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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추적

日帝 함남지사 이규완 가문의 2억 달러 유산, 과장인가 사실인가

글 : 안치용  在美 언론인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johh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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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 이규완, 외국인 장모로부터 거액 유산 상속
⊙ 60년대 신문에도 등장하는 遺産 스토리
⊙ 이규완 후손, “이승만 지원” 주장
⊙ 유언 상당히 부풀려 있는 듯
1963년 7월 7일 《일요신문》8면. ‘故이규완 일가의 상속비화’를 소개하는 기사.
  “2억 달러를 찾아 사회에 환원하고 싶습니다.”
 
  10월 초 서울시 중구 호텔에서 만난 친일파 이규완(李圭完·1862~1946)의 후손(後孫)은 올해 초 사망한 외할아버지 이순영씨가 작성한 ‘유산 상속의 유래’라는 제목의 자술서(自述書)를 기자에게 보여줬다. 80여 년 전에 자신의 집안으로 상속된 천문학적인 유산 이야기였다. 이순영씨의 딸 이옥진씨를 대신해, 기자를 찾은 이씨의 아들 김신(37)씨는 이규완의 고손자(高孫子·증손자의 아들)이다. 자술서에는 집안에 내려오는 2억 달러 유산의 내력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 있었다. 기자는 가족관계 증명서를 통해 김씨가 이규완의 후손임을 확인했다.
 
  2007년 7월 10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규완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다. 이규완은 일제시대 강원도 장관과 함경남도지사를 지내고, 동양척식주식회사 고문까지 역임했다. 당시 결정 이유서를 보면, 이규완의 친일행각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규완 후손에 따르면, 이야기는 대한제국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4년 이규완은 갑신정변(甲申政變) 참여 후 일본으로 도망했다. 그 당시 일본인 이매자(李梅子·일본명 나카무라 우메코)와 결혼했는데, 1928년 이매자는 친어머니인 스페인계 캐나다인 마가렛 고츠로부터 2억 달러의 유산을 상속받았고, 그 돈을 캐나다 은행에 예치했다는 것이다.
 

 
  후손, “이규완은 친일파 아니다”
 
  친일파의 유산 상속 스토리는 호기심을 끌기 충분했다. 특히 이규완 후손 김신씨는 “유산을 찾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며 “이규완 할아버지는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친일파 이규완이 아닌 인간 이규완을 보아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간 이규완 할아버지는 춥고 배고프고 배우지 못했어요. 그 당시 모든 국민이 그랬죠. 그래서 이규완 할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 살기를 원했어요. 비록 식민지라도 국민이 배부르게 먹고 정치, 경제가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즉 이미 친일파로 정리되었지만 자신의 할아버지는 떳떳하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규완은 어떤 인물이었고, 나아가 2억 달러 유산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규완 집안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근현대사 곳곳의 역사적 사실들이 마치 모자이크를 맞추듯이 맞아 들어가는 묘한 재미가 있었다.
 
  2억 달러 미스터리를 추적하면서,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 김영수 연구위원(한국근대사)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조언을 통해 당시 주요 역사 문헌, 신문 기사 등을 발굴했다. 이규완 집안에서 내려오는 서류, 구전(口傳)을 이번에 발굴한 역사적 자료와 대조하면서 2억 달러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이규완(李圭完·1862~1946)

 
이규완 자서전 《이규완옹백년사(李圭完翁百年史)》.
  거액의 유산 상속 스토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1800년대 구한말(舊韓末)의 한반도 상황과 이씨 집안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규완은 전주 이씨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이규완은 젊은 시절 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의 수하(手下)에 들어가 개화파에 가담했다.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이유서에 따르면, 이규완은 1880년 19세에 박영효 문하에 들어간 뒤 1883년부터 1884년 7월까지 일본 동경 육군 호산학교에서 수학했다. 1884년 10월 시종무관 대위가 됐다. 한성부판윤을 지냈던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있는 동안 일본의 사관생도를 교관으로 불러들여 약 천 명의 군인들을 훈련시켰으며, 그때 한국에 온 사관생도들이 바로 이 육군 호산학교 생도들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규완은 1884년 10월 19일 갑신정변에 참여했으나 3일 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했고 1885년 2월 박영효, 서재필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가 1887년 8월 일본으로 돌아왔다. 박영효의 수하로서 갑신정변, 그리고 일본과 미국으로의 망명 등 그와 한몸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친분
 
  이규완은 그 뒤 1894년 7월 일본에서 귀국해 그해 12월 경무관으로 임명됐으나 1895년 7월 박영효 역모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가 3개월 만에 돌아온 이씨는 당시 34세로 일본의 야마구치현, 즉 시모노세키 인근에 정착했다. 당시 17세의 일본 처녀 나카무라 우메코(한국명 이매자)를 만났다. 을사늑약 체결 강요 등 일제식민지배의 원흉으로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는 우메코 집안의 사동 출신이었다.
 
  이규완의 자서전인 《이규완옹백년사(李圭完翁百年史)》 76쪽을 보면 이와 관련해 의미 있는 내용이 있다. 이규완의 부인 이매자(나카무라 우메코)의 집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사동(使童·잔심부름하는 아이)으로 일했다는 부분이다. 내용은 이렇다.
 
  “이토는 어릴 때에 매자(梅子) 부인 친가에서 경영하는 정미소 사동으로 있었는데 이렇게 입신출세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으며 모두 내 일과 같이 기뻐하였다.”
 
  대부분의 조선인은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알게 됐지만 이규완은 그보다 10여 년 전 이미 이토 히로부미와 인연을 맺으면서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스승으로 모시던 사람의 딸이 이매자라고 전해진다. 이렇듯 ‘일본망명객’ 이규완은 우연한 기회에 이토 히로부미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뒤에 이규완도 한편으로는 탄탄대로에, 한편으로는 한민족 지탄의 대상인 친일파 반열에 오르게 됐다.
 
  이규완은 1907년 7월 일본에서 귀국했다. 이보다 약 2년 앞선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특명전권대사로 대한제국에 부임한 뒤 조정대신들을 강압해 을사늑약을 체결,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을 장악했다. 그 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통감에 부임한 뒤 1907년 을사오적으로 잘 알려진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을 중심으로 친일내각을 구성했음을 감안하면, 이토 히로부미가 이규완을 불러들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된다.
 
 
  조선 청년 일본군 입대 후원
 
  이씨는 1907년 11월 귀국 4개월 만에 중추원 부찬의가 되고 1908년 6월 11일부터 1910년 9월 30일까지 강원도관찰사를, 1910년 10월 1일부터 1918년 9월 22일까지 약 8년간 강원도 장관을 지냈다. 이는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이씨는 1918년 9월 23일부터 1919년 8월 19일까지 함경남도 장관을, 그 다음날부터 1924년 12월 1일까지 함경남도지사를 지냈다. 약 16년간 일제 관료를 지낸 것이다. 함경남도지사에서 퇴임한 뒤 1933년까지 약 9년간은 동양척식주식회사 고문을 지냈고 그 기간 중인 1927년 2월 15일부터 1928년 4월 29일까지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장을 지내는 등 일제시대 그야말로 친일파로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인 1939년 2월 7일에는 조선의 청년들을 일본군으로 입대시키는 역할을 했던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 이사를 역임하다 1946년 12월 15일 광복 약 1년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2007년 7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이유서’에 언급된, 이규완의 친일 사례는 다음과 같다.
 
  60년대 신문에 등장하는 遺産 스토리
 
올해 초 사망한 이규완 후손 이순영씨가 작성한 유산 관련 사실관계를 기록한 ‘유산 상속의 유래’.
  1963년 7월 7일 《일요신문》은 8면에 ‘故 이규완 일가의 상속비화’를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다. ‘韓·日·加 세 나라에 걸친 3대의 유산’이라는 제목에, “꿈같은 사실… 3억 불이 굴러들어온다”며 관련 내용을 다뤘다. 2억 달러 유산을 3억 달러로 늘려 잡은 것은, 이자 등을 합쳐 추정했기 때문이다. 기사를 소개하면 이렇다(당시 원문 그대로 표기).
 
  “「카나다」 「밴쿠우바」의 어느 은행에서 잠자고 있다는 3억 「달러」의 유산이 한국인에게 상속된다는 이야기는 최근에 와서 그 실현성이 가능하다는데서 또 하나의 색다른 하제를 던지게 되었다. 3억 「달러」라면 우리나라 살림의 총규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막대한 재산이다. 한때 상속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물이 없어 거의 가망이 없을 듯이 보여졌으나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유서·호적상의 기재 등 상속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물이 발견되어(?) 오는 8, 9월을 고비로 무슨 귀결이 지어질 듯하다. 한국·미국·일본 이렇게 3국의 혈연관계와 함께 「클로즈업」된 이 화제는 누구보다도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미국인 선교사 「패인」씨의 입회입증이 「키포인트」가 될 것 같다. 수수께끼 같은 이 화제를 잘 풀어줄 사람이 바로 「패인」씨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그동안 각 방면으로 탐지한바 문제의 인물이 해방 후 한국을 다녀간 사실과 기독교 관계 인사들을 통해 행방을 알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주게 되어 이것이 화제로만 남을 것 같지는 않다.”
 
이규완의 친일 사례
 
  *일본군사령관에게 독립군 鎭壓 요구
  《동아일보》 1921년 8월 24일 3면

 
  산림지대에 군대 출동, 이 함남지사가 출병 요구한 결과
 
  배일단이 평안북도에 침입한 이래 이미 20여 일이 지났으나 아직 완전한 토벌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함경남도 당국에서는 군대의 출동을 요구하고 군대와 연락을 도모하여 협력일치로 철저히 토벌의 목적을 도달하고자 마침내 함경남도지사 이규완씨는 20일 4시에 함흥 제37연대 연대장에게 출병을 요구하였더니…
 
 
  *일본천황 臣民 강조
  《매일신보》 1916년 4월 12일 2면

 
  道長官歷訪, 강원도 장관 이규완씨 談
 
  농사, 양잠, 治道, 축우 기타 식산흥업에 관한 사업의 시설은 총독의 시정방침에 기초하여 착착 진행 중임은 타도와 대략 동일한 (중략) 우리 조선인의 富力이 내지인을 필적하여 납세 기타 국민된 의무를 행하게 된다면 一視同仁(멀고 가까운 사람을 똑같이 대함)하시는 우리 천황폐하의 赤子로 어찌 내지인과 동등한 권리를 향유치 못하겠는가. 참정권을 획득함은 물론이고 비록 국무대신이나 駐外 사신이라도 가히 하지 못할 자가 없을 것으로 믿는다.
 
 
이규완 후손, “이규완이 이승만 지원”

 
  《일요신문》 보도 이전인 이승만 정권 시절 말기에도 관련 내용은 세간의 화제였다. 이규완 후손의 주장은 이렇다.
 
  “이규완 옹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어요.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고마운 마음에 이규완 옹의 아들 이선길, 손자 이순영을 경무대로 수차례 초대했어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화신백화점 앞 신신백화점 부지를 불하(拂下)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선길 할아버지는 이를 거절했어요. 최근 돌아가신 이순영 할아버지가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어요. 이승만 대통령도 3억 달러 이야기를 알고 있었어요. 당시 그 자금을 한국으로 들여오기 위해 여러 차례 만나서 의논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런 이유에서 당시 언론에 보도되는 등 화제가 되었어요.”
 
  그렇다면 3억 달러는 어떻게 이규완 집안에 상속되게 된 것일까. 이규완 후손의 주장과 올해 사망한 이순영씨의 유언, 역사 문헌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李圭完
 
  1862.11.15 출생
  1880. 박영효(朴泳孝)의 문하에 들어감
  1884.10.19 갑신정변에 참여 후 일본으로 피신
  1885.2~1887.8 박영효, 서재필(徐載弼) 등과 도미(渡美), 그 후 일본으로 돌아옴
  1894.7 일본에서 귀국
  1895.7~1907.7 박영효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피신
  1908.6~1910.9 강원도 관찰사
  1910.10~1918.9 강원도 장관
  1919.8~1924.12 함경남도지사
  1923.6 일본 정부로부터 정4위에 승위 됨
  1924.12~1933 동양척식주식회사 고문
  1939.2 경성부 육군지원자 후원회 이사
  1946.12.15 사망
 
  일본인 혼혈 여인과의 운명적 만남
 
나카무라 우메코(한국명 이매자).
  거액 유산 상속의 유래는, 바로 이 시기, 즉 1895년 박영효 역모사건에 연루돼 다시 일본으로 피신한 뒤 한 일본인 혼혈(混血) 여인 나카무라 우메코(한국명 이매자)를 만나 결혼한 것은 이미 기술한 바 있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를 연결시킨 부인 나카무라 우메코는 어떤 인물일까. 이규완 후손에 따르면, 이규완의 부인 나카무라 우메코는 1880년 5월 15일 일본 외교관이던 나카무라 이치와 마가렛 고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96년 7월 15일 이규완과 결혼했다고 한다. 마가렛 고츠의 기구한 일생이 한국인 후손에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유산을 남겼다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낳게 된다.
 
  스페인 왕손으로 알려진 마가렛 고츠는 1876년 미국에 근무하던 일본인 외교관 나카무라 이치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당시 이혼녀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결혼 뒤 1877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장남을 출산하고 1880년 딸을 낳았으니, 그 딸이 바로 나카무라 우메코이다. 일본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한 것이 1860년임을 감안하면 나카무라 이치는 미·일 국교 수립 초창기에 미국에 파견된 외교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나카무라 이치는 본국 귀국 명령을 받음에 따라 1880년 갓난아이인 우메코만을 데리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 이듬해인 1881년 고츠가 뒤따라 일본을 방문했는데, 나카무라 이치는 일본에 본처와 아들까지 둔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고츠는 우메코를 나카무라 이치 가문에 입적시키고 많은 양육비를 준 뒤 나카무라 이치와 헤어졌다. 다만 장남은 자신이 키우기로 하고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그 뒤 고츠는 수시로 한국과 일본 등을 드나들며 대한제국 황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고츠는 1900년 한국을 방문해 시종문관인 민영환을 만나 조선인들의 이민을 주선했다고 한다.
 
나카무라 우메코와 이규완 집안 가족들.
  또 1902년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고츠는 제물포항에서 출항한 하와이 이민선이 일본 나가사키, 고베 등에 기항, 일시 상륙할 때 이들 조선인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 많은 도움을 줬다는 것이 이규완 후손의 주장이다.
 
  이규완의 부인 나카무라 우메코는 1905년 26세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다. 1905년 요코하마에 살던 미국인 선교사 페인은 나카무라 우메코에게 친어머니가 마가렛 고츠라는 사실을 알려준 뒤 모녀 상봉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친모인 고츠가 딸 우메코를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 만나고 싶다며 선교사 페인에게 우메코의 여비를 보내며 딸을 만나려 했다.
 
  당시 우메코는 갓난아이를 데리고 중국 상하이로 갔으나 배 도착이 늦어져 만남이 무산됐다. 그러나 당시 고츠가 딸을 위해 메모를 남겼는데 ‘싱가포르에 있는 모 외국인 저택으로 찾아와라’는 전갈이었다. 우메코는 다시 싱가포르로 가 감격적인 첫 모녀상봉이 이뤄졌다. 이때 모녀간 기념사진도 촬영하고 상속서류와 상아로 만든 도장을 전해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고츠는 우메코에게 일가족의 캐나다 이민을 권했으나 우메코는 남편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민은 이규완의 반대로 무산됐다. 고츠는 싱가포르에서 딸과 헤어질 때 적지 않은 돈을 주었다. 우메코는 그 뒤 일본에서 생활할 때 돈이 필요하면 선교사 페인을 찾아가 상아도장을 제시하고 돈을 찾아갔다. 선교사 페인은 중간에서 돈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상아도장, 즉 하얀색 도장이 친딸이라는 징표였다.
 
 
 
어머니 고츠 2억 달러 유산 남겨

 
  모녀의 상봉 7년 뒤인 1912년 우메코의 오빠는 캐나다 밴쿠버 모 은행의 행장으로 재직하던 중 미혼인 상태에서 사망했다. 고츠 씨는 페인을 통해 상속을 위해 캐나다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이때 남편인 이규완이 “한국 사람들이 다들 고생하고 있는데 우리만 잘살자고 갈 수가 있겠느냐”고 반대하여, 캐나다행을 포기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28년 마침내 고츠 여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이규완 후손에 따르면, 우메코는 경성부 종로 5정 304번지에서 살 때 페인으로부터 사망통지와 함께 유언장을 전달받았다. 유언장의 내용은 이러했다.
 
  “사랑하는 내 딸 우메코, 언제든지 캐나다에 와서 유산을 상속받도록 해라. 우메코가 상속받을 유산은 2억 달러이다. 그동안 나를 보살펴온 양녀가 있는데 그에게도 일부 유산을 줬으며 너의 재산은 양녀가 관리하도록 했으니 안심해라. 미스터 페인을 만나면 모든 일을 살펴줄 것이다. 양녀나 페인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일제시대 유산 상속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와중에 1939년 미국-소련과 일본-독일이 맞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그동안 연락을 맡았던 선교사 페인마저도 일본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귀국함으로써 페인과의 교류도 단절되고 말았다.
 
 
  상속서류 한국전쟁 도중 사라져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고 그 이듬해인 1946년 12월 15일 이규완이 사망했다. 상속녀인 우메코씨마저도 1949년 9월 14일 유명을 달리한다. 우메코의 상속 권리는 이선길을 비롯한 아들 4명과 딸 5명 등 9남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유산 상속에 필요한 증거품인 유언장, 상아도장, 고츠 여사의 사진 등 모든 관계서류가 한국전쟁 도중에 사라졌다. 이들은 전쟁이 나자 이선길의 차녀인 이옥의 집이 있었던 춘천시 교동 5번지 소재 초가 지붕 밑에 이들 서류들을 숨겨두고 피란을 떠났다. 북한 인민군의 취사장으로 사용되었던 이 집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집 전체가 불타고 말았다. 그 결과 남은 증거는 단 하나 일본인이었던 우메코와 이규완이 혼인했다는 사실이 기재돼 있는 호적등본뿐이었다.
 
  한국전이 끝난 뒤 이들은 다시 유산 찾기에 나섰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된 뒤 당시 강원도지사인 최규옥의 주선으로 이규완의 차남인 이선길과 그의 아들 이순영이 경무대에서 이 대통령을 만나 유산 문제를 논의했다. 최규옥의 약력을 조회한 결과 이들의 주장대로 1949년 11월부터 1954년 7월까지 제3대 강원도지사를 역임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마도 이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것은 1953년 종전 이후부터 1954년경으로 추정된다.
 
  이승만 대통령도 유산 찾기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들의 캐나다행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다 1961년 5·16혁명을 맞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혁명정부에 수차례 진정서를 보내 이 같은 사연을 알리고 혁명정부가 미(美) 국무부 등과 교섭, 비자 발급 등에 나섰지만 또 캐나다행은 좌절됐고 유산 상속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 뒤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 등으로 친일파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자 이들은 유산을 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보다는 숨죽이며 생업에 열중했다.
 
  이규완 후손의 주장에 따르면, 페인 선교사의 부인은 1970년대까지 캐나다 토론토의 한 병원에 정신이상 증세로 입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당시 페인 부인의 주소는 토론토 소재 한 한국교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가 이 한국교회로 전화를 걸어봤지만 이미 40여 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 결과 페인 선교사의 후손들은 찾을 수 없었다.
 
 
  유언 상당히 부풀려 있는 듯
 
이규완의 친필 글씨. 《이규완옹백년사(李圭完翁百年史)》.
  이렇듯 이규완 후손의 주장은 상당히 정교하게 되어 있다. 엄격한 검증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이규완 후손은 “이매자 외고조할머니에게 남긴 유산은 2억 달러지만 당초 유산은 7억 달러였다. 고츠 할머니가 7억 달러의 유산 중 5억 달러는 자선사업단체에 기부하고 2억 달러를 외고조할머니에게 남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산액수는 상당히 부풀려졌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그 액수가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2억 달러의 유산이라면 지금 한화 20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약 86년 전인 1928년 당시로 환산하면 가히 상상조차 불가능한 엄청난 돈이다. 미국 정부의 물가상승 등을 고려해 화폐 가치를 환산해 보면, 1928년 1달러는 현재 13.91달러에 달한다. 보수적으로 환산하더라도 1928년보다 물가가 14배 상승, 당시 1달러는 현재 14달러에 이른다. 그렇다면 당시 2억 달러는 현재 28억 달러, 약 3조원이다. 전체 유산 규모 7억 달러는 현재 98억 달러, 10조원이다.
 
  그렇다면 당시 2억 달러는 어느 정도의 돈일까. 1928년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미국의 세입은 395억 달러, 세출은 300억 달러여서 95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공식기록이다. 그렇다면 2억 달러는 당시 미국 세출의 0.7%에 달하는 거액이다. 고츠의 전체 유산이 7억 달러라는 게 사실이라면 이는 당시 미국 세출의 2.33%에 달한다. 과연 개인이 이렇게 큰돈을 가지고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특히 캐나다 정부의 경제 규모를 따져보면 이 같은 유산 규모는 캐나다를 뒤흔들 정도임을 알 수 있다. 1928년 캐나다의 전체 국민총생산, 즉 GNP는 60억5천만 달러였다. 2억 달러 유산은 캐나다 전체 경제 규모의 3.3%, 7억 달러는 11.6%에 달한다. 만일 이 같은 막대한 유산을 가진 사람이 사망해 재산을 상속한다면 캐나다뿐 아니라 전 세계의 큰 뉴스가 됐을 것이지만 그 같은 뉴스를 찾을 수는 없었다.
 
  미국의 대부호라면 록펠러를 떠올린다.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석유회사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록펠러 가문의 사실상의 창시자로 존 D 록펠러를 꼽는다. 1839년에서 1937년까지 생존한 존 D 록펠러는 죽기 3년 전인 1934년 ‘록펠러 패밀리 트러스트’를 만들어 유산을 남겼다. 그 액수가 5억4천만 달러였다.
 
  아마도 유산 이야기가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면서 과장됐거나 페인 선교사 등이 전해주는 유산 규모를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록에서 ‘마가렛 고츠’ 찾기 어려워
 
  또 유산액수를 떠나서 유산의 유무를 알아보는 것도 사실상 쉽지 않다. 유족들이 마가렛 고츠의 영문 표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유산 찾기에 앞서 고츠의 존재를 찾아야 하는데 이는 상당히 어렵다. 이규완 후손들은 Margaret, T Cous일 것이라고 말했으나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활성화된 조상 찾기 사이트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동시대의 인물 중 동일한 영문 표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조상 찾기 사이트에서 잘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같은 영문 표기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미국 정부에서도 종종 이용하는 사이트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신력이 있다.
 
  대신 Margaret Coutts라는 표기를 사용하는 캐나다인은 존재했다. 그러나 출생 시기는 1855년경으로 엇비슷했으나 사망 시기가 달랐고 가족관계도 달랐다. 결정적으로 스페인 계통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계통이라는 점도 이씨 유족이 설명하는 고츠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이처럼 정확한 영문명을 알지 못하고는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에 비유될 정도로 어렵다는 점이 유산 찾기의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큰 장애요인이다.
 
  고츠와 딸 우메코의 연락을 맡았던 페인 선교사의 후손을 찾는 문제도 쉽지 않았다. 페인 선교사 또한 그 영문 표기를 모르고 있고 그 부인의 마지막 주소지로 알려진 캐나다 토론토의 한 한국교회도 페인 부인의 존재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규완은 생전에 “한국 전체를 사고도 남을 돈이니 반드시 찾아서 나라를 위해서 써라”고 말했다고, 후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28년 당시 캐나다 국적의 한 여성이 현실적으로 그 같은 액수의 돈을 소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정부에 이 같은 유산을 찾도록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음에도 진행이 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수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 액수의 거액은 아닐지라도 적지 않은 돈의 유산이 존재했다는 추측은 가능하다. 여러 선교사가 귀부인의 부탁을 받고 딸에게 적지 않은 돈을 전해줬을 뿐 아니라 싱가포르 등 외국에서의 만남도 주선하는 등 일정액의 유산 존재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다만 9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점 등을 감안하면 유족들이 이를 찾아내고 확인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 어렵다.
 
  이렇듯 어려운 일이지만 이규완 자손은 1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산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의 노력이 과연 빛을 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인터뷰]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김영수
 
  이규완과 명성황후 암살 未遂사건
 
사진 : 서경리
  1800년대 말 이규완의 행적을 쫓아가면 대한제국 말기의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와 관련된 부분이 주목된다. 암살 미수는 박영효 역모사건과 엉켜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김영수 연구위원(한국근대사) 설명을 통해 당시 상황을 복원했다.
 
  —박영효 역모사건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1895년 5월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얻은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했어요. 삼국간섭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러시아에 접근했어요. 일본의 후원을 통해 정계에 복귀한 내부대신 박영효는 러시아에 접근하는 왕실을 견제했고요. 일찍이 철종의 부마가 되어 금릉위(錦陵尉)로 불린 박영효는 1884년 전후영사(前後營使) 겸 우포장(右捕將)으로 갑신정변에 참가했지만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박영효는 1894년 12월 일본의 후원을 통해 정계에 복귀하여 내부대신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1895년 7월 왕실을 견제하기 위해 시위대(侍衛隊)를 일본 군사교관에 교육받은 훈련대(訓練隊)로 교체하여 대궐 수비를 담당시키려 했어요.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명성황후는 강력히 반대하면서 ‘박영효가 역모를 도모했다’며 박영효를 정계에서 축출한 것이죠.”
 
  —이규완이 명성황후 암살 미수사건에 개입한 것은 사실인가요.
 
  “당시 일본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의 회고록, 주한 일본공사관이 본국 정부에 보낸 문서에는 박영효가 1895년 7월 역모를 꾸민 적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하지만 1895년 7월 11일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본국 외무부에 보낸 문서를 살펴보면 “박영효는 자신에 대한 왕비의 제거 음모에 맞서서 대항했고, 스기무라도 최후의 방법을 결정할 것을 박영효에게 촉구했다”고 되어 있죠.
 
  또 박영효는 1895년 7월 7일 6시경 그의 부하 이규완과 신응희(申應熙) 등을 동반하여 주한 일본공사관에서 남대문을 거쳐, 용산에서 작은 배를 이용해서 인천으로 도피했어요.
 
  이규완은 경무부사의 신분으로 박영효의 역모사건에 핵심인물이었어요. 러시아 측 문서에 따르면, 박영효와 이규완이 명성황후와 민씨 일가를 제거하려 했다는 점이 확인됩니다.”
 
  이규완은 자서전인 《이규완옹백년사(李圭完翁百年史)》 62쪽에서 이를 부정하고 있다.
 
  “박영효는 신응희가 지휘하는 훈련대와 이규완이가 인솔하는 경찰대를 사주하여 민비를 저해(沮害)하고 민비붕당각료를 암살한 음모를 하였다는 무근지설(無根之說·근거 없이 떠도는 말)로 위증하여 결국은 박영효와 이규완은 파면되었다.”

 
박영효.
  —박영효와 이규완은 어떤 관계였나요?
 
  “이규완은 17세에 박영효의 사동으로 들어간 이후 19세에 박영효의 문하생으로 그의 비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1884년 갑신정변에 함께 참여한 전력이 있어요.
 
  둘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사례가 있어요. 1894년 3월 김옥균·홍종우가 상해로 떠나자, 이일직의 계획에 따라 박영효 암살을 시도했어요. 권동수가 서예에 능한 점을 이용해 박영효의 별실에서 휘호를 쓴 뒤, 박영효가 품평을 하는 사이 저격할 계획을 세웠죠.
 
  박영효가 투숙하고 있던 친린의숙(親隣義塾)에 김태원(金泰元)을 보내 박영효를 유인하게 하였는데, 그가 도착하자 바로 계획이 누설되어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리하여 권동수는 권총과 일본도를 휴대해 운래관(雲來館)에 대기하고, 이일직이 직접 박영효를 방문, 암살하려 했어요. 그러나 이일직은 이규완 등에 의해 붙들려, 친린의숙에 감금되었어요.
 
  1898년에 접어들면서 독립협회(獨立協會)가 강력한 정치 단체로 부상함에 따라 (일본에 있던 박영효는) 본국에 이규완 등의 심복을 밀파하여 독립협회와의 제휴를 통한 자신의 정계 복귀를 기도했어요.
 
  그러나 고종과 수구파 대신들은 오히려 이를 구실로 독립협회를 해산시켜 버렸죠.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계획을 바꿔 1900년 7월 본국에 밀파되어 있던 이규완 일행에게 의화군 이강(義和君 李堈)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 음모를 지시했어요. 그러나 음모도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그의 정계 복귀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고, 궐석재판결과 교수형이 선고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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