마운 사람을 만난다.
『친구와 함께 어느 외딴집에 들어가니까 노인이 나오더군요. 이북 말씨를 떨쳐버릴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고향이 강원도 양양인데 의용군으로 끌려나왔다」고 하면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 노인은 아들 같은 우리의 남루한 행색을 보더니만 안타까웠는지 하룻밤을 재워주고 그 다음날 아침에 떡까지 사주면서 양양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갖은 고생을 하며 상주 인근에 도착했을 때 安씨 일행은 「인민군들은 태백산으로 집결하라」는 포스터를 발견했다. 후퇴하는 인민군들에게 歸順(귀순)을 권유하는, 국군이 뿌린 삐라도 심심치 않게 목격했다.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귀순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이미 北에서 내려올 때 국군에게 잡히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단단히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부모형제가 있고 고향이 있는 北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北行을 계속하다가 그들은 경찰에 사로잡혔다.
『경찰이 총을 겨누고 있는데 총도 없이 빈몸인 우리는 저항하지도 못하고 그저 의용군으로 끌려나왔다는 변명만 되풀이 했습니다. 다행히 그게 통했는지 그 경찰은 우리를 의용군으로 믿어주더군요. 그런데 그에게 끌려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이미 그 마루에는 인민군 두 명이 앉아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순경이 「인민군은 고향이 38선 북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나왔겠지만 명색이 대한민국 물을 먹은 놈들이 의용군으로 나갈 수 있느냐. 마당에서 떡 몇 개를 얻어먹는 것도 감지덕지하라」더군요. 경찰서로 끌려갈 때도 인민군들은 경찰 지프를 타고 가는 반면에 우리들은 그 지방에서 잡힌 좌익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갔습니다』
경찰에 체포되어 상주 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그는 또 한 번의 죽음의 고비를 만난다.
『고개를 넘는 도중에 국군이 트럭을 세우면서 우리를 내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기들끼리 「아직 사람 못죽여 봤지」 하면서 한 놈씩 맡아 쏴버리자고 하더군요. 그때 우리를 잡아가던 경찰이 이 사람들을 죽여버리면 조사를 못한다고 만류하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대신 된통 얻어맞았죠.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인민군은 때리지 않는 겁니다. 그걸 보며 의용군이라고 거짓말 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남쪽 출신인 의용군보다 북쪽 출신인 인민군의 대접이 훨씬 좋다는 것을 안 그는 그때부터 다시 자신이 인민군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安씨는 상주와 청주 그리고 대전과 부산을 거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가 처음 들어간 곳은 親共(친공)포로가 장악하고 있던 77 포로수용소였다. 수용소 안으로 남쪽 신문은 물론 북쪽 신문도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놀랐다. 親共포로들에게 제거대상 리스트에 올려진 安씨는 구사일생으로 77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나 부산의 가야수용소로 옮겨졌다. 미군 작업대에서 작업을 하던 그는 반공포로 석방 때 수용소를 탈출하지 못하고 板門店(판문점)까지 이송되었다. 판문점에서 安씨는 북쪽 대신 남쪽을 택했다. 이미 親共포로들의 블랙 리스트에 올려진 그로서는 그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의 비상
아직도 北에 생존해 있을지 모르는 형제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金斗植(김두식·66)씨. 함경남도 영흥이 고향이었던 金씨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 강제 동원령에 의해 평북 철산의 광산으로 배치되어 광부로 일했다.
『1950년 10월 말쯤이었는데 한밤중에 비상이 걸리더니 무조건 열차에 태워졌습니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가는데 가는 방향으로 봐서 북쪽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열차를 타고 가다가 미군기의 폭격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몇 명은 열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가더군요. 저도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총을 든 경비병들이 감시하고 있어 도저히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신의주에 도착한 金씨는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다음 다시 이동을 했다. 압록강변을 따라 낮에는 자고 밤을 이용해 행군했다. 원래 목적지는 백두산이었지만 전황이 인민군에게 극히 불리해지면서 도중에 그가 속한 부대는 만주로 건너갔다. 통화를 거쳐 길림의 二道區(이도구)라는 조선족 마을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3개월간 훈련을 마치고 인민군 19사단 1연대에 배속되었다.
『훈련을 받긴 했지만 실제로 총은 훈련을 끝마칠 무렵에 딱 세 발을 쏴봤습니다.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총도 지급받지 못하고 필요할 때마다 지급받아 사용했습니다. 우리 부대는 음력으로 1951년 정월 초하룻날 평안북도 초산진으로 건너왔습니다. 북한 땅을 떠난 지 3개월 만이었습니다. 이동하면서 보니까 남북 어느 쪽이 학살했는지는 모르지만 민간인들이 손이 묶인 채 학살당한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언제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착잡했습니다』
황해도 해주를 거쳐 그의 연대는 개성 남쪽인 개풍군 일대에 주둔했다. 압록강을 넘어올 때 金씨는 연대장 직속의 정찰소대 분대장이었지만 북한으로 들어온 이후 사상검토 끝에 당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供給(공급)소대로 전속되어 보급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필사의 탈출
『부식을 조달하기 위해 어떤 집에 들어가 부엌에서 김치 항아리를 찾아내 가지고 나오는데 집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항아리를 붙잡고 통곡하며 놓아주지를 않는 겁니다. 할머니의 울음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모여들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라 하늘에다 대고 공포를 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할머니가 항아리를 놓더군요. 할머니에게 뺏은 항아리를 가지고 부대로 돌아오면서도 마음이 영 개운치를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에게도 그게 유일한 반찬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주민들의 저항은 농가의 중요한 재산이자 농사를 짓는 데 없어서는 안될 소를 공출할 때 더욱 격렬했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끌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1951년 5월 초 임진강을 도하한 그의 부대는 경기도 문산을 거쳐 파주에서 국군과 마주쳤다. 멀리 남쪽으로 삼각산이 바라보이는 지점이었다.
『5월20일 새벽부터 국군의 포격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겁니다. 저는 얼마나 피곤했던지 그 와중에도 참호에서 그만 잠이 깜박 들어버렸는데 잠에서 깨보니 사방이 조용하더군요. 전날만 하더라도 나무가 무성하던 나지막한 야산이 몇시간 사이에 벌거벗은 민둥산으로 바뀌어 있는 겁니다. 그만큼 포격이 심했던 거죠. 눈앞에 보이는 고지에는 철모를 쓴 군인들이 보였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부대는 철모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군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원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북한에서 성분 불량자로 찍혀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귀순하려고, 인민군들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국군이 살포한 삐라도 한 장 간직하고 있었다.
물론 국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는 교육은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설마 죽이겠느냐」라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에서 그는 얼마 전부터 탈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틈을 이용해 金씨는 하얀 깃발을 단 작대기를 쳐들고 국군 쪽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를 향해 뒤에서 인민군의 총격이 가해지고 국군 쪽에서는 탈출을 엄호하는 사격으로 잠시 총격전이 벌어졌다. 5월경이라 새파랗게 핀 보리밭을 달리던 그는 끝내 뒤에서 날아온 총탄에 오른쪽 가슴을 맞지만 땅바닥을 기다시피하여 국군이 있는 쪽으로 넘어갔다.
『죄인인 우리야…』
『잠시 뒤에 국군 병사 둘이 나타나 피투성이가 된 저를 보더니 안되겠다는 듯이 「네 발로 걸어가지 못하면 쏴 버리겠다」 라고 하더군요. 가슴에 총을 맞은 탓에 이미 입으로 시커먼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려고 정말 죽을 힘을 다해 걸어갔습니다. 1백m도 안되는 나지막한 야산을 올라가는데 몇 번이나 쓰러질 정도였으니까요. 오로지 살겠다는 일념으로 올라갔습니다. 국군 장교 앞으로 끌려갔는데 갑자기 고향을 물어보더군요. 그제서야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일 거라면 굳이 고향 같은 건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金씨는 귀순을 한 점이 참작이 된 탓인지 서울로 후송되었다. 영등포에 도착한 그는 간단한 심사를 받고 곧 수원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때까지 인민군 복장 그대로였다.
『교실 바닥에 창가 쪽으로 매트리스를 깔아 두었는데 맞은편에는 국군 부상병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부상을 당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국군 병사들이 우리 인민군 병사들을 보더니만 원수들이 왔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국군 부상병으로서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만 하더라도 총을 겨누고 싸웠고 또 자신들을 불구의 몸으로 만든 인민군 병사들이 같은 병실에서 똑같이 치료를 받고 있으니까요. 죄인인 우리야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죠. 저도 화장실에 갔다오다가 국군병사에게 발길질을 당했습니다.
그 다음날은 오른쪽 다리가 잘려나간 병사가 맞은편에 있는 우리를 향해 대검을 던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심각하다고 파악한 군의관이 와서 「모두들 잘 들어라. 우리는 한 민족 한 형제다. 비록 저들은 얼마전만 하더라도 우리와 싸웠던 인민군들이지만 지금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총알받이로 강제로 끌려나온 것 뿐이다. 우리는 저들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유를 찾아 용감히 귀순했기 때문이다」라고 연설을 하더군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그날 이후 우리와 국군 사이에는 위생병이 보초를 섰습니다』
金씨는 며칠 후 국군 부상병들과 함께 대구 삼덕 초등학교에 설치된 27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수원에서 자기들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던 국군 부상병들과 친해졌다.
『자주 얼굴을 대하다보니 서로 인사도 하게 되고 때로는 국군 부상병들이 우리 인민군 부상병들이 있는 병실로 놀러오기도 했습니다. 화제는 주로 어느 전선에서 어느 부대랑 싸웠냐는 거죠. 가족이 면회를 온 국군 부상병들은 음식물과 과일들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한때 국군과 인민군으로 갈라져 싸웠던 사람들이 함께 치료를 받으면서 화해를 해나가는 과정은 민족의 동일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강조해주는 부분이다.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기는 했지만 앞, 뒤 가슴의 갈비뼈를 하나도 스치지 않았습니다. 엑스레이를 검토하고 난 군의관도 천우신조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2개월 반 정도 지나니까 가슴의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되더군요.
그 무렵 우리들에게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누군가가 전쟁은 곧 국군의 승리로 끝나니까 고향으로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 좋은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곳에 가면 고향 친구들도 많이 만날 수 있다기에 저는 그곳이 포로수용소라고는 차마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저는 포로로 잡힌 게 아니고 귀순한 거니까 다르게 대우한다고 순진하게만 받아들인 거죠』
대구에서 트럭을 탄 金씨가 도착한 곳은 부산 동래에 있는 포로수용소였다. 그때가 1951년 8월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된다. 귀순한 사람과 포로로 잡힌 인민군을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함께 취급한 포로처리 과정은 그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親共포로와 反共포로 사이의 유혈극이라는 불씨로 남게 되었다. 아마 귀순병과 포로를 처음부터 구별해서 처리했다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의 혼란은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金씨는 親共 일색이었던 73 포로수용소에서 우여곡절 끝에 빠져 나와 反共 포로수용소인 96 포로수용소로 옮긴다. 반공포로 석방 때 金씨는 철조망을 끊고 탈출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던 남쪽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金씨와는 달리 南도 北도 선택하지 못하고 제3국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최인훈의 소설 「廣場(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바로 그들의 모델이다. 소설 속에서 현해탄에 투신자살하는 이명준과는 달리 그들은 살아남았다.
필자는 몇 년 전 某(모) 방송국의 초청으로 귀국한 그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신의주가 고향이라는 황덕림(브라질 거주)씨는 일제 때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고향을 떠난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해 해방이 될 때까지 산해관 인근 농촌에서 살았다. 해방이 되자 열여덟의 나이로 조선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가 소속된 부대는 중국 인민해방군 166師였다.
『무슨 이념 때문이라기보다는 군대에 들어가면 최소한 배고픔만은 벗어날 줄 알았기 때문이죠』
이후 黃씨가 속한 중국인민해방군 166師는 國共내전을 치르고 북한으로 들어와 인민군 6사단으로 탈바꿈했다. 6·25 전쟁 초기 개성을 거쳐 마산을 점령하기 위해 미군과 공방전을 펼치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기는 바람에 黃씨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1950년 11월, 전투에 염증을 느낀 黃씨는 부대를 이탈해 귀순의 형태로 경찰에 체포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지막지한 폭력과 거제도 포로수용소 行(행)이었다.
『친공, 반공 양쪽에 의해 희생당한 포로들의 시체를 매장하는 작업에 밤마다 동원되었습니다. 제 유일한 목표는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했던 남쪽. 하지만 포로수용소 안에서 밤마다 벌어지는 테러를 목격하면서 黃씨는 남쪽마저도 자신이 선택할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절망했다. 南과 北,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는 판문점 근처의 중립국 수용소로 이송되고 그곳에서 우연하게 南도 北도 아닌 제3국으로 갈 수 있다는 소문을 접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택했다.
『6·25를 절대 잊지 말자』
살아온 인생역정과 체험은 개인에 따라서 조금씩 달랐지만 인민군 참전자들이 공통적으로 얘기하고 싶어했던 것은 6·25와 같은 전쟁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崔泰煥씨는 『우리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전쟁을 체험한 세대로서 어떠한 이념이나 명분을 가지고 있더라도 전쟁을 통한 문제해결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5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외세에 의해 빚어진 조국분단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 민족 모두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6·25 전쟁으로부터 빚어진 서로의 怨恨(원한)을 용서합시다. 대신 悲劇(비극)의 6·25를 절대로 잊지는 맙시다』
崔씨의 얘기는 결국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을 역사의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6·25 전쟁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인민군 참전자들. 북쪽에 가족을 남겨둔 채 남쪽에 남았던 그들 대부분은 남북화해 무드에 발맞추어 시작된 남북 이산가족찾기에도 신청서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北에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들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포성은 이미 그친 지 오래지만 인민군 출신들 중 몇몇은 아직도 南과 北, 양쪽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한때 인민군이었다는 사실을 멍에로 안고 살아가는 그들은 남북분단의 또다른 희생자였다. 평화적인 통일만이 그들의 가슴에 맺힌 恨(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