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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을 육사가 아닌 독립기념관에 모셔야 하는 이유

40년전 안기부 채용시험 "역사를 통한 韓蘇관계를 論하라"

김석규  한반도 안보전략연구원 고문, 행정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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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홍범도 장군 흉상. 사진=뉴시스

역사를 통해 한국과 소련의 관계를 논하라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국가정보원(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시험을 보러 갔을 때 국사논술과목에 나온 문제였다. 예상 밖의 문제 앞에서 수험생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안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출제 예상이 적중했던 것일까. 그건 아니었다.

 

나는 답안지에서 조선시대, 임시정부, 분단 상황, 6·25 남침전쟁, 북방정책, 그리고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과 그 이전의 제정(帝政) 러시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하지만 가장 큰 비중을 두고 길게 썼던 역사적 사건은 바로 자유시 참변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느 수험생들이 그렇듯, 시험장을 나서면서 다른 수험생들과 대화를 해봤다. 다들 비슷한 논점들을 썼다고 했다. 나만 유독 자유시 참변을 강조했나 싶었지만, 결과는 합격이었다. 덕분에 30여년을 국가에 봉직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자유시 참변에 대해서만큼은 속속들이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아내와 관련이 있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 4년 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어느덧 60 중반에 들어선 내 아내는 대대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 출신이다. 나로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탐독하는 등 근현대사에 더욱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였다.

 

아내의 고조부인 향산 이만도 선생은 장원급제 이후 동부승지로 입조(入朝)한 뒤 안동 유림의 수장으로 을미 의병장을 지냈다. 또한 한일합방에 항거하며 24일 간의 단식 끝에 순절하셨다. 그의 자제이신 이중업 선생은 아내의 증조부다. 이중업 선생은 파리장서 사건을 기획·주도한 인물이다. 아내의 조부, 이종흠 선생은 만주 독립군 자금을 지원하다가 옥고를 치르셨다. 3대가 독립운동가였으며 사후 훈장이 추서됐다. 지금도 안동에 가면 향산공원과 향산고택이 보존돼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뼈아픈 상처인 자유시 참변에 대해 누구보다 긴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유시 참변은 소련의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사이에 내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일본의 중국 진출과 독립군 토벌작전이라는 복잡 미묘한 국제정세 속에서 빚어졌다.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제(日帝)는 보복으로 만주 연해주 일대 조선인 수천명을 살육했다. 간도와 만주 독립군들의 활동 근거지를 차단하겠다는 계략도 숨어 있었다. 일각에선 일소(日蘇) 불가침 협약에 따른 일제의 공작으로 소비에트 적군을 이용한 독립군 소탕작전의 일부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레닌은 볼세비키 혁명이후 1919년 코민테른을 결성했다. 이때 소련은 국제 공산당운동 차원에서 이른바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자 어려움에 처해 있던 만주 지역 독립군들은 당시 소비에트 극동공화국 관할인 자유시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자유시로 모여든 우리 독립군에게 소비에트 적군(赤軍)은 무장해제와 적군에 편입되기를 요구하였다. 김좌진, 이범석 등 일부 독립군은 이에 반대하며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반면 홍범도를 비롯한 일부는 적군에 가담했다. 결국 우리 독립군 가운데 이를 거부한 이들은 1921627일 소비에트 적군의 월등한 화력 공격으로 수백명이 죽고 다쳤다. 이때 제야강을 넘어 후퇴하다가 강물에 휩쓸려 죽은 이들도 있다.

 

홍범도는 레닌이 하사한 권총으로 사할린의용대 독립군 김창수와 김오남을 사살했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 위원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사할린의용대 독립군에게 반()혁명죄를 선고했다. 소비에트 적군의 독립군 학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 셈이다. 참변 이후 홍범도는 이르쿠츠크로 가서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됐다.

 

물론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등의 전승(戰勝)은 혁혁한 공()이다. 하지만 당시 정보의 순환이 지금처럼 원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견(異見)이 나오기도 한다. 일례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3600명이라는 데 대해 과장이라는 주장이 있다. 홍범도가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자유시 참변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인 사할린의용대 측은 사망자가 수백명이라고 하는데, 홍범도를 비롯한 적군 측에서는 단 ‘36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자유시 참변을 둘러싼 논란은 사료 연구가 이뤄져야 할 사안이다.

 

무엇보다 홍범도는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노선을 견지했다. 소련 공산당의 군대에 편입됐고,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임시정부가 승인한 독립군에 대한 반역 행위를 했다

 

물론 당시 독립군들의 어려운 환경을 생각하면 소련 공산당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김좌진과 이범석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같은 상황에 처했지만 자유시를 떠나 자신의 독립군들을 보호하는 길을 택했다.

 

훗날 홍범도는 레닌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자유시 참변과 관련해 권총과 포상금, 군복을 선물 받았다.

 

얼마 전 국방부 브리핑에서 어느 기자가 홍범도 장군이 활약했던 1920년대의 공산당은 레닌의 공산당이고, 북한군을 사주해서 6·25 남침을 한 공산당은 스탈린의 공산당이라며 레닌의 공산당과 스탈린의 공산당은 아주 다르다고 따졌다.

 

하지만 레닌, 스탈린 그리고 지금의 푸틴은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레닌 시절 자유시 참변, 스탈린 시절 김일성을 앞세운 6.25남침전쟁 그리고 북한 핵실험과 KAL 007편 격추 등의 만행은 모두 같은 성질의 의도에서 비롯됐다. 바로 대한민국에 대한 적대행위로서 직접개입 또는 배후 지원이라는 것이다. 이번 북·러 정상회담과 불법무기 거래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홍범도 흉상의 복장은 레닌이 하사한 소련군복과 부됸노프카라고 하는 소련 전투모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있어야 할 곳이 적어도 육군사관학교는 아닐 것이다.

 

홍범도는 을미의병으로 거병,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싸웠다. 봉오동 계곡 전투에선 대승을 거뒀다. 부인과 두 아들은 모두 항일 독립전투 과정에서 희생됐다. 그러고도 독립의 총을 놓지 않은 전설적인 전사였다. 존중받아야 하고 길이 기억돼야 분은 분명하다. 그러한 점에서 독립기념관에 모시고 기념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그의 흉상을 의미에 맞지 않는 육사 앞에 세워 지금 일어나는 역사 갈등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이는 김원봉을 서훈하려다가 실패한 사례에서 알 수 있다. 정율성 논란도 마찬가지다. 광주의 한 기념 시설에선 정율성을 '항미원조의 영웅'이라고 공개적으로 치하하는 자료를 전시한다.

 

독립기념관에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고 독립 운동을 한 선열들이 있다. 독립운동엔 이념도 없고 좌우(左右)도 없다. 그러니 독립기념관으로 모시는 게 사리에 맞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는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낼 군 간부들을 양성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생도들은 공산당 복장을 한 독립운동가의 흉상에 경례를 해야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나만 드는 게 아닐 것이다.

입력 : 2023.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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