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대통합위원장 提案 다시 와도 고사할 것”
⊙ 민주당, 독재자들에 저항하여 싸웠던 과거에서 벗어나야
⊙ “<백년전쟁>, 무식한 사람들이 만들었더라”
朴相曾
⊙ 83세. 서울대 사학과 졸업.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 신학 석사.
⊙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 참여연대 공동대표, 국민통합시민운동 공동대표.
⊙ 민주당, 독재자들에 저항하여 싸웠던 과거에서 벗어나야
⊙ “<백년전쟁>, 무식한 사람들이 만들었더라”
朴相曾
⊙ 83세. 서울대 사학과 졸업.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 신학 석사.
⊙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 참여연대 공동대표, 국민통합시민운동 공동대표.
지난 3월 27일 오후 퇴근 후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데 마침 TV조선 <판>에 박상증(朴相曾) 목사가 나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진보 교계의 원로(元老)이자, 역대 정권에서 늘 재야 진영에 몸담았던 박 목사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했다. 채널을 고정했다.
“보수 진영은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데 민주당과 좌파 진영은 그 옛날 흘러간 ‘민주화 운동 타령’이나 하고 있다”, “취임 100일도 안 됐는데 무조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등 예상외의 발언들이 쏟아졌다. 진보에서 보수로 ‘전향(轉向)했다’는 오해를 살 만했다.
실제 박 목사는 18대 대선 직전인 2012년 11월 1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朴槿惠)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는 이유로 진보 진영으로부터 ‘변절’ 공격을 받고 있었다. 박 목사의 자세한 입장이 듣고 싶었다. 방송 다음 날인 28일 박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4월 3일 오후 3시 집에서 보자”며 수락했다.
약속대로 4월 3일 골목을 지나 닿은 녹번동의 허름한 단독주택에서 박 목사와 마주했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진보적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여든세 살의 박 목사에게 곧바로 ‘전향’ 여부를 묻는 것은 실례(失禮)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과 관련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박 목사는 1997년부터 2007년도까지 ‘참여연대’ 대표를 맡았으며 2000년 8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박 시장은 1996년 5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참여연대 사무처장, 2000년 8월부터 현재까지 아름다운 재단 총괄상임이사를 맡으며 박 목사와 인연을 맺었다.
“朴元淳 시장은 건전한 좌파”
—박원순 시장과 오래 일을 했는데 박 시장은 어떤 스타일입니까.
“건전한 좌파로 볼 수 있지요. 현실주의자의 면모도 있고요. 밖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하더라고요. 한 예로 참여연대 설립 초반(1996~1997년)에 우리를 알리기 위해 《한겨레》에 기삿거리를 많이 제공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한겨레》에 예상했던 우리와 관련한 기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박원순 시장이 ‘뭐 했느냐’며 애들을 무섭게 잡더군요. 그리고 흠이 있다면 상당히 사람이 충동적입니다.”
—충동적이라니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즉흥적인 아이디어를 곧 실천하려고 하는 성급함이 있었어요.”
—참여연대가 시작한 ‘낙천·낙선 운동(2000·2004년)’도 박 시장의 즉흥적인 아이디어였나요?
“그렇다 볼 수 있죠. 충분한 토론이 없었습니다. 저는 사실 반대했어요. 장기적 비전 없이 당장의 인기만을 보고 실행한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참여연대의 평가가 절대적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실제 2000년도의 낙천·낙선 운동은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4년 뒤인 2004년에는 별 영향이 없었습니다.”
—2012년 11월 1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 시장은 어떤 사안에서는 자기주장대로 가기 위해 아예 나와 논의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던데요.
“그랬죠. 하루는 아름다운 재단 이사회 회의에서 김승유(金勝猷)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방글라데시의 그라민뱅크(Grameen Bank)와 같은 사회연대은행 모델을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더라고요. 저는 반대했습니다. 우리나라와 방글라데시는 처한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죠.
그런데 박 시장이 여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저 모르게 김 전 회장과 이야기를 했나 봐요. 2007년 7월 하나은행이 박 시장이 만든 희망제작소와 최대 300억원 규모의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소액 신용 대출) 사업을 벌인다는 기사가 나오더군요.”
2008년 2월 설립을 목표로 박 시장이 하나은행과 야심 차게 준비했던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은 결국 흐지부지됐다. 박 시장은 2009년 6월 사업 실패의 배후에 국정원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서울시장이 된 이후 박 시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2012년 6월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서울시장 공관으로 초대한다고 해서 가보니 백낙청 교수, 함세웅 신부 등이 있더군요. 두 번째는 이번(2013년)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 때입니다. 예전 참여연대 활동할 때 빼고는 설에 온 일이 없는데 이번에 온다고 하더라고요. 비서가 설 전날 전화를 걸어 ‘박 시장이 내일 4시40분에 자택으로 찾아뵙고, 10분 후 이동할 예정입니다’라고 말합디다. ‘커피 한잔 마실 시간도 없겠구나’ 생각을 했지요. 당일 박 시장이 왔어요. 그런데 10분 있다 간다던 사람이 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갔습니다.”
—한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요.
“별 이야기 없었어요. 아, 제가 ‘아들 병역문제 때문에 고생이 많은 것 같은데 잘 해결됐느냐’고 물었더니 ‘해결은 됐는데 아직 잡음이 있는 것 같다’고 답하더라고요.”
—야권에서는 박 시장을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꼽고 있는데, 그와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나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지금 대통령으로 박원순 찍으라면 안 찍을 겁니다. 박 시장은 아직 더 성장해야 합니다. 매도 더 많이 맞아야 하고요.”
“安哲秀, 기본적인 예의 없는 사람”
야권의 차기 대권주자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안철수(安哲秀) 4·24 재보선 서울 노원병 무소속 후보로 이어졌다. 박 목사는 안 후보와도 4년 가까이 일한 적이 있다. 안 후보는 2008년 9월부터 2012년 9월까지 아름다운 재단 이사직을 역임했다.
안 후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박 목사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자신이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으로 있을 당시 물이 새는 가회동 재단 사무실을 ‘리모델링’하기 위해 이사들에게 후원금 1000만원씩을 내달라고 요청했는데 당시 이사였던 안 후보만 내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컸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서울 종로구 가회동 아름다운 재단 사무실은 비만 오면 막 물이 샜습니다. 그런데 이게 전세니까 누구도 고칠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리모델링을 하자고 했습니다. 비용을 뽑아보니 5억원 정도가 나왔습니다.
돈이 안 모이기에 제가 이사들에게 모두 1000만원씩 기부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1000만원 내고 당장 생활 곤란 겪을 사람은 저밖에 없었고, 12년 이사장 하면서 처음으로 요청했던 것이지요.
퇴임 직전에(2012년 8월) 실무자들한테 돈 들어왔느냐고 물었더니 안철수씨만 안 냈다고 하더군요. 정말 화가 났습니다.”
—안 후보가 아름다운 재단 이사라는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은 저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만 저는 안철수씨가 아름다운 재단을 위해 어떤 공헌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사회에 참석 안 할 때가 잦았고, 중요한 발언을 한 적도 없습니다. 밖에서는 안철수씨가 아름다운 재단의 이사가 된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저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안철수씨는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입니다.”
—버릇이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일화를 들려드리지요. 안철수씨가 2011년 6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되고 난 직후 이사회가 열렸어요. 이사들이 안씨에게 축하한다고 박수를 쳐주더군요.
마침 제 옆에 안씨가 앉았기에 제가 ‘융합이 뭐야?’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대답을 안 해요. 속으로 ‘내가 무식한 사람이라 무시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안씨가 ‘그거 영어로 컨버전스(convergence)입니다’라고 답하더군요.”
—당황하셨겠네요.
“네. 제가 좀 황당해서 ‘그건 나도 알아. 내 말은 융합이 뭐 하는 것이냐는 질문이야’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또 한참 대답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봐 옛날 60년대 내가 공부할 때 학문 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y·두 가지 이상의 여러 학문영역을 포괄하여 이루어지는 연구로서 이들 상이한 학문의 전문가나 연구원들이 각자의 학문적 접근에 관련 있는 어떤 특정의 문제를 같이 검토하면서 수행하는 연구)라는 학문이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거 아닌가? 대답을 못하는 거 보니 융합은 교수 자리 하나 더 주기 위해 생긴 학문이구먼!’이라고 비꼬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슨 대통령을 한다고….”
“안철수 노원병 출마 멋있는 정치 아냐”
—2012년 6월 안철수재단을 만들면서 아름다운 재단의 윤정숙(尹貞淑) 상임이사를 데려간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니까요. 안씨는 ‘안철수재단’을 만들면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인 윤정숙씨를 모셔갔는데 저한테는 한마디 상의도 없었습니다. 당시 안씨는 아름다운 재단 이사(2008년 9월~2012년 9월)이기도 했는데, 이사장인 저를 그렇게 취급한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밑에 사람 시켜서 우리 쪽 사람을 자기네 책임자로 끌어가려는 공작도 했습니다. 이 사람 인격이 완전히 장돌뱅이구나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안 후보가 노원병 지역에 출마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은데요,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멋있는 정치는 아니지요. 쉽게 따 먹으려 하는 장사꾼 심리 아닙니까. 지금까지 안씨가 걸어온 행보를 보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불던 안풍도 지금 사그라지지 않았습니까.”
안 후보가 출마한 노원병은 전통적으로 야권 성향이 강한 곳이다. 때문에 그가 이곳에 출마하는 것은 정치를 너무 쉽게 하려는 태도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朴槿惠 대통령과의 만남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교회일치 운동)의 주역인 박 목사의 평생 과업은 국민 대통합이다. 2013년 1월 21일 창립한 국민통합시민운동 공동 대표직을 맡은 것도 이 일환이다. 국민 대통합은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공약이기도 하다. 사실 국민 대통합은 역대 많은 정권에서 내놓은 구호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들이 그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마감했다. 이번에는 다를까.
—사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서로 공존(共存)하기가 쉽지 않은 것 아닌가요.
“예수가 하나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은 지 2천 년이 됐지만, 아직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2천 년 동안 그 모습 그대로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가 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통합을 위해서는 노골적인 토론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국민통합이 박근혜 정부 5년 만에 이뤄지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둘 것으로 봅니다.”
—대통합을 평생 과업으로 삼고 있는데 18대 대선(2012년 12월 19일) 직전(2012년 10월 중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부터 받은 국민대통합위원장 제의는 왜 거절한 것입니까.
“국민 대통합이 표를 얻기 위한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2012년 11월 국민대통합위원장 제의를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입장을 바꿨다는 말도 들렸는데요.
“아닙니다.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충무로교회 목사를 하다가 은퇴를 한 최건호 목사가 저의 제자입니다. 저와 나이 차이는 별로 안 나지만 제가 서울신학대에서 최 목사를 가르쳤었지요. 그런데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와 최 목사가 잘 아는 사이더군요.
2012년 10월 즈음 최 목사가 황 대표와 점심을 꼭 같이 먹자고 해서 약속을 잡았지요. 점심때 강남의 한 호텔에 가서 황 대표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박근혜 후보가 들어오더라고요. 그날이 처음이었어요. 실제로 박 후보를 본 것이.
박 후보가 저에게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사실 (국민 대통합에) 관심 있다. 내가 만약 한다면 같이 일할 젊은 친구들도 있긴 하다’고 이야기했지요. 애매할 수 있는 답변이긴 하지만 수락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혼선이 있었군요.
“그런 셈이지요. 이 사람들이 제가 수락했다고 판단했는지, 언론에 제가 대통합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나오더군요. ‘아, 이건 아니다’ 싶어 아니라고 언론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밤에 박 후보에게서 전화가 오더군요. ‘목사님 도와주신다고 하고 갑자기 이러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기에 일단 ‘대선이 진행 중인 만큼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제 이야기가 오해를 줬다면 죄송하다, 이해, 양해를 해달라’고 했어요.”
—대선이 끝났으니 만약 국민대통합위원장 제의가 온다면 받아들일 겁니까.
“한번 안 한다고 했는데 또 오겠습니까. 게다가 온다고 하더라도 저는 자유롭게 할 말은 하면서 일해 온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조직의 장이 되면 사람들 눈치 보면서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국민대통합위원회는 곧 출범한다. 안전행정부는 4월 3일 ‘국민대통합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 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 확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통합위원회는 국민통합 정책의 기본방향을 정하는 대통령 자문기구다. 관계부처 장관 등 20명이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한다.
主思派 국회 입성에는 민주당도 책임
—올 3월 ‘TV조선’에 출연해 국민대통합의 걸림돌은 주사파(主思派)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진보 시민운동의 대부(代父)격인 목사님이 생각하는 주사파는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까.
“제 기억으로 46년도에 중학교 졸업을 하고 그 당시에 일제 잔재로 남아 있던 서울대학 예과에 입학했습니다. 국대안 반대시위가 한창일 때였는데 선배들이 대부분 좌익 성향이 강했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남로당에 가입하라고 하더군요. 왜 가입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한 선배가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남로당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남로당에 가입하려면 공산당 삐라를 뿌리다가 5번을 잡혀가야 비로소 자격이 생겼습니다.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못 한다고 했습니다. 또 북한 지하 비밀선거도 하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거절했지요.
48년 예과에서 본과인 서양사학과에 13명이 올라갔는데 ‘저 XX는 친미(親美)고 반동(反動)’이라며 따돌리더라고요. 견딜 수가 없어서 그해에 미국으로 도망갔습니다. 말이 좀 길어졌는데, 저는 저에게 남로당 가입이나 비밀지하선거 참여를 독려한 사람들을 주사파(主思派)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 주사파라는 이야기인데요, 그렇다면 애국가(愛國歌)를 부정하는 통합진보당의 이정희(李正姬) 전 의원, 이석기·김재연(金在姸) 의원 등을 종북(從北) 주사파로 볼 수 있겠네요.
“종북 맞습니다. 이정희 전 의원 같은 경우, 18대 대선 당시 국민 세금인 선거보조금 27억3500만원을 확보하자 곧바로 후보를 사퇴했는데 이런 사람이 의원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전 의원은 대선 출마 선언으로 27억여 원의 국고보조금을 확보한 뒤 18대 대선을 사흘 앞둔 2012년 12월 16일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유로 후보 사퇴했다. 이 국고보조금은 후보가 대선에서 중도사퇴하거나, 완주했으나 저조한 지지율을 기록하더라도 반납하지 않아도 되는 돈이다.
통합진보당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야가 ‘이석기-김재연 의원 자격심사안’ 처리에 대해 합의한 것과 관련해 질문했다. 박 목사의 이야기다.
“그들이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야권연대 때문 아닙니까. 당시 TV를 보니까 민주당 한명숙 대표하고, 이정희 대표하고 야권연대를 성사시키고서 얼싸안고 기뻐하던데요. 그렇다면 민주당도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요. 민주당도 솔선수범해서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통합당 대선평가위원회가 78일간의 활동을 마치고 4월 9일 발표한 대선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4·11 총선 당시 당대표였던 한명숙(韓明淑) 의원이 100점 만점에 76.3점으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당원들이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을 연장선상에 놓고 책임을 따진 결과로 보인다.
盧武鉉 정권 때 해외 對南 공작책이 국내 행사에 참석
—야당도 중요한 국정 파트너입니다. 거기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하는데 요즘 민주당은 그렇게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선거 때마다 민주당을 찍어왔는데 지금은 내가 찍어왔던 옛날의 민주당이 아니에요. 과거 민주당의 모습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과거에는 신익희, 조병옥, 김대중 등 사회적 존경을 받는 리더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없습니다.”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도 민주당의 리더 중 한 명 아닌가요.
“노무현 정부 이후 민주당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386 중심의 NL 계열이 정권 핵심에서 일했습니다. 그래서 외교와 안보가 너무 진보적 색채를 띠게 됐지요. 그렇게 되니 여당과 무조건 부딪치고,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는 정당으로 비치게 됐습니다.”
—결국 민주당이 야당의 역할을 충실히 못하는 이유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는 거군요.
“노 전 대통령이 뭘 잘못했느냐, 2005년 8월 14~15일 광복 60돌 기념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축전’이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됐는데 해외 대남 공작책들이 다 왔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국정원 사람들한테 ‘게네 온 거 알아?’라고 물으니, ‘안다, 높은 데서 오게 했다’고 답하더라고요. 당시 상태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노무현 정권이 그런 정권이었습니다.”
—민주당이 예전 모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독재자와 싸웠던 과거만 생각해서 저항만 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면 안 됩니다. 국민에게 감동을 줘야지요. 감동은 대안(代案)입니다. 현재 민주당은 자기들만 감동하는 대안만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 논쟁이 있는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민주당이 과거 고전적 의미에서 리버럴(liberal·자유주의적인)한 정당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 목사는 현재의 민주당 모습이 안타까운지 1999년 호주에서 겪었던 일화를 들려줬다.
“영국에서는 야당이 정권획득에 대비하여 수상 이하 각 각료를 미리 정해 둔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섀도 캐비닛(shadow cabinet·예비내각)이 어떤 역할을 할까 궁금했는데 호주 다윈시에서 잘 보게 됐습니다.
동티모르 전쟁이 난 1999년도였는데, 그쪽에 살던 원주민 수천 명이 호주로 이송됐습니다. 이들 앞에서 현 정부의 이민부 장관과 야당의 이민부 장관이 원주민 수천 명 앞에서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아도 당신 나라가 편안해질 때까지 우리가 당신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더군요. ‘와 이거 진짜 민주주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민주당도 언젠가 이렇게 변화할 수 있겠죠? 싸우지 말고 남의 말을 경청할 수 있어야 변화할 수 있습니다.”
5·18 영상물을 만든 계기
박 목사는 1980년 미국에서 결성된 민주동지회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미국은 물론, 일본·캐나다 등 해외에서도 국내 민주화 운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했다. 이 일환으로 박 목사는 그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알리는 다큐멘터리도 제작했다.
—1980년 ‘5·18 광주사태’ 비디오는 어떻게 제작하게 된 것입니까.
“사실 제가 미국에서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제작한 5·18 영상물을 봤습니다. 보고 깜짝 놀랐지요. 5·18이 국내에서 북한을 동조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혁명적 사건으로 그려졌더라고요. 5·18을 왜곡하는 것 같아서 비디오를 제작하게 됐습니다.”
—비디오 제작 경험이 없어 힘들지는 않았나요.
“그렇지요. 깨끗한 화면이 필요했는데 미국 CBS 화면이 가장 깨끗했습니다. 구하고 싶은데 당시 장면당 30달러를 요구하더군요. 다 사려면 수만 달러가 필요했습니다.
어느 날 주류 도매상 하는 친구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우리 가게에 오는 친구 중에 CBS 노조위원장이 있는데 한번 부탁해 볼까?’하는 거예요. 그리고 3주 뒤에 진짜 그 친구가 비디오테이프 원본을 얻어다 줬어요. 조니워커 광인 노조위원장에게 조니워커 한 박스를 선물로 줬다고 하더군요.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시나리오 작성, 편집도 직접 했습니까.
“아니요. 시나리오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 심재원씨가 작성해 줬고, 편집은 베트남전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의 다큐멘터리를 맡았던 여성이 맡아줬습니다. 자금은 대학동창인 외과의사 김마태 박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대줬고요. 회계는 가발장사를 하던 김윤철 장로가 맡았습니다.
반 년 만에 광주를 담은 비디오를 완성했고 1981년 5월 18일쯤 뉴욕 리버사이드 처치(Riverside Church)에서 처음 상영했습니다. 아마 미국에 사는 전라도 출신들은 거의 다 왔을 것입니다. 상영 내내 예배당에는 흐느끼는 소리뿐이었어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 ‘엉터리’”
5·18 비디오 제작 이야기는 물 흐르듯 국내의 영상물 <백년전쟁>으로 옮겨갔다. 박 목사는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을 친일파,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미국의 허수아비로 그린 <백년전쟁>을 “본질을 왜곡하는 무식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비판했다.
<백년전쟁>은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을 주관해 18대 대선을 앞두고 공개한 좌파의 영상물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현대사 100년을 소재로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표방하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관해 만든 53분짜리 <두 얼굴의 이승만>이란 영상과 박정희 전 대통령 시기를 다룬 <프레이저 보고서, 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란 42분짜리 영상의 시사회를 작년 11월 29일 열고 유튜브를 중심으로 인터넷 등에 무료로 배포했다.
—영상물 <백년전쟁>이 본질을 어떤 식으로 왜곡했다고 보십니까.
“이승만씨를 친일로 규정했더라고요. 제가 이승만씨가 쓴 책 중에 읽은 게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책이 1942년도에 나온 《Japan Inside out(일본 내막기)》입니다. 책에서 그는 진주만 기습 7개월 전에 이미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만행을 봤을 때 충분히 미국을 침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당시 미국은 일본에 우호적이라 이승만씨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예측이 맞아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이런 책을 쓴 사람이 친일일까요? 박정희씨 관련 내용도 마찬가지고요.”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부분은 어디가 잘못됐습니까.
“프레이저 보고서를 인용해 박정희씨가 미국이 하라는 대로 경제정책을 펼쳤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프레이저 보고서가 뭔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1976년 미국에서 박동선씨를 중심으로 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러자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로 하여금 이 사건을 조사해 1978년 10월 31일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지요. 소위원회는 위원장이 프레이저 의원이었기 때문에 ‘프레이저 위원회’, 보고서는 ‘프레이저 보고서’로 불리게 됐습니다. 영상처럼 프레이저 리포트는 박정희씨에게 미국의 경제정책을 강요하는 리포트가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전 많은 사람이 희생된 5·16이 쿠데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기술하면 안 됩니다.”
北에 가보니
박 목사는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다음 해인 2002년 재일(在日) 대한기독교회 남북통일위원회 자문위원 자격으로 4박5일간 북한을 다녀왔다. 박 목사는 북한에도 기독교 연맹이 존재하긴 하지만 교회가 상당히 통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북한은 근본적으로 종교를 인정하지 않지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큰 봉수교회에 가보니까 남성 4중창 성가대가 나왔는데 모두 국민 가수로 이뤄졌더라고요. 동원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 가수면 우리나라에서 ‘조용필(趙容弼)’급의 가수들이 성가대로 참여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요. 다 북한에서는 유명한 가수라고 하더라고요.”
1980년대 해외 관광객들이 많아지자 북한은 그들을 위해 전시용으로 봉수교회(1988년), 장충성당(1989년)을 설립했다. 1992년에는 김일성의 지시로 칠골교회를 세웠다. 칠골교회는 김일성이 어렸을 때 어머니 강반석과 함께 다니던 옛 칠골교회를 기념해 복원 신축한 교회로 반석교회로 불리기도 했다.
교회와 성당이 있긴 하지만 북한에 종교의 자유는 없다. 북한에서 가장 높은 법이라 불리는 ‘사회주의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轉向? 유치한 이야기
인터뷰 시간이 길어져 저녁식사 시간이 지났다. 박 목사는 이만하고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집 근처 백화점 지하 음식점에 저렴하고 맛있는 ‘마파두부면’이 있다며 추천했다. “알았다”고 한 뒤 마지막으로 가장 처음 하려 했던 질문을 던졌다.
—진보 진영 주변에서는 목사님이 전향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향? 유치한 이야기지요. 제가 1981년부터 아시아교회협의회(CCA) 총무로 일하며 아시아 각국의 사회선교운동을 도왔습니다. 196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 일하다 1965년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계교회협의회(WCC) 간사로 일하게 됐는데 그때 북한과 체제경쟁을 하던 박정희 정권은 동백림사건, 인혁당사건 등 간첩사건을 터뜨렸고, 김대중 납치사건도 저질렀습니다. 그때 저는 WCC에서 이런 국내 정치상황을 전 세계로 알리는 일을 맡았습니다. 저는 일관되게 지금의 입장을 취해 왔어요. 그런 저에게 전향이라니요?”⊙
“보수 진영은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데 민주당과 좌파 진영은 그 옛날 흘러간 ‘민주화 운동 타령’이나 하고 있다”, “취임 100일도 안 됐는데 무조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등 예상외의 발언들이 쏟아졌다. 진보에서 보수로 ‘전향(轉向)했다’는 오해를 살 만했다.
실제 박 목사는 18대 대선 직전인 2012년 11월 1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朴槿惠)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는 이유로 진보 진영으로부터 ‘변절’ 공격을 받고 있었다. 박 목사의 자세한 입장이 듣고 싶었다. 방송 다음 날인 28일 박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4월 3일 오후 3시 집에서 보자”며 수락했다.
약속대로 4월 3일 골목을 지나 닿은 녹번동의 허름한 단독주택에서 박 목사와 마주했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진보적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여든세 살의 박 목사에게 곧바로 ‘전향’ 여부를 묻는 것은 실례(失禮)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과 관련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박 목사는 1997년부터 2007년도까지 ‘참여연대’ 대표를 맡았으며 2000년 8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박 시장은 1996년 5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참여연대 사무처장, 2000년 8월부터 현재까지 아름다운 재단 총괄상임이사를 맡으며 박 목사와 인연을 맺었다.
“朴元淳 시장은 건전한 좌파”
—박원순 시장과 오래 일을 했는데 박 시장은 어떤 스타일입니까.
“건전한 좌파로 볼 수 있지요. 현실주의자의 면모도 있고요. 밖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하더라고요. 한 예로 참여연대 설립 초반(1996~1997년)에 우리를 알리기 위해 《한겨레》에 기삿거리를 많이 제공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한겨레》에 예상했던 우리와 관련한 기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박원순 시장이 ‘뭐 했느냐’며 애들을 무섭게 잡더군요. 그리고 흠이 있다면 상당히 사람이 충동적입니다.”
—충동적이라니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즉흥적인 아이디어를 곧 실천하려고 하는 성급함이 있었어요.”
—참여연대가 시작한 ‘낙천·낙선 운동(2000·2004년)’도 박 시장의 즉흥적인 아이디어였나요?
“그렇다 볼 수 있죠. 충분한 토론이 없었습니다. 저는 사실 반대했어요. 장기적 비전 없이 당장의 인기만을 보고 실행한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참여연대의 평가가 절대적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실제 2000년도의 낙천·낙선 운동은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4년 뒤인 2004년에는 별 영향이 없었습니다.”
—2012년 11월 1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 시장은 어떤 사안에서는 자기주장대로 가기 위해 아예 나와 논의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던데요.
“그랬죠. 하루는 아름다운 재단 이사회 회의에서 김승유(金勝猷)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방글라데시의 그라민뱅크(Grameen Bank)와 같은 사회연대은행 모델을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더라고요. 저는 반대했습니다. 우리나라와 방글라데시는 처한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죠.
그런데 박 시장이 여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저 모르게 김 전 회장과 이야기를 했나 봐요. 2007년 7월 하나은행이 박 시장이 만든 희망제작소와 최대 300억원 규모의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소액 신용 대출) 사업을 벌인다는 기사가 나오더군요.”
2008년 2월 설립을 목표로 박 시장이 하나은행과 야심 차게 준비했던 마이크로 크레디트 사업은 결국 흐지부지됐다. 박 시장은 2009년 6월 사업 실패의 배후에 국정원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서울시장이 된 이후 박 시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두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2012년 6월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서울시장 공관으로 초대한다고 해서 가보니 백낙청 교수, 함세웅 신부 등이 있더군요. 두 번째는 이번(2013년)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 때입니다. 예전 참여연대 활동할 때 빼고는 설에 온 일이 없는데 이번에 온다고 하더라고요. 비서가 설 전날 전화를 걸어 ‘박 시장이 내일 4시40분에 자택으로 찾아뵙고, 10분 후 이동할 예정입니다’라고 말합디다. ‘커피 한잔 마실 시간도 없겠구나’ 생각을 했지요. 당일 박 시장이 왔어요. 그런데 10분 있다 간다던 사람이 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갔습니다.”
—한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요.
“별 이야기 없었어요. 아, 제가 ‘아들 병역문제 때문에 고생이 많은 것 같은데 잘 해결됐느냐’고 물었더니 ‘해결은 됐는데 아직 잡음이 있는 것 같다’고 답하더라고요.”
—야권에서는 박 시장을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로 꼽고 있는데, 그와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나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지금 대통령으로 박원순 찍으라면 안 찍을 겁니다. 박 시장은 아직 더 성장해야 합니다. 매도 더 많이 맞아야 하고요.”
“安哲秀, 기본적인 예의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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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목사의 기억에 안철수 후보는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안 후보가 2013년 3월 18일 노원구 주민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 |
안 후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박 목사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자신이 아름다운 재단 이사장으로 있을 당시 물이 새는 가회동 재단 사무실을 ‘리모델링’하기 위해 이사들에게 후원금 1000만원씩을 내달라고 요청했는데 당시 이사였던 안 후보만 내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컸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서울 종로구 가회동 아름다운 재단 사무실은 비만 오면 막 물이 샜습니다. 그런데 이게 전세니까 누구도 고칠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리모델링을 하자고 했습니다. 비용을 뽑아보니 5억원 정도가 나왔습니다.
돈이 안 모이기에 제가 이사들에게 모두 1000만원씩 기부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1000만원 내고 당장 생활 곤란 겪을 사람은 저밖에 없었고, 12년 이사장 하면서 처음으로 요청했던 것이지요.
퇴임 직전에(2012년 8월) 실무자들한테 돈 들어왔느냐고 물었더니 안철수씨만 안 냈다고 하더군요. 정말 화가 났습니다.”
—안 후보가 아름다운 재단 이사라는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은 저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만 저는 안철수씨가 아름다운 재단을 위해 어떤 공헌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사회에 참석 안 할 때가 잦았고, 중요한 발언을 한 적도 없습니다. 밖에서는 안철수씨가 아름다운 재단의 이사가 된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저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안철수씨는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입니다.”
—버릇이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일화를 들려드리지요. 안철수씨가 2011년 6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되고 난 직후 이사회가 열렸어요. 이사들이 안씨에게 축하한다고 박수를 쳐주더군요.
마침 제 옆에 안씨가 앉았기에 제가 ‘융합이 뭐야?’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대답을 안 해요. 속으로 ‘내가 무식한 사람이라 무시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안씨가 ‘그거 영어로 컨버전스(convergence)입니다’라고 답하더군요.”
—당황하셨겠네요.
“네. 제가 좀 황당해서 ‘그건 나도 알아. 내 말은 융합이 뭐 하는 것이냐는 질문이야’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또 한참 대답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봐 옛날 60년대 내가 공부할 때 학문 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y·두 가지 이상의 여러 학문영역을 포괄하여 이루어지는 연구로서 이들 상이한 학문의 전문가나 연구원들이 각자의 학문적 접근에 관련 있는 어떤 특정의 문제를 같이 검토하면서 수행하는 연구)라는 학문이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거 아닌가? 대답을 못하는 거 보니 융합은 교수 자리 하나 더 주기 위해 생긴 학문이구먼!’이라고 비꼬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슨 대통령을 한다고….”
“안철수 노원병 출마 멋있는 정치 아냐”
—2012년 6월 안철수재단을 만들면서 아름다운 재단의 윤정숙(尹貞淑) 상임이사를 데려간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니까요. 안씨는 ‘안철수재단’을 만들면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인 윤정숙씨를 모셔갔는데 저한테는 한마디 상의도 없었습니다. 당시 안씨는 아름다운 재단 이사(2008년 9월~2012년 9월)이기도 했는데, 이사장인 저를 그렇게 취급한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밑에 사람 시켜서 우리 쪽 사람을 자기네 책임자로 끌어가려는 공작도 했습니다. 이 사람 인격이 완전히 장돌뱅이구나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안 후보가 노원병 지역에 출마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은데요,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멋있는 정치는 아니지요. 쉽게 따 먹으려 하는 장사꾼 심리 아닙니까. 지금까지 안씨가 걸어온 행보를 보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불던 안풍도 지금 사그라지지 않았습니까.”
안 후보가 출마한 노원병은 전통적으로 야권 성향이 강한 곳이다. 때문에 그가 이곳에 출마하는 것은 정치를 너무 쉽게 하려는 태도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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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목사는 18대 대선 전 박근혜 대통령의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고사했다. |
—사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서로 공존(共存)하기가 쉽지 않은 것 아닌가요.
“예수가 하나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죽은 지 2천 년이 됐지만, 아직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2천 년 동안 그 모습 그대로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나가 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통합을 위해서는 노골적인 토론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국민통합이 박근혜 정부 5년 만에 이뤄지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둘 것으로 봅니다.”
—대통합을 평생 과업으로 삼고 있는데 18대 대선(2012년 12월 19일) 직전(2012년 10월 중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부터 받은 국민대통합위원장 제의는 왜 거절한 것입니까.
“국민 대통합이 표를 얻기 위한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2012년 11월 국민대통합위원장 제의를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입장을 바꿨다는 말도 들렸는데요.
“아닙니다. 그때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충무로교회 목사를 하다가 은퇴를 한 최건호 목사가 저의 제자입니다. 저와 나이 차이는 별로 안 나지만 제가 서울신학대에서 최 목사를 가르쳤었지요. 그런데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와 최 목사가 잘 아는 사이더군요.
2012년 10월 즈음 최 목사가 황 대표와 점심을 꼭 같이 먹자고 해서 약속을 잡았지요. 점심때 강남의 한 호텔에 가서 황 대표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박근혜 후보가 들어오더라고요. 그날이 처음이었어요. 실제로 박 후보를 본 것이.
박 후보가 저에게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사실 (국민 대통합에) 관심 있다. 내가 만약 한다면 같이 일할 젊은 친구들도 있긴 하다’고 이야기했지요. 애매할 수 있는 답변이긴 하지만 수락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혼선이 있었군요.
“그런 셈이지요. 이 사람들이 제가 수락했다고 판단했는지, 언론에 제가 대통합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나오더군요. ‘아, 이건 아니다’ 싶어 아니라고 언론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밤에 박 후보에게서 전화가 오더군요. ‘목사님 도와주신다고 하고 갑자기 이러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기에 일단 ‘대선이 진행 중인 만큼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제 이야기가 오해를 줬다면 죄송하다, 이해, 양해를 해달라’고 했어요.”
—대선이 끝났으니 만약 국민대통합위원장 제의가 온다면 받아들일 겁니까.
“한번 안 한다고 했는데 또 오겠습니까. 게다가 온다고 하더라도 저는 자유롭게 할 말은 하면서 일해 온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조직의 장이 되면 사람들 눈치 보면서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국민대통합위원회는 곧 출범한다. 안전행정부는 4월 3일 ‘국민대통합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 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 확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통합위원회는 국민통합 정책의 기본방향을 정하는 대통령 자문기구다. 관계부처 장관 등 20명이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한다.
主思派 국회 입성에는 민주당도 책임
—올 3월 ‘TV조선’에 출연해 국민대통합의 걸림돌은 주사파(主思派)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진보 시민운동의 대부(代父)격인 목사님이 생각하는 주사파는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까.
“제 기억으로 46년도에 중학교 졸업을 하고 그 당시에 일제 잔재로 남아 있던 서울대학 예과에 입학했습니다. 국대안 반대시위가 한창일 때였는데 선배들이 대부분 좌익 성향이 강했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남로당에 가입하라고 하더군요. 왜 가입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한 선배가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남로당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남로당에 가입하려면 공산당 삐라를 뿌리다가 5번을 잡혀가야 비로소 자격이 생겼습니다.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못 한다고 했습니다. 또 북한 지하 비밀선거도 하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거절했지요.
48년 예과에서 본과인 서양사학과에 13명이 올라갔는데 ‘저 XX는 친미(親美)고 반동(反動)’이라며 따돌리더라고요. 견딜 수가 없어서 그해에 미국으로 도망갔습니다. 말이 좀 길어졌는데, 저는 저에게 남로당 가입이나 비밀지하선거 참여를 독려한 사람들을 주사파(主思派)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 주사파라는 이야기인데요, 그렇다면 애국가(愛國歌)를 부정하는 통합진보당의 이정희(李正姬) 전 의원, 이석기·김재연(金在姸) 의원 등을 종북(從北) 주사파로 볼 수 있겠네요.
“종북 맞습니다. 이정희 전 의원 같은 경우, 18대 대선 당시 국민 세금인 선거보조금 27억3500만원을 확보하자 곧바로 후보를 사퇴했는데 이런 사람이 의원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전 의원은 대선 출마 선언으로 27억여 원의 국고보조금을 확보한 뒤 18대 대선을 사흘 앞둔 2012년 12월 16일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유로 후보 사퇴했다. 이 국고보조금은 후보가 대선에서 중도사퇴하거나, 완주했으나 저조한 지지율을 기록하더라도 반납하지 않아도 되는 돈이다.
통합진보당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야가 ‘이석기-김재연 의원 자격심사안’ 처리에 대해 합의한 것과 관련해 질문했다. 박 목사의 이야기다.
“그들이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야권연대 때문 아닙니까. 당시 TV를 보니까 민주당 한명숙 대표하고, 이정희 대표하고 야권연대를 성사시키고서 얼싸안고 기뻐하던데요. 그렇다면 민주당도 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요. 민주당도 솔선수범해서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통합당 대선평가위원회가 78일간의 활동을 마치고 4월 9일 발표한 대선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4·11 총선 당시 당대표였던 한명숙(韓明淑) 의원이 100점 만점에 76.3점으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당원들이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을 연장선상에 놓고 책임을 따진 결과로 보인다.
1946년 7월 13일 유억겸 문교부장 주도로 6·6·4 신 학제에 기초하여 경성대학교, 서울 시내 및 근교의 8개 관립전문학교, 사립학교인 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일괄 통합하여 9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의 종합대학교로 설립한다는 안(案). |
盧武鉉 정권 때 해외 對南 공작책이 국내 행사에 참석
—야당도 중요한 국정 파트너입니다. 거기에 걸맞은 처신을 해야 하는데 요즘 민주당은 그렇게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선거 때마다 민주당을 찍어왔는데 지금은 내가 찍어왔던 옛날의 민주당이 아니에요. 과거 민주당의 모습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과거에는 신익희, 조병옥, 김대중 등 사회적 존경을 받는 리더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없습니다.”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도 민주당의 리더 중 한 명 아닌가요.
“노무현 정부 이후 민주당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386 중심의 NL 계열이 정권 핵심에서 일했습니다. 그래서 외교와 안보가 너무 진보적 색채를 띠게 됐지요. 그렇게 되니 여당과 무조건 부딪치고,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는 정당으로 비치게 됐습니다.”
—결국 민주당이 야당의 역할을 충실히 못하는 이유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는 거군요.
“노 전 대통령이 뭘 잘못했느냐, 2005년 8월 14~15일 광복 60돌 기념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축전’이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됐는데 해외 대남 공작책들이 다 왔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국정원 사람들한테 ‘게네 온 거 알아?’라고 물으니, ‘안다, 높은 데서 오게 했다’고 답하더라고요. 당시 상태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노무현 정권이 그런 정권이었습니다.”
—민주당이 예전 모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독재자와 싸웠던 과거만 생각해서 저항만 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면 안 됩니다. 국민에게 감동을 줘야지요. 감동은 대안(代案)입니다. 현재 민주당은 자기들만 감동하는 대안만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 논쟁이 있는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민주당이 과거 고전적 의미에서 리버럴(liberal·자유주의적인)한 정당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 목사는 현재의 민주당 모습이 안타까운지 1999년 호주에서 겪었던 일화를 들려줬다.
“영국에서는 야당이 정권획득에 대비하여 수상 이하 각 각료를 미리 정해 둔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섀도 캐비닛(shadow cabinet·예비내각)이 어떤 역할을 할까 궁금했는데 호주 다윈시에서 잘 보게 됐습니다.
동티모르 전쟁이 난 1999년도였는데, 그쪽에 살던 원주민 수천 명이 호주로 이송됐습니다. 이들 앞에서 현 정부의 이민부 장관과 야당의 이민부 장관이 원주민 수천 명 앞에서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아도 당신 나라가 편안해질 때까지 우리가 당신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더군요. ‘와 이거 진짜 민주주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민주당도 언젠가 이렇게 변화할 수 있겠죠? 싸우지 말고 남의 말을 경청할 수 있어야 변화할 수 있습니다.”
5·18 영상물을 만든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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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목사는 주사파의 국회 입성에는 민주통합당의 잘못도 크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2012년 3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와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가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 |
—1980년 ‘5·18 광주사태’ 비디오는 어떻게 제작하게 된 것입니까.
“사실 제가 미국에서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 제작한 5·18 영상물을 봤습니다. 보고 깜짝 놀랐지요. 5·18이 국내에서 북한을 동조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혁명적 사건으로 그려졌더라고요. 5·18을 왜곡하는 것 같아서 비디오를 제작하게 됐습니다.”
—비디오 제작 경험이 없어 힘들지는 않았나요.
“그렇지요. 깨끗한 화면이 필요했는데 미국 CBS 화면이 가장 깨끗했습니다. 구하고 싶은데 당시 장면당 30달러를 요구하더군요. 다 사려면 수만 달러가 필요했습니다.
어느 날 주류 도매상 하는 친구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우리 가게에 오는 친구 중에 CBS 노조위원장이 있는데 한번 부탁해 볼까?’하는 거예요. 그리고 3주 뒤에 진짜 그 친구가 비디오테이프 원본을 얻어다 줬어요. 조니워커 광인 노조위원장에게 조니워커 한 박스를 선물로 줬다고 하더군요.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시나리오 작성, 편집도 직접 했습니까.
“아니요. 시나리오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 심재원씨가 작성해 줬고, 편집은 베트남전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의 다큐멘터리를 맡았던 여성이 맡아줬습니다. 자금은 대학동창인 외과의사 김마태 박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대줬고요. 회계는 가발장사를 하던 김윤철 장로가 맡았습니다.
반 년 만에 광주를 담은 비디오를 완성했고 1981년 5월 18일쯤 뉴욕 리버사이드 처치(Riverside Church)에서 처음 상영했습니다. 아마 미국에 사는 전라도 출신들은 거의 다 왔을 것입니다. 상영 내내 예배당에는 흐느끼는 소리뿐이었어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 ‘엉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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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의 메인 포스터.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백년전쟁>은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을 주관해 18대 대선을 앞두고 공개한 좌파의 영상물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현대사 100년을 소재로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표방하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관해 만든 53분짜리 <두 얼굴의 이승만>이란 영상과 박정희 전 대통령 시기를 다룬 <프레이저 보고서, 누가 한국 경제를 성장시켰는가>란 42분짜리 영상의 시사회를 작년 11월 29일 열고 유튜브를 중심으로 인터넷 등에 무료로 배포했다.
—영상물 <백년전쟁>이 본질을 어떤 식으로 왜곡했다고 보십니까.
“이승만씨를 친일로 규정했더라고요. 제가 이승만씨가 쓴 책 중에 읽은 게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책이 1942년도에 나온 《Japan Inside out(일본 내막기)》입니다. 책에서 그는 진주만 기습 7개월 전에 이미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만행을 봤을 때 충분히 미국을 침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당시 미국은 일본에 우호적이라 이승만씨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예측이 맞아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이런 책을 쓴 사람이 친일일까요? 박정희씨 관련 내용도 마찬가지고요.”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부분은 어디가 잘못됐습니까.
“프레이저 보고서를 인용해 박정희씨가 미국이 하라는 대로 경제정책을 펼쳤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프레이저 보고서가 뭔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1976년 미국에서 박동선씨를 중심으로 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러자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로 하여금 이 사건을 조사해 1978년 10월 31일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지요. 소위원회는 위원장이 프레이저 의원이었기 때문에 ‘프레이저 위원회’, 보고서는 ‘프레이저 보고서’로 불리게 됐습니다. 영상처럼 프레이저 리포트는 박정희씨에게 미국의 경제정책을 강요하는 리포트가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전 많은 사람이 희생된 5·16이 쿠데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기술하면 안 됩니다.”
北에 가보니
박 목사는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 다음 해인 2002년 재일(在日) 대한기독교회 남북통일위원회 자문위원 자격으로 4박5일간 북한을 다녀왔다. 박 목사는 북한에도 기독교 연맹이 존재하긴 하지만 교회가 상당히 통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북한은 근본적으로 종교를 인정하지 않지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북한에서 가장 큰 봉수교회에 가보니까 남성 4중창 성가대가 나왔는데 모두 국민 가수로 이뤄졌더라고요. 동원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 가수면 우리나라에서 ‘조용필(趙容弼)’급의 가수들이 성가대로 참여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요. 다 북한에서는 유명한 가수라고 하더라고요.”
1980년대 해외 관광객들이 많아지자 북한은 그들을 위해 전시용으로 봉수교회(1988년), 장충성당(1989년)을 설립했다. 1992년에는 김일성의 지시로 칠골교회를 세웠다. 칠골교회는 김일성이 어렸을 때 어머니 강반석과 함께 다니던 옛 칠골교회를 기념해 복원 신축한 교회로 반석교회로 불리기도 했다.
교회와 성당이 있긴 하지만 북한에 종교의 자유는 없다. 북한에서 가장 높은 법이라 불리는 ‘사회주의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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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목사는 1965년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계교회협의회(WCC) 간사로 일했다. 원 안이 박 목사. |
轉向? 유치한 이야기
인터뷰 시간이 길어져 저녁식사 시간이 지났다. 박 목사는 이만하고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집 근처 백화점 지하 음식점에 저렴하고 맛있는 ‘마파두부면’이 있다며 추천했다. “알았다”고 한 뒤 마지막으로 가장 처음 하려 했던 질문을 던졌다.
—진보 진영 주변에서는 목사님이 전향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향? 유치한 이야기지요. 제가 1981년부터 아시아교회협의회(CCA) 총무로 일하며 아시아 각국의 사회선교운동을 도왔습니다. 196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 일하다 1965년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계교회협의회(WCC) 간사로 일하게 됐는데 그때 북한과 체제경쟁을 하던 박정희 정권은 동백림사건, 인혁당사건 등 간첩사건을 터뜨렸고, 김대중 납치사건도 저질렀습니다. 그때 저는 WCC에서 이런 국내 정치상황을 전 세계로 알리는 일을 맡았습니다. 저는 일관되게 지금의 입장을 취해 왔어요. 그런 저에게 전향이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