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총선을 앞두고 586운동권 세대 퇴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그 시절을 다룬 소설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1990년대에 공지영 등의 '후일담 소설'들이 1980년대 운동권을 긍정하는 바탕 위에 그 시절을 아련하게 회고했다면, 최근 나오는 소설들은 그 시절 운동권의 위선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얼마 전 나온 <도림천연가>(이연수, 타임라인)는 82학번 서울대생의 설익은 의식과 사랑을, <86학번 승연이>(박선경, 북앤피플)은 86학번 지방대 운동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월간조선>에서 위의 두 소설들을 소개하자 라문찬이라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보내왔다. <드보크>(나무 옆 의자)라는 소설이었다. 작가는 자신을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이다. 직장을 다니며 다른 필명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썼다. ‘라문찬’은 레이먼드 챈들러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에드거 앨런 포를 흠모하여 이름마저 바꾼 추리 작가 에도가와 란포처럼 되고 싶었다"고 소개한다.
솔직히 1980년대 운동권을 다룬 소설들을 읽는 것은 그 시절 대학을 다니면서 그들을 거부했고, 지금도 그들과 싸우고 있는 나로서는 조금 거북하다. 현실에서도 그들의 억지와 위선을 지긋지긋하게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또 다시 그들을 대면하라고? 솔직히 싫다. 그럼에도 <도림천연가>나 <86학번 승연이>를 읽고 서평을 쓴 것은 운동권을 고발하는 책을 용감하게 펴낸 작가와 출판사에 대한 '전우애' 때문이었다 (물론 읽고 난 후에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인정하게 되었지만).
<드보크>는 <도림천연가>나 <86학번 승연이> 세대보다는 조금 뒤의 운동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드보크>라는 제목에서, 이 소설이 운동권과 북한의 연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북한 공작원들과 접선하고, 노동당에 입당했으면서도 그 사실을 감추고 오늘날 한국 정치의 주역으로 행세하고 있는 세대, 그리고 '김일성 장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런 주제들을 다루기에는 부담이 좀 있어서일까? <도림천연가>나 <86학번 승연이>가 '자전적 소설' 형식이라면, <드보크>는 스릴러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만큼 소설적 상상력이 펼쳐질 여지가 많다고 할까?
소설은 한 무리의 H대(한양대일 것이다) 학생들이 북한 공작원 앞에서 노동당 입당 선서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월간지 기자에게 뭔가를 제보하려던 사내가 피살되고, 그 월간지의 김소미 기자는 사건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그 뒤에는 1990년대 한국 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던 '지하당 사건'과 그 관련자들의 의문사 사건들이 숨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1980년대 후반 H대학 NL의 거두였다가 현재는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오른 안경석 의원과 H대학 PD의 우두머리였지만 지금은 중장비 기사가 되어 병든 아내 미영을 돌보는 김성찬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NL과 PD의 대립, 미영을 둘러싼 경석과 성찬의 사랑 싸움 등 그들의 대학 시절 이야기가 펼쳐지다가 소설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납치와 폭력, 반전(反轉)....영화 <범죄도시>를 연상케 한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생략하지만, 소설은 헐리우드의 시리즈물이 그러는 것처럼 이 이야기의 2탄이 남아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 속 인물들이 누구를 모티브로 한 것인지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 재미가 쏠쏠하다.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김부겸 전 총리로 여겨지는 인물들이 보인다 (어디까지나 소설 속 모티브가 되었다는 것이지, 그들이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로서는 반갑게도, 사건을 추적하는 기자가 속한 매체는 <월간조선>, 그 기자를 도와주는 원로 기자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편집장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도 보인다.법조계, 언론계, 정부, 군부 등에 침투한 '김일성 장학생'들의 존재도 언뜻 비춘다.
이 소설은 1980년대 후반 NL이 어떻게 PD를 제압하고 대학가, 더 나아가 이 나라 운동권 전체의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운동권 정치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586운동권과 북한과의 유착이라는 문제를 직격한다. 스릴러소설이나 추리소설로서는 약간 밀도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쉽지만, 조금 더 세상이 좋아지면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