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가수에서 화가 그리고 방송인으로 다음의 길은?
⊙ 40년 동안 노래했으니 기념 공연 대신 노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
⊙ 최고의 한국 가요는 조용필의 ‘생명’, 송창식의 ‘사랑이야’, 명혜원의 ‘청량리 부르스’
⊙ 송창식이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과 쎄시봉 무대에 함께 서지 않는 이유
⊙ 개인전을 4차례 연 가수 출신 화가로서 조영남의 代作 시비를 보는 생각
⊙ 죽음에 초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폐암 오진으로 몸무게 8kg이나 줄어
최백호
1950년생. 가야고등학교 졸업 /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가수 데뷔. 한국음악발전연구소 소장,
뮤지스땅스 대표
⊙ 40년 동안 노래했으니 기념 공연 대신 노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
⊙ 최고의 한국 가요는 조용필의 ‘생명’, 송창식의 ‘사랑이야’, 명혜원의 ‘청량리 부르스’
⊙ 송창식이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과 쎄시봉 무대에 함께 서지 않는 이유
⊙ 개인전을 4차례 연 가수 출신 화가로서 조영남의 代作 시비를 보는 생각
⊙ 죽음에 초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폐암 오진으로 몸무게 8kg이나 줄어
최백호
1950년생. 가야고등학교 졸업 /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가수 데뷔. 한국음악발전연구소 소장,
뮤지스땅스 대표
매일 밤 10시5분부터 12시까지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SBS 러브FM을 통해서다. 그것도 벌써 8년째다. 그의 삶은 ‘조용하게 분주’했다. 노랫말을 만들고 곡을 직접 쓰기도 하는 가수로 출발해 개인전을 4차례나 연 화가로, 연기자로,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음악발전연구소라는 곳의 소장으로 인디밴드를 돕는 뮤지스땅스의 대표로 바쁜 삶을 살았고, 살고 있다. 그 사이에는 짧은 이민 생활도 있었다. 우리가 잘 몰랐을 뿐이다.
늘 가까이 있지만 신비로운 존재, 최백호(崔白虎). 그가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는다. 그의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1977년에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 내년이 데뷔 40주년이죠?
“정확히 하면 올햅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77년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노래는 76년 12월에 나왔습니다.”
— 40주년 기념 공연도 준비해야겠네요.
“저도 기념 공연을 하려고 했는데 후배 한 명이 ‘40주년이 되면 놀아야죠’ 하더군요(웃음). 40년 동안 노래 부르느라 고생했으니까 올해는 놀아도 된다는 거예요.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공연 대신 앨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40주년 기념 앨범은 언제 나옵니까.
“지금 편곡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CD를 두 개 넣어서 만들어요. LP판도 같이 만들고요.”
— 국내에 LP판을 제작하는 곳이 있나요?
“우리나라에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참 그런 게 답답한데 그 시절이 지나가면 기계고 뭐고 다 없애버려요. 일본은 지금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일본 가서 찍어와야 돼요.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한물가면 확 갖다 버리죠.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잖아요.”
최백호씨의 모습을 떠올리면 청바지 등 진 종류의 바지와 셔츠, 헝클어진 듯한 머리다. 기자와 만난 날도 흰색 진 바지와 흰색 면 셔츠를 입고 있었다.
— 20대 때나 70을 바라보는 지금이나 복장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
— 나이 먹어가면서 ‘옷을 너무 젊게 입으면 쑥스럽다’는 생각 안 드나요?
“그런 생각은 안 합니다. 제가 옷을 젊게 입는 것이 아니고 20대 때 제가 입던 스타일을 지금도 그대로 입는 것뿐입니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죠. 젊은 친구들 보면 굉장히 타이트한 옷을 입는데 그런 거를 입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 외양에서 20대 시절과 지금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헤어스타일이죠. 흰머리가 많이 났으니까요(웃음). 나이가 드니까 머리가 긴 게 추해 보여서 좀 짧게 하죠. 배도 나왔고요.”
— 정신적으로 20대와 비교해서 변한 것은요.
“아무래도 생각이 좀 넓어졌고요. 생각의 템포가 느려지면서 여유가 생기고 시각이 넓어졌다고 할까요. 젊었을 때는 단면적인 성격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둘러보고 급하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 젊은 시절에 모나고 급한 성격이었으면 싸움도 많이 했겠네요.
“싸움은 안 했어요. 별로 안 좋아해요.”
부모님의 죽음
최백호씨는 생후 5개월 만에 아버지(최원봉)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의 부친 최원봉씨는 28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치인이었다. 그에게도 정치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까.
— 한동안 연예인들의 국회의원 출마가 많았는데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 그래도 부친이 국회의원도 하셨고 그 피가 흐르고 있을 텐데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까.
“그냥 보통 일반적인 국민의 시각에서 관심이 있는 정도죠.”
— 선거철이 되면 도와달라는 정치인들이 꽤 있을 텐데요.
“많이 있죠. 그런데 저는 라디오방송을 진행하고 있어서 못하죠. 그게 어떤 면에서는 편합니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까요.”
— 정치 로고송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은 안 받았나요?
“그런 제안은 꽤 받아봤습니다. ‘영일만 친구’라는 제 노래는 포항에서 쓰겠다고 해서 그냥 쓰게 했죠. 만들어주지는 못했습니다.”
생후 5개월 만에 부친을 여읜 최백호씨는 교사였던 어머니마저 그가 미대(美大) 진학을 꿈꾸며 재수하던 시절에 잃는다. 그의 나이 만 스물이었다.
— 일찍 부모님의 죽음을 겪었는데요. 그렇게 겪은 죽음이 최 선생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어릴 때부터 죽음이란 게 우리 삶의 끝에 있는 게 아니고 항상 제 주변에서 같이 가는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어요.”
— 죽음이라는 게 일상적인 삶의 한 부분이라고 일찍부터 받아들인 거네요.
“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초연함이 있었는데 오늘 처음 공개하지만 얼마 전에 폐암이라는 오진을 한번 받으면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 최근에요?
“네. 병원에서 ‘폐암일 수도 있으니까 다시 한 번 검사를 받아보라’고 해서 받았습니다.”
— 놀랐겠습니다.
“몸이 한 8킬로그램 빠졌어요.”
— 그 이야기 듣고 나서요?
“정말 죽음에 대해서는 초연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닥치니까 고민이 되는 거예요. 3개월 동안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한 15일 만에 8킬로가 빠졌어요.”
— 그래서 그 결과는요?
“이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사람을 완전히 반죽음까지 보내놓고는(웃음).”
— 폐암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을 때 심정은 어떻던가요?
“의사가 아침 10시30분쯤에 전화를 준다고 해서 새벽부터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정말 엄청 길더군요.”
— 종교 있으세요.
“없습니다.”
— 종교는 없지만 그 시간에 어딘가에 기도하고 싶지는 않던가요.
“그런 것도 없었어요. 그냥 멍한 상태라고 해야 하나?”
— 보통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남은 삶은 잉여다” 하면서 어디에 헌신하겠다고 결심들 하던데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그런 결심은 없었습니다. ‘어휴! 살았구나’ 하는 생각 외에 특별한 생각은 없었어요.”
송창식에 대한 생각
— 부선망(父先亡) 독자라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됐는데도 갔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였나요.
“먹고살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당시 제가 잠잘 곳과 먹을 방법이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 그게 결국은 먹고살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냥 피신을 한 거죠. 당시로서는 군대에 가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71년에 입대했는데 1년 만에 제대했어요.”
— 왜요?
“제가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제1하사관학교에서 조교로 군 복무를 했는데 그때 결핵이 발견된 겁니다.”
— 의병 제대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이었겠습니다.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 모르겠는데 저는 현실감이 좀 떨어져요. 무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걸 못해요. 이번에 폐암이라는 오진을 받았을 때도 제 죽음 후 제 주변에 닥쳐올 현실에 대해 절실하게 느끼질 못했어요. 당장 죽음이 다가왔으니까 그냥 죽는다고만 생각했죠. 뭐 제 죽음 후에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 뭘 정리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못했어요. 현실감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서 그랬는지 제대 후의 계획을 세우거나 하는 게 없었어요. 그때 보상금조로 11만5000원을 받은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 최 선생의 평소 이미지에 결핵을 덧붙이니까 과거 요절한 천재 문인들이 연상되는군요.
“저는 천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요. 그냥 노래 부르고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재능이 좀 있을 뿐이죠. 아, 그러고 보니까 ‘이름 모를 소녀’의 가수 김정호 선배님도 결핵으로 돌아가셨네요. 그분은 천재죠.”
— 김정호씨 말고 천재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가수는 또 누가 있습니까.
“제 생각일 뿐인데요. 송창식씨도 그 범주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분은 천재가 아니라 기인 아닌가요?
“절대로 이상한 분 아닙니다. 참 훌륭한 분이세요.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가수로서도 자기 자부심과 자존심이 굉장한 분입니다. 그분의 세계를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고집스러움은 있지만 경우가 바르다고 해야 하나요? 저하고 세 살 차이지만 존경스럽고 그만한 선배가 없습니다.”
— 두 분이 자주 만나는 것 같습니다.
“자주 뵙는 편인데 근래에 와서는 좀 바빠서 못 만났어요.”
— 과거 송창식씨와 함께 활동했던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씨는 쎄시봉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송창식씨는 왜 같이하지 않는 겁니까.
“자세히는 몰라도 제 생각에는 음악적인 견해차 때문에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쎄시봉 분들이 방송 토크쇼에 나와서 하는 주장은 좀 다르던데요. 이를테면 생활습관의 차이라고 할까요?
“남들이 잘 때 활동하고 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독창적으로 하는 운동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거는 공연하기 싫어서 핑계를 댄 걸 거예요. 어쨌든 워낙 음악적으로 뛰어나고 참 좋은 노래들을 많이 만드는 분입니다. 지금도 미 발표곡을 1000곡 가지고 있답니다.”
— 왜 음반으로 내지 않는 겁니까.
“제가 음반을 내자고 조르는데 지금 내봐야 얼마 안 팔릴 게 뻔하고 그 뻔한 결과가 싫다고 하셔요.”
— 거듭 묻지만 본인이 천재라는 생각을 정말 해보지 않았습니까.
“(웃음) 제 장점이 제 주제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겁니다. 어쩌면 제가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제 주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만화는 나의 스승
최백호씨는 만화광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홍대 앞 ‘북새통’이라는 만홧가게를 단골로 다녔는데 지금도 한 달에 두세 번쯤 그곳을 찾아 신작(新作)들을 살핀다고 한다. 그가 처음 만난 만화는 김산호 화백이 그린 SF만화 《라이파이》였다고 한다. 이 만화는 당시로서는 먼 미래였던 22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웅물이다.
— 만화는 작품을 구상할 때 상상력을 얻기 위해서 즐겨 보는 겁니까.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만화를 처음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마련됐다고 생각합니다. 《라이파이》라는 만화를 보면서부터 제 생각이 깨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그전까지는 항상 어린애였는데 그때부터 발전하고 상상하면서 제 세계를 만들어나갔던 것 같습니다.”
— 한마디로 《라이파이》가 최 선생의 세계관, 우주관, 철학관 형성에 기초가 됐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그 시대에도 훌륭한 만화였고 지금도 훌륭한 만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친소 관계를 《라이파이》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기도 합니다(웃음).”
— 일본 만화도 많이 봤겠군요.
“안타깝게도 일본 만화를 많이 봤어요. 하지만 요즘은 우리나라 만화 중에 좋은 만화가를 발견해서 그분 작품에 푹 빠져 있습니다.”
— 누굽니까.
“이상규 화백이라고 있습니다. 《호랑이 형님》이라는 만화를 그렸는데 그 만화는 일본 만화에 견줄 만한 우리나라 만화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나암림》을 그린 오연 화백도 대단하고요. 오연 화백의 《위나암림》은 붓으로 그린 만화인데 내용뿐만 아니라 그림도 대단합니다. 한 장 한 장이 작품이에요.”
— 그래서 만화를 통해서 영감을 많이 얻습니까.
“거기서 많은 영감을 받고 안 받고의 차원이 아니라 지금도 정말 많이 봅니다. 저는 소설이나 이런 걸 많이 보는 거나 만화를 많이 보는 거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만화라고 해서 자꾸 차별을 두면 우리 대중문화 발전에 문제가 생겨요. 저는 우리 사회의 만화에 대한 천시가 우리나라 대중문화 발전에 큰 저해 요인이 됐다고 봐요.”
—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육성을 저해했다고 보는 건가요?
“그렇죠.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들에게 만화를 많이 보게 했잖아요. 만화가 발전하면서 일본이 자동차 디자인이나 이런 면에서 세계적인 위치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미 60년대 50년대에 일본 만화에서는 스포츠카가 등장해요. 그때도 일본 만화는 그림이나 내용의 수준이 굉장히 높아요.”
— 노랫말을 짓거나 작곡을 하는 데 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까.
“그럼요. 만화에 나오는 대사가 소재가 되기도 하죠.”
— SF 만화를 좋아하는데 직접 쓰는 노랫말들은 왜 우수에 젖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요.
“그건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환경이 그래서 그런가. 이제는 그런 우수에 젖은 노래가 잘 안 나오는데 아마 환경이 바뀌어서 그럴 거예요. 살기가 편해져서요.”
— 작사를 할 때 스스로도 잘 쓴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간혹요. 하지만 제가 노랫말을 참 많이 쓰는데 제 스스로 탄복을 하는 경우는 1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정도예요.”
— 본인이 쓴 가사 중 제일 가슴에 와 닿는 곡은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죠. 그 노랫말은 가사로 쓴 게 아니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노트에 일기처럼 적어놨던 겁니다. 그걸 술자리에서 작곡가 최종혁씨한테 드렸어요. 그런데 며칠 뒤에 곡을 만들어 와가지고 피아노 치면서 부르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좋더군요.”
— 그 노래 외에 다른 노래는요.
“트로트로 만든 ‘애비’가 먼저 떠오르는데 다른 노랫말들도 대부분 다 제 이야기들이에요.”
— 이번에 데뷔 40주년 기념으로 내는 앨범도 다 본인이 작사, 작곡을 한 겁니까.
“아닙니다. 제가 만든 노래는 2, 3곡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 가수 생활 40년 동안 낸 앨범이 총 20장이면 적게 낸 거죠?
“아니에요. 2년에 한 장꼴인데 그 정도면 많은 거예요. 요즘 가수들은 자주 내지만 저희가 한창 활동할 때는 5, 6년에 한 번씩 냈어요. 그때는 노래 한 곡이 한 5년도 가고 오래갔잖아요. 지금은 몇 개월이면 끝나지만.”
— 작사할 때 마음을 일부러 다운을 시킵니까? 어떤 상태에서 만듭니까.
“특별히 가사를 쓰기 위해 준비하고 책상 앞에 앉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도 문득 떠오른 구절이 있으면 적는 거죠. 제가 작사가로서는 프로가 아니니까요. 영화를 보다가 떠오른 말 이런 것들을 메모해 두죠.”
— 곡이 먼저 나오고 거기에 가사를 붙이는 경우도 있잖아요.
“저는 언제나 가사부터 쓰고 나서 그 가사에 곡을 붙입니다. 멜로디부터 쓰고 거기에 가사를 붙이는 거는 진짜 어려워요. 그건 진짜 프로들이나 하는 거죠. 저는 노랫말에 따라서 트로트인지 탱고인지 장르도 결정합니다.”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걸 몰랐다
— 영화 간판도 그린 것으로 아는데 몇 년이나 했습니까.
“몇 년씩은 아니고요. 72년도인데 딱 일주일 했습니다. 저는 극장에 들어가면 바로 영화 간판을 그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밑그림 그리고 라인 긋고 하는 일만 시키더군요. 그래서 일주일 만에 그만뒀어요.”
— 야간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기 전에 잠깐 한 일이군요.
“그랬죠. 제가 노래를 처음 업소에서 부른 게 73년 후반 정도예요. 지금 생각하면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이라든지 다른 일들이 뭘 해도 잘 안 됐는데 가수를 시작하면서 잘 풀렸어요. ‘아 이게 내 팔자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가수로서는 정말 좋은 팔자잖아요. 이 나이에 노래도 하고 있고 이렇게 《월간조선》하고 인터뷰도 할 수 있고요(웃음).”
— 그럼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기 전에는 스스로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은 못했나요?
“전혀 못했어요. 기타도 혼자서 막 배웠고 친구들과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면 하모니를 넣는 식으로 했지 직업으로 삼을 만한 수준이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제 친구 중에 노래를 워낙 잘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하고 노래를 하니까 제가 잘한다는 걸 몰랐죠. 밤에 업소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고만 생각했죠.”
— 이를테면 생계형 가수로 시작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기가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가수들은 다 노래 부르기 싫은 시기를 겪는 것 같아요. 밤에 술집에서 노래하기가 싫을 때가 있었죠. 한동안은 하루 저녁에 7, 8군데 업소에서 노래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노래가 아니라 소리만 지르다가 오는 느낌이었죠. 제가 89년에 미국에 가서 한인방송 라디오 DJ로 일하면서 한 2년 살았던 것도 가수를 그만두려고 시도했던 겁니다. 그 외에도 몇 번 그런 고비가 있었는데 결국 노래를 부르게 되더군요.”
— 가수 생활을 하면서 염증을 느낀 적도 있었던 거군요.
“아뇨. 어쩌면 애초부터 제 마음 깊은 곳에는 ‘딴따라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저는 신화처럼 들어왔어요. 제가 가수를 하는 것은 그런 아버지에게 누가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언젠가는 그만둬야 한다는 의식이 항상 있었어요.”
—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합니까.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완전히 접은 게 미국에서 돌아오고 난 후부터입니다. 그 이전에는 제가 노래를 만들 때 고집스럽게 지키려는 ‘나만의 원칙’ 같은 게 있었는데 그때부터 그걸 버렸어요. 그렇게 해서 귀국 후 만든 곡이 트로트인 ‘애비’였죠. 저는 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저와 함께 늙어간다는 걸 몰랐어요. 항상 마음이라도 20대에 머물려고 했었고 거기에 맞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다 늙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트로트를 처음 시작했어요. 그다음에 내놓은 노래가 ‘낭만에 대하여’였죠.”
—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른 가수 하수영씨가 최 선생의 가수 생활에서 큰 전환점이 됐죠?
“그랬죠. 부산에 있는 틴클럽이라는 곳에서 하수영 형을 만났는데 피아노도 잘 치고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곡을 쓸 때 악보 그리는 법 등 궁금한 게 있으면 묻고 또 물으며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배웠죠. 그 형을 만나면서 제 나름대로 음악에 대해서 조금 정리가 됐습니다.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것도 그분의 권유였습니다.”
— 자신의 노래 중 제일 아끼는 노래는 뭡니까.
“제 삶을 바꿔놓은 노래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와 96년에 발표한 ‘낭만에 대하여’입니다. 저에게는 큰 자산입니다.”
— 저작권료가 많이 들어와서요?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요. 가수 최백호로 살게 해준 노래들이라고 할까요. 저작권료는 엄청난 정도는 아니지만 많이 들어오는 편이죠.”
화가 최백호의 삶
— 군에서 제대한 후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먼저 선택한 것을 보면 스스로 노래보다는 그림에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왔나 봅니다.
“그림은 어릴 때부터 그렸고 화가가 되려는 생각도 갖고 있었죠. 중학교 시절에는 미술반 활동을 했고 재수할 때 미대를 가려고 했으니까요. 때가 오면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어요. 80년대 초에도 그림 그리기를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정신적으로 안정이 안 된 시기라서인지 안 되더군요. 2000년대에 들어와서 자리가 잡히고 마음이 편해지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 노래나 그림이나 독학을 한 것은 성격 때문입니까. 어려운 환경 탓이었습니까.
“미술은 독학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수 시절 6~7개월 정도 아틀리에에 다니면서 레슨도 받아봤으니까 완전한 독학이라고는 할 수 없겠네요. 제가 독학을 하게 된 것은 환경보다는 성격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남한테 배우지를 못해요. 미국에 있을 때 골프도 잠깐 했는데 그것도 남한테 배우지 않고 책을 뒤져가면서 혼자 배웠어요. 학교 공부라는 게 체질적으로 안 맞았어요.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를 못했으니까. 이해력이 굉장히 떨어졌어요.”
— 이해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공부에 대한 관심이 덜한 거 아니었습니까.
“적극적으로 공부하려고 하지 않은 건 맞아요. 머리에는 늘 딴생각만 있었어요.”
— 어머니도 교편을 잡으셨고 두 누님도 교편을 잡으셨는데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니요.
“누님들은 공부를 잘했지만 저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 가는 걸 싫어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야 했어요. 제 고향 바닷가가 부산에 있는 일광인데 매일 만화방에 앉아 있거나 그냥 일광 바닷가로 가서 놀고 그랬죠. 동네 사람들이 그런 저를 보고 어머니한테 일러서 많이 혼났죠.”
— 일광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곳에 조성하겠다는 ‘최백호 음악 거리’는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아이디어 차원에서 논의된 것으로 아는데 그 이후로는 모르겠어요. 저는 썩 뭐.”
— 쑥스럽다는 거죠?
“쑥스럽기도 하지만 좋아하시는 분도 있는 반면에 반대하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안 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었는데 꼭 하시겠다면 제가 참여하겠다고는 했어요.”
— 가수로 불리길 원합니까, 화가로 불리길 원합니까.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저는 가수죠.”
— 화가로서 개인전은 앞으로도 계속할 것 아닙니까.
“네. 지금 여의도에 조그만 그림 그리는 장소가 따로 있어요.”
— 전시 계획이 있습니까.
“사실은 제가 소장으로 있는 한국음악발전연구소가 기부단체인데 기금이 모자라요. 전시회를 열어서 제 그림이 팔리면 기부를 하려고 했는데 그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못 하고 있어요.”
— 그 사건이라니요.
“조영남 선배님 사건요.”
— 같은 가수 겸 화가로서 그 사건은 어떻게 보세요.
“제가 언급할 수는 없는 일이죠.”
— 누가 밑그림이라도 대신 그려주는 사람은 없나요.
“저는 없습니다.”
— 최 선생의 그림도 팔립니까.
“예.”
— 얼마에?
“제일 비싼 게 제가 알기로는 1200만원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왜 나무만 그립니까.
“그것밖에 그릴 줄 몰라서요(웃음). 조금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소재를 다양하게 해보려고 합니다.”
일출보다는 일몰이 좋다
최백호씨는 활동 영역을 노래와 그림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2009년에는 TV드라마 〈트리플〉에도 출연했고 〈미사리〉라는 영화 시나리오도 완성했다.
— 드라마 출연은 자발적이었습니까.
“아니에요. 동료 가수 김창완씨의 꾐과 격려에 넘어가서 출연했죠.”
— 앞으로도 기회가 생기면 연기활동을 할 생각입니까.
“아니에요. 안 해요. 제가 당시 드라마 감독에게 내건 출연 조건이 ‘웃는 연기, 우는 연기는 절대 못한다. 그냥 대사만 외워서 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해서 했던 거예요. 제가 영화에 관심이 있어서 현장을 한 번 겪어보려고 한 거죠.”
— 그럼 영화 촬영 현장에도 가봤습니까.
“몇 번 가봤습니다.”
— 〈미사리〉라는 영화 시나리오도 썼는데 언제쯤 제작에 들어가는 겁니까.
“한 영화사에서 시나리오를 보자고 해서 보내놓은 상태입니다.”
— 각본에 감독, 제작까지 다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작은 제가 돈이 없어서 안 되고 감독만 해보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 작곡할 때 몸에 밴 습관이 따로 있습니까.
“없습니다. 엉터리지만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고 하면서 작곡을 합니다. 악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휴대전화에 있는 피아노 어플을 가지고도 멜로디를 기록하곤 합니다.”
— 최 선생의 노랫말이나 곡들은 쓸쓸하거나 우울한 느낌인데 평소 성격이 반영된 겁니까.
“성격은 아니고 제가 슬픈 노래를 좋아해요. 저는 일출보다는 일몰이 좋아요. ‘기역 니은’ 춤으로 박남정이 인기를 끌 때 제가 그랬어요. ‘박남정보다는 김수희가 좋다’고요. 사실 제 성격은 밝고 긍정적이고 한술 더 뜨면 번잡스러운 편입니다.”
— 소위 ‘국민가수’로 불리는 분 중에는 노래 연습을 잘 안 한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는데 노래 연습을 많이 합니까.
“저는 연습을 2, 3일만 안 해도 음색이 달라져요. 하루 평균 2시간 정도는 노래 연습을 합니다.”
— 듣는 사람이 느낄 만큼 목소리가 달라지나요. 아니면 본인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좌우지간 저는 연습을 안 하면 소리가 잘 안 나와요.”
— 노래를 할 때 목소리의 울림을 보면 꼭 성악을 한 분처럼 느껴집니다. 혹시 성악 공부를 했습니까.
“아니에요. 바리톤으로 유명한 고성현 교수도 제게 성악을 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저는 성악을 공부한 적이 없어요.”
— 타고난 거군요.
“목청은 타고난 거 같아요.”
— 한국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가수 3명만 꼽아보시죠.
“장르에 따라 다 다른데요. … 한창 활동을 하던 시절을 기준으로 하면 패티 김 선생님 아닐까요? 한창 시절 패티 김 선생님은 세계적이었어요. 당시 세계적인 여가수인 밀바의 노래를 불러도 더 잘 불렀어요. 남자 가수로는 소리 잘 지르는 장사익씨가 있죠. 그 음색이나 호흡이 대단해요. 젊은 여자 가수로는 린하고 알리, 자우림의 김윤아가 있는데 세 사람의 색깔은 다르죠.”
— 남자 후배 중에는 없습니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많이 있는데 요즘 〈복면가왕〉이라는 프로에 출연했던 록그룹 국카스텐의 보컬 하현우가 대단하더군요.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실연도 좀 당해보고 거기에 페이소스까지 묻어나면 정말 대단한 가수가 될 겁니다. 임재범이나 JK 김동욱도 대단하고요.”
— 최백호가 뽑은 최고의 한국 노래 세 곡도 한번 꼽아보시죠.
“아, 어려운데요. 조용필의 ‘생명’, 송창식의 ‘사랑이야’, 명혜원의 ‘청량리 부르스’를 꼽아볼 수 있겠네요.”
— 한 인터뷰에서 실용음악과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이유가 뭡니까.
“오해가 있는데 제가 연주나 이런 분야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가창(歌唱) 쪽만 이야기한 겁니다. 가창은 배워버리면 똑같아집니다. 송창식, 조용필 같은 대가수들처럼 다 자기 색깔을 만들어야 하는데 가창을 배우면 자기 색깔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요즘 아이돌을 보면 노래하는 스타일이 다 비슷비슷해요. 잘하기는 하죠. 그런데 자기 색깔이 없어요.”
나이 아흔이 되면 멋진 노래 만들 것
— 최 선생에 대해 제2전성기를 맞고 있다고들 하는데요.
“저는 제1전성기가 없었는데(웃음). 제1전성기가 있었다면 너무 짧았고 지금은 제2전성기를 과분하게도 한 20년 동안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음악인 최백호로서 남기고 싶은 게 있다면요.
“저는 그런 게 없는 편이에요. 제가 만들거나 부른 노래를 제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들이 들어서 창피해하지 않는 음악을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 별칭이 ‘낭만가객’인데 맘에 듭니까.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좋지도 않았어요. 그냥 쑥스럽습니다. 또 제가 낭만적이지도 않은데 가면을 쓴 거 같기도 하고요.”
— 나이 아흔이 되면 멋진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요.
“제 기준이지만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을수록 깊이가 생깁니다. 아흔쯤 되면 세상을 보는 경험도 그만큼 쌓일 거고, 보는 시각도 달라질 거고 그래서 훨씬 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확신해요. 제가 마흔다섯 살에 ‘낭만에 대하여’를 내놨는데 그건 스물다섯에는 절대 못 만들 노래예요.”
— 설마 아흔에도 지금처럼 노래를 부르겠다는 뜻입니까.
“지금처럼 관리하면 부를 수 있을 거 같아요.”
—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요.
“저는 욕심이 없어요. 이 작업 자체가 즐거우니까요.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지 제가 아흔 되신 가수분들한테도 만약에 받아만 주신다면 노래하는 요령을 제 나름대로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흔 넘어 기운이 없어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 옛날 어른들처럼 시조를 읊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시조에서 약간 힌트를 가져온 것이긴 한데 하여튼 노래하는 방법이 있어요.”
— 요즘 행복한 거죠.
“행복합니다. 과분하게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행복하니 정말 행복한 거죠.”
40년 동안 노래했으니 기념 공연 대신 노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가수 최백호. 기념 공연은 없어도 후배의 얘기대로 그가 노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의 행복은 그의 바쁜 일상에서 오는 것이므로.⊙
늘 가까이 있지만 신비로운 존재, 최백호(崔白虎). 그가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는다. 그의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1977년에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 내년이 데뷔 40주년이죠?
“정확히 하면 올햅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77년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노래는 76년 12월에 나왔습니다.”
— 40주년 기념 공연도 준비해야겠네요.
“저도 기념 공연을 하려고 했는데 후배 한 명이 ‘40주년이 되면 놀아야죠’ 하더군요(웃음). 40년 동안 노래 부르느라 고생했으니까 올해는 놀아도 된다는 거예요.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공연 대신 앨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40주년 기념 앨범은 언제 나옵니까.
“지금 편곡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CD를 두 개 넣어서 만들어요. LP판도 같이 만들고요.”
— 국내에 LP판을 제작하는 곳이 있나요?
“우리나라에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참 그런 게 답답한데 그 시절이 지나가면 기계고 뭐고 다 없애버려요. 일본은 지금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일본 가서 찍어와야 돼요.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한물가면 확 갖다 버리죠.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잖아요.”
최백호씨의 모습을 떠올리면 청바지 등 진 종류의 바지와 셔츠, 헝클어진 듯한 머리다. 기자와 만난 날도 흰색 진 바지와 흰색 면 셔츠를 입고 있었다.
— 20대 때나 70을 바라보는 지금이나 복장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
— 나이 먹어가면서 ‘옷을 너무 젊게 입으면 쑥스럽다’는 생각 안 드나요?
“그런 생각은 안 합니다. 제가 옷을 젊게 입는 것이 아니고 20대 때 제가 입던 스타일을 지금도 그대로 입는 것뿐입니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죠. 젊은 친구들 보면 굉장히 타이트한 옷을 입는데 그런 거를 입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 외양에서 20대 시절과 지금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헤어스타일이죠. 흰머리가 많이 났으니까요(웃음). 나이가 드니까 머리가 긴 게 추해 보여서 좀 짧게 하죠. 배도 나왔고요.”
— 정신적으로 20대와 비교해서 변한 것은요.
“아무래도 생각이 좀 넓어졌고요. 생각의 템포가 느려지면서 여유가 생기고 시각이 넓어졌다고 할까요. 젊었을 때는 단면적인 성격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둘러보고 급하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 젊은 시절에 모나고 급한 성격이었으면 싸움도 많이 했겠네요.
“싸움은 안 했어요. 별로 안 좋아해요.”
부모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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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백호씨는 개인전을 4차례나 연 화가이기도 하다. |
— 한동안 연예인들의 국회의원 출마가 많았는데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받은 적은 없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 그래도 부친이 국회의원도 하셨고 그 피가 흐르고 있을 텐데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까.
“그냥 보통 일반적인 국민의 시각에서 관심이 있는 정도죠.”
— 선거철이 되면 도와달라는 정치인들이 꽤 있을 텐데요.
“많이 있죠. 그런데 저는 라디오방송을 진행하고 있어서 못하죠. 그게 어떤 면에서는 편합니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까요.”
— 정치 로고송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은 안 받았나요?
“그런 제안은 꽤 받아봤습니다. ‘영일만 친구’라는 제 노래는 포항에서 쓰겠다고 해서 그냥 쓰게 했죠. 만들어주지는 못했습니다.”
생후 5개월 만에 부친을 여읜 최백호씨는 교사였던 어머니마저 그가 미대(美大) 진학을 꿈꾸며 재수하던 시절에 잃는다. 그의 나이 만 스물이었다.
— 일찍 부모님의 죽음을 겪었는데요. 그렇게 겪은 죽음이 최 선생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어릴 때부터 죽음이란 게 우리 삶의 끝에 있는 게 아니고 항상 제 주변에서 같이 가는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죽음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어요.”
— 죽음이라는 게 일상적인 삶의 한 부분이라고 일찍부터 받아들인 거네요.
“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초연함이 있었는데 오늘 처음 공개하지만 얼마 전에 폐암이라는 오진을 한번 받으면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 최근에요?
“네. 병원에서 ‘폐암일 수도 있으니까 다시 한 번 검사를 받아보라’고 해서 받았습니다.”
— 놀랐겠습니다.
“몸이 한 8킬로그램 빠졌어요.”
— 그 이야기 듣고 나서요?
“정말 죽음에 대해서는 초연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닥치니까 고민이 되는 거예요. 3개월 동안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한 15일 만에 8킬로가 빠졌어요.”
— 그래서 그 결과는요?
“이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사람을 완전히 반죽음까지 보내놓고는(웃음).”
— 폐암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을 때 심정은 어떻던가요?
“의사가 아침 10시30분쯤에 전화를 준다고 해서 새벽부터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정말 엄청 길더군요.”
— 종교 있으세요.
“없습니다.”
— 종교는 없지만 그 시간에 어딘가에 기도하고 싶지는 않던가요.
“그런 것도 없었어요. 그냥 멍한 상태라고 해야 하나?”
— 보통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남은 삶은 잉여다” 하면서 어디에 헌신하겠다고 결심들 하던데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그런 결심은 없었습니다. ‘어휴! 살았구나’ 하는 생각 외에 특별한 생각은 없었어요.”
송창식에 대한 생각
— 부선망(父先亡) 독자라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됐는데도 갔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였나요.
“먹고살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당시 제가 잠잘 곳과 먹을 방법이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 그게 결국은 먹고살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냥 피신을 한 거죠. 당시로서는 군대에 가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71년에 입대했는데 1년 만에 제대했어요.”
— 왜요?
“제가 강원도 원주에 있는 제1하사관학교에서 조교로 군 복무를 했는데 그때 결핵이 발견된 겁니다.”
— 의병 제대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이었겠습니다.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 모르겠는데 저는 현실감이 좀 떨어져요. 무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걸 못해요. 이번에 폐암이라는 오진을 받았을 때도 제 죽음 후 제 주변에 닥쳐올 현실에 대해 절실하게 느끼질 못했어요. 당장 죽음이 다가왔으니까 그냥 죽는다고만 생각했죠. 뭐 제 죽음 후에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 뭘 정리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못했어요. 현실감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서 그랬는지 제대 후의 계획을 세우거나 하는 게 없었어요. 그때 보상금조로 11만5000원을 받은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 최 선생의 평소 이미지에 결핵을 덧붙이니까 과거 요절한 천재 문인들이 연상되는군요.
“저는 천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요. 그냥 노래 부르고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재능이 좀 있을 뿐이죠. 아, 그러고 보니까 ‘이름 모를 소녀’의 가수 김정호 선배님도 결핵으로 돌아가셨네요. 그분은 천재죠.”
— 김정호씨 말고 천재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가수는 또 누가 있습니까.
“제 생각일 뿐인데요. 송창식씨도 그 범주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분은 천재가 아니라 기인 아닌가요?
“절대로 이상한 분 아닙니다. 참 훌륭한 분이세요.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가수로서도 자기 자부심과 자존심이 굉장한 분입니다. 그분의 세계를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고집스러움은 있지만 경우가 바르다고 해야 하나요? 저하고 세 살 차이지만 존경스럽고 그만한 선배가 없습니다.”
— 두 분이 자주 만나는 것 같습니다.
“자주 뵙는 편인데 근래에 와서는 좀 바빠서 못 만났어요.”
— 과거 송창식씨와 함께 활동했던 조영남, 윤형주, 김세환씨는 쎄시봉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송창식씨는 왜 같이하지 않는 겁니까.
“자세히는 몰라도 제 생각에는 음악적인 견해차 때문에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쎄시봉 분들이 방송 토크쇼에 나와서 하는 주장은 좀 다르던데요. 이를테면 생활습관의 차이라고 할까요?
“남들이 잘 때 활동하고 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독창적으로 하는 운동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거는 공연하기 싫어서 핑계를 댄 걸 거예요. 어쨌든 워낙 음악적으로 뛰어나고 참 좋은 노래들을 많이 만드는 분입니다. 지금도 미 발표곡을 1000곡 가지고 있답니다.”
— 왜 음반으로 내지 않는 겁니까.
“제가 음반을 내자고 조르는데 지금 내봐야 얼마 안 팔릴 게 뻔하고 그 뻔한 결과가 싫다고 하셔요.”
— 거듭 묻지만 본인이 천재라는 생각을 정말 해보지 않았습니까.
“(웃음) 제 장점이 제 주제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겁니다. 어쩌면 제가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제 주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만화는 나의 스승
최백호씨는 만화광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홍대 앞 ‘북새통’이라는 만홧가게를 단골로 다녔는데 지금도 한 달에 두세 번쯤 그곳을 찾아 신작(新作)들을 살핀다고 한다. 그가 처음 만난 만화는 김산호 화백이 그린 SF만화 《라이파이》였다고 한다. 이 만화는 당시로서는 먼 미래였던 22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웅물이다.
— 만화는 작품을 구상할 때 상상력을 얻기 위해서 즐겨 보는 겁니까.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만화를 처음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마련됐다고 생각합니다. 《라이파이》라는 만화를 보면서부터 제 생각이 깨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그전까지는 항상 어린애였는데 그때부터 발전하고 상상하면서 제 세계를 만들어나갔던 것 같습니다.”
— 한마디로 《라이파이》가 최 선생의 세계관, 우주관, 철학관 형성에 기초가 됐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그 시대에도 훌륭한 만화였고 지금도 훌륭한 만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친소 관계를 《라이파이》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기도 합니다(웃음).”
— 일본 만화도 많이 봤겠군요.
“안타깝게도 일본 만화를 많이 봤어요. 하지만 요즘은 우리나라 만화 중에 좋은 만화가를 발견해서 그분 작품에 푹 빠져 있습니다.”
— 누굽니까.
“이상규 화백이라고 있습니다. 《호랑이 형님》이라는 만화를 그렸는데 그 만화는 일본 만화에 견줄 만한 우리나라 만화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나암림》을 그린 오연 화백도 대단하고요. 오연 화백의 《위나암림》은 붓으로 그린 만화인데 내용뿐만 아니라 그림도 대단합니다. 한 장 한 장이 작품이에요.”
— 그래서 만화를 통해서 영감을 많이 얻습니까.
“거기서 많은 영감을 받고 안 받고의 차원이 아니라 지금도 정말 많이 봅니다. 저는 소설이나 이런 걸 많이 보는 거나 만화를 많이 보는 거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만화라고 해서 자꾸 차별을 두면 우리 대중문화 발전에 문제가 생겨요. 저는 우리 사회의 만화에 대한 천시가 우리나라 대중문화 발전에 큰 저해 요인이 됐다고 봐요.”
—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육성을 저해했다고 보는 건가요?
“그렇죠.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들에게 만화를 많이 보게 했잖아요. 만화가 발전하면서 일본이 자동차 디자인이나 이런 면에서 세계적인 위치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미 60년대 50년대에 일본 만화에서는 스포츠카가 등장해요. 그때도 일본 만화는 그림이나 내용의 수준이 굉장히 높아요.”
— 노랫말을 짓거나 작곡을 하는 데 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까.
“그럼요. 만화에 나오는 대사가 소재가 되기도 하죠.”
— SF 만화를 좋아하는데 직접 쓰는 노랫말들은 왜 우수에 젖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요.
“그건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환경이 그래서 그런가. 이제는 그런 우수에 젖은 노래가 잘 안 나오는데 아마 환경이 바뀌어서 그럴 거예요. 살기가 편해져서요.”
— 작사를 할 때 스스로도 잘 쓴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간혹요. 하지만 제가 노랫말을 참 많이 쓰는데 제 스스로 탄복을 하는 경우는 1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정도예요.”
— 본인이 쓴 가사 중 제일 가슴에 와 닿는 곡은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죠. 그 노랫말은 가사로 쓴 게 아니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노트에 일기처럼 적어놨던 겁니다. 그걸 술자리에서 작곡가 최종혁씨한테 드렸어요. 그런데 며칠 뒤에 곡을 만들어 와가지고 피아노 치면서 부르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좋더군요.”
— 그 노래 외에 다른 노래는요.
“트로트로 만든 ‘애비’가 먼저 떠오르는데 다른 노랫말들도 대부분 다 제 이야기들이에요.”
— 이번에 데뷔 40주년 기념으로 내는 앨범도 다 본인이 작사, 작곡을 한 겁니까.
“아닙니다. 제가 만든 노래는 2, 3곡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 가수 생활 40년 동안 낸 앨범이 총 20장이면 적게 낸 거죠?
“아니에요. 2년에 한 장꼴인데 그 정도면 많은 거예요. 요즘 가수들은 자주 내지만 저희가 한창 활동할 때는 5, 6년에 한 번씩 냈어요. 그때는 노래 한 곡이 한 5년도 가고 오래갔잖아요. 지금은 몇 개월이면 끝나지만.”
— 작사할 때 마음을 일부러 다운을 시킵니까? 어떤 상태에서 만듭니까.
“특별히 가사를 쓰기 위해 준비하고 책상 앞에 앉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도 문득 떠오른 구절이 있으면 적는 거죠. 제가 작사가로서는 프로가 아니니까요. 영화를 보다가 떠오른 말 이런 것들을 메모해 두죠.”
— 곡이 먼저 나오고 거기에 가사를 붙이는 경우도 있잖아요.
“저는 언제나 가사부터 쓰고 나서 그 가사에 곡을 붙입니다. 멜로디부터 쓰고 거기에 가사를 붙이는 거는 진짜 어려워요. 그건 진짜 프로들이나 하는 거죠. 저는 노랫말에 따라서 트로트인지 탱고인지 장르도 결정합니다.”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걸 몰랐다
— 영화 간판도 그린 것으로 아는데 몇 년이나 했습니까.“몇 년씩은 아니고요. 72년도인데 딱 일주일 했습니다. 저는 극장에 들어가면 바로 영화 간판을 그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밑그림 그리고 라인 긋고 하는 일만 시키더군요. 그래서 일주일 만에 그만뒀어요.”
— 야간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기 전에 잠깐 한 일이군요.
“그랬죠. 제가 노래를 처음 업소에서 부른 게 73년 후반 정도예요. 지금 생각하면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이라든지 다른 일들이 뭘 해도 잘 안 됐는데 가수를 시작하면서 잘 풀렸어요. ‘아 이게 내 팔자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도 가수로서는 정말 좋은 팔자잖아요. 이 나이에 노래도 하고 있고 이렇게 《월간조선》하고 인터뷰도 할 수 있고요(웃음).”
— 그럼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기 전에는 스스로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은 못했나요?
“전혀 못했어요. 기타도 혼자서 막 배웠고 친구들과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면 하모니를 넣는 식으로 했지 직업으로 삼을 만한 수준이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제 친구 중에 노래를 워낙 잘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하고 노래를 하니까 제가 잘한다는 걸 몰랐죠. 밤에 업소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고만 생각했죠.”
— 이를테면 생계형 가수로 시작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노래를 부르기가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가수들은 다 노래 부르기 싫은 시기를 겪는 것 같아요. 밤에 술집에서 노래하기가 싫을 때가 있었죠. 한동안은 하루 저녁에 7, 8군데 업소에서 노래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노래가 아니라 소리만 지르다가 오는 느낌이었죠. 제가 89년에 미국에 가서 한인방송 라디오 DJ로 일하면서 한 2년 살았던 것도 가수를 그만두려고 시도했던 겁니다. 그 외에도 몇 번 그런 고비가 있었는데 결국 노래를 부르게 되더군요.”
— 가수 생활을 하면서 염증을 느낀 적도 있었던 거군요.
“아뇨. 어쩌면 애초부터 제 마음 깊은 곳에는 ‘딴따라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저는 신화처럼 들어왔어요. 제가 가수를 하는 것은 그런 아버지에게 누가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언젠가는 그만둬야 한다는 의식이 항상 있었어요.”
—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합니까.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완전히 접은 게 미국에서 돌아오고 난 후부터입니다. 그 이전에는 제가 노래를 만들 때 고집스럽게 지키려는 ‘나만의 원칙’ 같은 게 있었는데 그때부터 그걸 버렸어요. 그렇게 해서 귀국 후 만든 곡이 트로트인 ‘애비’였죠. 저는 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저와 함께 늙어간다는 걸 몰랐어요. 항상 마음이라도 20대에 머물려고 했었고 거기에 맞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다 늙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트로트를 처음 시작했어요. 그다음에 내놓은 노래가 ‘낭만에 대하여’였죠.”
—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른 가수 하수영씨가 최 선생의 가수 생활에서 큰 전환점이 됐죠?
“그랬죠. 부산에 있는 틴클럽이라는 곳에서 하수영 형을 만났는데 피아노도 잘 치고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곡을 쓸 때 악보 그리는 법 등 궁금한 게 있으면 묻고 또 물으며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배웠죠. 그 형을 만나면서 제 나름대로 음악에 대해서 조금 정리가 됐습니다. 서울로 올라오게 된 것도 그분의 권유였습니다.”
— 자신의 노래 중 제일 아끼는 노래는 뭡니까.
“제 삶을 바꿔놓은 노래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와 96년에 발표한 ‘낭만에 대하여’입니다. 저에게는 큰 자산입니다.”
— 저작권료가 많이 들어와서요?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요. 가수 최백호로 살게 해준 노래들이라고 할까요. 저작권료는 엄청난 정도는 아니지만 많이 들어오는 편이죠.”
화가 최백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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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최백호의 그림 소재는 언제나 나무다. 앞으로는 그림의 소재를 더 넓혀나갈 생각이라고 한다. |
“그림은 어릴 때부터 그렸고 화가가 되려는 생각도 갖고 있었죠. 중학교 시절에는 미술반 활동을 했고 재수할 때 미대를 가려고 했으니까요. 때가 오면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어요. 80년대 초에도 그림 그리기를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정신적으로 안정이 안 된 시기라서인지 안 되더군요. 2000년대에 들어와서 자리가 잡히고 마음이 편해지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 노래나 그림이나 독학을 한 것은 성격 때문입니까. 어려운 환경 탓이었습니까.
“미술은 독학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수 시절 6~7개월 정도 아틀리에에 다니면서 레슨도 받아봤으니까 완전한 독학이라고는 할 수 없겠네요. 제가 독학을 하게 된 것은 환경보다는 성격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남한테 배우지를 못해요. 미국에 있을 때 골프도 잠깐 했는데 그것도 남한테 배우지 않고 책을 뒤져가면서 혼자 배웠어요. 학교 공부라는 게 체질적으로 안 맞았어요.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를 못했으니까. 이해력이 굉장히 떨어졌어요.”
— 이해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공부에 대한 관심이 덜한 거 아니었습니까.
“적극적으로 공부하려고 하지 않은 건 맞아요. 머리에는 늘 딴생각만 있었어요.”
— 어머니도 교편을 잡으셨고 두 누님도 교편을 잡으셨는데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니요.
“누님들은 공부를 잘했지만 저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 가는 걸 싫어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야 했어요. 제 고향 바닷가가 부산에 있는 일광인데 매일 만화방에 앉아 있거나 그냥 일광 바닷가로 가서 놀고 그랬죠. 동네 사람들이 그런 저를 보고 어머니한테 일러서 많이 혼났죠.”
— 일광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곳에 조성하겠다는 ‘최백호 음악 거리’는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아이디어 차원에서 논의된 것으로 아는데 그 이후로는 모르겠어요. 저는 썩 뭐.”
— 쑥스럽다는 거죠?
“쑥스럽기도 하지만 좋아하시는 분도 있는 반면에 반대하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안 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었는데 꼭 하시겠다면 제가 참여하겠다고는 했어요.”
— 가수로 불리길 원합니까, 화가로 불리길 원합니까.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저는 가수죠.”
— 화가로서 개인전은 앞으로도 계속할 것 아닙니까.
“네. 지금 여의도에 조그만 그림 그리는 장소가 따로 있어요.”
— 전시 계획이 있습니까.
“사실은 제가 소장으로 있는 한국음악발전연구소가 기부단체인데 기금이 모자라요. 전시회를 열어서 제 그림이 팔리면 기부를 하려고 했는데 그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못 하고 있어요.”
— 그 사건이라니요.
“조영남 선배님 사건요.”
— 같은 가수 겸 화가로서 그 사건은 어떻게 보세요.
“제가 언급할 수는 없는 일이죠.”
— 누가 밑그림이라도 대신 그려주는 사람은 없나요.
“저는 없습니다.”
— 최 선생의 그림도 팔립니까.
“예.”
— 얼마에?
“제일 비싼 게 제가 알기로는 1200만원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왜 나무만 그립니까.
“그것밖에 그릴 줄 몰라서요(웃음). 조금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소재를 다양하게 해보려고 합니다.”
일출보다는 일몰이 좋다
최백호씨는 활동 영역을 노래와 그림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2009년에는 TV드라마 〈트리플〉에도 출연했고 〈미사리〉라는 영화 시나리오도 완성했다.
— 드라마 출연은 자발적이었습니까.
“아니에요. 동료 가수 김창완씨의 꾐과 격려에 넘어가서 출연했죠.”
— 앞으로도 기회가 생기면 연기활동을 할 생각입니까.
“아니에요. 안 해요. 제가 당시 드라마 감독에게 내건 출연 조건이 ‘웃는 연기, 우는 연기는 절대 못한다. 그냥 대사만 외워서 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해서 했던 거예요. 제가 영화에 관심이 있어서 현장을 한 번 겪어보려고 한 거죠.”
— 그럼 영화 촬영 현장에도 가봤습니까.
“몇 번 가봤습니다.”
— 〈미사리〉라는 영화 시나리오도 썼는데 언제쯤 제작에 들어가는 겁니까.
“한 영화사에서 시나리오를 보자고 해서 보내놓은 상태입니다.”
— 각본에 감독, 제작까지 다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작은 제가 돈이 없어서 안 되고 감독만 해보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 작곡할 때 몸에 밴 습관이 따로 있습니까.
“없습니다. 엉터리지만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고 하면서 작곡을 합니다. 악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휴대전화에 있는 피아노 어플을 가지고도 멜로디를 기록하곤 합니다.”
— 최 선생의 노랫말이나 곡들은 쓸쓸하거나 우울한 느낌인데 평소 성격이 반영된 겁니까.
“성격은 아니고 제가 슬픈 노래를 좋아해요. 저는 일출보다는 일몰이 좋아요. ‘기역 니은’ 춤으로 박남정이 인기를 끌 때 제가 그랬어요. ‘박남정보다는 김수희가 좋다’고요. 사실 제 성격은 밝고 긍정적이고 한술 더 뜨면 번잡스러운 편입니다.”
— 소위 ‘국민가수’로 불리는 분 중에는 노래 연습을 잘 안 한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분도 있는데 노래 연습을 많이 합니까.
“저는 연습을 2, 3일만 안 해도 음색이 달라져요. 하루 평균 2시간 정도는 노래 연습을 합니다.”
— 듣는 사람이 느낄 만큼 목소리가 달라지나요. 아니면 본인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좌우지간 저는 연습을 안 하면 소리가 잘 안 나와요.”
— 노래를 할 때 목소리의 울림을 보면 꼭 성악을 한 분처럼 느껴집니다. 혹시 성악 공부를 했습니까.
“아니에요. 바리톤으로 유명한 고성현 교수도 제게 성악을 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저는 성악을 공부한 적이 없어요.”
— 타고난 거군요.
“목청은 타고난 거 같아요.”
— 한국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가수 3명만 꼽아보시죠.
“장르에 따라 다 다른데요. … 한창 활동을 하던 시절을 기준으로 하면 패티 김 선생님 아닐까요? 한창 시절 패티 김 선생님은 세계적이었어요. 당시 세계적인 여가수인 밀바의 노래를 불러도 더 잘 불렀어요. 남자 가수로는 소리 잘 지르는 장사익씨가 있죠. 그 음색이나 호흡이 대단해요. 젊은 여자 가수로는 린하고 알리, 자우림의 김윤아가 있는데 세 사람의 색깔은 다르죠.”
— 남자 후배 중에는 없습니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많이 있는데 요즘 〈복면가왕〉이라는 프로에 출연했던 록그룹 국카스텐의 보컬 하현우가 대단하더군요.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실연도 좀 당해보고 거기에 페이소스까지 묻어나면 정말 대단한 가수가 될 겁니다. 임재범이나 JK 김동욱도 대단하고요.”
— 최백호가 뽑은 최고의 한국 노래 세 곡도 한번 꼽아보시죠.
“아, 어려운데요. 조용필의 ‘생명’, 송창식의 ‘사랑이야’, 명혜원의 ‘청량리 부르스’를 꼽아볼 수 있겠네요.”
— 한 인터뷰에서 실용음악과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이유가 뭡니까.
“오해가 있는데 제가 연주나 이런 분야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가창(歌唱) 쪽만 이야기한 겁니다. 가창은 배워버리면 똑같아집니다. 송창식, 조용필 같은 대가수들처럼 다 자기 색깔을 만들어야 하는데 가창을 배우면 자기 색깔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요즘 아이돌을 보면 노래하는 스타일이 다 비슷비슷해요. 잘하기는 하죠. 그런데 자기 색깔이 없어요.”
나이 아흔이 되면 멋진 노래 만들 것
— 최 선생에 대해 제2전성기를 맞고 있다고들 하는데요.
“저는 제1전성기가 없었는데(웃음). 제1전성기가 있었다면 너무 짧았고 지금은 제2전성기를 과분하게도 한 20년 동안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음악인 최백호로서 남기고 싶은 게 있다면요.
“저는 그런 게 없는 편이에요. 제가 만들거나 부른 노래를 제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들이 들어서 창피해하지 않는 음악을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 별칭이 ‘낭만가객’인데 맘에 듭니까.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좋지도 않았어요. 그냥 쑥스럽습니다. 또 제가 낭만적이지도 않은데 가면을 쓴 거 같기도 하고요.”
— 나이 아흔이 되면 멋진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요.
“제 기준이지만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을수록 깊이가 생깁니다. 아흔쯤 되면 세상을 보는 경험도 그만큼 쌓일 거고, 보는 시각도 달라질 거고 그래서 훨씬 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확신해요. 제가 마흔다섯 살에 ‘낭만에 대하여’를 내놨는데 그건 스물다섯에는 절대 못 만들 노래예요.”
— 설마 아흔에도 지금처럼 노래를 부르겠다는 뜻입니까.
“지금처럼 관리하면 부를 수 있을 거 같아요.”
— 욕심이 과한 것 아닌가요.
“저는 욕심이 없어요. 이 작업 자체가 즐거우니까요.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지 제가 아흔 되신 가수분들한테도 만약에 받아만 주신다면 노래하는 요령을 제 나름대로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흔 넘어 기운이 없어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 옛날 어른들처럼 시조를 읊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시조에서 약간 힌트를 가져온 것이긴 한데 하여튼 노래하는 방법이 있어요.”
— 요즘 행복한 거죠.
“행복합니다. 과분하게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행복하니 정말 행복한 거죠.”
40년 동안 노래했으니 기념 공연 대신 노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가수 최백호. 기념 공연은 없어도 후배의 얘기대로 그가 노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의 행복은 그의 바쁜 일상에서 오는 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