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갈등의 뇌관, ‘춘원·육당 상(賞)’ 추진하는 고정일 대표 : 월간조선

문인의 이름을 딴 국내 문학상이 여럿 있다. 동인(東仁)문학상, 이상(李箱)문학상 등이 대표적이다. 20세기 한국의 문인들은 죽기 살기로, 혹은 양심과 죽음을 넘나들며 글을 써야 했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었고 문자를 빼앗겼으며 좌우이념의 소용돌이와 전쟁의 극한, 동족상잔과 이산(離散)·분단을 모두 체험했다. ‘종군 작가단’이란 이름으로 6·25 전장의 지옥을 누비기까지 했다.

아우슈비츠의 지옥과 함께 인류 역사상 그만한 체험을 강요받은 문인이, 작가가 또 있을까. 이들 문인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은 그래서 그 의미가 절절하고 무겁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인인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의 이름을 내건 문학상이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흔한 문학관도 없다. 두 사람의 문학적 위상이 부족해서일까.

국내 중견 출판사인 동서문화사 고정일(高正一) 대표는 “춘원과 육당은 늘 20세기 한국 문단에서 화제의 중심이었다”고 했다. “한국의 신(新)문학 초기는 그야말로 육당과 춘원의 ‘2인 문단시대’였다”는 것이다.

지난 7월 말의 일이다. 국내 5대 문학단체의 하나인 한국문인협회(이사장 문효치)가 ‘춘원·육당 상(賞)’ 제정을 발표했다. 문인협회는 회원 수가 1만5000명에 이르는 거대 단체다. 그러나 보름도 안 돼 시상 계획을 접었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기자는 문효치 문인협회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추진했다. 협회는 그러나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한국시인협회 최동호 회장(고려대 명예교수)을 통해 재접촉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1972년 10월 《문학사상》을 창간할 당시 편집주간이었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역시 춘원문학상을 기획했다가 뜻을 접은 일이 있다. 당시 벌떼처럼 일어선 반대여론 앞에 이어령은 놀라 포기하고 말았다.

한국 문단의 아이러니, 춘원과 육당

고정일 대표는 1977년부터 10여 년 동안 ‘동인문학상 운영·집행위원장’을 맡아 이문열·김원일·조세희·오정희 등 신예작가를 발굴했다.

고정일 대표는 최근 문인협회가 포기한 ‘육당학술상’ ‘춘원문학상’ 제정 뜻을 밝혔다. 모두가 비켜서려 하는 ‘춘원’이란 뇌관을 다시 건드린 것이다. 문단 안팎이 술렁이고 있다.

그는 한국출판문화상, 한국번역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전문 출판인이다. 올해가 창사 60주년이다. 지금은 《조선일보》가 운영하고 있지만 고 대표는 1977년부터 10여 년 동안 ‘동인문학상 운영·집행위원장’을 맡아 이문열·김원일·조세희·오정희 등 신예작가를 발굴, 시상한 일도 있다. 최근 《세계사상전집》(전 100권), 《세계문학전집》(전 100권)을 기획하는 등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 그가 ‘춘원상’이란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들었다. 그의 지인들은 손사래를 치며 만류한다. 기자는 그와의 만남에 앞서 몇몇 국문학자에게 ‘춘원·육당 상’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한 젊은 소장파 교수의 말이다.

“결론 내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고리대금업자였고, 천재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는 동성애자였다고 합니다. 아르튀르 랭보는 아프리카 노예상인이었으며 철학자 하이데거, 근대음악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독일 나치에 협력했어요. 에즈라 파운드는 2차 대전 당시 무솔리니를 지지하는 방송을 통해 반(反)유대주의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들 행적과 다른 한편의 예술, 그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이 교수는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이 1917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연재되며 세상에 나왔다. 내년이 100주년이다. 이제는 춘원을 둘러싼 갈등과 논란을 정리할 때가 됐다”고 했다.

다시 기자는 몇 년 전 《나의 일생-춘원 자서전》을 펴냈던 서울대 최종고 명예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국인물전기학회 회장이자 춘원연구학회 회원이기도 하다.

최 교수는 “안타깝다. 춘원은 싫으나 좋으나 우리 민족의 모습이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창(窓)이다. 역사는 외면한다고 잊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고 했다. 그는 춘원·육당 상 논란에 “안타깝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지난 10월 6일 서울 지하철 3호선 약수역 앞에서 고정일 대표를 기다렸다. 파란색 남방을 입은 그가 성큼성큼 역사(驛舍) 쪽으로 걸어왔다. 기자의 눈엔 그의 등 뒤로 ‘춘원·육당 상’이란 섶도, 불길도 보이지 않았다. 일면식이 없었지만 인파 속에서 그를 단번에 알아보고,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고 대표는 “10대 시절 춘원의 《무정》이니 《사랑》《개척자》를 읽으며 성장했다. 지난 7월 말 문인협회가 춘원·육당 상 제정을 한다기에 직접 문효치 이사장을 격려한 일이 있다. ‘어려운 때 결단을 내려 고맙다’고 했다”고 말했다.

문인협회가 포기한 ‘춘원·육당 상’을 다시 제정키로

1979년 동인문학상 시상식 팸플릿.

고정일 대표의 계속된 말이다.

“문효치 이사장에게 ‘일부 반발이 있더라도 이겨내야 한다’고 했더니 ‘고맙다’고 했어요. 그런데 보름도 안 돼 ‘안 하겠다’는 겁니다. 깜짝 놀랐죠. 어찌된 일인지 직접 문 이사장에게 물었어요. ‘면목이 없다’더군요. 반대 세력들이 몰려와 ‘친일파 죽여라!’고 난동을 부려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는 겁니다.”

고 대표는 내심 ‘한국 문인을 대표한다는 문효치가 고작 이 정도냐’고 통탄했다.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전교조 등 진보단체들은 춘원상을 ‘이완용상’에 빗대며 문 이사장 집안의 친일 전력까지 끄집어냈다고 한다. “문효치의 증조부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겁박에 백기 투항하고 말았다. 고 대표의 말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학계나 언론·문화·학술단체가 침묵하는 이유가 뭘까요? 문인협회의 취소 결정은 육당과 춘원을 부관참시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어찌 한국의 문화판 수준이 정치판과 똑같나요….”

그는 고심 끝에 동서문화사가 주관하는 ‘육당학술상’과 ‘춘원문학상’을 제정키로 했다. 현재 심사위원을 위촉한 상태며 12월 초에 제1회 수상자를 발표할 예정이다.

― 혹시 춘원·육당과 어떤 인연이 있나요?

“1955년인가… 춘원의 아내 허영숙을 만난 일이 있어요. 당시 허영숙은 광영출판사란 이름의 출판사를 차렸어요. 이광수의 ‘광’, 허영숙의 ‘영’자를 조합한 이름이죠. 허영숙은 한국 최초의 여의사, 산부인과 의사로 알려진 신여성입니다. 그분이 《춘원전집》을 발간했는데 수십 권 되는 전집을 여성이 어떻게 팝니까. 재고가 가득 쌓인 것을 제가 리어카에 실어다 청계천에서 팔았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제가 《한국문학전집》을 발간했을 때는 이미 춘원의 가족이 이민을 떠난 상태였죠. 그때 인세를 전하러 춘원의 아들(3남 이영근)의 처가인 배정현 대법원장 댁을 찾은 적이 있어요.”

― 춘원 가족에게 문학상 제정 의사를 전했나요?

“수년 전, 미국에 사는 춘원의 딸 이정화 여사가 귀국했다는 얘기를 듣고 만났었죠. 이 여사 말이 ‘춘원이 광복 전까지 살던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의 옛집을 찾아가니 그곳 사람들이 친일파 운운하며 난리를 치더라’는 겁니다. 이 여사는 사릉에다 춘원기념관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낙담한 이 여사는 ‘이제 누구라도 나서서 춘원기념관과 춘원문학상을 만들어줬음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조심스레 ‘제가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너무 고맙다’며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친일과 ‘시대적 처연함’

춘원 이광수. 그가 1917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연재를 시작한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은 내년에 100주년이 된다.

― 육당 선생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몇 해 전 최남선과 일본인 출판인 노마 세이지(野間淸治)를 비교하는 평전(《애국작법(愛國作法)》)을 쓴 적이 있지요. 노마 세이지는 일본 출판문화의 선구자입니다. 그가 세운 출판사 고단샤(講談社)를 들어본 적이 있죠?

잡지 《소년》을 창간해 ‘우국의 편집자’라 불린 조선 선비정신의 출판인 육당. 잡지 《유벤(雄辯)》을 창간해 ‘열정의 편집자’로 불린 일본 무사정신의 출판인 노마 세이지. 두 사람 모두 ‘기적의 출판인’으로 출판보국의 평가를 받는 거인들입니다.

낮에는 책 팔고 밤에 책 읽던 제 젊은 시절, 육당의 《조선역사》《고사통》을 읽고 또 읽었어요. 대학시절, 월탄(月灘朴鍾和·1901~1981) 선생이 육당의 《백팔번뇌》를 읽어준 일이나 조용만(趙容萬·1909~1995) 선생이 육당의 생애와 신문관(육당이 세운 인쇄소) 이야기를 들려주던 기억이 새로워요.”

육당 최남선의 말년 모습. 1908년 잡지 《소년》을 창간한 육당은 ‘우국의 편집자’라 불린 조선 선비정신의 출판인이었다.

― 육당이나 춘원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불편한 시각을 어떻게 보세요.

고 대표는 “왜 모두들 ‘용감한 달걀이 되어 부서지지 않았느냐’고, ‘바위처럼 버티고 선 조선총독부의 권력에 부딪쳐 깨어지지 않았느냐’고 질타만 하느냐”고 반문했다.

― 문인들의 친일행적을 이해하는 입장인가요?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었던 문인들은 때때로 조선총독부 신민통치 정책을 찬양하거나 돕는 글을 써야만 했어요. 과감히 절필할 수 있었던 몇몇 문인을 빼면 모든 문인이 ‘잠재적 친일문인’이었어요. 그건 시대적 처연함이죠.”

“시대적 처연함”이란 대목에서 그는 숨을 가다듬었다.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친일을 제외하고 일제 말기 우리 문인에게 놓인 길은 세 갈래였다고 한다. 붓을 꺾는 일, 골방에서 계속 창작하는 일, 아니면 일본어로 쓰되 식민지 현실을 부각시키는 일이었다.

붓을 꺾으려면 먹고사는 일에서 해방돼야 한다. 목숨과 생계를 유지하는 한 붓을 꺾기란 매우 요원해 보인다. 2000여 편의 시문을 남긴 매천 황현(黃玹·1855~1910)처럼 〈절명시(絶命詩)〉를 남긴 채 자결을 택하는 길이 유일한 선택일지 모른다. 한국의 문인 중에 펜을 버리고 총과 칼을 든 경우는 거의 없다.

작품 발표는 안 하되 골방에서 글을 쓰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소설가 황순원, 시인 박두진 등이 그 경우다. 발표할 지면은 없지만, 숨어 집필에 열중, 우리말로 쓴 작품을 차곡차곡 쌓았다.

일본어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일본 문단에 발표한 경우도 있다.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 출신의 월북 작가 김사량이 대표적이다. 1940년 단편 〈빛 속에서〉로 조선(한국)인 최초로 아쿠타가와상(芥川賞) 후보에 올랐던 그는, 주로 일본어로 작품을 썼다.

고 대표의 말이다.

“일제 식민통치는 혹독했고 집요하며 길었습니다. 역대 조선 총독들이 모두 일본군 현역 장군들이었다는 사실이 상징하는 것이 뭘까요? 한국인의 저항을 아주 작은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뜻일 겁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우리 민족에 대해 거의 절대적 권력을 가졌었고, 조선 총독들의 통치는 한국인의 인권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고 국제여론의 압력도 없었습니다.

당시 문인들은 죽지 않기 위해, 식민통치 정책을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얻을 수 없었으니까요.”

육당을 변절자로 비난한 만해의 경우

동서문화사 고정일 대표. 그는 “기왕에 시작한 일, 어떤 반발도 이겨내고 춘원·육당 상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고 대표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의 예를 들었다.

“만해는 육당을 ‘변절자’라고 공박하고 지탄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해도 비켜갈 수 없었어요. 1937년엔 불교잡지에다 일제를 옹호하고 ‘천황폐하의 신민’으로서 조선인들의 의무를 독려하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만해는 또 승려들의 결혼문제를 언급하며 ‘헌의서’와 ‘건백서’를 썼는데, 헌의(獻議)는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뢴다는 뜻이지만, 건백(建白)은 임금이자 조정에 의견을 아뢴다는 뜻입니다. 만해가 통감(데라우치 마사타케)과 통감부를 임금이나 조정으로 여겼어요. 그때가 1910년 9월입니다. 항일 지도자가 그런 건의를 식민 통치자에게 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의 현실인식으로선 충격적이죠. 일제 한국인(조선인) 치고 친일과 친일문학에 자유로운 이는 거의 없습니다.”

― 어쩌면, 한국문학사에서 친일문인과 월북문인의 작품을 빼면 여백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춘원의 《무정》과 《유정》《흙과 사랑》《단종애사》 등의 문학작품은 그의 친일과 상관없는 민족의 문화자산이라고 봅니다. 《사상계》의 장준하는 육당에 대해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같이 아낄 줄 모르는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의 노구를 치하한 일이 없다’고 탄식했어요.”

당초 고 대표는 춘원·육당 상을 제정하며 춘원학회와 육당학회의 후원을 받을 생각이었지만 뜻을 접었다. 사전에 전·현직 학회장에게 확약까지 받았으나 일부 유족이 반발하면서 벽에 부딪혔다. “특정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에 (춘원을) 값싸게 팔아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 대표로선 억장이 무너지는 얘기다. 당초 춘원상에 긍정적이던 이정화 여사도 난감해 하며 “서로 분란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고 대표는 진보단체의 공격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상심이 컸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사주를 받은 행동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장고를 거듭하다 계속 추진키로 결심을 굳혔다.

“반발은 예상되지만 기왕에 시작한 일, 뜻을 굽히지 않을 생각입니다. 공정한 심사로 상의 투명성과 문학적 학술적 가치를 높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