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브랜드 밀리오레
회사가 망해도 브랜드(Brand·상표)는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다. 브랜드만 따로 사고 팔기도 해, 회사마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최근에 급속도로 알려진 브랜드 가운데 하나를 들라면 「밀리오레」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99년에 스포츠조선을 비롯한 4군데 스포츠신문이 모두 밀리오레를 히트상품으로 선정했고 문화일보는 밀리오레를 브랜드 파워 대상에, 캠퍼스저널은 21세기 소비 리더가 뽑은 브랜드로 선정했다.
밀리오레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제품이 아닌 한 상가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밀리오레가 너무 유명해져 사람들은 『동대문에 가자』는 말을 『밀리오레 가자』라고 말할 정도이다.
요즘 그 밀리오레가 동대문뿐만 아니라 서울 명동과 부산까지 진출했다. 이태리어로 「더 좋은(The Better)」이라는 뜻의 밀리오레(Migliore)를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사람, 柳宗煥(류종환·45) 사장을 탐험하기로 했다.
柳사장이 건축해서 개장시킨 商街(상가)는 「팀204」(現 동대문 밀리오레 밸리), 동대문 밀리오레, 명동 밀리오레, 부산 밀리오레 등 총 4군데. 현재 신축중인 대구·광주·수원 밀리오레는 내년중에 오픈 할 예정이다. 4개의 商街 가운데 팀204만 도매상가이고 나머지는 소매상가이다.
이 가운데 가게를 판, 즉 등기분양한 상가는 동대문 밀리오레 하나이고 나머지는 점포를 임대분양했다. 柳宗煥 사장은 등기분양한 동대문 밀리오레 상가의 근린시설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팀204는 도매상가 중 「빅 3」 안에 포함되고, 동대문 밀리오레는 그 명성대로 주변 소매 쇼핑몰을 리드하고 있으며, 명동 밀리오레는 IMF 이후 활기를 잃은 명동 패션가를 되살리고 있다. 2000년 9월에 문을 연 부산 밀리오레는 벌써 부산 지역 최고의 商街로 떠올랐다.
현재 네 군데 商街의 연간 매출액은 1조원에 이른다. 柳宗煥 사장은 현재 신축중인 대구, 광주, 수원 등 세 군데 商街가 개장하여 정상 궤도에 오르면 밀리오레 상가의 전체 연간 매출액은 2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밀리오레를 중심으로 한 동대문 상권을 연구한 단행본도 출간되었고 서울대학교에서 밀리오레를 연구한 박사가 두 명이나 배출되었다. 柳宗煥 사장은 밀리오레를 연구한 사람들이 자신을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200억원을 6년 만에 3000억원으로
그의 현재 재산은 얼마나 될까. 팀204 상가를 건축하기 전 남대문의 6평짜리 점포에서 니트의류 도매업을 했던 그의 당시 재산은 200억원이었다. 그에게 현재의 재산을 묻자 200억원이 15∼20배 가량 늘었을 것이라고 답하면서 재산이 아닌 회사 資産(자산)이라고 표현해 달라고 당부했다.
현재 그는 (주)밀레오레와 (주)성창F&D 등 두 회사의 대표다. (주)밀리오레는 연합물산을 인수한 후 상호를 변경한 것이며, 성창F&D의 前身(전신)은 성창니트이다. (주)성창F&D가 (주)밀리오레의 지분을 100% 갖고 있어 두 회사를 하나로 봐도 무방하다. F&D는 Fashion(의류사업) & Develop(상가 건설 및 개발)의 약자이다. 그는 현재 상가 운영관리와 개발사업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가를 지어서 상인들에게 임대한 뒤 관리를 철저히 하여 장사가 잘되는 상가로 만드는 것이다. 상가가 잘되면 건물의 가치가 올라가 매각 때 큰 수익을 올리게 된다. 또 상가가 잘되면 임대료 협상 때마다 임대료를 올려 받을 수 있다. 그는 상가를 임대한 뒤 장사가 잘되게 하기 위해 상인들에게 패션정보 제공, 상가 홍보, 상가 관리 등 철저한 운영관리를 하고 있다. 상가를 건축해 임대한 뒤 상인들의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상가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다.
현재 두 회사 직원은 500여 명이며 연간 그가 4개의 상가를 운영·관리하여 벌어들이는 순수익은 350억원이다. 최소 3000억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년 수백억원씩 벌어들이는 柳宗煥 사장. 그의 성공은 어떻게 이룩됐으며, 종자돈 200억원은 또 어떻게 마련했을까.
밀리오레 제국의 황제는 짐작과 달리 매우 조용했다. 시장에서 20년 넘게 잔뼈가 굵은 데다 강원도 출신이라는 얘기에 활달하고 의욕이 넘치는, 좀더 솔직히 표현하면 최소한 知的(지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의외로 그는 知的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나직한 음성과 논리적인 언변, 시종 진지한 표정이 그렇게 보이게 했다. 소리내어 크게 웃는 법이 없는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177㎝의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에서 얼핏 시장 상인의 모습이 엿보이는 정도였다.
그의 화법만큼은 현장에서 체득한 싱싱함이 느껴졌다. 상인 시절과 사업가로 변신한 지금의 수입 차이를 『도토리가 한 번 구르는 것과 호박이 한 바퀴 구르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식이었다.
그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활동적이기보다 사색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성공에 이른 중요한 단서로 「사색」을 꼽았다. 끊임없는 생각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늘 머리 속이 복잡할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한다는 그는 술을 마실 때도 생각하느라 도무지 취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체득한 산지식을 판단의 잣대로 삼는다는 그는 신문과 시사잡지를 비롯한 정기 간행물을 많이 읽는다고 했다.
재산이 3000억원이나 되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궁금해 하고 있을 때 柳宗煥 사장은 『요즘 모든 게 회의스럽다』고 말했다. 4년 前, 밀리오레 제국을 처음 건설한 직후부터 그는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고, 언론에 두들겨맞느라 진이 빠졌다고 했다. 이 시련이 불과 얼마 전에 끝났다고 그는 말했다.
『3년 반 동안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법정에서 1500문항에 답변하다 보면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죠. 지난 10월쯤 대부분의 문제가 일단락 되고 나를 고발했던 사람이 1심에서 무고죄로 실형을 받았는데 시원하기보다는 허탈했습니다』
그가 고초를 겪은 것은 성공에 따른 「유명세」인지도 모른다.
『그 일을 겪으면서 눈에 띄게 잘되었다가는 좋게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은 富者(부자)를 존경하고 신뢰감을 갖는 나라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돈을 많이 번 사람에게 호의적이지가 않습니다. 휴일도 없이 일해서 정당하게 돈을 벌어도 좋은 소리 못 듣는 게 현실이더군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이쯤에서 중단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더군요』
재래시장의 신화적 존재
그는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재래시장의 신화적 존재」이다. 家業(가업)을 돕다가 1980년부터 주도적으로 동대문 시장에서 의류 도매업을 시작한 이래 20년 만에 이룬 성공이다. 명동 밀리오레 쇼핑몰 상가운영위원회 柳承烈(류승렬) 이사는 柳宗煥 사장을 「시장 상인들의 우상」이라며 자신의 꿈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柳宗煥 사장은 재래시장 40년 사상 의류 분야 최고 매출액 행진을 계속했던,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가 옷과 인연을 맺은 것은 유년시절부터다. 부모님이 강원도 春川(춘천)에서 포목점과 함께 옷가게를 운영했는데 장남인 그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드나들며 부모님을 도왔다. 자가용에 가정부까지 둘 정도로 부유했던 집안이 갑자기 몰락한 것은 아버지가 가까운 친척에게 당좌수표를 내주었다가 떼인 데다 이듬해 똑같은 일을 또 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등학교 3학년 때 온 가족이 빈손으로 서울로 이주했다. 서울의 한 工高(공고)에 편입했지만 마음 붙일 곳이 없어 싸움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 유도와 합기도를 익힌 데다 태권도 공인 3단으로 중학교 때 강원도 대표였던 그는 싸움만큼은 자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마음을 잡지 못했던 그는 어느 날 술을 먹고 서울 동대문구 한 버스회사 차고지에서 잠이 들었다. 물세례를 받고 온몸이 푹 젖은 채 한밤중에 자기가 살던 제기동 뚝방까지 걸어가면서 새롭게 태어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스무 살, 이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침 부모님이 50평 정도되는 니트(knit) 공장을 차려 「성창니트」라는 간판을 붙이고 일을 시작했다.
『저는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앞날을 개척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의지보다는 환경에 따라 움직여진다고 봅니다. 제가 부모님을 따라 자연스럽게 장사꾼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죠. 단,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는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1974년 부모님을 돕기 시작하면서부터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한번 시작하면 무섭게 몰입하는 것이 그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이다. 그 시절 어머니는 혹독한 조련사 역할을 했는데 밤새 일한 후 아침 6시에 솜처럼 피곤해서 잠이 들어도 아침 8시면 반드시 그를 깨웠다. 原絲(원사)로 스웨터 등의 니트 의류를 만들어 팔았는데 고용한 일꾼이 30여 명 정도 됐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그의 가족들은 거의 날밤을 새며 니트 공장에서 일했다.
꼬박 4년간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없는 그는 軍에 입대해서 오히려 편하게 잘 수 있었다. 軍에서 제대했을 때 어머니가 남자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면서 그를 학원으로 밀어넣었다.
『저녁마다 학원을 다녀 3년 동안 전기 배관 용접 등 기술자격증을 7개나 땄어요. 어느 한구석 기댈 데도 없으니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앙고라 스웨터 하루 1억원어치 팔아
제대를 하고 학원에 다니던 1980년부터 그는 연로한 부모님 대신 본격적으로 성창니트를 이끌어 갔다. 신평화시장에 점포를 얻어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을 직접 팔았다. 공장을 차리고 점포를 얻느라 진 빚을 갚고 안정이 되어가던 1982년 겨울, 하청공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맡겨두었던 원단이 모두 타버렸다. 당시 돈으로 6000만원쯤 손해를 보고 또다시 빚을 지게 되었다.
다시 추스리고 공장을 가동하던 중 그에게 중요한 전환기가 왔다. 1985년에 앙고라를 소재로 한 스웨터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 일이 그에게 엄청난 富(부)를 안겨다 주었다. 당시 스웨터는 구슬이나 스팡클로 변화를 주는 게 디자인의 전부였다. 너무 단조롭다는 생각을 한 그는 외국 잡지에서 힌트를 얻어 스웨터에 직접 날염(捺染)을 해보기로 했다. 날염공장을 찾아가 기술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끝에 스웨터에 여러 가지 무늬를 찍는 데 성공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미 염색된 실로 짠 옷과 달리 만들어진 상태에서 날염을 한 스웨터는 독특한 멋을 냈던 것이다.
『하루에 2000만원에서 3000만원어치를 팔았어요. 1985년 한 해 동안 10억원을 벌었습니다. 빚을 다 갚고 이듬해 제기동 뚝방을 벗어나 잠실로 이사했죠. 한 3년 정도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하청공장 사장이 물건을 뒤로 빼돌리는 바람에 돈을 거의 날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시장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다 당해 봤어요. 그런 것이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돼요』
그는 더 이상 동대문에서 장사하고 싶지 않아 1987년에 남대문으로 옮겼다. 시티보이 商街가 있는 빌딩의 6평짜리 점포를 6억원에 매입했다. 장사가 잘됐다. 하루에 적게는 5000만원에서 많게는 1억3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때 하청공장 30군데에서 1000여 명이 우리 옷을 만들었어요. 저녁 7시30분부터 이튿날 새벽3시까지 장사했는데 전국에서 소매 상인이 몰려와 서로 사겠다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매일 옷이 몇 장씩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상인들이 벌떼같이 몰려드는 바람에 물건을 실은 봉고차가 옆으로 넘어진 일까지 있었어요. 질서를 잡기 위해서 욕도 하고 때로는 주먹질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선착순으로 번호표를 나눠준 뒤 주문을 받는 아이디어를 냈죠. 줄 세워놓고 큰소리 치면서 장사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재래시장 물건을 수출
단지 날염기술 때문에 옷이 날개 돋친 듯 팔린 것은 아니다. 디자인과 原緞(원단), 원사 등 素材(소재)가 다른 제품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素材를 구하기 위해 방적 공장에 의뢰해 직접 만들기도 하고 이태리까지 가서 구해오기도 했다. 또 자주 외국에 나가서 유행 디자인을 살펴보고 패션 서적을 통해 의류 디자인을 연구했다.
『1990년대 초에 유명 브랜드 가운데서도 이태리 소재로 옷을 만드는 곳은 별로 없었어요. 저는 시장 옷을 이태리에서 구한 소재로 만들었던 거죠』
좋은 소재 고르는 눈과 판매가 잘될 디자인을 구상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옷을 보면서 그런 눈이 저절로 생긴 것 같습니다. 특별히 디자인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만드는 옷마다 인기가 있었어요. 그건 素材 때문이라고 봐요. 소재가 좋아야 좋은 옷이 나옵니다. 이태리가 패션 대국이 된 것은 질 좋고 다양한 소재 덕분입니다』
그는 재래시장 물건을 외국에 수출한 1세대 상인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부터 일본과 대만, 홍콩, 러시아, 남미 등지에서 온 보따리 상인들에게 스웨터를 판매했는데 1993년까지 수백만 장을 팔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요즘도 외국 보따리 상인들이 많이 오지만 그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외국 보따리 상인들이 샘플을 갖고 와서 주문하는 것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가 1억원어치씩 팔 때 2위 상인은 5000만원 정도 팔았다고 한다. 재래시장에는 하루에 몇천만원씩 파는 사람이 몇 사람은 꼭 있다고 한다. 당시 시장 마진이 30∼40% 정도였다니 하루에 3000만원 정도의 수익을 낸 셈이다. 그렇게 해서 1993년까지 200억원을 모았다.
柳宗煥 사장은 당시 컴퓨터를 이용해 무늬를 인쇄하는 편물기계도 도입했다.
『제가 니트 분야를 10년은 발전시켰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만든 날염 스웨터를 수백 명이 카피를 했을 겁니다. 그때 특허를 냈어야 하는데 그걸 몰랐어요. 지금도 시장에서 그 스웨터가 팔리고 있어요』
도매상인에서 상가 개발자로
그는 시장에서 장사할 때 반드시 지킨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최고의 소재를 사용한다는 것과 반드시 현금 거래를 한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수표 때문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 자신이 시장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았다.
1990년 초반부터 국내 소비자들이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성창니트라는 브랜드로 전국 체인점을 내는 것도 생각해 봤으나 자신의 제품은 재래시장에 맞다고 판단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발을 떼지 않는 것, 그의 성공 수칙 가운데 하나이다.
하루에 몇천만원씩 수익을 내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는 1993년에 전혀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안면이 전혀 없는 A씨가 『상가를 지어 분양사업을 하려는데 도와달라』고 요청해 온 것이다. 당시 재래시장에서 「柳宗煥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시장 상인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다. 그의 유명세를 이용하기 위해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생소한 분야인 데다 워낙 장사가 잘되던 때라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거듭되는 권유에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中低價(중저가) 브랜드가 프랜차이즈업(특약대리점)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재래시장의 상황이 나빠지고 있을 때였다. 상인들과 독립 브랜드를 공유해 유통업을 하면 모두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심 끝에 참여를 결정했다.
『제가 나서서 이탈리아 브랜드도 수입해 오고 상인들도 만나고 해서 넉 달 만에 상가 분양을 끝냈어요. 商街 분양이 순조롭게 끝나자 A씨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분양받은 사람 가운데 일부가 분양권을 팔았는데, A씨가 자신의 허락 없이 판 분양권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고는 제가 분양권을 매매하면서 권리금을 챙겼다고 트집을 잡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을 통해 나를 부동산 브로커로 매도했습니다』
A씨로부터 시달림을 당하던 柳사장은 그를 무고죄로 고소했다. 당시 A씨는 모 정당의 당직자였다. 3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그는 명예훼손 혐의로 실형을 살았다. 법정 싸움을 하는 동안 柳사장은 A씨에 대한 복수심과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직접 분양업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한 분양업으로 그는 밀리오레 제국의 황제가 된 것이다.
A씨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6개월 빠른 1996년 6월에 도매상가인 팀204를 완공했다. 상인을 유치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재래시장의 최우수 상인이었던 柳宗煥 사장이 도매상가를 개설하자 「우수 商人」과 함께 여러 상인들이 입주했다.
재래시장에는 약 2만여 명의 의류 상인이 있는데 그 가운데 10% 정도가 우수 상인이라고 한다. 우수 상인들은 뛰어난 감각으로 직접 옷을 만들고, 그 옷으로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밀리오레 개장
1990년대 중반, 재래시장은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았다. 中低價 브랜드의 프랜차이즈가 번성하고 아울렛(Outlet·할인점)에서는 유명 브랜드 제품을 헐값에 판매했다. 재래시장을 찾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자 그는 재래시장도 변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수 상인들을 규합해 옷을 만들어 중간단계 없이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소매상가를 만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존 서울 동대문 의류 도매상가 건너편에 소매 쇼핑몰을 짓는다고 하자 모두들 안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백화점처럼 쾌적한 공간에서 좋은 옷을 싼 가격에 공급하면 안 될 리 만무하다고 판단한 그는 과감히 땅을 매입했다. 그 땅에서 장사를 하던 450여 상가를 내보내는 일만 해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6개월간의 악전고투 끝에 기존 상인들과 협상을 끝내고 1996년 2월에 공사를 시작했다. 1998년 8월, 찬바람이 쌩쌩 불던 최악의 경제상황 속에서 동대문 밀리오레가 개장했다.
『밀리오레 상가를 개점할 때 된다고 믿는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었어요. 개점할 당시 거평이 부도 나는 바람에 더 어려웠죠. 2000여 점포 가운데 600개 정도만 들어선 상태에서 개장을 했습니다. 개장하기 며칠 前에 유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어요. 내가 시장에서 쌓은 20년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착잡하기 그지없었죠』
당시 그는 은행에서 꽤 많은 돈을 빌렸다. 애초에 동대문 밀리오레의 2000여개 점포는 하나씩 소유권을 완전히 이전하는 등기분양을 했었다. 분양받은 점포주들은 가게를 빌려 장사하겠다는 상인들이 없자 10% 위약금을 물고 해약을 하려는 심산으로 중도금과 잔금을 차일피일 미루었던 것이다. 그런 데다 대대적인 개장 기념 준비와 홍보비, 광고비에 돈을 쏟아 부었다. 관건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었다.
그는 10대와 20대를 소비층으로 잡고 매장 분위기에서부터 상가 앞거리까지 세심한 공을 들였다. 매일 1000명에게 1만원권 상품권을 선착순으로 나눠주었으며 상가 앞 야외무대에서 다양한 이벤트 행사를 열었다.
동대문 밀리오레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개장하자마자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단숨에 10만여 명이 밀리오레를 찾았다. 경제위기로 비싼 옷보다 실속 있는 옷을 찾던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개장한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비어 있던 1500여 점포가 꽉 차는 이변이 일어났다. 점포주들은 미루어 왔던 분양대금 600억원을 일시에 완납했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나날이 명성이 높아져 서울의 명소로 자리잡고, 외국인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 됐다. 柳宗煥 사장의 독특한 상가 관리법과 밀리오레의 성공이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밀리오레는 철저히 10대와 20대를 대상으로 물건을 만들고 그들을 겨냥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밀리오레는 가격이 싸면서도 기존의 도매상가와 달리 옷을 입어볼 수 있고 환불과 교환이 가능하다. 또 재래시장에서 사용되지 않던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밀리오레는 재래시장이 아닌 쇼핑타운이라는 개념에서 상가규칙을 정하고 상인들에게 철저히 지키게 했다. 상인들은 개장 20분 前에 점포에 나와 영업에 대비해야 하고 영업시간에 책을 읽거나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 매장에서 어떤 도박행위도 해서는 안 되며 손님과 다투거나 불친절해서도 안 된다. 술에 취해 고객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동료 상인과 다투어도 안 된다. 3회 이상 이런 사항이 적발되면 퇴출된다. 가짜 상표를 부착하거나 이중가격, 상품의 질이 떨어져 매출이 극히 부진한 상인, 지정된 품목이 아닌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은 퇴출 대상이다. 상인 대표 30여 명이 수시로 매장을 돌면서 현장을 체크하는 암행반 제도를 만들었다. 이런 규칙 때문에 첫해에 100여 개의 점포가 퇴출되었다』
3년 6개월 동안 조사받다
한편에서는 『밀리오레가 점포주들의 권익을 무시한다. 상인들을 마구 쫓아내는 등 횡포가 심하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柳宗煥 사장은 하나의 상가를 건축하는 중간에 다음 공사를 착공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1994년 11월에 팀204 착공을 시작으로 6년여 동안 4개의 대형 쇼핑몰을 건축했다. 이들 상가를 완공해 분양 업무와 상가 운영관리를 하면서 3개의 상가를 더 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3년 6개월을 각종 고발에 시달리며 관계당국에 불려 다니고 법원에 드나들어야 했다. 팀 204상가에 지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의 일부가 柳사장에게 불만을 품고 고발을 하여 1997년 10월부터 수사 당국에 불려 다녔던 것이다.
『팀204 공사를 하면서 탈세를 위해 국세청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건축 인허가를 위해 구청과 서울시에 뇌물을 주었다. 검찰과 경찰에 비호세력이 있다.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완전히 소설을 써서 투서했더군요. 서울지검 특수부와 大檢(대검) 중수부에서 조사받으면서 국세청 세무조사까지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 동대문 밀리오레가 개장을 한 것이다. 동대문 밀리오레의 경우 임대가 잘 안 되자 점포주들이 2년간 임대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 1998년에는 임대료 없이 관리비만 받고 건물을 빌려주는 곳이 있을 정도로 임대가 잘 안 되었다.
柳宗煥 사장은 상인들을 모집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대기업에서 정리해고된 패션 디자이너들과 유학을 준비하다가 환율 때문에 포기한 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마땅한 일거리를 찾지 못해 애태우고 있었다. 柳宗煥 사장은 신선한 감각을 가진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해 연말까지 하루에 3만원씩 稅를 내는 임대제도를 신설하는 등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그렇게 해서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1년만에 10억원 이상을 손에 쥔 스타 상인들이 속속 배출되어 그들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동대문 키즈(kids)」라는 이름을 얻은 새로운 우수 상인들이 대거 배출되었고 일부는 독립하여 전국에 의류체인점을 개설하기도 했다.
장사가 잘되는 점포는 가치가 올라가게 마련이다. 동대문 밀리오레 상가가 폭발적으로 장사가 잘되자 밀리오레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새로운 상인들이 줄을 섰다. 이들은 점포주들에게 권리금과 임대료를 많이 줄 테니 지금 장사하고 있는 상인들을 내보내 줄 것을 부탁했다. 점포주란 동대문 밀리오레가 최초 분양될 때 가게를 산 사람들이다. 점포주들은 柳사장에게 2년간 임대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자기 점포이지만 상인들을 마음대로 교체할 수 없었다. 점포주들은 柳사장에게 2년간 임대권한을 1년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했다.
柳사장은 기존 상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고, 상인이 바뀌면 상가 발전이 힘들어진다는 이유로 점포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계속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조사받는 동안 자료를 철저히 준비해서 제출했지요. 조직폭력배 두목이다, 마약을 한다는 투서도 들어와 그 점도 조사받았습니다. 여자 관련 소문만 빼고 나쁜 얘기는 다 들었습니다』
그는 조사를 받으면서 관청에서 「생사람은 잡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다소 안심이 됐다. 다양한 조사를 받은 뒤 그가 들은 마지막 말은 『시간 빼앗아 미안하다. 의심되는 바가 없으니 사업에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점포주들과 끝없는 싸움
당시 明洞(명동) 밀레오레를 한창 건축하면서 지방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만약 강단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사업을 계속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조사를 계속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받은 고통도 고통이지만 국가기관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거 아닙니까.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투서를 보내는 사람은 형사처벌해야 합니다. 투서가 난무하는 것은 무고죄 성립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재래시장 최초로 상인 대표들로 구성된 상가운영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柳사장의 아이디어였다. 柳宗煥 사장은 늘 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상가 발전을 논의했다.
상가운영위원회는 점포주들의 항의가 계속되자 토의 끝에 2년 후 점포주들이 상인을 교체할 수 있도록 합의하고 상인들을 설득했다. 계속 점포주들의 불만이 언론에 기사화되면서 商街 이미지가 나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柳宗煥 사장은 점포주와 상가운영위원회가 토의할 때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다. 점포주에게 분양을 했고 또 商街를 살리기 위해 상인들과 함께 했던 사람으로서 드러내 놓고 어느 편도 들 수 없었던 것이다.
『기존 상인들이 매달 10만∼25만원씩 2년간 거의 1000만원의 돈을 내서 商街를 홍보했습니다. 점포 인테리어를 하는 데도 200만∼300만원 정도 들었지요. 결국 오늘의 밀리오레를 만든 것은 기존 상인들입니다. 적정선에서 임대료를 올리고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이 점포주들에게 훨씬 이득일 텐데 많은 점포주들이 임대료를 많이 내겠다는 새로운 상인을 선택했죠. 점포 가격이 서너 배나 올랐는데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던 겁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의외로 적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2000년 8월28일 개장 2주년 때 밀리오레를 활성화시킨 상인의 약 3분의 1이 떠났다.
『우수한 상인들이 많이 떠났지요. 2년 동안 워낙 장사가 잘되었기 때문에 모두들 돈은 벌었지만 애정을 갖고 키운 상가를 떠날 때 마음이 좋진 않았겠죠. 점포주들이 상가를 살리기 위해 품목 배정에서부터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권리금과 임대료를 많이 내는 상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소비자는 냉정하고 정확하다
상인들이 물갈이된 동대문 밀리오레는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이상 징후를 나타냈다. 새로 들어온 일부 상인들이 밀리오레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상가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 점포주가 직접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들은 『내 가게에 내가 지각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며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최고의 商街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략이 필요한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각 층의 상품 구성과 상품 구색」, 「고객들에게 최고의 상품으로 최상의 서비스를 하는 일」이라고 한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2년 만에 탄탄하게 유지되던 두 가지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눈은 냉정하고 정확합니다. 밀리오레가 변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챈 소비자들이 밀리오레를 외면하기 시작했지요.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번성했어도 한 달 만에 가라앉을 수 있는 데가 바로 시장입니다. 남대문 상가가 좋은 예지요. 동대문 밀리오레가 침체되자 주변 상가들도 동반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한번 다녀가는 사람들이니 여전히 찾고 있지만 국내 소비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더 좋은 곳을 찾아가죠』
두 달쯤 지나면서 점포주들이 위기를 실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1월1일에 상인측과 점포주들이 함께 관리단 운영협의회라는 것을 구성했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성창F&D가 운영하되 빌딩관리는 관리단에서 지정해 준 회사에서 대행하고 있다.
겨울철이 되자 동대문 밀리오레 商街 衣類(의류) 코너의 50%가 니트 의류를 파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예전 같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운영위원회에서 철저히 품목 지정을 해서 구색을 맞추기 때문이다. 품목을 바꾸고 싶어하는 상인이 있을 경우 層(층)을 옮겨서 장사하게 할지언정 商街의 품목 구성비율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그런 노력이 밀리오레에 가면 다양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을 낳았던 것이다.
『니트의류 등 편중된 상품만 파는 상가를 영리한 소비자들이 찾을 리 없지요. 벌써부터 장사가 안 되는 점포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300만원어치 파는 상인도 있지만 하루에 한두 개밖에 못 파는 상인들도 있습니다』
장사가 안 되면 바로 관리비 연체자가 생기고 곧이어 임대료 인하 요구가 터져 나온다. 거기서 더 나빠지면 상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점포의 가격이 하락하고 그 피해는 결국 점포주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시장의 生理(생리)다.
柳宗煥 사장은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말하면서도 미련이 남는 듯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그가 만든 브랜드에다 철저한 운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한 상가이기 때문에 그만큼 아쉬움이 큰 것 같았다. 벌써부터 『다시 柳사장이 강력하게 이끌어 달라. 상가를 살려달라』는 요청이 오고 있지만 아직 더 지켜볼 작정이라고 한다. 개인의 욕심을 앞세우면 전체가 희생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만 재정비할 수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장사꾼은 멀리 내다봐야 한다
柳宗煥 사장이 투서로 인해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시작하던 1997년 10월, 明洞 밀리오레가 착공됐다. 그는 명동 밀리오레를 구상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동대문은 재래시장 이미지가 강해서 패션 1번지인 명동에서 밀리오레를 새롭게 인식시키기 위해 진출하였죠』
그는 상가 부지를 물색할 때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한다. 「유동인구가 많을 것, 전철과 연결되어 있을 것, 고객유입이 원활한 곳」. 이 세 가지만 맞으면 설사 商街 개발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건물을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고 매각도 쉽다고 한다.
명동 밀리오레는 동대문 밀리오레의 분양대금이 잘 들어오지 않아 한때 6개월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답답했죠. 괴로울 때는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면서 잊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데다 친인척도 별로 없습니다. 저는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어디 하나 기댈 데가 없어요. 언론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혈연 지연 학연에 얽매여 있다는 비판을 할 때면 솔직히 그런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의논 대상이 전혀 없었어요.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항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신중했다고 전한다. 모든 판단의 바로미터는 시장에서 터득한 산 경험이다. 그는 스스로를 사업가가 아닌 「장사꾼」이라고 부른다.
『장사꾼과 장사치는 다릅니다. 눈앞의 이익을 따지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은 장사치이지만 장사꾼은 멀리 내다볼 줄 알고, 다른 사람 생각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장사꾼은 능력과 함께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없어야지요』
동대문 밀리오레 개장 이후 분양대금이 수월하게 들어와 다행히 명동 밀리오레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명동 밀리오레가 완공된 후 그를 잘 알고 있는 우수 상인들이 명동으로 몰려들었다. 명동에서도 상가운영위원회를 조직했다. 상인들은 이미 柳사장이 동대문에서 어떤 철칙을 세워 상가를 운영했고, 상가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언제든지 퇴출된다는 것, 또 엄격한 규칙들이 상가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동 밀리오레는 임대 분양만 실시했다. 회사가 점포주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利點(이점)이 있다. 2000년 6월에 문을 열었는데 단 4개월 만에 숙녀복 매출이 동대문 밀리오레를 앞섰다. 柳사장은 몇 달 후면 지금보다 두 배는 잘될 거라고 말했다.
우수 상인이 시장을 끌어간다
IMF 이전에 명동의 골목골목은 국내 유명 브랜드가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시장 제품을 파는 상가들로 채워져 있다. 간혹 대기업의 브랜드 상가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도이다. 柳사장은 재벌그룹 계열회사가 아닌 의류업체는 다 망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말했다.
『유행은 아무도 예측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다음 계절의 상품을 3∼6개월 전에 준비하는데 소비자의 유행 감각에 맞추지 못하면 그대로 망하는 겁니다. 전자제품은 고유의 기능이 있으니 10∼20% 할인해 주면 판매가 되지만 옷은 그렇지 않습니다』
패션회사가 망하는 이유를 柳사장은 이렇게 분석했다.
『규모가 커져 하청업체에 제품 생산을 일임할 때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패션업체는 본사에서 관리할 수 있는 만큼만 키워야 합니다. 한국인들은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에 1∼2등 하지 않으면 다 망합니다. 덩치가 커지면 기민하게 움직일 수가 없죠. 우리나라는 패션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를 예측하기가 힘듭니다. 소비자의 욕구를 따라가면서 맞추어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기존의 브랜드에 쉽게 식상하고 새로운 브랜드를 찾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柳宗煥 사장은 밀리오레가 변화무쌍한 소비자의 욕구를 가장 잘 맞출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요즘은 브랜드마다 初度(초도) 제품을 걸어서 반응이 좋지 않으면 바로 다른 제품으로 바꾼다고 한다.
밀리오레의 경우 상인들이 대부분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심리를 알아보는 스팟(spot)상품을 수시로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팔리는 제품만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柳사장은 요즘 젊은이들이 유행을 따르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한다고 일러주었다.
柳宗煥 사장은 상가 부지를 물색할 때 그 지역 소비자의 특성 분석을 비롯한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한다. 명동 상가를 짓기 전에 시장 조사를 했을 때 동대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상가를 개장하자 동대문과 명동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동대문은 마음먹고 쇼핑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명동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 5만원 미만의 돈을 갖고 다닌다는 것이다. 명동에 오는 학생들은 모범생 스타일이 많다고 한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학생들이 몰려와 별별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화장실의 전구가 노상 없어지는 바람에 촌스러운 백열등으로 교체해야 했고 화장지도 수시로 없어진다.
상인 200명 퇴출시켜
明洞의 영업시간은 새벽 3시까지다. 밤 10시면 주변 상가들이 撤市(철시)하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시간이 점점 연장되고 있다. 처음에 밤 10시면 끊어지던 손님이 요즘은 새벽 1시까지 이어진다. 명동은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밤 11시 이후 100% 무료 주차를 허용하는 등 고객 서비스를 더욱 확대했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개장하자마자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明洞은 차분하게 고객이 늘어나는 중이다. 동대문에서 문 열자마자 「대박」을 체험했던 상인들은 명동에 와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柳宗煥 사장의 운영방침은 入店(입점)한 상인들이 최고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최고의 상가가 된다고 해서 柳宗煥 사장의 수익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상가가 잘되면 임대료 협상 때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장사가 잘되어도 임대료 인상폭은 한 자릿수를 넘기지 않을 계획이라고 한다.
도매점포를 운영할 때 매일 1억원의 매출을 올렸던 그는 밀리오레 상인들이 하루에 몇백만원, 혹은 1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언제 부자될지 걱정이다』고 말한다. 그 정도면 엄청난 수익이라는 것을 그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노력하면 하루에 몇천만원에서 1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곳이 시장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명동 밀리오레가 개장한 지 4개월째인 지난 10월에 200여 명의 상인이 퇴출되었다. 상인들 가운데는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영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곳에서 처리 못한 재고품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소비자들의 욕구를 파악해 새로운 물건을 계속 만들어도 성공할까 말까 한 판국에 재고품을 파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선 수익을 올리려다 보면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금방 매출에서 차이가 났지요. 함께 출발한 상인들이지만 과감히 퇴출시켰습니다. 그 여파로 얼마 동안 장사가 잘 안 됐어요』
그는 한 달에 열흘 정도는 지방에서 지낸다. 부산 밀리오레 매장도 둘러봐야 하고 현재 공사중인 세 군데를 둘러봐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 초부터 내내 모 신문에 밀리오레에 관한 좋지 않은 기사가 보도됐다. 그런 기사가 나자 처음에 부산 밀리오레의 분양이 순조롭지 못했다. 그는 보도를 한 신문사를 검찰에 고발하는 등 강경하게 대처했다.
2000년 9월 부산 밀리오레가 문을 열자 全 점포가 꽉 찼다. 그를 잘 아는 서울의 우수 상인들도 부산 밀리오레에 많이 동참했다. 柳宗煥 사장이 개발한 네 군데 상가의 총 점포수는 모두 6000여 개이다. 밀리오레 상인 가운데 300여 명은 네 곳 모두에서 장사를 할 정도로 柳사장을 신임하고 있다.
『부산은 동대문이나 명동과는 분위기가 또 다릅니다. 그러니 그쪽 상권을 개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상가를 발전시키려면 그곳에 가장 알맞은 운영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부산 밀리오레는 가족단위로 찾아옵니다. 당연히 다양한 연령층의 옷을 준비해야지요. 부산만 해도 아직 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활성화되지 못해 용돈을 부모님에게 타서 쓰는 경우가 많아요. 학생들이 옷을 고르면 부모들이 돈을 지불합니다』
부산 밀리오레는 불과 두 달 만에 부산에서 최고의 상가로 자리잡았다.
유사 상가 40여 개 생겨
날염 스웨터로 돌풍을 일으켰던 그는 밀리오레라는 새로운 형태의 패션몰을 선보이며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저가 브랜드에 타격을 입히면서 백화점 층별 구성을 바꾼 점이라고 한다.
『중저가 의류를 사려고 백화점에 갈 필요가 없어졌지요. 밀리오레에 오면 싸고 좋은 제품이 많으니 구태여 브랜드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거지요. 외국의 중저가 의류 할인점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동대문의 위세에 밀려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브랜드 선호 경향도 바꾸었습니다. 백화점에 뒤지지 않는 다양한 제품을 유행에 맞춰 싼값에 구입할 수 있으니 브랜드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거지요』
백화점은 명품을 비롯한 고가 제품, 중저가는 동대문으로 쇼핑 선호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전국에 밀리오레와 유사한 상가가 40여 개나 생겼다. 동대문의 또다른 소매상가들도 애초에 도매상가로 출발했다가 밀리오레의 성공에 힘입어 소매로 전환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柳宗煥 사장은 동대문 밀리오레를 인근의 상가와 비교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말한다. 명동 밀리오레 쇼핑몰 운영이사회 柳承烈 이사는 柳宗煥 사장의 성공 비결을 「우수 상인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분석했다.
제일평화시장에서 보세의류점을 경영했으며 의류업체 TBJ 기획실장을 지낸 바 있는 柳이사는 현재 밀리오레에 4개의 상가를 보유하고 있다.
『옷을 잘 만들어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나도 열심히 배워서 나중에 상가 개발을 하고 싶습니다. 柳사장님은 거의 초인이에요. 하루도 쉬는 날이 없고 매사에 열정적입니다. 옥석을 가려 취할 것만 취하고 원칙이 확실한 점,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것이 성공 요인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즉각 회의를 소집하고 밤 12시에도 전화를 걸어 신속히 해결합니다. 柳사장님이 단지 사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상인들이 따르는 건 아닙니다. 애정으로 아랫사람을 챙기기 때문에 상인들이 따르는 거죠』
당국의 조사를 받을 때도 상인들은 柳사장을 믿었다고 한다.
『사장님이 시장 상인 출신이기 때문에 상인들의 애환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죠. 점포주보다는 弱者(약자)인 세입자들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었던 겁니다. 柳사장님은 앞으로 우수 상인을 키우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죠. 또 상가 개발 사업 전문가들도 키우고 있어요. 저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柳宗煥 사장이 사회 환원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상인들이 그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각 쇼핑몰마다 공연장을 만들어 고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일러주었다. 또 부산지역 全 고등학교에서 장학생을 1명씩 선발해 장학금을 주고 있다고 한다. 상가 개발이 완료되면 장학사업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 상인들과 회사가 힘을 합쳐 명절 때마다 불우시설에 옷을 전달하고 있다.
柳宗煥 사장은 직원들에게 하도급 업체 사람들에게 술을 얻어먹지 말라고 지시했다. 대신 술을 사주면서 일을 제대로 시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柳道源(류도원) 홍보팀장은 柳宗煥 사장을 이렇게 말했다.
『치밀하고 빨라서 직원들이 따라가기 힘듭니다. 2∼3년 전 일을 수치까지 기억할 정도입니다. 머리가 좋은 점이 성공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라고 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망설이고 있을 때 빨리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남녀 차별이 없고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어요. 급료는 대기업 중위권 정도입니다』
휴식도 취미도 없이 일만 한다
柳宗煥 사장도 밀리오레의 성공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수 상인의 유입을 들었다. 그는 적극적인 사람보다는 묵묵히 일하는 사람에게 더욱 애정이 간다고 한다. 행여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이 있더라도 잘못을 인정하면 관대하지만 잘못하고도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는다.
상가운영위원회와는 수시로 회의를 하는데 柳사장은 회원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자신이 잘못 판단한 일에 대해서는 즉각 시인하고 고친다. 회사 직원들은 일요일에, 상가는 월요일에 쉬기 때문에 그는 하루도 쉴 수가 없다. 명절에도 쉬지 않는 그는 작년 설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바로 사무실에 출근했다. 1984년에 결혼해 두 자녀를 두고 있는데 16년 동안 가족과 휴가를 딱 세 번 갔다.
그 흔한 골프도 안 친다. 1989년에 골프장에 다섯 번 나갔다가 시간이 너무 아까워 골프채를 친구에게 넘겨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유행 시장을 쫓아가려면 잠자는 시간도 아껴야 할 판이라고 말한다.
그는 시장에서 터득한 상인정신을 이렇게 정의했다.
『혼을 불어넣어 물건을 만들고 고객이 오기 전에 정성껏 상품을 갖춰놓아야 합니다. 물건을 팔 때도 그야말로 혼신을 다해야 합니다』
그는 지금의 성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제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습니다. 집을 한 번 샀다가 팔고 다시 산 것 외에 부동산을 산 적이 없습니다. 가난할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는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어떤 사업이든 펼칠 수 있다는 점이죠. 앞으로도 열심히 일만 할 겁니다. 일 외에는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아마 상가 개발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지금도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 겁니다』
휴일도 없이 일하는 그에게 주변에서는 있는 돈 좀 쓰면서 즐기라고 권한다.
『돈이 많으면 여자, 도박, 술에 빠지기 쉽다고 하더군요. 저는 여자와 도박에는 관심이 없어요. 대신 매일 저녁 술을 마시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돈은 있는데 할 일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사람은 향락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 저는 아직 젊고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는 가끔 유통이나 패션 분야 사람들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는다. 강의 때마다 빠지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
『패션 쪽 학생들을 만나면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환상을 갖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디자이너는 고급 업종이 아니라 열심히 뛰어야 하는 고달픈 직종이라는 걸 강조하죠. 유통 쪽은 장기 프로젝트를 세우지 말라고 얘기하죠. 5년, 10년 앞의 계획을 세우는 대신 2∼3년, 혹은 1년 앞을 내다보고 효율적으로 대처하라고 권하죠』
패션은 회귀한다
柳宗煥 사장은 요즘 상가운영위원회와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상가운영 기법을 논의하고 있다.
『밀리오레 유통방식은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2년간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죠. 발전시킬 게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태리보다 유행이 3∼5년 정도 늦습니다. 그쪽이 그때 어떠했나 살펴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패션 쪽은 너무 앞만 보고 가도 안 됩니다. 패션은 회귀본능이 있기 때문에 과거도 돌아봐야 합니다.
新(신)유통개념을 다시 만드는 게 요즘 숙제입니다. 각 상가마다 현실에 맞는 운영법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2년 前 동대문 밀리오레를 오픈 할 때 야외무대에서 이벤트를 하면 사람이 엄청나게 몰렸어요. 요즘은 인기 연예인이 와도 잘 모이지 않습니다. 가수의 수명이 3개월이라고 하잖아요. 세상은 빨리 변하고 있어요』
柳사장은 상인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좋은 상품을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겠지만 패션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게 더욱 중요합니다. 함께 노력해서 좋은 소재로 좋은 제품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상가에 와서 물건도 사고 좋은 소재도 구입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저는 사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얼마를 더 버는가 하는 것에는 관심없습니다. 우리나라가 패션왕국이 되는 데 초석이 되고 싶습니다. 밀리오레 상인들이 그 역할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우수한 상인들과 힘을 합치면 우리는 몇 년 안에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다소 기준이 까다롭고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앞날을 내다보고 함께 최고의 상가를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지금도 가끔 상가 개발 사업에 뛰어든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일하는 기계라는 생각이 드는 데다 열심히 일해도 주변에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방 진출은 주변의 권유에 의해서 하게 되었는데 힘이 많이 들지요. 명동까지만 개장했으면 편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인간이 태어나서 겪을 수 있는 과정을 다 겪은 것 같습니다. 모험심이 많아서 안 겪어도 될 과정들을 거치고 있는 거죠
인생살이 자체가 OX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100가지 문제가 있다고 했을 때 O만 계속 밟으면 성공하는 거고 X를 거듭해서 짚으면 실패하는 거죠. 그동안 X를 몇 번 밟긴 했지만 치명적이지 않았다고 봐요. 앞으로도 O만 밟고 싶은 건 누구나 같은 심정이겠죠』
이탈리아에 도전
그의 최대 목표는 이태리를 능가하는 素材 개발이다. 대구에 갈 때면 밀라노 프로젝트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살펴본다. 대구 섬유단지를 이태리 밀라노와 같이 성장시키려면 소재 개발이 우선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태리는 옷을 만들기 전에 먼저 그 디자인에 맞는 원사로 원단을 만들어서 옷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디자인을 해놓고 그에 맞는 원단을 구하러 다니죠.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어떤 업종이든 선두주자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뒤 자본을 기술개발에 재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내년에 세 군데 상가를 완공해 활성화시킨 뒤 본격적으로 소재 개발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좋은 소재를 수입하기도 하지만 직접 생산해 밀리오레 상인들에게 공급할 계획이다. 그는 지금, 밀리오레 옷이 이태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게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한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성취했던 그가 이번에도 해낼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7년 만에 200억 벌어 6년 만에 3000억원으로 만든 비결 14 가지
①신중하게 생각을 한 뒤 과감하게 실천했다
②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본다
③안 될 일에는 손대지 않는다
④끊임없이 연구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⑤소비자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⑥최고의 소재와 최고의 디자인을 고집했다
⑦철저한 고객중심 서비스를 실시했다
⑧우수 상인을 모집하고 가능성 있는 사람을 선택했다
⑨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즉각 반영했다
⑩눈앞의 이익보다 멀리 내다봤다
⑪유행을 정확히 예측하고 지역에 맞는 전략을 수립했다
⑫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시련 속에서 최선을 찾았다
⑬장사꾼 기질과 상인정신으로 무슨 일이든 혼신을 다했다
⑭늘 새로운 것을 모색했다
1999년에 스포츠조선을 비롯한 4군데 스포츠신문이 모두 밀리오레를 히트상품으로 선정했고 문화일보는 밀리오레를 브랜드 파워 대상에, 캠퍼스저널은 21세기 소비 리더가 뽑은 브랜드로 선정했다.
밀리오레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제품이 아닌 한 상가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밀리오레가 너무 유명해져 사람들은 『동대문에 가자』는 말을 『밀리오레 가자』라고 말할 정도이다.
요즘 그 밀리오레가 동대문뿐만 아니라 서울 명동과 부산까지 진출했다. 이태리어로 「더 좋은(The Better)」이라는 뜻의 밀리오레(Migliore)를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사람, 柳宗煥(류종환·45) 사장을 탐험하기로 했다.
柳사장이 건축해서 개장시킨 商街(상가)는 「팀204」(現 동대문 밀리오레 밸리), 동대문 밀리오레, 명동 밀리오레, 부산 밀리오레 등 총 4군데. 현재 신축중인 대구·광주·수원 밀리오레는 내년중에 오픈 할 예정이다. 4개의 商街 가운데 팀204만 도매상가이고 나머지는 소매상가이다.
이 가운데 가게를 판, 즉 등기분양한 상가는 동대문 밀리오레 하나이고 나머지는 점포를 임대분양했다. 柳宗煥 사장은 등기분양한 동대문 밀리오레 상가의 근린시설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팀204는 도매상가 중 「빅 3」 안에 포함되고, 동대문 밀리오레는 그 명성대로 주변 소매 쇼핑몰을 리드하고 있으며, 명동 밀리오레는 IMF 이후 활기를 잃은 명동 패션가를 되살리고 있다. 2000년 9월에 문을 연 부산 밀리오레는 벌써 부산 지역 최고의 商街로 떠올랐다.
현재 네 군데 商街의 연간 매출액은 1조원에 이른다. 柳宗煥 사장은 현재 신축중인 대구, 광주, 수원 등 세 군데 商街가 개장하여 정상 궤도에 오르면 밀리오레 상가의 전체 연간 매출액은 2조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밀리오레를 중심으로 한 동대문 상권을 연구한 단행본도 출간되었고 서울대학교에서 밀리오레를 연구한 박사가 두 명이나 배출되었다. 柳宗煥 사장은 밀리오레를 연구한 사람들이 자신을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200억원을 6년 만에 3000억원으로
그의 현재 재산은 얼마나 될까. 팀204 상가를 건축하기 전 남대문의 6평짜리 점포에서 니트의류 도매업을 했던 그의 당시 재산은 200억원이었다. 그에게 현재의 재산을 묻자 200억원이 15∼20배 가량 늘었을 것이라고 답하면서 재산이 아닌 회사 資産(자산)이라고 표현해 달라고 당부했다.
현재 그는 (주)밀레오레와 (주)성창F&D 등 두 회사의 대표다. (주)밀리오레는 연합물산을 인수한 후 상호를 변경한 것이며, 성창F&D의 前身(전신)은 성창니트이다. (주)성창F&D가 (주)밀리오레의 지분을 100% 갖고 있어 두 회사를 하나로 봐도 무방하다. F&D는 Fashion(의류사업) & Develop(상가 건설 및 개발)의 약자이다. 그는 현재 상가 운영관리와 개발사업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가를 지어서 상인들에게 임대한 뒤 관리를 철저히 하여 장사가 잘되는 상가로 만드는 것이다. 상가가 잘되면 건물의 가치가 올라가 매각 때 큰 수익을 올리게 된다. 또 상가가 잘되면 임대료 협상 때마다 임대료를 올려 받을 수 있다. 그는 상가를 임대한 뒤 장사가 잘되게 하기 위해 상인들에게 패션정보 제공, 상가 홍보, 상가 관리 등 철저한 운영관리를 하고 있다. 상가를 건축해 임대한 뒤 상인들의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상가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다.
현재 두 회사 직원은 500여 명이며 연간 그가 4개의 상가를 운영·관리하여 벌어들이는 순수익은 350억원이다. 최소 3000억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년 수백억원씩 벌어들이는 柳宗煥 사장. 그의 성공은 어떻게 이룩됐으며, 종자돈 200억원은 또 어떻게 마련했을까.
밀리오레 제국의 황제는 짐작과 달리 매우 조용했다. 시장에서 20년 넘게 잔뼈가 굵은 데다 강원도 출신이라는 얘기에 활달하고 의욕이 넘치는, 좀더 솔직히 표현하면 최소한 知的(지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의외로 그는 知的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나직한 음성과 논리적인 언변, 시종 진지한 표정이 그렇게 보이게 했다. 소리내어 크게 웃는 법이 없는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177㎝의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에서 얼핏 시장 상인의 모습이 엿보이는 정도였다.
그의 화법만큼은 현장에서 체득한 싱싱함이 느껴졌다. 상인 시절과 사업가로 변신한 지금의 수입 차이를 『도토리가 한 번 구르는 것과 호박이 한 바퀴 구르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식이었다.
그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활동적이기보다 사색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성공에 이른 중요한 단서로 「사색」을 꼽았다. 끊임없는 생각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늘 머리 속이 복잡할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한다는 그는 술을 마실 때도 생각하느라 도무지 취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체득한 산지식을 판단의 잣대로 삼는다는 그는 신문과 시사잡지를 비롯한 정기 간행물을 많이 읽는다고 했다.
재산이 3000억원이나 되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궁금해 하고 있을 때 柳宗煥 사장은 『요즘 모든 게 회의스럽다』고 말했다. 4년 前, 밀리오레 제국을 처음 건설한 직후부터 그는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고, 언론에 두들겨맞느라 진이 빠졌다고 했다. 이 시련이 불과 얼마 전에 끝났다고 그는 말했다.
『3년 반 동안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법정에서 1500문항에 답변하다 보면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죠. 지난 10월쯤 대부분의 문제가 일단락 되고 나를 고발했던 사람이 1심에서 무고죄로 실형을 받았는데 시원하기보다는 허탈했습니다』
그가 고초를 겪은 것은 성공에 따른 「유명세」인지도 모른다.
『그 일을 겪으면서 눈에 띄게 잘되었다가는 좋게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은 富者(부자)를 존경하고 신뢰감을 갖는 나라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돈을 많이 번 사람에게 호의적이지가 않습니다. 휴일도 없이 일해서 정당하게 돈을 벌어도 좋은 소리 못 듣는 게 현실이더군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이쯤에서 중단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더군요』
재래시장의 신화적 존재
그는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재래시장의 신화적 존재」이다. 家業(가업)을 돕다가 1980년부터 주도적으로 동대문 시장에서 의류 도매업을 시작한 이래 20년 만에 이룬 성공이다. 명동 밀리오레 쇼핑몰 상가운영위원회 柳承烈(류승렬) 이사는 柳宗煥 사장을 「시장 상인들의 우상」이라며 자신의 꿈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柳宗煥 사장은 재래시장 40년 사상 의류 분야 최고 매출액 행진을 계속했던,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가 옷과 인연을 맺은 것은 유년시절부터다. 부모님이 강원도 春川(춘천)에서 포목점과 함께 옷가게를 운영했는데 장남인 그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드나들며 부모님을 도왔다. 자가용에 가정부까지 둘 정도로 부유했던 집안이 갑자기 몰락한 것은 아버지가 가까운 친척에게 당좌수표를 내주었다가 떼인 데다 이듬해 똑같은 일을 또 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등학교 3학년 때 온 가족이 빈손으로 서울로 이주했다. 서울의 한 工高(공고)에 편입했지만 마음 붙일 곳이 없어 싸움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 유도와 합기도를 익힌 데다 태권도 공인 3단으로 중학교 때 강원도 대표였던 그는 싸움만큼은 자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마음을 잡지 못했던 그는 어느 날 술을 먹고 서울 동대문구 한 버스회사 차고지에서 잠이 들었다. 물세례를 받고 온몸이 푹 젖은 채 한밤중에 자기가 살던 제기동 뚝방까지 걸어가면서 새롭게 태어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스무 살, 이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침 부모님이 50평 정도되는 니트(knit) 공장을 차려 「성창니트」라는 간판을 붙이고 일을 시작했다.
『저는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앞날을 개척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의지보다는 환경에 따라 움직여진다고 봅니다. 제가 부모님을 따라 자연스럽게 장사꾼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죠. 단,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는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1974년 부모님을 돕기 시작하면서부터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한번 시작하면 무섭게 몰입하는 것이 그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이다. 그 시절 어머니는 혹독한 조련사 역할을 했는데 밤새 일한 후 아침 6시에 솜처럼 피곤해서 잠이 들어도 아침 8시면 반드시 그를 깨웠다. 原絲(원사)로 스웨터 등의 니트 의류를 만들어 팔았는데 고용한 일꾼이 30여 명 정도 됐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그의 가족들은 거의 날밤을 새며 니트 공장에서 일했다.
꼬박 4년간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없는 그는 軍에 입대해서 오히려 편하게 잘 수 있었다. 軍에서 제대했을 때 어머니가 남자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면서 그를 학원으로 밀어넣었다.
『저녁마다 학원을 다녀 3년 동안 전기 배관 용접 등 기술자격증을 7개나 땄어요. 어느 한구석 기댈 데도 없으니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앙고라 스웨터 하루 1억원어치 팔아
제대를 하고 학원에 다니던 1980년부터 그는 연로한 부모님 대신 본격적으로 성창니트를 이끌어 갔다. 신평화시장에 점포를 얻어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을 직접 팔았다. 공장을 차리고 점포를 얻느라 진 빚을 갚고 안정이 되어가던 1982년 겨울, 하청공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맡겨두었던 원단이 모두 타버렸다. 당시 돈으로 6000만원쯤 손해를 보고 또다시 빚을 지게 되었다.
다시 추스리고 공장을 가동하던 중 그에게 중요한 전환기가 왔다. 1985년에 앙고라를 소재로 한 스웨터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 일이 그에게 엄청난 富(부)를 안겨다 주었다. 당시 스웨터는 구슬이나 스팡클로 변화를 주는 게 디자인의 전부였다. 너무 단조롭다는 생각을 한 그는 외국 잡지에서 힌트를 얻어 스웨터에 직접 날염(捺染)을 해보기로 했다. 날염공장을 찾아가 기술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 끝에 스웨터에 여러 가지 무늬를 찍는 데 성공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미 염색된 실로 짠 옷과 달리 만들어진 상태에서 날염을 한 스웨터는 독특한 멋을 냈던 것이다.
『하루에 2000만원에서 3000만원어치를 팔았어요. 1985년 한 해 동안 10억원을 벌었습니다. 빚을 다 갚고 이듬해 제기동 뚝방을 벗어나 잠실로 이사했죠. 한 3년 정도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하청공장 사장이 물건을 뒤로 빼돌리는 바람에 돈을 거의 날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시장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다 당해 봤어요. 그런 것이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돼요』
그는 더 이상 동대문에서 장사하고 싶지 않아 1987년에 남대문으로 옮겼다. 시티보이 商街가 있는 빌딩의 6평짜리 점포를 6억원에 매입했다. 장사가 잘됐다. 하루에 적게는 5000만원에서 많게는 1억3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때 하청공장 30군데에서 1000여 명이 우리 옷을 만들었어요. 저녁 7시30분부터 이튿날 새벽3시까지 장사했는데 전국에서 소매 상인이 몰려와 서로 사겠다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매일 옷이 몇 장씩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상인들이 벌떼같이 몰려드는 바람에 물건을 실은 봉고차가 옆으로 넘어진 일까지 있었어요. 질서를 잡기 위해서 욕도 하고 때로는 주먹질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선착순으로 번호표를 나눠준 뒤 주문을 받는 아이디어를 냈죠. 줄 세워놓고 큰소리 치면서 장사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재래시장 물건을 수출
단지 날염기술 때문에 옷이 날개 돋친 듯 팔린 것은 아니다. 디자인과 原緞(원단), 원사 등 素材(소재)가 다른 제품보다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素材를 구하기 위해 방적 공장에 의뢰해 직접 만들기도 하고 이태리까지 가서 구해오기도 했다. 또 자주 외국에 나가서 유행 디자인을 살펴보고 패션 서적을 통해 의류 디자인을 연구했다.
『1990년대 초에 유명 브랜드 가운데서도 이태리 소재로 옷을 만드는 곳은 별로 없었어요. 저는 시장 옷을 이태리에서 구한 소재로 만들었던 거죠』
좋은 소재 고르는 눈과 판매가 잘될 디자인을 구상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옷을 보면서 그런 눈이 저절로 생긴 것 같습니다. 특별히 디자인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만드는 옷마다 인기가 있었어요. 그건 素材 때문이라고 봐요. 소재가 좋아야 좋은 옷이 나옵니다. 이태리가 패션 대국이 된 것은 질 좋고 다양한 소재 덕분입니다』
그는 재래시장 물건을 외국에 수출한 1세대 상인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부터 일본과 대만, 홍콩, 러시아, 남미 등지에서 온 보따리 상인들에게 스웨터를 판매했는데 1993년까지 수백만 장을 팔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요즘도 외국 보따리 상인들이 많이 오지만 그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외국 보따리 상인들이 샘플을 갖고 와서 주문하는 것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가 1억원어치씩 팔 때 2위 상인은 5000만원 정도 팔았다고 한다. 재래시장에는 하루에 몇천만원씩 파는 사람이 몇 사람은 꼭 있다고 한다. 당시 시장 마진이 30∼40% 정도였다니 하루에 3000만원 정도의 수익을 낸 셈이다. 그렇게 해서 1993년까지 200억원을 모았다.
柳宗煥 사장은 당시 컴퓨터를 이용해 무늬를 인쇄하는 편물기계도 도입했다.
『제가 니트 분야를 10년은 발전시켰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만든 날염 스웨터를 수백 명이 카피를 했을 겁니다. 그때 특허를 냈어야 하는데 그걸 몰랐어요. 지금도 시장에서 그 스웨터가 팔리고 있어요』
도매상인에서 상가 개발자로
그는 시장에서 장사할 때 반드시 지킨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최고의 소재를 사용한다는 것과 반드시 현금 거래를 한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수표 때문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 자신이 시장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았다.
1990년 초반부터 국내 소비자들이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성창니트라는 브랜드로 전국 체인점을 내는 것도 생각해 봤으나 자신의 제품은 재래시장에 맞다고 판단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발을 떼지 않는 것, 그의 성공 수칙 가운데 하나이다.
하루에 몇천만원씩 수익을 내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는 1993년에 전혀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안면이 전혀 없는 A씨가 『상가를 지어 분양사업을 하려는데 도와달라』고 요청해 온 것이다. 당시 재래시장에서 「柳宗煥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시장 상인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다. 그의 유명세를 이용하기 위해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생소한 분야인 데다 워낙 장사가 잘되던 때라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거듭되는 권유에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中低價(중저가) 브랜드가 프랜차이즈업(특약대리점)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재래시장의 상황이 나빠지고 있을 때였다. 상인들과 독립 브랜드를 공유해 유통업을 하면 모두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심 끝에 참여를 결정했다.
『제가 나서서 이탈리아 브랜드도 수입해 오고 상인들도 만나고 해서 넉 달 만에 상가 분양을 끝냈어요. 商街 분양이 순조롭게 끝나자 A씨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분양받은 사람 가운데 일부가 분양권을 팔았는데, A씨가 자신의 허락 없이 판 분양권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고는 제가 분양권을 매매하면서 권리금을 챙겼다고 트집을 잡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을 통해 나를 부동산 브로커로 매도했습니다』
A씨로부터 시달림을 당하던 柳사장은 그를 무고죄로 고소했다. 당시 A씨는 모 정당의 당직자였다. 3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그는 명예훼손 혐의로 실형을 살았다. 법정 싸움을 하는 동안 柳사장은 A씨에 대한 복수심과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직접 분양업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한 분양업으로 그는 밀리오레 제국의 황제가 된 것이다.
A씨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6개월 빠른 1996년 6월에 도매상가인 팀204를 완공했다. 상인을 유치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재래시장의 최우수 상인이었던 柳宗煥 사장이 도매상가를 개설하자 「우수 商人」과 함께 여러 상인들이 입주했다.
재래시장에는 약 2만여 명의 의류 상인이 있는데 그 가운데 10% 정도가 우수 상인이라고 한다. 우수 상인들은 뛰어난 감각으로 직접 옷을 만들고, 그 옷으로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밀리오레 개장
1990년대 중반, 재래시장은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았다. 中低價 브랜드의 프랜차이즈가 번성하고 아울렛(Outlet·할인점)에서는 유명 브랜드 제품을 헐값에 판매했다. 재래시장을 찾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자 그는 재래시장도 변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수 상인들을 규합해 옷을 만들어 중간단계 없이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소매상가를 만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존 서울 동대문 의류 도매상가 건너편에 소매 쇼핑몰을 짓는다고 하자 모두들 안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백화점처럼 쾌적한 공간에서 좋은 옷을 싼 가격에 공급하면 안 될 리 만무하다고 판단한 그는 과감히 땅을 매입했다. 그 땅에서 장사를 하던 450여 상가를 내보내는 일만 해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6개월간의 악전고투 끝에 기존 상인들과 협상을 끝내고 1996년 2월에 공사를 시작했다. 1998년 8월, 찬바람이 쌩쌩 불던 최악의 경제상황 속에서 동대문 밀리오레가 개장했다.
『밀리오레 상가를 개점할 때 된다고 믿는 사람은 저 하나밖에 없었어요. 개점할 당시 거평이 부도 나는 바람에 더 어려웠죠. 2000여 점포 가운데 600개 정도만 들어선 상태에서 개장을 했습니다. 개장하기 며칠 前에 유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어요. 내가 시장에서 쌓은 20년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착잡하기 그지없었죠』
당시 그는 은행에서 꽤 많은 돈을 빌렸다. 애초에 동대문 밀리오레의 2000여개 점포는 하나씩 소유권을 완전히 이전하는 등기분양을 했었다. 분양받은 점포주들은 가게를 빌려 장사하겠다는 상인들이 없자 10% 위약금을 물고 해약을 하려는 심산으로 중도금과 잔금을 차일피일 미루었던 것이다. 그런 데다 대대적인 개장 기념 준비와 홍보비, 광고비에 돈을 쏟아 부었다. 관건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었다.
그는 10대와 20대를 소비층으로 잡고 매장 분위기에서부터 상가 앞거리까지 세심한 공을 들였다. 매일 1000명에게 1만원권 상품권을 선착순으로 나눠주었으며 상가 앞 야외무대에서 다양한 이벤트 행사를 열었다.
동대문 밀리오레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개장하자마자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단숨에 10만여 명이 밀리오레를 찾았다. 경제위기로 비싼 옷보다 실속 있는 옷을 찾던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개장한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비어 있던 1500여 점포가 꽉 차는 이변이 일어났다. 점포주들은 미루어 왔던 분양대금 600억원을 일시에 완납했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나날이 명성이 높아져 서울의 명소로 자리잡고, 외국인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이 됐다. 柳宗煥 사장의 독특한 상가 관리법과 밀리오레의 성공이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밀리오레는 철저히 10대와 20대를 대상으로 물건을 만들고 그들을 겨냥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밀리오레는 가격이 싸면서도 기존의 도매상가와 달리 옷을 입어볼 수 있고 환불과 교환이 가능하다. 또 재래시장에서 사용되지 않던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밀리오레는 재래시장이 아닌 쇼핑타운이라는 개념에서 상가규칙을 정하고 상인들에게 철저히 지키게 했다. 상인들은 개장 20분 前에 점포에 나와 영업에 대비해야 하고 영업시간에 책을 읽거나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 매장에서 어떤 도박행위도 해서는 안 되며 손님과 다투거나 불친절해서도 안 된다. 술에 취해 고객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동료 상인과 다투어도 안 된다. 3회 이상 이런 사항이 적발되면 퇴출된다. 가짜 상표를 부착하거나 이중가격, 상품의 질이 떨어져 매출이 극히 부진한 상인, 지정된 품목이 아닌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은 퇴출 대상이다. 상인 대표 30여 명이 수시로 매장을 돌면서 현장을 체크하는 암행반 제도를 만들었다. 이런 규칙 때문에 첫해에 100여 개의 점포가 퇴출되었다』
3년 6개월 동안 조사받다
한편에서는 『밀리오레가 점포주들의 권익을 무시한다. 상인들을 마구 쫓아내는 등 횡포가 심하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柳宗煥 사장은 하나의 상가를 건축하는 중간에 다음 공사를 착공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1994년 11월에 팀204 착공을 시작으로 6년여 동안 4개의 대형 쇼핑몰을 건축했다. 이들 상가를 완공해 분양 업무와 상가 운영관리를 하면서 3개의 상가를 더 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3년 6개월을 각종 고발에 시달리며 관계당국에 불려 다니고 법원에 드나들어야 했다. 팀 204상가에 지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의 일부가 柳사장에게 불만을 품고 고발을 하여 1997년 10월부터 수사 당국에 불려 다녔던 것이다.
『팀204 공사를 하면서 탈세를 위해 국세청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건축 인허가를 위해 구청과 서울시에 뇌물을 주었다. 검찰과 경찰에 비호세력이 있다.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는데 완전히 소설을 써서 투서했더군요. 서울지검 특수부와 大檢(대검) 중수부에서 조사받으면서 국세청 세무조사까지 받았습니다』
그 와중에 동대문 밀리오레가 개장을 한 것이다. 동대문 밀리오레의 경우 임대가 잘 안 되자 점포주들이 2년간 임대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 1998년에는 임대료 없이 관리비만 받고 건물을 빌려주는 곳이 있을 정도로 임대가 잘 안 되었다.
柳宗煥 사장은 상인들을 모집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대기업에서 정리해고된 패션 디자이너들과 유학을 준비하다가 환율 때문에 포기한 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마땅한 일거리를 찾지 못해 애태우고 있었다. 柳宗煥 사장은 신선한 감각을 가진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해 연말까지 하루에 3만원씩 稅를 내는 임대제도를 신설하는 등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그렇게 해서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1년만에 10억원 이상을 손에 쥔 스타 상인들이 속속 배출되어 그들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동대문 키즈(kids)」라는 이름을 얻은 새로운 우수 상인들이 대거 배출되었고 일부는 독립하여 전국에 의류체인점을 개설하기도 했다.
장사가 잘되는 점포는 가치가 올라가게 마련이다. 동대문 밀리오레 상가가 폭발적으로 장사가 잘되자 밀리오레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새로운 상인들이 줄을 섰다. 이들은 점포주들에게 권리금과 임대료를 많이 줄 테니 지금 장사하고 있는 상인들을 내보내 줄 것을 부탁했다. 점포주란 동대문 밀리오레가 최초 분양될 때 가게를 산 사람들이다. 점포주들은 柳사장에게 2년간 임대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자기 점포이지만 상인들을 마음대로 교체할 수 없었다. 점포주들은 柳사장에게 2년간 임대권한을 1년으로 줄여달라고 요구했다.
柳사장은 기존 상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고, 상인이 바뀌면 상가 발전이 힘들어진다는 이유로 점포주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계속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조사받는 동안 자료를 철저히 준비해서 제출했지요. 조직폭력배 두목이다, 마약을 한다는 투서도 들어와 그 점도 조사받았습니다. 여자 관련 소문만 빼고 나쁜 얘기는 다 들었습니다』
그는 조사를 받으면서 관청에서 「생사람은 잡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다소 안심이 됐다. 다양한 조사를 받은 뒤 그가 들은 마지막 말은 『시간 빼앗아 미안하다. 의심되는 바가 없으니 사업에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점포주들과 끝없는 싸움
당시 明洞(명동) 밀레오레를 한창 건축하면서 지방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만약 강단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사업을 계속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조사를 계속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받은 고통도 고통이지만 국가기관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거 아닙니까.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투서를 보내는 사람은 형사처벌해야 합니다. 투서가 난무하는 것은 무고죄 성립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재래시장 최초로 상인 대표들로 구성된 상가운영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柳사장의 아이디어였다. 柳宗煥 사장은 늘 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상가 발전을 논의했다.
상가운영위원회는 점포주들의 항의가 계속되자 토의 끝에 2년 후 점포주들이 상인을 교체할 수 있도록 합의하고 상인들을 설득했다. 계속 점포주들의 불만이 언론에 기사화되면서 商街 이미지가 나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柳宗煥 사장은 점포주와 상가운영위원회가 토의할 때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다. 점포주에게 분양을 했고 또 商街를 살리기 위해 상인들과 함께 했던 사람으로서 드러내 놓고 어느 편도 들 수 없었던 것이다.
『기존 상인들이 매달 10만∼25만원씩 2년간 거의 1000만원의 돈을 내서 商街를 홍보했습니다. 점포 인테리어를 하는 데도 200만∼300만원 정도 들었지요. 결국 오늘의 밀리오레를 만든 것은 기존 상인들입니다. 적정선에서 임대료를 올리고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이 점포주들에게 훨씬 이득일 텐데 많은 점포주들이 임대료를 많이 내겠다는 새로운 상인을 선택했죠. 점포 가격이 서너 배나 올랐는데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던 겁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의외로 적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2000년 8월28일 개장 2주년 때 밀리오레를 활성화시킨 상인의 약 3분의 1이 떠났다.
『우수한 상인들이 많이 떠났지요. 2년 동안 워낙 장사가 잘되었기 때문에 모두들 돈은 벌었지만 애정을 갖고 키운 상가를 떠날 때 마음이 좋진 않았겠죠. 점포주들이 상가를 살리기 위해 품목 배정에서부터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권리금과 임대료를 많이 내는 상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소비자는 냉정하고 정확하다
상인들이 물갈이된 동대문 밀리오레는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이상 징후를 나타냈다. 새로 들어온 일부 상인들이 밀리오레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상가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 점포주가 직접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들은 『내 가게에 내가 지각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며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최고의 商街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략이 필요한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각 층의 상품 구성과 상품 구색」, 「고객들에게 최고의 상품으로 최상의 서비스를 하는 일」이라고 한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2년 만에 탄탄하게 유지되던 두 가지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눈은 냉정하고 정확합니다. 밀리오레가 변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챈 소비자들이 밀리오레를 외면하기 시작했지요.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번성했어도 한 달 만에 가라앉을 수 있는 데가 바로 시장입니다. 남대문 상가가 좋은 예지요. 동대문 밀리오레가 침체되자 주변 상가들도 동반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한번 다녀가는 사람들이니 여전히 찾고 있지만 국내 소비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더 좋은 곳을 찾아가죠』
두 달쯤 지나면서 점포주들이 위기를 실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1월1일에 상인측과 점포주들이 함께 관리단 운영협의회라는 것을 구성했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성창F&D가 운영하되 빌딩관리는 관리단에서 지정해 준 회사에서 대행하고 있다.
겨울철이 되자 동대문 밀리오레 商街 衣類(의류) 코너의 50%가 니트 의류를 파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예전 같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운영위원회에서 철저히 품목 지정을 해서 구색을 맞추기 때문이다. 품목을 바꾸고 싶어하는 상인이 있을 경우 層(층)을 옮겨서 장사하게 할지언정 商街의 품목 구성비율이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그런 노력이 밀리오레에 가면 다양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을 낳았던 것이다.
『니트의류 등 편중된 상품만 파는 상가를 영리한 소비자들이 찾을 리 없지요. 벌써부터 장사가 안 되는 점포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300만원어치 파는 상인도 있지만 하루에 한두 개밖에 못 파는 상인들도 있습니다』
장사가 안 되면 바로 관리비 연체자가 생기고 곧이어 임대료 인하 요구가 터져 나온다. 거기서 더 나빠지면 상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점포의 가격이 하락하고 그 피해는 결국 점포주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시장의 生理(생리)다.
柳宗煥 사장은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말하면서도 미련이 남는 듯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그가 만든 브랜드에다 철저한 운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한 상가이기 때문에 그만큼 아쉬움이 큰 것 같았다. 벌써부터 『다시 柳사장이 강력하게 이끌어 달라. 상가를 살려달라』는 요청이 오고 있지만 아직 더 지켜볼 작정이라고 한다. 개인의 욕심을 앞세우면 전체가 희생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만 재정비할 수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장사꾼은 멀리 내다봐야 한다
柳宗煥 사장이 투서로 인해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시작하던 1997년 10월, 明洞 밀리오레가 착공됐다. 그는 명동 밀리오레를 구상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동대문은 재래시장 이미지가 강해서 패션 1번지인 명동에서 밀리오레를 새롭게 인식시키기 위해 진출하였죠』
그는 상가 부지를 물색할 때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한다. 「유동인구가 많을 것, 전철과 연결되어 있을 것, 고객유입이 원활한 곳」. 이 세 가지만 맞으면 설사 商街 개발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건물을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고 매각도 쉽다고 한다.
명동 밀리오레는 동대문 밀리오레의 분양대금이 잘 들어오지 않아 한때 6개월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답답했죠. 괴로울 때는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면서 잊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데다 친인척도 별로 없습니다. 저는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어디 하나 기댈 데가 없어요. 언론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혈연 지연 학연에 얽매여 있다는 비판을 할 때면 솔직히 그런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의논 대상이 전혀 없었어요.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모든 것을 혼자 결정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항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신중했다고 전한다. 모든 판단의 바로미터는 시장에서 터득한 산 경험이다. 그는 스스로를 사업가가 아닌 「장사꾼」이라고 부른다.
『장사꾼과 장사치는 다릅니다. 눈앞의 이익을 따지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은 장사치이지만 장사꾼은 멀리 내다볼 줄 알고, 다른 사람 생각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장사꾼은 능력과 함께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없어야지요』
동대문 밀리오레 개장 이후 분양대금이 수월하게 들어와 다행히 명동 밀리오레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명동 밀리오레가 완공된 후 그를 잘 알고 있는 우수 상인들이 명동으로 몰려들었다. 명동에서도 상가운영위원회를 조직했다. 상인들은 이미 柳사장이 동대문에서 어떤 철칙을 세워 상가를 운영했고, 상가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언제든지 퇴출된다는 것, 또 엄격한 규칙들이 상가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동 밀리오레는 임대 분양만 실시했다. 회사가 점포주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利點(이점)이 있다. 2000년 6월에 문을 열었는데 단 4개월 만에 숙녀복 매출이 동대문 밀리오레를 앞섰다. 柳사장은 몇 달 후면 지금보다 두 배는 잘될 거라고 말했다.
우수 상인이 시장을 끌어간다
IMF 이전에 명동의 골목골목은 국내 유명 브랜드가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시장 제품을 파는 상가들로 채워져 있다. 간혹 대기업의 브랜드 상가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도이다. 柳사장은 재벌그룹 계열회사가 아닌 의류업체는 다 망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거라고 말했다.
『유행은 아무도 예측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다음 계절의 상품을 3∼6개월 전에 준비하는데 소비자의 유행 감각에 맞추지 못하면 그대로 망하는 겁니다. 전자제품은 고유의 기능이 있으니 10∼20% 할인해 주면 판매가 되지만 옷은 그렇지 않습니다』
패션회사가 망하는 이유를 柳사장은 이렇게 분석했다.
『규모가 커져 하청업체에 제품 생산을 일임할 때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패션업체는 본사에서 관리할 수 있는 만큼만 키워야 합니다. 한국인들은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에 1∼2등 하지 않으면 다 망합니다. 덩치가 커지면 기민하게 움직일 수가 없죠. 우리나라는 패션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를 예측하기가 힘듭니다. 소비자의 욕구를 따라가면서 맞추어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기존의 브랜드에 쉽게 식상하고 새로운 브랜드를 찾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柳宗煥 사장은 밀리오레가 변화무쌍한 소비자의 욕구를 가장 잘 맞출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요즘은 브랜드마다 初度(초도) 제품을 걸어서 반응이 좋지 않으면 바로 다른 제품으로 바꾼다고 한다.
밀리오레의 경우 상인들이 대부분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심리를 알아보는 스팟(spot)상품을 수시로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팔리는 제품만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柳사장은 요즘 젊은이들이 유행을 따르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한다고 일러주었다.
柳宗煥 사장은 상가 부지를 물색할 때 그 지역 소비자의 특성 분석을 비롯한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한다. 명동 상가를 짓기 전에 시장 조사를 했을 때 동대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상가를 개장하자 동대문과 명동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동대문은 마음먹고 쇼핑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명동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 5만원 미만의 돈을 갖고 다닌다는 것이다. 명동에 오는 학생들은 모범생 스타일이 많다고 한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학생들이 몰려와 별별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화장실의 전구가 노상 없어지는 바람에 촌스러운 백열등으로 교체해야 했고 화장지도 수시로 없어진다.
상인 200명 퇴출시켜
明洞의 영업시간은 새벽 3시까지다. 밤 10시면 주변 상가들이 撤市(철시)하기 시작했는데 요즘은 시간이 점점 연장되고 있다. 처음에 밤 10시면 끊어지던 손님이 요즘은 새벽 1시까지 이어진다. 명동은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밤 11시 이후 100% 무료 주차를 허용하는 등 고객 서비스를 더욱 확대했다.
동대문 밀리오레는 개장하자마자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왔지만 明洞은 차분하게 고객이 늘어나는 중이다. 동대문에서 문 열자마자 「대박」을 체험했던 상인들은 명동에 와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柳宗煥 사장의 운영방침은 入店(입점)한 상인들이 최고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최고의 상가가 된다고 해서 柳宗煥 사장의 수익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상가가 잘되면 임대료 협상 때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장사가 잘되어도 임대료 인상폭은 한 자릿수를 넘기지 않을 계획이라고 한다.
도매점포를 운영할 때 매일 1억원의 매출을 올렸던 그는 밀리오레 상인들이 하루에 몇백만원, 혹은 1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 언제 부자될지 걱정이다』고 말한다. 그 정도면 엄청난 수익이라는 것을 그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노력하면 하루에 몇천만원에서 1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곳이 시장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명동 밀리오레가 개장한 지 4개월째인 지난 10월에 200여 명의 상인이 퇴출되었다. 상인들 가운데는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영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곳에서 처리 못한 재고품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소비자들의 욕구를 파악해 새로운 물건을 계속 만들어도 성공할까 말까 한 판국에 재고품을 파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요. 우선 수익을 올리려다 보면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됩니다. 금방 매출에서 차이가 났지요. 함께 출발한 상인들이지만 과감히 퇴출시켰습니다. 그 여파로 얼마 동안 장사가 잘 안 됐어요』
그는 한 달에 열흘 정도는 지방에서 지낸다. 부산 밀리오레 매장도 둘러봐야 하고 현재 공사중인 세 군데를 둘러봐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 초부터 내내 모 신문에 밀리오레에 관한 좋지 않은 기사가 보도됐다. 그런 기사가 나자 처음에 부산 밀리오레의 분양이 순조롭지 못했다. 그는 보도를 한 신문사를 검찰에 고발하는 등 강경하게 대처했다.
2000년 9월 부산 밀리오레가 문을 열자 全 점포가 꽉 찼다. 그를 잘 아는 서울의 우수 상인들도 부산 밀리오레에 많이 동참했다. 柳宗煥 사장이 개발한 네 군데 상가의 총 점포수는 모두 6000여 개이다. 밀리오레 상인 가운데 300여 명은 네 곳 모두에서 장사를 할 정도로 柳사장을 신임하고 있다.
『부산은 동대문이나 명동과는 분위기가 또 다릅니다. 그러니 그쪽 상권을 개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상가를 발전시키려면 그곳에 가장 알맞은 운영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부산 밀리오레는 가족단위로 찾아옵니다. 당연히 다양한 연령층의 옷을 준비해야지요. 부산만 해도 아직 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활성화되지 못해 용돈을 부모님에게 타서 쓰는 경우가 많아요. 학생들이 옷을 고르면 부모들이 돈을 지불합니다』
부산 밀리오레는 불과 두 달 만에 부산에서 최고의 상가로 자리잡았다.
유사 상가 40여 개 생겨
날염 스웨터로 돌풍을 일으켰던 그는 밀리오레라는 새로운 형태의 패션몰을 선보이며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저가 브랜드에 타격을 입히면서 백화점 층별 구성을 바꾼 점이라고 한다.
『중저가 의류를 사려고 백화점에 갈 필요가 없어졌지요. 밀리오레에 오면 싸고 좋은 제품이 많으니 구태여 브랜드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거지요. 외국의 중저가 의류 할인점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동대문의 위세에 밀려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브랜드 선호 경향도 바꾸었습니다. 백화점에 뒤지지 않는 다양한 제품을 유행에 맞춰 싼값에 구입할 수 있으니 브랜드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거지요』
백화점은 명품을 비롯한 고가 제품, 중저가는 동대문으로 쇼핑 선호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전국에 밀리오레와 유사한 상가가 40여 개나 생겼다. 동대문의 또다른 소매상가들도 애초에 도매상가로 출발했다가 밀리오레의 성공에 힘입어 소매로 전환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柳宗煥 사장은 동대문 밀리오레를 인근의 상가와 비교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말한다. 명동 밀리오레 쇼핑몰 운영이사회 柳承烈 이사는 柳宗煥 사장의 성공 비결을 「우수 상인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분석했다.
제일평화시장에서 보세의류점을 경영했으며 의류업체 TBJ 기획실장을 지낸 바 있는 柳이사는 현재 밀리오레에 4개의 상가를 보유하고 있다.
『옷을 잘 만들어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나도 열심히 배워서 나중에 상가 개발을 하고 싶습니다. 柳사장님은 거의 초인이에요. 하루도 쉬는 날이 없고 매사에 열정적입니다. 옥석을 가려 취할 것만 취하고 원칙이 확실한 점,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것이 성공 요인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즉각 회의를 소집하고 밤 12시에도 전화를 걸어 신속히 해결합니다. 柳사장님이 단지 사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상인들이 따르는 건 아닙니다. 애정으로 아랫사람을 챙기기 때문에 상인들이 따르는 거죠』
당국의 조사를 받을 때도 상인들은 柳사장을 믿었다고 한다.
『사장님이 시장 상인 출신이기 때문에 상인들의 애환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죠. 점포주보다는 弱者(약자)인 세입자들 입장에 섰기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었던 겁니다. 柳사장님은 앞으로 우수 상인을 키우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죠. 또 상가 개발 사업 전문가들도 키우고 있어요. 저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柳宗煥 사장이 사회 환원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상인들이 그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각 쇼핑몰마다 공연장을 만들어 고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일러주었다. 또 부산지역 全 고등학교에서 장학생을 1명씩 선발해 장학금을 주고 있다고 한다. 상가 개발이 완료되면 장학사업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 상인들과 회사가 힘을 합쳐 명절 때마다 불우시설에 옷을 전달하고 있다.
柳宗煥 사장은 직원들에게 하도급 업체 사람들에게 술을 얻어먹지 말라고 지시했다. 대신 술을 사주면서 일을 제대로 시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柳道源(류도원) 홍보팀장은 柳宗煥 사장을 이렇게 말했다.
『치밀하고 빨라서 직원들이 따라가기 힘듭니다. 2∼3년 전 일을 수치까지 기억할 정도입니다. 머리가 좋은 점이 성공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라고 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망설이고 있을 때 빨리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남녀 차별이 없고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어요. 급료는 대기업 중위권 정도입니다』
휴식도 취미도 없이 일만 한다
柳宗煥 사장도 밀리오레의 성공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수 상인의 유입을 들었다. 그는 적극적인 사람보다는 묵묵히 일하는 사람에게 더욱 애정이 간다고 한다. 행여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이 있더라도 잘못을 인정하면 관대하지만 잘못하고도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는다.
상가운영위원회와는 수시로 회의를 하는데 柳사장은 회원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자신이 잘못 판단한 일에 대해서는 즉각 시인하고 고친다. 회사 직원들은 일요일에, 상가는 월요일에 쉬기 때문에 그는 하루도 쉴 수가 없다. 명절에도 쉬지 않는 그는 작년 설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바로 사무실에 출근했다. 1984년에 결혼해 두 자녀를 두고 있는데 16년 동안 가족과 휴가를 딱 세 번 갔다.
그 흔한 골프도 안 친다. 1989년에 골프장에 다섯 번 나갔다가 시간이 너무 아까워 골프채를 친구에게 넘겨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유행 시장을 쫓아가려면 잠자는 시간도 아껴야 할 판이라고 말한다.
그는 시장에서 터득한 상인정신을 이렇게 정의했다.
『혼을 불어넣어 물건을 만들고 고객이 오기 전에 정성껏 상품을 갖춰놓아야 합니다. 물건을 팔 때도 그야말로 혼신을 다해야 합니다』
그는 지금의 성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제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습니다. 집을 한 번 샀다가 팔고 다시 산 것 외에 부동산을 산 적이 없습니다. 가난할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는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어떤 사업이든 펼칠 수 있다는 점이죠. 앞으로도 열심히 일만 할 겁니다. 일 외에는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아마 상가 개발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지금도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 겁니다』
휴일도 없이 일하는 그에게 주변에서는 있는 돈 좀 쓰면서 즐기라고 권한다.
『돈이 많으면 여자, 도박, 술에 빠지기 쉽다고 하더군요. 저는 여자와 도박에는 관심이 없어요. 대신 매일 저녁 술을 마시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돈은 있는데 할 일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사람은 향락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 저는 아직 젊고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는 가끔 유통이나 패션 분야 사람들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는다. 강의 때마다 빠지지 않고 하는 얘기가 있다.
『패션 쪽 학생들을 만나면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환상을 갖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디자이너는 고급 업종이 아니라 열심히 뛰어야 하는 고달픈 직종이라는 걸 강조하죠. 유통 쪽은 장기 프로젝트를 세우지 말라고 얘기하죠. 5년, 10년 앞의 계획을 세우는 대신 2∼3년, 혹은 1년 앞을 내다보고 효율적으로 대처하라고 권하죠』
패션은 회귀한다
柳宗煥 사장은 요즘 상가운영위원회와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상가운영 기법을 논의하고 있다.
『밀리오레 유통방식은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2년간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죠. 발전시킬 게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태리보다 유행이 3∼5년 정도 늦습니다. 그쪽이 그때 어떠했나 살펴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패션 쪽은 너무 앞만 보고 가도 안 됩니다. 패션은 회귀본능이 있기 때문에 과거도 돌아봐야 합니다.
新(신)유통개념을 다시 만드는 게 요즘 숙제입니다. 각 상가마다 현실에 맞는 운영법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2년 前 동대문 밀리오레를 오픈 할 때 야외무대에서 이벤트를 하면 사람이 엄청나게 몰렸어요. 요즘은 인기 연예인이 와도 잘 모이지 않습니다. 가수의 수명이 3개월이라고 하잖아요. 세상은 빨리 변하고 있어요』
柳사장은 상인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좋은 상품을 만들어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겠지만 패션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게 더욱 중요합니다. 함께 노력해서 좋은 소재로 좋은 제품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상가에 와서 물건도 사고 좋은 소재도 구입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저는 사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얼마를 더 버는가 하는 것에는 관심없습니다. 우리나라가 패션왕국이 되는 데 초석이 되고 싶습니다. 밀리오레 상인들이 그 역할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우수한 상인들과 힘을 합치면 우리는 몇 년 안에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다소 기준이 까다롭고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앞날을 내다보고 함께 최고의 상가를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지금도 가끔 상가 개발 사업에 뛰어든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일하는 기계라는 생각이 드는 데다 열심히 일해도 주변에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방 진출은 주변의 권유에 의해서 하게 되었는데 힘이 많이 들지요. 명동까지만 개장했으면 편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인간이 태어나서 겪을 수 있는 과정을 다 겪은 것 같습니다. 모험심이 많아서 안 겪어도 될 과정들을 거치고 있는 거죠
인생살이 자체가 OX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100가지 문제가 있다고 했을 때 O만 계속 밟으면 성공하는 거고 X를 거듭해서 짚으면 실패하는 거죠. 그동안 X를 몇 번 밟긴 했지만 치명적이지 않았다고 봐요. 앞으로도 O만 밟고 싶은 건 누구나 같은 심정이겠죠』
이탈리아에 도전
그의 최대 목표는 이태리를 능가하는 素材 개발이다. 대구에 갈 때면 밀라노 프로젝트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살펴본다. 대구 섬유단지를 이태리 밀라노와 같이 성장시키려면 소재 개발이 우선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태리는 옷을 만들기 전에 먼저 그 디자인에 맞는 원사로 원단을 만들어서 옷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디자인을 해놓고 그에 맞는 원단을 구하러 다니죠.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어떤 업종이든 선두주자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뒤 자본을 기술개발에 재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내년에 세 군데 상가를 완공해 활성화시킨 뒤 본격적으로 소재 개발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좋은 소재를 수입하기도 하지만 직접 생산해 밀리오레 상인들에게 공급할 계획이다. 그는 지금, 밀리오레 옷이 이태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게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한번 시작한 일은 반드시 성취했던 그가 이번에도 해낼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7년 만에 200억 벌어 6년 만에 3000억원으로 만든 비결 14 가지
①신중하게 생각을 한 뒤 과감하게 실천했다
②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본다
③안 될 일에는 손대지 않는다
④끊임없이 연구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⑤소비자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⑥최고의 소재와 최고의 디자인을 고집했다
⑦철저한 고객중심 서비스를 실시했다
⑧우수 상인을 모집하고 가능성 있는 사람을 선택했다
⑨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즉각 반영했다
⑩눈앞의 이익보다 멀리 내다봤다
⑪유행을 정확히 예측하고 지역에 맞는 전략을 수립했다
⑫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시련 속에서 최선을 찾았다
⑬장사꾼 기질과 상인정신으로 무슨 일이든 혼신을 다했다
⑭늘 새로운 것을 모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