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은 장성택과 둘도 없는 술친구, 장성택은 김경희와 결혼하기 전 교통안전원이었다”
⊙ 공훈배우 어머니, 조선인민군협주단·호위국협주단에서 활동, 김일성·김정일 父子 앞에서
노래하기도
⊙ 김정일 위해 공연하고 남파 지하공작원들에 한국 노래 가르치는 칠보산 악단 지원했다 탈락
⊙ 탁월한 가창력에도 요덕수용소에 간 친척 때문에 북한에서 모든 활동 제약.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시도
⊙ “남한에서 가수로 성공해 통일 후 북한에 있는 옛 동료들 당당하게 만날 것”
⊙ 공훈배우 어머니, 조선인민군협주단·호위국협주단에서 활동, 김일성·김정일 父子 앞에서
노래하기도
⊙ 김정일 위해 공연하고 남파 지하공작원들에 한국 노래 가르치는 칠보산 악단 지원했다 탈락
⊙ 탁월한 가창력에도 요덕수용소에 간 친척 때문에 북한에서 모든 활동 제약.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시도
⊙ “남한에서 가수로 성공해 통일 후 북한에 있는 옛 동료들 당당하게 만날 것”
2004년 9월 말, 명성희(明成姬)씨 가족은 평양에서 함경북도 무산(茂山)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가족이라고 해 봐야 어머니 박윤희(朴允姬)씨와 동생 미희(가명)씨가 전부였다. 세 모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평양에서 함경북도 무산까지는 열차로 꼬박 12시간이 걸리는 거리. 스물다섯 살, 스무 살의 자매는 열차를 타는 것도, 평양 밖으로 벗어나는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열차는 낡고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침대칸 1등석인데도 차창 유리가 깨져 들이치는 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고, 침대 시트는 세탁한 지 언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더러웠다. 게다가 발밑으로 쥐들이 드나들어 자매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열차는 전력이 달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사회안전부 요원들이 승객을 대상으로 검문검색을 했다. 공훈배우 출신인 어머니 박씨는 차분한 어조로 “추석 명절을 맞아 고향에 다니러 간다”고 둘러댔다. 대부분의 요원들이 박씨의 말을 믿었지만 간혹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면 박씨는 준비해 온 보따리 속에서 고급 양주며 담배를 꺼내 요원의 손에 쥐여주곤 했다.
노래할 자유가 있는 남으로
이들 가족이 무산에 도착한 것은 열차를 탄 지 사흘 만이었다. 보통 때면 12시간이면 주파하는 거리를 2박3일 동안 달려 겨우 당도한 것이다. 무산역에서 하차한 후 박씨는 두 딸을 국경지대까지 안내해 줄 탈북 전문 브로커에게 맡겼다. 자신은 과거 같은 협주단에서 활동했던 친구를 따라나섰다. 식구가 함께 가면 탈북자로 의심받을 것이 뻔해 따로 길을 나선 것이다.
자매는 브로커를 따라 산골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브로커는 여러 장의 공민증을 자매 앞에 내놓았다. 이제부터는 함경북도 공민증을 들고 무산 사람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매는 평양 사람 특유의 하얗고 단정한 외모를 숨기기 위해 얼굴에 어두운 톤의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머리칼을 헝클었다. 억양이 다른 함경북도 사투리도 배우려 했지만 도저히 따라 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이곳 사람을 만나면 침묵하기로 했다.
국경지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제법 높다란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늦가을 무산의 해는 짧았고, 날은 스산했다. 군데군데 마을이 있어도 개 짖는 소리만 날 뿐 전깃불이 없어서 사위가 칠흑처럼 어두웠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살짝 들떠 있던 자매는 비로소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길에 들어선 것인지 실감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1시간이면 넘을 수 있다던 산을 브로커는 12시간씩이나 끌고 다녔다. 참다 참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물어보려는데 전방 50m 거리에 고장 난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한 무리의 인민군들이 모여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급히 공민증을 챙겼다. 동생 미희씨는 실제 공민증 주인과 연령대나 생김새가 비슷해 문제가 없었는데, 성희씨는 누가 봐도 확연히 달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군인 중 몇 명은 술을 마셨는지 취해 있었다. 취한 군인 중 하나가 “너희들 뭐야, 떼려는(탈북하려는) 것들 아니야?”라며 공민증을 보자고 했다. 브로커와 동생은 무사히 통과했고, 성희씨 차례가 되었다. ‘공민증을 보여주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공민증 안 가져왔습니다”라는 함경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취한 군인이 “솔직히 너희들 떼려는 에미나이들이지?”라고 재차 심문했을 때는 드센 함경도 여자처럼 “아니, 이 동무들 술 마셨으면 곱게 잠이나 잘 일이지 왜 이러십니까” 하면서 따지기까지 했다. 어디서 그런 능력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덕분에 무사히 산을 넘었고, 다음날 약속된 장소에서 어머니를 만나 두만강을 건넜다.
이들이 목숨 걸고 탈북을 감행한 것은 믿기지 않겠지만 마음껏 노래하고 싶은 자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민체육인’ 아버지 간암으로 별세
탈북가수 명성희씨 가족은 평양에서 상류층으로 살았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탈북 과정은 그동안 언론을 통해 접한 숱한 탈북 스토리와는 사뭇 달랐다. 탈북 동기도 상식 수준을 벗어났다. 북한에서도 가수로 활동했던 귀순 연예인 명성희씨. 북한에 남겨진 친척들 때문에 언론과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해 온 그를 어머니 박윤희씨와 함께 만났다.
명씨는 놀랍게도 북한 남녀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20년 넘게 활약한 명동찬(明東燦)씨의 딸이었다. 명동찬 감독은 1990년 평양과 서울에서 열린 통일축구대회 당시 북한 대표팀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축구선수로 활약,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올림픽 등 각종 국제경기에 국가대표로 참가했으며, 이후 축구감독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그 공로로 1992년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았다. 1999년에는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여자월드컵에 북한 여자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해 국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명성희씨에 따르면 명 감독은 나이지리아 여자월드컵대회 직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명 감독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평양체육대학 재학 중 대표선수가 되어 여러 대회에 참가한 스타선수 출신 감독이었지요. 선수 시절 일본에서는 ‘문동찬’으로 유명했습니다.”(어머니 박씨)
―일본에는 왜 ‘명동찬’이 아니고 ‘문동찬’으로 알려진 건가요.
“일본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일본 대회에 나갈 때는 성을 ‘문’으로 바꾸다 보니 그렇게 알려졌지요. 친척들을 만나 일본에 흡수될까봐 보위부에서 성을 바꾸게 한 겁니다.”
―1990년에 열린 통일축구대회 당시 서울에 오기도 했지요.
“네, 당시 박종환 감독과 악수를 나누던 북한 대표팀 감독이 바로 제 남편입니다. 머리를 길게 기른 박 감독과 달리 남편은 군인처럼 짧게 잘라 좀 촌스러워 보였지요. 그래서 이후에 해외대회에 나갈 때는 제가 직접 남편 머리를 손질해 주곤 했습니다. 제가 손재간이 좀 있거든요.”
―오랫동안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인민체육인’ 칭호까지 받았으니 북한 정권의 대접이 특별했을 것 같은데….
“대표팀 감독이나 ‘인민체육인’ 칭호는 명예일 뿐 여기처럼 월급이 있거나 연금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선물 아파트’라 불리는 100㎡(30평) 크기의 체육인 아파트를 한 채 분양해 줘 살았고, 생활비는 남편이 경기 때문에 제3국에 나갈 때마다 그곳에 있는 친구들에게 받은 돈으로 충당했지요.”
축구대표팀 자력갱생으로 운영
―제3국에서 어떤 사람들이 돈을 줍니까.
“제3국에는 마약이나 무기를 팔아 외화벌이를 하는 투사(우리의 독립 유공자처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 자제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남편과 친해서 적지 않은 용돈을 주곤 했지요. 보통 제3국에 한 번 나갈 때마다 수만 달러씩 가져오곤 했습니다.”
―개인이 외화를 반입하는 데 문제가 안되나요.
“남편은 수백 달러의 돈을 고급 담뱃갑에 숨겨서 들여왔습니다. 담배 가루를 털어낸 후 그곳에 돌돌 만 지폐를 넣어서 왔지요. 공항 직원들 중에는 남편을 따르는 이들이 많아 담배를 하나씩 선물로 주는 척하고 나중에 되돌려 받는 방법으로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가져온 돈은 적발되면 모두 빼앗기기 때문에 비닐로 싸서 집 벽에 넣고 시멘트로 봉한 후 조금씩 꺼내서 썼지요.”
―그 많은 돈을 혼자 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럼요, 선수들에게도 조금씩 나눠 주었지요. 북한은 대표팀 선수라고 해서 특별히 수고비를 주지 않습니다. 국제대회에서 승리할 경우 상금으로 수백 달러씩 주는 정도지요. 가난한 촌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성장한 데다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이들이라 남편은 늘 가엾게 여겼어요. ‘내가 모가지가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아이들에게 돈을 주겠다’며 수천 달러씩 챙겨 주곤 했습니다.”
―적발된 적은 없습니까.
“있었지요. 남편이 오랫동안 대표팀 감독을 맡다 보니 시기하는 체육인이 몇몇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제3국에서 가져온 돈을 국가에 헌납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선수들에게 나눠 주었다’며 김정일한테 고발했어요. 그런데 김정일이 ‘야, 잘했다. 안 그래도 줘야 할 돈인데 관대하게 봐줘라’고 했답니다.”
―명 감독이 여자대표팀을 맡게 된 것은 좌천된 것인가요.
“김정일이 남편의 능력을 믿고 장성택(張成澤)을 시켜 특별히 지시한 것이라 좌천은 아닙니다. 1992년쯤인가, 김정일은 남자대표팀으로는 북한이 세계 정상에 설 수 없다고 판단해 남편에게 여자대표팀을 육성하도록 했어요.”
“장성택은 가정적으로 불우”
―명 감독이 장성택과도 알고 지냈나요.
“알고 지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친했지요. 술친구였습니다. 둘이서 당구도 치고 포커도 치면서 자주 어울렸어요.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장성택은 ‘집에 가면 반겨 줄 아내와 자식이 있어서 너는 좋겠다’며 남편을 부러워했어요. (당시) 장성택은 참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로열패밀리인데 불쌍했단 말인가요.
“로열패밀리면 뭐해요. 아무 권한이 없는데…. 장성택은 김정일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었습니다. 그걸 알고 아랫사람들도 우습게 여겼어요. 사실 장성택은 남편에게 북한 최고위층이 사는 호화주택을 주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중앙당 주택 담당자가 장성택을 무시하고 자기 사람에게 주고 말았어요. 그 바람에 우리 가족은 체육인 아파트에 살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말하는 호화주택은 한국의 타운하우스와 같은 고급 주택을 말한다. 명성희씨 가족이 거주한 체육인 아파트는 예술인 아파트, 과학인 아파트와 함께 평양 만경대구역 광복거리에 위치해 있는 30층짜리 원통형 아파트였다고 한다.
장성택이 껍데기만 로열패밀리라는 것을 알고 실망한 것은 1994년 이들 가족이 엄청난 위기에 처했을 때다. 결국 이 사건은 이 가족의 탈북 동기로 이어졌다.
―1994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외화벌이로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 있던 저희 언니가 사회안전부의 실적 올리기 경쟁에 희생돼 ‘협잡꾼’(거짓말쟁이)으로 몰려 억울하게 요덕수용소로 끌려가게 됐어요. 장성택은 저희 언니와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언니가 벌어들이는 돈의 대부분이 장성택에게 갔고, 그 돈으로 호화주택이며 아파트를 짓고 있었으니까요. 장성택은 언니가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어요. 그런데도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결국 박씨의 언니는 물론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조카딸까지 요덕수용소로 가게 됐고, 둘은 이송 도중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장성택이 김일성 사위인데 그 정도로 힘이 없었나요.
“그 사람은 김정일의 노예나 다름없었어요. 출신 성분이 평범해 김정일이 무시했습니다. 장성택은 원래 도로교통 정리를 하는 교통안전원이었어요. 그런데 워낙 키가 크고 인물이 좋으니까 김경희가 오다가다 보고 반해서 결혼하게 해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지요. 김일성은 처음에 장성택이 너무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며 반대했지만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허락했고, 장성택을 원산인민경제대학에 진학시켰습니다.”
이 부분은 장성택에 대해 그동안 국내에 알려진 내용과 많이 달랐다. 황장엽(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가 생전에 출간한 회고록에 따르면 김경희와 장성택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동급생으로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를 눈치 챈 김일성이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장성택을 원산경제대학으로 전학시켰으나 끝내 김경희를 단념시키지 못해 결혼시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어머니는 공훈배우로 활동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나요.
“남편과 나는 인연이 아주 깊어요. 남편은 축구선수로, 나는 가수로 어렸을 때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신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어요. 당시 성신에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가 속한 조선인민군협주단 연습장이 있었고, 남편이 소속된 4·25축구단 훈련장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오다가다 만나는 제게 ‘남이야, 혼자 몰래 먹어’하며 초콜릿을 주곤 했어요.”
―남이는 애칭이었나요.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제 이름을 윤남이라고 짓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윤희라고 짓는 바람에 따를 수밖에 없었대요. 그게 아쉬워 아버지는 늘 나를 ‘남이’라고 불렀지요.”
박씨의 조부는 원산에서 이름난 한의학 박사였고, 아버지는 의사였다.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그는 빼어난 가창력에도 집안 배경 때문에 원산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조선인민군협주단에 발탁돼 가극배우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북한의 5대 가극 중의 하나인 <당의 참된 딸>에서 꼬마 소년 연기를 하였다. 북한의 5대 가극은 <당의 참된 딸>외에 <밀림아, 이야기하라> <피바다> <꽃 파는 처녀> <한 자위단의 운명>이 있다.
조선인민군협주단은 북한 최고의 예술단으로 단원만 수백 명이었다고 한다. 박씨는 “<당의 참된 딸>은 김정일이 직접 연출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해 여름인가 <피바다> 공연을 마쳤는데 김정일이 와서 다음 공연 작품인 <당의 참된 딸>을 직접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전문 연출가보다 실력이 뛰어나 우리 모두가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저렇게 잘할까 궁금했는데, 다 그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며 오페라를 그때그때 들여와 감상했으니 보는 눈이 있었던 것이지요.”
키는 작지만 성량이 풍부했던 박씨는 실력을 인정받아 3급 공훈배우로 활동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 앞에서 ‘강반석 어머니’라는 찬양가를 불러 갈채를 받기도 했다. 덕분에 당 비서의 눈에 띄어 호위국(護衛局)협주단의 발성지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직급도 껑충 뛰어 상위(上尉·대위와 중위 사이의 계급)가 되었다.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는 소위가 되는 데만도 12년이 걸리는데 단숨에 상위가 된 것이다.
―호위국협주단은 어떤 곳입니까.
“김일성·김정일을 위한 협주단이에요. 규모는 조선인민군협주단의 4분의 1 정도로 작았지만 단원들의 실력은 한 수 위였지요. 김정일이 협주단 단원들을 ‘우리 애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아꼈습니다.”
―명 감독과는 호위국협주단에 있을 때 결혼한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남편을 ‘오빠, 오빠’ 하고 따랐지만 사실 제가 좋아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어요. 4·25축구단의 홍윤철 선수였지요. 그 선수도 저를 좋아했습니다만, 제 나이가 너무 어려서 결혼할 수 없었어요. 호위국 여자 단원은 28세 이전에 결혼하면 안 되었는데, 홍윤철씨는 제가 28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에 나이가 너무 많아 다른 분과 결혼을 했지요.”
홍윤철은 후에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4·25축구단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의 아들이 현재 북한축구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는 홍영조(洪映早)다.
성량 폭발, 3옥타브 넘나들어
―북한에서 상류층으로 잘산 것 같은데, 굳이 탈북할 필요가 있었나요.
“성희가 자살 시도까지 하면서 노래를 하고 싶어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성희는 엄마인 제가 들어도 깜짝 놀랄 정도로 뛰어난 성량과 음감을 지닌 아이인데, 이모가 요덕수용소에 갔다는 것 때문에 꿈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시들시들 죽어 가는 것 같아 엄마로서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3옥타브의 음역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정도로 폭발적인 가창력을 자랑한다는 성희씨는 평양무용음악대학 출신이다. 그는 이전에 귀순해 활동하는 북한 출신 가수들과는 목소리가 확연히 달랐다. 북한 여가수라면 으레 상상하게 되는 가늘고 얇은 음색이 아니었다. 팝가수 셀린 디옹이나 머라이어 캐리처럼 파워 있는 목소리였다.
―우리가 아는 북한 출신 여가수들과는 목소리가 많이 다르네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꾀꼬리처럼 간드러지게 부르는 북한 특유의 창법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던 저의 롤 모델은 러시아의 국민가수 알라 푸가체바(Alla Pugacheva) 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심수봉씨가 불러 유명해진 ‘백만송이 장미’의 원곡 ‘밀리언 로즈(Million Rose)’를 부른 가수죠.”
가늘고 고운 목소리의 심수봉씨와 달리 알라 푸가체바는 중저음의 두꺼운 목소리가 매력적인 가수다. 10살밖에 안된 성희씨가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사람들이 외국 가수가 노래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는 외국에 자주 드나드는 아버지 덕분에 러시아 음악뿐만 아니라 샹송, 보사노바, R&B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접했고, 혼자서 따라 부르곤 했다. 그 덕분에 ‘주체발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북한 특유의 가늘고 얇은 목소리로 변성되지 않고 두꺼운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 박씨는 북한에서 접하기 힘든 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북한에서는 튀는 목소리였겠네요.
“북한 스타일하고 달라 어디서든 환영받는 목소리는 아니었어요. 결국 어렸을 때부터 가고 싶었던 금성제1고등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이 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부러워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금성제1고등중학교는 문화예술 분야의 영재를 양성하는 평양 최고의 명문 학교다. 2000년 평화자동차 주최로 서울에서 공연해 화제가 된 평양학생소년예술단 단원의 대부분이 이 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는 김일성과 김정일 앞에서 공연하는 동생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10대에 팝송과 남한 가요 섭렵
―대학에 가기 전까지 음악공부는 혼자 한 건가요.
“저는 금성제1고등중학교에 갈 수 없어서 광복거리중학교에 진학했어요.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팝송과 한국 노래를 부르곤 했지요. 그러던 중 이모가 요덕수용소로 잡혀 갔습니다. 어린 마음에 내가 노래로 김정일을 감동시켜서 이모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칠보산 악단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칠보산 악단은 남한 가요를 좋아하는 김정일을 위해 공연하는 단체이자 남파 지하공작원들에게 한국 노래를 가르치는 기관이었다. 그는 이 악단에 들어가기 위해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양수경의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김완선의 ‘오늘밤’ 등을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시험을 봤는데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이 됐다. 몇 년 후 무력부 적공국(남파공작원 양성소)에서도 단원을 모집해 응시했다. 심사위원들은 남한 노래를 남한 가수보다 더 잘하는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 여겼지만 이번에도 역시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 처리됐다.
칠보산 악단과 적공국이 아니면 중저음의 그를 받아줄 만한 기관이 없어서 그는 절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를 늘 격려하고 응원해 주던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못하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셔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다량의 수면제를 사다가 복용했다.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어머니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 급히 병원으로 후송해 살았죠. 병원에서 3일 동안 누워 있었어요. 북한에서는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하면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되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제가 약을 잘못 알고 먹어서 쓰러졌다고 둘러댔습니다.”
퇴원 후 박씨는 딸이 걱정돼 “이제 노래는 포기하고 결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타일렀다. 성희씨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평양음악무용대학(現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은 어떻게 진학하게 된 건가요.
“결혼은 하기 싫고, 대학을 갈까 고민하다 엄마의 권유로 선택한 곳이 평양음악무용대학입니다. 클래식 전문 교육기관이라 엄마에게 발성법을 지도받고 시험을 쳤지요. 당시 실기평가 교수가 남한 출신인 전후봉 선생님이었는데, 처음에는 ‘너처럼 진성을 내면 클래식 음악을 할 수 없다’며 탐탁지 않아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엄마에게 두성을 배워 3옥타브의 음역대를 넘나들게 되자 깜짝 놀라시더군요.”
그는 이 대학에서 남한 출신의 여러 대학 교수를 사사했다. 북한 음악과 남한 음악, 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갔다. 그러자 왕재산경음악단(旺載山輕音樂團), 만수대예술단 등에 응시해 보라는 추천이 줄을 이었다. 자신 있게 도전했지만 역시 신원조회에 걸려 번번이 미끄러졌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는데 어머니가 친구라며 영화방송음악단 작곡가를 소개해 줬다.
―영화방송음악단에 들어간 건가요.
“네, 그곳은 신원조회가 없어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변수일 단장을 만났는데, 이분은 가극에서 김일성 연기를 주로 하던 분이에요. 이 단장님이 어느 날 혼잣말처럼 ‘조선 땅에는 <타이타닉> 주제가 같은 노래를 부를 가수가 없나’ 하며 탄식했습니다. 저는 그 노래가 나오자마자 익혔던 사람이라 그분 앞에서 자신있게 불렀죠. 그랬더니 ‘야, 너 대단하다’고 칭찬하시더군요.”
그 무렵 일본에서 활동하던 가수 김연자씨가 김정일의 초청으로 평양 공연을 하게 되었다. 마침 김씨가 리허설을 하던 곳이 영화방송음악단 연습장과 같은 건물이어서 그는 단장과 함께 구경하러 갔다. 그런데 때마침 김씨가 <타이타닉>의 주제가인 셀린 디옹의 ‘My heart will go on’을 연습하고 있었다. 김씨의 노래를 들은 단장이 한마디했다. “저 노래는 김연자가 명성희만 못하다”라고.
서태지와아이들 노래에 충격
―영화방송음악단에 들어가 활동을 한 건가요.
“<스승과 제자>라는 영화와 <당찬 처녀들>이라는 드라마의 OST를 불러 음반까지 취입했어요. 영화와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OST에 대한 반응도 아주 좋았습니다. 저를 두고 ‘끼가 많다’ ‘인민배우감이다’라는 칭찬이 여기저기서 들렸어요. 어린 나이에 유명해진 것이죠.”
―나름 자리를 잡았는데 왜 탈북하게 된 건가요.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제가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음악으로 알려진 건 아니었어요. 북한에서는 ‘주체발성’ 식의 가는 목소리로 노래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 때문에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갈 수 있을까’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한국에서 크게 성공한 드라마 <가을동화>의 OST에 매료돼 있었다. ‘혹시 나를 떠나려는 그대 맘이 힘든 나를 위해서’로 시작되는 타이틀곡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접할 수 있었죠.
“중앙당에서 일하는 고위급 자제들이 즐겨 봤기 때문에 한국 방송 직후 테이프가 돌곤 했어요. 생각해 보면 저는 북한에서 하지 말라는 건 다 하고 산 행운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한국 영화와 음악을 접하면서 자신이 한국 청년들에 비해 문화적으로 많이 뒤져 있다고 생각해 ‘통일이 되면 나는 뭐가 될까’ 걱정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국 음악은 어떻게 들었나요.
“집에서 몰래 라디오로 들었어요. <국군방송>이었는데, 서태지와아이들의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는 전기에 감전된 듯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 멋있었거든요. 또 김현정의 ‘그녀와의 이별’이라는 곡도 좋아했는데, 한번은 DJ가 ‘아, 김현정씨 이 노래 부를 때 추는 엉덩이 춤이 섹시하죠’라고 하는 거예요. 그 얘길 듣고 ‘이 가수는 노래하면서 춤까지 추나 보다’ 했습니다.”
한국 노래를 들으며 그는 군가와 찬양가 일색인 북한 노래가 더욱 듣기 싫어졌다. 그때부터 알 수 없는 신을 향해 ‘남조선에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 날이면 기차를 타고 한국에 가는 꿈을 꾸곤 했다. 어머니도 더 이상은 딸의 꿈을 막을 재간이 없어서 탈북을 도모하게 됐다.
남한 대학에서 실용음악 전공
―명 감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는 어떤 일을 했나요.
“남편이 남기고 간 돈으로 고려호텔 앞에 얼음공장을 얻어 직원 30명을 데리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팔았어요. 평양 시내 36개 식료독채(한국의 마트)에 아이스크림을 공급해 매월 7000달러씩 벌었습니다. 당 간부들도 우리 아이스크림을 즐겨 사 먹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지요. 벌이가 좋았습니다.”
―집이랑 공장은 어떻게 하고 왔습니까.
“그냥 두고 왔죠, 뭐. 우유, 버터, 설탕 같은 아이스크림 재료도 창고 가득 사 놓고 왔으니 돈으로 치면 수만 달러나 되는 재산을 두고 온 셈이죠. 공장 식구들에게 애들이 아파서 며칠 쉰다고 하고 왔습니다.”
―탈북 준비는 얼마 동안이나 한 건가요.
“믿을 만한 브로커 구하고, 이것저것 준비하는 데 한 달 정도 걸렸습니다.”
―브로커에게는 얼마나 주었나요.
“중국까지 안내하고 한국 여권 만들어 비행기까지 태워 주는 조건으로 한 사람당 1만 달러씩, 총 3만 달러 주었어요.”
―딸의 꿈을 위해 북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온 셈이네요.
“넓은 집과 공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왔지요. 남한에 가면 딸이 가수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도착해 보니 쉽지만은 않네요.”
명성희씨 가족은 중국을 거쳐 2004년 12월 한국에 왔다. 이후 자매는 ‘북한에서 프로가수였다’는 사실을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서울예대 실용음악과에 진학해 공부했다.
팝페라 가수로 성공하고파
―한국에 온 지 벌써 8년째네요. 한국에서 가수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지요.
“한국에서는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와서 보니 그렇지만은 않네요. 자본주의 사회이다 보니 성공을 위해서는 투자도 좀 필요한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유명 작곡가의 추천으로 한 기획사와 계약하고 음반을 냈다. 하지만 자금이 부족했던지 기획사 측은 이렇다 할 홍보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음반에 담은 곡도 성희씨가 추구했던 음악과 달랐다. 탈북가수인 데다 나이가 좀 있다는 이유로 성인가요를 부르도록 했는데, 편곡 스타일이 그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북한 풍이어서 기운이 빠졌다. 결국 그는 방송에 한 번 제대로 출연하지도 못한 채 위약금까지 물어 주며 기획사에서 빠져나왔다.
―실망이 컸겠네요.
“컸지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 가수 활동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습니다. 사실 제가 잘 안 나오는 목소리를 끌어낼 줄 아는 재주가 있어서 서울예대 다닐 때 학생들을 상대로 과외를 좀 한 경력이 있거든요. 가수 대신 보컬트레이너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반대했습니다. ‘남이 아니라 네가 성공해야 나중에 통일이 되어도 옛 동료들한테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서요.”
한동안 일이 없었던 성희씨는 요즘 바빠졌다. 일본 영사관 행사에서 노래한 것인 인연이 돼 오는 봄 한 케이블 TV에서 방송할 한일 합작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기 때문이다. 일본의 TSS프로덕션과 한국의 서희프로덕션이 공동 제작할 이 드라마에서 그는 연기뿐만 아니라 주제곡까지 부른다. 일본 후쿠오카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촬영할 이 단막극은 케이블 TV ‘채널T’에서 방송할 예정이다. 그는 “공중파는 아니지만 ‘새로운 시작이자 도전’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어떤 가수가 되고 싶은가요.
“북한과 남한에서 기본기를 다진 만큼 어떤 장르의 곡도 완벽하게 소화하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언젠가는 비트가 빠르고 강한 팝페라로 성공하고 싶은 꿈도 있고요.”⊙
평양에서 함경북도 무산까지는 열차로 꼬박 12시간이 걸리는 거리. 스물다섯 살, 스무 살의 자매는 열차를 타는 것도, 평양 밖으로 벗어나는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열차는 낡고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침대칸 1등석인데도 차창 유리가 깨져 들이치는 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고, 침대 시트는 세탁한 지 언제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더러웠다. 게다가 발밑으로 쥐들이 드나들어 자매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열차는 전력이 달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사회안전부 요원들이 승객을 대상으로 검문검색을 했다. 공훈배우 출신인 어머니 박씨는 차분한 어조로 “추석 명절을 맞아 고향에 다니러 간다”고 둘러댔다. 대부분의 요원들이 박씨의 말을 믿었지만 간혹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면 박씨는 준비해 온 보따리 속에서 고급 양주며 담배를 꺼내 요원의 손에 쥐여주곤 했다.
노래할 자유가 있는 남으로
이들 가족이 무산에 도착한 것은 열차를 탄 지 사흘 만이었다. 보통 때면 12시간이면 주파하는 거리를 2박3일 동안 달려 겨우 당도한 것이다. 무산역에서 하차한 후 박씨는 두 딸을 국경지대까지 안내해 줄 탈북 전문 브로커에게 맡겼다. 자신은 과거 같은 협주단에서 활동했던 친구를 따라나섰다. 식구가 함께 가면 탈북자로 의심받을 것이 뻔해 따로 길을 나선 것이다.
자매는 브로커를 따라 산골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브로커는 여러 장의 공민증을 자매 앞에 내놓았다. 이제부터는 함경북도 공민증을 들고 무산 사람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매는 평양 사람 특유의 하얗고 단정한 외모를 숨기기 위해 얼굴에 어두운 톤의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머리칼을 헝클었다. 억양이 다른 함경북도 사투리도 배우려 했지만 도저히 따라 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이곳 사람을 만나면 침묵하기로 했다.
국경지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제법 높다란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늦가을 무산의 해는 짧았고, 날은 스산했다. 군데군데 마을이 있어도 개 짖는 소리만 날 뿐 전깃불이 없어서 사위가 칠흑처럼 어두웠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살짝 들떠 있던 자매는 비로소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길에 들어선 것인지 실감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1시간이면 넘을 수 있다던 산을 브로커는 12시간씩이나 끌고 다녔다. 참다 참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물어보려는데 전방 50m 거리에 고장 난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한 무리의 인민군들이 모여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급히 공민증을 챙겼다. 동생 미희씨는 실제 공민증 주인과 연령대나 생김새가 비슷해 문제가 없었는데, 성희씨는 누가 봐도 확연히 달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군인 중 몇 명은 술을 마셨는지 취해 있었다. 취한 군인 중 하나가 “너희들 뭐야, 떼려는(탈북하려는) 것들 아니야?”라며 공민증을 보자고 했다. 브로커와 동생은 무사히 통과했고, 성희씨 차례가 되었다. ‘공민증을 보여주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공민증 안 가져왔습니다”라는 함경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취한 군인이 “솔직히 너희들 떼려는 에미나이들이지?”라고 재차 심문했을 때는 드센 함경도 여자처럼 “아니, 이 동무들 술 마셨으면 곱게 잠이나 잘 일이지 왜 이러십니까” 하면서 따지기까지 했다. 어디서 그런 능력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덕분에 무사히 산을 넘었고, 다음날 약속된 장소에서 어머니를 만나 두만강을 건넜다.
이들이 목숨 걸고 탈북을 감행한 것은 믿기지 않겠지만 마음껏 노래하고 싶은 자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민체육인’ 아버지 간암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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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찬 감독은 북한축구대표팀을 20여 년 동안 이끌었던 명장이라는 평가다. |
명씨는 놀랍게도 북한 남녀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20년 넘게 활약한 명동찬(明東燦)씨의 딸이었다. 명동찬 감독은 1990년 평양과 서울에서 열린 통일축구대회 당시 북한 대표팀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축구선수로 활약,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올림픽 등 각종 국제경기에 국가대표로 참가했으며, 이후 축구감독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그 공로로 1992년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았다. 1999년에는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여자월드컵에 북한 여자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해 국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명성희씨에 따르면 명 감독은 나이지리아 여자월드컵대회 직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명 감독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평양체육대학 재학 중 대표선수가 되어 여러 대회에 참가한 스타선수 출신 감독이었지요. 선수 시절 일본에서는 ‘문동찬’으로 유명했습니다.”(어머니 박씨)
―일본에는 왜 ‘명동찬’이 아니고 ‘문동찬’으로 알려진 건가요.
“일본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일본 대회에 나갈 때는 성을 ‘문’으로 바꾸다 보니 그렇게 알려졌지요. 친척들을 만나 일본에 흡수될까봐 보위부에서 성을 바꾸게 한 겁니다.”
―1990년에 열린 통일축구대회 당시 서울에 오기도 했지요.
“네, 당시 박종환 감독과 악수를 나누던 북한 대표팀 감독이 바로 제 남편입니다. 머리를 길게 기른 박 감독과 달리 남편은 군인처럼 짧게 잘라 좀 촌스러워 보였지요. 그래서 이후에 해외대회에 나갈 때는 제가 직접 남편 머리를 손질해 주곤 했습니다. 제가 손재간이 좀 있거든요.”
―오랫동안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인민체육인’ 칭호까지 받았으니 북한 정권의 대접이 특별했을 것 같은데….
“대표팀 감독이나 ‘인민체육인’ 칭호는 명예일 뿐 여기처럼 월급이 있거나 연금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선물 아파트’라 불리는 100㎡(30평) 크기의 체육인 아파트를 한 채 분양해 줘 살았고, 생활비는 남편이 경기 때문에 제3국에 나갈 때마다 그곳에 있는 친구들에게 받은 돈으로 충당했지요.”
축구대표팀 자력갱생으로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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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나이지리아 여자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평양 성신 훈련장에서 북한 여자축구대표팀을 지도하고 있는 명동찬 감독. |
“제3국에는 마약이나 무기를 팔아 외화벌이를 하는 투사(우리의 독립 유공자처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 자제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남편과 친해서 적지 않은 용돈을 주곤 했지요. 보통 제3국에 한 번 나갈 때마다 수만 달러씩 가져오곤 했습니다.”
―개인이 외화를 반입하는 데 문제가 안되나요.
“남편은 수백 달러의 돈을 고급 담뱃갑에 숨겨서 들여왔습니다. 담배 가루를 털어낸 후 그곳에 돌돌 만 지폐를 넣어서 왔지요. 공항 직원들 중에는 남편을 따르는 이들이 많아 담배를 하나씩 선물로 주는 척하고 나중에 되돌려 받는 방법으로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가져온 돈은 적발되면 모두 빼앗기기 때문에 비닐로 싸서 집 벽에 넣고 시멘트로 봉한 후 조금씩 꺼내서 썼지요.”
―그 많은 돈을 혼자 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럼요, 선수들에게도 조금씩 나눠 주었지요. 북한은 대표팀 선수라고 해서 특별히 수고비를 주지 않습니다. 국제대회에서 승리할 경우 상금으로 수백 달러씩 주는 정도지요. 가난한 촌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성장한 데다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이들이라 남편은 늘 가엾게 여겼어요. ‘내가 모가지가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아이들에게 돈을 주겠다’며 수천 달러씩 챙겨 주곤 했습니다.”
―적발된 적은 없습니까.
“있었지요. 남편이 오랫동안 대표팀 감독을 맡다 보니 시기하는 체육인이 몇몇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제3국에서 가져온 돈을 국가에 헌납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선수들에게 나눠 주었다’며 김정일한테 고발했어요. 그런데 김정일이 ‘야, 잘했다. 안 그래도 줘야 할 돈인데 관대하게 봐줘라’고 했답니다.”
―명 감독이 여자대표팀을 맡게 된 것은 좌천된 것인가요.
“김정일이 남편의 능력을 믿고 장성택(張成澤)을 시켜 특별히 지시한 것이라 좌천은 아닙니다. 1992년쯤인가, 김정일은 남자대표팀으로는 북한이 세계 정상에 설 수 없다고 판단해 남편에게 여자대표팀을 육성하도록 했어요.”
―명 감독이 장성택과도 알고 지냈나요.
“알고 지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친했지요. 술친구였습니다. 둘이서 당구도 치고 포커도 치면서 자주 어울렸어요.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장성택은 ‘집에 가면 반겨 줄 아내와 자식이 있어서 너는 좋겠다’며 남편을 부러워했어요. (당시) 장성택은 참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로열패밀리인데 불쌍했단 말인가요.
“로열패밀리면 뭐해요. 아무 권한이 없는데…. 장성택은 김정일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었습니다. 그걸 알고 아랫사람들도 우습게 여겼어요. 사실 장성택은 남편에게 북한 최고위층이 사는 호화주택을 주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중앙당 주택 담당자가 장성택을 무시하고 자기 사람에게 주고 말았어요. 그 바람에 우리 가족은 체육인 아파트에 살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말하는 호화주택은 한국의 타운하우스와 같은 고급 주택을 말한다. 명성희씨 가족이 거주한 체육인 아파트는 예술인 아파트, 과학인 아파트와 함께 평양 만경대구역 광복거리에 위치해 있는 30층짜리 원통형 아파트였다고 한다.
장성택이 껍데기만 로열패밀리라는 것을 알고 실망한 것은 1994년 이들 가족이 엄청난 위기에 처했을 때다. 결국 이 사건은 이 가족의 탈북 동기로 이어졌다.
―1994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외화벌이로 국가에 큰 공을 세우고 있던 저희 언니가 사회안전부의 실적 올리기 경쟁에 희생돼 ‘협잡꾼’(거짓말쟁이)으로 몰려 억울하게 요덕수용소로 끌려가게 됐어요. 장성택은 저희 언니와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언니가 벌어들이는 돈의 대부분이 장성택에게 갔고, 그 돈으로 호화주택이며 아파트를 짓고 있었으니까요. 장성택은 언니가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어요. 그런데도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결국 박씨의 언니는 물론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조카딸까지 요덕수용소로 가게 됐고, 둘은 이송 도중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장성택이 김일성 사위인데 그 정도로 힘이 없었나요.
“그 사람은 김정일의 노예나 다름없었어요. 출신 성분이 평범해 김정일이 무시했습니다. 장성택은 원래 도로교통 정리를 하는 교통안전원이었어요. 그런데 워낙 키가 크고 인물이 좋으니까 김경희가 오다가다 보고 반해서 결혼하게 해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지요. 김일성은 처음에 장성택이 너무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며 반대했지만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허락했고, 장성택을 원산인민경제대학에 진학시켰습니다.”
이 부분은 장성택에 대해 그동안 국내에 알려진 내용과 많이 달랐다. 황장엽(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가 생전에 출간한 회고록에 따르면 김경희와 장성택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동급생으로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를 눈치 챈 김일성이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장성택을 원산경제대학으로 전학시켰으나 끝내 김경희를 단념시키지 못해 결혼시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어머니는 공훈배우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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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 국제축구 대회에서 준우승 메달을 받고 있는 명동찬 감독. |
“남편과 나는 인연이 아주 깊어요. 남편은 축구선수로, 나는 가수로 어렸을 때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신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어요. 당시 성신에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가 속한 조선인민군협주단 연습장이 있었고, 남편이 소속된 4·25축구단 훈련장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오다가다 만나는 제게 ‘남이야, 혼자 몰래 먹어’하며 초콜릿을 주곤 했어요.”
―남이는 애칭이었나요.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제 이름을 윤남이라고 짓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윤희라고 짓는 바람에 따를 수밖에 없었대요. 그게 아쉬워 아버지는 늘 나를 ‘남이’라고 불렀지요.”
박씨의 조부는 원산에서 이름난 한의학 박사였고, 아버지는 의사였다.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그는 빼어난 가창력에도 집안 배경 때문에 원산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조선인민군협주단에 발탁돼 가극배우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북한의 5대 가극 중의 하나인 <당의 참된 딸>에서 꼬마 소년 연기를 하였다. 북한의 5대 가극은 <당의 참된 딸>외에 <밀림아, 이야기하라> <피바다> <꽃 파는 처녀> <한 자위단의 운명>이 있다.
조선인민군협주단은 북한 최고의 예술단으로 단원만 수백 명이었다고 한다. 박씨는 “<당의 참된 딸>은 김정일이 직접 연출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느 해 여름인가 <피바다> 공연을 마쳤는데 김정일이 와서 다음 공연 작품인 <당의 참된 딸>을 직접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전문 연출가보다 실력이 뛰어나 우리 모두가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저렇게 잘할까 궁금했는데, 다 그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며 오페라를 그때그때 들여와 감상했으니 보는 눈이 있었던 것이지요.”
키는 작지만 성량이 풍부했던 박씨는 실력을 인정받아 3급 공훈배우로 활동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 앞에서 ‘강반석 어머니’라는 찬양가를 불러 갈채를 받기도 했다. 덕분에 당 비서의 눈에 띄어 호위국(護衛局)협주단의 발성지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직급도 껑충 뛰어 상위(上尉·대위와 중위 사이의 계급)가 되었다.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는 소위가 되는 데만도 12년이 걸리는데 단숨에 상위가 된 것이다.
―호위국협주단은 어떤 곳입니까.
“김일성·김정일을 위한 협주단이에요. 규모는 조선인민군협주단의 4분의 1 정도로 작았지만 단원들의 실력은 한 수 위였지요. 김정일이 협주단 단원들을 ‘우리 애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아꼈습니다.”
―명 감독과는 호위국협주단에 있을 때 결혼한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남편을 ‘오빠, 오빠’ 하고 따랐지만 사실 제가 좋아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어요. 4·25축구단의 홍윤철 선수였지요. 그 선수도 저를 좋아했습니다만, 제 나이가 너무 어려서 결혼할 수 없었어요. 호위국 여자 단원은 28세 이전에 결혼하면 안 되었는데, 홍윤철씨는 제가 28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에 나이가 너무 많아 다른 분과 결혼을 했지요.”
홍윤철은 후에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4·25축구단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의 아들이 현재 북한축구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는 홍영조(洪映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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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가극 가수로 활동, 공훈배우 칭호를 받은 박윤희씨. |
“성희가 자살 시도까지 하면서 노래를 하고 싶어해 어쩔 수가 없었어요. 성희는 엄마인 제가 들어도 깜짝 놀랄 정도로 뛰어난 성량과 음감을 지닌 아이인데, 이모가 요덕수용소에 갔다는 것 때문에 꿈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시들시들 죽어 가는 것 같아 엄마로서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3옥타브의 음역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정도로 폭발적인 가창력을 자랑한다는 성희씨는 평양무용음악대학 출신이다. 그는 이전에 귀순해 활동하는 북한 출신 가수들과는 목소리가 확연히 달랐다. 북한 여가수라면 으레 상상하게 되는 가늘고 얇은 음색이 아니었다. 팝가수 셀린 디옹이나 머라이어 캐리처럼 파워 있는 목소리였다.
―우리가 아는 북한 출신 여가수들과는 목소리가 많이 다르네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꾀꼬리처럼 간드러지게 부르는 북한 특유의 창법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던 저의 롤 모델은 러시아의 국민가수 알라 푸가체바(Alla Pugacheva) 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심수봉씨가 불러 유명해진 ‘백만송이 장미’의 원곡 ‘밀리언 로즈(Million Rose)’를 부른 가수죠.”
가늘고 고운 목소리의 심수봉씨와 달리 알라 푸가체바는 중저음의 두꺼운 목소리가 매력적인 가수다. 10살밖에 안된 성희씨가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사람들이 외국 가수가 노래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는 외국에 자주 드나드는 아버지 덕분에 러시아 음악뿐만 아니라 샹송, 보사노바, R&B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접했고, 혼자서 따라 부르곤 했다. 그 덕분에 ‘주체발성’이라고 일컬어지는 북한 특유의 가늘고 얇은 목소리로 변성되지 않고 두꺼운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 박씨는 북한에서 접하기 힘든 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북한에서는 튀는 목소리였겠네요.
“북한 스타일하고 달라 어디서든 환영받는 목소리는 아니었어요. 결국 어렸을 때부터 가고 싶었던 금성제1고등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이 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부러워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금성제1고등중학교는 문화예술 분야의 영재를 양성하는 평양 최고의 명문 학교다. 2000년 평화자동차 주최로 서울에서 공연해 화제가 된 평양학생소년예술단 단원의 대부분이 이 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는 김일성과 김정일 앞에서 공연하는 동생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10대에 팝송과 남한 가요 섭렵
―대학에 가기 전까지 음악공부는 혼자 한 건가요.
“저는 금성제1고등중학교에 갈 수 없어서 광복거리중학교에 진학했어요.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팝송과 한국 노래를 부르곤 했지요. 그러던 중 이모가 요덕수용소로 잡혀 갔습니다. 어린 마음에 내가 노래로 김정일을 감동시켜서 이모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칠보산 악단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칠보산 악단은 남한 가요를 좋아하는 김정일을 위해 공연하는 단체이자 남파 지하공작원들에게 한국 노래를 가르치는 기관이었다. 그는 이 악단에 들어가기 위해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양수경의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김완선의 ‘오늘밤’ 등을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시험을 봤는데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이 됐다. 몇 년 후 무력부 적공국(남파공작원 양성소)에서도 단원을 모집해 응시했다. 심사위원들은 남한 노래를 남한 가수보다 더 잘하는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 여겼지만 이번에도 역시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 처리됐다.
칠보산 악단과 적공국이 아니면 중저음의 그를 받아줄 만한 기관이 없어서 그는 절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를 늘 격려하고 응원해 주던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못하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셔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다량의 수면제를 사다가 복용했다.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어머니가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 급히 병원으로 후송해 살았죠. 병원에서 3일 동안 누워 있었어요. 북한에서는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하면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되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제가 약을 잘못 알고 먹어서 쓰러졌다고 둘러댔습니다.”
퇴원 후 박씨는 딸이 걱정돼 “이제 노래는 포기하고 결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타일렀다. 성희씨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평양음악무용대학(現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은 어떻게 진학하게 된 건가요.
“결혼은 하기 싫고, 대학을 갈까 고민하다 엄마의 권유로 선택한 곳이 평양음악무용대학입니다. 클래식 전문 교육기관이라 엄마에게 발성법을 지도받고 시험을 쳤지요. 당시 실기평가 교수가 남한 출신인 전후봉 선생님이었는데, 처음에는 ‘너처럼 진성을 내면 클래식 음악을 할 수 없다’며 탐탁지 않아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엄마에게 두성을 배워 3옥타브의 음역대를 넘나들게 되자 깜짝 놀라시더군요.”
그는 이 대학에서 남한 출신의 여러 대학 교수를 사사했다. 북한 음악과 남한 음악, 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갔다. 그러자 왕재산경음악단(旺載山輕音樂團), 만수대예술단 등에 응시해 보라는 추천이 줄을 이었다. 자신 있게 도전했지만 역시 신원조회에 걸려 번번이 미끄러졌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는데 어머니가 친구라며 영화방송음악단 작곡가를 소개해 줬다.
―영화방송음악단에 들어간 건가요.
“네, 그곳은 신원조회가 없어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변수일 단장을 만났는데, 이분은 가극에서 김일성 연기를 주로 하던 분이에요. 이 단장님이 어느 날 혼잣말처럼 ‘조선 땅에는 <타이타닉> 주제가 같은 노래를 부를 가수가 없나’ 하며 탄식했습니다. 저는 그 노래가 나오자마자 익혔던 사람이라 그분 앞에서 자신있게 불렀죠. 그랬더니 ‘야, 너 대단하다’고 칭찬하시더군요.”
그 무렵 일본에서 활동하던 가수 김연자씨가 김정일의 초청으로 평양 공연을 하게 되었다. 마침 김씨가 리허설을 하던 곳이 영화방송음악단 연습장과 같은 건물이어서 그는 단장과 함께 구경하러 갔다. 그런데 때마침 김씨가 <타이타닉>의 주제가인 셀린 디옹의 ‘My heart will go on’을 연습하고 있었다. 김씨의 노래를 들은 단장이 한마디했다. “저 노래는 김연자가 명성희만 못하다”라고.
서태지와아이들 노래에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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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찬 전 북한축구대표팀 감독의 장녀인 가수 명성희씨. |
“<스승과 제자>라는 영화와 <당찬 처녀들>이라는 드라마의 OST를 불러 음반까지 취입했어요. 영화와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OST에 대한 반응도 아주 좋았습니다. 저를 두고 ‘끼가 많다’ ‘인민배우감이다’라는 칭찬이 여기저기서 들렸어요. 어린 나이에 유명해진 것이죠.”
―나름 자리를 잡았는데 왜 탈북하게 된 건가요.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제가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음악으로 알려진 건 아니었어요. 북한에서는 ‘주체발성’ 식의 가는 목소리로 노래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 때문에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갈 수 있을까’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한국에서 크게 성공한 드라마 <가을동화>의 OST에 매료돼 있었다. ‘혹시 나를 떠나려는 그대 맘이 힘든 나를 위해서’로 시작되는 타이틀곡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접할 수 있었죠.
“중앙당에서 일하는 고위급 자제들이 즐겨 봤기 때문에 한국 방송 직후 테이프가 돌곤 했어요. 생각해 보면 저는 북한에서 하지 말라는 건 다 하고 산 행운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한국 영화와 음악을 접하면서 자신이 한국 청년들에 비해 문화적으로 많이 뒤져 있다고 생각해 ‘통일이 되면 나는 뭐가 될까’ 걱정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국 음악은 어떻게 들었나요.
“집에서 몰래 라디오로 들었어요. <국군방송>이었는데, 서태지와아이들의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는 전기에 감전된 듯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 멋있었거든요. 또 김현정의 ‘그녀와의 이별’이라는 곡도 좋아했는데, 한번은 DJ가 ‘아, 김현정씨 이 노래 부를 때 추는 엉덩이 춤이 섹시하죠’라고 하는 거예요. 그 얘길 듣고 ‘이 가수는 노래하면서 춤까지 추나 보다’ 했습니다.”
한국 노래를 들으며 그는 군가와 찬양가 일색인 북한 노래가 더욱 듣기 싫어졌다. 그때부터 알 수 없는 신을 향해 ‘남조선에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 날이면 기차를 타고 한국에 가는 꿈을 꾸곤 했다. 어머니도 더 이상은 딸의 꿈을 막을 재간이 없어서 탈북을 도모하게 됐다.
남한 대학에서 실용음악 전공
―명 감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는 어떤 일을 했나요.
“남편이 남기고 간 돈으로 고려호텔 앞에 얼음공장을 얻어 직원 30명을 데리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팔았어요. 평양 시내 36개 식료독채(한국의 마트)에 아이스크림을 공급해 매월 7000달러씩 벌었습니다. 당 간부들도 우리 아이스크림을 즐겨 사 먹을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지요. 벌이가 좋았습니다.”
―집이랑 공장은 어떻게 하고 왔습니까.
“그냥 두고 왔죠, 뭐. 우유, 버터, 설탕 같은 아이스크림 재료도 창고 가득 사 놓고 왔으니 돈으로 치면 수만 달러나 되는 재산을 두고 온 셈이죠. 공장 식구들에게 애들이 아파서 며칠 쉰다고 하고 왔습니다.”
―탈북 준비는 얼마 동안이나 한 건가요.
“믿을 만한 브로커 구하고, 이것저것 준비하는 데 한 달 정도 걸렸습니다.”
―브로커에게는 얼마나 주었나요.
“중국까지 안내하고 한국 여권 만들어 비행기까지 태워 주는 조건으로 한 사람당 1만 달러씩, 총 3만 달러 주었어요.”
―딸의 꿈을 위해 북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온 셈이네요.
“넓은 집과 공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왔지요. 남한에 가면 딸이 가수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도착해 보니 쉽지만은 않네요.”
명성희씨 가족은 중국을 거쳐 2004년 12월 한국에 왔다. 이후 자매는 ‘북한에서 프로가수였다’는 사실을 모두 잊고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서울예대 실용음악과에 진학해 공부했다.
팝페라 가수로 성공하고파
―한국에 온 지 벌써 8년째네요. 한국에서 가수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지요.
“한국에서는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와서 보니 그렇지만은 않네요. 자본주의 사회이다 보니 성공을 위해서는 투자도 좀 필요한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유명 작곡가의 추천으로 한 기획사와 계약하고 음반을 냈다. 하지만 자금이 부족했던지 기획사 측은 이렇다 할 홍보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음반에 담은 곡도 성희씨가 추구했던 음악과 달랐다. 탈북가수인 데다 나이가 좀 있다는 이유로 성인가요를 부르도록 했는데, 편곡 스타일이 그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북한 풍이어서 기운이 빠졌다. 결국 그는 방송에 한 번 제대로 출연하지도 못한 채 위약금까지 물어 주며 기획사에서 빠져나왔다.
―실망이 컸겠네요.
“컸지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 가수 활동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습니다. 사실 제가 잘 안 나오는 목소리를 끌어낼 줄 아는 재주가 있어서 서울예대 다닐 때 학생들을 상대로 과외를 좀 한 경력이 있거든요. 가수 대신 보컬트레이너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반대했습니다. ‘남이 아니라 네가 성공해야 나중에 통일이 되어도 옛 동료들한테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서요.”
한동안 일이 없었던 성희씨는 요즘 바빠졌다. 일본 영사관 행사에서 노래한 것인 인연이 돼 오는 봄 한 케이블 TV에서 방송할 한일 합작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기 때문이다. 일본의 TSS프로덕션과 한국의 서희프로덕션이 공동 제작할 이 드라마에서 그는 연기뿐만 아니라 주제곡까지 부른다. 일본 후쿠오카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촬영할 이 단막극은 케이블 TV ‘채널T’에서 방송할 예정이다. 그는 “공중파는 아니지만 ‘새로운 시작이자 도전’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어떤 가수가 되고 싶은가요.
“북한과 남한에서 기본기를 다진 만큼 어떤 장르의 곡도 완벽하게 소화하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언젠가는 비트가 빠르고 강한 팝페라로 성공하고 싶은 꿈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