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대 공사 부채는 매년 늘고, 민영화한 공기업 부채는 매년 줄고
⊙ 공기업의 차입금 의존도 36%(2007년)43%(2009년)46%(2011년)
⊙ “철강, 정유 역시 과거에는 민영화를 상상할 수 없는 분야”
⊙ 공기업의 차입금 의존도 36%(2007년)43%(2009년)46%(2011년)
⊙ “철강, 정유 역시 과거에는 민영화를 상상할 수 없는 분야”
- 지난 2013년 12월 28일, 민주노총, 한국노총 조합원 및 철도노조원들이 민영화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업무량은 솔직히 S사(社) 다닐 때의 25%였습니다. 월급은 그대로였지만요.”
민간회사에서 공기업으로 이직했던 A씨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기자는 그에게 ‘공기업의 방만 경영에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말 속에 공기업 경영의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그의 얘기다.
“회사 자리 배치가 특이했습니다. 팀장이 창가 자리를 꿰차고 앉아 차장 뒤통수를 보고, 차장은 과장 뒤통수를, 과장은 대리 뒤통수를 보게끔 책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팀장이 신문을 펼쳐서 읽고 있으면 그 앞에 앉은 차장은 바짝 긴장하고 컴퓨터 모니터 보고, 또 그 앞의 과장을 등 뒤에서 감시하는 것이 전형적인 사내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자리 배치에서 기업의 창의력이며, 혁신을 논하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공기업은 직급을 굉장히 강조했고 회사가 군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불필요한 일을 한다고 느꼈던 것이 있다면요.
“사무직 직원이 밤에 건물 지키는 야근 숙직제도가 있었습니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회사에 오는 전화를 받는 업무였죠. 위급한 상황이 있을 만한 회사가 아니어서 전화가 한 통도 오지 않는 날이 많습니다. 걸려오지 않는 전화를 받으라고 사무직 직원을 무작정 앉혀놓는 거죠. 다음날에는 무조건 오전 취침이에요. 사무실에서 마시는 물도 외부업체에서 받으면 간단할 텐데, 지하수가 나오는 수돗가에 물통 지고 가서 떠오는 업무를 하는 직원도 있었습니다.”
A씨가 근무했던 공기업은 얼마 뒤 민간회사가 됐다.
KT&G, 민영화 후 시가총액 5배 늘어
철도노조 파업 사태로 인해 공기업 개혁이 다시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공기업 개혁은 모든 정권에서 외쳤던 얘기 중 하나다. 하지만 공기업 개혁은 장기적으로 다뤄지기보다는 이슈가 생길 때마다 임시 방편적으로 논의돼 왔다.
공기업 개혁의 방법 중 하나가 공기업을 민영화(民營化)하는 것이다. 공기업 민영화란 정부 출자(出資) 기관이 가진 주식을 민간회사에 파는 것을 말한다. 주인이 정부에서 민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IMF 여파로 정부의 부채 줄이기가 급선무였던 김대중 정부 때 민영화된 국정교과서(현 미래엔·1998년 민영화),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2000년), 포항제철(현 포스코·2000년), 한국통신(현 KT·2002년), 한국담배인삼공사(현 KT&G·2002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공기업 민영화를 두고 찬반(贊反)이 거세다. 민영화 찬성론자들은 만성 적자를 기록하는 공기업을 민영화하면 경쟁 체제가 도입돼 흑자로 돌아서고, 회사의 체질이 강화돼 경쟁력이 생긴다고 본다. 반대론자들은 공기업을 민간에서 운영하면 국민복지보다 회사의 이익을 우선으로 둬서 이용료가 오를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전기를 민영화하면 전기료가, 철도를 민영화하면 철도이용료가 터무니없이 오를 것이니 민영화를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다 보니 공기업의 민영화는 간단치 않다. 하지만 만성 적자인 공기업의 경영 실적, 또 경영 적자 상황에서도 직원들에게 주어지는 성과급 얘기가 나올 때면 대다수는 분개한다. 민간기업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어서다. 공기업의 민영화는 정말 나쁜 것일까.
숫자로 보면 공기업 민영화는 환영받아 마땅해 보인다. 지난 1989년에 창립된 한국담배인삼공사는 지난 1999년 10월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됐고, 지난 2002년 12월에 민영화를 끝냈다. 2조306억원이었던 공사 시절 매출액(2002년)은 지난 2012년 3조9847억원으로 2배가량 늘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5863억원에서 1조359억원으로 역시 배가 늘었다. 주식시장에서 시가총액은 2조9800억원에서 11조900억원으로 무려 5배나 성장했다.
지난 1962년 창립돼 민간과 국유화를 거듭했던 한국중공업은 지난 2000년 12월 민영화가 됐다. 매출은 2조4091억원(2002년)에서 9조6272억원(2012년), 영업이익은 827억원에서 5948억원으로 늘었다. 포항제철의 매출 역시 같은 기간 11조6920억원에서 35조6650억원, 영업이익은 20조990억원에서 27조900억원으로 상승했다. 공기업의 대표격인 한국전력공사의 매출은 18조7082억원(2000년)에서 49조4215억원(2012년)으로 늘었으나, 영업이익은 3조4700억원에서 마이너스 8179억원을 기록해 적자가 됐다.
민영화된 과거 공기업 부채, 104%에서 62%로 줄어
무엇보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부채’ 부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김영신 부연구위원은 최근 〈공기업 부채 증가의 문제점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그가 기업의 여러 지표 중 ‘부채’를 집중 분석한 이유는 이렇다.
“기업은 대개 수익성·성장성·안정성 등으로 경쟁력을 평가합니다. 공기업이 얼마나 수익을 내야 하느냐는 논쟁거리이고, 전기료 등 가격을 높이면 수익은 금방 좋아질 수 있습니다. 공기업 사업이 독점 체제여서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기업의 성장성 역시 정부에서 국책 사업을 시행한다면 단숨에 성장률이 높아질 수 있어서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때문에 공기업의 자본 대비 부채비율을 통해서 민영화된 공기업과 비교했습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한국전력공사·가스공사·석유공사·토지주택공사·철도공사·도로공사·수자원공사 등 7대 공기업의 부채는 지난 2002년 73%에서 2011년 216%로 3배가량 늘었습니다. 민간기업의 경우에는 부채비율이 150%가 넘으면 투자자들에게 ‘투기 등급’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반면 민영화된 KT·KT&G·두산중공업·남해화학(옛 한국종합화학공업 인수합병)·대한송유관공사·미래엔·(주)포스코 등 7대 민간기업의 부채비율은 같은 기간 104%에서 62%로 줄었습니다. 공기업의 매출액은 꾸준히 늘었고, 같은 기간에 민영화된 기업의 매출도 지속적으로 늘었습니다. 둘 다 매출은 늘었지만, 공기업은 부채비율이 높아지고 민영화된 기업은 부채가 줄고 있습니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구조적인 문제입니까.
“공기업은 정부의 직간접적 통제와 영향을 받습니다. 공기업의 CEO, 내부 감사 임명에 정부가 관여합니다. 공익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공기업 희생이 강요될 수 있습니다. 경기 부양 차원에서 쓸데없는 일도 많이 벌입니다. 문제는 공기업의 이런 특성 때문에 늘어난 부채가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얼마나 어려운 상황입니까.
“공기업 부채 중 대부분은 금융 빚입니다. 지난 2011년에 공기업 21개의 금융 빚이 전체 부채의 70%에 달했습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매년 내야 하는 금융 이자가 3조5910억원(이자율 4% 계산)입니다. 공기업들의 차입의존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7개 공기업의 차입금의존도는 지난 2007년 36%에서 2011년 48%로 늘었습니다. 일부 공기업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공기업의 영업이익은 줄고, 은행 빚은 산더미인데 빚은 고사하고 이자마저 갚을 능력이 없어지면 공공요금을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국민 부담으로 돌아오는 거죠.”
공기업 때 100원에 산 물건, 민영화되니 50원
공기업의 부채비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공기업 경영이 방만하다는 뜻이다. 김정호(金正浩)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는 “공기업의 경영이 방만하다는 것은 생산 원가가 높다는 뜻이다. 같은 일이라도 민간기업이 하면 더 낮은 원가에, 더 높은 품질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 한국중공업 시절에 입사한 B씨의 얘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협력업체에서 물품을 사는 구매단가가 민영화가 된 첫해에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공기업 시절에 100원을 주고 샀던 물건인데, 민영화 기업이 되니 50원에 산 겁니다. 똑같은 회사이고, 똑같은 물품인데 말입니다. 결론적으로는 제품의 원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죠.”
―공기업 시절에는 왜 물품을 비싸게 산 겁니까.
“매번 해오던 일이니까 깐깐하게 따지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式)이었습니다. 주인 없는 회사다 보니 눈치 볼 일도 없고, 굳이 싸게 사서 이윤을 많이 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영화 이후에는 달라졌군요.
“완전히 다른 회사죠. 민영화 후 회사 전반에 걸쳐 일하는 방식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제품의 구매단가를 일일이 따졌고, 모든 공정이 투명하게 공개됐습니다. 기업이 수익을 내야 한다는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고요. 회사의 인사·조직 부문에도 변화가 컸습니다. 예전에는 직원 출퇴근용 버스기사, 사무실 전등 갈아끼우는 사람들의 봉급이 대졸자 수준이었고, 정년이 보장됐는데 다 바뀌었습니다. 주먹구구식의 관행이 없어졌습니다.”
과거 한국담배인삼공사 시절에 입사한 C씨 역시 공기업의 안일한 문화를 기억했다. C씨의 얘기다.
“공사 시절에는 보수적이면서 안정성을 추구하는 문화였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일을 보면 ‘누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히 내 일이 아닌데 책임지고 싶지 않은 거죠. 민영화 전후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한 가지만 꼽으라면 조직문화입니다. 민영화된 KT&G에서는 변화, 혁신, 역동성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듭니다. 철저하게 성과 중심적인 조직문화로 탈바꿈했죠.”
공기업의 ‘값’에 대한 안일한 인식은 사장에서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한국중공업 출신인 D씨의 얘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회사가 두산그룹으로 넘어간 후 부서 재배치 등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에서 일했다. 그의 얘기다.
일본 기술 받아들인 뒤, 삼성과 공기업의 반응은
“‘한국중공업이 가장 잘나갈 때 있었던 CEO가 가장 일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가 잘나갈 때 미래 경영비전을 세우고, 여유 자금을 축적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더군요. 돈을 꼭 써야 할 때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기저기 나눠주기 식으로 쓴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낙하산으로 떨어진 공기업 사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조용히 버티는 것입니다. 재임기간 2~3년 동안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만 없으면 됩니다. 재임기간 조용히 버티려니 노조 얘기를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고요. 굳이 잘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기술 자립 의지도 없고요.”
―최대한 변화없이 사는 거군요.
“비슷한 시기에 삼성과 한국중공업이 일본의 어떤 기술을 공유한 적이 있습니다. 삼성은 일본의 기술을 어떻게든 자기 식으로 기술화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한국중공업은 자립할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했다고도 볼 수 있죠. 그냥 베끼고, 매년 일본에 로열티를 냈습니다.”
한국중공업 출신인 B씨의 얘기도 비슷하다. 그의 얘기다.
“공기업 시절에 사장들이 ‘글로벌 기업’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면서 해외에 나갔습니다. 오늘처럼 세계적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해외 출장을 간 것이 아닙니다. ‘공기업 사장을 2~3년만 잘하면 상공부장관 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할 때였습니다. 이 자리를 바탕으로 더 좋은 자리로 가기 위해, 그 수단 중 하나로 글로벌을 외치면서 해외에 다녀왔죠.”
한 공기업의 자회사 사장을 지낸 C씨는 “직원들에게 가격의 의미를 인식시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C사장의 얘기다.
“모든 물건에는 값이 있기 마련입니다. 물건의 원가에, 얼마의 마진을 붙여서 최종적으로 어떤 가격에 팔아야 하는지 결정하죠. 공공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공기업에 이윤추구가 첫 번째 목표가 아니라고 해도, 발전소 하나에서 나오는 전기 원가가 얼마인지, 상수도 하나당 얼마의 마진이 남는지는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장이 된 후에 원가표를 요구했는데 직원들이 ‘그런 것을 산정해 본 적이 없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직원들 말로는 역대 사장 중에서 그런 것을 요구한 사람도 없었고, 왜 그런 데이터가 필요한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그런 것들을 알고 있어야 하는지, 가격의 의미를 직원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기업에서라면 신입사원도 아는 기본적인 일인데 공기업에서는 그 의미 자체를 공유하는 데 시간이 걸렸죠.”
두산중공업 노조가 파업 아닌 실리를 택한 이유
공기업 직원은 흔히 철밥통으로 불린다. 오늘날 민영화에 성공했다손 치지만, ‘철밥통’ 공기업에 입사한 이들에게 ‘회사가 민영화가 된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을 것이다. KT&G 한 직원의 얘기다.
“처음에는 직장의 안정성에 우려가 컸죠. 민영화 방식과 관련해 회사를 분할 매각할지, 특정 기업에 매각할지 등 논란이 있었고, 회사에 애착이 강했던 직원들은 국내 담배 산업의 존립 기반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생계 터전을 잃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컸습니다. 민영화에 반대한다고 거리에 나서기도 했죠. 많은 불안, 아픔을 겪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두산중공업 역시 민영화되는 과정, 민영화 이후 극심한 진통이 있었다. 민영화 3년째인 지난 2002년에 48일, 2003년에 63일에 걸쳐 파업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 기업에서 철도노조가 이번에 보여준 행태와 같은 격렬한 시위는 없다. 노조의 파업 일변도는 실리를 찾는 방향으로 변했다.
두산중공업 부장으로 재직 중인 B씨의 얘기다.
“민영화가 진행될 때는 노조의 힘이 강했습니다. 노조가 민영화와 관련해 ‘5대(大) 재벌로의 민영화는 안 된다’는 둥 가이드라인을 정할 정도였고, 두산으로 넘어간 후에도 파업 등 심한 쟁의를 벌였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조의 반발 모습이 차츰 변했습니다. 회사 측의 노조 정책이 일관됐거든요. 노조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어떤 경우에도 들어주지 않았고, 또 노조가 지레짐작으로 ‘회사가 우리를 무시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회사 경영진이 우리를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지도 않는다라는 인식이 노조 내부에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노조가 실리를 챙기는 쪽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기까지 오래 걸려”
벌써 10여 년 전에 민간기업이 된 KT&G는 더 이상 국내 기업이 아니다. 글로벌 5위의 담배기업으로 중국·러시아·미주 등 세계 42개국에 수출을 하고 있다. KT&G가 지난 2012년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은 7105억원이다. 러시아·터키·이란에 현지공장을 건설했고,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담배회사인 트리삭티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KT&G 관계자의 얘기다.
“KT&G 직원들에게 ‘경쟁’이라는 단어는 이제 익숙합니다. 과거 독점 시절에는 흡연가들의 국산 담배에 대한 충성도가 절대적이었고, 글로벌 담배회사같이 세련된 마케팅 기술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민영화된 이후에는 외국계 담배회사들의 공세가 거세지고, 경쟁 구도가 생겼습니다. 절박한 도전이 요구됐습니다.”
―공기업 마인드로 살아가다가 민간회사 직원으로 살아가기 힘들었을 텐데요.
“직원 모두가 힘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익숙하고 수동적이고, 편한 것이 좋았던 시절에서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로 전환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수년간 자리 잡은 생각의 틀을 한순간에 바꾸기는 어렵잖습니까. 실적 중심의 인사평가, 보상이 우리에게 맞는 것인가에 대해 숱하게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별수 없었습니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절박함이 종전의 안일했던 태도보다 강했습니다. 성과와 보상, 창의적 발상의 연결고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KT&G는 민영화 이후 일반 대기업처럼 모든 것을 성과 중심으로 평가하는 ‘신(新) 인사제도’를 도입했다. 또 민영화와 함께 마케팅 본부 안에 ‘브랜드국’을 신설하는 등 민간기업의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두산중공업은 민영화 시점인 지난 2000년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가 완전하게 다른 회사가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다. 2000년 이전의 두산중공업은 미국·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전설비 또는 담수플랜트를 수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국내에서 영업하는 회사였다.
하지만 민영화가 된 이후 회사의 일은 주로 해외에서 진행된다. 지난 2002년에는 미국과 중국에 원자력 주기기 공급업체로 선정됐고, 지난 2006년에는 크배르너IMGB, 미쓰이밥콕을 인수했다. 베트남에 생산공장을 준공하고, 체코 터빈 원천기술사인 ‘스코다파워’를 매입(2009년)했다. 인도 ‘첸나이웍스’, 독일 ‘렌체스’(각각 2011년), 영국의 물업체인 ‘엔퓨어’(2012년)를 인수하는 등 글로벌 회사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두산중공업의 B부장은 “공기업으로 머물렀다면 오늘날 두산중공업의 성과를 내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동남아, 사우디 등에 전력을 납품하기 위해서는 그 국가기관에서 요구하는 기업의 도덕성, 신뢰성, 재무안정성을 맞춰야 합니다. 공기업 시절처럼 타이트하지 못한 경영, 부서 간 칸막이 문화로 인한 불신의 문화 등이 남아 있었다면 해외시장에 뛰어들 엄두조차 못 냈을 겁니다. 해외 공개 입찰의 경우 대개 1% 가격 차이에 의해 당락이 결정됩니다. 경쟁이 너무나 치열합니다. 국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는 공기업이 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쟁에 던져지니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점체제를 허물어내야”
조동근(趙東根)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오늘날 당연히 민간기업이 하는 것으로 알려진 철강, 정유, 통신 역시 과거에는 민영화를 상상도 못하는 분야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조 교수의 얘기다.
“민영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공의 이익을 얘기하는데 자신들의 방만한 이기주의를 가리려는 것뿐입니다. 철강, 정유, 통신 역시 과거에는 민영화를 하면 큰일 날 분야로 인식됐습니다. 오늘날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말입니다. 공기업 민영화 여부 이전에 선결돼야 할 것은 경쟁 체제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독점 체제 대신에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먼저 열어주자는 것입니다.”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역시 “민간기업이 들어올 수 있게 공기업의 독점 체제를 푸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공기업은 엄밀히 따져서 빚을 내서 수익을 추구하는 집단입니다. 공기업이 원가를 높이고, 따라서 적자가 나고, 그러면 정부가 경영 적자를 메워주는 패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직원들이 봉급을 많이 받지만 삼성전자를 ‘신의 직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보수를 받는 만큼 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직원을 많이 뽑고, 그러다 보니 업무가 적고, 회사가 아무리 적자가 나도 평생 고용이 보장되니 공기업을 두고 ‘신의 직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공기업은 공공재를 다룬다는 특이점이 있다고들 합니다만.
“공공재는 공급자가 소비자에게 요금을 받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국방은 ‘평화에 대한 요금’입니다. 이 돈을 사용자에게 물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국방, 치안,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은 분명 공공재입니다. 하지만 저는 전력, 물에 대해 공공재라고 이름 붙이는 것에 반대합니다.”
―전기, 물이 공공재가 아니라면요.
“‘물이 공공재가 아니라면 돈 없는 사람은 물을 못 먹게 할 거냐’는 질문이 있을 겁니다. 기초생계 수급제도 등을 통해서 식수를 사서 마실 권한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의 여러 산업은 국가가 필요 이상으로 관여하고 있고, 규제가 너무 강합니다. 자율 경쟁 체제를 확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 재벌들이 대다수의 제반사업을 장악하지 않을까요.
“저는 꼭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견기업이 컨소시엄의 형태로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기업의 독점 체제를 허물어내면 경쟁이 시작될 것이고, 경쟁 속에서 최적화된 기업의 모습을 찾아갈 겁니다.”
김동원(金東元)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민간이 많이 들어올 수 있고 공공성이 약한 것부터 민영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의 얘기다.
“공기업이 민영화를 해서 성공, 실패를 한 사례가 외국에 많습니다. 이런 사례를 일일이 분석해서 진출해야 합니다. 공기업 노조는 자신들의 방만한 경영이 국민에게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정부 역시 재임 시절에 업적 남기기 형태로 공기업에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올해의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대다수의 공기업은 2014년 역시 적자 경영을 할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 섣불리 메스를 들이대기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익명의 전직 공기업 노조원의 말이다.
“밖에서 공기업의 행태를 보면 황당할 겁니다. 하지만 내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경기 안 타고, 고용불안 느끼지 않고, 공무원처럼 안정적으로 회사 다니려고 선택한 직장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너희 회사를 삼성, 현대차와 같은 민간기업으로 만들겠다고 하면, 자신이 가진 그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민간회사에서 공기업으로 이직했던 A씨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기자는 그에게 ‘공기업의 방만 경영에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말 속에 공기업 경영의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그의 얘기다.
“회사 자리 배치가 특이했습니다. 팀장이 창가 자리를 꿰차고 앉아 차장 뒤통수를 보고, 차장은 과장 뒤통수를, 과장은 대리 뒤통수를 보게끔 책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팀장이 신문을 펼쳐서 읽고 있으면 그 앞에 앉은 차장은 바짝 긴장하고 컴퓨터 모니터 보고, 또 그 앞의 과장을 등 뒤에서 감시하는 것이 전형적인 사내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자리 배치에서 기업의 창의력이며, 혁신을 논하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공기업은 직급을 굉장히 강조했고 회사가 군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 불필요한 일을 한다고 느꼈던 것이 있다면요.
“사무직 직원이 밤에 건물 지키는 야근 숙직제도가 있었습니다.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회사에 오는 전화를 받는 업무였죠. 위급한 상황이 있을 만한 회사가 아니어서 전화가 한 통도 오지 않는 날이 많습니다. 걸려오지 않는 전화를 받으라고 사무직 직원을 무작정 앉혀놓는 거죠. 다음날에는 무조건 오전 취침이에요. 사무실에서 마시는 물도 외부업체에서 받으면 간단할 텐데, 지하수가 나오는 수돗가에 물통 지고 가서 떠오는 업무를 하는 직원도 있었습니다.”
A씨가 근무했던 공기업은 얼마 뒤 민간회사가 됐다.
KT&G, 민영화 후 시가총액 5배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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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프랑스 칸에서 열린 세계면세품박람회 내 KT&G 전시관. 전시된 ESSE 담배는 초슬림 담배 중 전 세계 판매 1위 제품이다. |
공기업 개혁의 방법 중 하나가 공기업을 민영화(民營化)하는 것이다. 공기업 민영화란 정부 출자(出資) 기관이 가진 주식을 민간회사에 파는 것을 말한다. 주인이 정부에서 민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IMF 여파로 정부의 부채 줄이기가 급선무였던 김대중 정부 때 민영화된 국정교과서(현 미래엔·1998년 민영화),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2000년), 포항제철(현 포스코·2000년), 한국통신(현 KT·2002년), 한국담배인삼공사(현 KT&G·2002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공기업 민영화를 두고 찬반(贊反)이 거세다. 민영화 찬성론자들은 만성 적자를 기록하는 공기업을 민영화하면 경쟁 체제가 도입돼 흑자로 돌아서고, 회사의 체질이 강화돼 경쟁력이 생긴다고 본다. 반대론자들은 공기업을 민간에서 운영하면 국민복지보다 회사의 이익을 우선으로 둬서 이용료가 오를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전기를 민영화하면 전기료가, 철도를 민영화하면 철도이용료가 터무니없이 오를 것이니 민영화를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양측이 팽팽하게 맞서다 보니 공기업의 민영화는 간단치 않다. 하지만 만성 적자인 공기업의 경영 실적, 또 경영 적자 상황에서도 직원들에게 주어지는 성과급 얘기가 나올 때면 대다수는 분개한다. 민간기업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어서다. 공기업의 민영화는 정말 나쁜 것일까.
숫자로 보면 공기업 민영화는 환영받아 마땅해 보인다. 지난 1989년에 창립된 한국담배인삼공사는 지난 1999년 10월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됐고, 지난 2002년 12월에 민영화를 끝냈다. 2조306억원이었던 공사 시절 매출액(2002년)은 지난 2012년 3조9847억원으로 2배가량 늘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5863억원에서 1조359억원으로 역시 배가 늘었다. 주식시장에서 시가총액은 2조9800억원에서 11조900억원으로 무려 5배나 성장했다.
지난 1962년 창립돼 민간과 국유화를 거듭했던 한국중공업은 지난 2000년 12월 민영화가 됐다. 매출은 2조4091억원(2002년)에서 9조6272억원(2012년), 영업이익은 827억원에서 5948억원으로 늘었다. 포항제철의 매출 역시 같은 기간 11조6920억원에서 35조6650억원, 영업이익은 20조990억원에서 27조900억원으로 상승했다. 공기업의 대표격인 한국전력공사의 매출은 18조7082억원(2000년)에서 49조4215억원(2012년)으로 늘었으나, 영업이익은 3조4700억원에서 마이너스 8179억원을 기록해 적자가 됐다.
민영화된 과거 공기업 부채, 104%에서 62%로 줄어
무엇보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부채’ 부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김영신 부연구위원은 최근 〈공기업 부채 증가의 문제점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그가 기업의 여러 지표 중 ‘부채’를 집중 분석한 이유는 이렇다.“기업은 대개 수익성·성장성·안정성 등으로 경쟁력을 평가합니다. 공기업이 얼마나 수익을 내야 하느냐는 논쟁거리이고, 전기료 등 가격을 높이면 수익은 금방 좋아질 수 있습니다. 공기업 사업이 독점 체제여서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기업의 성장성 역시 정부에서 국책 사업을 시행한다면 단숨에 성장률이 높아질 수 있어서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때문에 공기업의 자본 대비 부채비율을 통해서 민영화된 공기업과 비교했습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한국전력공사·가스공사·석유공사·토지주택공사·철도공사·도로공사·수자원공사 등 7대 공기업의 부채는 지난 2002년 73%에서 2011년 216%로 3배가량 늘었습니다. 민간기업의 경우에는 부채비율이 150%가 넘으면 투자자들에게 ‘투기 등급’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반면 민영화된 KT·KT&G·두산중공업·남해화학(옛 한국종합화학공업 인수합병)·대한송유관공사·미래엔·(주)포스코 등 7대 민간기업의 부채비율은 같은 기간 104%에서 62%로 줄었습니다. 공기업의 매출액은 꾸준히 늘었고, 같은 기간에 민영화된 기업의 매출도 지속적으로 늘었습니다. 둘 다 매출은 늘었지만, 공기업은 부채비율이 높아지고 민영화된 기업은 부채가 줄고 있습니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구조적인 문제입니까.
“공기업은 정부의 직간접적 통제와 영향을 받습니다. 공기업의 CEO, 내부 감사 임명에 정부가 관여합니다. 공익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공기업 희생이 강요될 수 있습니다. 경기 부양 차원에서 쓸데없는 일도 많이 벌입니다. 문제는 공기업의 이런 특성 때문에 늘어난 부채가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얼마나 어려운 상황입니까.
“공기업 부채 중 대부분은 금융 빚입니다. 지난 2011년에 공기업 21개의 금융 빚이 전체 부채의 70%에 달했습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매년 내야 하는 금융 이자가 3조5910억원(이자율 4% 계산)입니다. 공기업들의 차입의존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7개 공기업의 차입금의존도는 지난 2007년 36%에서 2011년 48%로 늘었습니다. 일부 공기업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공기업의 영업이익은 줄고, 은행 빚은 산더미인데 빚은 고사하고 이자마저 갚을 능력이 없어지면 공공요금을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국민 부담으로 돌아오는 거죠.”
공기업 때 100원에 산 물건, 민영화되니 50원
공기업의 부채비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공기업 경영이 방만하다는 뜻이다. 김정호(金正浩)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는 “공기업의 경영이 방만하다는 것은 생산 원가가 높다는 뜻이다. 같은 일이라도 민간기업이 하면 더 낮은 원가에, 더 높은 품질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과거 한국중공업 시절에 입사한 B씨의 얘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협력업체에서 물품을 사는 구매단가가 민영화가 된 첫해에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공기업 시절에 100원을 주고 샀던 물건인데, 민영화 기업이 되니 50원에 산 겁니다. 똑같은 회사이고, 똑같은 물품인데 말입니다. 결론적으로는 제품의 원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죠.”
―공기업 시절에는 왜 물품을 비싸게 산 겁니까.
“매번 해오던 일이니까 깐깐하게 따지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式)이었습니다. 주인 없는 회사다 보니 눈치 볼 일도 없고, 굳이 싸게 사서 이윤을 많이 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영화 이후에는 달라졌군요.
“완전히 다른 회사죠. 민영화 후 회사 전반에 걸쳐 일하는 방식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제품의 구매단가를 일일이 따졌고, 모든 공정이 투명하게 공개됐습니다. 기업이 수익을 내야 한다는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고요. 회사의 인사·조직 부문에도 변화가 컸습니다. 예전에는 직원 출퇴근용 버스기사, 사무실 전등 갈아끼우는 사람들의 봉급이 대졸자 수준이었고, 정년이 보장됐는데 다 바뀌었습니다. 주먹구구식의 관행이 없어졌습니다.”
과거 한국담배인삼공사 시절에 입사한 C씨 역시 공기업의 안일한 문화를 기억했다. C씨의 얘기다.
“공사 시절에는 보수적이면서 안정성을 추구하는 문화였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일을 보면 ‘누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히 내 일이 아닌데 책임지고 싶지 않은 거죠. 민영화 전후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한 가지만 꼽으라면 조직문화입니다. 민영화된 KT&G에서는 변화, 혁신, 역동성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듭니다. 철저하게 성과 중심적인 조직문화로 탈바꿈했죠.”
공기업의 ‘값’에 대한 안일한 인식은 사장에서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한국중공업 출신인 D씨의 얘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회사가 두산그룹으로 넘어간 후 부서 재배치 등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에서 일했다. 그의 얘기다.
일본 기술 받아들인 뒤, 삼성과 공기업의 반응은
“‘한국중공업이 가장 잘나갈 때 있었던 CEO가 가장 일을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가 잘나갈 때 미래 경영비전을 세우고, 여유 자금을 축적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더군요. 돈을 꼭 써야 할 때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기저기 나눠주기 식으로 쓴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낙하산으로 떨어진 공기업 사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조용히 버티는 것입니다. 재임기간 2~3년 동안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만 없으면 됩니다. 재임기간 조용히 버티려니 노조 얘기를 일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고요. 굳이 잘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기술 자립 의지도 없고요.”
―최대한 변화없이 사는 거군요.
“비슷한 시기에 삼성과 한국중공업이 일본의 어떤 기술을 공유한 적이 있습니다. 삼성은 일본의 기술을 어떻게든 자기 식으로 기술화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한국중공업은 자립할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했다고도 볼 수 있죠. 그냥 베끼고, 매년 일본에 로열티를 냈습니다.”
한국중공업 출신인 B씨의 얘기도 비슷하다. 그의 얘기다.
“공기업 시절에 사장들이 ‘글로벌 기업’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면서 해외에 나갔습니다. 오늘처럼 세계적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해외 출장을 간 것이 아닙니다. ‘공기업 사장을 2~3년만 잘하면 상공부장관 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할 때였습니다. 이 자리를 바탕으로 더 좋은 자리로 가기 위해, 그 수단 중 하나로 글로벌을 외치면서 해외에 다녀왔죠.”
한 공기업의 자회사 사장을 지낸 C씨는 “직원들에게 가격의 의미를 인식시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C사장의 얘기다.
“모든 물건에는 값이 있기 마련입니다. 물건의 원가에, 얼마의 마진을 붙여서 최종적으로 어떤 가격에 팔아야 하는지 결정하죠. 공공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공기업에 이윤추구가 첫 번째 목표가 아니라고 해도, 발전소 하나에서 나오는 전기 원가가 얼마인지, 상수도 하나당 얼마의 마진이 남는지는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장이 된 후에 원가표를 요구했는데 직원들이 ‘그런 것을 산정해 본 적이 없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직원들 말로는 역대 사장 중에서 그런 것을 요구한 사람도 없었고, 왜 그런 데이터가 필요한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그런 것들을 알고 있어야 하는지, 가격의 의미를 직원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기업에서라면 신입사원도 아는 기본적인 일인데 공기업에서는 그 의미 자체를 공유하는 데 시간이 걸렸죠.”
두산중공업 노조가 파업 아닌 실리를 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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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중공업이 건설한 UAE 푸자이라 담수화 플랜트 야경. 두산중공업은 민영화를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
“처음에는 직장의 안정성에 우려가 컸죠. 민영화 방식과 관련해 회사를 분할 매각할지, 특정 기업에 매각할지 등 논란이 있었고, 회사에 애착이 강했던 직원들은 국내 담배 산업의 존립 기반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생계 터전을 잃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컸습니다. 민영화에 반대한다고 거리에 나서기도 했죠. 많은 불안, 아픔을 겪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두산중공업 역시 민영화되는 과정, 민영화 이후 극심한 진통이 있었다. 민영화 3년째인 지난 2002년에 48일, 2003년에 63일에 걸쳐 파업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 기업에서 철도노조가 이번에 보여준 행태와 같은 격렬한 시위는 없다. 노조의 파업 일변도는 실리를 찾는 방향으로 변했다.
두산중공업 부장으로 재직 중인 B씨의 얘기다.
“민영화가 진행될 때는 노조의 힘이 강했습니다. 노조가 민영화와 관련해 ‘5대(大) 재벌로의 민영화는 안 된다’는 둥 가이드라인을 정할 정도였고, 두산으로 넘어간 후에도 파업 등 심한 쟁의를 벌였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조의 반발 모습이 차츰 변했습니다. 회사 측의 노조 정책이 일관됐거든요. 노조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어떤 경우에도 들어주지 않았고, 또 노조가 지레짐작으로 ‘회사가 우리를 무시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됐습니다. 회사 경영진이 우리를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지도 않는다라는 인식이 노조 내부에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노조가 실리를 챙기는 쪽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기까지 오래 걸려”
벌써 10여 년 전에 민간기업이 된 KT&G는 더 이상 국내 기업이 아니다. 글로벌 5위의 담배기업으로 중국·러시아·미주 등 세계 42개국에 수출을 하고 있다. KT&G가 지난 2012년 해외에서 벌어들인 돈은 7105억원이다. 러시아·터키·이란에 현지공장을 건설했고,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담배회사인 트리삭티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KT&G 관계자의 얘기다.
“KT&G 직원들에게 ‘경쟁’이라는 단어는 이제 익숙합니다. 과거 독점 시절에는 흡연가들의 국산 담배에 대한 충성도가 절대적이었고, 글로벌 담배회사같이 세련된 마케팅 기술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민영화된 이후에는 외국계 담배회사들의 공세가 거세지고, 경쟁 구도가 생겼습니다. 절박한 도전이 요구됐습니다.”
―공기업 마인드로 살아가다가 민간회사 직원으로 살아가기 힘들었을 텐데요.
“직원 모두가 힘들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익숙하고 수동적이고, 편한 것이 좋았던 시절에서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로 전환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수년간 자리 잡은 생각의 틀을 한순간에 바꾸기는 어렵잖습니까. 실적 중심의 인사평가, 보상이 우리에게 맞는 것인가에 대해 숱하게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별수 없었습니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절박함이 종전의 안일했던 태도보다 강했습니다. 성과와 보상, 창의적 발상의 연결고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KT&G는 민영화 이후 일반 대기업처럼 모든 것을 성과 중심으로 평가하는 ‘신(新) 인사제도’를 도입했다. 또 민영화와 함께 마케팅 본부 안에 ‘브랜드국’을 신설하는 등 민간기업의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두산중공업은 민영화 시점인 지난 2000년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가 완전하게 다른 회사가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다. 2000년 이전의 두산중공업은 미국·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전설비 또는 담수플랜트를 수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국내에서 영업하는 회사였다.
하지만 민영화가 된 이후 회사의 일은 주로 해외에서 진행된다. 지난 2002년에는 미국과 중국에 원자력 주기기 공급업체로 선정됐고, 지난 2006년에는 크배르너IMGB, 미쓰이밥콕을 인수했다. 베트남에 생산공장을 준공하고, 체코 터빈 원천기술사인 ‘스코다파워’를 매입(2009년)했다. 인도 ‘첸나이웍스’, 독일 ‘렌체스’(각각 2011년), 영국의 물업체인 ‘엔퓨어’(2012년)를 인수하는 등 글로벌 회사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두산중공업의 B부장은 “공기업으로 머물렀다면 오늘날 두산중공업의 성과를 내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동남아, 사우디 등에 전력을 납품하기 위해서는 그 국가기관에서 요구하는 기업의 도덕성, 신뢰성, 재무안정성을 맞춰야 합니다. 공기업 시절처럼 타이트하지 못한 경영, 부서 간 칸막이 문화로 인한 불신의 문화 등이 남아 있었다면 해외시장에 뛰어들 엄두조차 못 냈을 겁니다. 해외 공개 입찰의 경우 대개 1% 가격 차이에 의해 당락이 결정됩니다. 경쟁이 너무나 치열합니다. 국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는 공기업이 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쟁에 던져지니 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점체제를 허물어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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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업 민영화는 모든 정권의 이슈였다. 지난 1998년 7월 20일, 과천 산업자원부 회의실에서 한전, 포철, 가스공사, 한국중공업 등 공기업 사장단이 회의를 하는 모습. |
“민영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공의 이익을 얘기하는데 자신들의 방만한 이기주의를 가리려는 것뿐입니다. 철강, 정유, 통신 역시 과거에는 민영화를 하면 큰일 날 분야로 인식됐습니다. 오늘날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말입니다. 공기업 민영화 여부 이전에 선결돼야 할 것은 경쟁 체제를 도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독점 체제 대신에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먼저 열어주자는 것입니다.”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역시 “민간기업이 들어올 수 있게 공기업의 독점 체제를 푸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공기업은 엄밀히 따져서 빚을 내서 수익을 추구하는 집단입니다. 공기업이 원가를 높이고, 따라서 적자가 나고, 그러면 정부가 경영 적자를 메워주는 패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직원들이 봉급을 많이 받지만 삼성전자를 ‘신의 직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보수를 받는 만큼 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직원을 많이 뽑고, 그러다 보니 업무가 적고, 회사가 아무리 적자가 나도 평생 고용이 보장되니 공기업을 두고 ‘신의 직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공기업은 공공재를 다룬다는 특이점이 있다고들 합니다만.
“공공재는 공급자가 소비자에게 요금을 받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국방은 ‘평화에 대한 요금’입니다. 이 돈을 사용자에게 물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국방, 치안,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은 분명 공공재입니다. 하지만 저는 전력, 물에 대해 공공재라고 이름 붙이는 것에 반대합니다.”
―전기, 물이 공공재가 아니라면요.
“‘물이 공공재가 아니라면 돈 없는 사람은 물을 못 먹게 할 거냐’는 질문이 있을 겁니다. 기초생계 수급제도 등을 통해서 식수를 사서 마실 권한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의 여러 산업은 국가가 필요 이상으로 관여하고 있고, 규제가 너무 강합니다. 자율 경쟁 체제를 확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 재벌들이 대다수의 제반사업을 장악하지 않을까요.
“저는 꼭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견기업이 컨소시엄의 형태로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기업의 독점 체제를 허물어내면 경쟁이 시작될 것이고, 경쟁 속에서 최적화된 기업의 모습을 찾아갈 겁니다.”
김동원(金東元)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민간이 많이 들어올 수 있고 공공성이 약한 것부터 민영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의 얘기다.
“공기업이 민영화를 해서 성공, 실패를 한 사례가 외국에 많습니다. 이런 사례를 일일이 분석해서 진출해야 합니다. 공기업 노조는 자신들의 방만한 경영이 국민에게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정부 역시 재임 시절에 업적 남기기 형태로 공기업에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올해의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대다수의 공기업은 2014년 역시 적자 경영을 할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 섣불리 메스를 들이대기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익명의 전직 공기업 노조원의 말이다.
“밖에서 공기업의 행태를 보면 황당할 겁니다. 하지만 내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경기 안 타고, 고용불안 느끼지 않고, 공무원처럼 안정적으로 회사 다니려고 선택한 직장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너희 회사를 삼성, 현대차와 같은 민간기업으로 만들겠다고 하면, 자신이 가진 그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