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2월 3일 체결된 조일 수호 조규에 대한 후속 조치로 같은 해 7월 6일에는 일본의 이사관인 외무대승 미야모토 쇼이치와 조선의 의정부 당상 조인희가 경성(京城:서울) 청수관(淸水館)에서 만나 수호 조규 부록과 무역규칙을 체결한다. 이때 체결된 조약에 대한 서술 중 현행 교과서 2종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금성출판사 |
강화도 조약에 뒤이어 체결된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조‧일 무역 규칙에는 일본 외교관의 여행 자유 인정,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거류지(조계) 설정, 일본 화폐의 유통 허용, 일본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인정 및 양곡 무제한 수출 허용 등의 불평등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229) |
|
리베르스쿨 |
조‧일 수호 조규 부록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인 외교관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도록 하고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가 유통될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개항장 사방 10리 안에 일본인이 거주할 수 있는 구역인 거류지를 설정하였다.(207) |
두 교과서에만 수록된 ‘일본인 외교관의 자유 여행 허용’ 내용은 어느 조관에 있는 것인지 해당 출판사에 질의하여 금성출판사로부터 수호 조규 부록 제1관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아래가 부록 제1관이다.(리베르스쿨은 답변 거부)
‘제1관 각 항구에 주류(駐留)하는 일본국 인민 관리관은 조선국 연해 지방에서 일본국 배가 파선되어 긴급할 경우, 지방관에게 알리고 해당 지역의 연로(沿路)를 지나갈 수 있다.
(各港口駐留日本國人民管理官, 於朝鮮國沿海地方, 日本國諸船致敗緊急, 得告地方官, 往過該地沿路)’
수호 조규 부록 제4관에는 ‘이후 부산 항구에서 일본국 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이정(里程)은 부두로부터 기산(起算)하여 동서남북 각 직선 거리 10리[조선의 里法]로 정한다.’고 하여 기본적으로 개항장 밖으로의 이동을 제한하고 있다. 때문에 조선국 연해에서 일본국 선박이 파손되는 등 불의의 사고가 났을 경우 이를 처리할 일본국 인민 관리관의 파견이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이 조관은 사고 선박의 처리를 위해 관리관의 불가피한 현장 접근을 위한 연로(沿路) 이용의 융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일본국 인민 관리관을 외교관이라 하는 것이나, 사고를 전제로 한 관리관의 이동을 자유 여행이라 하는 것 모두 올바른 서술이라 할 수 없다. 금성출판사는 이어진 답변에서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당초 일본은 조‧일 수호 조규 부록의 제정을 추진하면서 서울에 자국 공사관을 설치하여 외교관을 상주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의 완강한 거부로 이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일본 측의 집요한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선에서 타협하였다. 따라서 영사를 관리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개항장에 주재하도록 하고 필요한 경우 내지의 여행을 허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 답변에서 금성출판사는 영사를 관리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으나 전혀 근거가 없다. 이때 일본은 아직 조선에 영사를 두지 못하고 인민 관리관을 두어 자국민을 관리하였으며, 영사(領事)는 1882년 조미조약에 처음 등장한다. 또 내지 여행을 허용하도록 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위 조관에는 내지(內地)나 여행(旅行)을 직접 표현하거나 해석이 가능한 용어가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사실 관계에 어긋나는 답변이다.
이 부분은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으로 약칭함)에서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에도 ‘조선 국내에서의 일본 외교관의 여행 자유’라고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질의에 국편은 금성출판사와 동일한 답변을 하였다. 이에 선박 사고 처리를 위한 공무상 이동을 어떻게 자유 여행이라 할 수 있으며, 배가 파손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재차 질문을 했다. 아래는 이에 대한 국편의 답변이다.
‘제1관의 내용은 각 항구에 주재하는 일본국 인민의 관리관이 조선국 연해 지방에서 일본 선박이 긴급한 상황에 빠졌을 경우 지방관에게 알리고 해당 지역의 연로를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통과 여부가 승인이나 허가 사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일본 관리관은 자국 선박에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다고 적당히 둘러대며 조선의 지방관에게 통고하기만 하면 사실상 지방관이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문구 자체로 본다면 일본 관리관의 여행을 단서를 달아 허용하는 내용이지만, 실효적인 면에서는 자유로운 여행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이 답변을 보면 조문에 있는 그대로 뜻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조약 체결 후 예상되는 부작용을 마치 조문의 본래 뜻인 양 자의적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그야 말로 상하로 당기면 日(일)이 되고 좌우로 당기면 曰(왈)이 되는 ‘녹비[鹿皮]에 가로 왈(曰)’이다.
간혹 시골길이나 번잡한 시장에서 횡단보도가 없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무단 횡단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도로 교통법상 횡단보도나 육교와 같은 횡단 시설이 아닌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는 행위는 도로 교통 법규 위반이다. 그런데 워낙 많은 사람들이 무단횡단을 하니 도로교통법이 무색해 보인다. 그럴 경우 실효적인 면에서 자유로운 횡단을 허용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국편의 답변이 이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일본은 그동안 한행 이정(閑行里程)의 확대 적용과 일본국 외교관의 여행 자유를 조선 측에 꾸준히 요구해 왔으나 이를 관철하지 못하다가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을 계기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것이 아래의 수호 조규 속약(續約) 제2항이다.
‘제2, 일본국 공사(公使)와 영사(領事) 및 그 수행원과 가족은 조선 내지의 각 처를 유력(遊歷:여러 고장을 두루 돌아다님)할 수 있다.[유력할 지방을 지정하면 예조에서는 호조(護照:여행 증명서)를 발급하고, 지방관청은 호조를 확인하고 보호하여 보낸다.]’
(任聽日本國公使領事, 及其隨員眷從, 遊歷朝鮮內地各處事.[指定遊歷地方, 由禮曹給照, 地方官勘照, 護送.]
일본인 외교관의 자유로운 여행을 허용한 것은 1882년에 와서나 가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호 조규 부록의 제1관을 들어 ‘일본인 외교관의 자유 여행 허용’이라 한 교과서와 국편의 서술은 잘못이다. 이와 관련하여 국편과 해당 출판사에 여러 차례 문제 제기를 했지만 ‘일본인 외교관의 자유 여행을 허용하였다’는 서술에 문제가 없다는 답변만 이어졌다.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