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해방 80년

무엇이 오늘의 대한민국과 북한을 만들었나

대한민국, ‘포용적’ 제도 선택 vs ‘억압적’ 제도 북한

  • 글 : 김학준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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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80주년에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어제 오늘 내일

⊙ 내향적·폐쇄적 대륙 국가 소련과 외향적·개방적 해양 국가 미국의 점령이 남북의 운명 갈라
⊙ 북, 레닌-스탈린주의 수용… 잘살아 보려는 생래적 욕구 억눌러
⊙ 남, 1960년대 이후 ‘수출입국’ 정책… 기업가·자본주의 정신 확산
⊙ 남북, 1972~73년부터 국력 역전
미 항공우주국(NASA) 인공위성이 찍은 한반도 야경은 대한민국의 흥기와 북한의 쇠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사진=NASA 홈페이지
우리 겨레는 올해 8월 15일에 일제(日帝)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 80년을 맞이했다. 그것은 동시에 남(南)과 북(北)으로의 분단 80년이었다. 우리 식으로 산수(傘壽)에 해당하는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난 현실은 남과 북 사이의 너무나 뚜렷한 차이이다. 단순화시켜 말해, 남은 비교적 대부분의 국민이 자유로우면서도 잘사는 나라가 되었음에 비해 북은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이억압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나라가 되었다.
 
  1950년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1960 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러한 대비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남은 독재 정권 아래 빈곤에 허덕이는 나라의 상징과도 같았고, 북은 비록 서구적 의미에서의 자유는 제한되었다고 해도 물질적으로는 남에 비해 여유 있는 나라처럼 비쳤다. 다시 단순화시켜 말해 ‘남농북공(南農北工)’, 곧 남한은 전근대적(前近代的)인 농업국임에 비해 북한은 근대화하는 공업국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어떤 국민에게 남한은 벗어나야 할 나라였다. 미국이라면 제일 좋고, 아니라면 아르헨티나이든 브라질이든 파라과이이든 한국인을 받아 주는 중남미 국가로라도 떠나야 할 나라였다. 정부 스스로 국민의 해외 이주를 도울 뿐만 아니라 활성화하기 위해 해외개발공사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떠나는 나라가 아니라 찾아가 살고 싶은 나라가 되었다. 2024년 11월 14일에 서방 선진 국가들의 회의체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38개 회원국 가운데 한국은 이입(移入) 증가율이 영국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나라가 되었다. 대조적으로 북한은 국제적으로 그 국민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그리고 정권의 손발들이 그들을 잡아들이려고 중국이나 동남아까지 쫓아다니며 온갖 행패를 다 부리는 나라로 각인되었다.
 
  이러한 남과 북 사이의 대비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쉽게 말해, 똑같은 날 해방과 분단을 맞은 남과 북은 어떠한 배경에서 이렇게 달라진 상황 속에 살게 된 것인가? 이 글은 이 물음에 대답해 보려는 시도이다.
 
 
  냉전과 분단
 
  1945년 8월 15일에 일제가 연합국을 상대로 항복을 선언해 한민족에게 해방이 찾아왔을 때 그러한 극적인 반전(反轉)이 나타날 것을 예상한 국민은 매우 드물었다. 더구나 분단을 예견한 국민은 없었다. 곧바로 38도선 이북을 소련군이 점령하고 그 이남을 미군이 점령하면서 남과 북의 우리 겨레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무엇인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 분단은 연합국의 공식 발표처럼 ‘잠정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3년 뒤 남에서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북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이 발표되었다. 분단은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적대적인 ‘국가’ 또는 ‘체제’의 성립이라는 방향으로 굳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차적 요인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전개되던 냉전(冷戰)이었다. 당시 양극(兩極) 체제를 형성한 채 세계정치를 좌우하던 두 초강대국은 제로섬(zero sum)의 사고(思考)방식과 논리에 얽매여, 다른 문제들에서도 그러했지만 한반도 문제에서 조금만큼의 양보도 허용하지 않았다. 여기에 한반도 내부에서의 이념적 대결 의식이 곁들여져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의 상황은 그랬지만, 돌이켜보면 오늘날 ‘잘사는 나라 한국’ 그리고 ‘못사는 나라 북한’의 원형은 바로 이 3년의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다음에서 살피기로 한다.
 
 
  김일성의 등장
 
  북한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된 단초는 불행히도 소련(그리고 1949년 이후에는 중공)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북한을 처음부터 바다와 거리가 먼 대륙적이면서 내향적(內向的)·폐쇄적 성격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련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소비에트 체제를 이식(移植)하는 것을 북한이 받아들임으로써 북한의 불운은 더욱 굳어졌다.
 
  일제가 패망하는 시점에 군사적으로 한반도에 먼저 진입한 쪽은 소련이었다. 소련 극동군 산하 제25군은 1945년 8월 10일에 함경북도 웅기로부터 들어와 8월 26일에 평양 점령을 완전히 끝냈다. 이후 북한에서 간접통치를 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상 군정(軍政)을 펴면서, 소련군의 뒤를 따라 9월 19일에 입북(入北)한 소련 극동군 대위 출신의 김일성(金日成)을 내세워 10월 10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分局)’을 세워 그를 북한의 중심적 지도자로 키우는 한편,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하순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소련·영국 등 연합국 외무장관 회의(3상회의)는 “연합국이 코리아에 통일된 임시정부를 세우고 이 정부를 상대로 5년 이내에 신탁통치(信託統治)를 실시하기로 한다”는 합의를 발표했다(회담에 참석하지 못한 중화민국은 문서로 동의했다).
 
  이 발표에 대해 북한에서는 김일성은 물론이고 여타의 세력이 지지했다. 조만식(曺晩植)을 당수로 출범한 기독교적 우익 중심의 조선민주당이 반대했으나 소련 점령군은 그들을 탄압했고, 그들 다수는 자유를 찾아 월남(越南)했다. 이처럼 모스크바 결정에 전반적으로 큰 저항이 없었기에 북에서는 소련의 점령정책 프로그램이 비교적 순탄하게 집행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소련 점령군은 12월 하순에 ‘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격상시키면서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선출했다. 1946년 2월 8일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제 34세의 청년 김일성이 소련 점령군의 비호 아래 당·정(黨政)을 모두 장악하면서 북한 정권의 정점(頂點)에 도달한 것이다. 앞의 것은 곧 훗날 ‘북조선로동당’으로(그리고 1949년 ‘남조선로동당’을 흡수해 ‘조선로동당’으로), 뒤의 것은 ‘북조선인민위원회’로 확대된다.
 
 
  사회주의적 개혁
 
  이처럼 북한에서 북한을 단위로 하는 단독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소련 점령군의 방침과 지시에 발을 맞추며 일련의 사회주의적 ‘개혁’ 조치들이 취해졌다. 거기에는 지주로부터 토지를 무상(無償)으로 빼앗아 농민들에게 돌려준 토지개혁, 노동자들에게 ‘8시간 노동제’를 약속한 노동개혁, 초등학교부터 의무교육을 다짐한 교육개혁, 그리고 남녀평등권의 보장을 포함한 사회개혁 등이 포함되었다.
 
  그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토지개혁만 해도 시행 시점에서 김일성은 “이제 토지는 영원히 농민의 것”이라고 큰소리쳤으나, 북한 정권이 1950년대 후반에 ‘농업 협동화’ 또는 ‘농촌 집단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부분의 농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토지를 포기하고 집단농장으로 들어가도록 강제했다. ‘8시간 노동제’의 경우 노동자들을 여러 구호 아래 끊임없이 강제노동에 동원해 의미를 잃었다. 대표적 사례가 1956년 12월 이후 몇 해에 걸쳐 추진한 ‘천리마운동’이다.
 
  훗날에는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당시 1000만 명 가까운 북한 주민들 가운데 다수가 환영했다. 반면에 ‘부르주아 계급’으로 단죄되면서 토지를 빼앗긴 지주들 그리고 탄압의 대상이 된 기독교인들과 상공업자들은 남한을 선택해, 소련군 점령기에 월남한 북한 주민의 수가 모두 합쳐 약 30만~50만 명 사이에 이르렀다.
 
  이 조치들에서 보듯, 북한 정권은 사유(私有)재산을 철저히 범죄시하면서 상공업을 억압했다. 또한 기독교를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여 탄압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단정하고 소련을 조국처럼 떠받들었다.
 
 
  법치주의가 붕괴한 북한
 
북한의 몰락은 소련이 스탈린주의 체제를 북한에 이식하면서 시작됐다. 사진은 김일성과 스탈린의 사진을 앞세우고 반미 시위를 벌이는 북한 주민들. 사진=연합뉴스/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러한 조치들의 배경에는 소련판 마르크시즘·레니니즘 또는 스탈린주의의 무조건적 수용이 있었다. 이 관영(官營)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에 대한 철저한 무시에서 출발했다. 인간은 소수(少數) 권력자 집단인 공산당(북한의 경우 조선로동당)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 이데올로기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 공산당 최고 권력자의 정부, 그리고 그에 의한 정부이면서 그를 위한 정부를 정당화하고 뒷받침했다. 그 이데올로기는 잘살아 보려는 인간의 생래적(生來的) 욕구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고 그러한 욕구에서 출발한 자본주의를 타도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자연히 기업 활동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간단히 말해 스탈린주의는 당이, 그리고 당의 최고 권력자가 곧 국가인 ‘당국가(party-state)’ 이론을 정당화했다. 여기에 법을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단정해 법치주의 자체를 부인하고, 그 연장선 위에서 삼권분립 이론을 부르주아 이론으로 몰아세우며 부인했다. 1950년대에 김일성이 우리나라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최고재판소(훗날 중앙재판소로 개칭) 소장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숙청한 사례, 그리고 서구적 의미에서 법관의 자격이 없는 당의 고위 인사가 최고재판소 소장에 임명된 사례 등은 북한에서 법치주의가 어떻게 무너졌는가를 말해 준다. 그 이후에 법치주의는 더욱 빠르게 붕괴해 사실상 완전히 최고 권력자 1인의 사인(私人) 지배로 귀결된다.
 
 
  북한에 남은 일제의 유산
 
북한의 국장(國章) 속 수풍댐은 일제가 북한에 남겨 준 유산이다.
  위에서 보았듯, 북한 정권이 철저히 사기업 활동을 억제함과 동시에 국가권력으로 경제를 장악한 채 운영했지만, 이 시기에는 겉으로 보기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일제의 풍부한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을 일시적으로 점령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자신의 일부로 삼아 통치하고자 했으며, 그 기반 위에서 만주를 비롯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해 경제적 이득을 최대화하고자 했다. 그러한 목적에서 평야가 많은 남한은 농경지대로 키우고자 한 반면에, 지하자원이 풍부한 북한은 공업지대로 키웠다. 압록강변의 평안북도 수풍을 비롯해 함경도와 평안도의 여러 곳에 수력발전소를 세우고, 함경남도 흥남에 대규모의 질소비료공장을 세운 것이 그 사례들이다.
 
  북한 정권은 이것들을 그대로 활용하며 공업 발전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일본인 기술자들의 귀국을 막고 그대로 체류하게 하면서 그들의 기술을 활용했다. 북한 정권은 친일파 숙청을 외치면서도 그들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조선인 기술자들을 그대로 활용했다.
 
  거기에 더해 소련으로부터의 지원이 있었다. 소련은 처음에는 북한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점령 후기에는 앞으로 전개될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염두에 두고 일정한 수준에서 지원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당과 정부 차원에서 단독정권 수립을 향한 행보를 비교적 순탄하게 진전시키고 일련의 사회주의적 개혁 조치들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적어도 외견상 성장과 안정을 이루게 되자, 소련군 점령이 끝나 가는 시점에서 김일성은 노골적으로 자만심을 드러냈다. 그는 “이제 북풍(北風)이 남조선을 휩쓸고 있으며 남조선을 해방할 날이 가까웠다”는 취지의 발언을 되풀이하기에 이르렀다.
 
  1948년 9월 9일에 김일성을 ‘내각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자 김일성의 자만 그리고 거기에 기초한 오판(誤判)은 결국 1950년 6월 25일의 전면 남침으로 나타난다.
 
 
  해양국 미국의 남한 점령
 
  남한이 흥기(興起)의 길을 걷게 된 단초는 북한과 정반대로, 대표적 해양국인 미국의 군사 점령 아래 놓이게 된 사정에서 찾을 수 있다. 대륙국과 달리 해양국은 대체로 개방적이면서 외향적(外向的)인 성격을 가지며 해외로 활발히 진출하는데, 남한은 바로 개방성과 외향성을 내재화(內在化)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이 개방성과 외향성이 1960년대 이후 두드러지게 발현되면서 한국의 흥기를 견인(牽引)한다.
 
  소련군보다 약 1개월 늦게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곧바로 서울에 군정청을 개설하고 직접 통치했다. 미국의 점령정책은 우선 자유민주주의의 보급이었다. 그러했기에 초기에는 복수(複數)정당제와 정당의 자유를 인정해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훗날 ‘근로인민당’으로 개명) 등 좌익 정당들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물론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기업 활동을 보장하는 조치들로 이어졌다.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미국 헌법 제1조의 정신은 미군정의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특히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소련 점령군을 피해 월남한 기독교도들이 교세를 확장해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확실하게 성장시킨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새삼 강조할 필요 없이, 기독교는 국제적 또는 범(汎)세계적 성격이 강하다. 한국은 미국과의 우호 협력을 증진시키면서 동시에 기독교를 매개로 서방세계로의 진출을 활성화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의 유학이 시작되고, 이것이 점차 확대되면서 한국이 서방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좌우합작운동의 무산
 
  앞에서 말한 모스크바 합의는 북한에서와 달리 남한에서 극심한 찬반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화시켜 말해,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 및 김규식(金奎植)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우익 세력은 반대하고,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 및 조선인민당 등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 세력은 찬성했으며, 이로 말미암은 좌·우익 간 투쟁이 격렬해졌다. 이 과정에서 1946년 10월에는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에서 미군정의 시책에 반대하는 투쟁(우익의 시각으로는 ‘폭동’, 좌익의 시각으로는 ‘항쟁’)이 전개되면서 좌우의 갈등은 더욱 깊어지고 사실상 내란(內亂) 상태가 조성되었다. 이 시점인 1946년 11월 23일에 남한의 좌익 세력은 자신들의 통합 정당으로 ‘남조선로동당’(약칭 남로당)을 출범시켰다.
 
  코리아에 관한 모스크바 협정은 코리아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미소(美蘇)공동위원회를 개최하도록 규정했다. 이 공동위원회의 성공을 돕기 위해 미군정은 남한의 좌·우익 지도자들에게 ‘좌우합작위원회’를 열도록 권고했고, 이에 따라 여운형(呂運亨)이 이끄는 좌익 지도자들과 김규식이 이끄는 우익 지도자들 사이에 몇 차례 회담이 열렸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두 차례 서울에서 열렸으나 역시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코리아의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1947년 가을에 미국은 결국 코리아의 독립 문제를 국제연합(유엔)으로 이관했으며, 여기서도 미국과 소련은 대치했다. 그렇지만 당시 유엔에 대해 결정적 영향력을 지닌 미국의 적극적 추진으로 유엔은 코리아임시위원단을 구성할 수 있었고, 이 위원단의 결정으로 1948년 5월 10일에 남한에서의 총선거 실시가 예정되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는 이승만.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점에서 제주도에서는 총선에 반대하는 남로당 주도의 투쟁이 격화되었다. 김구와 김규식 등도 5·10 총선이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결국 남북분단을 고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논리로 반대하며 북행(北行)을 결정해 평양에서 김일성을 상대로 협상했다. 그 결과는 ‘주한미군 철수, 유엔의 개입 반대’라는 김일성의 일관된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합의문의 채택이었다.
 
  당시 밖으로는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련은 남한에서 반공적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김일성 정권은 거기에 발맞추어 남한 안에서의 정부 수립 운동을 방해하고 있었으며, 안으로는 좌우 투쟁이 심화되면서 좌익 역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러한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구한말에 개혁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선두에 섰던 이승만은 확고한 자유민주주의 사상 그리고 반공주의 사상을 포지(抱持)한 채, 경우에 따라서는 미군정에 저항하면서까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결국 유엔의 결정대로 5월 10일에 총선거가 실시되고, 그 선거에 따라 구성된 제헌의회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곧 제1공화국이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기적 같은 일이었으며, 이승만의 강인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발전의 원형은 이때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남조선 인민이 공산주의 아래에서의 남북통일을 기대하고 있다’고 망상한 김일성은 1949년 3월에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을 제의했다. 당시 측근의 한 사람으로 훗날 소련공산당 제1서기 겸 수상이 되는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스탈린-김일성 회담에 관해 언급하며 “김일성은 남조선이 아주 취약한 풍선과 같아 한번 찌르기만 하면 곧바로 터질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남침 계획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증언했다.
 
 
  ‘세상에 부럼 없어라’
 
  스탈린이 신중을 기하라고 제동을 걸자 김일성은 1950년 1월에 다시 스탈린을 찾아가 똑같은 제의를 되풀이했고, 스탈린은 마침내 승인했다. 곧이어 중공의 마오쩌둥(毛澤東)도 지원을 약속했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나 37개월 계속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되었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전쟁이 1953년 7월 27일에 ‘현장에서의 정전(停戰)’으로 마무리된 이후 김일성은 1953년 9월과 11월에 소련과 중공을 각각 방문해 원조를 얻어 냈고, 1956년 8월에는 소련 및 공산권을 순방해 심지어 매우 가난한 몽골로부터도 원조를 받았다. 동시에 반대 세력을 철저히 숙청해 1인 독재 체제를 더욱 굳혔다. 중공업 육성 중심의 경제정책을 전개해 외견상 상당한 ‘성장’을 과시했다.
 
  기세가 등등해진 김일성은 1956년 무렵 ‘세상에 부럼 없어라’라는 가요를 보급했다. ‘부럼’은 ‘부러움’이라는 뜻으로, 북한은 ‘세상에 부러워할 것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는 오만하면서도 자기기만적인 주장이다. 그는 계속해서 남을 ‘미제(美帝)의 식민 지배 아래 온 인민이 굶주림과 헐벗음에 시달리는 지옥’으로 대비하면서, 잘사는 북이 못사는 남을 원조하겠다는 제의를 공식적으로 반복했다. 이 일련의 제의를 보면, 북은 자신을 선물을 가득 실은 썰매를 몰아가는 산타클로스로, 그리고 남을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금세 깨닫게 된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한국에서 제1공화국이 무너지자 김일성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제2공화국에서 좌경적(左傾的) 혁신계가 제1공화국 이후 금압(禁壓)한 북한과의 협상을 지지하는 운동을 전개하자, 북한 정권은 적극 지지하면서 남한 내부에서 친북(親北)·친사회주의적 ‘인민 봉기’가 일어나도록 부채질했다.
 
 
  주체사상
 
  그사이 처음에는 굳게 단결해 있던 소련과 중공의 관계에 균열이 생겨 이른바 중소(中蘇) 분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김일성은 ‘주체(主體)’를 부르짖으며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이 ‘주체’는 1965년 4월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방문해 알리아르함 학술원에서 행한 김일성의 연설에서 이론화되었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는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음에 비해 북한은 주체를 지향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오였다. 김일성이 말한 주체는 민족의, 국가의, 당(黨)의 주체가 아니라 김일성 개인의 주체로, “내가 하는 일에 일절 간섭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주체’에 대한 반응이 좋다고 판단해, 《로동신문》은 1966년 8월 12일에 ‘자주성을 옹호하자’라는 사설을 발표하면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自衛) 이것은 우리 당의 일관된 방침”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했으나 실제에 있어서 북한이 점점 더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안으로 오므라드는 내향적·폐쇄적 방향으로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18개월 뒤인 1968년 1월 21일에는 무장공비 31명을 남파해 청와대를 기습하게 하고, 이틀 뒤에는 북방 동해안에서 미 해군 정찰함을 나포했다. 가을에는 남방 동해안으로 대규모의 무장 군인을 침투시켜 게릴라전을 벌였다. 북한의 이러한 호전적(好戰的) 대외(對外) 행태는 한반도에서뿐만 아니라 동북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고,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국가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수출立國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이후 거의 매달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전시된 수출품들을 살펴보면서 수출을 독려했다. 사진=조선DB
  1960년까지만 해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70달러에 못 미쳐, 확실히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최빈국(最貧國)들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한국은 자신의 힘으로 국민의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정부 예산 자체의 대부분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 역량으로 1953년 10월 1일에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끌어내 대한민국의 안전을 굳건히 함과 동시에 국제사회에 한국은 미국이 지원하는 우방국임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한미동맹은 이후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는 튼튼한 울타리가 된 것이다. 6·25전쟁은 민족적으로 매우 불행한 참변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의 외향성을 자극해 미국 또는 서방세계로의 유학과 이주 및 진출을 북돋았다.
 
  1960년 4월의 ‘시민혁명’ 이후, 특히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정변’ 이후, 한국의 역대 정부들은 ‘수출입국(輸出立國)’의 구호 아래 수출 품목의 확대와 증산에 역점을 둔 관(官) 주도형 경제개발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그 흐름 안에서 1970년대 중반 이후 중화학공업이 육성되면서 산업과 수출 품목의 성격 자체를 선진화시켰다. 그 정책은 자연히 과학과 기술의 진흥과 발전을 동반했다. 동시에 그 정책은 기업의 성장과 발전을 뒷받침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에 기업가 정신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정신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불가피하게 해외 지향적인 그 정책은 한국의 해외 진출 및 국제 교류를 넓혔으며, 국제사회에 깊이 개입하고 국제사회에 의해 깊이 ‘침투된’ 한국을 개방사회로 바꾸어 놓았다. 1960년대에 이뤄진 일본과의 국교(國交) 수립 및 베트남 진출, 1970년대에 이뤄진 중동 진출, 그리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 초기 사이에 이뤄진 북방권 진출은 그러한 전환에서 촉매제의 역할을 수행했다.
 
 
  지주-소작인 관계 소멸
 
  한국이 이처럼 상업국가·무역국가로 성장 발전하면서 농업은 과거처럼 주된 산업의 지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농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50년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줄어들었다. 1953년 현재 47.3%였던 것이 2008년 현재 약 2.5%로 격감한 것이다. 농업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 역시 크게 줄어들었다. 자연히 과거의 지주 계급은 힘이 크게 줄어드는 가운데 사실상 와해되었고 소작인 계급 역시 사실상 소멸되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배링턴 무어 2세(Barrington Moore, Jr.)는 지주와 소작인 계급이 존속하는 사회는 결코 근대화된 사회가 아니며, 이 두 계급의 그리고 그들 사이의 봉건(封建) 관계의 소멸 위에 근대국가가 성립하고 민주주의가 진전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한국이 농업국가로부터 상업국가·무역국가로 확실하게 바뀜에 따라 지주와 소작인 계급 및 그들 사이의 봉건 관계가 소멸함으로써 한국에는 근대국가가 성립될 수 있었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한국인 특유의 교육열에 바탕을 둔 우수한 인재들의 성취 욕구가 크게 작용했다. 그것들이 모두 종합되면서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독립한 국가들 가운데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이자 ‘세계 20대 대국 그룹’에 진입했고, 또한 원조를 받던 후진국에서 원조를 주는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그 결과 특히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판단으로는 1972~73년을 고비로 남과 북의 생활 여건이 확연하게 역전되기 시작했다. 서구적 의미의 자유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경제적 지표들만 놓고 볼 때, 남이 북을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973년 10월에 일어난 제1차 석유 파동과 1978년 12월 제2차 석유 파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은 헤쳐 나와 경제성장을 계속해, 1978년에 세계은행 기준으로 신흥공업국가 그룹의 일원으로 인정받지만, 북은 거기서 빠진 채 쇠락의 길에 들어섰다.
 
  ‘남한의 흥기와 북한의 쇠락’과 관련해, 2024년 노벨경제학상 공동수상자인 대런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다론 아제모을루) MIT 경제학과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James A. Robinson)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가 공저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검토하기로 한다. 저자들은 이 책의 제3장에서 ‘동질성이 매우 높은 단일민족’이 1945년 8월에 남과 북으로 나뉜 이후 걸어온 길을 비교했다. 이 비교에 따르면 남한은 세계의 부유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북한은 세계의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차이가 발생했는가? 저자들은 그 원인을 남과 북이 각각 채택한 ‘정치적 및 경제적 제도’에서 찾았다.
 
  남의 경우 정치제도가 ‘포용적’이었다. 다원주의(多元主義)의 원리와 사유재산 보장의 제도 아래, 권력이 사회 전반에 분산되어 있고 국민은 직업을 인센티브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며, 따라서 누구에게나 경제적 기회가 주어져 있고 정부는 국민의 요구에 반응하면서 책임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 대조적으로 북은 정치제도가 기본적으로 ‘억압적’인 데다가, 개개인의 인센티브를 허용하지 않으며 소수의 특권층이 자원을 독점하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취하는 ‘착취적’인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그 결과 남은 ‘성공한 국가’가 되었고 북은 ‘실패한 국가’가 되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관찰이다.
 
 
  북한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북한 정권의 본질을 다시 생각할 필요를 느낀다. 그사이 한국의 사회과학계뿐만 아니라 세계의 사회과학계에서도 북한을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론 ▲‘신(新)전체주의체제’론 ▲‘당국가(party-state)’론 ▲‘동원체제’론 ▲‘수령체제’론 또는 ‘수령절대주의’론 ▲‘병영국가’론 ▲‘신정체제(神政體制)’론 또는 ‘사이비종교집단’론 ▲‘폭력적 강압체제’론 ▲‘유격대국가’론 ▲‘극장국가’론 ▲‘봉건체제’론 또는 ‘봉건적 군벌체제’론 ▲‘내재적 접근’론 등의 개념 또는 방법론으로 분석하고 설명하고자 했다. 그것들 가운데 특히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론은 지난날 소련과 동유럽 공산 국가들, 그리고 마오쩌둥 당시의 중국을 설명하는 데 유효했고, 김일성의 북한과 김정일의 북한 그리고 오늘날 김정은의 북한을 설명하는 데도 유효하다.
 
  그러면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론의 내용은 무엇인가? 원래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을 연구하며 개발한 이 이론은 ▲누구도 그 타당성에 대해 질문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이데올로기 ▲그 이데올로기의 구현자로서의 단일한 지도자 ▲그 단일한 지도자를 유일한 지도자로 떠받드는 대중적 정당 ▲정치적 반대자는 물론이고 무고한 시민에 대해서도 테러를 일삼는 비밀경찰을 통한 폭력의 독점 ▲매스컴의 독점을 통한 철저한 언론 통제 ▲경제의 완전한 중앙집권적 기획 등을 특성으로 삼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 여섯 가지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그것은 ‘권력의 사법부 장악을 통해 법과 정의를 권력의 뜻에 맞게 운영하는 특성’이다.
 
  북한 정권은 이 특성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거기에 더해 특히 김일성 통치의 후반부와 김정일 통치기 전체 그리고 김정은 통치의 경우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의 특성에 ‘과도한 대중적 의식(儀式)과 집회에 대한 강제적 참여’와 ‘끊임없는 세뇌교육’이 추가된 ‘신전체주의체제’론 역시 유효하다.
 
 
  ‘신가산제(新家産制) 私人독재 정권’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을 참배하는 북한 주민들. 오늘날 북한은 ‘신가산제 사인독재 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의 세습이 이루어져 김정은 정권이 공식적으로 등장하면서, 김정은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대체로 2012~13년부터 북한 정권 스스로 ‘백두혈통’론을 정립하고 전파했다. 김일성과 김일성의 첫 부인 김정숙이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 사이에 ‘백두산 밀영(密營)’에서 태어났다는 김정일이 ‘백두혈통’을 이어받아 후계자가 되었듯,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이 ‘백두혈통’을 이어받아 후계자가 되었다고 선전함과 동시에, ‘백두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지도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리론’을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리론’에 기초해, 2013년에 기존의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개정하고 세습 체제를 공식화했다.
 
  김일성과 김정숙이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는 주장에는 큰 줄거리에서 사실이 포함되었으나, 과장은 물론이고 때로는 거짓마저 포함되었다.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거짓이지만,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이러한 ‘리론’은 서방세계의 인식론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궤변임은 물론이다. 그 공식적 궤변 자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고 ‘인민’의 나라도 아니며 ‘공화국’도 아니라 봉건적이며 세습적인 ‘왕국’임을 말한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국가이론이 스위스의 정치학자 카를 할러가 개발하고 독일의 세계적이면서 세기적(世紀的)인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가 명확하게 정립한 ‘가산제국가(家産制國家·patrimonial state)’론이다. 베버는 군주가 국가를 자신의 세습 재산으로 취급하는 왕국을 염두에 두고 그 개념을 설정했는데, “가산제 국가에서 영토와 인민은 군주의 사유(私有)로, 재정은 군주의 사수입(私收入)으로, 전쟁은 군주의 사사(私事)로 간주되고, 공법(公法)과 사법(私法)의 구별이나 통치권과 소유권의 구별이 없으며, 군주는 이러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의 주체로서의 권력자로 간주된다”. 베버의 이 개념을 빌려 김진무 교수는 북한을 ‘봉건왕조 가산제적 독재국가’로 명명했고, 최봉대 교수는 ‘신가산제(新家産制) 사인(私人)독재 정권’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어떠한 개념보다 최 교수의 이 개념이 오늘날의 북한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존 로빈슨과 루이제 린저
 
  북한 정권의 본질이 그러한데도 그 본질을 가려 주고 오히려 미화함으로써 외부인의 인식을 오도(誤導)한 저술은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 사례로 두 가지만 지적하겠다.
 
  첫째, 영국의 세계적인 경제학자 존 로빈슨(Joan Robinson)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1965년에 발표한 논문이다. 마르크시스트 경제학자로 《자본의 축적》 같은 저서로 명성을 얻은 그는 1964년 10월에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한 뒤 발표한 이 논문에서, “북한이 김일성에 대한 긍지를 가진 북한 인민의 집합적인 노력의 결과로 경제적 성취를 이룩했다”고 평가하면서 그것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김일성을 “독재자라기보다는 메시아(a messiah rather than a dictator)”라고 극찬했으며, “조만간 남한은 사회주의 아래 흡수통합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둘째, 서독 작가로 1950년에 출판한 《생(生)의 한가운데》를 통해 국내에 널리 알려진 루이제 린저(Luise Rinser)가 1981년에 출판한 《북한기행기》이다. 그는 자신이 “히틀러의 나치즘에 저항해 투옥되었고 나치 독일의 패전 이후에는 평화주의자로 일관되게 생활했다”고 고백해 독일과 해외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980년 봄에 3주 동안 북한을 방문하고 쓴 이 책도 그래서 좋게 받아들여졌다. 이 책에서 “북한에는 범죄 자체가 없으며 그래서 형무소가 없고 다만 교화소가 있을 뿐인데, 교화소에 들어온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가 원할 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취지로 썼다. 이어 “북한에서는 영양과 예방검진의 덕으로 감기와 결핵이 전멸되었고, 장애인이나 불구자가 전혀 없다”는 취지로 썼으며, “북한에는 가난이 없다”고 단언했다.
 
  뭔가 모순되는 루이제 린저의 행적에 의문을 품은 독일의 몇몇 연구자들의 끈질긴 연구 결과로 나치즘에 저항했다는 고백은 거짓으로 드러났고, 오히려 히틀러를 찬양한 사실이 밝혀졌다. 북한에 관한 설명 역시 거의 거짓이었다.
 
 
  정치 지도자들이 중요
 
  남한의 흥기와 북한의 쇠퇴라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수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너무나 큰 격차를 보이는 남북한의 경제력이다. 현재 한국의 명목국내총생산(GDP)은 2161조8000억 원인 데 비해 북한의 그것은 36조2000억 원으로 한국의 1.7% 수준이며, 1인당 GDP는 한국은 4700만원이 넘지만 북한은 한국의 30분의 1에 해당하는 150만원 수준이다. 그 소득 격차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 무역 총액 격차는 거의 2000 배로 벌어졌다. 역시 2022년 기준으로 한국의 무역 총액은 1조4151억 달러인 데 비해 북한은 7억1000만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격차를 쉬우면서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한밤중에 찍어 2014년 2월 26일에 공개한 한반도 위성사진이다. 밝게 빛나는 훤한 모습의 한국과 깜깜해서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북한이 뚜렷한 대비를 보이는 것이다. 미국의 테슬라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는 2023년 12월 31일에 자신의 SNS에 한반도를 밤에 촬영한 위성사진을 ‘낮과 밤의 차이’라는 글과 함께 공유하면서, “한 국가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눈 뒤 70년 후에 비교해 보자”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낙관해서는 안 된다. 한 국가의 흥기와 쇠락은 그 구성원들, 특히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를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이 자만감에 빠져 국가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북한에 대한 정책을 잘못 세워 대응할 경우, 상황에 큰 변화가 올 수 있다. 이 점에서 특히 새 정부의 건전한 정책 수립과 집행이 요청된다.
 
  한국의 경우, 산업화의 진행 과정에서 많은 문제 또는 병폐가 드러났다.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율 1위라는 공식 통계는 충격적이다. 새 정부는 이러한 병폐의 수술에도 진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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