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훈 작가는 "나의 글쓰기는 부사와 형용사 죽이기"라고 말했다. 사진은 《월간 시인》 4월호 캡처.
최근 발행된 시(詩) 전문지 《월간 시인》 4월호에 《하얼빈》의 소설가 김훈의 글쓰기 방법론이 실려 흥미를 끌었다.
지난 3월 4일 프레스센터 서울클럽에서 열린 사단법인 겸수회(兼修會) 초청 <김훈의 ‘글쓰기와 글씨 쓰기’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김훈 작가는 서정성을 극대화한 단문 중심의 독특한 문체로 장편 《칼의 노래》, 《남한산성》, 《하얼빈》 등을 펴내 주목을 받았다.
그는 “글 쓸 때 형용사를 싫어한다. 형용사로는 사물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며 “초고를 쓴 뒤 퇴고할 때 형용사와 부사를 모조리 죽인다”고 했다.
다음의 내용은 《월간 시인》 홍찬선 편집인이 정리한 내용이다.
시 전문지 《월간 시인》 4월호
명사 3개, 동사 4개로 된 명시 ‘산유화’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가 있다. ‘산, 꽃, 새’라는 명사 3개와 ‘핀다, 운다, 산다, 진다’는 동사 4개로 천지자연, 우주만물의 이치를 멋들어지게 표현했다. 형용사와 부사는 ‘좋아, 없이, 저만치, 혼자서’ 등 꼭 필요한 것에만 극히 제한적으로 썼다. 오로지 김소월만이 쓸 수 있는, 김소월이 아니면 안 되는 명시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전문
시에서도 이런 것처럼, 나는 소설에서 형용사와 부사 없이 쓰는 글을 쓰도록 노력한다. 내가 형용사를 싫어하는 것은 사물을 형용할 수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이라는 표현에서 ‘추운’이란 형용사가 표현하는 것은 거의 없다. ‘노란 개나리’의 ‘노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부사와 형용사를 완전히 죽일 수는 없다.
이육사의 시 ‘광야’는 절제된 부사와 형용사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특히 제4연은 ‘지금’과 ‘홀로’, 그리고 ‘여기’라는 부사 3개와 ‘아득하다’와 ‘가난하다’는 형용사 2개로 절대고독을 은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외로운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와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는 싯구로 절대고독을 이겨내려는 큰 의지를 나타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비결이다. 한국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언어의 감각성을 멋지게 보여주었다.
‘광야’에 나오는 이육사의 부사는 바로 ‘혁명가의 부사’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이육사, ‘광야’ 제4연
나는 2022년 8월에 장편소설 《하얼빈》을 출간했다. 하얼빈에서 “이토가 곧 죽었다”라고 썼다. 안중근 의사가 쏜 총알에 맞은 뒤 이등박문이 죽는 장면이다. 나는 처음에 ‘곧'’란 부사 없이 “이토가 죽었다”라고 썼다가 고쳤다. 개정판을 낼 때 ‘곧’을 뺄까를 고민하고 있다.
부사 하나, 형용사 하나에 대해 끝까지 고민하는 것이 자신만의 문체를 만든다.
문체는 작가의 운명이다
《하얼빈》을 쓰려고 자료조사를 하다 안중근과 우덕순에 대한 검찰조서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안중근은 사냥꾼이라 했고, 우덕순은 담배팔이라고 답했다. 안중근을 만나서 무슨 말을 했느냐는 물음에는 이토를 죽이러 가자고 해서 함께 하얼빈에 왔다고 했다.
그들의 펄떡거리는 젊음에 빠져 《하얼빈》을 썼다. 그런 설렘이 소설의 재료가 된다. 나는 역사소설을 쓸 때 많은 자료보다 이같은 설렘을 더 중시한다. 자료는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정도로 충분하다.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이토를 죽이려고 하얼빈역으로 갔던 1909년에 화가 고희동(1886~1965)은 유화를 배우러 동경으로 갔다.
그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1915년 귀국했다.
고희동은 평생 물 (수묵화)과 기름(유화)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구본웅이 1937년에 쓴 고희동과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명문가 자제로서 수묵화를 하다가 유화를 배운 뒤 왜 다시 수묵화로 돌아왔나?”라는 날카로운 질문에 “왠지 모르게 그렇게 됐다”고 엉성하게 대답했다. 구본웅은 웬일인지 더 캐묻지 않았다. 구본웅은 고희동의 대답이 솔직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서양화 기법으로 동양화를 시도했지만, 도저히 안 됐다.
서양화를 한국으로 옮겨와 수묵화와 융합하려고 했는데, 형식적으로 꽂는 이식(利殖)에만 머물렀고, 내면화해서 융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고희동의 "어쩐지"라는 부사는 임화가 '이식문화사'라고 폄하한 근대사의 비극을 설명한 담담한 말일 수 있다. (중략)
문체는 작가의 팔자다.
문체는 가수에게 음색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라 향가 가운데 <찬기파랑가>가 있다. 거기에 ‘열치매 나타난 달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매’가 한자에 없는 한글의 독특한 표현이다. ‘매’ 한 글자 덕분에 평면의 글이 동영상으로 나타나는 효과가 나온다. 내가 살아가는 한글의 문체다. 문체의 비결은 한국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언어의 감수성이다.
(※ 자세한 내용은 시 전문지 《월간 시인》 4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