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남 나봉한 감독, 대(代) 이어 영화감독…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꼬마신랑3〉 등
100여 편 제작
⊙ 나운규 독립운동 밝혀져 1993년 건국훈장애국장 추서… 대전 국립묘지 안장
⊙ 끝까지 곁에서 지킨 여우(女優) 현방란… 치매로 고생하다 사망
100여 편 제작
⊙ 나운규 독립운동 밝혀져 1993년 건국훈장애국장 추서… 대전 국립묘지 안장
⊙ 끝까지 곁에서 지킨 여우(女優) 현방란… 치매로 고생하다 사망
- 나운규 감독.
영화감독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1902~1937)는 한국 영화사에 신화적 인물이다. 서른여섯 짧은 생애 동안 16편의 극영화를 제작하고 25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아리랑〉은 한국 무성영화를 대표하는 최초의 걸작이었다. 올해는 〈아리랑〉이 개봉된 지 꼭 90년이 된다.
필름이 ‘증발’해 버려 실체는 모르나 영화 〈아리랑〉은 식민지 민족혼을 담은 영상 기록물이다. 《실록 한국영화 총서(1903~1945)》를 쓴 김종욱(金鍾旭)씨의 말이다.
“총독부는 〈아리랑〉 개봉 당일부터 주제가 노랫말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영화 선전지를 압수했고 주제가를 담은 음반 판매를 금지시켰으며 극장 내에 경찰을 임석시켜 변사의 해설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아리랑〉은 민족영화 1호로 각광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전국에서 개봉됐고 일본·중국까지 건너가 동포의 가슴을 적셨다. 춘사 나운규는 좌우 이념을 강요받기 전 세상을 떠나 남북한 모두에서 민족영화의 봉우리로 기억된다. 월북 시인 임화(林和)는 “무성시대 조선 영화계를 나운규 시대라 이름 해도 좋다. 무성시대에 나운규 이상 가는 영화예술가는 나오지 아니했다”(잡지 《삼천리》 1941년 6월호)고 말했다.
1937년 8월 9일 폐결핵으로 숨진 그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그해 《조선일보》는 8월 11일부터 사흘간 〈나운규 일대기〉를 연재했는데 13일자 기사 말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 8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은 고향에서는 그의 딸 신자(辛子) 양이 달려오고, 그의 형이 달려왔으며, 그의 본처와 현방란이 돌아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 종익(鍾益) 군은 경성공업을 마치고 어디로인지 가 버려서 아버지의 죽음에 임종을 못하였다고 한다. …〉
춘사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서 15살 때 조혼, 조정옥(曺貞玉·1956년 작고)을 부인으로 맞아들였으나 집안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춘사의 임종을 지켜본 여인은 유랑극단 시절 극단 단장의 딸 현방란(玄芳蘭)이었다. 이들은 단성사 뒤 허름한 셋방에서 나운규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3년 남짓 살았다고 한다.
현방란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영화계 인사를 통해 수소문했다. 충무로에서 만난 한 원로감독의 말이다.
“현방란은 춘사의 영화 〈무화과〉 〈그림자〉 〈아리랑 3편〉 등에 출연하며 스크린에 데뷔했어요. 춘사가 죽고 소식이 끊겼습니다. 참으로 애석한 한국 영화 인물사의 실상입니다. 말년에 어느 양로원에서 치매로 고생하다 사망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인할 길이 없어요.
이런 얘기도 있어요. 현방란의 아버지(현성완)는 일제말 극단(형제좌) 단장이었습니다. 춘사가 죽자 (아버지의) 극단을 따라 만주로 떠났다는 설, 황해도 해주(海州)로 갔다는 설도 있어요. 춘사와 함께 쓰던 살림도구는 현방란의 고향인 전북 고창으로 내려보냈다고 하더군요.”
《동아일보》 1981년 5월 9일자 기사에 원로배우 복혜숙의 회고가 실렸는데 이런 구절이 나온다.
〈… 거의 죽음에 이른 춘사를, 어린 딸을 업은 현방란이 간호하던 생각이 난다. …〉
복혜숙의 증언으로 볼 때, 나운규·현방란 사이에 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자(딸)에게 전보해서 오게 하라. 보고 싶다”(春史)
나운규의 2남1녀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영화계 인사의 도움을 받아 나운규 후손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장남인 나종익(羅鍾益)은 함경북도 상상봉역(驛) 조역(助役)으로 일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월남한다고 벼르다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북한에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나종익은 회령에서 태어났으나 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서울대 공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경성고공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공업발전을 위해 설립한 전문학교다. 전체 조선인 졸업생은 30%에 불과했다.
딸 나신자(羅辛子)는 오빠 나종익보다 세 살 어리다. 나운규는 죽기 직전 친구 윤봉춘(尹逢春)에게 이런 청을 했다고 한다.
“신자에게 전보해서 오게 하라. 보고 싶다.”
윤봉춘이 사경을 헤매던 춘사에게 “누가 보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유일하게 딸 신자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나신자는 여성잡지 《여원》(1955년 창간, 1970년 폐간)에서 사진부장으로 일하던 김규혁(金奎赫)과 결혼, 슬하에 2남2녀를 낳았다. 《여원》은 본격적인 상업지 체제를 갖춘 첫 여성지로, 사진부장이던 김규혁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현재 나신자·김규혁은 모두 사망한 상태다.
나신자의 2남2녀 중 장남은 건국대 수의학과 교수와 학장, 대한수의학회 부회장, 건국대 부속 동물병원장을 지낸 김태종 명예교수다. 그에게 만나고 싶다고 청을 넣었으나 “아는 게 없다. 죄송하다”는 답을 들었다.
차남은 KBS 카메라 감독으로 근무했던 김의종이다. 퇴직 후 종편채널인 JTBC에서 근무한 것으로 전해진다.
춘사의 막내아들 나봉한(羅奉漢·83)은 아버지 뒤를 이어 영화감독이 됐다. 태어난 곳은 서울. 3살 때 춘사가 사망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 경기상고와 서라벌예대를 나와 신상옥(申相玉) 감독에게 영화·연출을 배웠다. ‘신 필름’에서 만든 데뷔작은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년). 이 영화로 나 감독은 그해 대종상을 거머쥐었다. 또 민비로 분(扮)한 배우 최은희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나봉한은 1966년 결혼해 2남1녀를 낳았다. 장남 광열(羅光·50)은 IT회사 이사로 재직 중이다. 차남 광일(羅光一·48)은 세무사다. 두 아들은 대학에서 경영·회계 관련 학과를 전공했다. ‘3대 영화인’ 가업을 잇지 않은 셈이다.
막내 은정(羅恩晶·46)은 서울예대 방송연예과 90학번이다. 개그맨 김지선과 동기다. KBS 〈전국은 지금〉, SBS 〈출발 서울의 아침〉, EBS 〈탐구현장〉 등에서 전문 리포터로 일하다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나봉한 감독은 현재 와병 중이다. 16년 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누워 지내고 있다. 나 감독과 대화가 불가능해 장남 광열씨를 만났다.
‘나운규 아들’이란 숙명
나광열씨는 아버지 나봉한 감독의 근황을 이렇게 전했다.
“현역에서 은퇴하시고 2년 뒤 쓰러지셨어요. 2001년 무렵입니다. 지금은 주변 사람을 거의 못 알아보세요. 기억력도 많이 감퇴하셨고요. 평소엔 누워 계시는데 식사 때는 휠체어에 앉으세요. 그런 아버지를 구완하시는 어머니 건강도 안 좋으셔요.”
— 2대가 영화감독 집안이네요.
“할아버지처럼 아버지도 영화인으로 사셨어요. 〈청산별곡〉 〈꽃가마〉 〈화촉신방〉 〈문정왕후〉 〈인조반정〉 〈꼬마신랑3〉 같은 사극 영화를 만드셨는데 그 시절엔 사극이 많았어요. 평론가로부터 ‘사극을 말쑥하고 기름지게 다듬는 솜씨가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으셨어요. 하지만 ‘나운규 아들’이란 숙명을 메고 영화를 만드셨을 겁니다.
아버지는 충무로 영화계가 불황에 빠지자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했어요. 1970~80년대 민방위훈련 홍보영상을 아버지가 다 만드셨고, 기업홍보 영상도 제작하셨어요. 그러나 극영화를 단념한 것은 아니었어요.”
— 왜 문화영화나 광고영화를 만드셨어요.
“1970년대초 충무로는 불황으로 내리막길을 걷던 시절입니다. TV 보급으로 영화관객이 갑자기 줄더니 문 닫는 극장이 하나둘 생겨났어요. 영화 제작 편수도 1960년대의 절반에 못 미쳤습니다. 아버지는 계속 극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으셨나 봐요. 대신 LG그룹, 현대그룹, 포항제철, 동서식품 등의 기업 홍보영상을 만드셨습니다.”
이 밖에도 나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원형극장용 멀티비전을 제작했고 1990년에는 독립기념관 입체영화(서클비전), 1993년에는 대전EXPO 정부관의 멀티비전을 만들었다.
광열씨는 그러나 “(아버지가) 극영화를 만드실 때는 집안이 괜찮았으나 다른 일에 손을 대면서 어려워졌다. 사업을 한다고 집을 팔았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영화감독이 천직이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나운규는 화려한 삶을 사셨지만 아버지 나봉한은 그러지 못했다”며 이런 설명을 담담히 덧붙였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아버지는 겨우 세 살이셨어요. 어린 시절 아버지 없이 성장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어요. 그런 아픔 때문인지 당신은 평생 가족을 위해 사셨습니다. 살면서 어머니가 속상해한 적이 없으니까요.”
나봉한 감독에게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그가 경기상고 3학년에 재학할 때, 서라벌예술학교(나중 서라벌예술대학으로 바뀌었다가 1972년 중앙대와 통합됐다) 교장 윤백남(尹白南)을 찾아갔다.
윤백남은 한국영화의 여명기에 기여한 대표적인 영화인이다. 그가 ‘윤백남프로덕션’을 통해 만든 〈심청전〉(1925년작)의 주인공이 나운규다. 춘사는 윤백남을 찾아가 〈심청전〉 출연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나운규 아들이 윤백남을 찾아간 겁니다. 윤백남 교장이 ‘자네 부친도 날 찾아왔었는데… 솔직히 이야기해 난 반댈세. 영화가 얼마나 고생스러운 것인데… 자네 어머니가 고생한 일 모르나’고 했다고 합니다.”
나운규는 영화감독으로 요란한 주목을 받았지만 영화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아내 조정옥은 물지게를 지면서 억척스레 생활고와 싸워야 했다.
“아버지는 그날 윤백남 선생에게 ‘영화를 해도 절대로 가족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셨대요. 그 약속대로 정말 성실하게 사셨어요. 평생 남 신세를 안 지려 했죠. 몸이 편찮으셔도 가족에겐 내색을 않으셨어요.
당신은 저희에게 항상 옳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길게 생각해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셨어요. ‘후회하지 않는 삶!’, 이게 학창시절, 우리집 가훈이었습니다.”
나봉한 감독의 집에 〈아리랑〉 필름이 있었다?
‘나운규 아들’이란 사실이 나봉한 감독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운규라는 이름 석 자가 벅차게 무거웠을 것이다. 광열씨의 말이다.
“영화계라는 큰 테두리에서 후광을 입으셨을 겁니다. 아버지는 서라벌예술학교에서 안종화(安鍾和)·이광래(李光來)·유두연(流頭宴) 선생에게 영화를 배웠는데 모두 할아버지 친구들이셨어요. 신상옥 감독 밑에서 작업한 것이나 동료 감독에 비해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던 점도 할아버지 덕분인지 몰라요. 하지만 아버지는 나운규 뒤를 잇는다는 생각보다 영화 그 자체를 미치도록 좋아하셨던 겁니다.”
“아버지 나봉한은 나운규 후광을 이용하거나, 나운규 아들을 내세우고, 나운규 영화와 경쟁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나봉한 감독은 한국영상자료원 관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해방 후 종로 우미관에서 아버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리랑〉은 대단한 작품”이라고. 어린 시절 나봉한은 변사의 말을 모두 외울 정도로 아버지의 〈아리랑〉을 보고 또 보았고 한다. 아들은 영화 〈아리랑〉을 부친의 유산이라 여겼다.
나 감독은 또 사라진 〈아리랑〉 필름을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집에 〈아리랑〉 필름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오셨는데 아버지 친구분이셨다. 그분이 빨리 갖고 오라고 해서 (어머니가) 내주셨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나 감독 집에 〈아리랑〉 필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광열씨는 조금 다른 말을 했다.
“과거에 할머니를 통해 받은 할아버지 유품 중에 필름이 있었다는데, 그 필름이 〈아리랑〉인지 여부는 알 수 없어요.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제게 안 하셨어요. 어쨌든 아버지는 오랫동안 〈아리랑〉 필름을 찾으려 애를 많이 쓰셨어요. 중국에서 〈아리랑〉을 상영했다는 기록을 보고 중국엘 갔고, 〈아리랑〉 필름 소장자로 알려진 일본인 아베 요시시게(2005년 사망)를 여러 차례 만나기도 했어요. 그러나 필름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순 없었어요.”
독립운동가 춘사
— 나운규 묘지는 어디 있나요.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모셨다가 지금은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했어요.”
나운규가 독립유공자로 국립묘지에 묻히게 된 것은 아들 나봉한 감독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1988년 독립기념관 원형극장에서 상영된 문화영화 〈내 사랑 금수강산〉을 감독했다. 당시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이었던 조동걸 교수가 “치안본부(현 경찰청)에 일제 때 춘사의 수형기록이 남아 있다”는 말을 하더란다. 광열씨 말이다.
“공교롭게도 아버지 친구분이 경찰청에 근무하셨는데 자료관리 담당자셨나 봐요. 수형자료를 찾는 데만 2년여가 걸렸어요.”
나 감독은 춘사의 수형기록을 토대로 1992년 3월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보상을 신청했고 정부는 이듬해 8월 15일 광복절 날(48주년)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춘사의 독립운동 행적을 더듬어 보자. 1919년 4월 나운규는 회령교회 최경재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3·1 독립선언문 수천 장을 비밀리에 등사했고 시위행진용 태극기도 수천 장 만들었다. 시위를 벌이기 직전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기습 시위를 감행했다.
이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북간도 국민회 소속 독립군에 입단한 춘사는 회령과 청진을 잇는 ‘회청선 7호 터널’ 폭파와 전선 절단공작에 참여했다. 그러나 1922년 배신한 동료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잡혀 고향인 회령에 압송돼 1년6개월간 복역했다. 광열씨는 끝으로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셨어요. 수형기록을 찾아내 ‘독립운동가 나운규’가 되셨으니까요. 어려웠던 일제하에 나라 잃은 설움을 영화로 담아내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할아버지 뜻을 생각하면 후손으로서 자랑스럽습니다. 그 뜻이 우리 시대까지 잘 이어졌으면 합니다.”
현재 광열씨는 슬하에 딸을 하나 두고 있다.
— 딸을 영화인으로 만들 생각은?
“아버진 3대 영화 가족을 꿈꾸셨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어요. 세대를 한 번 뛰었으니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없잖아요. 제 남동생도 딸이 하나입니다.”
— 그래도 딸이 원한다면?
“아이가 원한다면야 ….”⊙
필름이 ‘증발’해 버려 실체는 모르나 영화 〈아리랑〉은 식민지 민족혼을 담은 영상 기록물이다. 《실록 한국영화 총서(1903~1945)》를 쓴 김종욱(金鍾旭)씨의 말이다.
“총독부는 〈아리랑〉 개봉 당일부터 주제가 노랫말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영화 선전지를 압수했고 주제가를 담은 음반 판매를 금지시켰으며 극장 내에 경찰을 임석시켜 변사의 해설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아리랑〉은 민족영화 1호로 각광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전국에서 개봉됐고 일본·중국까지 건너가 동포의 가슴을 적셨다. 춘사 나운규는 좌우 이념을 강요받기 전 세상을 떠나 남북한 모두에서 민족영화의 봉우리로 기억된다. 월북 시인 임화(林和)는 “무성시대 조선 영화계를 나운규 시대라 이름 해도 좋다. 무성시대에 나운규 이상 가는 영화예술가는 나오지 아니했다”(잡지 《삼천리》 1941년 6월호)고 말했다.
1937년 8월 9일 폐결핵으로 숨진 그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그해 《조선일보》는 8월 11일부터 사흘간 〈나운규 일대기〉를 연재했는데 13일자 기사 말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 8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받은 고향에서는 그의 딸 신자(辛子) 양이 달려오고, 그의 형이 달려왔으며, 그의 본처와 현방란이 돌아앉아서 울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 종익(鍾益) 군은 경성공업을 마치고 어디로인지 가 버려서 아버지의 죽음에 임종을 못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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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리랑〉 제작진과 함께. 앞줄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나운규 감독이다. |
현방란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영화계 인사를 통해 수소문했다. 충무로에서 만난 한 원로감독의 말이다.
“현방란은 춘사의 영화 〈무화과〉 〈그림자〉 〈아리랑 3편〉 등에 출연하며 스크린에 데뷔했어요. 춘사가 죽고 소식이 끊겼습니다. 참으로 애석한 한국 영화 인물사의 실상입니다. 말년에 어느 양로원에서 치매로 고생하다 사망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인할 길이 없어요.
이런 얘기도 있어요. 현방란의 아버지(현성완)는 일제말 극단(형제좌) 단장이었습니다. 춘사가 죽자 (아버지의) 극단을 따라 만주로 떠났다는 설, 황해도 해주(海州)로 갔다는 설도 있어요. 춘사와 함께 쓰던 살림도구는 현방란의 고향인 전북 고창으로 내려보냈다고 하더군요.”
《동아일보》 1981년 5월 9일자 기사에 원로배우 복혜숙의 회고가 실렸는데 이런 구절이 나온다.
〈… 거의 죽음에 이른 춘사를, 어린 딸을 업은 현방란이 간호하던 생각이 난다. …〉
복혜숙의 증언으로 볼 때, 나운규·현방란 사이에 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자(딸)에게 전보해서 오게 하라. 보고 싶다”(春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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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937년 8월 13일자 〈나운규 일대기〉 기사. 아래 인물사진은 나운규 장남 종익과 딸 신자. |
장남인 나종익(羅鍾益)은 함경북도 상상봉역(驛) 조역(助役)으로 일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월남한다고 벼르다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북한에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나종익은 회령에서 태어났으나 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서울대 공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경성고공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공업발전을 위해 설립한 전문학교다. 전체 조선인 졸업생은 30%에 불과했다.
딸 나신자(羅辛子)는 오빠 나종익보다 세 살 어리다. 나운규는 죽기 직전 친구 윤봉춘(尹逢春)에게 이런 청을 했다고 한다.
“신자에게 전보해서 오게 하라. 보고 싶다.”
윤봉춘이 사경을 헤매던 춘사에게 “누가 보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유일하게 딸 신자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나신자는 여성잡지 《여원》(1955년 창간, 1970년 폐간)에서 사진부장으로 일하던 김규혁(金奎赫)과 결혼, 슬하에 2남2녀를 낳았다. 《여원》은 본격적인 상업지 체제를 갖춘 첫 여성지로, 사진부장이던 김규혁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현재 나신자·김규혁은 모두 사망한 상태다.
나신자의 2남2녀 중 장남은 건국대 수의학과 교수와 학장, 대한수의학회 부회장, 건국대 부속 동물병원장을 지낸 김태종 명예교수다. 그에게 만나고 싶다고 청을 넣었으나 “아는 게 없다. 죄송하다”는 답을 들었다.
차남은 KBS 카메라 감독으로 근무했던 김의종이다. 퇴직 후 종편채널인 JTBC에서 근무한 것으로 전해진다.
춘사의 막내아들 나봉한(羅奉漢·83)은 아버지 뒤를 이어 영화감독이 됐다. 태어난 곳은 서울. 3살 때 춘사가 사망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한다. 경기상고와 서라벌예대를 나와 신상옥(申相玉) 감독에게 영화·연출을 배웠다. ‘신 필름’에서 만든 데뷔작은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년). 이 영화로 나 감독은 그해 대종상을 거머쥐었다. 또 민비로 분(扮)한 배우 최은희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나봉한은 1966년 결혼해 2남1녀를 낳았다. 장남 광열(羅光·50)은 IT회사 이사로 재직 중이다. 차남 광일(羅光一·48)은 세무사다. 두 아들은 대학에서 경영·회계 관련 학과를 전공했다. ‘3대 영화인’ 가업을 잇지 않은 셈이다.
막내 은정(羅恩晶·46)은 서울예대 방송연예과 90학번이다. 개그맨 김지선과 동기다. KBS 〈전국은 지금〉, SBS 〈출발 서울의 아침〉, EBS 〈탐구현장〉 등에서 전문 리포터로 일하다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나봉한 감독은 현재 와병 중이다. 16년 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누워 지내고 있다. 나 감독과 대화가 불가능해 장남 광열씨를 만났다.
‘나운규 아들’이란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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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운규 감독의 2남 나봉한 감독. |
“현역에서 은퇴하시고 2년 뒤 쓰러지셨어요. 2001년 무렵입니다. 지금은 주변 사람을 거의 못 알아보세요. 기억력도 많이 감퇴하셨고요. 평소엔 누워 계시는데 식사 때는 휠체어에 앉으세요. 그런 아버지를 구완하시는 어머니 건강도 안 좋으셔요.”
— 2대가 영화감독 집안이네요.
“할아버지처럼 아버지도 영화인으로 사셨어요. 〈청산별곡〉 〈꽃가마〉 〈화촉신방〉 〈문정왕후〉 〈인조반정〉 〈꼬마신랑3〉 같은 사극 영화를 만드셨는데 그 시절엔 사극이 많았어요. 평론가로부터 ‘사극을 말쑥하고 기름지게 다듬는 솜씨가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으셨어요. 하지만 ‘나운규 아들’이란 숙명을 메고 영화를 만드셨을 겁니다.
아버지는 충무로 영화계가 불황에 빠지자 정부 홍보영화를 제작했어요. 1970~80년대 민방위훈련 홍보영상을 아버지가 다 만드셨고, 기업홍보 영상도 제작하셨어요. 그러나 극영화를 단념한 것은 아니었어요.”
— 왜 문화영화나 광고영화를 만드셨어요.
“1970년대초 충무로는 불황으로 내리막길을 걷던 시절입니다. TV 보급으로 영화관객이 갑자기 줄더니 문 닫는 극장이 하나둘 생겨났어요. 영화 제작 편수도 1960년대의 절반에 못 미쳤습니다. 아버지는 계속 극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으셨나 봐요. 대신 LG그룹, 현대그룹, 포항제철, 동서식품 등의 기업 홍보영상을 만드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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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봉한 감독(왼쪽에서 두 번째)은 신상옥(오른쪽 끝) 감독에게 영화·연출을 배웠다. |
광열씨는 그러나 “(아버지가) 극영화를 만드실 때는 집안이 괜찮았으나 다른 일에 손을 대면서 어려워졌다. 사업을 한다고 집을 팔았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영화감독이 천직이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나운규는 화려한 삶을 사셨지만 아버지 나봉한은 그러지 못했다”며 이런 설명을 담담히 덧붙였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아버지는 겨우 세 살이셨어요. 어린 시절 아버지 없이 성장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어요. 그런 아픔 때문인지 당신은 평생 가족을 위해 사셨습니다. 살면서 어머니가 속상해한 적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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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운규 감독의 손자 광열씨. |
윤백남은 한국영화의 여명기에 기여한 대표적인 영화인이다. 그가 ‘윤백남프로덕션’을 통해 만든 〈심청전〉(1925년작)의 주인공이 나운규다. 춘사는 윤백남을 찾아가 〈심청전〉 출연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이번에는 나운규 아들이 윤백남을 찾아간 겁니다. 윤백남 교장이 ‘자네 부친도 날 찾아왔었는데… 솔직히 이야기해 난 반댈세. 영화가 얼마나 고생스러운 것인데… 자네 어머니가 고생한 일 모르나’고 했다고 합니다.”
나운규는 영화감독으로 요란한 주목을 받았지만 영화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아내 조정옥은 물지게를 지면서 억척스레 생활고와 싸워야 했다.
“아버지는 그날 윤백남 선생에게 ‘영화를 해도 절대로 가족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셨대요. 그 약속대로 정말 성실하게 사셨어요. 평생 남 신세를 안 지려 했죠. 몸이 편찮으셔도 가족에겐 내색을 않으셨어요.
당신은 저희에게 항상 옳은 길을 걸어야 한다고, 길게 생각해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셨어요. ‘후회하지 않는 삶!’, 이게 학창시절, 우리집 가훈이었습니다.”
나봉한 감독의 집에 〈아리랑〉 필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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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 시절 나운규(15세). |
“영화계라는 큰 테두리에서 후광을 입으셨을 겁니다. 아버지는 서라벌예술학교에서 안종화(安鍾和)·이광래(李光來)·유두연(流頭宴) 선생에게 영화를 배웠는데 모두 할아버지 친구들이셨어요. 신상옥 감독 밑에서 작업한 것이나 동료 감독에 비해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던 점도 할아버지 덕분인지 몰라요. 하지만 아버지는 나운규 뒤를 잇는다는 생각보다 영화 그 자체를 미치도록 좋아하셨던 겁니다.”
“아버지 나봉한은 나운규 후광을 이용하거나, 나운규 아들을 내세우고, 나운규 영화와 경쟁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나봉한 감독은 한국영상자료원 관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해방 후 종로 우미관에서 아버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리랑〉은 대단한 작품”이라고. 어린 시절 나봉한은 변사의 말을 모두 외울 정도로 아버지의 〈아리랑〉을 보고 또 보았고 한다. 아들은 영화 〈아리랑〉을 부친의 유산이라 여겼다.
나 감독은 또 사라진 〈아리랑〉 필름을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집에 〈아리랑〉 필름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오셨는데 아버지 친구분이셨다. 그분이 빨리 갖고 오라고 해서 (어머니가) 내주셨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나 감독 집에 〈아리랑〉 필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광열씨는 조금 다른 말을 했다.
“과거에 할머니를 통해 받은 할아버지 유품 중에 필름이 있었다는데, 그 필름이 〈아리랑〉인지 여부는 알 수 없어요.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제게 안 하셨어요. 어쨌든 아버지는 오랫동안 〈아리랑〉 필름을 찾으려 애를 많이 쓰셨어요. 중국에서 〈아리랑〉을 상영했다는 기록을 보고 중국엘 갔고, 〈아리랑〉 필름 소장자로 알려진 일본인 아베 요시시게(2005년 사망)를 여러 차례 만나기도 했어요. 그러나 필름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순 없었어요.”
독립운동가 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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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원으로 이장하기 전 나운규 감독의 묘는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었다. 나봉한 감독과 딸 은정씨가 참배하고 있다. |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모셨다가 지금은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했어요.”
나운규가 독립유공자로 국립묘지에 묻히게 된 것은 아들 나봉한 감독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1988년 독립기념관 원형극장에서 상영된 문화영화 〈내 사랑 금수강산〉을 감독했다. 당시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이었던 조동걸 교수가 “치안본부(현 경찰청)에 일제 때 춘사의 수형기록이 남아 있다”는 말을 하더란다. 광열씨 말이다.
“공교롭게도 아버지 친구분이 경찰청에 근무하셨는데 자료관리 담당자셨나 봐요. 수형자료를 찾는 데만 2년여가 걸렸어요.”
나 감독은 춘사의 수형기록을 토대로 1992년 3월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보상을 신청했고 정부는 이듬해 8월 15일 광복절 날(48주년)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춘사의 독립운동 행적을 더듬어 보자. 1919년 4월 나운규는 회령교회 최경재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3·1 독립선언문 수천 장을 비밀리에 등사했고 시위행진용 태극기도 수천 장 만들었다. 시위를 벌이기 직전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기습 시위를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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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나운규 묘지. 사진=현충원 |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셨어요. 수형기록을 찾아내 ‘독립운동가 나운규’가 되셨으니까요. 어려웠던 일제하에 나라 잃은 설움을 영화로 담아내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할아버지 뜻을 생각하면 후손으로서 자랑스럽습니다. 그 뜻이 우리 시대까지 잘 이어졌으면 합니다.”
현재 광열씨는 슬하에 딸을 하나 두고 있다.
— 딸을 영화인으로 만들 생각은?
“아버진 3대 영화 가족을 꿈꾸셨지만 뜻을 이루진 못했어요. 세대를 한 번 뛰었으니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없잖아요. 제 남동생도 딸이 하나입니다.”
— 그래도 딸이 원한다면?
“아이가 원한다면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