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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중독자의 처절한 告白 - 연쇄살인犯 유영철이 보내온 50여 통의 편지

사람에겐 生의 갈망이 있지만 死의 갈망도 있다. 나는 死의 갈망을 선택했다

이은영    chosun30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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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멈추지 못하고 사체를 매장하고 와서야 깊은 숙면에 빠졌다. 외로움을 잊고 긴 시간을 자게 되었다. 깨어나서는 날아갈 듯이 개운했다」(2004년 11월21일字 편지 中)

柳永哲은「가장 공포스러웠던 순간은 死體를 토막 내고 있다가 아들의 전화를 받았을 때였다」고 고백했다. 살인마 유영철이「나도 인간이다」는 사실을 깨달게 한 것은 아들의 목소리였다.
  기자는 月刊朝鮮 2004년 9월호에 「柳永哲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사를 썼다. 지난해 7월15일, 柳永哲이 검거된 후 기자는 「20명의 사람을 토막을 내어서 매장시킨 악마는 어떻게 탄생했는지」 몹시 궁금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柳永哲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을 비롯해서 20여 명의 이웃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통해 전해들은 柳永哲의 어린 시절은 기자를 당혹케 했다.
 
  柳永哲은 아버지의 不在로 가난과 외로움을 겪었지만 그림과 조각에 소질을 보이는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친구·친척과 이웃 주민들의 증언이 진실인지 궁금했다.
 
  지난해 8월19일 서울구치소에 있는 柳永哲에게 事實(사실)관계를 묻는 편지를 보냈다. 「반론권을 줘야겠다」는 생각도 작용했다. 뜻밖에도 기자의 편지에 柳永哲은 답장을 보내왔다. 첫 편지는 8월27일에 왔고, 두 번째 편지는 9월6일, 세 번째 편지는 9월8일에 왔다. 현재까지 그가 보내온 편지는 50여 통에 달한다.
 
  서울구치소의 한 교정관계자는 『柳永哲은 李恩英 기자에게 편지를 쓰는 데 매달리고 있다. 편지 쓰는 게 세상과 통하는 그의 유일한 통로이자 애착인 것 같다』고 전했다. 그 관계자는 柳永哲이 편지를 쓰는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柳永哲이 수갑을 찬 채 마룻바닥에 엎드려 편지를 쓰고 있다. 재판을 받으러 나가는 것 외에 책 읽기와 편지 쓰기에 매달리는 일이 유일한 낙인 것 같다. 柳永哲은 하루에 20분 운동할 수 있는 시간에 밖에 나가지 않고, TV를 보지 않을 정도로 우울증에 빠져 있지만 편지를 쓸 때만큼은 밝고 진지해 보인다. 柳永哲이 쓴 편지는 담당 교도관들이 柳永哲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다』
 
   기자는 柳永哲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떻게 그렇게 잔혹한 토막 살인을 20차례나 할 수 있었는지」를 집중적으로 물어봤다. 혹시 「정신이상으로 살인을 하지 않았는지」 추궁했다. 柳永哲은 『나는 정신이상이 아니다』면서 『정신이상자가 철저하게 계획하고 살인을 이행할 수 있느냐』고 했다. 柳永哲은 끔찍했던 살인을 무덤덤하게 묘사했고, 당시 정황도 정확하게 그려냈다. 가끔씩은 그림을 그려서 보내오기도 했다.
 
  柳永哲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柳永哲에게 살해당한 연약한 여인들의 얼굴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면서도 柳永哲과 편지를 계속 주고받은 것은 「柳永哲 같은 흉악범도 우리 사회의 소산」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柳永哲은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를 질타하고 자신이 마치 혁명가가 되는 듯한 글을 적어 보내기도 했다. 「나는 사회를 살인한 것이다」라며 柳永哲은 자신의 모든 범죄를 정당화했다. 기자는 편지를 보내 「당신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던져진 사람들이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 궤변을 펴지 말라」고 했다.
 
  기자에게 존대말로 글을 쓰던 유영철은 편지를 10여 차례 보낸 후 「李恩英 기자와1970년생 동갑이니 말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겠다」며 반말투의 편지를 보내왔다.
 
  柳永哲의 편지가 거짓으로 일관된 변명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편지에는 그가 왜 20여 명을 죽이는 끔찍한 범행에 나섰는지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 무수히 담겨 있었다. 「이런 단서를 추적한다면 柳永哲 같은 흉악범이 또다시 출연하는 것은 막을 수 있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되었다.
 
  柳永哲은 「가장 공포스러웠던 순간은 死體를 토막 내고 있다가 아들의 전화를 받을 때였다」고 고백했다. 살인마 柳永哲이 「나도 인간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은 아들의 목소리였다. 인간을 살도록 하는 힘이 가족이며, 인간을 버티게 만드는 것이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柳永哲의 편지를 모아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
 
  희대의 살인마 柳永哲과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소문을 듣고서 기자에게 한동안 「편지를 보여 달라」는 전화가 쇄도했다. 외국인들에게서도 전화가 걸려 왔다.
 
  기자는 외국인에게 『잔혹한 살인마의 편지인데 무엇이 궁금하냐』고 물었다. 일본인인 한 사람은 『柳永哲이 살인 직전에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고, 미국인인 한 사람은 『잔혹한 살인이지만 분석하고 싶다』고 했다. 柳永哲 사건을 통해 살인에 이르는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고 동종의 범죄를 막겠다는 의도인 듯했다.
 
  柳永哲의 심리분석을 맡아 주었던 경찰대학교 李雄赫 교수, 경찰청 과학수사계 권일용 형사, 柳永哲의 변론을 맡은 金秉俊 변호사도 기자의 생각에 공감을 표시해 주었다.
 
  이번에 책을 내면서 柳永哲의 심리분석을 맡아 주었던 경기대학교 심리학과 李水晶 교수는 『柳永哲의 편지를 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내던져 버렸다. 과연 이 편지들을 모아서 책을 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을 했다. 그러나 결국 심리분석을 하게 되었다』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번민과 고민의 산물로 책이 나오게 되었다. 柳永哲이 구체적으로 묘사한 범행과 연관된 정경 등은 너무나 잔혹해서 상당 부분을 삭제했다.
 
 
  「살인 중독자」 유영철의 편지
 
 
  [2004년 10월13일자 편지]
 
  왕지우개 하나 부탁해요. 10년만 지워버리게
 
   어김없이 또 은영씨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근데 반가움보다 슬프네요. 미안해요. 지우려고만 해서. 어디서 구할 수만 있다면 큰 왕지우개 하나 부탁해요. 10년만 지워 버리게.
 
  그날(2004년 10월3일) 제가 그렇게 잠꼬대를 심하게 했다네요. 『같이 가~ 같이 데려가~』라고. 잠꼬대라곤 전혀 하지 않는 나인데. 魂(혼)이 정말 있는 건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은영씨에게 많은 위로를 받은 건 사실이에요. 은영씨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힘들어요. 더 비참해지는 것 같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를 읽어 봤냐구요? 「한니발」도 읽어 봤어요. 그래서 뇌를 먹어 본 거구요. 여기서 영화를 틀어 준 적이 있는데 어느 여자 죽이기 전 같이 본 영화라 TV를 꺼버렸어요. 그리고 유일하게 관계를 가진 어느 여자는 정이 들어 죽이기 정말 마음 아팠어요. 방 청소하던 그 여자가 우연찮게 제 흉기들을 발견하는 바람에. 나를 많이 따르고 같이 살자고까지 했던 여자라 꼭 사체를 찾아 주고 싶었는데.
 
  金변호사님은 은영씨 말대로 예리하세요. 여성들의 살인 부분에 대해서는 검·경찰과는 다르게 집어 내시더라구요. 그래요. 내가 진정 죽이고자 했던 여자는 동거했던 여자처럼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여자들」이었어요. 막상 정 때문에 죽이지 않은 그 여자는 자기 꾀에 살았다고 지금도 웃고 다니겠죠. 제 사건에서 그 여자를 빼 놓고는 범죄행각이 성립 안 돼요.
 
  저의 살인들을 결과로만 보지 않고 원인을 본다면 그 여자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죠. 그 여자는 벼랑 끝에 선 나에게 시퍼런 비수를 들이댄 사람이에요. 그 여자로 인해 「말」이라는 게 얼마나 잔인하다는 걸 알게 되었죠. 말로써 나를 그렇게 죽어 가게 만든 그 여자는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인성마저 모두 앗아가 버렸으니까요.
 
  그 사람의 행동에 극도로 동화되어 그렇게 무자비한 행동들이 계속되었지만 단언컨대 그런 여자가 밤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한 제2의 유영철은 또 나옵니다.
 
  이지러지고 음성적이었던 저의 여성 교제도 잘못되었고 사람 만나는 것에 신중하지 못했던 나의 우매함이 더 크지만, 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음에도 깨닫기는커녕 결혼 운운하며 남자들에게 상처 주는 걸 재미삼아 다니고 있을 그 여자를 생각하니 분노가 다시 이네요.
 
   이제 좀 제가 혐오스러워지나요? 그래도 절 알려면 아직 멀었는데. 위선적인 횡설수설 속에 진실이 드러나는 법이니까 판단은 은영씨 몫이고, 저는 밤만 되면 우울증에 시달렸어요.
 
  컴컴한 방에 들어가면 어둠이 싫고 혼자 불 켜는 것도 싫고 답답할 때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곤 했어요.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비가 내려도 온통 잠기도록 왔으면 바랐었고, 번개가 쳐서 전부 불 태워 버렸으면 했고, 태풍이 오면 온통 집어 삼켜 버렸으면 했어요. 그런 광기들이 있었기에 파괴의 유혹을 강렬히 느끼고 미친 듯이 사람을 害(해)하고 그로 인해 나로 모르게 도취되어 버리고. 카타르시스적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정말 내 몸 속에는 몇 방울의 광적인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이 나이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의 절정과 괴로움의 극치까지 모두 느껴 봤기 때문에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요.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러한 분노의 폭발은 더 큰 공허감과 외로움을 일게 했을 뿐 정작 나의 어두운 감정을 해소시키고 정화시키진 못했어요. 나의 그릇된 사고방식이 내 정신의 건강까지 다 앗아가 버린 거죠.
 
  웃기는 건, 미처 제가 받을 지탄은 생각하지 못한 채 원혼들을 달래 준다고 모든 걸 자백해 버렸다는 거예요. 범법자가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는 것만이 꼭 자수가 아닌데. 소지품을 추궁하여 자백을 받아 냈다는 경찰의 말은 어이가 없어요. 정작 추궁한 증거품들의 피해자들의 시체는 한 具(구)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10개월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경찰 추적 한 번 안 당하고 증거 하나 남기지 않은 사람을 정신병자로 몰아 버리는지. 검·경이 측은하기까지 하네요. 요는 어쨌든 겉핥기식 수사는 좀 바뀌어야 된다는 얘기예요.
 
  저는 이건 알겠더라구요. 나쁜 것을 더욱 나쁘게 만드는 이 사회, 이런 곳이 뭐가 좋다고 바둥바둥 살려고 했는지. 세상 사람들은 유영철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떤다고 하더군요.
 
  오늘 신세타령은 이만. 수고하세요. 아직 가을인데 이렇게 추운 건 마음이 추워서일까요?
 
 
 
[2004년 10월17일자 편지]

 
  내가 가장 무서웠던 순간이 언제인지 아세요?
 
   신문에 「심리평가 보고서」 얘기가 실렸더군요. 정말 함부로 말을 못 하겠어요. 무슨 「돌연변이」 연구도 아니고 그 조사반들에게 한 60%의 「유영철」을 얘기했다면 은영씨에겐 99%의 고백(?)이니 그 사람들이 이은영씨에게 물어보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갈수록 저에 대해 정보를 많이 알게 될 테니.
 
  女子 하면 떠오르는 相(상)이 있냐구요? 저는 상당수 사람들이 선택했다는 「황진이」도 아니고 제 그림 상대 「엄지」도 아니고 소설 속의 「베아트리체」도 아니에요. 두 말할 나위 없이 「아이 엄마」라고 말하고 싶네요.
 
  서로 百年偕老(백년해로)하지는 못했지만 참 착했던 사람이고 지난날 폐쇄적인 나에게 그 사람은 다정하고 건전하게 다가와 처음으로 「사랑」이란 걸 알게 해준 여자였어요.
 
  착한 엄마에게서 나온 아이를 4~5세 때 시장에 데리고 다닌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어머, 쟤 좀 봐』, 『무슨 사내아이가 이렇게 예쁘니~』 그래서 기분이 좋았었는데. 누구든 자기 자식이 예뻐 보이는 법인데, 그 녀석 데리고 다니며 아무리 봐도 우리 애보다 더 예쁜 앤 없더라구요. 애정 없이 부족하게 자란 저라서 애한테 만큼은 정말 잘해 주고 싶었는데.
 
   제가 이번 蠻行(만행)을 저지르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아세요?
 
  남이 들으면 이해가 안 가겠지만, 그건 사체를 토막 내는 와중에 아들 녀석에게 전화가 온 순간이었어요. 전화벨 소리에 놀란 게 아니라 당황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감기 아직 안 나았어 아빠?』 하며 물어보는 말이 『아빠, 난 다 알고 있어. 그러지마』 하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 했었어요.
 
  하던 작업(?)을 중단하고 너무 긴장해서 사체 토막을 늘어놓은 채 밥을 먹었어요. 긴장하니까 배가 고파지더라구요. 이은영씨도 배고프면 밥부터 먹는다는 것처럼 사체 정리도 안 하고, 라면은 좀 그래서(?) 그 늦은 시간에 밥을 해먹었어요.
 
  사체 토막 내는 일이 얼마나 氣(기)를 집중해야 되는지 그 음악을 틀어 놓고도 긴장을 늦출 수 없더라구요. 다음날 아이를 만나면서 그 긴장감이 사라졌듯이, 그만큼 제 마음이 얼마나 아들 녀석에게 의존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일 겁니다. 아들 녀석이 내게 주었던 정신적 위안과 행복감은 세상 그 어떤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되었다는 얘기예요.
 
  시집도 안 간 처자가 이런 맘을 알는지 모르겠네요.
 
  4년 전 오늘. 애 엄마와 법정에서 이혼재판을 했던 날이에요. 이혼의 아픔보다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낙엽 쌓인 서초동 법원 길을 눈물 떨구며 힘없이 걸어가고 있을 그 사람이 생각나서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몰라요. 저는 그때 추수의 몸이라 달려가서 위로를 해 줄 수도 없었거든요.
 
  「가을 가~을 가면 오지 말아라~」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나네요. 그 옛날 가난한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 이맘때 되면 꼭 생각이 나니. 오늘 청승은 여기까지. 수고하세요.
 
 
 
[2004년 10월22일자 편지]

 
  제가 왜 재판을 계속 거부하냐구요?
 
  물고기의 IQ는 0.7이라는데 그런 물고기를 놓치는 낚시꾼들은 IQ가 얼마일까요? 하루에 한 명꼴은 사람이 죽어 나가도 열심히 순찰만 도는 경찰이나 힘들게 몇 번을 잡아 놓고도 쉽게 살인마를 놓치는 경찰들은 어느 나라 경찰일까요? 법조인끼리 소송이 걸렸다면 아무래도 경험이 풍부한 범죄자들이 심판하는 건 어떨까요?
 
  제가 왜 재판을 계속 거부하냐구요?
 
  제 인생과 목숨을 결정지은 자백이었는데 이만 하면 된 거 아닌가요? 안 나가겠다는 재판을 수단 방법 안 가리려 하고 「사슬」이라도 풀어 주면 나가겠다는 조건 같지도 않은 조건도 안 들어 주고, 『강제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판사의 협박성 때문에 난동이나 일으키게 하는 재판이 과연 재판인가요? 그렇게 전부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밝혀 내지 못한다면 그게 완전범죄로 남는 거지, 완전범죄가 별 건가요? 판결 전 조사팀이 별 희한한 조사까지 포괄적으로 해 갔으면서 뭘 더 말하라는 건지.
 
  사회의 공권력이라는 경찰이 1월에 절 그렇게 찜질방 사건으로 들쑤셔 놓지만 않았어도 그 이후 19명의 희생자는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고 제 마지막 희망도 깨지지 않았을 거예요. 사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심정을 정말 모르는 걸까요?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못해 제 자신이라도 죽이고 싶은 심정을 왜들 모르는 걸까요. 그래요 죽을 때까지 이런 삶의 연속이라면 지금이라도 끝내고 싶은 마음 굴뚝 같습니다.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인데 어느 책에서 보니 「야뇨증」은 정신적 공허감에서 생긴 병이라고 하더군요. 항상 외롭고 쓸쓸했던 슬픔들이 마음에 축적되어 있다가 밤에 잘 때 긴장이 해소되면서 눈물로 변형된 형태의 오줌을 싸게 된다는 게 의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군요. 저의 신체적인 특징이 다 이유가 있었네요.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오랜 시간 감금됐다가 풀려나는 장면에서 사람 얼굴 만지며 감동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저도 가슴 뭉클하더라구요. 같이 영화 보러 갔던 여자가 이상하게 보는 거 있죠? 그런 감정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거죠. 영화 「실미도」의 북파공작원들이 마지막에 자폭하는 장면에서도 혼자 흐느꼈어요.
 
  역시 옆에 있던 여자가 왜 우냐고 의아하게 보더군요. 현재 전국의 사형수 59명에게 「북파공작원」 같은 임무가 부여된다면 사양할 사람이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같이 보러 갔던 여자가 울더군요. 그 여자도 「가족애」가 많이 사무쳤나 봅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오히려(?) 재미없었어요. 실존하고 있을 그 眞犯(진범)은 저 같은 인간이 생각하기에도 맛이 완전히 간 것이라 생각해 버렸습니다. 할머니와 유치원생까지 강간, 살해하는 者라. 아무리 살인에 미친 사람이지만 저 같은 살인마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아니더라구요. 그 범인이 안 잡히는 건 아마 그가 사형수가 아닌 重刑(중형)을 받아 교도소에 숨어(?)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2004년 10월22일자 편지]
 
  돈도 아니고 性도 아니고 저는 사회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센스 있는 이은영씨는 이미 感知(감지)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진정 죽이고자 했던 대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비슷한 답이라도 찾으셨다면 답안 제출해 보세요. 채점해 드릴 테니. 언론에선 「부유층을 범행대상으로 삼았다는데 그 노부부들이 과연 부유층이었나?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를 범행대상으로 삼았다면서 왜 일반여성을 죽였나?」 그러더군요.
 
  신사동과 구기동에서 제 눈으로 확인한 현찰만 해도 億(억)이 넘는 액수더군요. 내가 강도로 위장했던 혜화동의 그 큰 금고엔 얼마나 있었을까? 성북동의 호화주택들도 踏査(답사)를 해봤지만 감히 엄두도 못 낼 「철옹성」들이더군요. 대출이자 내기에도 정신없이 사는 일반인들이 과연 그 많은 현찰 구경이나 해보겠습니까?
 
   일반여성이라는 가정주부가 마약전과가 있고 윤락전과가 그렇게 많습니까? 결혼 앞둔 여자라는 사람이 퇴폐 이발소 직원이더군요. 일반 회사에 다닌다는 여자는 「조건만남」 쪽지가 컴퓨터 조사 결과 그렇게나 많이 나오던데. 물론 제가 性매매 여성들만 골라 범행을 하려고 그랬던 건 아닙니다. 사람 가지고 장난 치고 남자들 등 쳐 먹는 여자만 찾아 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性매매 토론 글귀에 「유영철이가 사람을 더 죽이게 놔두지 왜 잡았냐」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 사건이 미화되고 옹호되어선 안 됩니다. 정말로 세상을 바꿔 놓지 못할 바엔 저 같은 어쭙잖은 인간이 또 나와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살인이라 해도 목적 없는 살인은 없습니다.
 
  원한이 있어서도 아니고 돈 때문도 아니고 性을 빼앗으려 했던 것도 아니고, 이제라도 제가 밝힌다면 저는 사회를 죽이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 어떤 합리화나 정당성으로 포장하려고 그러는 건 아닙니다. 그럴 기력도 안 남았습니다. 제가 왜 收支(수지)도 안 맞는 그 짓거리를 마음 먹었겠습니까? 제 이름 앞에 왜 「희대의 살인마」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합니까? 이제 그만들 왈가왈부했으면 합니다. 사회에 대한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부유층 살인」에서 「토막 살인」으로 생각이 바뀐지 아세요? 「혜화동 사건」을 마지막으로 「동거녀」를 만나기도 했지만, 「신사동 사건」의 유가족이 사회에 「억대」의 기부를 한 사실을 인터넷에서 보고 「부유층」은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던 겁니다. 안 그랬으면 「토막 살해」에 이어서 「조폭」들까지. 다시 「부유층」, 「토막」, 「조폭」 등 끝도 없었을 겁니다.
 
  저 같은 흉악범이 「사랑」에 대해 좀 알게 되니까 제 주변에는 이미 아무도 없더라구요. 제게 있어 情이란 무서운 거예요. 제 오피스텔에서 그 놈의 情 때문에 살아서 나간 여자가 정확히 6명이에요. 그 사람들은 뉴스를 보고 가슴을 쓸어 내렸겠죠. 제가 생각하는 情이란 목숨까지 결부시킨다는 얘기예요.
 
 
  [2004년 10월25일자 편지]
 
  父子의 마음이 일치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은영씨에게 의심이나 거부감 같은 건 없어졌어요. 처음부터 「오해」 같은 건 없었지만 記者(기자)와 殺人者(살인자)의 느낌은 좀 그랬거든요. 하지만 이은영씨는 이 바보를, 은영씨 옆을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 몇 번」같이 생각해야 해요. 행여 제가 이은영씨 마음에 머무르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요. 어차피 결과는 서로 아는 거지만, 알죠? 이은영씨의 마음에 또 새로운 「비밀번호」를 만들면 안 된다는 걸. 아무튼 저를 살게 하는 은영씨의 「편지 위력」은 대단해요. 여러모로 고마워요.
 
  日本 측 記者에게 「SOURCE(소스)」 같은 건 줄 것도 없었겠지만 「그림」 얘기는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말아 주세요. 제게 있어 畵材(화재)는 제 운명을 좌절케 했던 놈이잖아요. 다시는 그림 따윈 안 그릴 거예요. 떠날 때까지 한 장도.
 
  내 아이한테 한 번 실망(?)한 적이 있었어요. 아들 친구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갔었는데 친구들에게 아빠가 너무 잘 대해 주는 모습이 질투 났는지 도무지 생각지도 못했던 「거친 어휘」들을 쓰더라구요. 나중엔 여자친구 가슴까지 심할 정도로 주먹으로 쳤어요. 「나는 저 나이 때 안 그랬는데 얘가 왜 이럴까」 하는 생각도 잠시 「아, 내가 애를 잘못 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반면 어느 날은 父子의 마음이 일치했던 순간도 있었는데, 500원짜리 야구장 알죠? 그 야구장을 함께 지나다가 내 얼굴을 보고 씨익 웃는 거예요. 말할 것도 없이 「가위, 바위, 보」 해가면서 배트를 휘두르기 시작하는데 안타는 아니더라도 이 조그만 녀석이 잘도 맞추데요. 「역시 고추 달린 사내놈이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애 엄마한테도 실망한 적이 있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내가 너무 재밌고 감동 있게 봐서 애 엄마에게 읽어 보라고 했더니 『그럴 시간 있으면 한숨 자는 게 낫다』고 해요.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그 말 한마디에 그 사람이 나를 만나 얼마나 고생했고, 삶에 찌든 생활을 했는지가 나타나서 많이 속상했었거든요. 아내는 저로 인해 온갖 쓰디쓴 경험의 집대성 같은 결혼생활을 하다 떠나간 겁니다.
 
  연애시절 「폐병환자」였던 아내와 「프렌치 키스」를 하면서도 전염 같은 건 아예 생각도 안 할 정도로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었어요. 그 사람의 환경과 그 어떤 아픔까지 전부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람도 오랜 시간 날 기다려 준 것이 아니었나 하는 늦은 悲哀(비애)가 느껴지네요.
 
  그 사람은 다음 生에 날 만나는 거, 고개를 절레절레 하겠지만 전 그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진정 사랑했기에 슬프네요.
 
  요즘은 「풍뎅이」 한 마리를 유인(?)해서 저와 친해지도록 훈련시키고 있답니다. 이 인간 세상이 너의 微物(미물)보다 못하다는 걸 가르쳐 주고 있어요. 이놈도 제 정체를 알게 되면 싫증나서 금방 언제 날아가 버릴지 모르지만 이 「적막강산」에 움직이는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있어요.
 
 
  [2004년 11월4일자 편지]
 
  그 여자는 早漏 컴플렉스가 있는 나를 조롱했다
 
   사람이 명예롭고자 하는 이는 있어도 치욕스러움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을 얘기해 경악케하고 발견되지 않은 피해자를 계속 주장하고, 이문동 사건을 다시 번복하고. 나를 이해한다는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하지 않던 짓을 하면 갈 때가 돼서 그런 것이다. 뭐가 아쉬워 숨기고 가겠니. 이문동 사건. 그래 내 생각이 짧았다. 자식을 위해 마지막 해 줄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너무나도 믿게끔 「조건」을 내세우는데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면 거절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냐? 그래도 경찰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공증」까지 제시하는데 말이다. 너도 알 것이다. 내가 명분 없는 살인은 안 했다는 걸. 그리고 내가 지금에 와서 이문동 사건을 입 다물면 또 어떻고 잔인한 얘기들을 했으면 또 어떠냐? 내 운명이 달라질게 뭐가 있다고. 내 입에서 「진실」이라는 게 나왔으면 됐지.
 
  360알의 수면제로는 물론 죽지도 않고 「치사량」도 아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사람 가방에서 왜 水鏡(수경)이 나왔는지는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더라. 수영을 좀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죽으러 물에 들어갔다 해도 숨이 막히면 본능적으로 헤엄쳐 나오려고 한다. 더더구나 바닷물이기에 눈에 짠물이 들어가면 더욱 그렇다. 수면제를 먹으려 했던 이유는 약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수경을 끼고 지칠 때까지 헤엄쳐 나가려고 그랬다. 사체가 발견되어 檢屍(검시)하게 되면 수면제 반응으로 인해 「자살」 판명이 날 거고. 사실 그때 떠났더라면 지난 여름 그렇게까지 시끄럽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日本 잡지엔 아내를 죽이려는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더구나. 이를테면 「김 안주 하나에 처량하게 맥주 마시고 있는 아내가 측은해 보여 살해할 마음을 접었다. 아내를 못 죽인 화풀이 때문에 사람들을 그렇게 죽이게 됐다」
 
  내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너도 이미 알다시피 그런 일 있었던 건 맞으나 그건 6월 얘기다. 「전장으로 나가는 장수가 가족을 죽이고 나가는 심정」 얘기하지 않았더냐? 내 사건이 세상에 알려져 봐라. 내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애 엄마, 내게서 떠나가긴 했어도 고마운 사람이었다.
 
  살인의 생각은 이미 작년(2003년) 출소 전부터 마음먹었다. 그 대상은 당연히 부유층이었다. 동거녀 김○영 때문에 출장마사지, 전화방 아가씨가 타깃이 된 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여자 때문에 살해 여성들을 토막 내거나 살해된 여성 중 김○영이라는 동명이인을 그렇게 참혹하게 손괴한 것은 아니다.
 
  살해된 김○영을 그랬던 건 그날 아내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은 이유에서였다. 아내 집을 나서며 방화를 하고 간판을 부수고 해도 「화」가 식지 않더라. 그래서 그날 유인된 여성의 상황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잔인했던 것이다. 부유층에서 토막 살인으로 바뀐 동기도 그 동거녀 때문이라고 그러던데 그건 아니다.
 
  이미 2003년 11월에도 2004년 1월에도 돈에 미친 여자들은 내게서 죽어 갔다. 부유층을 대상으로 했던 범행을 멈춘 계기는 앞전에 얘기했을 것이다(부유층 피해자의 자녀가 억대의 돈을 사회에 기부했다는 얘기). 검·경이 밝혀 내지 못해서 그렇지 김○영과 동거 중에도 계속 살인은 있었다는 얘기다.
 
  나와 생활하면서도 툭하면 다른 남자와 조건만남(?)을 가지는 그 여자의 행동 때문에 살인의 화살이 性매매 여성들에게 날아간 것이다. 불가피하게 性매매 여성들을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때는 이미 내가 理性(이성)을 잃어 가고 있을 때였다. 하루에 한 명씩 마음먹었으니 말이다.
 
  「新潮(신조)」엔 이런 글도 있더라.
 
  「어떻게 동거녀에게 30만원씩 줘가며 관계를 가질 수 있느냐」
 
  우리나라 性문화를 비판하는 글을 보고 참으로 나라 망신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사람들은 내가 무조건 쾌락만을 좇는 행동들을 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건 아니다. 황학동 노점상에게서 압수(?)한 「음란 CD」와 「서적」 그리고 「시알리스」, 「비아그라」 같은 것들을 보고 별난 취미를 가졌다고 쓴 공소장 얘기는 어이가 없을 뿐이다.
 
  동거녀와의 관계도 내겐 무의미한 나날이 많았다. 내가 원했던 건 사람과 사람의 情이었고 그 여자가 원한 건 돈이었다. 내 학력·전과와 이혼남의 전력을 알아 버린 그 여자는 나를 남자로 보지 않았다.
 
  早漏(조루) 콤플렉스가 있는 나를 조롱했고 精管(정관)수술까지 한 내게 情이 아닌 돈만 요구했다. 그래서 실제로 경찰사칭으로 불법 단속(?)을 계속 병행해야만 했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유인된 여성들과의 性관계가 결여된 것이다. 이런 얘기까지 너에게 전하고 싶진 않지만.
 
  아무튼 돈으로 여잘 사고 남잘 얻고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너무나 많은 가식을 보이는 사람들(현재도 수없이 그런 채팅으로 밤을 새우는 이들이 많듯이). 그런 돈으로 사람을 저울질한다는 것 때문에 性(성), 命(명), 錢(전)을 경멸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내가 어떤 여자에게 끌렸던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이라는 얘기다. 어떤 미모나 매력도 순간 외에는 내 마음을 잡진 못했다.
 
  서로 정신 공감이 안 되는 상황에서 여성의 美는 내게 비중을 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미인을 싫어한다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실제 그랬다. 미모 좀 있는 여성만 골라서 범행한 거 보면 모르냐? 나는 무섭게(?) 살찐 가슴과 엉덩이를 혐오했다. 여봐라는 듯이 흔들고 다니는 글래머라는 족속들이 왜 그렇게 미웠는지 모르겠다.
 
  이 끝없는 불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 보이는 모든 것들이 惡의 씨로 보였고 비극의 싹으로 보였다. 사회부조리가 낳은 나의 24시간의 불안을 충족시키는 것이 과연 불가피한 살인뿐이었을까? 못 견디게 밀려오는 크나 큰 그 무엇과 싸우다 지칠 대로 지쳐서 선택한 방법이 그런 살인들뿐이었을까? 물론 마지막 선택은 자살이었다.
 
  첫눈이 오기 전에 했던 나와의 약속. 내가 왜 이 가시밭 세상에서 남의 피로 인해 피투성이가 되어 날뛰어야 했는지. 무슨 미련이 남아 빨리 떠나지 못하고 그렇게 괴로워해야 했는지. 비참하고 비참했던 내 인생.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무슨 寸劇(촌극)이란 말인가? 지금 다시 돌이켜 봐도 정말 너무나 한심한 짓거리였다.
 
  은영아.
 
  나는 그 옛날 그림이나 그려(대학로에서 캐리커처를 그려 주는 사람들처럼) 깨끗한 돈을 벌고 싶었다. 정말 그 돈으로 굶지 않을 만큼 먹고 살고 싶었다. 그게 이놈의 세상에서 욕심 안 부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깨끗한 일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내는 원치 않더라. 집을 많이 비우는 웨딩 사진 찍는 일도, 도장 파는 일도, 운전직도, 중장비도, 어느 사장의 비서직도 내가 하는 일마다 탐탁지 않게 생각하더라. 좀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속물근성이 아내에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난 내 가정에 安住(안주)하지 못했던 것이다.
 
 
  [2004년 11월12일자 편지]
 
  내 몸을 X-레이로 찍어 뼈 자르는 法을 연구했다
 
  은영아.
 
  내가 인체의 마디마디를 어떻게 연구했는지 아냐? 인터넷으로 인체도감을 찾아봐도 뼈만 나온 건 없길래 병원에 가서 내 몸을 X-레이로 찍었다. 아프지도 않은데 무조건 몸 전체를 찍어 달라니깐 이상하게 생각하더라. 요즘 웬만한 병원은 X-레이 기록을 CD로 달라고 하면 주는데 그걸 다시 내가 web design으로 옮겨 놓고 확대해 가면서 골절의 마디마디를 공부(?)한 것이다. 그 결과 칼을 두어 번만 대도 정강이를 자를 정도로 숙련(?)이 되더라.
 
  내 사건들은 가면 갈수록 대담해지고 치밀해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내 범죄일지에 구상했던 과정대로 진행된 것이다.
 
  은영아.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여기서 조금 이동할 일이 생기면 나를 보는 재소자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고개 숙이고 다니라는 둥 별소리를 다 한다. 하지만 평생 비굴하게 살아 왔기 때문에 가는 날까지라도 비굴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뻔뻔스럽게 머리를 들고 다닌다. 나는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불쌍하다. 이런 세상에서 더 괴로워야 하고 더 마음 아파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 내 生의 필름은 끊겨 버리면 그만이지만 계속 슬픈 장면을 찍어야 되는 사람들. 남은 사람들이 더 안 됐을 뿐이다.
 
  고난은 오히려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강하게 만든다는데 시련이 닥칠수록 난 추락만 했다. 수렁에 빠졌으면 나오려고 했어야 했는데, 그 더러운 물에서 난 헤엄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범죄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관심은 한창 나이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려니와 불법을 단속한다는, 그래서 잘만 하면 혼도 내주고 응징자도 되어보겠다는 마음속의 恨(한)도 작용했던 것 같다.
 
  내 영혼이 조금씩 조금씩 좀먹어 들어가는 것 같다. 마귀의 밑밥인지도 모르겠다. 이 얼마나 한심하냐. 수고해라.
 
 
  [2004년 11월17일자 편지]
 
  선짓국·내장탕이 나오는데 숟가락이 안 간다
 
   「여고 졸업반」을 부른 가수 김인순이 세상을 떠난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다. 귀여운 보조개에 빵모자가 기억에 남는 「소녀와 가로등」의 장덕도, 현해탄에 몸을 던진 「사의 찬미」의 윤심덕도 모두 요절한 가수들이다.
 
  가장 아름다울 때 죽고자 함은 무섭고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혹자들은 자살을 치졸하고 용기 없는 짓이라고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의 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들이다. 살아 있음이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보내 줘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입지적인 인물이 되고자 살아 왔던 게 아니기 때문에 나이 먹어 가면서 산다는 게 두렵고 싫었다. 죽기 위해 살았다는 내 궤변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냐. 최고의 순간에 가지는 못할망정 비참하게 가고 싶지는 않았다만 결국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는구나. 「산타크리트 詩」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세상이 괴로우면 죽어 버려라. 허나 네 業(업)이 이어지는 다음 生(생)엔 더 큰 괴로움이 이어질 것이다」
 
  어찌됐든 자살은 어리석다는 그런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만 神을 배척하고 신앙을 우습게 생각했던 나는 그러나 그릇된 思考(사고)가 영혼마저 상하게 한다는 건 알겠더라. 저야 싫든 좋든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만 남겨진 자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플 뿐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생명이 진화한다는 「다윈」의 책을 즐겨 봤던 적이 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론은 생명과학의 고전으로 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이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정글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나 또한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나 「윤회설」로 본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나 같은 존재는 결코 구원받을 길이 없다. 어차피 불교는 죽고 다시 태어나야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는 (그것도 그 당대에는 되지 않는) 것이니 나는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것이다.
 
  「히틀러」든 「일본 천황」이든 아니면 「칼리귤라」든 「풍신수길」이든 그들 또한 무수한 살인행위를 범했다. 그 후 그들도 죽었다. 그러나 혁명가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나는 미친 살인마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 앞뒤 생각 없이, 끝도 없이 타락해 버린 내 자신이 너무나 밉다. 달리기 좀 한다는 남자가 35년 필드를 뒤도 안 돌아보고 숨 가쁘게 달려 버렸다. 결승선도 없이 아무도 뛰지 않는 그런 길을 쉬지도 않고 뛰고 나서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비탄에 빠져 있는 것이다.
 
  절에 가면 五百羅漢(오백나한)이라는 것이 있다. 어떻게 그리 한결같이 惡한 형상인지 일반 사람들은 마주보기가 섬뜩할 정도다. 왜 그럴까? 옛날에 절의 탱화를 그린 사람들은 모두 실존인물을 그리는 것이라고 했단다. 그러니 그대로 그렸을 것이고. 그림을 쳐다보기도 무서운데 그런 형상이 살아 움직였다고 생각해 봐라. 일반 사람들은 기절초풍하고도 남을 일 아니겠냐? 그런데 인간의 모습을 하고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하지 못할 짓을 한 사람도 있다. 탱화 그리는 사람들이 내 모습을 후세에 남긴다면 어떤 형상일지 뻔할 것 같다.
 
  내 둘째형도 그랬지만 왜 죽으려고 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두는 것일까? 가는 마당에 굳이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사람이 떠날 때만큼이라도 신발을 가지런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마지막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의 죽음을 준비하는 이들은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을 보이는 것 같다. 600만 명이 죽어간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으러 가는 사실을 아는 유태인들은 가는 도중에 신발의 끈을 다시 매고 복도에 비뚤어지게 걸린 액자를 바로 세우고 사형장으로 갔다고 하더라.
 
  나처럼 색맹책을 전부 읽지 못하는 사람은 완전색맹에 가까운데 실상 운전면허증이 있는 거 보면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운전면허증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3색(신호등)의 단색만 따로 테스트해서 간신히 얻어 낸 결과란다.
 
  생똥을 싸는 사람을 보고 더럽다는 생각이 아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면 너 또한 나의 그런 이중적인 성격을 이해 못 할 것이다. 여기서 선짓국인가 내장탕인가 나오는데 배 고파도 숟가락이 안 간다. 달밤에 체조해야 했던 지난 시간들을 생각하면 밥조차 먹을 수 있겠냐. 그저 쓸개 없는 노루처럼 살았어야 했는데 후회 막심할 뿐이다.
 
 
  [2004년 11년 21일자 편지]
 
  할머니가 무당이었는지 어린 시절 집에 온통 귀신 그림들이 가득했다
 
  사형 존치론자들이 나 때문에 힘 받았다고? 언론매체로 벌써 몇 번을 날 죽였다 살렸다 하는구나. 그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대기 사형수 58명 중엔 분명 나처럼 사형시켜 줬으면 하는 이들이 몇 명은 있을 것이다.
 
  사형 폐지론자들이 나 때문에 맥이 풀렸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법안이 통과되고 안 되고 집행을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형제 공방은 그만하고 내가 전하려 했던 그 의식들이나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어릴 적엔 추워서 집안에만 있어야 했던 겨울보다 밖에 나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여름이 좋았던 것 같다.
 
  엄마를 통해 들었지만 집안의 생활고 때문에 내가 3~5세 때쯤인가 전북 고창에 계시는 작은아버지와 나의 친할머니 손에서 잠깐 맡겨져 생활했다고 한다. 큰형의 행방은 모르겠고 여동생은 계속 엄마가 서울에서 데리고 있었다. 난 둘째형과 친할머니 집에서 생활했던 기억은 조금 남아 있다.
 
   우리 친할머니는 무당이셨는지 신내림받은 선녀였는지 모르겠지만 집에 온통 귀신들, 탱화 그림들이 가득했던 기억이 제일 생생하다. 그런 그림과 향불 냄새가 싫어서 방 안에 잘 안 들어가려고 하다가 친할머니에게 많이 혼났다. 그래서 둘째형과 산에 올라가면 늦게 내려오곤 했는데, 어느 날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가 산에서 잠들어 버려 어른들이 찾아 나선 적도 있었다. 물론 그날 크게 혼났다. 이미 그때는 아버지가 妾(첩)과 같이 살 때라 엄마 혼자 힘들게 봉제공장에 다니시며 우리를 다시 데려오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실 때였다.
 
  서울 용산에 올라온 나는 6~8세 때 잠깐 여동생과 아버지 밑에서 살았는데 만화가게가 달린 가겟방에서 생활하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여동생이 계모에게 너무 자주 혼나 울었던 모습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매일 울었고, 난 입술이 터지도록 이를 악 물었던 기억 또한 생생하다. 나는 왜 계모에게 혼나지 않았냐면 날 혼낼라치면 내가 무서운 눈초리로 째려보았는데 그런 자세가 되면 몇 시간이나 씩씩대면서 그렇게 앉아 있었다. 계모가 아빠에게 말하길 『쟤 누굴 닮아 저러냐?』 하면서 말다툼한 것도 기억난다. 결국 아빠가 그리 고집부리고 있는 나를 데리고 나가 자장면을 사주곤 했는데 나중에도 나만 자장면을 사주고 낚시하러 가는데 데리고 다니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은 따뜻했다.
 
  내가 무서울 정도로 고집을 부렸던 건 지금은 기억도 없는 계모 이름과 얼굴이 많이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여동생 미○와 내가 남매로서 유난히 서로 아껴 주며 커온 건 그때 내가 미○를 달래 주는 그 행동이 미○에게 많은 위안이 되어서 일 것이다.
 
  어느 날 실수로 만화가게에 있는 아이스크림통을 깬 미○는 그날 계모에게 거의 죽도록 맞았고, 그날 밤 난 반항으로 미○를 데리고 엄마를 찾겠다며 용산 청과물시장을 거지꼴이 되어 돌아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엄마는 용산 청과물시장(지금의 용산 전자랜드 자리)에서 옥수수를 삶아 파는 행상 일을 하셨다. 우리는 이틀을 헤매다 결국은 엄마를 찾아서 계모의 행위를 고자질하고 엄마와 함께 살겠다고 매달렸다. 결국 다시 엄마 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계모 밑에서 살던 어떤 날 중엔 큰형과 둘째형이 만화가게에 찾아와 몰래 미○와 나를 데리고 나가 며칠간 기찻길 공사 자재더미에서 자다 계모에게 들켜 혼난 적도 있다. 계모 밑에서 생활했던 그 짧은 기간은 너무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춥고 배고프고 그랬다. 지금의 신용산 근처에 있는 튀김집을 죄다 찾아다니며 미○에게 튀김 찌꺼기를 얻어다 먹이는 게 제일 기분 좋았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만화가게를 했어도 난 만화책 한 권도 보지 못해서 나중에 그렇게 만화책을 많이 보고 그랬나 보다.
 
  미○를 미워했던 계모는 나만 용산에 있는 금양국민학교에 입학시켰는데 며칠 다니다 미○ 손잡고 엄마 찾겠다며 그 집을 탈출(?)하면서 엄마 손에 맡겨져 살게 돼 다시 마포에 있는 공덕국민학교에 미○와 같이 나란히 입학하게 되어 난 국민학교 1학년을 두 번 다니게 된 것이다.
 
  공덕 1동에서 형 둘과 미○와 엄마까지 생활했으니 엄마 고생이 이만저만이었겠냐? 그때쯤 미○와 나는 엄마가 일하시는 봉제공장에 자주 찾아가 식당밥을 함께 먹었던 기억도 난다. 우리가 가면 하던 일 멈추시고 공장식당에서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시려 했던 엄마는 공장 직원들에게 얼마나 눈치가 보였겠냐.
 
  겨울만 되면 변변한 점퍼 하나 없는 우리 형제들은 매일 방에 틀어박혀 TV 보는 게 제일 좋았다. 흑백TV였지만 영화 「타워링」을 미○ 손잡고 긴장하며 봤던 게 이상하게 안 잊혀진다.
 
  국민학교에 다니며 딱지나 구슬이 없어서 내가 가지고 놀 수 있었던 것은 동네 연탄뿐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동네 골목 어귀마다 허옇게 쌓아 둔 연탄재 더미가 많았는데 어른들에게 혼나면서도 연탄으로 집 짓고 그 속에서 놀고 그랬다.
 
  친구들이 많지 않았던 나는 비석치기나 그 흔한 술래잡기도 안 할 정도로 혼자만 놀았다. 역시 그때도 제일 힘든 건 배고픔이었지만 형들이나 미○와는 달리 이상하게 난 배고픔을 잘 참았다. 그래서 내가 나중에도 키가 제일 작았는지 몰라도 내색도 않는 그 고집은 뭔지 모르겠더라. 엄마가 가끔 밀가루 빵을 만들어 주셨는데 서로 먹으려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도 난 슬그머니 나가곤 그랬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어 食貪(식탐)도 없고 먹는 양도 작게 되었다.
 
  그러다 은영이 네가 내 사건 취재차 가봤다는 공덕 2동으로 이사 갔는데 국민학교 2학년인 그때쯤 큰형이 가출을 했다. 옛날에 방송인으로는 좀 유명하다는 A모씨(DJ)의 집에서 큰형 없이 우리 가족은 살게 되었다. 마당이 넓은 큰 집이었는데 그 집에만 일곱 가구가 세 들어 살았을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방들이 많았다.
 
  난 거기서 이미 부자들에 대한 惡意(악의)가 싹트게 되었을 정도로 안 좋은 기억이 많다. 그 집주인은 폭스바겐을 타고 다니며 폼 잡고 다녔는데 어느 날 리어카 행상을 하는 노인이 자기 차를 조금 상처 냈다고 그 노인을 개 패듯이 때리는 것을 보고 돈 좀 있는 사람이 정말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학교 가는 시간에 마당 한 켠에 있는 수돗가에서 세 들어 사는 아줌마가 빨래를 하다 비누거품이 그 주인에게 튀기면서 또 씁쓸한 광경을 보았다. 아줌마가 그 주인의 발길질에 빨래통에 처박혀 가며 혼났으니 말이다. 우리 엄마를 비롯해 세입자들이 그 주인을 무서워하고 굽신거리는 게 정말 싫었다.
 
  내가 4~5학년 때까지 그 집에서 살았는데 그때 우리집은 유난히 부업을 많이 했었다. 구슬 꿰기, 퍼즐 조립, 테니스공 붙이기, 각종 부품 조립 등 기억도 다 안 나는 부업들을 참 많이 했었다.
 
  그러다 4학년 2학기 때 가출했던 큰형이 「컴백 홈」 하면서 형제들이 모처럼 모였지만 내가 큰형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는 건 큰형이 내가 5학년이 되면서 또 가출했다가 그 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검정고시 시험을 쳐서 대학생이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형수라 부르라며 여자 하나 데리고 와서 말이다. 큰형은 1급 요리사 자격증까지 따서 따로 살림을 시작해 우리와는 완전히 떨어져 살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변성기와 사춘기를 맞은 난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性반응은 늦게 나타나더라. 또래 애들보다 목소리가 굵어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교회 성가대에서 베이스 파트를 맡고 있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성가대의 한 여학생이 이성으로 처음 느껴져서 편지하기 시작했다. 그 짝사랑은 내가 제주도에서 생활할 때까지 이어졌지만 서울에 올라와 아내를 만나기 직전에 그 여자에게 차였다. 내가 못생긴 것보다 내 옷 입는 차림새를 보고 내 집안 형편을 눈치 챈 것 같더라. 헤어져야 했던 이유만이라도 얘기해 줬더라면 그 애에 대한 원망은 없었을 것을 『그만 만나자』는 일방적인 그 말에 그 애가 커피집을 나가고 나서도 두 시간 넘게 앉아 있었던 게 지금도 기분이 영 그렇다.
 
  중1 때 아버지는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40일간 식물인간으로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병간호하시던 엄마마저 쓰러지셨다. 그래서 형제들이 돌아가며 아버지 옆에 지키고 있었는데, 아버지 임종하시던 날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우시는 것을 보고, 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분명 식물인간이라 했는데 어떻게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는지 너무나 놀라 이해가 안 간 것이다. 난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공부 잘할게요』 그랬었다. 그래서 내가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반에서 처음 8등을 차지한 공부란 걸 해 본 것이다.
 
  내가 마음만 먹었지 조폭을 죽이지 못한 것은, 진짜 조폭은 양아치 건달들과는 차원이 다른 유명기업체 대표들로 감히 나 같은 인간이 접근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더라. 그러니 미루어 올 수밖에. 김○영이 하나만 죽였다면 그렇게 많이 희생자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김○영이를 죽이지 못한 것은 시기와 증오도 사랑의 일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손에 유인된 여성들과의 슬픈 대화를 통해 인생무상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멈추지 못하고 사체를 매장하고 와서야 깊은 숙면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날 괴롭히는 악마와 귀신들과 싸워 이겼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중간 중간 내가 행한 일들이 정말 잘못되었다는 내면의 부르짖음도 분명 있었지만, 이미 내 육체는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잃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희망은 아예 도망가 버렸고 살아야겠다는 의욕마저 상실한 내가 이 세상과 부딪치면서 악마처럼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부 파헤쳐 봐도 그것은 허무뿐이었다. 내가 내 능력으로는 풀 수 없는 모순과 상처와 결핍과 죽음만이 가득하다는 걸 알았을 때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이더란 얘기다. 그래도 가끔 매혹에 홀리듯 미래의 환상에 빠졌지만 그것은 모두 텅빈 것들이었다. 그게 전부다. 내 지난날과 내 죄악의 씨는 한마디로 절망이었단 말이다.
 
 
  [2004년 11월26일자 편지]
 
  로또에 당첨이 됐어도 殺人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2003년에 출소할 당시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네 말에 그냥 피식 웃음만 나오더라. 난 출소해서 로또에 당첨이 되었더라도 아마 살인은 멈추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그 돈으로 완벽하게(?) 아지트라도 만들어 내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난 마음 먹은 건 소름끼칠 정도로 실행하는 지독한 고집이 있기도 하지만 그 만큼 내가 사는 이유는 돈이 아니라 엄청난 분노뿐이었다는 얘기다.
 
  기계체조를 했던 사람이라면 손으로 자기 몸무게 정도는 든다. 그러니 그 망치가 뭐가 무거웠겠냐. 나는 내가 무식하지 않다고 했지만 무식한 힘은 곧 무식한 머리에서 나오는 거다. 힘이 약한 사람만 골라 그리 했다는 것은 가장 비열한 짓이다. 그들을 향한 내 마음 빚은 당연히 내 生엔 다 갚지 못한다. 아무리 범죄혁명을 꿈꾸었다손 치더라도 그건 미친 짓에 불과했다. 이처럼 뭔가에 빠져 있는 나의 정신세계와 어리석은 분노 때문에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으며 상처받고 외로워하는 나날을 보내 왔는지 되돌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올 뿐이다. 하지만 그 한숨 속엔 분명 응어리가 있다. 일자 무식쟁이도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건 알기 때문이다. 이 나라가 이대로 라면 폼페이나 로마처럼 머지않아 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유림오피스텔에 살 때 옆집 살던 여자도 무슨 신문사 기자라던데 매일 새벽 2시쯤에 들어오길래 「저 여자, 정말 기자 맞나」 하고 생각했었다. 기자들의 일이라는 게 은근히 중노동인가 보더라. 노가다야 하루쯤 푹 쉬면 풀린다지만 머리 쓰는 거야 어디 그러냐. 그러니 고민이나 스트레스 가지고 사는 사람은 발걸음까지 무거운 건 당연한 것 같다.
 
  은영아, 나한테 「미사여구」 써가면서 그럴 필요까진 없다. 如反掌(여반장) 하듯 무자비하게 행동했던 지난 범죄들은 그대로 나를 나타내는 것이니 네가 느끼는 대로 쓰면 그만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인간 실격품인 야누스적인 인물이라 해도 一言半句(일언반구) 없이 날 그렇게 발가벗겨 버리면 어떡하냐?
 
  상의라도 했으면 좀 덜할 텐데 갑자기 뒤통수 맞은 기분이다. 내가 마음이라도 편케 해달라고 그랬건만 돈까지 보내고. 제기랄 첫눈이 오고 있다.
 
 
  [2004년 11월28일자 편지]
 
  내 인생 기가 차다며 편지 쓰는 너를 보면 나 또한 기가 차다
 
  어둡고 슬프지만 얼마든지 아름답게 그릴 수도 있었던 인생이다. 망상도 좋고, 절망도 좋고, 사랑과 집착을 혼동한 것도 좋다. 맹목적인 동물적 사랑에 끌려다닌 것도 다 좋다. 근데 마무리를 못해 버렸다. 그래서 유영철이라는 놈이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生을 버린 게 날 버린 여자들 때문도 아니다. 유영철 그 놈 때문이다. 애정도 부족하고 온통 상처투성이로 살아왔다 하더라도 어쨌든 마무리는 그놈 몫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
 
  사람의 내면에는 生의 갈망이 있지만 死의 갈망도 있다. 난 후자의 갈망을 택했었고 지금도 원하고 있다. 그런 내게 순수성이라도 찾아 주려는지 내 인생 기가 차다면서 편지 쓰는 너를 보면 나 또한 기가 차다.
 
  아들이 색맹인지 검사해 보진 못했지만 색맹이 창피한 게 아니라 이 나라가 잘못된 거 아니겠냐? 색맹이라 좋은 점도 있다. 어두운 곳에서 잘 보인다는 거다. 사체 매장할 때마다 플래시나 핸드폰 한 번 안 가져갔지만 漆黑(칠흑) 같은 곳에서도 잘 보이더라. 탯줄과 젖줄? 둘다 소중하겠지만 내가 生母, 生父 찾아 갔듯이 어차피 나중에 탯줄 찾아 가는 것 같더라.
 
  가수 길은정은 壽衣를 미리 준비해 놓고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구나. 가는 날까지 미소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슬프겠니. 시한부 인생들이 주렁주렁 달고 있는 인위적인 그 생명 연장 장치들이 난 싫더라. 사는 데까지 살아보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일까? 물론 그 사람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야 누구든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나도 죽음 앞에 숙연해지는 것 같다. 세상에서 이만 줄이마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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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yche    (2022-03-14) 찬성 : 1   반대 : 0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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