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중심 서라벌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오랫동안 한반도의 중심이자 세계의 주목을 받는 도시였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보잘 것 없는 국력의 신라가 통일 후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멀리 서역까지 이름을 떨친 중심에 국제적인 도시 경주가 있었다.
한가위를 맞아 출판사와 저자의 도움으로 3회에 걸쳐 《천년의 기억 우리들의 경주》를 소개한다. 아울러 보너스로 경북 안동 이야기도 2회에 걸쳐 전한다.
- 사진=서고 제공
신라 흥덕왕릉의 무인석을 살펴보면 터번을 쓴 머리, 큰 코에 깊은 눈의 서역 무사가 철퇴를 들고 있다. 마치 신라 흥덕왕릉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사실 신라 왕들을 살펴보면 시해당하거나 1년을 채우지도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등 물러난 왕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왕릉을 보면 부리부리한 눈매와 큼지막한 매부리코를 가진 무인석을 발견하게 된다. 모습이 영락없는 '서역인'이다. 신라 왕들을 지키던 실제 호위무사가 서역출신의 용병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표식이 아닐까.
페르시아의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는 7세기 중엽 신라와 페르시아간 교류사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다. '쿠쉬의 책'이라는 제목의 서사시 쿠쉬나메는 '바실라'(Basilla)로 표기된 신라이야기가 나온다.
지금도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왕궁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터번'을 쓴 토우와 용강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서역인 모습의 토용은 서역인이 신라시대에는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신라인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준다.
다음은 여행작가 서명수씨가 쓴 《천년의 기억 우리들의 경주》(서고 간)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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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처용
왕이 시해(弑害)됐다.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존재로 살아있는 부처로까지 추앙받고 있던 왕이 전쟁이나 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하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마침내 왕을 죽이고 왕권을 차지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개국 이래 800여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벌어지지 않았던 국왕시해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가 섭정을 끝내고 친정(親政)에 나선 혜공왕이 실세호족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상대등 김양상에 의해 죽으면서 폐위됐다. 진골출신인 김양상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제37대 선덕왕이다. 730년 4월이다.
봉건군주인 왕이 살해되자 왕은 백척간두에 서 있듯 끊임없이 위협받는 존재로 전락했다. 숙부가 조카를 죽이고 동생이 형을 살해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폐위시키는 골육상쟁의 왕권다툼은 '골품제'를 지켜 온 신라 왕실이 맞게 된 숙명이자 비극이었다. 그로부터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 200여 년 동안 20명의 왕이 탄생할 정도로 왕의 존재는 파리 목숨과 다를 바 없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
시해당하거나 1년을 채우지도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등 물러난 왕들이 부지기수였다.원성왕의 뒤를 이은 소성왕은 1년 5개월 만에 왕권을 넘겼고 13살에 왕위에 오른 애장왕은 결국 성년이 되면서 친정에 나서자 섭정 숙부에 의해 시해된다. 2번째로 시해된 신라왕이다. 희강왕, 민애왕도 1년여 만에 죽임을 당하는 등 신라의 왕권다툼은 절정에 달한다.
서역인 호위무사 처용
왕들은 이중삼중의 호위무사를 세워 경호에 몰입하는 등 노심초사했다. 선왕을 죽이고 왕이 된 선덕왕의 치세는 겨우 5년이었고 그나마 말년에는 병석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선덕왕이후 왕에 오른 '원성왕'은 화백회의가 추대한 김주원을 제치고 왕권을 쟁취했다, 혜공왕을 죽이고 선덕왕시대를 여는 데 공(功)을 세운 덕에 왕권에 접근할 수 있었던, 원성왕은 누구보다 경호에 신경을 쓰는 등 만전을 기했을 것이다.
가까운 친인척에 의해 왕이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을 겪은 그는 신하들을 신뢰하는 대신 무예가 뛰어난 서역인을 근접 호위무사로 파격 발탁하지 않았을까 싶다. 경덕왕대부터 시작된 왕권다툼에 직·간접적으로 얽혀있는 '진골'신하들보다 이해관계가 없는 서역인 '처용'이 오히려 더 충성심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주시내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에 만나는 원성왕릉(괘릉)은 경주고분들 중에서 눈에 띌 정도로 제대로 조성된 왕릉이다. 삐뚤빼뚤한 경주소나무들이 능역을 에워싸고 있는데다 판석과 탱주가 고분을 에워싸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호위무사처럼 능역을 지키는 두 쌍의 무인(武人)석과 문인(文人)석이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큼지막한 매부리코를 가진 무인석은 영락없는 '서역인'이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성역이나 다름없는 왕릉을 지키는 호위무사로 신라인이 아닌 서역인을 세워둔 것은 원성왕을 지키던 실제 호위무사가 서역출신의 용병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표식이다.
처용가
처용의 존재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편이었다. 헌강왕(제49대)대의 신라는 모처럼 만에 맞이한 태평성대로 기록되고 있다. '서울(서라벌)로부터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고 담장이 서로 맞닿았는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길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신라의 왕경 경주는 당시 무려 17만호가 몰려 사는 번창하는 국제도시로 이름이 났다.
<삼국유사>는 처용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헌강왕이 개운포(울산 신항 주변)로 놀러갔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몰려와서 길을 잃게 되자 왕이 괴이하게 여겨 주위사람들에게 물으니 '이는 동해 용왕의 변괴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래서 용을 위해 절을 짓도록 지시했고 그러자 동해 용왕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났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 왕을 보필했는데 그가 '처용'(處容)이었다.
왕은 미녀를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그의 마음을 잡았고 급간이라는 벼슬을 주어 일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워서 역신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해 밤이 되면 그 집에 와 몰래 자곤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서울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운운의 '처용가'가 나오는 대목이다.
헌강왕 치세기인 9세기 말 처음으로 존재를 드러낸 '처용'이지만 신라와 페르시아간 교류는 물론 신라 땅에 이주한 신라인 처용은 통일신라이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신라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 신라를 개국한 박혁거세와 석탈해와 김알지 등도 외부에서 유입된 '도래인'이었다. 신라의 개방성과 국제성은 페르시아 상인들조차 쉽게 신라인으로 동화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 천년신라가 가진 다양성의 힘이었다.
원성왕릉을 지키는 서역무사상과 더불어 안강에 있는 흥덕왕릉에서 만날 수 있는 무인석은 부시 전 미국대통령을 빼닮은 모습이 이채롭다. 두 곳의 왕릉에서 서역무사를 만나게 됨에 따라 당시 서역인들이 왕의 호위무사로 대를 이어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라인보다 체격이 훨씬 더 건장하고 무예까지 갖추고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호위무사의 자격은 없지 않을까?
흥덕왕 때는 '청해진'이 설치되고 해상왕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무역을 활발히 하던 시기와도 맞아 떨어진다. 서역과의 교류와 무역도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
중국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875)은 헌강왕대 개운포에 나타난 처용과 묘하게 일치한다. 소금장수 황소가 일으킨 반란은 무슬림들이 중국 광저우 일대에 대거 정착해 살고 있던 무슬림에 대한 무차별 살육과 약탈로 번졌다. 페르시아 상인들은 살길을 찾아 당나라를 떠났고 그 중 일부가 배로 개운포로 들어왔을 것이다. 향료와 유리그릇 등을 가득 싣고 들어온 처용의 무리들에게 신라는 새로운 안식처가 됐을 것이다.
이들보다 먼저 신라 땅에 도래해 정착해 살고 있는 '경호처장급' 호위무사 등의 '서역인'을 통해 전해진 신라에 대한 정보는 그들에게 신라를 새로운 이상향으로 기억하게 했을 것이다.
아랍문명에 정통한 이희수 교수가 소개한 페르시아의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는 7세기 중엽 신라와 페르시아간 교류사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다. '쿠쉬의 책'이라는 제목의 서사시 쿠쉬나메는 '바실라'(Basilla)로 표기된 신라이야기가 후반부의 주내용이다.
<쿠쉬나메>에서 신라는 천국같이 살기 좋은 곳이며 아직 남의 침략을 받지 않은 나라로 묘사돼 있다. 아비틴이 이끄는 이란인(페르시아인)들은 중국을 떠나 신라에 도착했고 신라왕 태후르는 이들을 극진히 환영해준다. 쿠시나메는 신라의 아름다운 풍경과 신라왕궁의 모습 등에 대한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도자 아비틴은 마침내 신라공주 '프라랑'과 결혼을 하고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의 무인상 그리고 경주 도처에서 발견되는 서역의 흔적과 쿠쉬나메는 '처용'이 신화의 소재가 아니라 실재했던 신라인이었다는 확신을 준다.
지금도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왕궁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터번'을 쓴 토우와 용강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서역인 모습의 토용은 서역인이 신라시대에는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신라인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준다. 월성 1호 해자에서 나온 토우는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어 영락없는 서역인의 형상이었다.
처용의 형상을 한 신라인은 이방인이 아닌 혁거세와 탈해와 같은 도래인이었다.
여행작가 서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