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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연평해전 영웅' 이희완 보훈부 차관 임명을 계기로 본 각국의 상이군인 출신 군인-정치인들

넬슨, 모세 다얀은 부상 후에도 軍에 남아 전공 세워... 두 다리 잃은 덕워스 미 상원의원, 네이비씰 출신 댄 크렌쇼 미 하원의원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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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연평해전 당시 참수리357정 부정장이었던 이희완 신임 국가보훈부 차관. 사진=조선DB

2002년 제2차 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정 부정장(중위)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던 이희완(47‧해사 54기) 대령이 국가보훈부 차관이 됐다. 이 차관은 금년 1월 대령으로 진급했는데, 보통 대령이 국방부 과장, 소장이 국장급인 것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승진이다.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이희완 차관 임명을 발표하면서 “영웅이 대우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희완 차관도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을 일군 영웅들의 국가를 위한 헌신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면서 "이번 차관 임명은 해군 소위 임관 이후 지난 23년간 국가안보 현장에서 역할을 한 저에게 국가유공자와 제복근무자, 국민을 위해 봉사하라는 특별한 소명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희완 차관은 2002년 6월 29일 벌어진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정장 윤영하 대위가 전사한 후 25분간 교전을 지휘하다가 북한의 37㎜ 포탄을 맞아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이 공을 인정받아 이 차관은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지만, 부상으로 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전역심사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심신장애로 인하여 현역으로 복무하는 것이 적합하지 아니한 사람’은 ‘전역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현역에서 전역시킬 수 있다’는 군인사법(제37조1항 1호) 규정에 의한 것이었다. 다행히 ‘전투 또는 작전 관련 훈련 중 다른 군인에게 본보기가 될만한 행위로 인하여 신체장애인이 된 사람은 제1항 제1호에도 불구하고 전역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현역으로 계속 복무하게 할 수 있다’(제37조3항)는 규정 덕분에 이 차관은 계속 해군에 남을 수 있었다. 다만 더 이상 배를 타지는 못하고 , 이후 해군사관학교‧합참대 교관으로 근무해 왔다.  

 

이처럼 부상 당했을 경우 원칙적으로 전역하게 되는 한국군과는 달리 해외에서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군(軍)에, 그것도 전투병과에 계속 남아 군인으로 이름을 떨친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국의 국가적 영웅인 호레이쇼 넬슨(1758~1805) 제독이다. 넬슨은 1794년 코르시카섬 점령 작전 중 오른쪽 눈을, 1797년 세인트 빈센트 해전에서 오른쪽 팔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전투지휘관으로 해군에 남았고, 결국 1805년 트라팔가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전사(戰死),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 기도를 좌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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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제독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을 지낸 모세 다얀(1915~1981)도 부상에도 불구하고 군에 계속 남아 무명(武名)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1941년 영국군 정찰대의 일원으로 프랑스 비시정부군과 전투 중 한쪽 눈을 잃었다. 이후 그는 ‘캐러비안의 해적’처럼 검은 안대를 했는데, 이는 다얀의 상징이 됐다. 다얀은 부상 후에도 계속 군에 남아 제1, 2차 중동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이스라엘군 참모총장까지 지낸 후 예편했다. 이후 정계에 투신, 국방장관으로 1967년 6일 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다. 1977년에는 메나헴 베긴 정부의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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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다얀 전 이스라엘 국방장관

 

이스라엘의 아비그도르 벤-갈(1936~2016) 장군은 1967년 6일 전쟁 당시 그가 탄 지프가 지뢰를 밟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잃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군에 남아 전투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 당시 제7기갑여단장을 맡고 있던 그는 전쟁 발발 2주 전부터 전쟁의 위험을 경고, ‘미친 ×’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의 부대는 이스라엘군에서 유일하게 전투태세가 완비되어 있는 부대였다. 이집트군의 기습 공격으로 이스라엘군은 괴멸적 타격을 입고, 이스라엘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이 벤-갈의 부대였다. 제7기갑여단은 골란고원 등 시리아전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것을 넘어 시리아 영내로 진격했다. 벤-갈이 시리아전선에서 이렇게 버텨준 덕분에 이스라엘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 패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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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그도르 벤-갈 장군

 

영국의 아드리안 카톤 드 위아트(1880~1963) 장군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소말릴랜드에서 전투 중 두 차례 총상을 입어 눈과 귀의 일부를 잃었다. 이후 유럽 서부전선으로 옮긴 그는 1915년 서부전선에서 총상을 입어 왼쪽 손을 잃었다. 이때 군의관이 손을 대기를 망설이자 드 위아트는 자기 손으로 덜렁거리는 손가락을 뽑아버렸다. 그는 전쟁 중 모두 7차례의 부상을 당했지만 매번 이를 극복, ‘죽일 수 없는 군인(The unkillable soldi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대령으로 노르웨이 전투에 참전했고,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처칠 총리의 사절로 중국 장제스 총통에게 파견되었고, 소장(少將)까지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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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안 카톤 드 위아트 장군

 


한국인들에게는 불쾌한 이름이지만, 초대 조선총독과 제18대 일본 총리를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1852~1919)도 상이군인이었다. 그는 1877년 세이난전쟁(메이지유신 후 사이고 다카모리를 우두머리로 하는 사쓰마 사무라이들이 일으킨 반란) 당시 다바루자카(田原坂) 전투에서 적군이 휘두른 칼에 맞아 오른쪽 팔이 불구가 됐다. 이후 데라우치는 군 지휘관 코스에서는 벗어났지만 군정(軍政)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해 육사교장, 운수통신사령관, 육군교육총감, 육군참모차장, 육군대신 등을 역임했다. 1910년 제3대 조선통감으로 부임, 한일합방을 성사시킨 후 초대 조선총독이 됐다. 1916~1918년 총리를 지냈다. 1916년에는 일본 군인 최고의 명예인 원수(元帥)가 되었다. 조선 총독 시절 무단정치를 폈던 그는 총리가 된 후에도 강압적 통치와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펴다가 1918년 '쌀소동'으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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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외국에는 상이군인으로 정계에 투신, 성공한 경우도 많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밥 돌(1923~2021) 전 상원의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전선에서 독일군의 포격으로 쇄골과 척추 일부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 이 부상 탓에 그는 평생 오른손을 못 쓰게 되었다. 그는 동성무공훈장과 퍼플하트(상이장)를 받고 대위로 예편했다. 이후 정계에 투신한 밥 돌은 캔자스주에서 연방하원의원과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상원원내대표 등을 지냈다. 199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빌 클린턴에게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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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돌 전 미국 상원의원

 

태미 덕워스(55) 미 상원의원은 여성 상이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태국에 주둔 중이던 미군 출신 아버지와 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992년 미 육군 예비군(U.S. Army Reserve)에 입대, 1996년부터 일리노이 주 방위군으로 복무하다가 이라크전쟁에 파병됐다. 그는 여성 최초이자 아시아계 최초의 미 육군 헬기 편대장이었다. 2004년 이라크전에서 블랙호크 헬기를 조종하다가 RPG(로켓추진유탄) 공격을 받고 격추되는 바람에 두 다리를 모두 잃고 오른팔에도 장애를 입었다. 그는 이후에도 계속 군적(軍籍)에 이름을 올려두고 있다가 군 입대 23년 만인 2014년 주방위군 중령으로 전역했다. 재활 과정에서 각종 스포츠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고정익 항공기 조종사 자격증까지 따서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일리노이주 보훈부 장관(2006~2008), 연방보훈부 차관보(2009~2011)를 지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권유로 2012년 연방 하원의원(일리노이주)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2014년 재선됐고, 2016년 연방상원의원(일리노이주)이 됐다. 의원 생활 중 두 딸을 낳아 화제를 모았다. 재직 중 자녀를 가진 최초의 연방상원의원이 된 그는 두 번째 딸을 낳은 후에 1살 미만의 영아를 데리고 의회에 출석하고 수유(授乳)할 수 있도록 상원 의사당 규정을 개정시켰다. 2020년 대선 당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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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의 덕워스 미국 상원의원.사진=미 국방부(퍼블릭 도메인)

 

미 해군 정예 특수부대인 네이비씰 출신인 댄 크렌쇼(39) 미 하원의원은 201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급조폭발물 폭발로 오른쪽 눈을 잃었다. 그 후에도 4년 동안 더 군에 복무하다가 주한미군 근무를 끝으로 2016년 전역했다. 2018년 텍사스주에서 연방하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으며, 2020년 재선됐다.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처럼 검은 안대가 상징인 그는 ‘빅 보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지만, 국내 정책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등 공화당 내 온건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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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크렌쇼 미국 하원의원

 

우리나라에서도 부상에도 불구하고 군 복무를 계속하다가 정계에 진출한 사례가 있다. 이종명(64‧육사39기) 전 국회의원이 그 사람이다. 그는 2000년 제1보병사단 수색대대장(중령) 시절에 후임자인 설동섭 중령과 함께 인수인계를 위해 비무장지대 수색 정찰 중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전투 또는 작전 관련 훈련 중 다른 군인에게 본보기가 될만한 행위로 인하여 신체장애인이 된 사람은 제1항 제1호에도 불구하고 전역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현역으로 계속 복무하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생겼고, 그는 2004년 대령으로 진급, 2015년 전역했다. 2016년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다. 재직 중 “이제는 사실에 기초해서 논리적으로 (5‧18이)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었다’라는 것을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5‧18망언’으로 공격받았다. 군내 일각에서는 그의 부상 경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었고, 2019년 ‘MBC 스트레이트’는 그러한 의혹을 소개하는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입력 : 202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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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lt;박정희 바로보기gt;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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