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 ‘남영동 대공분실’의 상징 이근안 전 경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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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스1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죽는다. 이근안(李根安). 1938년생. 향년 88. 그 이름 석 자가 한 시대의 어두운 골목 하나를 가리킨다. 그가 떠난 325, 누군가는 공식 유감을 표했고, 누군가는 침묵했다.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1970년 순경으로 제복을 입었다. ‘대공수사관이 되었으나 세상은 그에게 다른 이름을 붙였다. ‘고문 기술자.’ 스스로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이름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로 뜨겁던 1980대, 그 시절을 살지 않은 사람에게는 교과서의 한 장일테지만 그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에게는 몸이 기억하는 시간이요 공간이었다. 그가 일하던 남영동 대공분실 지하, 그 냉기와 습기를 몸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 살아 있다.


민주화의 물결이 들어오자 그는 사라졌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대한민국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누군가는 그 시절을 민주주의의 새벽이라 불렀고, 그에게 그 시절은 도피의 어둠이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뒤바뀐 기묘한 역전이었다.

1999, 그는 자수했다. 이듬해 대법원은 고문 및 불법 구금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법정에서 선고문이 낭독되던 그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람의 속내는 판결문에 담기지 않는다.

 

200010, 이근안이 지금은 사라진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다. 교도관들이 깜짝 놀랐다. 놀랄 만도 했다. 그 교도소는 14년 전, 그가 직접 고문했던 사람이 수감됐던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김근태 전 의원은 19865월 영등포교도소로 이송됐다. 44일 동안, 그는 바로 서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 있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치아가 흔들려 제대로 음식도 먹지 못했다.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14년 뒤 같은 담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수감 중 이씨는 광목 앞치마를 두르고 유압기에서 생산된 두부 판을 날라 수돗가에 차곡차곡 쌓는 일을 부지런히 했다고 한다. 지하실에서 다른 사람의 몸을 주무르던 손이, 이제 두부 판을 날랐다. 역사라는 것은 종종 이런 방식으로 자기 뜻을 관철한다. 그 교도소 정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을 거쳐 가는 자여, 우리는 그대를 믿노라.’ 이근안이 그 문을 통과할 때, 그 문장은 무슨 의미였을까.

 

출소 후 그는 목사가 되었다. 반성한다고 했다. 종교는 때로 사람에게 마지막 언어를 준다. 용서를 구하는 언어, 혹은 스스로를 용서하는 언어. 그것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그만이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말했다. “나는 고문 기술자가 아니라 애국자다.” 그 한마디는 조용히 쌓아 올린 것들을 한꺼번에 허물었다. 여론은 들끓었고, 목사직은 박탈되었다. 그는 다시, 이름만 남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동부병원 장례식장이었다. 발인은 27일 새벽 540. 세상이 아직 어둑한 시간이었다. 그가 떠난 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성명을 냈다.

 

이근안은 고문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죄나 반성의 뜻을 밝히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가해자의 죽음은 그가 저지른 만행을 지울 수 없으며, 민주주의 역사에 새겨진 피해자들의 고통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었다. 사업회는 또 오랜 세월 고통을 견뎌온 피해자와 그 가족들께 깊은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그는 끝내 자신의 이름과 화해하지 못했다. 88년의 세월, 그는 반성과 항변 사이 어딘가에서, 용서와 단죄 사이 어딘가에서. 그 어딘가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이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는다. 새벽 540, 차가운 3월의 공기 속에서 발인이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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