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2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북송 재일교포의 증언, 함경북도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 세미나에 발제자로 나선 이상봉(가명)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월간조선
"밥을 넉넉히 준다기에 자진해서 탄광에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며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국군포로 형님 3~4명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2006년 탈북해 2007년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까지 이들은 살아있었다.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왔을 때 이들은 큰 기대를 했었는데, 이후 실망했던 얼굴들이 눈에 선하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우리를 버리나 보다'하고 실망했다."
'북송 재일교포의 증언, 함경북도 탄광에서 만난 국군포로들' 세미나에 발제자로 나선 이상봉(가명)씨는 이같이 말했다.
사단법인 물망초가 주최한 북한 인권세미나가 11월 2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세미나 발표자들은 북한인권 개선 및 국군포로 귀환 등을 촉구했다.
1946년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난 이상봉씨는 북한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날조 선전을 믿고 1960년 북송선을 탔다. 이후 함경북도 유선군(이후 회령시에 편입)의 탄광에서 일했다.
이씨는 "갱 밖은 최저 영하 26도, 갱 안은 영상 34도 이상이었다"면서 "북극과 적도 차이의 환경이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은 국군포로를 '관대히 용서해 줄 수 있는 포로'와 '용서해 줄 수 없는 포로'로 나누어 관리했다. 전자는 정치범수용소에 들어갔고, 후자는 탄광에 배치돼 노역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국군포로 형님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이들은 자기한테 오는 사람은 다 밀고자, 감시자라는 생각에 절대 사람을 곁에 붙이지 않더라"면서 "'나는 일본에서 와서 같이 고생하는 사람이니 믿어 달라'고 했다"고 했다.
이씨가 기억하는 국군포로들의 이름은 이승식, 리상범, 박주용, 주용수, 박팔양 등이다. 이씨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국군포로들에게 3명 이상 모이지 말 것,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지 말 것, 대한민국 대신 '남조선 괴뢰' 호칭을 사용할 것 등의 규칙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씨는 자신과 친하게 지낸 이승식이 "1989년 또는 1990년 탈북해 중국으로 갔다가 공안에 붙잡혀 강제 송환된 뒤 아내, 세 자녀와 함께 공개 총살됐다"고 기억했다.
이씨는 자신이 탈북해 일본이나 한국에 갈 것을 미리 생각했더라면 국군포로들에 대해 더 자세히 기록했을텐데 그러지 못했다며 "아쉽고 미안하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함께 일했던 국군포로들은 1931∼1933년생이 많았고, 지금 살아있다면 90살이 넘었을 것"이라면서 "하루 빨리 국군포로를 구원하자"고 호소했다.
책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의 저자 이혜민 작가(전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는 "정전협정 이후 국내로 돌아온 국군포로를 만나 취재한 뒤 이들의 증언을 모아 책을 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갱도 내 온도에 관한 기억이나 이씨가 직접 목격한 북한 문건 속 내용은 구체적인 부분이 많다"면서 "다른 국군포로의 증언과 교차 검증해보면 사실성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박선영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은 이날 행사가 끝난 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간 우리 정부는 국군포로 송환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면서 "정부와 시민 사회가 국군포로 송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들을 국내로 데려올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글=김세윤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