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大 日
1955년 함북 무산군 출생. 무산고등광업전문학교, 청진공산대학 졸업. 평양시 호위국 하사관 강습소에서 9년 간 軍 복무. 1983년부터 국가보위부 요원으로 활동. 1998년 9월 탈북, 같은 해 한국 입국. 현재 탈북자동지회 부회장,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원.
1955년 함북 무산군 출생. 무산고등광업전문학교, 청진공산대학 졸업. 평양시 호위국 하사관 강습소에서 9년 간 軍 복무. 1983년부터 국가보위부 요원으로 활동. 1998년 9월 탈북, 같은 해 한국 입국. 현재 탈북자동지회 부회장,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원.
최초의 국가안전보위부 출신 탈북자
우리 사회에는 「북한」이라는 사회를 들여다보는 여러 가지 窓이 준비돼 있다. 도청이나 감청, 위성사진 등을 통한 기계적 정보를 비롯하여 북한 관련 각종 저작들, 심지어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 金日成·金正日 父子의 저작물, 흑색선전 방송인 「구국의 소리」 방송까지 리얼 타임으로 듣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 사회에서 태어나 살다 온 사람들, 즉 脫北 귀순자들이 전하는 人的 정보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들의 북한 생활은 수만 가지 논설이나 이론, 기계적 분석적 접근으로 짚어낼 수 없는, 체험에서 우러나는 생생한 관찰기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기자가 만난 尹大日(윤대일·47·일부 언론보도에는 尹成銹란 가명으로 소개됨)씨는 1998년 9월 북한을 탈출하여 같은 해 10월 한국에 온 최초의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소좌(한국의 소령급에 해당·보위부 요원들은 모두 현역 군인 신분임)」 출신 귀순자다. 그는 9년 간의 軍복무를 마치고 함북 무산市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중 국가안전보위부(이하 「보위부」로 표기) 요원으로 선발돼 反探課(반탐과) 지도원으로 15년 간 근무하다 脫北 귀순했다. 지금까지 다양한 탈북자들의 귀순 행렬이 이어졌지만 북한의 정보기관인 보위부 지도원 출신이 한국에 온 것은 尹씨가 첫번째 사례이다.
보위부는 북한 주민을 감시·통제하고 체제 저항세력을 색출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는 북한 유일의 정보기관으로서, 金正日 세습체제 유지의 전위부대이자 독재기구 유지의 사령탑으로서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진 조직이었다. 尹씨는 1983년부터 국경 도시인 함북 무산군 보위부의 反探課 지도원으로 근무했는데, 주된 업무는 중국이나 러시아로 탈출한 脫北者 송환 및 주민 감시, 외부 침투 간첩 색출 등이었다.
尹大日씨는 중국에 파견돼 탈북자들을 체포, 송환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1994년 북한 총리 강성산의 사위 康明道(강명도)씨가 중국으로 탈출했을 때 그의 체포 밀명을 받고 중국에 파견됐으나 金日成 사망으로 임무 수행을 포기하고 귀국했다고 한다. 일반 脫北 귀순자들이 金正日 체제의 희생자라면, 尹씨는 金正日의 명을 받들어 가해자의 편에 섰던 특이한 신분의 귀순자이자 탈북자 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 생생한 체험과 이론으로 무장한 전문가다.
그의 한국行으로 인해 북한 보위부의 주민 통제 시스템, 간첩 색출 방법, 탈북자 송환 및 대처 방식 등 베일에 가려져 있던 보위부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작은 바람 구멍이 뚫렸고, 북한 정권의 탈북자 대책 및 동향에 대한 정통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다.
尹씨는 현재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黃長燁·金德弘씨가 결성한 탈북자동지회 부회장이다. 그는 다수의 탈북자들이 중국 北京 주재 스페인 총영사관과 沈陽(심양)의 미국·일본 총영사관에 진입하여 이들의 처리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떠오른 지난 5월14일부터 23일까지 미국 인권단체인 디펜스 포럼 재단의 초청을 받아 백악관과 국무부, 의회를 방문했다.
美 고위 관리와 만난 최초의 탈북자
그는 訪美 과정에서 제임스 릴리 前 주한 미국 대사, 국무부의 론 크레인 민주·인권·노동 담당 차관보를 비롯한 한반도 관련 전문가 20여 명과 면담했다. 백악관에서는 마이클 그린 한국·일본 보좌관과 국가안전회의(NSC)의 한반도 담당자를 만났으며, 체니 부통령의 안보담당 보좌관, 美 하원 의원 등에게 북한 인권문제와 탈북자 문제에 관해 증언했다.
脫北 귀순자가 미국을 방문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미국 고위 관리들과 만나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것은 尹씨가 처음이다. 미국이 탈북자 문제에 정통한 尹씨를 초청하여 고위 관리들과 면담토록 한 것은 美 정부의 탈북자 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감지되는 대목이다.
月刊朝鮮은 탈북자 문제에 대한 국제적 기류가 민감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美 고위 관리들과 면담하고 온 尹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尹씨는 자신이 보위부 시절 체험한 내용을 주제로 저서를 집필 중인데, 원고 마무리 작업으로 분주한 가운데 기자와 만나 이틀 간 10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우선 미국에 다녀온 소감부터 물어보았다.
『북한에서는 「美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자」는 선전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그 제국주의 나라에 들어간 순간, 공원 속에 나라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평양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고 선전하는데, 뉴욕과 워싱턴 등 미국 도시들과 비교하니까 평양이 허구의 도시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어요』
허구의 도시라는 부분이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尹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은 통신시설과 도로였습니다. 시원스레 닦인 도로와 누구나 들고 다니는 전화기(핸드폰)를 보면서 「이 사람들은 後代를 위해 값진 일을 해 놓았구나」 하고 느꼈어요. 반면에 북한에서는 아파트나 건물 한 채를 짓더라도 미래를 위한 안목이나 생산성, 실용성을 고려하는 게 아니라 金日成 父子의 우상화와 결부시켜 짓습니다. 그러니 도시 전체가 박제된 세트장 같은 허구의 도시로 느껴질 수밖에요』
尹大日씨는 탈북자를 잡아들이던 보위부 요원 입장이었다가 어느 날 본인도 탈북자가 되어 한국으로 왔다. 그는 함북 무산군 보위부 반탐과 지도원으로서 탈북자 체포 송환 업무를 위해 연간 10여 차례 이상 중국을 드나들었다. 이 과정에서 개혁·개방으로 중국 인민들의 삶이 윤택해진 모습, 그리고 남한 가요와 비디오를 접하면서 사상과 신념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체제유지의 전위세력이었던 그의 등을 떠민 것은 1997년 12월부터 시작된 보위부 요원을 대상으로 한 숙청작업이었다.
尹씨의 증언에 의하면 1996년 중국 北京에서 중앙 사로청(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 책임 일꾼들이 남한 대표와 만나 그들로부터 뇌물과 향응을 받았으며, 북측 대표단 일부가 비밀리 제주도에 초청받아 남한의 안기부 요원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 고위층에 남한 정보기관의 자금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金正日은 보위부가 남한의 공작에 즉각 대처하지 못했다 하여 자신이 총애하던 김영룡 보위부 제1부부장을 反黨·反혁명 종파분자로 지목했다. 김영룡은 회의 도중 극약을 먹고 자살했고, 김영룡 휘하의 보위부 최고 간부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처형됐다고 한다. 다시 尹씨의 증언.
『이 사건의 여파로 보위부 요원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 검열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던 보위부원 24명이 소환당해, 그 중 한 명을 제외한 23명이 처형됐어요. 해외 파견 경험이 많았던 저의 활동에 대해 정보원들이 「남한 비디오와 가요를 자주 들었다」고 밀고했기 때문에 수사망에 걸리면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고 소환 하루 전에 둘째 아들만 데리고 중국으로 도주했습니다』
尹씨는 김영룡 보위부 제1부부장의 자살과 보위부 요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을 목격하면서 보위부도 결국 金正日 세습체제 유지를 위한 이용도구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북한을 탈출했다고 한다.
美 고위 관리들, 탈북자 문제에 큰 관심
―한국 정부는 탈북자들이 중국이나 러시아 주재 한국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에 들어와 망명을 요청하면 문전 박대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行 과정에서 우리 대사관으로부터 섭섭한 일을 경험하지는 않았습니까.
『저는 보위부 요원이라는 특수 신분 때문인지 탈북한 지 한 달 만에 손쉽게 한국行의 꿈을 이루었습니다만, 다른 귀순자들은 사정이 다르더군요. 어떤 친구는 한국 대사관에서 내쫓긴 후 한국 선교사나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몽골 사막지대, 미얀마 정글지대를 돌파하여 한국에 왔는데 이 과정에서 가족이나 일행이 목숨을 잃은 사례도 많더군요』
尹大日씨는 미국에 가서 백악관과 국무부의 고위 관리들과 만났을 때 그들은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이번에 미국에 가서 느낀 점은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자기 나라와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탈북자와 북한 인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金正日 체제下에서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우리 정부 관계자 중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표명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이번에 尹大日씨가 탈북자 문제를 주제로 미국의 對北정책을 수립, 집행하는 고위 관리들과 대화를 나눈 것을 두고 미국의 탈북자 및 북한 인권정책이 관망 자세에서 적극적인 개입 쪽으로 전환하는 것 아닌가 하는 관측이 나왔다. 尹씨와 만난 미국 고위 관리, 한반도 전문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탈북자가 대량 발생한 시기 ▲탈북자의 발생 원인 ▲앞으로 탈북자가 계속 발생한 것인지의 여부 ▲북한의 구체적인 인권 실태 ▲식량 상황 등이었다고 한다.
대화 과정에서 尹大日씨는 미국 전문가들이 남한의 관리나 전문가보다 더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으며, 북한 문제를 냉정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에 한국 정부는 북한 문제를 너무 낭만적·감성적·非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우선 탈북자에 대한 尹씨의 증언을 들어 본다.
『탈북자들은 中-北 국경에 면해 있고 농토가 협소, 척박한 함북·함남·자강도 출신이 대부분입니다. 양강도는 국경지역이면서도 탈북자가 적은데, 그 이유는 양강도가 뙈기밭 농사에 적합하여 먹고 살 수 있는 조건이 다른 지역보다는 유리하기 때문이죠』
1974년 말 金正日이 주도한 「70일 전투」로 경제 망가지기 시작
―탈북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부터이고, 북한 경제상황이 최악의 바닥을 헤맸던 1994년 말부터 1998년 사이에 대량 脫北이 시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 식량난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말부터로, 그 때부터 단 한 번도 국가가 배급량의 100%를 공급한 적이 없습니다. 국가가 주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니 국경 지역 사람들은 「중국에서는 개도 쌀밥을 먹고 돼지도 옥수수를 먹는데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개돼지만도 못하다. 이렇게 기다리다 굶어 죽느니 차라리 뛰쳐나가자」 해서 脫北 행렬이 시작된 겁니다』
尹씨는 북한 식량난은 홍수나 천재지변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1970년대부터 20여 년 북한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린 것이 곪아서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74년 말 金正日은 그 해 인민경제 계획 수행이 어렵게 되자 「수령님의 전사가 할 일은 수령님께서 제일 걱정하는 경제문제를 풀어드리는 것」이라면서 「70일 전투」를 조직하여 밀어붙였습니다. 자재나 원료, 자원 등 아무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가용자원을 총동원하여 「70일 전투」를 벌인 결과 그 해 계획은 겨우 달성했지만, 다음해부터 그 여파가 심각하게 제기됐습니다. 국력이 쇠진한 상태에서 일시에 자원과 자재, 원료를 대량 투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를 혹사시킨 것이죠. 「70일 전투」의 여파로 1975년부터 경제가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해 골병이 든 겁니다』
―국내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金正日은 金日成대학 경제학부 출신으로 알려졌는데, 경제 전문가가 그런 무리수를 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金正日은 「경제에 말려들면 정치를 못한다」는 金日成의 유훈을 충실히 지키는 인물입니다. 경제에 관한 초보지식만 있었어도 국가 경제를 이처럼 파국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경제사정이 점점 어려워지자 黨에서는 체제 유지와 굶주린 주민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 「학습도 생산도 抗日 유격대 식으로」 등등 구호를 내걸기 시작했지만 총체적 모순의 惡순환 단계로 들어서고 말았어요』
함북 무산군 전체 인구의 10%가 탈북
국내 인권단체에서는 중국이나 러시아 등을 유랑 중인 탈북자 수를 20만~30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데, 尹씨는 이러한 수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탈북자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완전 脫北하여 중국에 숨어사는 탈북자는 많아야 10만명 정도로 봅니다. 20만~30만명이란 수치는 脫北했다가 식량 등을 구해서 돌아가는 유동인구까지를 포괄한 수치로 보입니다. 보위부 내부 문서에 의하면 脫北 러시를 이루었던 1993~98년 사이 한 해 평균 5만여 명이 脫北했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식량을 구한 후 돌아왔습니다. 1996~98년 사이에는 하루에 40~50명의 탈북자가 중국에서 송환되어 왔어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탈북·송환을 반복하여 인민보안성(우리의 경찰에 해당)의 구류장이 넘쳐나자 국경지역에 위치한 보위부는 감옥을 설치하여 송환된 탈북자들을 수감했습니다』
尹씨는 탈북자 수에 대한 자신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제가 보위부원으로 근무했던 함북 무산군은 인구가 12만명이었는데 무산군에서만 중국에서 송환되거나 국경을 넘어가다 잡혀오는 탈북자 수가 연간 3000명을 넘었습니다. 제가 탈북자를 담당하면서 통계를 내 보니 탈북했다가 잡혀오는 숫자는 탈북한 사람의 4분의 1 정도이더군요. 이 통계를 근거로 할 경우 무산군에서 탈북자 수는 연간 1만2000명, 즉 郡 전체 주민의 10%가 脫北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탈북자가 크게 늘면서 각 市·道 보위부는 1997년 초에 탈북자 실태조사를 벌였습니다. 제가 함북 무산광산의 노동자 주택이 밀집된 노동자區의 1000세대를 조사한 결과 300세대가 비어 있더군요. 이들은 중국으로 탈출했거나 굶어 죽은 겁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脫北하고 굶어 죽을 때 북한 당국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전쟁 예비식량까지 다 털어 먹여도 이 지경이니 제 아무리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戰士들이라도 무슨 대책을 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尹씨는 북한 식량난의 본질은 구조적 모순의 악순환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면서 이렇게 진단했다.
『비료와 농약생산이 중단된데다가 농기계를 가동할 유류 공급마저 끊겼습니다. 농장원들도 먹지를 못해 노동 생산성이 극도로 저하된 상태에서 홍수, 한발 등 자연재해가 겹쳤어요. 농업의 붕괴로 배급체계가 마비되니까 주민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脫北을 합니다. 金正日은 脫北 행렬이 계속되면 체제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탈북자를 계속 잡아들입니다. 결국 북한이 식량난 해결을 위해 내놓은 유일한 대책은 주민감시와 국경봉쇄 강화가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식량난으로 북한 주민 300만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산했는데, 이 수치의 신빙성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전체적인 조사를 해 보지 않아 자세한 실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만 최소한 30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에 의하면 식량난이 극심했던 1996~97년 함북 무산군에서만 하루 평균 20명 정도가 굶어 죽었습니다. 이 통계를 근거로 할 경우 무산군에서 한 달에 600명, 일 년이면 7200명, 즉 무산군 총 인구의 6%가 굶어 죽은 셈이죠.
1997년에 제 사촌동생 세 명도 굶어 죽었어요. 다른 직장보다는 보급이 좋다고 알려졌던 함북도內 5개 지역 보위부에도 식량 배급이 끊겨 보위부원이 먹지를 못해 출근을 못 할 정도였으니까요』
人肉 사건, 탈북자 코 꿰어 송환 등은 사실이 너무 과장된 것
尹씨의 증언에 의하면 경제가 결딴난 1996년 9∼10월에 金正日은 남한을 장악할 경우를 대비해 남한 각 道·市·郡의 보위부장, 정치부장, 부부장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특별 수당까지 지급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오래 전부터 남한 출신들을 위주로 남한의 道·市·郡의 당 책임비서, 인민위원회 위원장, 인민보안서장, 검찰소 소장, 재판소 소장 등을 임명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정기 교육을 진행했다고 한다.
―일부 탈북자들은, 식량난을 견디다 못한 일부 북한 주민들이 人肉을 먹었다고 증언을 한 바 있습니다만, 人肉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직접 人肉 사건을 보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청진市 나남구역의 나남탄광 기계공장에 다니던 한 여인이 너무 굶어 정신이 돈 나머지 옆집 아이를 가마솥에 삶아 먹은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에서 발생한 人肉 사건은 많아야 서너 건, 그것도 非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발생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남한 언론에서는 북한의 보위부 요원들이 체포한 탈북자들의 코를 꿰어 북한으로 호송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尹씨는 『탈북자들이 金正日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북한 사정에 대해 과장한 측면이 없지 않다』면서 『탈북자나 탈북자들의 증언을 보도하는 언론은 진실을 가려서 북한 사정을 알려야 통일 과정에서 쓸데없는 혼란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尹大日씨가 백악관과 국무부 고위 관리 및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만났을 때 그들은 尹씨에게 ▲앞으로도 탈북자가 계속 발생할 것인가 ▲중국이 탈북자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으로 보는가 ▲북한이 탈북자를 막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는가 등을 집중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중국이 北京 주재 스페인 총영사관이나 심양의 일본 영사관에 진입할 탈북자를 제3국 추방 형식으로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일부에서는 탈북자에 대한 중국의 정책변화가 아닌가 하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국은 1961년 북한과 체결한 탈북자 인수 인계 합의서에 의해 탈북자를 체포하여 北으로 강제 송환하고 있습니다. 중국 공안(우리의 경찰에 해당)들도 저간의 사정을 다 알면서도 북한과의 협정과 동맹관계 때문에 계속 송환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중국이 주도적으로 탈북자 정책을 바꿀 가능성은 희박하며, 다만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가 탈북자 문제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일 경우 국제사회의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없다고 봅니다』
탈북자에 난민 지위 부여하면 북한 붕괴
―탈북자 문제의 핵심은 탈북자에 대한 난민 지위 부여, 그리고 탈북자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정착촌 건설로 압축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탈북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북한에서 50만~100만명 정도만 탈북하면 내부에서 심한 동요나 소요가 일어나 대대적인 혼란이 야기될 것이며, 사실상 국가라는 이미지를 상실하여 金正日 체제 붕괴의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저는 미국 고위 관리들과 면담 과정에서 탈북자에 대한 난민 지위 부여와 정착촌 건설이 북한 주민 해방의 뇌관이 될 것이라고 수차 강조했습니다』
尹씨의 증언이 효력을 발휘한 때문인지 최근 對北정보에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미국 정부 및 유엔 주도下에 몽골 지역에 정착촌 건설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국제 사회의 압력에 의해 난민 지위 부여, 정착촌 건설이 실현될 경우 북한의 대응책에 대해 尹大日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金正日은 주민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脫北 주민에 대한 처벌을 더 엄격하게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북한은 中-北 국경지역에 3개 사단 병력을 투입하여 2km마다 1개 소대가 경비를 맡고 있는데 탈북자들이 계속 늘면 국경지역 봉쇄를 위해 병력을 증강할 것입니다』
―주민 감시 강화, 국경지역 병력 증강이 이루어질 경우 북한 주민들의 脫北 의지가 약화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북한의 경제사정이 호전되기 전에는 탈북자 수가 줄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脫北 의지를 꺾는 것은 국경수비대의 무력이나 주민 감시체계가 아니라 탈북자를 외면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입니다.
駐中 한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은 지금도 한국行을 희망하는 탈북자를 외면하고 중국 공안에 체포 송환되는 현실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非인도적인 태도야말로 脫北 의지를 꺾는 결정적인 무기가 되고 있어요』
駐中 한국대사관이 죽음으로 내몬 탈북자들
尹大日씨는 駐中 한국 대사관이 망명을 요청하는 탈북자를 내쫓아 사망케 한 사례로 함북 무산광산에 근무하던 유태도씨 6父子 사건을 폭로했다. 유태도씨는 중국 거주 조선족 동포로서 1960년대 초 북한으로 귀국하여 다섯 아들과 함께 함북 무산광산에서 착정기(광석 발파를 위해 구멍을 뚫는 기계) 운전공으로 근무했다. 6父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하여 1980년대 말 金日成 훈장을 받았고, 신문 방송 텔레비전 등 선전매체는 그들 父子의 충성심을 대서특필하여 사회의 귀감이 되도록 했다.
체제 유지의 상징이었던 6父子도 참혹한 식량난 앞에서는 현실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6년 9월 6父子 중 장남, 차남, 셋째, 넷째 아들 네 명이 중국에 있는 고모의 도움으로 脫北했다. 그들은 脫北 즉시 北京의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金日成과 함께 찍은 사진, 훈장 등을 보여주며 한국行을 희망했으나 대사관 직원들은 『도와줄 수 없으니 自力으로 중국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가라』면서 문전 박대했고, 대사관에서 쫓겨나자마자 중국 공안에 체포돼 1996년 11월 북한으로 송환됐다.
『체제의 선전물이던 6父子 중 네 아들이 탈출하자 상부에서는 「놈들을 당장 잡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제가 그들의 송환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공안에 수사 협조를 요청했어요. 당시 저는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로 가치관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을 때라서 네 아들이 무사히 한국으로 탈출하길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駐中 한국 대사관이 네 아들을 내쫓아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국 대사관 놈들 정말 잔인한 놈들이다」고 분개했습니다』
北으로 송환된 네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은 1997년 4월 「조국반역죄」로 처형당했고, 나머지 두 명은 정치범 수용소로 가 생사 불명 상태라고 한다. 尹씨는 『이들은 한국 정부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駐中 한국 대사관이 탈북자를 한 동포로 생각한다면 중국 공안에 체포되지 않도록 보이지 않게 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울 방법이 없다」면서 숱한 탈북자들을 死地로 내몰았습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대한민국 공무원들의 업무 태도를 보면서 북한 공무원에 비해 너무도 무책임하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한의 공무원들은 자신이 맡은 일은 스스로 알아서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남한의 공무원들은 북한 공무원보다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탈북자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金正日 체제下에서는 지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드니까 어쩔 수없이 탈북자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이들이 송환되면 처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기 힘들었어요』
―탈북자가 발생하면 북한 기관은 脫北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북한은 어떤 직장이건 출근 시간이 8시인데, 직장 소속원들의 출결 상황을 9시까지 해당 지역 사회안전부와 보위부에 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근하지 않으면 보위부원이 그 집에 찾아가 집안을 수색하는데, 이 과정에서 脫北 사실이 파악되면 보위부의 신상명세와 중국內의 친인척 내역 등 자료를 가지고 중국 공안에 수사를 요청합니다』
원조 중단, 외교 고립으로 북한 주민 해방을!
북한 식량난을 바라보는 남한 내의 여론은 유화론과 강경론으로 분열되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 對北 유화론자들은 金正日 체제가 무너지면 큰 혼란이 발생해 우리 체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북한을 지원하여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 식량과 의약품, 생필품을 지원하고 있다. 對北 지원 문제에 대해 尹씨는 『북한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은 사회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왕조 세습체제입니다. 金正日이 이런 체제를 유지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북한 경제 회생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남한의 정부 관계자나 일부 학자, 지식인들은 북한을 지원하여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이론을 근거로 북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에 대한 초보상식도 없는 사람들의 허황된 생각입니다』
―金大中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은 對北 햇볕정책으로 북한이 개혁·개방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북한은 金正日 체제가 존재하는 한 개혁·개방을 못 합니다. 개혁·개방을 하려면 폐쇄사회의 빗장을 열고 외국 자본을 유치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주민 통제가 어렵고 사회주의 경제체제 및 관리체계가 무너집니다. 지금까지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선전해 오던 모든 논리가 부정당해 金正日 세습체제 붕괴의 결정타가 될 텐데 金正日이 이런 위험한 카드를 받아들이겠습니까』
尹씨는 미국 하원의원들과 면담 과정에서 『국제사회가 북한을 지원하면 金正日 세습체제만 강화시켜 북한 주민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對北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고 한다.
『金正日이 인민군대까지 굶겨 가면서도 개혁·개방을 못 하는 것은 「개혁·개방=金正日 세습체제 붕괴」라는 현실을 냉철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金正日은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세습체제 유지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 외에는 代案이 없어요. 이런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려면 ①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원조를 즉각 전면적으로 중단할 것 ② 봉쇄정책을 통해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것 ③ 탈북자에게 난민 지위 부여 및 정착촌 건설로 대량 脫北을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金正日 세습체제를 내부로부터 와해시켜야 합니다』
전쟁을 할 만한 물질적 토대가 안 되어 있다
―金正日 체제가 위협받을 경우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現 단계에서 북한이 전쟁을 수행할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봅니다. 제가 보위부 근무 시절 보위부 간부들은 「인민군대마저 식량공급을 못 해 군인들이 밥을 빌어먹는 거지 군대가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겠는가」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보위부는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여력이 없다는 사실을 세 갈래로 접근했어요. 첫째, 필요한 포탄과 탄약 등은 비축해 놓았다 해도 전쟁을 감당할 만한 다른 분야의 물질적 토대가 전혀 준비되지 못한 점. 둘째, 전쟁에 동원되어야 할 군인들의 육체적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점. 셋째, 전쟁이 나면 북한은 혼자서 싸워야 하지만 남한은 동맹국과 함께 싸우니까 북한이 必敗한다는 겁니다』
―1997년 남한으로 망명한 黃長燁, 金德弘씨는 『전쟁을 막기 위해 남한에 왔다』면서 북한의 전쟁 준비상황을 증언한 사실이 있는데, 이런 의견은 어떻게 보십니까.
『1997년 무렵은 경제상황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전쟁을 하자는 의견들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 휴가도 안 보내고, 1997년 정초에 특수부대가 각 기관을 습격하는 기습작전 훈련이 실시되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黃선생은 당시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북한은 우리의 군사동맹국인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시비를 걸고 있고, 일부 反美주의자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6·15 頂上회담에서는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이 주한미군 주둔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요.
『金正日의 믿기 어려운 말을 함부로 옮기는 사람은 정치인으로서 식견이 부족하거나 金正日에게 협력하려는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주한미군 철수 요구 혹은 지위문제에 시비를 거는 것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에 惡영향을 주는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북한이 심각한 식량난의 와중에도 핵무기나 미사일 개발 등 무력을 계속 강화하는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까요.
『저는 북한의 핵무기와 관련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만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미사일과 관련해서는 황해도 지역의 미사일 발사기지를 양강도 삼지연군 일대로 이전하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발사기지가 2005년에 완공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金正日 정권 무너져도 혼란 없다
―金正日 세습체제가 무너지면 새로 들어설 북한 지도부가 개혁·개방에 나서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새로 들어설 북한 지도부는 「북한」이라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주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개혁·개방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될 겁니다. 이 과정에서 남한 기업이 북한에 투자하여 주민생활을 향상시키고, 일정한 수준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그 때 가서 군사분계선을 치우면 자연스럽게 통일이 되는 겁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金正日에 대한 반감이 북한 전체 주민은 물론, 국가보위부나 안전부, 북한 핵심 지도계층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남한의 일부 세력들은 金正日 통치구조가 사라지면 북한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관측하는데 저는 金正日 체제가 사라져도 북한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尹大日씨는 『金正日을 권력의 의자에서 치워 놓는 것이 북한을 자연스럽게 개혁 ·개방의 길로 유도하는 것』이라면서 金正日 권력의 본질을 이렇게 분석했다.
尹씨는 『북한이 철저한 왕조 세습체제라는 구조로 볼 때 金正日의 후계자는 반드시 그 집안에서 나올 것』이라면서 『후계자 문제는 아직 金正日이 건재하기 때문에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지만 시기가 성숙되면 수많은 상징조작을 통해 金正日의 장남 金正男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金正男을 후계자로 옹립하라는 내부 문건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1998년 2월에 보위사령부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에 의하면 金正男이 이미 인민군 대장 계급을 가지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金正男에게 帝王學 교육이 실시됐다고 합니다. 북한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운 중국 교포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평양에서는 작년부터 金正男을 「떠오르는 태양」으로 은밀하게 선전하고 있답니다』
―북한이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하면서도 장자 상속에 의한 권력 세습을 어떤 논리로 이해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 논리나 주장을 떠나 북한의 본질은 「조선왕조의 완벽한 부활」로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습 왕조이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북한은 권력을 父子간에 세습하는 시스템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金正日은 국가보위부조차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이용할 뿐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 가족만을 믿기 때문에 代를 물려가며 권력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된 겁니다.
金正日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金正男에게 권력을 물려주려 하는데,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가용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권력 세습의 고리를 金正日에서 끊어야만 북한 주민을 굶주림과 박해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어요. 金正日이 살아 있는 한, 그리고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는 한 북한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金正日이 보낸 송이는 16호 수용소 정치범들이 채취한 것
尹씨는 지난 5월 미국 디펜스 포럼 재단의 초청을 받아 訪美했을 때 워싱턴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惡의 축이라면 金正日은 惡의 뿌리』라며 『보위부 등 정부기관이 金正日의 지시로 아편을 조직적으로 재배하여 중국·일본·남한 등지에 밀수출하고 있다』고 충격적 증언을 했다. 그는 또 북한이 체제유지를 위한 공개처형, 탈북자 강제송환,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를 비롯하여 북한 정부가 사람 납치 등 범죄행위를 하고 있는 실상을 폭로했다.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尹씨의 증언.
『북한에서는 정치범 수용소를 「정치범 관리소」라고 부르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 20여 개를 운영했습니다. 정치범 수용소를 관리하는 부서는 국가안전보위부의 농장 담당 지도국인데, 이는 외부 사람들에게 위장하기 위한 간판입니다.
안혁·강철환씨 등 요덕 수용소 출신이 脫北하여 남한에 온 후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이 공개됐고, 이를 근거로 국제 인권단체들이 북한 인권실태를 조사해야 한다며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함경북도의 온성, 경성 등지에 있던 10여 개의 수용소를 폐쇄하여 10여 개로 통폐합했습니다. 수용소 숫자가 10여 개로 줄었지만 수용 인원 20만명은 변함 없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尹씨는 보위부 요원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범 수용소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철통 같은 비밀에 부쳐져 있다고 한다.
尹씨는 또 『2000년 추석 무렵 金正日이 남한에 보낸 송이버섯은 제16호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된 정치범들이 채취하여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金大中 대통령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일부 親北 좌익계 인사들은 북한 인권문제 거론은 적절치 않으니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제 인권단체들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 실태에 대해 계속 거론하니까 그 숫자를 줄인 사실이나, 유태준씨 문제를 계속 거론하니까 생존 사실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현실로 볼 때 북한 인권에 침묵해야 한다는 주장은 金正日의 폭압통치를 도와주기 위한 시도라는 오해를 살 우려가 있어요. 야만적인 폭압체제를 운영하는 金正日 정권을 비판하고 북한 동포들의 인권 개선을 외치는 것은 시대의 양심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당연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安承運 목사는 보위부 대외 반탐정국 요원이 납치
―尹선생께서는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국가기관이 사람 납치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安承運 목사 납치사건에 대한 진상을 설명해 주십시오.
『安承運 목사는 북한의 보위부 대외 반탐정국 소속의 312호실 요원들이 납치했습니다. 1995년 무렵 보위부는 남한에서 새로 출범한 金泳三 정부의 對北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하고 중국 東北지방에서 남한 안기부(現 국가정보원) 요원들의 움직임이 뜸해지자 안기부의 차후 對北 공작방향, 문민정부 對北정책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東北지방에서 활동하는 안기부 요원을 납치하라는 밀명을 해외 거점에 나가 있는 요원들과 국경 市·郡의 안전보위부 부장들에게 하달했습니다』
―安목사 납치는 누구 지시에 의해 어떤 사람이 납치에 가담했습니까.
『당시 국가안전보위부 1부부장 김영룡이 보위부 반탐정국 소속 312호실에 직접 지시했고, 312호실 소속의 리경춘이란 지도원이 1995년 7월9일 연길시에서 교회 활동을 하던 安목사를 안기부 요원으로 알고 납치했습니다. 납치범들은 한밤중에 安목사를 호텔 밖으로 유인한 후 조선족 교포의 차량으로 두만강 국경지역까지 이동했으며, 다음날 오후 용정시 개산툰 근방의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납치했어요』
우리 정부의 강력한 항의가 제기되자 중국은 安목사 납치사건의 주모자였던 리경춘을 체포하여 실형을 선고했다. 그는 1년 7개월 간 장춘 감옥에 수감됐다가 1997년 8월 석방과 동시에 북한으로 추방됐는데, 리경춘을 마중하기 위해 함경북도 보위부장이 회령시 세관까지 나가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고 한다. 尹씨는 『안기부 요원을 납치하라』는 상부 지시에 의해 자신이 소속됐던 함북 무산군 보위부가 납치한 한국인 이종근씨 사건도 증언했다.
『1995년 7월18일 이종근이란 남한 사람이 6·25 때 헤어진 형을 만나려고 국경지역에 나타난 것을 안기부 요원인 줄 알고 납치했습니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혈육을 만나러 온 시골 농부라는 사실이 밝혀져 8월11일 회령을 통해 중국으로 송환했어요. 제가 이종근씨를 직접 데리고 회령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인계했습니다. 당시 회령에 이종근씨가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형이 살고 있었음에도 상봉시키지 않은 채 돌려 보냈습니다』
金日成 지시로 1992년부터 아편 재배
尹大日씨는 북한의 아편 재배 실태, 마약 생산 현황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아편 재배는 1992년 金日成이 함경북도를 현지 지도하는 과정에서 재배 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시 경제가 엉망이 되어 중앙으로부터 모든 공급이 끊기고 생산의 모든 부분이 멈춘 상태였습니다. 金日成은 함북도당 확대전원회의에서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도 함북도는 중앙으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라. 자체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라. 일제시대에 함북도 연사군에서 아편 농사가 잘 되었는데 연사군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 지시에 의해 보위부의 통제 감시下에 연사군에서 아편 재배가 시작된 겁니다』
―그 전에는 북한에서 아편이 재배되지 않았습니까.
『소규모로 재배된 경우는 있지만 대규모로 재배된 것은 1992년 金日成 지시 이후부터입니다. 1996년 말에는 중앙으로부터 「함북도의 협동농장 중 10정보씩 아편을 재배하라」는 지시가 내려와 1997년부터 함북도內 협동농장에서 대대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재배된 아편은 인민무력성 보위국이 관리하는 청진시 나남구역의 나남제약공장으로 운반된 다음 이곳에서 가공하여 완제품을 생산했습니다. 나남제약공장에는 태국인 마약 기술자들이 근무했는데, 이곳에서는 헤로인과 필로폰(속칭 히로뽕)을 각각 매월 1t씩 연간 24t 정도 생산했습니다. 다른 보위부 요원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평양시 교외에도 마약 제조공장이 있다고 합니다』
黨의 지시에 의해 아편이 대대적으로 재배되자 일제시대를 경험했던 나이 많은 노인들로부터 『나라가 망할 무렵이면 국가가 아편 생산을 지시한다』고 하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생산된 마약 판매는 보위사령부가 운영하는 「수정무역 합영회사」가 담당하고 있는데, 주로 해외에 나가는 출장원, 對南공작부서 요원들이 해상루트를 통해 남한·일본·대만 등으로 판매하거나 국경지역을 통해 중국 지역에 팔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일본으로 가장 많이 흘러간 것으로 압니다. 판매가격은 국경지역에서는 kg당 1만 달러, 해상에서는 1만5000달러에 판매됐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약 판매대금은 「충성의 외화 자금」이라 하여 金正日에게 바칩니다. 이 달러를 북한 주민들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이나 의약품 구입에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불행하게도 金正日은 이런 달러를 독재기구 강화, 국방력 강화에 사용할 뿐 식량은 각 道나 공장 기업소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팽개쳐 놓은 상황입니다』
尹씨는 자신이 마약사건을 수사하여 47kg의 마약을 회수한 적이 있으며, 자신도 20kg의 마약을 소지하고 있다가 일부를 중국 국경지역에서 남한 사람에게 판매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는 마약이 지천에 널려 있어 마약 중독자가 양산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아편이 설사나 복통 등에 만병통치약이라 하여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대고 있으며, 불치병에 걸리면 통증을 없애기 위해 아편을 복용합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편을 대대적으로 단속했으나 지금은 국가가 마약제조라는 범죄행위에 앞장서고 있으며 숱한 아편 중독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995~98년 동안 2000명 주민 공개처형
북한은 외화벌이를 위해 마약뿐만 아니라 남한의 중고 자동차를 나진항을 통해 밀수입하여 중국으로 되팔아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자동차 밀수는 보위사령부 무역부 등에서 조총련계를 통해 진행한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의 공개처형 실태도 증언을 하셨는데.
『북한은 1980년대 말까지는 주민에게 겁을 주기 위해 道·市·郡에서 10년에 한 번 정도 공개처형을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사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사회 전반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金日成 사망 후 체제가 급격히 흔들리자 1995년 초부터 체제 안전을 해치는 범죄행위가 발생할 경우 공개처형을 실시한다는 포고문을 7~8차례나 발표했어요. 대대적으로 공개처형이 자행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尹씨는 1995~98년 기간 중 1개 郡에서 한 해 평균 10~12명의 주민이 공개 처형됐으며, 이를 전국적으로 합산하면 최소 2000명의 주민이 공개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尹씨는 『1994년 金日成 사망을 계기로 민심이 크게 흔들리고 체제 불만이 확산되어 反체제 활동이 전에 비해 2.5배 정도 급증했기 때문에 공개처형으로 주민의 동요를 억누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포통치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형 방법도 종전과는 달리 참혹한 방식으로 했습니다. 전에는 사형수의 가슴을 조준하여 쏘았으나 1995년 이후에는 머리를 조준사격하여 얼굴 반쪽이 날아가고 붉은 피와 함께 골이 쏟아지도록 했고, 참혹하게 죽은 시체를 하룻동안 방치하여 공포감을 극대화했어요. 공개처형이 벌어지는 날이면 주민과 학생을 동원해 처형 장면을 보게 함으로써 체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꺾어 놓았습니다』
―최근에 북한의 금강산댐 붕괴 가능성이 제기돼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금강산댐의 건설 목적은 무엇입니까.
『금강산댐은 오래 전에 시작된 공사인데 경제 여건 때문에 공사가 수차 중단됐다가 착공 10년 후인 1998년에 1차 공사가 완공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에는 「금강산댐은 水攻작전을 위해 건설하는 것이다. 금강산댐을 터뜨리면 서울 주요 지역이 8m나 물에 잠긴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어요』
―금강산댐이 水攻작전을 위해 건설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유사시 쉽게 터뜨리기 위해 흙으로 댐을 쌓은 것이라든지, 댐 공사에 인민군대를 대대적으로 투입한 점, 또 공사 기간 중 보위부 요원들에게까지 금강산댐은 水攻을 위해 짓고 있는 것이란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보위부원 1명이 1000명의 주민 감시
尹大日씨의 증언에 의하면 보위부는 북한 최대의 정보기관으로서 주민 감시, 反체제세력이나 간첩 색출 및 체포, 金부자의 신변을 위협하는 테러분자 색출 및 처형 등을 통해 북한의 세습체제를 유지시켜 주는 기구다.
1945년 11월 창설된 「국가보위부」는 1992년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자 두 나라를 견제하고 국가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그 해 12월 「국가안전보위부」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3년 초 탈북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국경봉쇄 부서와 대외 반탐정국을 신설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金正日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반탐정국은 1998년경까지 「동방진흥무역공사」라는 이름으로 연길의 한 호텔 8층에 거점을 만들어 활동했어요. 중국 요녕성 심양市에 있는 북한 영사관 직원들은 총영사에서부터 말단 직원까지 전원이 대외 반탐정국 소속원이며, 총영사는 중국 현지에서 진행되는 보위부 비밀사업을 직접 지휘하는 사령탑입니다. 반탐정국 요원들은 아편 밀매로 활동자금을 조달하여 남한 사람 납치, 첩보수집, 脫北 주민 체포 및 수사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尹씨의 증언에 의하면 金正日 정권은 북한 주민을 통제 감시하고 정치범들을 처벌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위부에 3만여 명의 정예 요원들을 근무시키고 있다고 한다. 1987년 김만철씨 一家가 남한으로 귀순한 후 金正日은 보위부 요원들이 1명당 50명의 정보원을 비밀리에 채용하도록 했다. 채용된 정보원들은 1명당 20명의 주민들을 감시하기 때문에 보위부 요원 1명은 정보원을 통해 1000명 주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산술에 근거한다면 북한의 2000만 주민을 감시하는 데는 2만명의 보위부 요원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1987년에 국가안전보위부장 이진수가 사망한 후 金正日은 후임자를 공석으로 둔 채 보위부 제1부부장이 사업 전반을 지도하는 체제로 개편했다. 보위부는 金正日의 직접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체제 유지의 핵심세력이므로 金正日 자신이 실질적인 국가안전보위부장을 겸직하고 있다고 한다.
尹씨는 『북한이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도 쉽게 붕괴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군대와 보위부, 인민보안성과 같은 독재기구로 주민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金正日은 보위부 조직을 통해 북한 사회 전반을 강력히 통제하고 있으며 체제 불만자들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모두 정치범 수용소에 격리 수용하는 등 공포통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와 가족 모두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反체제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북한에서는 金日成 父子를 비판하는 낙서나 삐라 살포 등을 통해 불만을 토로하는 정도가 최상의 체제 저항 운동이죠. 보위부는 낙서나 삐라 사건에 대비하여 만 17세 이상 全주민의 필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체제를 비방하는 전단이나 낙서가 발견되면 필적을 감정하여 범인 추적에 나섭니다』
북한 최상층부 인사들도 동요
尹씨는 북한 보위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삐라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91년 추석날인 9월23일 함북 청진市에서 평양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철길 주변에 「金日成 타도」, 「북한 사회를 개혁 개방하라」, 「쌀을 달라」는 내용이 적힌 삐라 수백 장이 살포됐습니다. 사건 발생 후 보위부가 전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사 중단 지시가 내려오더군요. 제가 한국으로 온 후에 안 사실인데 이 삐라 사건의 주인공은 귀순한 인민군 장교 출신 임영선씨였습니다. 그가 남한에 귀순한 후 남한 언론과 기자회견에서 이 사실을 실토하자 북한 지도부에서 수사 중단 지시를 내린 겁니다』
이밖에도 북한에서는 金日成 사망 후 숱한 反체제·反국가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정황에 대해 尹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95년 6월 함북 청진시 나남구역에 위치한 인민군 제6군단 쿠데타 사건으로 함북 당위원회 조직비서와 함북 보위부 부장이 처형됐습니다. 1996년 12월에는 金日成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 기념궁전에 삐라 살포사건, 1997년 9월 당중앙위원회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 처형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金正日이 가장 신임했던 군부와 黨, 보위부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렇다면 북한의 최상층부 인사들도 동요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체제의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는 보위부 요원을 비롯해 북한 상층부 사람들도 북한 체제가 갈 데까지 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 체제에서 살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순 덩어리의 체제에 충성을 해야 하는 보위부 요원들도 크게 동요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尹씨는 체제수호의 전위세력이었던 역대 보위부장의 말로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초대 보위부장 김병하는 金正日 세습체제 구도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1980년 金正日은 김병하가 애매한 군중을 처형하여 黨과 대중을 이탈시켰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그를 숙청했습니다. 자신이 金正日의 이용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안 김병하는 집무실에서 권총 자살을 했습니다. 2대 보위부장 이진수는 1987년 8월 황해남도의 보위부 사업실태를 파악하러 내려갔다가 보위부 침실에서 잠을 자던 중 밤나무 가스에 중독돼 사망했어요.
그의 사망 후 金正日은 제1부부장을 통해 보위부를 대리 통치를 했습니다. 이진수의 뒤를 이어 보위부를 맡은 보위부 제1부부장 김영룡은 1998년 4월5일 金正日로부터 反黨 反혁명 종파분자로 몰리자 회의 도중 극약을 먹고 자살했어요』
북한 지도층도 아들 軍에 안 보내
尹씨는 『현재 북한의 실질적인 국가안전보위부장은 金正日인데 그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 인구 중 金正日을 지지하는 사람은 1만명 정도도 안 될 것입니다. 상층부 인사들도 마음속으로는 金正日을 떠났어요. 단지 처벌이 무서워 복종하고 있을 뿐이죠. 黃長燁·金德弘씨가 남한으로 망명했을 때 보위부 간부들은 「이 체제도 이제 끝났구나」 하고 절망 낙담했습니다. 이처럼 다 죽어 가는 북한을 살려 놓은 것이 金大中 정부입니다. 남한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북한은 벌써 붕괴되었을 겁니다』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金正日이 金日成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북한 체제를 일사불란하게 이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는데요.
『지난 50년 간 주민들을 충성심 하나로 이끌고 왔습니다만 이제는 아무리 달콤한 말도 싫증날 때가 왔습니다. 불만이 쌓여 체제에 대한 환멸이 폭발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카리스마가 강한 사람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체제 유지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강압통치, 철권통치는 어쩔 수 없는 체제유지의 수단이라고 봅니다』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사람의 아들이 非정상적인 방법으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 하여 거센 비판이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북한 지도층의 자식들 軍복무 현황은 어떻습니까.
『북한 특권층도 자식들을 軍에 안 보내려고 대학에 보내거나 국가 자금으로 외국 유학을 보내는 등 별 짓을 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軍에 입대해도 1년 정도 복무한 후 빼돌리는 일이 많아 일반 서민층 자녀들의 불만이 큽니다. 黨 중앙에서는 「간부들 자녀부터 軍복무에 솔선 수범하라」고 지시하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남과 북이 추구하는 이념만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다를 뿐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유형, 범죄유형까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성취해야 할 목표가 주어지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에너지가 폭발할 경우 변화의 속도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빠를 것으로 봐요』
햇볕정책이 남한을 변화시켜 反美기지화하고 있다
―정치색이 배제되어야 할 이산가족 상봉장이 체제의 선전장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북한은 1997년 말에 이산가족 상봉에 대비하여 黨 기관들이 협동하여 전국적으로 남한 출신과 월남자 가족 및 연고자들을 파악하고 이산가족 상봉장에 내보낼 대상자 선발을 마쳤습니다. 상봉 시기는 1998년 초로 잡았으나 서관히 사건, 이산가족 상봉을 주도해야 할 보위부의 김영룡 제1부부장 사건 등으로 진전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북한이 상봉장에 내보낼 인물로는 북한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 反체제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 체제 선전에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사람 등이었습니다.
현재까지 진행된 이산가족 상봉행사에는 이런 사람들이 출연한 겁니다. 북한은 앞으로 두세 차례 상봉 행사를 더 하고 나면 행사장에 내보낼 「믿을 만한 이산가족」이 다 고갈되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상봉행사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尹씨는 자신의 한국行으로 이산가족이 됐다. 요즘도 북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고 한다. 함께 脫北 귀순한 작은아들을 제외한 여덟 명의 가족은 행방불명 상태인데 요덕이나 개천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형 윤대봉씨는 尹씨의 탈북 사실이 알려진 직후 직접 책임을 물어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랍·탈북자 인권과 구명을 위한 시민연대」 대표인 李犀(이서) 목사는 『아무 죄도 없는 尹大日씨 가족을, 그것도 젖먹이 어린이까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시키는 것은 중대한 인권유린 행위』라면서 『유태준씨 사건처럼 국제 인권단체들과 연대하여 북한 정권에 尹씨 가족의 生死 규명을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尹씨는 金大中 정부의 對北정책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그는 金大中 정권이 집권기간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남북 頂上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것이 아니라 남한 주민들 속에 (잠시나마) 金正日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고 북한 체제를 찬양하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對北 햇볕정책은 북한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남한을 변화시켜 남한 전체가 反美기지화하고 있다고도 했다.●
尹大日씨가 증언하는 국가안전보위부의 정체
북한 최대의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는 1945년 11월19일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반동세력을 숙청 진압할 목적으로 창설됐다. 6·25 때는 후방에 침투하는 간첩과 무장 게릴라 색출과 소탕, 남한에 동조하는 반동 단체들과 인물들의 구속 처형업무를 전담했다. 초기에 내무성 정보국으로 출범한 이 기관은 1962년부터 1973년 초까지 사회안전성 정치보위국으로 이름을 바꾸어 간첩 및 反체제 인사 색출, 對南공작을 주도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며 자신의 집권에 방해된다고 판단되는 政敵들을 대부분 제거한 金日成은 북한 사회에 남아 있는 적대계급의 잔재세력과 체제 불만세력을 조직적으로 색출하기 위해 1973년 5월 사회안전성 산하의 정치보위국을 국가정치보위부로 개편하고 중앙을 비롯해 각 道와 市·郡마다 조직을 확대했다.
이 무렵 북한은 권력세습을 위한 기반 조성작업에 돌입했는데, 국가정치보위부는 세습체제 구축에 반대하여 金日成 父子의 신변을 위협하는 테러분자 색출 및 제거, 金日成 父子의 권위와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모독하는 사건, 국가주권 전복 음모자, 反체제 인물 등을 발본색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시 말하면 국가정치보위부는 金日成 父子의 세습체제를 공고히 하고 후계구도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金正日이 후계자로 확고한 위상을 굳힌 후 金正日은 국가정치보위부란 명칭을 국가보위부로 바꾸고 권한도 축소하여 간첩 잡는 데만 전념할 것을 지시했다.
1980년대 말부터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소련 해체, 1992년 韓中 수교 등의 여파로 체제 붕괴의 조짐이 보이자 위기감을 느낀 金正日은 1992년 12월 국가보위부를 국가안전보위부로 개칭하고 국경봉쇄 부서와 대외 반탐정국을 신설하는 등 조직을 강화했다.
尹大日씨는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는 다른 나라 정보기관과는 달리 북한 유일의 정보기관이면서도 해외첩보 수집이나 對南공작보다는 북한의 세습체제를 보호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상부 지시에 의해 한국인 및 외국인 납치, 마약밀매, 탈북자 송환 업무에 종사하고 있으며 세습체제 유지 및 공포심 조장을 위해 정치범 수용소 운영, 주민 공개처형 등 惡役을 맡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는 「북한」이라는 사회를 들여다보는 여러 가지 窓이 준비돼 있다. 도청이나 감청, 위성사진 등을 통한 기계적 정보를 비롯하여 북한 관련 각종 저작들, 심지어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 金日成·金正日 父子의 저작물, 흑색선전 방송인 「구국의 소리」 방송까지 리얼 타임으로 듣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 사회에서 태어나 살다 온 사람들, 즉 脫北 귀순자들이 전하는 人的 정보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들의 북한 생활은 수만 가지 논설이나 이론, 기계적 분석적 접근으로 짚어낼 수 없는, 체험에서 우러나는 생생한 관찰기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기자가 만난 尹大日(윤대일·47·일부 언론보도에는 尹成銹란 가명으로 소개됨)씨는 1998년 9월 북한을 탈출하여 같은 해 10월 한국에 온 최초의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소좌(한국의 소령급에 해당·보위부 요원들은 모두 현역 군인 신분임)」 출신 귀순자다. 그는 9년 간의 軍복무를 마치고 함북 무산市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중 국가안전보위부(이하 「보위부」로 표기) 요원으로 선발돼 反探課(반탐과) 지도원으로 15년 간 근무하다 脫北 귀순했다. 지금까지 다양한 탈북자들의 귀순 행렬이 이어졌지만 북한의 정보기관인 보위부 지도원 출신이 한국에 온 것은 尹씨가 첫번째 사례이다.
보위부는 북한 주민을 감시·통제하고 체제 저항세력을 색출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는 북한 유일의 정보기관으로서, 金正日 세습체제 유지의 전위부대이자 독재기구 유지의 사령탑으로서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진 조직이었다. 尹씨는 1983년부터 국경 도시인 함북 무산군 보위부의 反探課 지도원으로 근무했는데, 주된 업무는 중국이나 러시아로 탈출한 脫北者 송환 및 주민 감시, 외부 침투 간첩 색출 등이었다.
尹大日씨는 중국에 파견돼 탈북자들을 체포, 송환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1994년 북한 총리 강성산의 사위 康明道(강명도)씨가 중국으로 탈출했을 때 그의 체포 밀명을 받고 중국에 파견됐으나 金日成 사망으로 임무 수행을 포기하고 귀국했다고 한다. 일반 脫北 귀순자들이 金正日 체제의 희생자라면, 尹씨는 金正日의 명을 받들어 가해자의 편에 섰던 특이한 신분의 귀순자이자 탈북자 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 생생한 체험과 이론으로 무장한 전문가다.
그의 한국行으로 인해 북한 보위부의 주민 통제 시스템, 간첩 색출 방법, 탈북자 송환 및 대처 방식 등 베일에 가려져 있던 보위부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작은 바람 구멍이 뚫렸고, 북한 정권의 탈북자 대책 및 동향에 대한 정통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다.
尹씨는 현재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黃長燁·金德弘씨가 결성한 탈북자동지회 부회장이다. 그는 다수의 탈북자들이 중국 北京 주재 스페인 총영사관과 沈陽(심양)의 미국·일본 총영사관에 진입하여 이들의 처리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떠오른 지난 5월14일부터 23일까지 미국 인권단체인 디펜스 포럼 재단의 초청을 받아 백악관과 국무부, 의회를 방문했다.
美 고위 관리와 만난 최초의 탈북자
그는 訪美 과정에서 제임스 릴리 前 주한 미국 대사, 국무부의 론 크레인 민주·인권·노동 담당 차관보를 비롯한 한반도 관련 전문가 20여 명과 면담했다. 백악관에서는 마이클 그린 한국·일본 보좌관과 국가안전회의(NSC)의 한반도 담당자를 만났으며, 체니 부통령의 안보담당 보좌관, 美 하원 의원 등에게 북한 인권문제와 탈북자 문제에 관해 증언했다.
脫北 귀순자가 미국을 방문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미국 고위 관리들과 만나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것은 尹씨가 처음이다. 미국이 탈북자 문제에 정통한 尹씨를 초청하여 고위 관리들과 면담토록 한 것은 美 정부의 탈북자 정책에 중대한 변화가 감지되는 대목이다.
月刊朝鮮은 탈북자 문제에 대한 국제적 기류가 민감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美 고위 관리들과 면담하고 온 尹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尹씨는 자신이 보위부 시절 체험한 내용을 주제로 저서를 집필 중인데, 원고 마무리 작업으로 분주한 가운데 기자와 만나 이틀 간 10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우선 미국에 다녀온 소감부터 물어보았다.
『북한에서는 「美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자」는 선전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그 제국주의 나라에 들어간 순간, 공원 속에 나라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평양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고 선전하는데, 뉴욕과 워싱턴 등 미국 도시들과 비교하니까 평양이 허구의 도시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어요』
허구의 도시라는 부분이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尹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은 통신시설과 도로였습니다. 시원스레 닦인 도로와 누구나 들고 다니는 전화기(핸드폰)를 보면서 「이 사람들은 後代를 위해 값진 일을 해 놓았구나」 하고 느꼈어요. 반면에 북한에서는 아파트나 건물 한 채를 짓더라도 미래를 위한 안목이나 생산성, 실용성을 고려하는 게 아니라 金日成 父子의 우상화와 결부시켜 짓습니다. 그러니 도시 전체가 박제된 세트장 같은 허구의 도시로 느껴질 수밖에요』
尹大日씨는 탈북자를 잡아들이던 보위부 요원 입장이었다가 어느 날 본인도 탈북자가 되어 한국으로 왔다. 그는 함북 무산군 보위부 반탐과 지도원으로서 탈북자 체포 송환 업무를 위해 연간 10여 차례 이상 중국을 드나들었다. 이 과정에서 개혁·개방으로 중국 인민들의 삶이 윤택해진 모습, 그리고 남한 가요와 비디오를 접하면서 사상과 신념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체제유지의 전위세력이었던 그의 등을 떠민 것은 1997년 12월부터 시작된 보위부 요원을 대상으로 한 숙청작업이었다.
尹씨의 증언에 의하면 1996년 중국 北京에서 중앙 사로청(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 책임 일꾼들이 남한 대표와 만나 그들로부터 뇌물과 향응을 받았으며, 북측 대표단 일부가 비밀리 제주도에 초청받아 남한의 안기부 요원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 고위층에 남한 정보기관의 자금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金正日은 보위부가 남한의 공작에 즉각 대처하지 못했다 하여 자신이 총애하던 김영룡 보위부 제1부부장을 反黨·反혁명 종파분자로 지목했다. 김영룡은 회의 도중 극약을 먹고 자살했고, 김영룡 휘하의 보위부 최고 간부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처형됐다고 한다. 다시 尹씨의 증언.
『이 사건의 여파로 보위부 요원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 검열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던 보위부원 24명이 소환당해, 그 중 한 명을 제외한 23명이 처형됐어요. 해외 파견 경험이 많았던 저의 활동에 대해 정보원들이 「남한 비디오와 가요를 자주 들었다」고 밀고했기 때문에 수사망에 걸리면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고 소환 하루 전에 둘째 아들만 데리고 중국으로 도주했습니다』
尹씨는 김영룡 보위부 제1부부장의 자살과 보위부 요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을 목격하면서 보위부도 결국 金正日 세습체제 유지를 위한 이용도구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북한을 탈출했다고 한다.
美 고위 관리들, 탈북자 문제에 큰 관심
―한국 정부는 탈북자들이 중국이나 러시아 주재 한국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에 들어와 망명을 요청하면 문전 박대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行 과정에서 우리 대사관으로부터 섭섭한 일을 경험하지는 않았습니까.
『저는 보위부 요원이라는 특수 신분 때문인지 탈북한 지 한 달 만에 손쉽게 한국行의 꿈을 이루었습니다만, 다른 귀순자들은 사정이 다르더군요. 어떤 친구는 한국 대사관에서 내쫓긴 후 한국 선교사나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몽골 사막지대, 미얀마 정글지대를 돌파하여 한국에 왔는데 이 과정에서 가족이나 일행이 목숨을 잃은 사례도 많더군요』
尹大日씨는 미국에 가서 백악관과 국무부의 고위 관리들과 만났을 때 그들은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이번에 미국에 가서 느낀 점은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자기 나라와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탈북자와 북한 인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金正日 체제下에서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우리 정부 관계자 중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표명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이번에 尹大日씨가 탈북자 문제를 주제로 미국의 對北정책을 수립, 집행하는 고위 관리들과 대화를 나눈 것을 두고 미국의 탈북자 및 북한 인권정책이 관망 자세에서 적극적인 개입 쪽으로 전환하는 것 아닌가 하는 관측이 나왔다. 尹씨와 만난 미국 고위 관리, 한반도 전문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탈북자가 대량 발생한 시기 ▲탈북자의 발생 원인 ▲앞으로 탈북자가 계속 발생한 것인지의 여부 ▲북한의 구체적인 인권 실태 ▲식량 상황 등이었다고 한다.
대화 과정에서 尹大日씨는 미국 전문가들이 남한의 관리나 전문가보다 더 상세한 내용을 알고 있으며, 북한 문제를 냉정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에 한국 정부는 북한 문제를 너무 낭만적·감성적·非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우선 탈북자에 대한 尹씨의 증언을 들어 본다.
『탈북자들은 中-北 국경에 면해 있고 농토가 협소, 척박한 함북·함남·자강도 출신이 대부분입니다. 양강도는 국경지역이면서도 탈북자가 적은데, 그 이유는 양강도가 뙈기밭 농사에 적합하여 먹고 살 수 있는 조건이 다른 지역보다는 유리하기 때문이죠』
1974년 말 金正日이 주도한 「70일 전투」로 경제 망가지기 시작
―탈북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부터이고, 북한 경제상황이 최악의 바닥을 헤맸던 1994년 말부터 1998년 사이에 대량 脫北이 시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 식량난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말부터로, 그 때부터 단 한 번도 국가가 배급량의 100%를 공급한 적이 없습니다. 국가가 주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니 국경 지역 사람들은 「중국에서는 개도 쌀밥을 먹고 돼지도 옥수수를 먹는데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개돼지만도 못하다. 이렇게 기다리다 굶어 죽느니 차라리 뛰쳐나가자」 해서 脫北 행렬이 시작된 겁니다』
尹씨는 북한 식량난은 홍수나 천재지변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1970년대부터 20여 년 북한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린 것이 곪아서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74년 말 金正日은 그 해 인민경제 계획 수행이 어렵게 되자 「수령님의 전사가 할 일은 수령님께서 제일 걱정하는 경제문제를 풀어드리는 것」이라면서 「70일 전투」를 조직하여 밀어붙였습니다. 자재나 원료, 자원 등 아무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가용자원을 총동원하여 「70일 전투」를 벌인 결과 그 해 계획은 겨우 달성했지만, 다음해부터 그 여파가 심각하게 제기됐습니다. 국력이 쇠진한 상태에서 일시에 자원과 자재, 원료를 대량 투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를 혹사시킨 것이죠. 「70일 전투」의 여파로 1975년부터 경제가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해 골병이 든 겁니다』
―국내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金正日은 金日成대학 경제학부 출신으로 알려졌는데, 경제 전문가가 그런 무리수를 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金正日은 「경제에 말려들면 정치를 못한다」는 金日成의 유훈을 충실히 지키는 인물입니다. 경제에 관한 초보지식만 있었어도 국가 경제를 이처럼 파국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경제사정이 점점 어려워지자 黨에서는 체제 유지와 굶주린 주민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 「학습도 생산도 抗日 유격대 식으로」 등등 구호를 내걸기 시작했지만 총체적 모순의 惡순환 단계로 들어서고 말았어요』
함북 무산군 전체 인구의 10%가 탈북
국내 인권단체에서는 중국이나 러시아 등을 유랑 중인 탈북자 수를 20만~30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데, 尹씨는 이러한 수치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탈북자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는 알 수 없지만 완전 脫北하여 중국에 숨어사는 탈북자는 많아야 10만명 정도로 봅니다. 20만~30만명이란 수치는 脫北했다가 식량 등을 구해서 돌아가는 유동인구까지를 포괄한 수치로 보입니다. 보위부 내부 문서에 의하면 脫北 러시를 이루었던 1993~98년 사이 한 해 평균 5만여 명이 脫北했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식량을 구한 후 돌아왔습니다. 1996~98년 사이에는 하루에 40~50명의 탈북자가 중국에서 송환되어 왔어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탈북·송환을 반복하여 인민보안성(우리의 경찰에 해당)의 구류장이 넘쳐나자 국경지역에 위치한 보위부는 감옥을 설치하여 송환된 탈북자들을 수감했습니다』
尹씨는 탈북자 수에 대한 자신의 경험담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제가 보위부원으로 근무했던 함북 무산군은 인구가 12만명이었는데 무산군에서만 중국에서 송환되거나 국경을 넘어가다 잡혀오는 탈북자 수가 연간 3000명을 넘었습니다. 제가 탈북자를 담당하면서 통계를 내 보니 탈북했다가 잡혀오는 숫자는 탈북한 사람의 4분의 1 정도이더군요. 이 통계를 근거로 할 경우 무산군에서 탈북자 수는 연간 1만2000명, 즉 郡 전체 주민의 10%가 脫北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탈북자가 크게 늘면서 각 市·道 보위부는 1997년 초에 탈북자 실태조사를 벌였습니다. 제가 함북 무산광산의 노동자 주택이 밀집된 노동자區의 1000세대를 조사한 결과 300세대가 비어 있더군요. 이들은 중국으로 탈출했거나 굶어 죽은 겁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脫北하고 굶어 죽을 때 북한 당국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전쟁 예비식량까지 다 털어 먹여도 이 지경이니 제 아무리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戰士들이라도 무슨 대책을 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尹씨는 북한 식량난의 본질은 구조적 모순의 악순환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면서 이렇게 진단했다.
『비료와 농약생산이 중단된데다가 농기계를 가동할 유류 공급마저 끊겼습니다. 농장원들도 먹지를 못해 노동 생산성이 극도로 저하된 상태에서 홍수, 한발 등 자연재해가 겹쳤어요. 농업의 붕괴로 배급체계가 마비되니까 주민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脫北을 합니다. 金正日은 脫北 행렬이 계속되면 체제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탈북자를 계속 잡아들입니다. 결국 북한이 식량난 해결을 위해 내놓은 유일한 대책은 주민감시와 국경봉쇄 강화가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식량난으로 북한 주민 300만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산했는데, 이 수치의 신빙성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전체적인 조사를 해 보지 않아 자세한 실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만 최소한 30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에 의하면 식량난이 극심했던 1996~97년 함북 무산군에서만 하루 평균 20명 정도가 굶어 죽었습니다. 이 통계를 근거로 할 경우 무산군에서 한 달에 600명, 일 년이면 7200명, 즉 무산군 총 인구의 6%가 굶어 죽은 셈이죠.
1997년에 제 사촌동생 세 명도 굶어 죽었어요. 다른 직장보다는 보급이 좋다고 알려졌던 함북도內 5개 지역 보위부에도 식량 배급이 끊겨 보위부원이 먹지를 못해 출근을 못 할 정도였으니까요』
人肉 사건, 탈북자 코 꿰어 송환 등은 사실이 너무 과장된 것
尹씨의 증언에 의하면 경제가 결딴난 1996년 9∼10월에 金正日은 남한을 장악할 경우를 대비해 남한 각 道·市·郡의 보위부장, 정치부장, 부부장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특별 수당까지 지급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오래 전부터 남한 출신들을 위주로 남한의 道·市·郡의 당 책임비서, 인민위원회 위원장, 인민보안서장, 검찰소 소장, 재판소 소장 등을 임명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정기 교육을 진행했다고 한다.
―일부 탈북자들은, 식량난을 견디다 못한 일부 북한 주민들이 人肉을 먹었다고 증언을 한 바 있습니다만, 人肉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제가 직접 人肉 사건을 보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청진市 나남구역의 나남탄광 기계공장에 다니던 한 여인이 너무 굶어 정신이 돈 나머지 옆집 아이를 가마솥에 삶아 먹은 사건이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에서 발생한 人肉 사건은 많아야 서너 건, 그것도 非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발생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봅니다. 남한 언론에서는 북한의 보위부 요원들이 체포한 탈북자들의 코를 꿰어 북한으로 호송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尹씨는 『탈북자들이 金正日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북한 사정에 대해 과장한 측면이 없지 않다』면서 『탈북자나 탈북자들의 증언을 보도하는 언론은 진실을 가려서 북한 사정을 알려야 통일 과정에서 쓸데없는 혼란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尹大日씨가 백악관과 국무부 고위 관리 및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만났을 때 그들은 尹씨에게 ▲앞으로도 탈북자가 계속 발생할 것인가 ▲중국이 탈북자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으로 보는가 ▲북한이 탈북자를 막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는가 등을 집중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중국이 北京 주재 스페인 총영사관이나 심양의 일본 영사관에 진입할 탈북자를 제3국 추방 형식으로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일부에서는 탈북자에 대한 중국의 정책변화가 아닌가 하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국은 1961년 북한과 체결한 탈북자 인수 인계 합의서에 의해 탈북자를 체포하여 北으로 강제 송환하고 있습니다. 중국 공안(우리의 경찰에 해당)들도 저간의 사정을 다 알면서도 북한과의 협정과 동맹관계 때문에 계속 송환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중국이 주도적으로 탈북자 정책을 바꿀 가능성은 희박하며, 다만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가 탈북자 문제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일 경우 국제사회의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없다고 봅니다』
탈북자에 난민 지위 부여하면 북한 붕괴
―탈북자 문제의 핵심은 탈북자에 대한 난민 지위 부여, 그리고 탈북자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정착촌 건설로 압축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탈북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북한에서 50만~100만명 정도만 탈북하면 내부에서 심한 동요나 소요가 일어나 대대적인 혼란이 야기될 것이며, 사실상 국가라는 이미지를 상실하여 金正日 체제 붕괴의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저는 미국 고위 관리들과 면담 과정에서 탈북자에 대한 난민 지위 부여와 정착촌 건설이 북한 주민 해방의 뇌관이 될 것이라고 수차 강조했습니다』
尹씨의 증언이 효력을 발휘한 때문인지 최근 對北정보에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미국 정부 및 유엔 주도下에 몽골 지역에 정착촌 건설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국제 사회의 압력에 의해 난민 지위 부여, 정착촌 건설이 실현될 경우 북한의 대응책에 대해 尹大日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金正日은 주민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脫北 주민에 대한 처벌을 더 엄격하게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북한은 中-北 국경지역에 3개 사단 병력을 투입하여 2km마다 1개 소대가 경비를 맡고 있는데 탈북자들이 계속 늘면 국경지역 봉쇄를 위해 병력을 증강할 것입니다』
―주민 감시 강화, 국경지역 병력 증강이 이루어질 경우 북한 주민들의 脫北 의지가 약화될 가능성은 없습니까.
『북한의 경제사정이 호전되기 전에는 탈북자 수가 줄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脫北 의지를 꺾는 것은 국경수비대의 무력이나 주민 감시체계가 아니라 탈북자를 외면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입니다.
駐中 한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은 지금도 한국行을 희망하는 탈북자를 외면하고 중국 공안에 체포 송환되는 현실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非인도적인 태도야말로 脫北 의지를 꺾는 결정적인 무기가 되고 있어요』
駐中 한국대사관이 죽음으로 내몬 탈북자들
尹大日씨는 駐中 한국 대사관이 망명을 요청하는 탈북자를 내쫓아 사망케 한 사례로 함북 무산광산에 근무하던 유태도씨 6父子 사건을 폭로했다. 유태도씨는 중국 거주 조선족 동포로서 1960년대 초 북한으로 귀국하여 다섯 아들과 함께 함북 무산광산에서 착정기(광석 발파를 위해 구멍을 뚫는 기계) 운전공으로 근무했다. 6父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하여 1980년대 말 金日成 훈장을 받았고, 신문 방송 텔레비전 등 선전매체는 그들 父子의 충성심을 대서특필하여 사회의 귀감이 되도록 했다.
체제 유지의 상징이었던 6父子도 참혹한 식량난 앞에서는 현실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1996년 9월 6父子 중 장남, 차남, 셋째, 넷째 아들 네 명이 중국에 있는 고모의 도움으로 脫北했다. 그들은 脫北 즉시 北京의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金日成과 함께 찍은 사진, 훈장 등을 보여주며 한국行을 희망했으나 대사관 직원들은 『도와줄 수 없으니 自力으로 중국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가라』면서 문전 박대했고, 대사관에서 쫓겨나자마자 중국 공안에 체포돼 1996년 11월 북한으로 송환됐다.
『체제의 선전물이던 6父子 중 네 아들이 탈출하자 상부에서는 「놈들을 당장 잡아오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제가 그들의 송환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공안에 수사 협조를 요청했어요. 당시 저는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로 가치관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을 때라서 네 아들이 무사히 한국으로 탈출하길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駐中 한국 대사관이 네 아들을 내쫓아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국 대사관 놈들 정말 잔인한 놈들이다」고 분개했습니다』
北으로 송환된 네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은 1997년 4월 「조국반역죄」로 처형당했고, 나머지 두 명은 정치범 수용소로 가 생사 불명 상태라고 한다. 尹씨는 『이들은 한국 정부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駐中 한국 대사관이 탈북자를 한 동포로 생각한다면 중국 공안에 체포되지 않도록 보이지 않게 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울 방법이 없다」면서 숱한 탈북자들을 死地로 내몰았습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대한민국 공무원들의 업무 태도를 보면서 북한 공무원에 비해 너무도 무책임하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한의 공무원들은 자신이 맡은 일은 스스로 알아서 끝까지 책임을 집니다. 남한의 공무원들은 북한 공무원보다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탈북자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金正日 체제下에서는 지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드니까 어쩔 수없이 탈북자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이들이 송환되면 처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기 힘들었어요』
―탈북자가 발생하면 북한 기관은 脫北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북한은 어떤 직장이건 출근 시간이 8시인데, 직장 소속원들의 출결 상황을 9시까지 해당 지역 사회안전부와 보위부에 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근하지 않으면 보위부원이 그 집에 찾아가 집안을 수색하는데, 이 과정에서 脫北 사실이 파악되면 보위부의 신상명세와 중국內의 친인척 내역 등 자료를 가지고 중국 공안에 수사를 요청합니다』
원조 중단, 외교 고립으로 북한 주민 해방을!
북한 식량난을 바라보는 남한 내의 여론은 유화론과 강경론으로 분열되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 對北 유화론자들은 金正日 체제가 무너지면 큰 혼란이 발생해 우리 체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북한을 지원하여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 식량과 의약품, 생필품을 지원하고 있다. 對北 지원 문제에 대해 尹씨는 『북한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은 사회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왕조 세습체제입니다. 金正日이 이런 체제를 유지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북한 경제 회생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남한의 정부 관계자나 일부 학자, 지식인들은 북한을 지원하여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이론을 근거로 북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에 대한 초보상식도 없는 사람들의 허황된 생각입니다』
―金大中 대통령과 정부 관계자들은 對北 햇볕정책으로 북한이 개혁·개방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북한은 金正日 체제가 존재하는 한 개혁·개방을 못 합니다. 개혁·개방을 하려면 폐쇄사회의 빗장을 열고 외국 자본을 유치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주민 통제가 어렵고 사회주의 경제체제 및 관리체계가 무너집니다. 지금까지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선전해 오던 모든 논리가 부정당해 金正日 세습체제 붕괴의 결정타가 될 텐데 金正日이 이런 위험한 카드를 받아들이겠습니까』
尹씨는 미국 하원의원들과 면담 과정에서 『국제사회가 북한을 지원하면 金正日 세습체제만 강화시켜 북한 주민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對北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고 한다.
『金正日이 인민군대까지 굶겨 가면서도 개혁·개방을 못 하는 것은 「개혁·개방=金正日 세습체제 붕괴」라는 현실을 냉철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金正日은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세습체제 유지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 외에는 代案이 없어요. 이런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려면 ①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원조를 즉각 전면적으로 중단할 것 ② 봉쇄정책을 통해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것 ③ 탈북자에게 난민 지위 부여 및 정착촌 건설로 대량 脫北을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金正日 세습체제를 내부로부터 와해시켜야 합니다』
전쟁을 할 만한 물질적 토대가 안 되어 있다
―金正日 체제가 위협받을 경우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現 단계에서 북한이 전쟁을 수행할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봅니다. 제가 보위부 근무 시절 보위부 간부들은 「인민군대마저 식량공급을 못 해 군인들이 밥을 빌어먹는 거지 군대가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겠는가」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보위부는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여력이 없다는 사실을 세 갈래로 접근했어요. 첫째, 필요한 포탄과 탄약 등은 비축해 놓았다 해도 전쟁을 감당할 만한 다른 분야의 물질적 토대가 전혀 준비되지 못한 점. 둘째, 전쟁에 동원되어야 할 군인들의 육체적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점. 셋째, 전쟁이 나면 북한은 혼자서 싸워야 하지만 남한은 동맹국과 함께 싸우니까 북한이 必敗한다는 겁니다』
―1997년 남한으로 망명한 黃長燁, 金德弘씨는 『전쟁을 막기 위해 남한에 왔다』면서 북한의 전쟁 준비상황을 증언한 사실이 있는데, 이런 의견은 어떻게 보십니까.
『1997년 무렵은 경제상황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전쟁을 하자는 의견들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 휴가도 안 보내고, 1997년 정초에 특수부대가 각 기관을 습격하는 기습작전 훈련이 실시되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黃선생은 당시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북한은 우리의 군사동맹국인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시비를 걸고 있고, 일부 反美주의자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6·15 頂上회담에서는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이 주한미군 주둔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요.
『金正日의 믿기 어려운 말을 함부로 옮기는 사람은 정치인으로서 식견이 부족하거나 金正日에게 협력하려는 사람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주한미군 철수 요구 혹은 지위문제에 시비를 거는 것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에 惡영향을 주는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
―북한이 심각한 식량난의 와중에도 핵무기나 미사일 개발 등 무력을 계속 강화하는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까요.
『저는 북한의 핵무기와 관련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만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미사일과 관련해서는 황해도 지역의 미사일 발사기지를 양강도 삼지연군 일대로 이전하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발사기지가 2005년에 완공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金正日 정권 무너져도 혼란 없다
―金正日 세습체제가 무너지면 새로 들어설 북한 지도부가 개혁·개방에 나서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새로 들어설 북한 지도부는 「북한」이라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주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개혁·개방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될 겁니다. 이 과정에서 남한 기업이 북한에 투자하여 주민생활을 향상시키고, 일정한 수준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그 때 가서 군사분계선을 치우면 자연스럽게 통일이 되는 겁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金正日에 대한 반감이 북한 전체 주민은 물론, 국가보위부나 안전부, 북한 핵심 지도계층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남한의 일부 세력들은 金正日 통치구조가 사라지면 북한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관측하는데 저는 金正日 체제가 사라져도 북한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尹大日씨는 『金正日을 권력의 의자에서 치워 놓는 것이 북한을 자연스럽게 개혁 ·개방의 길로 유도하는 것』이라면서 金正日 권력의 본질을 이렇게 분석했다.
尹씨는 『북한이 철저한 왕조 세습체제라는 구조로 볼 때 金正日의 후계자는 반드시 그 집안에서 나올 것』이라면서 『후계자 문제는 아직 金正日이 건재하기 때문에 누구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지만 시기가 성숙되면 수많은 상징조작을 통해 金正日의 장남 金正男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金正男을 후계자로 옹립하라는 내부 문건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1998년 2월에 보위사령부에 근무하는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에 의하면 金正男이 이미 인민군 대장 계급을 가지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金正男에게 帝王學 교육이 실시됐다고 합니다. 북한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운 중국 교포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평양에서는 작년부터 金正男을 「떠오르는 태양」으로 은밀하게 선전하고 있답니다』
―북한이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하면서도 장자 상속에 의한 권력 세습을 어떤 논리로 이해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 논리나 주장을 떠나 북한의 본질은 「조선왕조의 완벽한 부활」로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습 왕조이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북한은 권력을 父子간에 세습하는 시스템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金正日은 국가보위부조차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이용할 뿐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 가족만을 믿기 때문에 代를 물려가며 권력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된 겁니다.
金正日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金正男에게 권력을 물려주려 하는데,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가용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권력 세습의 고리를 金正日에서 끊어야만 북한 주민을 굶주림과 박해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어요. 金正日이 살아 있는 한, 그리고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는 한 북한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金正日이 보낸 송이는 16호 수용소 정치범들이 채취한 것
尹씨는 지난 5월 미국 디펜스 포럼 재단의 초청을 받아 訪美했을 때 워싱턴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惡의 축이라면 金正日은 惡의 뿌리』라며 『보위부 등 정부기관이 金正日의 지시로 아편을 조직적으로 재배하여 중국·일본·남한 등지에 밀수출하고 있다』고 충격적 증언을 했다. 그는 또 북한이 체제유지를 위한 공개처형, 탈북자 강제송환,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를 비롯하여 북한 정부가 사람 납치 등 범죄행위를 하고 있는 실상을 폭로했다.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尹씨의 증언.
『북한에서는 정치범 수용소를 「정치범 관리소」라고 부르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 20여 개를 운영했습니다. 정치범 수용소를 관리하는 부서는 국가안전보위부의 농장 담당 지도국인데, 이는 외부 사람들에게 위장하기 위한 간판입니다.
안혁·강철환씨 등 요덕 수용소 출신이 脫北하여 남한에 온 후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이 공개됐고, 이를 근거로 국제 인권단체들이 북한 인권실태를 조사해야 한다며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함경북도의 온성, 경성 등지에 있던 10여 개의 수용소를 폐쇄하여 10여 개로 통폐합했습니다. 수용소 숫자가 10여 개로 줄었지만 수용 인원 20만명은 변함 없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尹씨는 보위부 요원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범 수용소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철통 같은 비밀에 부쳐져 있다고 한다.
尹씨는 또 『2000년 추석 무렵 金正日이 남한에 보낸 송이버섯은 제16호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된 정치범들이 채취하여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金大中 대통령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일부 親北 좌익계 인사들은 북한 인권문제 거론은 적절치 않으니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국제 인권단체들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 실태에 대해 계속 거론하니까 그 숫자를 줄인 사실이나, 유태준씨 문제를 계속 거론하니까 생존 사실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현실로 볼 때 북한 인권에 침묵해야 한다는 주장은 金正日의 폭압통치를 도와주기 위한 시도라는 오해를 살 우려가 있어요. 야만적인 폭압체제를 운영하는 金正日 정권을 비판하고 북한 동포들의 인권 개선을 외치는 것은 시대의 양심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당연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安承運 목사는 보위부 대외 반탐정국 요원이 납치
―尹선생께서는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국가기관이 사람 납치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安承運 목사 납치사건에 대한 진상을 설명해 주십시오.
『安承運 목사는 북한의 보위부 대외 반탐정국 소속의 312호실 요원들이 납치했습니다. 1995년 무렵 보위부는 남한에서 새로 출범한 金泳三 정부의 對北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하고 중국 東北지방에서 남한 안기부(現 국가정보원) 요원들의 움직임이 뜸해지자 안기부의 차후 對北 공작방향, 문민정부 對北정책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東北지방에서 활동하는 안기부 요원을 납치하라는 밀명을 해외 거점에 나가 있는 요원들과 국경 市·郡의 안전보위부 부장들에게 하달했습니다』
―安목사 납치는 누구 지시에 의해 어떤 사람이 납치에 가담했습니까.
『당시 국가안전보위부 1부부장 김영룡이 보위부 반탐정국 소속 312호실에 직접 지시했고, 312호실 소속의 리경춘이란 지도원이 1995년 7월9일 연길시에서 교회 활동을 하던 安목사를 안기부 요원으로 알고 납치했습니다. 납치범들은 한밤중에 安목사를 호텔 밖으로 유인한 후 조선족 교포의 차량으로 두만강 국경지역까지 이동했으며, 다음날 오후 용정시 개산툰 근방의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납치했어요』
우리 정부의 강력한 항의가 제기되자 중국은 安목사 납치사건의 주모자였던 리경춘을 체포하여 실형을 선고했다. 그는 1년 7개월 간 장춘 감옥에 수감됐다가 1997년 8월 석방과 동시에 북한으로 추방됐는데, 리경춘을 마중하기 위해 함경북도 보위부장이 회령시 세관까지 나가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고 한다. 尹씨는 『안기부 요원을 납치하라』는 상부 지시에 의해 자신이 소속됐던 함북 무산군 보위부가 납치한 한국인 이종근씨 사건도 증언했다.
『1995년 7월18일 이종근이란 남한 사람이 6·25 때 헤어진 형을 만나려고 국경지역에 나타난 것을 안기부 요원인 줄 알고 납치했습니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혈육을 만나러 온 시골 농부라는 사실이 밝혀져 8월11일 회령을 통해 중국으로 송환했어요. 제가 이종근씨를 직접 데리고 회령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인계했습니다. 당시 회령에 이종근씨가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형이 살고 있었음에도 상봉시키지 않은 채 돌려 보냈습니다』
金日成 지시로 1992년부터 아편 재배
尹大日씨는 북한의 아편 재배 실태, 마약 생산 현황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아편 재배는 1992년 金日成이 함경북도를 현지 지도하는 과정에서 재배 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시 경제가 엉망이 되어 중앙으로부터 모든 공급이 끊기고 생산의 모든 부분이 멈춘 상태였습니다. 金日成은 함북도당 확대전원회의에서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도 함북도는 중앙으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라. 자체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라. 일제시대에 함북도 연사군에서 아편 농사가 잘 되었는데 연사군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 지시에 의해 보위부의 통제 감시下에 연사군에서 아편 재배가 시작된 겁니다』
―그 전에는 북한에서 아편이 재배되지 않았습니까.
『소규모로 재배된 경우는 있지만 대규모로 재배된 것은 1992년 金日成 지시 이후부터입니다. 1996년 말에는 중앙으로부터 「함북도의 협동농장 중 10정보씩 아편을 재배하라」는 지시가 내려와 1997년부터 함북도內 협동농장에서 대대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재배된 아편은 인민무력성 보위국이 관리하는 청진시 나남구역의 나남제약공장으로 운반된 다음 이곳에서 가공하여 완제품을 생산했습니다. 나남제약공장에는 태국인 마약 기술자들이 근무했는데, 이곳에서는 헤로인과 필로폰(속칭 히로뽕)을 각각 매월 1t씩 연간 24t 정도 생산했습니다. 다른 보위부 요원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평양시 교외에도 마약 제조공장이 있다고 합니다』
黨의 지시에 의해 아편이 대대적으로 재배되자 일제시대를 경험했던 나이 많은 노인들로부터 『나라가 망할 무렵이면 국가가 아편 생산을 지시한다』고 하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생산된 마약 판매는 보위사령부가 운영하는 「수정무역 합영회사」가 담당하고 있는데, 주로 해외에 나가는 출장원, 對南공작부서 요원들이 해상루트를 통해 남한·일본·대만 등으로 판매하거나 국경지역을 통해 중국 지역에 팔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일본으로 가장 많이 흘러간 것으로 압니다. 판매가격은 국경지역에서는 kg당 1만 달러, 해상에서는 1만5000달러에 판매됐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약 판매대금은 「충성의 외화 자금」이라 하여 金正日에게 바칩니다. 이 달러를 북한 주민들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이나 의약품 구입에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불행하게도 金正日은 이런 달러를 독재기구 강화, 국방력 강화에 사용할 뿐 식량은 각 道나 공장 기업소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팽개쳐 놓은 상황입니다』
尹씨는 자신이 마약사건을 수사하여 47kg의 마약을 회수한 적이 있으며, 자신도 20kg의 마약을 소지하고 있다가 일부를 중국 국경지역에서 남한 사람에게 판매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는 마약이 지천에 널려 있어 마약 중독자가 양산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아편이 설사나 복통 등에 만병통치약이라 하여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대고 있으며, 불치병에 걸리면 통증을 없애기 위해 아편을 복용합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편을 대대적으로 단속했으나 지금은 국가가 마약제조라는 범죄행위에 앞장서고 있으며 숱한 아편 중독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995~98년 동안 2000명 주민 공개처형
북한은 외화벌이를 위해 마약뿐만 아니라 남한의 중고 자동차를 나진항을 통해 밀수입하여 중국으로 되팔아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자동차 밀수는 보위사령부 무역부 등에서 조총련계를 통해 진행한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의 공개처형 실태도 증언을 하셨는데.
『북한은 1980년대 말까지는 주민에게 겁을 주기 위해 道·市·郡에서 10년에 한 번 정도 공개처형을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사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사회 전반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金日成 사망 후 체제가 급격히 흔들리자 1995년 초부터 체제 안전을 해치는 범죄행위가 발생할 경우 공개처형을 실시한다는 포고문을 7~8차례나 발표했어요. 대대적으로 공개처형이 자행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尹씨는 1995~98년 기간 중 1개 郡에서 한 해 평균 10~12명의 주민이 공개 처형됐으며, 이를 전국적으로 합산하면 최소 2000명의 주민이 공개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尹씨는 『1994년 金日成 사망을 계기로 민심이 크게 흔들리고 체제 불만이 확산되어 反체제 활동이 전에 비해 2.5배 정도 급증했기 때문에 공개처형으로 주민의 동요를 억누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포통치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형 방법도 종전과는 달리 참혹한 방식으로 했습니다. 전에는 사형수의 가슴을 조준하여 쏘았으나 1995년 이후에는 머리를 조준사격하여 얼굴 반쪽이 날아가고 붉은 피와 함께 골이 쏟아지도록 했고, 참혹하게 죽은 시체를 하룻동안 방치하여 공포감을 극대화했어요. 공개처형이 벌어지는 날이면 주민과 학생을 동원해 처형 장면을 보게 함으로써 체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꺾어 놓았습니다』
―최근에 북한의 금강산댐 붕괴 가능성이 제기돼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금강산댐의 건설 목적은 무엇입니까.
『금강산댐은 오래 전에 시작된 공사인데 경제 여건 때문에 공사가 수차 중단됐다가 착공 10년 후인 1998년에 1차 공사가 완공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에는 「금강산댐은 水攻작전을 위해 건설하는 것이다. 금강산댐을 터뜨리면 서울 주요 지역이 8m나 물에 잠긴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어요』
―금강산댐이 水攻작전을 위해 건설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유사시 쉽게 터뜨리기 위해 흙으로 댐을 쌓은 것이라든지, 댐 공사에 인민군대를 대대적으로 투입한 점, 또 공사 기간 중 보위부 요원들에게까지 금강산댐은 水攻을 위해 짓고 있는 것이란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보위부원 1명이 1000명의 주민 감시
尹大日씨의 증언에 의하면 보위부는 북한 최대의 정보기관으로서 주민 감시, 反체제세력이나 간첩 색출 및 체포, 金부자의 신변을 위협하는 테러분자 색출 및 처형 등을 통해 북한의 세습체제를 유지시켜 주는 기구다.
1945년 11월 창설된 「국가보위부」는 1992년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하자 두 나라를 견제하고 국가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그 해 12월 「국가안전보위부」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3년 초 탈북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국경봉쇄 부서와 대외 반탐정국을 신설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金正日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반탐정국은 1998년경까지 「동방진흥무역공사」라는 이름으로 연길의 한 호텔 8층에 거점을 만들어 활동했어요. 중국 요녕성 심양市에 있는 북한 영사관 직원들은 총영사에서부터 말단 직원까지 전원이 대외 반탐정국 소속원이며, 총영사는 중국 현지에서 진행되는 보위부 비밀사업을 직접 지휘하는 사령탑입니다. 반탐정국 요원들은 아편 밀매로 활동자금을 조달하여 남한 사람 납치, 첩보수집, 脫北 주민 체포 및 수사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尹씨의 증언에 의하면 金正日 정권은 북한 주민을 통제 감시하고 정치범들을 처벌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위부에 3만여 명의 정예 요원들을 근무시키고 있다고 한다. 1987년 김만철씨 一家가 남한으로 귀순한 후 金正日은 보위부 요원들이 1명당 50명의 정보원을 비밀리에 채용하도록 했다. 채용된 정보원들은 1명당 20명의 주민들을 감시하기 때문에 보위부 요원 1명은 정보원을 통해 1000명 주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산술에 근거한다면 북한의 2000만 주민을 감시하는 데는 2만명의 보위부 요원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1987년에 국가안전보위부장 이진수가 사망한 후 金正日은 후임자를 공석으로 둔 채 보위부 제1부부장이 사업 전반을 지도하는 체제로 개편했다. 보위부는 金正日의 직접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체제 유지의 핵심세력이므로 金正日 자신이 실질적인 국가안전보위부장을 겸직하고 있다고 한다.
尹씨는 『북한이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도 쉽게 붕괴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군대와 보위부, 인민보안성과 같은 독재기구로 주민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金正日은 보위부 조직을 통해 북한 사회 전반을 강력히 통제하고 있으며 체제 불만자들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모두 정치범 수용소에 격리 수용하는 등 공포통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와 가족 모두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反체제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북한에서는 金日成 父子를 비판하는 낙서나 삐라 살포 등을 통해 불만을 토로하는 정도가 최상의 체제 저항 운동이죠. 보위부는 낙서나 삐라 사건에 대비하여 만 17세 이상 全주민의 필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체제를 비방하는 전단이나 낙서가 발견되면 필적을 감정하여 범인 추적에 나섭니다』
북한 최상층부 인사들도 동요
尹씨는 북한 보위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삐라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91년 추석날인 9월23일 함북 청진市에서 평양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철길 주변에 「金日成 타도」, 「북한 사회를 개혁 개방하라」, 「쌀을 달라」는 내용이 적힌 삐라 수백 장이 살포됐습니다. 사건 발생 후 보위부가 전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사 중단 지시가 내려오더군요. 제가 한국으로 온 후에 안 사실인데 이 삐라 사건의 주인공은 귀순한 인민군 장교 출신 임영선씨였습니다. 그가 남한에 귀순한 후 남한 언론과 기자회견에서 이 사실을 실토하자 북한 지도부에서 수사 중단 지시를 내린 겁니다』
이밖에도 북한에서는 金日成 사망 후 숱한 反체제·反국가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 정황에 대해 尹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95년 6월 함북 청진시 나남구역에 위치한 인민군 제6군단 쿠데타 사건으로 함북 당위원회 조직비서와 함북 보위부 부장이 처형됐습니다. 1996년 12월에는 金日成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 기념궁전에 삐라 살포사건, 1997년 9월 당중앙위원회 농업담당 비서 서관히 처형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金正日이 가장 신임했던 군부와 黨, 보위부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렇다면 북한의 최상층부 인사들도 동요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체제의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는 보위부 요원을 비롯해 북한 상층부 사람들도 북한 체제가 갈 데까지 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 체제에서 살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순 덩어리의 체제에 충성을 해야 하는 보위부 요원들도 크게 동요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尹씨는 체제수호의 전위세력이었던 역대 보위부장의 말로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초대 보위부장 김병하는 金正日 세습체제 구도에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1980년 金正日은 김병하가 애매한 군중을 처형하여 黨과 대중을 이탈시켰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그를 숙청했습니다. 자신이 金正日의 이용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안 김병하는 집무실에서 권총 자살을 했습니다. 2대 보위부장 이진수는 1987년 8월 황해남도의 보위부 사업실태를 파악하러 내려갔다가 보위부 침실에서 잠을 자던 중 밤나무 가스에 중독돼 사망했어요.
그의 사망 후 金正日은 제1부부장을 통해 보위부를 대리 통치를 했습니다. 이진수의 뒤를 이어 보위부를 맡은 보위부 제1부부장 김영룡은 1998년 4월5일 金正日로부터 反黨 反혁명 종파분자로 몰리자 회의 도중 극약을 먹고 자살했어요』
북한 지도층도 아들 軍에 안 보내
尹씨는 『현재 북한의 실질적인 국가안전보위부장은 金正日인데 그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 인구 중 金正日을 지지하는 사람은 1만명 정도도 안 될 것입니다. 상층부 인사들도 마음속으로는 金正日을 떠났어요. 단지 처벌이 무서워 복종하고 있을 뿐이죠. 黃長燁·金德弘씨가 남한으로 망명했을 때 보위부 간부들은 「이 체제도 이제 끝났구나」 하고 절망 낙담했습니다. 이처럼 다 죽어 가는 북한을 살려 놓은 것이 金大中 정부입니다. 남한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북한은 벌써 붕괴되었을 겁니다』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金正日이 金日成에 비해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북한 체제를 일사불란하게 이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는데요.
『지난 50년 간 주민들을 충성심 하나로 이끌고 왔습니다만 이제는 아무리 달콤한 말도 싫증날 때가 왔습니다. 불만이 쌓여 체제에 대한 환멸이 폭발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카리스마가 강한 사람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체제 유지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강압통치, 철권통치는 어쩔 수 없는 체제유지의 수단이라고 봅니다』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사람의 아들이 非정상적인 방법으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 하여 거센 비판이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북한 지도층의 자식들 軍복무 현황은 어떻습니까.
『북한 특권층도 자식들을 軍에 안 보내려고 대학에 보내거나 국가 자금으로 외국 유학을 보내는 등 별 짓을 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軍에 입대해도 1년 정도 복무한 후 빼돌리는 일이 많아 일반 서민층 자녀들의 불만이 큽니다. 黨 중앙에서는 「간부들 자녀부터 軍복무에 솔선 수범하라」고 지시하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남과 북이 추구하는 이념만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다를 뿐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유형, 범죄유형까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성취해야 할 목표가 주어지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에너지가 폭발할 경우 변화의 속도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빠를 것으로 봐요』
햇볕정책이 남한을 변화시켜 反美기지화하고 있다
―정치색이 배제되어야 할 이산가족 상봉장이 체제의 선전장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북한은 1997년 말에 이산가족 상봉에 대비하여 黨 기관들이 협동하여 전국적으로 남한 출신과 월남자 가족 및 연고자들을 파악하고 이산가족 상봉장에 내보낼 대상자 선발을 마쳤습니다. 상봉 시기는 1998년 초로 잡았으나 서관히 사건, 이산가족 상봉을 주도해야 할 보위부의 김영룡 제1부부장 사건 등으로 진전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북한이 상봉장에 내보낼 인물로는 북한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 反체제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 체제 선전에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사람 등이었습니다.
현재까지 진행된 이산가족 상봉행사에는 이런 사람들이 출연한 겁니다. 북한은 앞으로 두세 차례 상봉 행사를 더 하고 나면 행사장에 내보낼 「믿을 만한 이산가족」이 다 고갈되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상봉행사를 진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尹씨는 자신의 한국行으로 이산가족이 됐다. 요즘도 북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고 한다. 함께 脫北 귀순한 작은아들을 제외한 여덟 명의 가족은 행방불명 상태인데 요덕이나 개천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형 윤대봉씨는 尹씨의 탈북 사실이 알려진 직후 직접 책임을 물어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랍·탈북자 인권과 구명을 위한 시민연대」 대표인 李犀(이서) 목사는 『아무 죄도 없는 尹大日씨 가족을, 그것도 젖먹이 어린이까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시키는 것은 중대한 인권유린 행위』라면서 『유태준씨 사건처럼 국제 인권단체들과 연대하여 북한 정권에 尹씨 가족의 生死 규명을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尹씨는 金大中 정부의 對北정책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그는 金大中 정권이 집권기간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남북 頂上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것이 아니라 남한 주민들 속에 (잠시나마) 金正日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고 북한 체제를 찬양하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對北 햇볕정책은 북한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남한을 변화시켜 남한 전체가 反美기지화하고 있다고도 했다.●
尹大日씨가 증언하는 국가안전보위부의 정체
북한 최대의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는 1945년 11월19일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반동세력을 숙청 진압할 목적으로 창설됐다. 6·25 때는 후방에 침투하는 간첩과 무장 게릴라 색출과 소탕, 남한에 동조하는 반동 단체들과 인물들의 구속 처형업무를 전담했다. 초기에 내무성 정보국으로 출범한 이 기관은 1962년부터 1973년 초까지 사회안전성 정치보위국으로 이름을 바꾸어 간첩 및 反체제 인사 색출, 對南공작을 주도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며 자신의 집권에 방해된다고 판단되는 政敵들을 대부분 제거한 金日成은 북한 사회에 남아 있는 적대계급의 잔재세력과 체제 불만세력을 조직적으로 색출하기 위해 1973년 5월 사회안전성 산하의 정치보위국을 국가정치보위부로 개편하고 중앙을 비롯해 각 道와 市·郡마다 조직을 확대했다.
이 무렵 북한은 권력세습을 위한 기반 조성작업에 돌입했는데, 국가정치보위부는 세습체제 구축에 반대하여 金日成 父子의 신변을 위협하는 테러분자 색출 및 제거, 金日成 父子의 권위와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모독하는 사건, 국가주권 전복 음모자, 反체제 인물 등을 발본색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시 말하면 국가정치보위부는 金日成 父子의 세습체제를 공고히 하고 후계구도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金正日이 후계자로 확고한 위상을 굳힌 후 金正日은 국가정치보위부란 명칭을 국가보위부로 바꾸고 권한도 축소하여 간첩 잡는 데만 전념할 것을 지시했다.
1980년대 말부터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소련 해체, 1992년 韓中 수교 등의 여파로 체제 붕괴의 조짐이 보이자 위기감을 느낀 金正日은 1992년 12월 국가보위부를 국가안전보위부로 개칭하고 국경봉쇄 부서와 대외 반탐정국을 신설하는 등 조직을 강화했다.
尹大日씨는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는 다른 나라 정보기관과는 달리 북한 유일의 정보기관이면서도 해외첩보 수집이나 對南공작보다는 북한의 세습체제를 보호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상부 지시에 의해 한국인 및 외국인 납치, 마약밀매, 탈북자 송환 업무에 종사하고 있으며 세습체제 유지 및 공포심 조장을 위해 정치범 수용소 운영, 주민 공개처형 등 惡役을 맡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