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저렇게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저 사람에게는 근심거리가 없을까? 필자는 그를 만날 때 마다 항상 기분이 좋은 그의 삶에 대하여 궁금증이 더 해 갔다.
“인생이란 즐겁게 살아야지요. 작은 것에 만족하면 됩니다.” 그의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간단명료하다. 필자의 글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오츠보 시게다카(大坪重隆, 66세)씨의 얘기다.
“인생은 작은 일로 이루어져 있지.
의무로 하는 큰 희생이 아니라,
미소와 많은 유쾌한 말들이
우리들의 인생을 아름다움으로 채워주는 거야“
미국의 여류 시인 ‘메리 하트만’의 “인생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단다.”라는 시(詩)가 그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는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거리인 후쿠오카(福岡)현 키타규슈(北九州)시에서 태어 났다. 우리 나이로 67세의 할아버지다. 그러나 그는 나이에 관계없이 언제나 열정이 넘친다. 특히 그는 한국 얘기를 하면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어떤 때는 “나의 조상이 한국사람 아닐까?”는 말도 서슴없이 한다.
첫 해외여행이 한국 땅
“저의 첫 해외여행이 한국이었습니다.”고 말문을 연 그는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70년을 회상했다. 그는 키타규슈의 청년회 해양단원의 자격으로 난생 처음 부산에 상륙하였다. 당시 부산항은 베트남에 파견되는 군인들의 환송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어머니의 절규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슬픈 광경이었습니다.”는 그는 용두산 공원 아래에 있는 상업학교에서의 청년 교류회와 공업고교의 군사 교련은 한국의 분단 현실을 이해함과 동시에 한국인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또, 요트를 타고 후쿠오카-부산의 210km를 2번이나 왕래하기도 한 의지의 남자다. 그는 요트에 몸을 싣고 바람 따라 물결 따라 1박2일 간 바다를 떠다니며 고대인들이 해류를 타고 왕래했던 바닷길에서 역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한번은 부산의 오륙도(五六島)에서 출발하여 대한 해협을 지나 대마도(對馬島)에 다다를 즈음 폭풍우를 만났다.
“아! 바다에서 나의 생을 마감하는 구나”
결국, 나침반 하나에 의지하여 활로를 찾아 목숨을 건졌던 일은 아직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털어 놓았다. 참으로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사나이다.
1985년부터 한국말 배워
그의 한국어 실력은 수준급이다. 한국어를 배운지 20년이 넘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열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1985년 후쿠오카 한국어 교육 원장이었던 대구의 홍종락(洪鐘洛)씨로부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홍 선생을 항상 은사(恩師)님이라고 부른다. 오츠보 씨는 홍 선생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인 1989년 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한국어 공부를 하였다. 그는 한국어 공부 시간만 되면 항상 가슴이 설랬다고 한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한국어를 같이 배운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몇 명 있다. 60세가 넘어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 들어간 가네가와(兼川)씨, 오키나와의 류큐(琉球) 조선사에 통달한 야마시로(山城)씨, TV 업계에서 톱 클라스의 한국통으로 손꼽히는 고미네(小嶺)씨 등이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홍 선생은 한국어와 일본어의 표현 방법의 차이, 문장 구조의 공통점 등 다양한 내용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때로는 한∙일 문제에 대하여 장시간의 토론회도 가졌다고 한다. 오츠보 씨는 항상 교사로서의 신념을 견지하며 학생들을 대하는 홍 선생의 교육자적인 자세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공공학교가 아닌 사적인 어학 교육에서도 이들처럼 ‘스승과 제자의 원칙’이 있었다는 것은 가슴 뭉클한 일이다.
‘나들이 클럽’의 탄생
1989년에는 후쿠오카에 하나의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 지역의 이름을 딴 ‘하카다회(博多 ?’라는 모임이다. 이 모임은 한국을 좋아하는 이 지역의 언론인이 주축이 되었다. 일명 ‘나들이 클럽’ 이라고 하기도 한다. 1990년 필자는 업무적으로 관련이 있던 와타나베(渡邊 ,현 나카무라 대학 사무총장, 60세) 씨의 소개로 오츠보(大坪) 씨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는 필자를 보자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며 유창한 한국말로 악수를 청했다. 그는 자신이 ‘나들이 클럽’의 간사(幹事)를 맡고 있다고 했다. 필자는 ‘나들이’ 란 “곧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잠시 가까운 곳에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내일 나들이 클럽의 총회가 있습니다. 꼭 오셔서 그러한 의미를 설명해 주세요. 회원들이 좋아 할 것입니다.”며 필자를 특별 연사로 불렀다. 필자와 그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의 일이다. 참으로 긴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필자와 그는 ’가라오케‘에 가서 노래 시합을 하였다. 때로는 불꽃 튀는 노래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필자는 일본 노래, 그는 한국 노래다. 1992년 오츠보 씨는, 나고야(名古屋) 지국(支局)으로 발령을 받았다. 친화력이 좋은 그는 나고야 중부전략연구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였고, 필자를 이 연구회의 특별회원으로 초청했다. 오늘날 나고야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은 오츠보 씨의 역할이 컸다. 후쿠오카와 나고야, 그리고 서울을 연결하는 다리를 그가 놓은 셈이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부채(扇)다’
요즈음은 선풍기나 에어컨에 밀려 부채가 자리를 잃고 있지만, 일본에는 아직도 부채가 중요한 선물이 되고 있다. 옛날에는 부채가 단순히 더위에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 외에 시와 그림을 그리는 화폭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오츠보 씨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부채(扇)로 표현한다.
“부채를 펼칠 때 느끼는 기분이 온화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부채에 그려져 있는 시화(詩畵)가 멋스럽기도 하고요. 또, 부채를 접으면 의식하지 않아도 다시 펼쳐지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접었던 부채를 펼치는 것처럼 언제든지 ‘나들이’ 할 수 있는 나라- 그리고 멋스러운 나라- 한국에 대한 그의 부채론 이다.
그는 일본 메이지(明治) 대학 출신으로 1962년에 후쿠오카의 서일본(西日本)신문사 계열의TV 회사에 입사하여 기술국, 영업국, 나고야 지국의 근무를 마치고 현재는 이 회사의 자회사인 TNC 기획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그는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어 한다. 그가 50세 이후부터 줄곧 강조하고 있는 키 워드(Key Word)는 선린우호(善隣友好)다. 그의 선린우호가 한국에서 결실을 맺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닌 ‘너무나 큰일’이기 때문에 기대가 더욱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