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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월간시인》 10월호가 분석한 "기형도 시집이 한국시의 신화가 된 비밀"

《입 속의 검은 잎》 100쇄 갈아치워… 50~60만 가량 판매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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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기형도 시인과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

시집은 팔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떤 시집은 몇 만 부, 아니 그 이상 엄청나게 팔려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다. 대박 난 시집 중에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이 있다.

 

월간시인10월호에 고용석 편집장(시인)베스트셀러 시집의 비밀이라며 입 속의 검은 잎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이유에 대해 글을 썼다. 흥미로워 요약해 소개한다.


198937일 새벽 4시 강문영 주연 영화 <2> 상영을 마치고 파고다극장 안을 정리하던 경비원은 어둠 속에서 소주병을 든 채 의자 밑에 쓰러져 있는 한 젊은이를 발견했다. 극장 사람들에 의해 시신은 을지로 녹십자병원으로 옮겨졌고 사인은 급성 뇌졸중으로 밝혀졌다.

 

생일을 엿새 앞둔 스물아홉의 시인 기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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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시인》 10월호에 고용석 편집장(시인)이 쓴 <기형도 시집이 32년 동안 한국시의 신화가 된 비밀> 기사다.


죽음의 장소로 인해 기형도가 동성애자였다느니, 불치병을 앓아 자살한 것이라느니 하는 억측이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았으나 곧 잠잠해졌다. 대학시절 연세문학회 친구 소설가 김태연은 그 소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형도가 기자로서 취재 욕심도 있었고 장기적으로는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 삼아서도 그 극장엘 한번 가보고 싶다 하였지요. 하지만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난다 하여 같이 몇 번 갔었던 겁니다. 죽기 전 마지막 통화에서도 다음 날 자정쯤 그 극장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었는데.”


친구인 소설가 성석제와 평론가 김현에 의해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발간되었다. 초판 24, 재판 41, 65쇄를 찍었는데 순식간에 24만 부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열풍은 군사 독재와 민주화운동의 격변을 겪은 독자들이 기형도의 시 속에 녹아 있는 시대적 아픔과 어둠에 빨려 들어간 탓이었다.

 

시 속에 내면화된 시인의 1인칭 언어 고백 전개가 독자들에게 마치 나의 마음을 대신 이야기해주고, 어루만져 주는 것 같은 공감을 주기에 독자들은 더욱 그의 시에 열광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여튼 이 한 권의 시집으로 80년대 이후 기형도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시집이 나온 지 벌써 30여 년이 넘어섰다. 최근 100번을 넘어설 정도로 쇄()를 갈아치웠다. 그동안 팔린 그의 시집은 정확하지는 않아도 50~60만 부에 가깝지 않을까. 대부분의 베스트셀러 시집들이 어느 시기에 정점에 올랐다가 사그라지는 것이 상례지만 기형도의 시집은 현재도 계속 진행형이다.


박정만-기형도-김현의 죽음


기형도의 시는 전반적으로 죽음이 안개처럼 스며 있다. 그의 성장 속에서 깊게 자리 잡은 죽음의 그림자가 시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우선 박정만-기형도-김현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박정만 시인이 1988102일 저녁 5시 서울 봉천동 자택 화장실에서 앉은 채 자는 듯 숨을 거두었는데 시인 기형도가 문상을 가며 혼잣말처럼 그처럼 접신의 경지에서 시를 쓰다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행복할까하는 소리를 여러 번 되풀이 했다고 한다.

 

김현이 기형도 사후 시 곳곳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말했는데 김현도 덜컥 기형도를 따라가 버렸다.

 

그러니까 1988102일 죽은 박정만 시인의 죽음이 다섯 달 뒤인 198937일 기형도 시인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뒤이어 입 속의 검은 잎해설을 쓴 김현 역시 1990627일 세상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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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시인》 10월호 커버 모습이다.

 

윤동주와 기형도, 기형도와 윤동주

 

가정 배경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버지가 1975516일 정초 세배를 왔던 사람들과 마신 양주가 탈이 되어 뇌졸중으로 쓰러져 중풍으로 방에 누워만 지냈다고 한다. 또 바로 위 누나는 목이 졸린 채 집 앞 논바닥에 파묻혔다가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이 죽음은 기형도가 시를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림중, 중앙고를 졸업한 그는 1979년 연세대 정법대 정법계열에 입학을 하는데, 그가 서울대를 가고도 남을 성적이었음에도 일부러 연세대를 택한 것은 윤동주가 나온 대학이란 이유에서였다. 기형도의 인생 목표는 윤동주의 시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이 좋아할 시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윤동주 시비 뒷면에는 윤동주가 29세에 목숨을 잃었다고 적혀 있다. 공교롭게도 기형도와 숨진 나이가 같다. 엄밀히 말하면 살았던 기간이 윤동주는 만271개월. 기형도는 만 2811개월이다.

 

한양대 유성호 교수는 기형도 시인 30주기 추모 심포지엄에서 두 시인은 청춘의 언어, 미완의 언어를 사용했으며,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고민을 내면화하여 1인칭 언어로 고백했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많다고 하였다.

입력 : 2023.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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