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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취재] 동경지하철에서 산화한 李秀賢씨 사건의 또 다른 진실

『義死 前, 교통사고 후유증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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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吉星 朝鮮日報 사회부 영남취재팀 기자
李 敬 恩 朝鮮日報 편집부 기자
  뉴스의 홍수 속에 묻혀진 진실 하나
 
  지난 1월26일 일본의 지하철 역에서 술취한 일본인을 구하려다 의롭게 산화한 한 젊은이의 희생은 한국과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故(고) 李秀賢(이수현·26·고려대 무역학과 4년 휴학)씨.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산악 자전거와 스킨 다이빙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 맨이었으며 기타에 심취해 있었던 李씨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국내와 일본의 신문 방송은 물론 양국의 인터넷에는 그의 용기있는 행동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글이 쏟아졌다.
 
  이같은 뉴스와 양국 고위 인사들의 조문 홍수 속에 묻혀진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당시 李秀賢씨가 어깨뼈가 튀어 나올 정도로 중상의 교통사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 게다가 그가 당한 교통사고에 대해 사고를 낸 일본 택시운전사와 택시 회사는 그가 죽는 날까지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산의 유족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조금씩 흘러나온 이 증언들은 뉴스의 홍수 속에 묻혀지는 듯했고, 또 사고의 당사자인 李씨가 이미 사망한 상태라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취재팀은 관계자들의 증언 확인과 부산,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다만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일본 경찰이 이 사실을 은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시간 현재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기사는 취재팀이 이 사실을 확인하기까지의 기록이다.
 
 
  한 장의 진단서
 
  李씨가 참변을 당한 것은 지난 1월26일 오후 7시18분쯤. 일본 도쿄 신주쿠 (新宿) JR 야마노테센(山手線) 신오쿠보(新大久保)역에서 만취 상태인 일본인 사카모토 세이코(坂本成晃)씨가 선로에 떨어지자 李씨가 맞은편 플랫폼에서 뛰어 내려 일본인 세키네(關根)씨와 함께 사카모토씨를 구하려다 전동차에 부딪혀 숨졌다.
 
  그는 고려대 무역학과 4학년을 휴학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겠다며 일본의 아카몬카이(赤門會) 일본어 학교에서 어학연수중 한 인터넷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韓日(한일) 양국의 가교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는 그의 사연에 일본인들마저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변취재를 하고 있던 취재팀은 처음부터 너무도 당연한 의문을 하나 지워 버릴 수 없었다.
 
  부모와 그의 친구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만능 스포츠 맨이 그렇게 쉽게 지하철에서 事故死(사고사)하게 된 것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 의문은 취재 과정에서 조금씩 풀려 나갔다.
 
  장례식까지 끝난 뒤인 2월5일부터 취재팀이 어머니 辛閏贊(신윤찬·51)씨를 찾아가 李씨의 어린시절 등에 대한 자료를 취재하던 중 어머니 辛씨는 『수현이가 죽은 후 일본에 갔을 때 한국학생들이 분개하면서 수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었다고 전하더라』면서, 진단서 한 장을 보여 주었다.
 
  발급의원, 동경 기무라(木村)병원. 병명은 두부(頭部) 타박상·우견 쇄관절 탈구·흉부타박상 등 3개. 지난 10월17일 기무라 病院 소속 의사인 스즈키(鈴木)의사가 날인한 것으로 돼 있었으며 李씨가 약 한 달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소견이 적혀 있었다. 진단서를 보면 초진이 10월14일로 돼있어 그 즈음에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측이 될 뿐, 목격자 유무에 대해서도 辛씨는 아는 바가 없었다. 진단서는 학생들 말을 듣고 부모님이 李秀賢씨의 소지품을 뒤져 찾아낸 것이었다.
 
  『秀賢이가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 택시가 이를 들이받았으며 머리부분에 타박상과 오른쪽 어깨뼈가 튀어나오는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신호는 분명 횡단신호였다는데…』
 
  『학생들은 「사고가 나자 택시기사가 내리며 욕설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전해줬어요. 운전사는 秀賢이가 외국인, 특히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더욱 그랬다고 학생들이 말하더라구요』
 
  교통사고 당시 秀賢씨는 『집에 알려야되지 않겠냐』는 친구들의 말에 『어머니 걱정하신다』며 일체 연락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이 교통사고는 부모님들에게조차, 그의 죽음 이후에 알려진 것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의 죽음을 보다 잘 설명해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는 李군은 이미 사망했고, 남은 것은 한 장의 진단서뿐. 취재팀으로서는 막막하기만 했다. 다른 친구들에게 들어봐도 사고의 상황을 아는 사람은 없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전언뿐.
 
 
  『초록불인 것 확인하고 횡단』
 
  우선은 담당의사의 확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물어 물어 간신히 통화가 된 담당 의사의 전언은 의외로 너무도 간단한 것이었다.
 
  『진료기록을 보면 지난 10월14일 (토요일) 새벽 3시 반, 李秀賢씨가 아라카와 구 마치야에 있는 기무라 병원에 와서 응급 조치를 받았다. 그는 자세한 사고 상황은 말하지 않고 「자동차에 부딪혔다」 고만 말했다』
 
  기무라 병원의 위치는 李秀賢의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당직의사는 응급치료를 하고 다시 낮에 병원에 와서 진찰을 받으라고 말했다. 당직의사의 말은 「李秀賢씨가 당시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는 것.
 
  李秀賢씨는 10월17일 기무라 의원에 다시 와 정형외과 담당인 스즈키(鈴木) 의사로부터 문제의 진단서를 떼어갔다. 당시 李씨는 『보험 처리 관계로 제출을 하기 위해서』라고만 말했다고 의사는 전했다.
 
  『의사의 판단으로는 한 달 정도 정형외과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부상이었으며, 이후 5회 진찰과 치료를 했습니다. 11월29일 왔을 때 어깨의 움직임이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12월20일 다시 한번 더 오라고 했으나 병원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말과는 달리 李씨는 죽기 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 사고에 대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남겼다.
 
  이 사고에 대해 李씨로부터 직접 자세하게 들은 친구중 한 명인 고려대학교 무역학과 98학번 李레(24·서울 마포구 아현동)양의 증언은 전혀 다르다. 그녀는 사고 두 달쯤 후인 지난 1월4일 저녁 서울 종로에서 李씨와 단둘이 만났다.
 
  『제 생일인 10월에 왜 연락도 없었느냐고 핀잔을 주니까 실은 교통사고를 당해 경황이 없었다고 말하더군요. 직접 지갑에서 병원 진찰증을 꺼내 보여주기까지 했어요.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아직 합의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라며 마음이 복잡하다고 하더군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택시에 치었대요.
 
  분명히 초록불인 것을 확인하고 건넜는데 택시 운전사는 빨간불이었다고 우기면서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더래요. 한국은 횡단보도 위라면 무조건 보행자가 우선인데 일본은 그렇지도 않은가보다고 형(李秀賢)이 말하더군요. 결국 경찰서까지 가게 됐는데 경찰서에서 경찰들이 형이 외국인이라고 일본어를 못알아듣는 척으로 일관했대요.
 
  그래서 형이 내 일본어를 못알아 들으면 통역관을 부르라고 했지만… 통역관도 결국 일본인이잖아요. 형이 어느 정도 일본어를 알아듣긴 하는데 옆에 서서 가만히 들어보니, 통역관이 형이 한 한국말을 이상하게 통역해서 옮기더래요. 왜 그런 식으로 내 말을 일본어로 옮기느냐고 항의하자 일본어로는 이렇게밖에 번역이 안 된다면서 무시하더래요.
 
  경찰서 측에선 서로 빨간불일 때 건넌 것으로 쌍방 잘못으로 처리하고 합의를 보라고 종용했다는 거예요. 형이 그럼 난 대사관에 연락해 해결하겠다고 말하자 그럼 그러라고 하더래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좋을 대로 해라. 하지만 대사관에 연락해서 일을 해결하려면 적어도 석 달이 걸린다, 잘 알아서 해라」고 했대요. 치료비도 제대로 못 받고 지금까지 일이 잘 해결 안 돼 고민이라고 했어요』
 
  경찰서라면 분명히 기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언론기관을 통해 협조를 요청한 지 일주일. 이 기사를 쓰고 있는 2월10일 현재까지도 일본 경찰은 침묵하고 있다.
 
 
 
『만취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李씨와 아카몬카이 1학년 같은 반이자, 작년 3월부터 3만4000엔짜리 학교기숙사에서 李군과 석 달을 같이 룸메이트로 살았던 한 학생으로부터 중요한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난 12월 5일 일본에서 귀국한 朴珍禹(박진우 회사원·26)씨의 증언.
 
  『사고 당일인 10월14일 닛포리 시로끼야에서 형(李秀賢)과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신 것은 사실입니다. 이성 문제로 형에게 상담할 것이 있어 둘이 8시에 만났습니다. 나중에 밤 12시쯤 아카몬카이 한국학생회장인 홍일기가 와서 합류했습니다. 술은 둘이서 제일 싼 1300엔짜리 양주 한병 반(약 500ml)을 시켜 나눠 마셨습니다.
 
  홍일기는 거의 안 마셨고, 이 술은 마주앙과 비슷해 도수가 별로 높지 않았습니다. 새벽 3시쯤 헤어질 때 秀賢이 형에게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으나 秀賢이 형이 정신도 말짱하고 「집(우구이스타니역 부근)도 자전거로 5분 정도면 갈 거리니 그냥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만취상태였다고 했다」고 하자, 박진우는 「그건 의사 생각이고 절대 그렇지 않다」면서 펄쩍 뛰었다.
 
  朴씨는 사건 당일 새벽 5시쯤 갑작스런 전화를 받았다. 李씨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朴씨가 자전거를 타고 李씨 집에 가보니 李씨가 반깁스 상태(석고깁스가 아니라 뻣뻣한 천에 팔을 고정한 상태)였다.
 
  『택시에 치었는데 앞유리창에 부딪친 후 튕겨 날아 땅바닥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택시 앞유리가 깨졌는데 이때 앞유리에 어깨 끝부분이 부딪히면서 뼈가 옆쪽으로 밀려 결국 그 옆의 어깨뼈가 앞으로 튀어나오게 되었다고 秀賢이 형은 말했습니다. 의사는 계속 눌러주어야 나온 뼈가 제대로 들어간다고 했다고 하더군요. 또한 앞으로 생활하는 데 지장은 없겠지만 심한 운동은 금물이라고 했다고 합디다』
 
  朴씨는 또 관할 경찰서인 이리야(入谷) 경찰서에서 秀賢씨가 조사를 받았으며, 사고 이후 4~5차례 경찰서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李씨는 원래 보상금으로 아르바이트 못간 것, 교통비, 병원 치료비, 학교 수업비, 정신적 피해 보상비 등을 받아야 하지만 절반 정도로 합의를 보게 될 것 같다고 朴씨에게 말했다.
 
  아카몬카이 일본어 학교의 한 선생은 「어차피 유학생이라 곧 떠날 테니 가해자측에서 버틸 때까지 버티어 보려고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는 것이 朴씨의 전언이다. 아무튼 병원비 등 각종 비용의 보증은 李씨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인터넷 카페 「네트 스파이더 BIG-1」의 사장(일본인)이 담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12월5일 朴씨가 귀국 전에 李씨는 『사고 보상 문제 등이 제대로 해결 안 되니 여기 있는 것보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까지 朴씨에게 말했다.
 
 
  꼬리를 무는 의문들
 
  朴씨의 증언에 의해 사건의 윤곽이 대강 드러났지만, 朴씨의 증언으로 의문들은 더욱 증폭되게 된다.
 
  어깨뼈가 밖으로 나올 정도의 교통사고가 어떻게 진단 4주에 두부 타박상 등의 가벼운 진단만으로 나올 수 있었느냐는 것.
 
  영동 정형외과의 梁元贊(양원찬) 원장은 이같은 李씨의 사고에 대해 『쇄골(어깨뼈)골절의 증상이 의심되며, 깁스를 하고 최소한 6주 치료해야 하는 중상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梁원장은 『이 정도의 부상이라면, 고정 깁스를 한 기간만큼 별도의 물리 치료를 해야 하며, 최소한 2개월 이상 지나야 자전거를 다시 탈 수 있다』고 말했다.
 
  李씨가 음주를 한 상태라 하더라도, 횡단보도에서의 사고라면 1차 책임은 운전자에게 있는 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룰이며, 따라서 이같은 사고라면 응당 바로 보상되어야 했다. 일본의 경우 한국보다 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조그만 사고의 경우에는 경찰서에 가지 않고도 바로 보험회사간 합의로 보상이 되며,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일본에서 5년 동안 동경특파원으로 지내다, 타고 있던 택시 안에서 트럭에 의해 추돌 접촉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 B씨는 『외국인이지만 언론사의 주재원이어서였는지 바로 합의보고 치료비 일체와 소액의 보상금을 바로 지급받았다』며 이런 일은 『李씨가 오래 있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단기 유학생이라 얕잡아 본 것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개했다.
 
  가장 큰 의문은 李씨의 사망 이후, 그를 추도하는 양국의 뉴스 홍수 속에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본 경시청과 담당 경찰서인 이리야(入谷) 경찰서의 이상한 행동이다. 박씨의 증언에 나오듯, 다섯 차례나 경찰서에서 진술을 받았다면 그의 기록은 분명히 남겨져 있을 것임에도 기록 유무조차 확인해 주지 않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인 택시회사와 택시 운전사의 신원조차 확인해 주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런 꼬리를 무는 의문 가운데서도 확실한 것이 있다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李씨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성치도 못한 몸을 이끌고 지하철 선로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나간 일에 가정은 없지만, 혹 이 교통사고가 없었다면, 그는 그날 그 시각 신오쿠보역에 있었더라도, 평소의 만능 스포츠맨으로서 적어도 목숨을 잃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를 모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李秀賢씨를 아끼던 주변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지금까지 양국 언론에서 보도된 것과는 조금은 차원이 다른 의문을 오늘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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