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프로의 세계’다. 모사드처럼 작지만 강한 조직 되려면 ‘정보 프로’를 길러야
⊙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安危를 위해선 禁忌가 없고 못할 일이 없다는 철두철미한 조직 윤리로 무장
⊙ 국정원은 정무 보조기관의 이미지 시급히 탈피, 안보 중추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李炳浩 울산大 초빙교수
⊙ 1940년 출생.
⊙ 陸士 졸업. 미국 조지타운大 안보학 석사.
⊙ 駐美대사관 참사관·공사,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 駐말레이시아 대사,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역임.
⊙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安危를 위해선 禁忌가 없고 못할 일이 없다는 철두철미한 조직 윤리로 무장
⊙ 국정원은 정무 보조기관의 이미지 시급히 탈피, 안보 중추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李炳浩 울산大 초빙교수
⊙ 1940년 출생.
⊙ 陸士 졸업. 미국 조지타운大 안보학 석사.
⊙ 駐美대사관 참사관·공사,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 駐말레이시아 대사,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역임.
2007년 9월 5일 이스라엘은 시리아가 북한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건설 중이던 핵시설을 폭격, 파괴했다. 언제나 그랬듯 이스라엘의 조치는 빠르고 단호했다.
이스라엘 對外(대외) 정보기관 ‘모사드’는 런던의 한 호텔에 투숙 중이던 시리아 고위 관료의 ‘노트북 컴퓨터’에서 시리아 핵시설 정보를 빼냈다. 호텔 방에 몰래 침투해 노트북에 해킹 장치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 정보가 결정적 단서가 됐고, 이후 추적 과정을 통해 ‘이란-시리아-북한 核(핵) 커넥션’이 확인되면서 ‘과수원(Operation Orchard)’이라 명명된 핵시설 폭격작전이 그날 밤 11시50분 감행된 것이다.
이 사례 외에도 모사드의 활약상과 관련된 逸話(일화)는 수없이 많다. 이런 일화들은 모사드가 현존하는 세계 정보기관 중 가장 뛰어난 기관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모사드는 아주 특별한 정보기관이다. ‘키돈(Kidon)’이라 알려진 전문 암살단을 공식적으로 운영할 정도로 그 운영이 유별나다. 모사드가 이처럼 독특하면서도 뛰어난 정보기관이 된 것은 이스라엘이 처한 절체절명의 안보 환경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사면초가적 안보상황에 놓여 있다. 熱戰(열전)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 자살폭탄테러가 터질지 모르는 치열한 ‘저강도 전쟁(Low Intensity Conflict)’이 일상이 된 나라다. 전문 암살단의 운영은 이런 절박한 안보 환경의 소산이다. 危害(위해) 인물을 사전에 제거하는 ‘이스라엘식 사전 예방공격(Preemptive Strike)’은 오래전부터 모사드의 주 임무 중 하나였다.
시리아 핵시설 폭격에 대한 보복 방안을 강구하던 시리아 안보담당 총책 ‘술레이만’은 2008년 8월 1일 지중해 해안에서 해수욕을 즐기던 중 요트를 타고 나타난 저격병에 의해 살해됐다. 모사드의 ‘키돈’이 감행한 ‘예방공격’의 한 사례다.
이 밖에도 모사드가 감행한 암살사건의 리스트는 길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검은 9월단(Black September) 테러리스트’를 10년 넘게 모사드가 끝까지 추적, 보복 살해한 일화는 전설이다. 그중 미국 CIA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감수하면서 감행한 사건도 포함돼 있다.
‘붉은 왕자’ 살라메 암살작전
1973년 수단 주재 미국대사가 ‘검은 9월단’ 테러리스트에 의해 살해당했다. ‘검은 9월단’은 당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운영하는 테러 조직이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아라파트’와 비밀리에 밀약을 맺었다. 당시 CIA 차장인 버넌 월터스가 1973년 11월 3일 아라파트를 만나 그로부터 “PLO가 미국인에 대한 테러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그 이후 미국은 이 밀약대로 PLO 테러를 걱정하지 않게 됐고, PLO로부터 많은 중동지역 테러 정보를 얻어 미국인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필요하면 ‘敵(적)’이나 ‘惡(악)’과도 악수할 수 있다는 비정한 검은 정보거래가 CIA와 PLO 간에 이뤄졌던 것이다. 당시 아라파트는 美(미) CIA와의 연락책으로 ‘붉은 왕자(Red Prince)’라는 별칭을 가진 알리 하산 살라메를 지명했다.
살라메는 뮌헨올림픽 테러사건과 수단 미국대사 암살을 배후 지휘한 ‘검은 9월단’의 리더로서 오래전부터 모사드의 제거 대상이었다. 뮌헨사건 직후 1973년 노르웨이의 한 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숨어 지내던 살라메는 모사드의 암살 시도를 간신히 모면했다.
이런 살라메가 미 CIA 본부건물에 초청받아 드나드는 상황에 모사드는 당연히 분노했고, CIA 측에 살라메와의 접촉을 일절 차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CIA 입장에서는 이를 용인할 수 없었다. 그만큼 살라메의 정보적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수년간 기회를 노리던 모사드는 1979년 전설적인 모사드 공작 책임자인 라피 에이탄의 지휘하에 살라메를 폭탄으로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모사드와 CIA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고, 그 여파는 상당기간 지속됐다.
이 사례는 이스라엘의 安危(안위)를 위해선 禁忌(금기)가 없고 못 할 일이 없다는 모사드의 철두철미한 조직 윤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모사드의 모토는 ‘첫째도 이스라엘, 마지막도 이스라엘, 항상 이스라엘(Israel the first, Israel the last, Israel always)’이다. 이 모토는 모사드의 정보공작활동을 지배하는 절대적 가치다. 이 정신에 입각해 모사드는 상대가 누구든 필요하면 손잡고, 필요 없으면 누구든 내치는 비정한 ‘프로 정보기관’의 典型(전형)으로 化(화)했다.
교황 바오로 2세 저격범의 배후 정확히 밝혀내
그간 모사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저술한 영국 작가 고든 토머스는 2009년 자신이 1996년에 쓴 <모사드의 비밀역사> (The Secret History of Mossad)를 업데이트한 최신 개정판을 냈다. 667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 속에는 어느 첩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모사드의 ‘에피소드’들이 수록돼 있다.
이 에피소드들은 모사드의 활동 범위가 全(전) 세계적이며, 활동 내용도 전방위적으로 다양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사드의 정보망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유대계 협조자 망을 이용, 세계 주요 국가를 거의 다 커버하고 있다. 또 이스라엘의 안위나 국익에 관한 사항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전방위적으로 활동한다. 그 사례를 두 가지만 들어보자.
1984년 나이지리아에서 쿠데타가 발생, 부하리 육군 소장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스라엘은 석유수입의 60%를 나이지리아에 의존하고 있어 새 정권으로부터 석유수입을 보장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당시 모사드 부장인 아드머니가 급거 나이지리아로 날아가 부하리와 은밀한 거래를 했다.
석유수출 대가로 부하리가 내세운 조건은 석유대금 수백만 달러를 횡령하고 해외로 잠적한 前(전) 나이지리아 교통부 장관 디코를 찾아 나이지리아로 송환하는 것이었다. 모사드 정보망은 런던에 숨어 있는 디코를 찾아냈고 나이지리아 정보부 요원들과 함께 디코를 납치, 나이지리아로 송환했다.
또 하나의 사례는 바티칸 교황청과 관련된 모사드의 활동 사례다. 이스라엘과 바티칸 교황청은 오랫동안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교관계 수립을 바라는 이스라엘의 요청은 바티칸에 의해 계속 거부당했다. 바티칸 내부에 포진하고 있는 일부 ‘反(반)이스라엘’ 세력들은 가자 지구와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1981년 5월 31일 聖(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은 총격을 받아 복부에 총탄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터키인 저격범 아카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됐다. 문제는 암살의 배후였다. CIA는 배후가 KGB일 것이라고 보고 이를 교황청에 주입시켜 놓고 있었다.
그러나 모사드의 정보망은 아카가 親(친)이란계 테러조직의 일원이며, 이란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교황 테러를 준비해 온 것을 밝혀냈다. 모사드는 이 정보가 교황청의 신뢰를 회복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교황의 측근을 통해 이 정보를 교황에게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CIA보다 더 정확한 모사드 정보
1983년 12월 23일 교황은 범인을 직접 만나 그의 죄를 용서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범인 아카로부터 모사드의 정보가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교황의 태도는 현격히 순화됐고, 1993년 12월 교황은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허용했다.
이 사례들은 모사드가 자신의 정보 역량을 어떤 발상을 가지고 어떻게 창의적으로 사용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모사드가 얼마나 기민하고 단호한 조직인가도 확인할 수 있다. 숨어 있는 디코를 찾아 납치하는 것은 영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위험한 공작이었다. 그러나 리스크를 감수할 정도로 모사드는 단호하고 자신에 차 있었다.
교황 암살 미수범에 대한 세계 최강 CIA의 판단을 뒤집을 정도로 모사드의 정보력은 뛰어나다. 그리고 그 정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최상인가 하는 판단 측면에서도 창의적이고 치밀하다.
이런 정보 운영의 탁월성을 고려할 때 모사드가 現存(현존)하는 세계 정보기관 중 가장 뛰어난 기관이라는 데 異論(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사드가 그토록 유능한 기관이 된 것일까? 답은 간명하다. 모사드가 직면한 절박한 안보와 정보환경은 모사드가 유능하게 활동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결정적 배경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적 요인이 전부가 아니다. 이는 ‘필요조건’일 뿐 모사드의 탁월성을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 충분조건을 마련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과 모사드의 역대 부장들이었다.
이들이 모사드에 대해 취한 조치들은 魔法(마법)이나 秘法(비법)이 아니었다. 이들은 정보기관 운영의 ‘기본’에 충실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적 정보 운영의 원칙과 논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했을 뿐이다.
‘정치가 정보기관 운영을 오염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 ‘부장을 자주 바꿔 리더십의 안정을 해쳐선 안된다’는 상식, ‘정보기관이 관료조직화되면 정보효율을 기할 수 없다’는 운영 마인드, ‘정보 프로를 중시하고 이들을 한가족으로 돌보고 뭉치게 해야 요원들의 진정한 헌신을 도모할 수 있다’는 믿음, 이런 요소들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쓴 훌륭한 정보기관을 만드는 레시피(조리비법)였고 이들은 이 레시피를 철저히 실천에 옮겨 체질화시켰을 뿐이다.
모사드 책임자 임기 ‘평균 5년 이상’
그렇다면 우리의 국정원은 어떤가? 모사드에 적용했던 좋은 정보기관 만드는 접근방법이 제대로 적용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국정원 운영 실태를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모사드가 중시해 온 정보운영의 기초 논리와 상식이 존중되기는커녕 오히려 무시돼 온 것이 국정원 운영의 실상이다.
1962년 모사드도 정치적 사건에 휘말렸다. 당시 수상인 벤 구리온은 유대계 원리주의자들로부터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 압력은 수상직을 위협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8세 소년 실종사건이 발생했다. 유대교 원리주의자였던 친할아버지가 손자를 원리주의자로 교육시키기 위해 아들 몰래 손자를 빼돌린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더욱 곤경에 빠진 벤 구리온 수상은 모사드 부장인 아서 하렐을 불러 실종소년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하렐 부장은 “그것은 경찰이 할 일이지 모사드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거절했지만 ‘수상의 명령’이라는 강한 압박에 결국 승복했다.
모사드는 특수팀을 조직, 조사 착수 8개월 만에 뉴욕에서 실종소년을 찾아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모사드의 정보력을 남용했다는 정치적 비판을 야기했고, 결국 11년간 부장직을 수행한 하렐의 낙마로 이어졌다.
후임 메이어 아미트 부장의 부임 일성은 “모사드는 앞으로 실종소년을 수색하는 일과 같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부당한 정치적 간섭도 절대 받지 않을 것이다”였다.
모사드의 임무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직 국가 안위 문제에만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원칙의 재천명이었다. 이 원칙은 그 이후 수많은 이스라엘 정치지도자와 모사드 부장들에 의해 철저히 지켜졌고, 이것이 오늘날의 모사드가 ‘프로 정보기관’으로 우뚝 선 원동력이 됐다.
사실 우리 정보기관의 관행으로 보면 실종소년을 찾는 일을 정보기관 능력의 남용으로 보는 비판 자체를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대통령의 지시에 정보 책임자가 토를 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모사드는 우리와 달리 과민할 정도로 정치를 경계하고 정보기관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치열했다.
모사드의 정치적 독립성이 완전 정착됐음은 모사드 부장의 재임 기간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1951년에 창설된 모사드는 半(반)세기를 넘는 동안 10명의 부장을 배출했다. 대부분 재직기간이 5년을 넘는다. 현 부장인 다간도 2002년부터 지금까지 7년째 재직 중이다. 이를 보면 정치의 부침에 관계없이 모사드는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에 예속된 국정원
국정원의 경우는 극히 대조적이다. 과거에도 우리 정보기관 책임자는 비교적 자주 바뀌었지만, 지난 10여 년간 국정원장의 교체가 특히 잦았다. 金大中(김대중)·盧武鉉(노무현) 정부하에서는 6명의 원장이 재직했으니까 평균 재임기간은 1년이 조금 넘는 정도다. 李明博(이명박) 정부에서도 두 번째 원장이 재직 중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왜 그럴까? 이는 국정원 운영에 정치가 여전히 강력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국정원을 정치로부터 독립시켜 운영해야 한다는 당위적 레토릭은 우리 사회에 흔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한 원인을 늘 국정원 자체에서 찾아왔다.
이명박 정부 초기의 일이다. 金成浩(김성호) 국정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원을 방문했을 때, 전 직원으로부터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 제출했다. 이는 사태의 본질을 잘못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과시행위였을 뿐이다.
국정원이 정치문제에 직접 개입했던 과거와 같은 관행은 이제 더 이상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과거 관행과는 차원을 달리하지만 국정원 운영에 정치적 고려가 아직도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국정원을 정치적 성격의 기관으로 보는 과거 인식의 殘影(잔영)이 아직도 우리 사회 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정원은 다른 선진 정보기관과는 달리 국내외 정보가 합쳐져 있는 정보기관이다. 전통적으로 국내 정보적 시각이 늘 해외 부문을 압도해 왔다. 그 전력은 1960년대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유래돼 온 것이다.
1960년대는 모든 것이 안보로 직결되는 ‘토털’ 안보의 시대였다. 국력이 북한에 비해 열세였고 ‘죽기 아니면 살기’式(식)의 치열한 체제경쟁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국가 안보 개념을 광의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북한보다 나아야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순수한 정보기관이라기보다 대통령의 통치를 돕는 통치기구의 일환이라는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대통령의 통치에 직접 도움이 되는 국내 분야가 보다 중요시됐고, 이 때문에 국정원을 안보기관이라기보다는 ‘정무기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명박 정부 정권 교체시 인수 위원회가 국정원을 정무 분과 위원회 소속으로 업무 분장시킨 것이 이를 방증한다.
문제는 이런 인식이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 국정원 관련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힘이 부쩍 실린 국정원’이라는 타이틀로 국정원 보고서가 청와대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고, 심지어 이 대통령이 中道(중도) 실용노선으로 국정 방향을 전환한 데도 국정원의 기여가 있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경험 없어도 아무나 해도 되는 분야’로 전락
이스라엘을 비롯해 어느 선진국에서도 정보기관에 관해 이런 유의 기사가 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들 국가에서 정보기관은 ‘힘 있는 기관’이 아니다. 국가 안위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기관일 뿐이다.
국정원장이 자주 교체되는 것도 같은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발탁된 원장들의 면모를 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대부분 대통령과 가깝다는 정치적 이유가 유일한 자격기준이다. 정보가 ‘프로의 세계’라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검찰을 비롯한 여러 부서에서 행정경험이 있다면 국정원장으로서 대통령 정무 보좌에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 원장 인사의 주 고려 요소인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정보는 ‘경험이 없어도 아무나 해도 되는’ 분야로 전락했다. 이런 현상은 선진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후진국적 현상이다.
특히 원장이 교체될 때마다 거의 전원이, 부임하자마자 나름 개혁을 내세우고 인사 및 조직개편을 단행해 왔다. 전임 원장이 시행한 인사와 개편은 후임 원장에 의해 다시 개편된 것이 비일비재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에 조직 개편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국정원은 늘 개혁 중인 상태에 있다.
이런 연유로 한 주요 국가에 주재하는 국정원 정보 책임자가 대사의 임기 3년 동안에 3명이 바뀌는 진풍경도 실제 일어났다. 이는 그 나라 정보기관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국정원의 후진성을 스스로 드러내 나라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직원들의 사기가 제대로 유지될 리 없다. 김성호 전임 원장이 국정원의 모토를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바꾸었다. 언제 개편과 인사 교체가 있을지 모르는, 전전긍긍하는 침체된 분위기하에서 이 모토가 바라는 ‘진정한 헌신’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은 모든 분야에서 선진화를 이뤄내는 것이 자신의 ‘국정 의지’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국정원도 이 선진화 의지에 예외지대일 수 없다. 국정원이 현재의 방식대로 간다면 선진국형 정보기관이 될 수 없음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사드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 모사드는 정보기관으로서 정체성을 늘 중시해 왔다. 그렇다면 국정원의 선진화 작업도 국정원이 정보기관으로서 어떤 일을 집중적으로 해야 할 것이냐는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성찰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보기관은 ‘제1의 국가방위선’
정보기관은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일을 하는 전문조직이다. 모사드 요원처럼 때로는 호텔방에 침입해 기밀을 훔쳐내고, 때로는 남의 통화 내용을 몰래 감청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 통상 비용이 많이 드는 활동이기도 하다.
이런 특별한 정보 활동들은 아무 데나 쓸 수 없고 당연히 꼭 필요한 데 써야 한다. 꼭 필요한 곳이 국가안보 분야라는 점은 전 세계 정보기관의 공통된 인식이다. 그래서 모두 정보기관을 ‘제일의 국가 방위선(the first line of defence)’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정보기관 운영의 정체성이고 기초적 원칙이다.
그간 국정원의 운영은 이 기초 원칙을 의식하지 않고 운영해 온 측면이 강하다. 이 원칙에 비춰 보면 국정원은 대통령이 사용하는 국가보위의 주요 수단으로서의 임무와 기능만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국정원의 대통령 보좌는 당연히 국가 안보업무에 집중돼야 한다.
예전처럼 포괄적 안보개념을 적용, 국정 전반에 걸쳐 대통령을 보좌해야 한다는 의식은 이 원칙에도 맞지 않고 시대착오적이다.
이 원칙이 경시돼 왔기 때문에 그간 국정원의 업무 초점도 지속적으로 흔들려 왔다.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말하면 그 정책 쪽으로, 경제의 중요성을 말하면 경제 쪽으로 정보활동 중심이 이리저리 흔들려 왔다. 이래 가지고는 선진 정보기관이 될 수 없다.
국정원은 정무 보조기관이라는 이미지를 시급히 탈피해야 한다. 그리고 안보 중추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것이 국정원 선진화를 위한 선결적 명제다.
국정원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선진화 과제는 어떻게 유능한 정보 스페셜리스트를 많이 육성하고 이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느냐다.
정보 취급 업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아마추어의 세계’가 아니다. 고도의 경험과 전문성, 그리고 헌신을 필요로 하는 ‘프로의 세계’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그간 국정원의 운영실상을 보면 이 기초적 상식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정부 부처 요원을 간부로 임용해 활용하는 편의적 운영도 빈번했다. 이처럼 정보 전문성이 경시되는 풍토하에서는 국정원의 선진화는 요원하다.
국정원은 메이저리그에 못 끼어
세계 정보기관의 움직임을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로 나눠 볼 수 있다. 미국 CIA, 영국 MI-6, 모사드, 프랑스 DGSE 등 선진 정보기관들은 주요 메이저리거들이다. 이들끼리의 협력은 활발하다. 국제 테러리즘을 놓고 전개되는 이들의 협력은 공동 대처 차원이고 상호 숨김이 없을 정도다. 책임자끼리 자주 만나는 것은 물론, 전화 협의도 잦다.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가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한 데에는 CIA, MI-6, 그리고 모사드 간의 긴밀한 정보협력이 크게 기여했다.
아마추어식으로 운영되는 국정원이 이들 대열 속에 낄 수 없음은 자명하다. 국정원도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 있는 정보기관이 돼야 한다. 이 대열의 합류는 국정원의 선진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의 실력은 두말할 필요 없이 요원의 실력으로 좌우된다. 각 정보 분야별로 탁월한 스페셜리스트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가 정보기관 경쟁력의 요체다. 병원의 경쟁력이 각 분야별 名醫(명의)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국정원의 현재 인력 운영방식으로는 유능한 정보 전문인력을 제대로 육성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계급 정년이 되면 기수별로 일괄 퇴직해야 하는 기계적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 요원이 어떤 실력과 경험을 지녔느냐는 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유능한 요원이라도 때가 되면 후진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명분으로 퇴직해야 한다. 정보 전문성을 소중히 여기기보다는 인사평등의 가치를 우선시한다. 이런 풍토는 다른 선진 정보기관에선 찾아볼 수 없다.
모사드의 전설적 인물 에이탄은 모사드의 공작 책임자로 거의 20년을 근무했다. 7년간 CIA 부장직을 수행한 조지 테닛은 이미 은퇴한 전임 공작 차장보 잭 다우닝을 다시 공작 차장보로 기용했다. 다른 관료 조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사의 탄력적 운영의 사례들이다. 이러한 정보기관다운 탄력적 인사운영 방식을 배제하면 훌륭한 정보 요원을 양성할 수 없다.
국정원은 현재의 인력운영 방식을 선진국형으로 탈바꿈하고 원장이 교체돼도 일관되게 실행에 옮겨 정착시켜야 한다. 그래서 직원들이 자신의 경력 관리 패턴을 인지하고, 필요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쌓게 만들어야 한다.
특히 해외분야 정보 전문인력의 양성을 위한 노력은 더욱 증진돼야 한다. 최근 외교부는 외교아카데미를 설립, 외교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해외 정보요원은 훌륭한 외교관의 자질과 동시에 정보요원으로서의 전문 지식과 경험을 고루 갖춰야 한다. 그만큼 탁월한 해외 정보요원의 양성은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작지만 강한 조직’되려면 ‘프로’를 길러야
모사드는 우수한 인력을 뽑아 철저한 교육을 통해 인력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신참 모사드 요원은 3년간 교육과정을 거쳐야 한다. 모사드 역대 부장 중 1963~1968년 모사드를 지휘했던 아미트 부장이 가장 존경받고 있다. 현 모사드의 교육과정과 인력 양성 프로그램은 그가 기초를 닦았고, 현재까지 큰 변화 없이 지속되고 있다.
그는 모사드는 경직된 관료주의가 통하지 않는, 작지만 기민하게 행동하는 정보기관이 돼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모사드를 CIA나 KGB 같은 큰 조직으로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를 일축했다. 그래서 1200명 규모의 작은 모사드를 만들었다.
반세기가 지난 현재의 모사드는 300명 정도만 증원된 1500여 명 규모로, 여전히 소규모다. 작지만 높은 사명 의식과 철저한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조직은 큰 규모의 정보기관보다 훨씬 유능할 수 있다는 아미트의 이상은 모사드의 현실이 됐다.
국정원 해외분야는 모사드와 같은 역할을 하는 부서다. 언젠가는 모사드에 필적할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 방식으로는 곤란하다. 특단의 발상과 조치가 있어야 한다.
최근 ‘현대 정보는 국내외의 구분이 없다. 이를 통합·운영해야 정보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허황된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해외근무 경험이 일천하고 훈련도 미흡한 국내 정보부서 요원이 해외에 파견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시급히 시정돼야 한다. 해외 정보분야의 전문성이 철저히 존중되지 않는다면 국정원의 장래는 암울하다.
마지막으로 국정원의 선진화는 국정원 자체의 노력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국민적 이해와 성원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정치권은 이제 국정원을 놓아 주어야 한다. 그간 국정원은 정쟁의 편리한 타깃이었다. 국정원이 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정치적 시각에서 불순하게 보고 견제하는 것이 능사처럼 여겨져 왔다. 국정원의 과거 이미지가 나쁘니 계속 흔드는 것이 정치적 득이 된다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이는 과거지향적 사고다.
이제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사고에서 벗어나 ‘무엇을 하도록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미래지향적 사고로 변모해야 한다. 국정원의 강화가 바로 국가 안보의 강화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통신비밀보호법도 정쟁의 차원으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국정원에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주는 것은 국민적 바람일 것이고, 그래서 정치권이 마땅히 해야 할 책무다.
국정원의 선진화를 위해 모사드를 벤치마킹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했지만 무조건 모사드 방식을 따르자는 의미는 아니다. 국정원과 모사드의 처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안보환경도 다르고, 감당해야 할 정보요구도, 그 기능도 다르다.
그러나 정보 논리와 상식만이 원칙이 돼야 한다는 當爲(당위)에는 차이가 없다. 그런 측면에서 모사드가 적용해 온 운영방식을 우리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준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 국정원이 직면한 안보환경은 국정원의 시급한 선진화를 요구하고 있다. 북한의 정보적 도전에 대처하는 것이 국정원의 제1의 당면한 책무다. 그러나 그 외에도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면 국정원의 정보책무는 실로 막중하다. 한반도의 어려운 환경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국가적 위기를 몰고 올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정보운영의 기본에 충실하라
국가 위기를 잉태한 위험요소들은 현재, 어디서나 늘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이 요소들은 평소엔 잘 안 보인다. 또 보통사람들은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국가가 위기로 치닫게 되는 요인으로 자란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감시하는 국가적 기능은 꼭 있어야 한다. 이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 바로 국정원이다.
몇 년 전 유명한 미국의 컬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9·11사태 이후 신설된 미국의 국토안보부를 두고 “미국 내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 잘하는 기준이 되는 유일한 정부 부서”라고 썼다. 국토부가 가시적 성과로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필수적 국가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다.
국정원도 마찬가지다. 국정원도 국가안위를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기능은 반드시 제대로 작동돼야 한다. 때문에 국정원의 선진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국정원은 하루빨리 제대로 된 진정한 선진화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이를 위해 정보 원칙과 상식에 맞지 않는 관행은 과감히 떨쳐야 한다. 모사드가 그래 온 것처럼 정보 운영의 ‘기본’을 충실히 실천해 나갈 때 선진화의 길은 자동으로 열리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對外(대외) 정보기관 ‘모사드’는 런던의 한 호텔에 투숙 중이던 시리아 고위 관료의 ‘노트북 컴퓨터’에서 시리아 핵시설 정보를 빼냈다. 호텔 방에 몰래 침투해 노트북에 해킹 장치를 설치했던 것이다.
이 정보가 결정적 단서가 됐고, 이후 추적 과정을 통해 ‘이란-시리아-북한 核(핵) 커넥션’이 확인되면서 ‘과수원(Operation Orchard)’이라 명명된 핵시설 폭격작전이 그날 밤 11시50분 감행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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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드 상징표지. |
모사드는 아주 특별한 정보기관이다. ‘키돈(Kidon)’이라 알려진 전문 암살단을 공식적으로 운영할 정도로 그 운영이 유별나다. 모사드가 이처럼 독특하면서도 뛰어난 정보기관이 된 것은 이스라엘이 처한 절체절명의 안보 환경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사면초가적 안보상황에 놓여 있다. 熱戰(열전)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 자살폭탄테러가 터질지 모르는 치열한 ‘저강도 전쟁(Low Intensity Conflict)’이 일상이 된 나라다. 전문 암살단의 운영은 이런 절박한 안보 환경의 소산이다. 危害(위해) 인물을 사전에 제거하는 ‘이스라엘식 사전 예방공격(Preemptive Strike)’은 오래전부터 모사드의 주 임무 중 하나였다.
시리아 핵시설 폭격에 대한 보복 방안을 강구하던 시리아 안보담당 총책 ‘술레이만’은 2008년 8월 1일 지중해 해안에서 해수욕을 즐기던 중 요트를 타고 나타난 저격병에 의해 살해됐다. 모사드의 ‘키돈’이 감행한 ‘예방공격’의 한 사례다.
이 밖에도 모사드가 감행한 암살사건의 리스트는 길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검은 9월단(Black September) 테러리스트’를 10년 넘게 모사드가 끝까지 추적, 보복 살해한 일화는 전설이다. 그중 미국 CIA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감수하면서 감행한 사건도 포함돼 있다.
‘붉은 왕자’ 살라메 암살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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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드에 의해 암살된 알리 하산 살라메. |
그 이후 미국은 이 밀약대로 PLO 테러를 걱정하지 않게 됐고, PLO로부터 많은 중동지역 테러 정보를 얻어 미국인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필요하면 ‘敵(적)’이나 ‘惡(악)’과도 악수할 수 있다는 비정한 검은 정보거래가 CIA와 PLO 간에 이뤄졌던 것이다. 당시 아라파트는 美(미) CIA와의 연락책으로 ‘붉은 왕자(Red Prince)’라는 별칭을 가진 알리 하산 살라메를 지명했다.
살라메는 뮌헨올림픽 테러사건과 수단 미국대사 암살을 배후 지휘한 ‘검은 9월단’의 리더로서 오래전부터 모사드의 제거 대상이었다. 뮌헨사건 직후 1973년 노르웨이의 한 도시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숨어 지내던 살라메는 모사드의 암살 시도를 간신히 모면했다.
이런 살라메가 미 CIA 본부건물에 초청받아 드나드는 상황에 모사드는 당연히 분노했고, CIA 측에 살라메와의 접촉을 일절 차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CIA 입장에서는 이를 용인할 수 없었다. 그만큼 살라메의 정보적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수년간 기회를 노리던 모사드는 1979년 전설적인 모사드 공작 책임자인 라피 에이탄의 지휘하에 살라메를 폭탄으로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모사드와 CIA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고, 그 여파는 상당기간 지속됐다.
이 사례는 이스라엘의 安危(안위)를 위해선 禁忌(금기)가 없고 못 할 일이 없다는 모사드의 철두철미한 조직 윤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모사드의 모토는 ‘첫째도 이스라엘, 마지막도 이스라엘, 항상 이스라엘(Israel the first, Israel the last, Israel always)’이다. 이 모토는 모사드의 정보공작활동을 지배하는 절대적 가치다. 이 정신에 입각해 모사드는 상대가 누구든 필요하면 손잡고, 필요 없으면 누구든 내치는 비정한 ‘프로 정보기관’의 典型(전형)으로 化(화)했다.
교황 바오로 2세 저격범의 배후 정확히 밝혀내
그간 모사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저술한 영국 작가 고든 토머스는 2009년 자신이 1996년에 쓴 <모사드의 비밀역사> (The Secret History of Mossad)를 업데이트한 최신 개정판을 냈다. 667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 속에는 어느 첩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모사드의 ‘에피소드’들이 수록돼 있다.
이 에피소드들은 모사드의 활동 범위가 全(전) 세계적이며, 활동 내용도 전방위적으로 다양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사드의 정보망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유대계 협조자 망을 이용, 세계 주요 국가를 거의 다 커버하고 있다. 또 이스라엘의 안위나 국익에 관한 사항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전방위적으로 활동한다. 그 사례를 두 가지만 들어보자.
1984년 나이지리아에서 쿠데타가 발생, 부하리 육군 소장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스라엘은 석유수입의 60%를 나이지리아에 의존하고 있어 새 정권으로부터 석유수입을 보장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당시 모사드 부장인 아드머니가 급거 나이지리아로 날아가 부하리와 은밀한 거래를 했다.
석유수출 대가로 부하리가 내세운 조건은 석유대금 수백만 달러를 횡령하고 해외로 잠적한 前(전) 나이지리아 교통부 장관 디코를 찾아 나이지리아로 송환하는 것이었다. 모사드 정보망은 런던에 숨어 있는 디코를 찾아냈고 나이지리아 정보부 요원들과 함께 디코를 납치, 나이지리아로 송환했다.
또 하나의 사례는 바티칸 교황청과 관련된 모사드의 활동 사례다. 이스라엘과 바티칸 교황청은 오랫동안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교관계 수립을 바라는 이스라엘의 요청은 바티칸에 의해 계속 거부당했다. 바티칸 내부에 포진하고 있는 일부 ‘反(반)이스라엘’ 세력들은 가자 지구와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1981년 5월 31일 聖(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은 총격을 받아 복부에 총탄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터키인 저격범 아카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됐다. 문제는 암살의 배후였다. CIA는 배후가 KGB일 것이라고 보고 이를 교황청에 주입시켜 놓고 있었다.
그러나 모사드의 정보망은 아카가 親(친)이란계 테러조직의 일원이며, 이란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교황 테러를 준비해 온 것을 밝혀냈다. 모사드는 이 정보가 교황청의 신뢰를 회복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교황의 측근을 통해 이 정보를 교황에게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CIA보다 더 정확한 모사드 정보
1983년 12월 23일 교황은 범인을 직접 만나 그의 죄를 용서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범인 아카로부터 모사드의 정보가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교황의 태도는 현격히 순화됐고, 1993년 12월 교황은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허용했다.
이 사례들은 모사드가 자신의 정보 역량을 어떤 발상을 가지고 어떻게 창의적으로 사용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모사드가 얼마나 기민하고 단호한 조직인가도 확인할 수 있다. 숨어 있는 디코를 찾아 납치하는 것은 영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위험한 공작이었다. 그러나 리스크를 감수할 정도로 모사드는 단호하고 자신에 차 있었다.
교황 암살 미수범에 대한 세계 최강 CIA의 판단을 뒤집을 정도로 모사드의 정보력은 뛰어나다. 그리고 그 정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최상인가 하는 판단 측면에서도 창의적이고 치밀하다.
이런 정보 운영의 탁월성을 고려할 때 모사드가 現存(현존)하는 세계 정보기관 중 가장 뛰어난 기관이라는 데 異論(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사드가 그토록 유능한 기관이 된 것일까? 답은 간명하다. 모사드가 직면한 절박한 안보와 정보환경은 모사드가 유능하게 활동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결정적 배경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적 요인이 전부가 아니다. 이는 ‘필요조건’일 뿐 모사드의 탁월성을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 충분조건을 마련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과 모사드의 역대 부장들이었다.
이들이 모사드에 대해 취한 조치들은 魔法(마법)이나 秘法(비법)이 아니었다. 이들은 정보기관 운영의 ‘기본’에 충실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적 정보 운영의 원칙과 논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했을 뿐이다.
‘정치가 정보기관 운영을 오염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 ‘부장을 자주 바꿔 리더십의 안정을 해쳐선 안된다’는 상식, ‘정보기관이 관료조직화되면 정보효율을 기할 수 없다’는 운영 마인드, ‘정보 프로를 중시하고 이들을 한가족으로 돌보고 뭉치게 해야 요원들의 진정한 헌신을 도모할 수 있다’는 믿음, 이런 요소들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쓴 훌륭한 정보기관을 만드는 레시피(조리비법)였고 이들은 이 레시피를 철저히 실천에 옮겨 체질화시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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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간 모사드 부장으로 일했던 아서 하렐. |
안타깝게도 국정원 운영 실태를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모사드가 중시해 온 정보운영의 기초 논리와 상식이 존중되기는커녕 오히려 무시돼 온 것이 국정원 운영의 실상이다.
1962년 모사드도 정치적 사건에 휘말렸다. 당시 수상인 벤 구리온은 유대계 원리주의자들로부터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 압력은 수상직을 위협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8세 소년 실종사건이 발생했다. 유대교 원리주의자였던 친할아버지가 손자를 원리주의자로 교육시키기 위해 아들 몰래 손자를 빼돌린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더욱 곤경에 빠진 벤 구리온 수상은 모사드 부장인 아서 하렐을 불러 실종소년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하렐 부장은 “그것은 경찰이 할 일이지 모사드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거절했지만 ‘수상의 명령’이라는 강한 압박에 결국 승복했다.
모사드는 특수팀을 조직, 조사 착수 8개월 만에 뉴욕에서 실종소년을 찾아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모사드의 정보력을 남용했다는 정치적 비판을 야기했고, 결국 11년간 부장직을 수행한 하렐의 낙마로 이어졌다.
후임 메이어 아미트 부장의 부임 일성은 “모사드는 앞으로 실종소년을 수색하는 일과 같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부당한 정치적 간섭도 절대 받지 않을 것이다”였다.
모사드의 임무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직 국가 안위 문제에만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원칙의 재천명이었다. 이 원칙은 그 이후 수많은 이스라엘 정치지도자와 모사드 부장들에 의해 철저히 지켜졌고, 이것이 오늘날의 모사드가 ‘프로 정보기관’으로 우뚝 선 원동력이 됐다.
사실 우리 정보기관의 관행으로 보면 실종소년을 찾는 일을 정보기관 능력의 남용으로 보는 비판 자체를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대통령의 지시에 정보 책임자가 토를 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모사드는 우리와 달리 과민할 정도로 정치를 경계하고 정보기관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치열했다.
모사드의 정치적 독립성이 완전 정착됐음은 모사드 부장의 재임 기간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1951년에 창설된 모사드는 半(반)세기를 넘는 동안 10명의 부장을 배출했다. 대부분 재직기간이 5년을 넘는다. 현 부장인 다간도 2002년부터 지금까지 7년째 재직 중이다. 이를 보면 정치의 부침에 관계없이 모사드는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에 예속된 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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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전 국정원장. |
왜 그럴까? 이는 국정원 운영에 정치가 여전히 강력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국정원을 정치로부터 독립시켜 운영해야 한다는 당위적 레토릭은 우리 사회에 흔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한 원인을 늘 국정원 자체에서 찾아왔다.
이명박 정부 초기의 일이다. 金成浩(김성호) 국정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원을 방문했을 때, 전 직원으로부터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 제출했다. 이는 사태의 본질을 잘못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과시행위였을 뿐이다.
국정원이 정치문제에 직접 개입했던 과거와 같은 관행은 이제 더 이상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과거 관행과는 차원을 달리하지만 국정원 운영에 정치적 고려가 아직도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국정원을 정치적 성격의 기관으로 보는 과거 인식의 殘影(잔영)이 아직도 우리 사회 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국정원은 다른 선진 정보기관과는 달리 국내외 정보가 합쳐져 있는 정보기관이다. 전통적으로 국내 정보적 시각이 늘 해외 부문을 압도해 왔다. 그 전력은 1960년대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유래돼 온 것이다.
1960년대는 모든 것이 안보로 직결되는 ‘토털’ 안보의 시대였다. 국력이 북한에 비해 열세였고 ‘죽기 아니면 살기’式(식)의 치열한 체제경쟁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국가 안보 개념을 광의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북한보다 나아야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순수한 정보기관이라기보다 대통령의 통치를 돕는 통치기구의 일환이라는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대통령의 통치에 직접 도움이 되는 국내 분야가 보다 중요시됐고, 이 때문에 국정원을 안보기관이라기보다는 ‘정무기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명박 정부 정권 교체시 인수 위원회가 국정원을 정무 분과 위원회 소속으로 업무 분장시킨 것이 이를 방증한다.
문제는 이런 인식이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 국정원 관련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힘이 부쩍 실린 국정원’이라는 타이틀로 국정원 보고서가 청와대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고, 심지어 이 대통령이 中道(중도) 실용노선으로 국정 방향을 전환한 데도 국정원의 기여가 있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이스라엘을 비롯해 어느 선진국에서도 정보기관에 관해 이런 유의 기사가 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들 국가에서 정보기관은 ‘힘 있는 기관’이 아니다. 국가 안위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기관일 뿐이다.
국정원장이 자주 교체되는 것도 같은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발탁된 원장들의 면모를 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대부분 대통령과 가깝다는 정치적 이유가 유일한 자격기준이다. 정보가 ‘프로의 세계’라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검찰을 비롯한 여러 부서에서 행정경험이 있다면 국정원장으로서 대통령 정무 보좌에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 원장 인사의 주 고려 요소인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정보는 ‘경험이 없어도 아무나 해도 되는’ 분야로 전락했다. 이런 현상은 선진국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후진국적 현상이다.
특히 원장이 교체될 때마다 거의 전원이, 부임하자마자 나름 개혁을 내세우고 인사 및 조직개편을 단행해 왔다. 전임 원장이 시행한 인사와 개편은 후임 원장에 의해 다시 개편된 것이 비일비재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에 조직 개편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국정원은 늘 개혁 중인 상태에 있다.
이런 연유로 한 주요 국가에 주재하는 국정원 정보 책임자가 대사의 임기 3년 동안에 3명이 바뀌는 진풍경도 실제 일어났다. 이는 그 나라 정보기관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국정원의 후진성을 스스로 드러내 나라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직원들의 사기가 제대로 유지될 리 없다. 김성호 전임 원장이 국정원의 모토를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바꾸었다. 언제 개편과 인사 교체가 있을지 모르는, 전전긍긍하는 침체된 분위기하에서 이 모토가 바라는 ‘진정한 헌신’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은 모든 분야에서 선진화를 이뤄내는 것이 자신의 ‘국정 의지’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국정원도 이 선진화 의지에 예외지대일 수 없다. 국정원이 현재의 방식대로 간다면 선진국형 정보기관이 될 수 없음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사드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 모사드는 정보기관으로서 정체성을 늘 중시해 왔다. 그렇다면 국정원의 선진화 작업도 국정원이 정보기관으로서 어떤 일을 집중적으로 해야 할 것이냐는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성찰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보기관은 ‘제1의 국가방위선’
정보기관은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일을 하는 전문조직이다. 모사드 요원처럼 때로는 호텔방에 침입해 기밀을 훔쳐내고, 때로는 남의 통화 내용을 몰래 감청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또 통상 비용이 많이 드는 활동이기도 하다.
이런 특별한 정보 활동들은 아무 데나 쓸 수 없고 당연히 꼭 필요한 데 써야 한다. 꼭 필요한 곳이 국가안보 분야라는 점은 전 세계 정보기관의 공통된 인식이다. 그래서 모두 정보기관을 ‘제일의 국가 방위선(the first line of defence)’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정보기관 운영의 정체성이고 기초적 원칙이다.
그간 국정원의 운영은 이 기초 원칙을 의식하지 않고 운영해 온 측면이 강하다. 이 원칙에 비춰 보면 국정원은 대통령이 사용하는 국가보위의 주요 수단으로서의 임무와 기능만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국정원의 대통령 보좌는 당연히 국가 안보업무에 집중돼야 한다.
예전처럼 포괄적 안보개념을 적용, 국정 전반에 걸쳐 대통령을 보좌해야 한다는 의식은 이 원칙에도 맞지 않고 시대착오적이다.
이 원칙이 경시돼 왔기 때문에 그간 국정원의 업무 초점도 지속적으로 흔들려 왔다.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말하면 그 정책 쪽으로, 경제의 중요성을 말하면 경제 쪽으로 정보활동 중심이 이리저리 흔들려 왔다. 이래 가지고는 선진 정보기관이 될 수 없다.
국정원은 정무 보조기관이라는 이미지를 시급히 탈피해야 한다. 그리고 안보 중추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것이 국정원 선진화를 위한 선결적 명제다.
국정원이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선진화 과제는 어떻게 유능한 정보 스페셜리스트를 많이 육성하고 이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느냐다.
정보 취급 업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아마추어의 세계’가 아니다. 고도의 경험과 전문성, 그리고 헌신을 필요로 하는 ‘프로의 세계’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그간 국정원의 운영실상을 보면 이 기초적 상식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정부 부처 요원을 간부로 임용해 활용하는 편의적 운영도 빈번했다. 이처럼 정보 전문성이 경시되는 풍토하에서는 국정원의 선진화는 요원하다.
국정원은 메이저리그에 못 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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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드의 전설적인 공작책임자 라피 에이탄. |
아마추어식으로 운영되는 국정원이 이들 대열 속에 낄 수 없음은 자명하다. 국정원도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 있는 정보기관이 돼야 한다. 이 대열의 합류는 국정원의 선진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의 실력은 두말할 필요 없이 요원의 실력으로 좌우된다. 각 정보 분야별로 탁월한 스페셜리스트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가 정보기관 경쟁력의 요체다. 병원의 경쟁력이 각 분야별 名醫(명의)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국정원의 현재 인력 운영방식으로는 유능한 정보 전문인력을 제대로 육성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계급 정년이 되면 기수별로 일괄 퇴직해야 하는 기계적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 요원이 어떤 실력과 경험을 지녔느냐는 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리 유능한 요원이라도 때가 되면 후진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명분으로 퇴직해야 한다. 정보 전문성을 소중히 여기기보다는 인사평등의 가치를 우선시한다. 이런 풍토는 다른 선진 정보기관에선 찾아볼 수 없다.
모사드의 전설적 인물 에이탄은 모사드의 공작 책임자로 거의 20년을 근무했다. 7년간 CIA 부장직을 수행한 조지 테닛은 이미 은퇴한 전임 공작 차장보 잭 다우닝을 다시 공작 차장보로 기용했다. 다른 관료 조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사의 탄력적 운영의 사례들이다. 이러한 정보기관다운 탄력적 인사운영 방식을 배제하면 훌륭한 정보 요원을 양성할 수 없다.
국정원은 현재의 인력운영 방식을 선진국형으로 탈바꿈하고 원장이 교체돼도 일관되게 실행에 옮겨 정착시켜야 한다. 그래서 직원들이 자신의 경력 관리 패턴을 인지하고, 필요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쌓게 만들어야 한다.
특히 해외분야 정보 전문인력의 양성을 위한 노력은 더욱 증진돼야 한다. 최근 외교부는 외교아카데미를 설립, 외교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해외 정보요원은 훌륭한 외교관의 자질과 동시에 정보요원으로서의 전문 지식과 경험을 고루 갖춰야 한다. 그만큼 탁월한 해외 정보요원의 양성은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작지만 강한 조직’되려면 ‘프로’를 길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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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드의 기틀을 닦은 메이어 아미트. |
그는 모사드는 경직된 관료주의가 통하지 않는, 작지만 기민하게 행동하는 정보기관이 돼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모사드를 CIA나 KGB 같은 큰 조직으로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를 일축했다. 그래서 1200명 규모의 작은 모사드를 만들었다.
반세기가 지난 현재의 모사드는 300명 정도만 증원된 1500여 명 규모로, 여전히 소규모다. 작지만 높은 사명 의식과 철저한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조직은 큰 규모의 정보기관보다 훨씬 유능할 수 있다는 아미트의 이상은 모사드의 현실이 됐다.
국정원 해외분야는 모사드와 같은 역할을 하는 부서다. 언젠가는 모사드에 필적할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 방식으로는 곤란하다. 특단의 발상과 조치가 있어야 한다.
최근 ‘현대 정보는 국내외의 구분이 없다. 이를 통합·운영해야 정보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허황된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해외근무 경험이 일천하고 훈련도 미흡한 국내 정보부서 요원이 해외에 파견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시급히 시정돼야 한다. 해외 정보분야의 전문성이 철저히 존중되지 않는다면 국정원의 장래는 암울하다.
마지막으로 국정원의 선진화는 국정원 자체의 노력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국민적 이해와 성원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정치권은 이제 국정원을 놓아 주어야 한다. 그간 국정원은 정쟁의 편리한 타깃이었다. 국정원이 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정치적 시각에서 불순하게 보고 견제하는 것이 능사처럼 여겨져 왔다. 국정원의 과거 이미지가 나쁘니 계속 흔드는 것이 정치적 득이 된다는 계산도 없지 않았다. 이는 과거지향적 사고다.
이제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사고에서 벗어나 ‘무엇을 하도록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미래지향적 사고로 변모해야 한다. 국정원의 강화가 바로 국가 안보의 강화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통신비밀보호법도 정쟁의 차원으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국정원에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주는 것은 국민적 바람일 것이고, 그래서 정치권이 마땅히 해야 할 책무다.
국정원의 선진화를 위해 모사드를 벤치마킹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했지만 무조건 모사드 방식을 따르자는 의미는 아니다. 국정원과 모사드의 처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안보환경도 다르고, 감당해야 할 정보요구도, 그 기능도 다르다.
그러나 정보 논리와 상식만이 원칙이 돼야 한다는 當爲(당위)에는 차이가 없다. 그런 측면에서 모사드가 적용해 온 운영방식을 우리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준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 국정원이 직면한 안보환경은 국정원의 시급한 선진화를 요구하고 있다. 북한의 정보적 도전에 대처하는 것이 국정원의 제1의 당면한 책무다. 그러나 그 외에도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면 국정원의 정보책무는 실로 막중하다. 한반도의 어려운 환경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국가적 위기를 몰고 올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정보운영의 기본에 충실하라
국가 위기를 잉태한 위험요소들은 현재, 어디서나 늘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이 요소들은 평소엔 잘 안 보인다. 또 보통사람들은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국가가 위기로 치닫게 되는 요인으로 자란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감시하는 국가적 기능은 꼭 있어야 한다. 이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이 바로 국정원이다.
몇 년 전 유명한 미국의 컬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9·11사태 이후 신설된 미국의 국토안보부를 두고 “미국 내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 잘하는 기준이 되는 유일한 정부 부서”라고 썼다. 국토부가 가시적 성과로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필수적 국가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다.
국정원도 마찬가지다. 국정원도 국가안위를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 기능은 반드시 제대로 작동돼야 한다. 때문에 국정원의 선진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국정원은 하루빨리 제대로 된 진정한 선진화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이를 위해 정보 원칙과 상식에 맞지 않는 관행은 과감히 떨쳐야 한다. 모사드가 그래 온 것처럼 정보 운영의 ‘기본’을 충실히 실천해 나갈 때 선진화의 길은 자동으로 열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