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뒤를 따른 또 다른 여인들
왜군 장수마저 감동시킨 민초들이 이 나라의 진정한 버팀목이었다
- 현풍 곽씨 12정려각 입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모신 대구광역시 달성군 도동서원 쪽으로 가는 도로에 수백 년 된 나무와 함께 커다란 자연석이 보인다.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 자손들에게 충과 효를 대대로 실천하고 청렴하고 결백한 가문으로 이름을 떨치라는 뜻이다. 그 바위 뒤에 장중한 정려각이 보인다.
‘현풍 곽씨 12정려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곳이다. 정려(旌閭)는 조선시대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내린 것인데 이 현풍 곽씨 집안에는 정려가 무려 12개나 된다. 정려를 살펴보면 이 현풍 곽씨 집안이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임을 알 수 있다. 이 집안에서 벌어진 사연을 뒤쫓아 보기로 한다.
현풍 곽씨 12정려각 입구에 삼강문(三綱門) 현판이 걸려 있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이다. 순서대로 임금은 신하의 근본, 어버이는 자식의 근본, 남편은 아내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삼강의 핵심은 충(忠)·효(孝)·열(烈)로 오륜과 함께 조선을 지배한 기본 이데올로기였다.
영조 때 한곳에 모아 세워
정려비는 각각 건립 연대가 다른데 영조 때 한곳에 모아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한 곽준의 두 아들, 사위와 딸, 며느리, 곽재훈의 네 효자(곽결·곽청·곽형·곽호)와 열부 전의 이씨, 광주 이씨, 밀양 박씨 등이 그들이다.
임진왜란 당시 안음(지금의 함양군 안의면) 현감이던 곽준은 중과부적인데도 일가족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갔다. 그는 아들 이상, 이후, 사위 류문호와 함께 전사했다. 동생과 남편이 숨졌다는 소식에 맏며느리 거창 신씨는 물론 딸도 자결했다. 나라를 향한 충, 부모와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친 효, 열의 도리를 실천한 것이다.
곽준은 관찰사 김성일로부터 자여도(창원역) 찰방으로 임명됐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면과 함께 공을 세워 1594년 안음현감으로 부임했다. 곽준이 현감으로 나갈 때 남긴 말이 있다. “대대로 청백으로 나라에 보답했거늘, 내 지금 한 고을을 맡은 공인이 되어 조상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 않겠는가.”
그는 임진왜란 후 도원수 권율, 도체찰사 이원익으로부터 황석산성을 축조해 왜적의 재침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산성축조와 병기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결국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함양군수 조종도와 함께 함양, 안의, 거창 등 세 읍의 군민은 곽준이 쌓은 황석산성으로 피신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政) 군과 대치했다.
군사 500명과 함께 산화한 곽준과 그 뒤를 따른 아들, 사위
곽준은 1597년 8월 18일 군사 500여 명과 함께 가토 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가 적탄에 쓰러졌을 때 두 아들이 달려나왔으나 곽준은 “나는 성을 사수해야 하나 너희들은 피하라”라고 고함쳤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나라 위해 죽는데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서 죽는 것이 불가한 일입니까”라며 왜군과 맞서다 장렬히 전사했다.
사위 유문호도 싸움터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을 들은 곽준의 딸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따라 죽지 않은 것은 나의 가장(유문호)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가장이 전사했으니 내가 살아 뭐하겠느냐”며 목을 매 자결한다. 뒤이어 곽준의 맏며느리 거창 신씨도 “남편의 영혼을 달래겠다”며 성곽의 망루에서 투신했다.
선조 31년(1598년)에 정려를 받은 곽준 일가에 대해 함양군은 황석산 밑에 황암사를 짓고 제를 올리고 있다. 이후 곽준은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안의 황암사당, 현풍 예연서원에 제향됐다. 곽준에게는 충렬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현풍 곽씨 12정려각에는 남편을 하늘같이 섬겼던 열부들도 있다.
곽내용과 결혼했던 전의 이씨 부인은 결혼한 지 1년 후인 1747년 남편이 병사하자 첫 제삿날 26세의 나이로 자결하며 위의 절명사(絶命詞)를 남겼다. 전의 이씨 부인은 남편이 죽자 그 자리에서 따라 죽으려다 시부모의 만류로 그만뒀지만 끝내 슬픔을 참지 못한 것이다. 이 절명사는 평소 그가 덮던 이불 밑에서 발견됐다.
현풍 곽씨 12정려비에는 임진왜란 때 왜병으로부터 순결을 지키려 투신한 계공랑 곽재기 부인인 광주 이씨와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대신 칼을 맞아 죽은 곽홍원의 처인 밀양 박씨와 시집온 지 한 해도 안돼 남편이 병사하자 끝내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한 통덕랑 곽수영의 부인 안동 권씨의 려(閭)도 있다.
곽씨 집안의 네 효자 이야기도 12정려비에 포함돼 있다.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의 종제인 재훈의 슬하에는 결, 청, 형, 호의 네 아들이 있었다. 이들이 임진왜란 때 병환 중에 있는 부친을 모시고 비슬산 중턱에 있는 동굴에 숨어서 피란하던 중 마침 왜병들이 굴 앞을 지나갔다.
이때 천식이 심한 부친이 기침을 해 왜병들이 “굴밖으로 나오라”고 고함을 치자 맏아들이 대신 나가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의 기침이 다시 터져 나오자 이번에는 둘째, 다음에는 셋째, 마지막으로 넷째 아들까지 죽음을 당했다. 다섯 번째 기침 소리가 들리자 마침내 왜장이 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병든 노인 혼자뿐이었다.
사연을 들은 왜장은 곽 노인의 등에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 써 붙이고 어떤 사람도 이 노인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우리 산하에는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현장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이것은 한민족이 숱한 외침에도 5000년을 버텨 온 원동력일 것이다.⊙
‘현풍 곽씨 12정려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곳이다. 정려(旌閭)는 조선시대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내린 것인데 이 현풍 곽씨 집안에는 정려가 무려 12개나 된다. 정려를 살펴보면 이 현풍 곽씨 집안이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임을 알 수 있다. 이 집안에서 벌어진 사연을 뒤쫓아 보기로 한다.
현풍 곽씨 12정려각 입구에 삼강문(三綱門) 현판이 걸려 있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이다. 순서대로 임금은 신하의 근본, 어버이는 자식의 근본, 남편은 아내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삼강의 핵심은 충(忠)·효(孝)·열(烈)로 오륜과 함께 조선을 지배한 기본 이데올로기였다.
영조 때 한곳에 모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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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에 ‘충효세업 청백가성’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충효를 대대로 이어 가고 청렴결백으로 가문을 빛내라는 뜻이다. |
임진왜란 당시 안음(지금의 함양군 안의면) 현감이던 곽준은 중과부적인데도 일가족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갔다. 그는 아들 이상, 이후, 사위 류문호와 함께 전사했다. 동생과 남편이 숨졌다는 소식에 맏며느리 거창 신씨는 물론 딸도 자결했다. 나라를 향한 충, 부모와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친 효, 열의 도리를 실천한 것이다.
곽준은 관찰사 김성일로부터 자여도(창원역) 찰방으로 임명됐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면과 함께 공을 세워 1594년 안음현감으로 부임했다. 곽준이 현감으로 나갈 때 남긴 말이 있다. “대대로 청백으로 나라에 보답했거늘, 내 지금 한 고을을 맡은 공인이 되어 조상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 않겠는가.”
그는 임진왜란 후 도원수 권율, 도체찰사 이원익으로부터 황석산성을 축조해 왜적의 재침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산성축조와 병기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결국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함양군수 조종도와 함께 함양, 안의, 거창 등 세 읍의 군민은 곽준이 쌓은 황석산성으로 피신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政) 군과 대치했다.
군사 500명과 함께 산화한 곽준과 그 뒤를 따른 아들,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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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정려각 앞에 있는 연못. |
사위 유문호도 싸움터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을 들은 곽준의 딸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따라 죽지 않은 것은 나의 가장(유문호)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 가장이 전사했으니 내가 살아 뭐하겠느냐”며 목을 매 자결한다. 뒤이어 곽준의 맏며느리 거창 신씨도 “남편의 영혼을 달래겠다”며 성곽의 망루에서 투신했다.
선조 31년(1598년)에 정려를 받은 곽준 일가에 대해 함양군은 황석산 밑에 황암사를 짓고 제를 올리고 있다. 이후 곽준은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안의 황암사당, 현풍 예연서원에 제향됐다. 곽준에게는 충렬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현풍 곽씨 12정려각에는 남편을 하늘같이 섬겼던 열부들도 있다.
곽내용과 결혼했던 전의 이씨 부인은 결혼한 지 1년 후인 1747년 남편이 병사하자 첫 제삿날 26세의 나이로 자결하며 위의 절명사(絶命詞)를 남겼다. 전의 이씨 부인은 남편이 죽자 그 자리에서 따라 죽으려다 시부모의 만류로 그만뒀지만 끝내 슬픔을 참지 못한 것이다. 이 절명사는 평소 그가 덮던 이불 밑에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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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풍 곽씨 12정려각의 전경. |
곽씨 집안의 네 효자 이야기도 12정려비에 포함돼 있다.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의 종제인 재훈의 슬하에는 결, 청, 형, 호의 네 아들이 있었다. 이들이 임진왜란 때 병환 중에 있는 부친을 모시고 비슬산 중턱에 있는 동굴에 숨어서 피란하던 중 마침 왜병들이 굴 앞을 지나갔다.
이때 천식이 심한 부친이 기침을 해 왜병들이 “굴밖으로 나오라”고 고함을 치자 맏아들이 대신 나가 죽음을 당했다. 아버지의 기침이 다시 터져 나오자 이번에는 둘째, 다음에는 셋째, 마지막으로 넷째 아들까지 죽음을 당했다. 다섯 번째 기침 소리가 들리자 마침내 왜장이 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병든 노인 혼자뿐이었다.
사연을 들은 왜장은 곽 노인의 등에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 써 붙이고 어떤 사람도 이 노인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우리 산하에는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현장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이것은 한민족이 숱한 외침에도 5000년을 버텨 온 원동력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