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홍태화 연구원. 사진=월간조선
보수 진영의 막연한 대미(對美) 감정은 6‧25 전쟁에서 비롯된 혈맹이자 공산 세력에 대항할 우군 정도다. 맞는 말이다. 보수의 주요 가치로 자리 잡은 맥락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왜 미국의 편에 서서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지, 현실적으로는 어느 선에서 대응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설득력이 있다. 감정에만 호소하는 ‘친미혐중(親美嫌中)’ 단순 구호 반복은 고리타분할뿐더러, 한국이 기대하는 ‘큰 형님’ 노릇을 미국이 정말 해줄지도 불확실하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생각도 없고 할 여건도 안 된다.
홍태화 미국 외교정책연구소(FPRI) 유라시아 연구원은 22일 개혁신당 주최로 열린 정책 포럼에서 ‘글로벌 질서 재편과 대한민국의 선택’이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이스라엘 국가안보연구소(INSS)와 후버 연구소 등에서의 활동 이력이 있는 홍 연구원은 지난 21대 대선을 전후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와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에게 외교‧안보 정책 자문을 맡은 바 있다. 이날 홍 연구원은 엘브리지 콜비(Elbridge Colby) 미국 국방부 정책차관의 발언을 소개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와 이 강연의 핵심이 요약돼 있었다.
<가장 좋은 파트너는 미국인처럼 말하거나 우리와 가장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무임승차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국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고 효과적인 파트너는 미국에 대한 감사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이유로 그러한 일을 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이 문맥에서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두 가지다. 그간 미국이 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유지해 온 두 개의 전선이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유럽과 아시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아시아를 우선하겠다는 의중과, 미국은 자국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국가를 파트너로 여긴다는 점이다. 이념과 우호 감정이라는 무형의 가치에 따라 미국이 움직일 거라 기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미국 입장에선 유럽보다 아시아를 더 위태롭게 여길 만하다. 유럽엔 EU(유럽연합)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라는 자유 진영 국가들의 결속체가 있지만, 아시아엔 없다. 유럽 국가들이 뭉치면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지만, 아시아의 자유 진영 국가들은 어렵사리 힘을 합친다 한들 경제력으로 보나 핵무력과 군사력으로 보나 중국에 압도당하는 게 현실이다. 당장 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러시아가 침공한지 4년이 흘렀지만 우크라이나 영토의 3분의 1밖에 점령하지 못했다. 유럽 국가들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전면적이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라면 유럽이 합심했을 때의 힘의 균형은 어느 정도 맞춰진다는 게 미국의 시각이라고 홍 연구원은 분석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다. 유럽은 항상 하나의 패권국이 등장할 때마다 서로간의 견제가 심했고, 유럽을 아우르는 하나의 제국이 영속하지 않았다. 반면 아시아 권역은 예로부터 중국의 세력권이었다. 그런 아시아는 자원과 인재, 지리적 이점 등 패권국을 가르는 핵심 이익의 요체다.
이처럼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에 안보 분담을 요구하는 배경엔 힘의 균형추를 한일(韓日) 쪽에 더 얹어야만 하는 사정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한반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한반도 천동설’이다. 일례로, 2018년 싱가포르 회담 이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유럽 순방길에서 각국 정상을 만나며 대북(對北) 제재 완화를 요청했던 일이 대표적이다. 단순히 대북 제재 완화에 대한 비판과 굴종적 대북관을 비판하는 여론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건 대북 제재가 유럽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 입장에서 재무장 논의, 가스를 러시아에 의존하는 에너지 안보, 중국의 전기차 시장 영향력 확대 등 여러 중요한 의제가 있음에도 한반도 얘기를 꺼낸 건 정치권에서도 ‘한반도 천동설’을 벗어나지 못하는 예시라고 홍 연구원은 지적했다.
정무 감각이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사례는 또 있다. 바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이 내민 각종 청구서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문제도 국가적 자존심 문제로 여겨진다고 홍 연구원은 지적했다. 트럼프 개인의 발언과 돌발 행동만 집중 조명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트럼프 개인 또는 그의 가족들에게 초점이 쏠린다. 그가 오늘 뭘 먹었는지, 소셜미디어(SNS)엔 뭘 올렸는지, 누굴 만나서 무슨 얘길 했는지 등이다. 홍 연구원은 “미국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예요. 이들의 미국 외교 대전략은 트럼프 한명에 의해 결정되기 힘듭니다. 구조적인 틀 안에서, 그 한계와 바운더리 안에서 트럼프가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찔러보는 겁니다. 트럼프 개인이 마치 게임하듯이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사용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강조하고 싶은 건, 트럼프라는 개인만 볼 게 아니라 구조적인 요인들을 보자는 겁니다.”
앞서 살펴봤듯, 미국에겐 중국 견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렇다고 한국이 중국과 전쟁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미국과 전략적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에도 셰셰(谢谢), 대만에도 셰셰’하는 식으로 괜스레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경제와 안보 모두 실리를 챙기겠다는 국정 철학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게 홍 연구원의 시각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극단적인 상황만 중국의 위협이 아니다. 한국의 경제 구조가 중국의 하청 업체로 전락하거나 한국 경제의 중심이 서울이 아닌 상하이로 옮겨가는 것, 또는 외교 전략과 정치적 결정이 중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이미 중국은 서해에 인공 구조물을 설치하고 있지만 한국의 이렇다 할 대응은 없다. 한국 내 중국 비밀 경찰서 사건, 중국인의 군사 시설 무단 촬영 사건 등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외교 전략이 ‘아시아 퍼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한국 입장에서 나쁘지만은 않다고 홍 연구원은 강조했다.
레토릭(rhetoric‧다듬은 말)은 다소 모호하게 할 수 있더라도, 행동은 분명해야 한다. 2025년, 미국은 동맹국들을 상대로 ‘대만 유사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은 바 있는데, 이때 일본과 호주는 ‘가상의 상황에 대해 답변하기 어렵다’는 모호한 답변을 했다. 하지만 행동은 적극적이었다. 남중국해와 태평양 진출을 노골화하는 중국에 보란 듯이 일본은 스텔스(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전투기가 탑재된 항공모함을 실전 배치했고, 호주엔 제1 도련선(중국의 해양 전략선) 안까지 도달하는 미국의 극초음속 미사일이 배치됐다. 그러나 우리의 대중(對中) 언어는 ‘양안(대만과 중국)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 ‘주한미군이 대만 유사시 가는 건 안 된다’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하지 않겠다’며 중국을 안심시키는 데 전전긍긍하는 식이다. 홍 연구원은 이러한 입장 표명이 미국 입장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안이 있다. 앞서 소개한 콜비 차관의 말처럼, 미국의 문제와 관련해 스스로의 이유로 일정한 역할을 맡는 것이다. 홍 연구원은 ‘미국의 아시아 우선주의 유도’ ‘핵무기 잠재 역량 확보를 위한 미국과의 협상’ ‘호주, 필리핀, 인도, 동남아 등과의 협력 확대’ ‘방산 역량을 통한 자유 진영의 병기창 자처’ 등을 제시했다. 홍 연구원은 이러한 역할에 국회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외교 무대에 얼굴을 비춰야 하니, 국회가 대중 정책에서의 ‘배드 캅’을 맡아 압박해야 이를 근거로 대외 협상의 저점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글=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