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온 대선(大選)] 안희정 傳奇 - 53장면으로 본 그의 삶 53년 (1/3) : 월간조선

안희정(安熙正) 충청남도 지사는 조기(早期) 대통령 선거 후보 선출 과정에서 등장한 최대의 다크호스다. 반기문(潘基文) 전 유엔 사무총장의 중도 사퇴 이후 그의 지지율은 민주당 내 2위로 올라섰고 보수를 포함한 전체 후보 지지율도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과 경합하며 2~3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문재인(文在寅) 전 민주당 대표와 함께 대표적인 친노(親盧) 인사인 안 지사의 최근 발언은 야권 지지자들의 기대와 사뭇 방향이 다르다. 사드 배치에 찬성하고 한미 동맹을 강조하는 것은 보수 표심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1964년생인 그의 삶을 전기(傳奇) 형식으로 정리해 봤다.

1. 안희정의 정치인론(論)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고 인터넷으로 신청을 한 적이 있다. 신상정보를 기입하면서 직업란을 누르니 공무원, 연구원 등 십수 가지 직업이 쭉 펼쳐졌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정치인’이라는 직업은 없었다. 처음에는 당혹스럽다가 섭섭하기도 했다.”

“언젠가 ‘자녀가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정치가 43.1%로 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정치인을 선망하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돈을 벌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다.”

“내가 보는 정치인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보았다. ‘국회의원이 아니면 먹고살 게 없는 사람’과 ‘국회의원으로 이미지 메이킹하는 사람’으로 크게 나뉘었다.”

“내가 스스로를 정치인이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1994년부터일 것이다. 처음 노무현 대통령과 일하게 되었던 해다.”

2. 정치인 안희정의 목표

“사회적 약자와 함께 살아가자는 공동체주의였고 독재권력과 천박한 자본의 힘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 정신이 사회의 작동원리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으며 분단된 약소국인 이 나라의 평화와 통일이었다.”

3. 출생

1964년 10월 28일 충청남도 논산에서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안희정 지사의 부모는 생존해 있으나 이름과 나이 등이 일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안 지사가 부모의 신원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고 한다. 그의 형제자매 역시 숫자만 나올 뿐 경력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또한 안 지사의 뜻이다. 다만 그의 책 곳곳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의 편린이 나온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강경포구 인근에서 객주점을 해 돈을 좀 버셨는데 둘째 부인을 들여도 아들이 없어서 셋째 부인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를 맞았다. 할머니는 열여섯 나이에 논 한 마지기인가를 친정에 안기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비로소 아들 둘을 낳았다. 그중 둘째가 우리 아버지다.”

“(할머니)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부잣집 할아버지한테 대를 잇기 위해 시집온 열여섯 살의 소녀. 20대 중반에 과부가 됐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홀로 키웠다. 해방, 전쟁, 가난의 고비고비를 넘으며 겪었을 고통들을 내 나름 되짚어본다.”

“(할머니) 할머니는 나와 형이 대전 시내에서 자취를 할 때 종종 손자들 밥을 해주러 오셨다. 그날도 할머니가 오셔서 좁은 자취방 문턱에 앉아 대전중앙시장에 내다 팔 도라지를 다듬고 계셨다. 나는 방에 앉아 운동권 형들에게 배운 민요를 흥얼거렸다.”

“(아버지) 두 아들은 해방 정국에서 가난과 싸우며 살았다.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내 아버지는 성실한 농사꾼으로, 철물점 주인으로 소소한 삶을 꾸려냈다.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 시골에서 철물점을 하며 꽤 잘살게 되었던 적도 있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유세를 부리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가끔 우리 형제를 자전거에 태우고 양지리 등산길로 놀러 가셨다. 그런데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금방 갈 것을 꼭 논밭 끝자락 오솔길을 따라 빙빙 돌아서 가는 것이었다. 한번은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돌아가냐고 물었다. ‘들판에서 사람들은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우리가 놀러 가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어?’”

“(어머니) 어머니는 집에 이웃이 찾아오면 꼭 따뜻한 밥 한 끼라도 해 먹이셨다. 초등학교 때 소풍 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김밥을 싸 오지 못하는 내 친구들 몫까지 10인분이 넘는 도시락을 싸주셨다.”

4. 박정희 대통령을 닮으라고 지은 이름

논산에서 철물점을 했던 안희정의 부친이 제일 존경했던 사람이 고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마침 안 지사의 이름을 지을 때 돌림자가 ‘희(熙)’자였는데 아버지가 박 대통령의 ‘바를 정자’를 붙여 직접 지었다. 안 지사의 부친은 어릴 적부터 안 지사에게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5. 논산 구자곡 초등학교 시절

안희정 지사의 홈페이지에 나오는 ‘살아온 날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1977년 충남 논산 구자곡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보이스카우트 및 핸드볼 선수 활동을 했고, 자존심과 의협심이 강해서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지녔던 꿈 많은 소년이었다.”

6. 어릴 적 별명

‘땅벌’이었다. 동네 아저씨들이 붙여줬다고 한다.

7. 중학생 때부터 혁명가를 꿈꾸다

이런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안 지사는 1979년 연무대 중학교 3학년 시절 독재의 어두움과 사회부조리에 눈을 떴다고 자신의 책 《안희정의 함께, 혁명》에서 밝혔다.

“중학교 3학년 때 박정희의 죽음으로 나는 ‘박정희 유겐트’의 환상에서 깨어났다. 나치가 만든 청소년 조직이었던 ‘히틀러 유겐트’처럼 박정희 시대에 나고 자란 나는 박정희 유겐트의 마지막 세대였다.”

8. 남대전 고등학교 시절

“(1980년) 남대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대전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시골의 마을 공동체와 달리 도시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낯선 이방인들의 마을이었다. 흙에 뿌리내린 공동체 대신 부유하는 익명성이 공기를 채우고 빈부의 계급 차가 여실히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나의 말랑말랑한 뇌와 예민한 감성은 혼란스러운 사회에 휘몰아치는 바람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1980년에 광주항쟁이 일어났고 계간 《창작과 비평》《다리》 등을 통해 전태일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황석영의 소설 《어둠의 자식들》, 김지하의 시 ‘오적’이 내 머리와 심장에 흘러들었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말은 나를 강타했다. ‘지식인은 부르주아 계급의 창녀다.’ 나는 당시 사춘기 소년들이 그렇듯, 아니 그보다 더 자의식이 비대해지고 사회의식, 역사의식, 민족의식도 함께 부풀었다. 부르주아의 창녀가 되어선 안 된다. 가진 자들과 출세한 자들에게 아첨하는 지식인이 되어선 안 된다. 민중과 함께해야 한다.”

9. 고교 1학년 때 자퇴 결심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교과서를 죄다 팔아버렸다. 대신 김학준의 《러시아 혁명사》,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같은 책들로 가방을 채웠다. 이런 책들이 내 새로운 교과서가 되었고 민중 속으로 다가가는 일은 새로운 체험학습이 되었다.”

10. 민중 체험 위해 노숙하며 혁명 결심

“나는 매일 밤 신문지를 들고 대전역으로 향했다. 그 휑한 광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웠다. 헐벗은 자들, 소외되는 자들이 모이는 곳에서 그 현실을 보고 싶었다. 걸인, 부랑자, 지게꾼, 포주, 창녀들….

그날 밤에도 나는 대전역으로 갔다. 광장 한복판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간이휴게소가 있었다. 빽빽이 놓인 벤치들은 바랜 코발트색에 거무튀튀한 때가 뒤섞여 오묘한 색을 띠었다. 여름의 습기를 머금고 찐득찐득해진 그 벤치에 맨살이 닿으면 쩍쩍 달라붙었다.

벤치 저쪽에는 한 여자가 아이를 업고 있었다. 행색이 남루한 여자는 벤치에 떨어져 있던 빵 조각을 주워들어 등에 매달린 아이에게 내밀었다. ‘너, 이것 좀 먹을래?’ 이제 겨우 말을 할 법한 어린아이, 그 조그만 어린애가 여지없는 아이의 목소리로 내뱉었다. ‘싫어, ××년아.’ 나는 충격을 받았다. 현실 같지 않은 현실, 몸을 팔고 육체의 노동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하는 저 밑바닥 사람들에게 사람다움은 사치였다. 활자로 읽은 부조리와 불의, 사회경제 체제에 내쳐진 이들이 바로 곁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 돌아누웠다. 그리고 혁명을 결심했다. ‘박정희가 휴전선 지키는 군대로 혁명했다면, 나는 민중과 시민의 힘으로 혁명하겠다.’”

11. 중앙정보부에 처음으로 붙잡혀가다

중학교 때부터 혁명가를 꿈꿨던 안희정 지사(왼쪽)는 고등학교 시절 이를 몸소 실천하려다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노상 서점을 들락거리던 어느 날 서점 주인이 《평천하》라는 지하신문을 주었다. 나는 그 신문을 읽고 편집장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것을 계기로 만나기도 했다. 결국 그 일로 ‘대전 철공소’ 간판을 단 중앙정보부 대전지부에 붙잡혀갔다. 나를 잡아간 형사는 ‘겨우 고등학생이냐’며 몽둥이찜질 좀 하고 내보내 주었지만 남대전 고등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이미 학교를 그만두기로 작정했지만 그 일은 고통스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영웅으로서 역사 앞에 섰다는 자부심이 되기도 했다.”

자서전과 달리 그의 공식 홈페이지엔 이런 기록이 나온다.

“민중을 걱정했던 조숙한 고등학생은 ‘광주 민주화 항쟁’에 관여되었다는 이유로 고교 입학 6개월 만에 제적당했다.”

인터넷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떠다닌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기도 했으며, 충남대 재학생들과 같이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서 몽둥이찜질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학교가 문제 학생들을 삼청교육대에 보내라고 지시를 받았는데 교장에게 “문제 학생을 학교가 교화시켜야지, 왜 삼청교육대에 보내는가?”라고 항의하다 불온서적 문제까지 겹쳐서 제적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12. 서울 성남 고등학교 재입학

“(남대전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고향에 내려와 책이나 읽고 있던 내 앞에 아버지는 농약병을 꺼내놓으셨다.

‘학교에 다시 갈래, 아니면 이거 먹고 나랑 같이 죽을래?’

아버지를 거역할 수는 없어 1981년에 두 번째 고등학교, 서울 대방동의 성남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상경을 해서도 나는 혁명을 하겠다며 대학가를 어슬렁거렸다. 나의 큰형, 누나가 하던 야학운동에 끼거나 다른 대학생들의 활동에 기웃거렸다. 고등학교 생활에 충실할 리 만무했다. 결국 3개월 만에 자퇴를 했다. 부모님과 교무실에서 자퇴서에 도장을 찍고 나오는데 교실에서 국어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 때문이었는지 어머니는 정문 앞에서 철퍼덕 주저앉아 우셨다.

얕은 실개천을 호기롭게 헤치고 나왔건만 물살은 점점 거칠어졌다. 나는 이성의 시대를 헤엄쳐가고 있었다. 신의 지배에서 깨어난 이성은 과학과 기술을 발달시키고 사회도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탄생시켰다. 나의 혁명도 함께 흘렀다. 나는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을 역사의 물결에 던져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13. 고려대학교 철학과 입학

“혁명을 해보겠다고 학교까지 그만두고 나왔지만 정작 혁명서클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누나가 야학강사로 나가던 퇴계로의 한 교회에서 노동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동자도, 혁명가도, 지식인도 아닌 내가 낄 곳은 없었다. 학생운동이라도 하려면 대학교에 가야 했다. 검정고시를 보고 입시학원에 등록해 고려대학교 철학과 83학번이 되었다.”

안 지사의 홈페이지에는 대학에 진학한 이유를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 고려대에 입학하다’라고 적어놓았다.

인터넷에는 이런 내용도 나돌고 있다.

처음에는 재수종합반을 3개월 정도 다니다 국영수에서 150점 만점, 암기과목 170점에서 반 정도 맞고 체력장에서 20점 만점을 받으면 고려대 정도는 갈 수 있겠다 싶어 때려치우고 독학했다고 한다. 당시 암기과목이 4개라 사탐 사회경제, 한국지리는 자신 있는 과목이라 열심히 풀고 나머지 두 과목은 한 번호로 밀었다고 한다. 수학은 다른 거 안 하고 정석만 2번 팠다고 한다. 시간도 많이 없고 하여 일곱 달 중 두 달가량 밤을 새워가며 국영수만 팠다고 한다. 결과는 대입시험에서 만점 340점 중 270점을 맞았다.

당시 대입 학력고사 전체 수석이 원희룡 제주도 지사로 340점 만점에 339점을 맞았으며 차석인 장하준 교수가 330점이었다.

14. 1986년 건국대 투쟁으로 수감

안희정 지사는 1986년 건대사태에 관계했다가 한 차례 수감되었다.

“대학은 혁명의 장이었다. 동시에 눈앞에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고 죽어 나가는, 말 그대로 전쟁터이기도 했다. 물론 나도 그 전장(戰場)에 뛰어들었다. 1986년 ‘건국대학교 투쟁’을 고려대학교 지하서클인 애국학생회가 주도했는데 나는 그 일로 한 차례 수감되었다.”

15.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재수감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또 한 차례 수감되었다. 2월 말의 늦은 밤, 아지트로 삼았던 친구 자취방에 가는 길이었다. 골목길에서 몸싸움 끝에 잡혔다. … 어딘지 모르지만 한적한 건물 뒤편에 내려서 컴컴한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 들어가자마자 그 사내들은 검거 과정의 수고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연거푸 발길질을 하고 뺨을 쳤다. 옷을 벗으라 했다. 옷을 벗자 다시 벽을 보고 서라고 했다. 나는 벽 앞에 섰다. 그들은 이제 벽을 타고 올라가라며 몽둥이질을 해댔다. 사내는 네 명이었다.

잠시 뒤 상급자인 중년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다짜고짜 내가 벗어놓은 구두를 집어 머리와 얼굴을 치기 시작했다. 죽여놓고 휴전선 철조망에 널어놓고 월북하다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라며….”

16. 폭력 앞에서 혁명의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닫다

“4인 1조로 매일같이 자행되는 폭력은 육체의 고통을 넘는 수치심을 안겼다. 그런데 폭력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좇던 이념을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질문들이었다.

‘미국을 몰아내면, 그럼 미국의 세계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어떤 건데?’

‘네가 말하는 민족자주경제를 건설한다는 게 대체 뭔데?’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수출 안 하면, 미제 자본을 빼면 어쩌자는 건데?’

지속적이고 교묘한 질문 공세에 나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갖고 있던 혁명의 이데올로기에는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자인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도, 미국과 잡았던 손을 끊고 자립경제로 간다는 것도 답이 될 수 없었다. 민중과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를 바로잡겠다는 정의감은 충만했지만 그래서 어떤 사회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건지에 대한 준비는 없었다.”

17. 깨진 혁명의 꿈

“한 달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곳이 남산 안기부 지하실이라는 사실은 한참 뒤에나 알았다. 검찰에 기소되어 서울구치소로 넘어가기 며칠 전, 수사관들은 남산 안기부 인근, 충무로의 어느 건물 2층에 있는 작은 룸카페로 나를 데려갔다.

‘너 인마, 이번에 들어가면 7~8년은 감옥에서 썩다 나올 텐데 술이나 한 잔 마시고 들어가.’

그게 간첩 전향 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술을 받아 마시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화장실에 가려면 문을 나가야 했는데 수사관들은 갔다 오라고만 하고 아무도 나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화장실 문틈으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고 대로의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만든 학생 조직은 깨졌고 나는 동료의 이름까지 불었다. 폭력 앞에 무너지고 이념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내가 어찌 학교로 돌아가 ‘안기부에서 탈출한 동지’의 영웅담을 떠들 수 있겠는가. 계단을 내려갈 수 없는 내 모습에 다시 한 번 무너졌다. 그렇게 두 번째로 들어간 감옥에서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을 읽었다. 소설 속 장면을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본다. 작가는 한겨울 본대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 빨치산을 ‘멧돼지’라 표현했다.…

나는 바로 그 멧돼지였다. 대열을 잃은 채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신세였다. 혁명을 하겠다는 꿈은 깨지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빨치산이었다. 헐벗은 야전에서 참호를 파고 있었는데 공습이 시작되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폭격기가 보였고 그 폭격기에서 포탄이 쏟아졌다. 점처럼 보이던 포탄이 어느새 세숫대야만 해져 내 얼굴로 들이닥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포탄을 맞은 인중의 고통이 선명했다. 일어나 앉으니 눈물이 흘렀다. 혁명은 솜사탕처럼 녹아 버렸다. 숱한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며 보냈다. 잘난 척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결심했다. ‘능력이 달리고 스스로 준비가 되지 않은 자리는 절대 탐하지 않겠다.’”

18. 김덕룡 의원 보좌관 시절

김덕룡 전 의원.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12월에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비서였던 김영춘 선배가 아르바이트라도 하라며 김덕룡 의원실을 소개해 주었다. 나는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대부(代父) 같은 빛바랜 이름을 버리고 민주화운동의 조력꾼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야당 의원 비서로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는 분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내 짝과 결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89년 1월, 내 나이 스물여섯에 신문에서만 보던 제도권 정치 현장에 몸담게 된 것이다.”

19. 안희정의 대(對)국회관(觀)

“국회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내게 실망과 참담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입사한 지 10개월이 지난 때 첫 국정감사가 열렸다. 당시에는 노트북이 없어서 대정부 질의서를 모두 손으로 썼는데, 그러다 보니 국정감사 기간에는 밤을 새워 일해도 당최 시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점은 ‘이런 것이 국가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란 회의감이었다. 질의를 위한 질의, 비판을 위한 비판을 위해 까만 밤을 불태우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몹시 부끄러웠다. 지난 신문을 뒤지며 뻔한 주제의 질문을 의원들이 던지고 기자들은 이걸 쭉 받아쓰고 이것이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같은 당이었다면 이야깃거리조차 안 되는 일을 갖고 여당과 야당 의원이 연일 싸우는 것도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다. 정책과 노선은 없고 패싸움으로 점철된 정당정치, 그들만의 정치에 회의와 환멸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