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막후에서 활약한 장치혁 전 고합회장 별세

국내 최초로 나일론 플랜트 국산화 성공...한때 재계 17위까지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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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장치혁(張致赫) 전 고합그룹 회장이 2월 05일 16시35분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향은 평북 영변. 

고인은 1966년 고려합섬주식회사(고합그룹)를 설립했다. 고합은 1971년 생산하기 시작한 합섬 이불솜인 ‘해피론’이 인기를 끌고, 국내 최초로 나일론 플랜트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화학공업 분야로 진출해 원료(석유화학)부터 섬유, 의류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 체제를 구축하면서 종합 화학·섬유 그룹으로 도약, 1990년대 중반에는 한때 재계 서열 17위까지 올랐다. 


고인은 이 시기 일본 합작선이었던 이토추 상사의 세지마 류조 회장의 권유로 일찍부터 중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인은 이토추 상사를 통해 중국공산당의 ‘민간외교’ 기구인 중국국제우호연락회와 접촉하면서 덩샤오핑의 막내딸인 덩용(鄧榕), 중국 군부(軍部) 원로(元老) 예젠잉(葉劍英)의 아들 웨펑(岳楓), 조선족 출신으로 덩샤오핑의 숨은 참모였던 진리(金黎) 등 중국 요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노태우 정부 시절, 고인은 이렇게 구축한 자신의 중국 내 고위 인맥들을 한창 북방 정책을 추진하던 정부 측과 연결해 주면서 한중 수교 성사에 이바지했다. 탁구선수 안재형과 자오즈민의 결혼이 성사되도록 돕기도 했다. 이처럼 한중 수교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수교훈장 숭례장을 받았다. 러시아 천연 가스관 북한 통과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고인은 북한과의 경협에도 나서 1994년 1월 김일성으로부터 금강산 개발 사업에 대한 승인을 받았으나, 그해 7월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때는 전경련 남북경협위원장으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수행했다. 

고합은 IMF 사태의 와중인 1998년 7월 ‘워크아웃 1호 기업’으로 결정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인은 계열사 통폐합 및 매각을 통해 자구책을 강구 했으나 2001년 결국 그룹이 해체되고 말았다. 고인은 생전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평양을 다녀온 뒤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나 ‘북한에 현금을 줄 필요가 없다. 도와주려면 당장 돈을 주는 것보다 쌀, 물자, 의약품, 공장시설을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면서 “정부의 주문대로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에 제일 먼저 들어갔지만,그 일이 있고서 워크아웃 협정대로 이행이 안 됐다”고 술회했다.


고인의 선친 장도빈 선생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의 마지막 주필을 지낸 독립운동가였다. 모친 김숙자 여사도 애국부인회 평남 조직책을 맡았던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김숙자 여사는 고인에게 “일본은 어제까지는 우리의 가장 큰 원수였지만, 오늘부터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말했고, 어릴 때 어머니의 그 한마디는 평생 고인이 일본사람들을 대할 때 잠재의식 속에 머문 하나의 지침(指針)이 되었다고 한다. 고인은 고대사를 연구한 사학자이기도 했던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1981년 ‘산운 장도빈 기념사업회’를 만들었고, 이를 고려학술문화재단으로 발전시켰다. 고려학술문화재단은 연해주 지역에서 고구려‧발해 유적지 발굴 사업 등을 활발하게 펼치기도 했다.
독립지사였던 부모의 영향 탓일까? 고인은 6‧25가 일어나가 실제 나이보다 세 살 더 많은 18살이라고 속이고 육군종합학교(27기)에 입교, 소위로 임관한 후 전선을 누비다가 휴전 후 중위로 전역했다. 전후에는 정부의 영자 홍보지인 《코리언 리퍼블릭》의 홍콩 주재원으로 언론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나옥주 (재)추양재단 상임이사, 장녀 장호정, 차녀 장호진, 사위 제레미 장 FTL컨설팅 수석고문, 김형준 ㈜기린건축 대표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 5일 9호실, 6일 17호실 (오전 10시부터 가능). 발인 7일 오전8시,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재)영락교회 공원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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