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Exclusive

故 신성일 2010년 인터뷰 "언어를 압축한 것이 詩라면 인간의 본성을 압축한 것은 섹스"

가죽점퍼와 청바지 유행시킨 근육질 미남, 한국영화 패러다임 바꿨다

[편집자 주]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배우 신성일(81)씨가 4일 오전 폐암으로 숨을 거뒀다. <월간조선> 2010년 7월호에 실린 고인 인터뷰를 다시 소개한다.

 

-----------------------------------------------------------------------
 

[작심 인터뷰] ‘영원한 로맨티스트’ 배우 申星一

“언어를 압축한 것이 詩라면 인간의 본성을 압축한 것은 섹스다”

글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 가죽점퍼와 청바지 유행시킨 근육질 미남, 한국 영화의 패러다임 바꿔
⊙ 교도소 복역 시절, 목욕탕에서 벗은 몸 보고 조폭들이 “아이고, 형님” 하며 고개 숙여
⊙ 꾸준한 운동이 건강 비결, 노인이라도 사흘에 한 번씩은 섹스해야 건강
 
申星一
⊙ 1937년 출생.
⊙ 건국대 국문과 졸업.
⊙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 영화배우협회 회장, 성일시네마트 대표이사, 16대 국회의원,
    한국야구위원회(KBO) 고문 역임.
⊙ 現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
 

  지난 6월 4일, 대구의 날씨는 그야말로 펄펄 끓는 가마솥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에 달려간 영천은 아예 불구덩이였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태양이 강렬했다. 개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었다.
 
  배우 신성일씨의 집은 경부고속도로 영천IC에서 승용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었다. 꼬불꼬불한 포도밭 샛길을 달리자 크고 작은 산이 울타리처럼 둘러싸인 곳에 잘생긴 한옥이 나타났다. ‘성일가(星一家)’라 새겨진 진입로의 입석(立石)이 문패인 양 객을 맞았다.
 
  백발이 성성한 왕년의 스타는 청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고, 맨발이었다. 1960년대 그가 연기한 영화 <맨발의 청춘>의 주인공 ‘서두수’가 떠올랐다. 흰 가죽점퍼에 꽉 낀 청바지, 반항적인 눈빛으로 시대의 아이콘이 된 매력남. 좀 과장하자면 스포츠 머리였던 서두수가 흰 가발을 쓰고 나타난 듯했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청바지와 남방이 잘 어울렸다.
 
  “여전히 젊어 보인다”고 했더니 그는 “70이 넘은 노인인데 뭘”하며 말끝을 흐렸다. “최근 출연한 TV 드라마를 본 젊은 여성들이 ‘나이가 들어도 섹시하다’고 하더라”고 전했더니 “그래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하며 웃었다. 인터뷰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나를 상대한 118명의 여인
 
52세 때 모습.
  1960~70년대 청춘스타로 스크린을 주름잡았던 이 배우는 최근 <나는 별일 없이 산다>는 TV 드라마에서 32년 연하의 탤런트 하희라씨와 연인 연기를 했다. 드라마 출연은 17년 만이라고 한다. 한동안 제작자와 정치인으로 살았던 그에게 “오랜만에 연기자 본업으로 돌아온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촬영 시스템이 예전과 달라 사흘 정도는 적응하는 데 힘들었습니다. 이정란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 대사도 한마디 한마디가 문학적이고 품격이 있어서 ‘제대로 전달이 안되면 어떻게 하나’ 긴장했죠.”
 
  드라마 중간에 하희라씨와 키스하는 신도 있었다. “키스신을 찍을 때는 떨리지 않더라”고 했다. ‘멜로의 황제’다웠다. 영화진흥공사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그가 출연한 영화는 총 506편에 이르고, 118명의 여자 주인공과 멜로 연기를 펼쳤다. 그중 한 명이 지금의 부인인 엄앵란씨다. 세상이 다 아는 로맨티스트(그는 ‘바람둥이’보다는 이 표현이 스마트해서 좋다고 했다)였던 만큼 엄앵란씨 외에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여배우가 있었을 듯싶다.
 
  “영화계 후배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나는 항시 영화계 안에 있지 않고 외곽에 있었어요. 후배들에게 물어보면 ‘신성일은 연예계 후배들을 넘겨다 본 적도 없고, 데이트하자는 소리도 못 들어 봤다’고 할 거예요. 진짜 그랬으니까.”
 
1963년에 상영된 엄앵란ㆍ신성일 주연의 <맨발의 청춘>.
  ―일 때문에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사랑에 빠지기 쉽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는 영화를 요즘처럼 TV에 출연해 홍보하지 않고, 서울이건 지방이건 배우들이 직접 다녔기 때문에 사실 연애할 기회는 많았죠. 그런데 동료 배우와 연애를 하면 후배들에게 떳떳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제가 신인이었던 시절 당시 스캔들 메이커로 유명했던 한 선배를 보고 터득했지요.”
 
  ―그 선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신인 시절, 하루는 오전 촬영을 마치고 야외에서 점심을 먹는데, 데뷔한 지 얼마 안된 신인 여배우가 나와 멀지 않은 거리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더군요. 이것을 본 선배가 ‘야, 미스 김 이리 와서 같이 먹자’고 부르니까 그 여배우가 중얼거리듯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더라고요. 어리고 청순한 신인 여배우여서 뭔가에 감전된 듯 충격이 컸어요. 그 순간 ‘아, 저 선배가 이 아이를 건드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선배 수법이 ‘야, 너하고 나하고 잤다고 소문이 쫙 퍼졌더라’는 식으로 엮는 것이었거든요.”
 
1964년에 개봉한 엄앵란ㆍ신성일 주연의 <배신>.
  그날 이후 그는 이 바닥에서 존경받는 선배가 되려면 동료 여배우에게는 사적 감정을 품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다고 한다. 또한 일 때문이 아니라면 밤 10시 이후의 자리는 되도록 피하자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밤 10시 이후는 대체로 정상이 아닌 자리가 많다는 것이다.
 
  “주변에 나를 따르는 여성은 많았지만 접촉한 경우는 드물었어요. 가는 곳마다 엄 여사의 친구와 동생들이 지뢰밭처럼 포진해 있어서 접근이 쉽지 않았지요. 요새 이곳에도 나 보겠다고 관광버스 타고 오는 아주머니들이 많아요. 일일이 상대할 수도 없고 해서 버스 기사 분들에게 오지 말라고 부탁했는데도 심심치 않게 옵니다.”
 
 
  요정집 4총사
 
1974년에 개봉한 안인숙ㆍ신성일 주연의 <별들의 고향>.
  젊은 시절 그의 연애담은 부인 엄앵란씨의 폭로(?)로 세간에 많이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초 재미교포 여성과 사랑에 빠져 한 달 반 동안 미국에 체류한 얘기며, 사별한 애인을 위해 엄앵란씨가 천도재를 지내 주었다는 얘기 등 수많은 이야기가 대중매체를 통해 공개됐다. 마당발 인맥을 자랑하는 엄앵란씨의 정보력 앞에서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그렇듯 촘촘한 감시망에도 허점은 있었던 모양. 그는 “밤늦게 촬영이 끝나면 무조건 애인 집으로 달려갔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는 통금이 있던 시절인데, 밤 늦게까지 촬영하는 우리에게는 통행증이 있었어요. 촬영이 좀 일찍 끝나면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애인에게 달려가곤 했습니다. 통금이 있는 한밤중이니 엄 여사도 잡으러 오지 못했지요.”
 
  1970년대에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과 어울려 요정집 출입도 잦았다. 그는 “신영균, 윤일봉, 남궁원 선배와 형제처럼 지냈다”며 “당시 우리가 요정에 뜨면 요정 주인이 문을 닫고 다른 손님을 일절 받지 않은 채 우리와 밤새도록 놀았다”고 말했다.
 
1963년 팬들의 투표로 제1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인기상을 차지한 엄앵란ㆍ신성일.
  “서울은 장충동 공원 옆에 있던 권마담이, 부산은 동래별장이, 대구는 춘앵각이 우리의 단골집이었어요. 70년대 초반에는 이런 비밀요정들이 많았는데, 그 후 룸살롱에 밀려 사라졌지요. 룸살롱에는 정치인들이 많이 와서 (나는) 가지 않았습니다.”
 
  ―요정에 가면 아가씨들이 모두 신 선생님 주위로만 몰려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거야 항상 돈을 내가 내니까 나한테 몰린 거죠. 다른 이유 없습니다.”
 
  ―당시 제일 막내 아니었습니까.
 
  “막내지만 내가 성질이 제일 급하고 주머니 사정이 좋으니까 계산하곤 했죠. 그분들은 마누라 눈치 보느라 내가 리드하지 않으면 그런 요정에도 못 갔어요.”
 
  영화계에서 그는 종종 신영균씨와 비교되곤 한다. 당대 최고 스타였고, 정계에 진출해 국회의원을 지냈다는 점에서 둘은 닮은꼴이지만 한 사람은 젊은 시절 안 쓰고 저축해 큰 부(富)를 이뤘고, 한 사람은 원 없이 쓰고 살다 지금은 그냥저냥 산다는 점에서다. 그는 신영균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형님은 저축과 재테크가 몸에 밴 분이었어요. 워낙 어렵고 힘들게 살아온 기억 때문에 돈을 함부로 쓰지 않았죠.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돼요. 저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젊은 나이에 성공해 최소한 돈에 얽매이지는 않았죠.”
 
 
  얼굴은 ‘꽃미남’ 몸매는 ‘짐승돌’
 
1964년 11월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치른 결혼식.
  대구 태생의 그는 대구 지역의 전통 부촌(富村)인 인교동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과 수영으로 체력을 단련했고, 중학교 때는 평행봉으로 근육질 몸매를 다졌다. 그 덕에 배우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58년 영화 제작자에 의해 캐스팅돼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고교 졸업 후 입시에 실패해 서울에서 학원을 다녔어요. 그러다 영화사 신필름에 픽업돼 배우가 됐는데, 당시 기라성 같은 배우들은 모두 악극단이나 유랑극단 출신이어서 저처럼 근육질 몸매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라 운동 근처에도 못 가본 분들이었죠. 당연히 제가 눈에 띌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외화가 인기를 끌고 있던 시절이라 영화 제작사들이 외국 배우처럼 몸매가 좋은 신인 발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때였다. 신필름은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그에게 5년 계약 조건으로 5만원을 주었다. 1958년 당시 최고 기업이었던 유한양행 사장 연봉이 5만원이었으니 큰돈이었다.
 
  이후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눈만 뜨면 촬영이고, 눈만 뜨면 돈이 쌓였다. 요즘 말로 얼굴은 ‘꽃미남’인데 몸은 ‘짐승돌’이라 멜로와 액션이 적절히 섞인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경상도 사내 특유의 기질이 스크린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1960년대 초부터 건달 영화와 캠퍼스를 소재로 한 청춘 멜로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순전히 신성일이라는 배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등장하기 이전의 한국 영화는 역사물이 대세였다고 한다. 그가 한국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은 셈이다.
 
  “그 무렵에는 영화 속에서 남자 배우들의 웃통을 벗기는 게 흔치 않은 일이었어요. 검열에 걸리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등장하면서부터 감독들이 요령껏 남자 배우들 웃통을 벗기곤 했지요. 볼 만했으니까. 저기에 붙어 있는 사진이 40대에 찍은 거예요.”
 
  그가 가리키는 벽면의 사진에는 삼각 수영복에 근육질 몸매를 드러낸 한 청년(?)이 바다를 배경으로 백사장에 서 있었다. 50대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탄탄한 몸매였다. 1970년대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러브신을 보고 여자들이 자지러졌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1963년 그는 이태원에 집을 사고, 이듬해 11월 지금의 부인 엄앵란씨와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결혼 후 재벌은 아니지만 부자로 살았다”며 “지금은 절약하고 살지만 엄 여사 역시 그때는 돈을 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수녀가 된 여인
 
   1971년 그는 영화 <연애교실>로 감독 데뷔한 후 한동안 감독 겸 배우로 활동하다 영화제작자와 사업가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정치권에 발을 들였고, 2000년 5월 고진감래 끝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지만 2005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돼 5년형을 선고받고 3년 동안 복역했다. 사람들은 ‘배우 신성일은 성공했지만 정치인 강신성일은 실패했다’고 말한다.
 
  ―정치권에 발을 들인 걸 후회하지 않나요.
 
  “후회하지는 않아요. 적어도 내가 정치하고는 궁합이 안 맞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으니까요. 정치하려면 양심이 두 개는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유권자들 앞에서는 해 주겠다고 약속해야 표를 얻을 수 있는 게 정치지요. 치사하고 비겁한 걸 싫어하는 제 성미에는 안 맞았습니다.”
 
  ―정치에 뛰어든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특별한 계기라기보다 내가 대중스타니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를 끌어들이려는 유혹이 많았어요. 전두환(全斗煥) 정권 때 발을 들이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것 같아요. 그때 진출했더라면 광주에는 가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은 한국의 민주주의 정치를 퇴보시켰다”며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잘 안다”고 말했다.
 
  ―1980년 광주(光州)를 잘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현장에서 저질러진 참극을 영남권 사람들은 믿지 않았어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같은 만행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저는 믿었어요. 그 무렵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광주 여인이었는데, 어느 날 밤 전화해서 ‘어떻게 국군이 선량한 시민의 가슴을 도려낼 수 있느냐’고 울먹이더군요. 그녀는 내게 ‘당신같이 경상도 말씨를 쓰는 사람이 많다’며 분노했어요.”
 
  ―그분과는 어떻게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까.
 
  “서울에서 알게 됐어요. 영화사에 근무했던 20대 초반의 여자였는데, 참 예쁘고 맑은 아가씨였죠. 이제 서로 막 좋아지고 있던 찰나였는데, 고향에 내려갔다가 참상을 목격한 거예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후 다시 만나지는 않았습니까.
 
  “그로부터 행방불명이 되어 버려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단서로 교구 쪽에 몸담고 있는 사람에게 알아보니 수녀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광주의 충격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숨어 버린 것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았지만 그녀의 신앙 생활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찾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5월이 되면 맑고 고왔던 그 여인 얼굴이 떠올라요.”
 
  그의 눈동자에 우수가 어린 듯했다. 때마침 그가 켜 놓은 라디오 음악프로에서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OST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내와는 53세 이후 각방 써
 
그는 12세 된 애마 ‘뽀빠이’를 키우고 있다.
  ―교도소 생활은 어땠습니까.
 
  “출소 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공짜밥 잘 먹고 잘 지냈어요. 처음에는 혈압이 상승해 힘들었는데 곧 정상으로 돌아와 그곳 생활에 적응했지요. 내 성격이 낙천적이라 다른 수감자들과도 즐겁게 지냈어요.”
 
  ―함께 수감 생활을 한 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권노갑씨가 저와 교도소 동기입니다. 그분을 비롯해 몇몇 정치인을 빼곤 모두 조폭들이었어요.”
 
  ―그들이 조폭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목욕하면서 알았죠. 우리가 있던 곳이 의정부교도소인데, 그 안에 스무 평 정도 되는 대중탕이 하나 있어요. 어느 날 그곳에 갔더니 등짝에 온갖 문신을 한 사내들이 진을 치고 있더군요. 다른 정치인들은 기가 죽었는데, 저는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죠. 그런 나를 이놈들이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갑자기 ‘아이고, 형님’ 하고 고개를 숙이더군요. 문신 하나 없이도 내 몸이 그놈들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던 거죠.”
 
  조폭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정치인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교도소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거나 운동을 할 때면 그에게 90도 각도로 깍듯이 인사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축구를 할 때면 조폭들은 문신 때문에 옷을 입고 뛰었지만 나는 당당하게 웃통을 벗고 뛰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3년이라는 세월을 감방에서 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여야 상관없이 많은 정치인과 영화계 인사들이 면회를 와서 심심치 않았어요. 또 바쁘다는 핑계로 쌓아 놓기만 했던 책을 탐독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삼국지>부터 각종 문학 도서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습니다. <삼국지>의 경우 여러 역자가 번역한 것을 모두 읽었어요.”
 
  2007년 출소 후 그는 고향 대구로 갔다. 그리고 지금의 장소에 전통 양식의 한옥을 지었다. 팔작지붕에 ‘ㄴ’자형으로 지어진 한옥은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옆에 자그마한 부엌이 딸려 있었다. 그는 “이곳에 머물 때면 손수 밥을 지어 먹는다”고 했다. 부인 엄앵란씨는 한옥을 불편해하는 데다 무릎 관절이 안 좋아 내려오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엄 여사와는 53세 이후 각방을 써 왔습니다. 생활도 각자 벌어서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수입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지요.”
 
 
  신체 나이 50대 유지 비결
 
생후 두 달 된 풍산개와 함께.
  ―영천이 연고지는 아닌 것 같은데, 특별히 이곳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언젠가 지인을 따라 건너편에 있는 포도밭에 왔다가 이곳 지형이 마음에 들어 점 찍어 두었죠. 뒤로 산이 펼쳐져 있고 앞으로 계곡이 흐르니 배산임수형 명당 아닙니까.”
 
  1000평 너른 대지에 연못과 작은 승마장, 말을 키울 수 있는 축사 등이 갖춰져 있었다. 마당에는 잘생긴 풍산개 부부가 낳은 지 두 달 되었다는 6마리의 새끼와 뒹굴며 놀고 있었다. 그야말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한 달에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쉬고 싶을 때만 찾는 곳이라 머무는 날이 많지는 않아요. 일할 때는 주로 대구에 있는 아파트에서 지냅니다. 서울에도 식구들이 사는 집 외에 제가 쓰는 오피스텔이 따로 하나 있어 일이 있을 때마다 올라가지요. 지금은 알고 지내던 지인들 선거 운동을 도운 뒤라 지친 몸을 풀고 싶어 와 있습니다.”
 
  그는 호남 지역 기초단체장에 출마한 지인들을 도왔다고 한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전날 종합건강검진을 받은 탓인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측근에 따르면 그는 해마다 건강검진을 받는데 늘 신체 나이 50으로 나온다고 한다.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젊은 시절부터 지금껏 웨이트트레이닝을 꾸준히 하고 있고, 일찍이 의학계에서 만병통치약이라고 한 아스피린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스피린을 장기 복용할 경우 몸에 해롭다고 하는데, 나한테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섹스는 사흘에 한 번씩 해야 건강하다”는 말도 했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난색을 표하며 이런 얘기를 했다.
 
  “얼마 전에 <아흔에 애인만 셋>이라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리오 마태오라는 프랑스인이 쓴 자서전인데, 이 사람은 꾸준한 자기 관리로 아흔에도 애인이 셋이나 있었고, 죽을 때까지 섹스를 했다는 얘기였어요. 감동까지는 아니지만 깊이 공감했습니다.”
 
  ―술·담배는 안 하나요.
 
  “술은 적당히 취하지 않을 정도로 소량만 마시고, 담배는 끊은 지 30년도 더 됩니다. 세상에 하면 할수록 느는 것이 술, 섹스, 노름, 싸움 등 4가지라고 해요. 싸움은 영화에서 실컷 했고, 술은 바빠서 먹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담배는 골프 때문에 끊었고요.”
 
  ―골프 때문에 담배를 끊었다고요.
 
  “1978년 늦가을 어느 날 평소 내가 좋아하는 골프장에 갔는데, 그날따라 굉장히 건조했습니다. 지금처럼 스프링클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메마른 풀이 솜처럼 뭉쳐서 필드 위를 날아다녔죠. 아무 생각 없이 담배 한 대를 물고 홀에 올라섰는데, 초록색이어야 할 필드가 온통 잿빛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캐디에게 물으니 ‘전날 고객이 버린 담배꽁초 때문에 밤 사이 타 버렸다’고 하더군요. ‘내가 좋아하는 골프장이 담배 때문에 망가졌구나’ 하는 생각에 그날로 담배를 끊었습니다.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 이후 다시는 피우지 않았죠.”
 
  ―스트레스가 건강의 주범이라는데,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합니까.
 
  “운동으로 풀지요. 육체적으로 피곤하면 잠도 잘 오고, 정신적으로 고민하거나 괴로워할 틈도 없거든요. 힘들고 괴롭다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사람이 싫어 골방에 처박히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 낙오가 됩니다. 나는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가 났을 때도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날렸습니다. 그러곤 빚쟁이들이 몰려오면 오히려 ‘다 갚아줄 테니 걱정 말라’며 큰소리를 쳤죠. 그랬더니 빚 독촉을 안 하더군요. 저 사람이 큰소리치는 것을 보니 아직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살아 있어야 빚을 갚을 것 아닙니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해 보이는 사람한테는 영원히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빚 독촉을 더 심하게 하는 법입니다.”
 
신성일씨가 사는 한옥은 경북 영천시 괴연동에 위치해 있다.
 
  내가 만약 <시> 감독이라면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애마(愛馬)를 구경하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백두’라 이름 붙인 풍산개 수컷이 꼬리를 치며 반겼다. 백두는 낯선 사람을 보고도 좀처럼 짖는 법이 없었다. 그는 “풍산개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따르는 성격이라 방범용이 아닌 사냥용으로 적합하다”고 설명해 주었다. 다른 짐승에게는 맹수처럼 덤벼드는 개가 풍산개라는 것이다. 그는 백두를 보며 한바탕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 백두는 산짐승이 내려와도 관심이 없어요. 요놈의 관심은 오로지 암컷한테만 있죠. 한동안 자유롭게 뛰어다니라고 풀어놓았더니 온 동네 암컷들을 건드려서, 다니다 보면 이놈 닮은 강아지들이 꽤 돼요.”
 
  그는 암컷을 밝히는 백두가 싫지 않는 눈치였다. 그에게 “아직도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면 사랑을 꿈꾸느냐”고 묻자 “그런 여인을 만나면 꿈을 꿀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현해야지”라고 답했다. “그런 날이 올 것에 대비해 나이에 상관없이 부지런히 나를 가꾸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연애는 물론 섹스에 대한 철학도 그는 확고했다. “최근에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재미있게 봤다”며 그는 이런 얘기를 했다.
 
  “오랜만에 참 좋은 작품을 봤습니다. 근데 저로서는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더군요. 영화에서 시에 눈을 떠 가는 주인공 양미자(윤정희 분)가 성폭행범이 된 손자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반신불수 노인(김희라 분)에게 몸을 허락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감독은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을 그린 것 같은데, 여기서 시의 개념과 섹스를 연결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제가 만약 감독이었다면 오래도록 혼자 살아온 여인이 원치 않았던 섹스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깨어나는 것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으로 그렸을 것 같아요. 그러면 이야기가 한층 풍부해지지 않았을까요. 저는 언어를 압축한 것이 시라면 인간의 본성을 압축한 것은 섹스라고 생각합니다.”⊙
 
 

입력 : 2018.11.03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2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대언자 (2018-11-06)

    모르면 말을 하지 말지
    인간은 우주를 압축해 놓은 존재야
    구별된 존재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는 존재
    구별되게 살아야 하는데
    당신은 동물보다 못한 삶
    본능대로 아무런 영향력 없는
    쾌락을 추구한 허무한 삶을 살아던것이다.

  • 박혜연 (2018-11-06)

    아 덧없는 인생이여!!!! ㅡㅡ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