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이 기죽지 말고 계속 저항하고 고발하고 클레임을 제기해야 개선될 것이다. 乙이 順從하면 甲의 횡포는 더욱 강고해질 것이다. 乙의 殉敎를 통해서만 사소한 변화를 보이는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responsive society)’라 하기 어렵다”
⊙ ‘甲과 乙’은 계약당사자를 나타내는 법률용어지만 지금은 한국사회의 不條理한 단면을 상징
⊙ 경직된 신분제의 정신적 틀이 上下, 甲乙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내재화시킨 결과
⊙ 官尊民卑 관념은 비굴하게 굽실대야 생존할 수 있다고 믿게 해
⊙ 조선의 民本사상은 당대 유럽보다 앞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도 민본사상이 담겨
⊙ 甲乙관계는 민주화하지 못한 한국정치의 실패, 민주주의의 실패로 이해해야
⊙ ‘甲과 乙’은 계약당사자를 나타내는 법률용어지만 지금은 한국사회의 不條理한 단면을 상징
⊙ 경직된 신분제의 정신적 틀이 上下, 甲乙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내재화시킨 결과
⊙ 官尊民卑 관념은 비굴하게 굽실대야 생존할 수 있다고 믿게 해
⊙ 조선의 民本사상은 당대 유럽보다 앞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도 민본사상이 담겨
⊙ 甲乙관계는 민주화하지 못한 한국정치의 실패, 민주주의의 실패로 이해해야
- 갑을관계를 의미하는 ‘먹이사슬’ 그림.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양심은 돌변하는 바람과 같다. 우리를 미치게 하는 것은 선악(善惡)과 양심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神)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지만 인간사회가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불공평이나 불평등을 논의하기 위해 서구의 마르크시즘이나 종속·지배이론을 빌려올 생각은 없다. 모르긴 해도 당대(當代)에 사는 누구나 자신이 불공정하고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여길지 모른다. 불평등(양극화)은 21세기 자본주의 국가가 안는 공통된 모순이지만, 좁게는 한국적 현상으로 징후를 해석할 수도 있다. 바로 ‘갑을(甲乙)관계’에서다.
‘갑과 을’은 계약당사자를 나타내는 한국식 법률용어지만 지금은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상징한다. 갑은 상대적으로 권력과 자리의 윗부분, 을은 갑 아래에 있는 이들을 말한다. 그러나 대기업 임원의 KAL 여승무원 폭행사건이 터지고 남양유업 사태가 이어지면서 ‘꿈틀한 을’의 반란이 활화산(活火山)처럼 번지고 있다. 덩달아 정치권도 불평등한 갑을 구조를 완화할 수단을 마련한다며 부산하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6월 5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갑을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대통령과 여야 지도자, 경제주체들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타협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김 대표는 “경제권력으로부터 불이익을 강요당하는 을의 입장에 설 것”이라며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처리도 약속했다.
공포를 매개로 한 上下관계
법으로 갑을의 복잡한 불편관계를 해소할 수 있을까. 학계에서는 갑을에 담긴 한국적 상하관계, 관존민비(官尊民卑)식 승자독식(勝者獨食)의 뿌리깊은 ‘공포(恐怖)’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갑을의 부조리를 풀 수 없다고 말한다.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한국사회는 무수한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申壬癸)…’의 구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엉켜 있다. 기자는 한국인의 생각 속에 담긴 갑을의 심리,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갑을의 역사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서울대 이부영(李符永) 명예교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관찰되는 사회 병폐로 형식주의적 완전무결주의(완전하게 보이기 위한 완전성), 획일주의, 경직된 관료주의, 공포를 매개로 한 상하관계를 들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의욕상실, 안일 무사, 책임 회피, 불신, 거짓말, 체면 유지에 급급한 임시변통이라는 윤리적 문제성을 제고하고 있다”고 했다.(《한국인 성격의 심리학적 고찰》 참조)
상하관계를 갑을관계로 치환하고 ‘공포’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자. 상하 혹은 갑을은 어느 가족, 사회에서나 존재한다.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편이다. 어려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엄정한 상하의 질서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구성원 간 갈등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상하의 문제가 원인이다. 누가 윗사람이고 누가 아랫사람인지 상하관계가 모호하면 불필요한 갈등이 생긴다. 오죽하면 한 살이라도 나이 먹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 “민증(주민등록증)부터 까자”라는 말이 나왔을까.
상하관계가 획일적이 되면 그 조직이나 구성원 간 관계는 공포 그 자체가 된다.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과 상관없이, 출생에 의해 정해지는 적서(嫡庶)와 반상(班常)의 대조적인 인생전망’(성균관대 김비환 교수)은 폐쇄적 갑을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같은 경직된 신분제의 정신적 틀이 상하, 갑을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한국인의 의식 속에 내재화시킨 것은 아닐까.
상(甲)이 하(乙)에 윽박지르거나 고함을 쳐도, 부당한 요구(거래)를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하(乙)를 얕잡아 보고 불평등을 강요하는 상(甲)의 심리는 쉽게 학습(전염)돼, 하(乙)는 또 다른 하(丙)에게, 또 다른 하(丙)는 또또 다른 하(丁) 등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경북대 철학과 신오현(申午鉉) 명예교수의 《한국인의 윤리관》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충·효·열(烈)과 같은 희생정신은 마조히즘에 가까울 정도로, 그리고 하급자, 약세(弱勢)자, 천(賤)신분에 대해서는 사디즘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악착스럽게 가혹하다.…>
혈연(血緣)·학연(學緣)·지연(地緣)이 엉킨 한국사회에서는 상사나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없으면서도 비굴하게 굽실대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서양과 같은 횡적(橫的)인 수평관계가 아니라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종적(縱的) 서열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요구하는 관행이 갑을관계에서 재현(再現)된 것은 아닐까.
아랫사람에게 극단적으로 엄하고 가혹해
자신의 친족이나 윗사람(甲)에게는 무조건 관대하고, 아랫사람(乙)에게는 극단적으로 엄하며 가혹한 것이 갑을관계의 표징이다. 그러니 갑이 을에게 더 많은 이익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서울대 철학과 황경식(黃璟植) 명예교수의 말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시어머니 며느리 적 모른다’는 게 한국인입니다. 이는 거창하게 사회정의니 공정성이니 하는 거대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쉽게 모순을 설명할 수 있어요. 저는 도덕의 기본은 역지사지(易地思之)에 있다고 봅니다. 칸트의 ‘보편화’ 가능성을 들먹이지 않아도, 기독교의 황금률(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유교의 은백률(네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등은 도덕의 기본 발상입니다. 아동심리학자 피아제(Piaget)에 따르면 6~7세가 되면 역지사지를 이해할 수 있어 도덕교육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그런 식으로 따지면 도덕지수가 10세 미만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상하와 갑을 간 질서를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잔인하고 탐욕스런 갑의 ‘승자독식’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비행기 비즈니스클래스에 탄 한 대기업 계열사 상무가 ‘라면을 제대로 못 끓인다’며 항공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 제빵회사 회장이 호텔 도어맨 뺨을 지갑으로 때리거나 남양유업 직원이 대리점 주인에게 폭언을 퍼부은 일이 갑의 당연한 권리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갑을의 부조리한 관계를 한국적 현상이라 가정할 때,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권위와 질서를 강조하는 고차원적 유교이념과 양반 중심의 관료사회가 내포한 관존민비식 뿌리깊은 공포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한국 역사에서 갑의 권능은 어느 정도였을까. 조선시대 대표 갑인 양반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조선 후기 사회모순을 직시했던 성호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을 연구해 《성호, 세상을 논하다》를 펴낸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姜明官) 교수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남긴 문집을 보라. 위로 고관대작부터 아래로 벼슬 없는 유생까지 글줄깨나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만들어주자고 말한다”며 “하지만 단 한 가지도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다”고 했다. 을(백성)의 마음속에 갑(양반과 관료)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게 틀림없다.
강 교수는 “부정직하고 부패한 자가 출세하고 양심을 지키고 올곧게 사는 사람이 궁핍한 것은 지금도 똑같지 않은가. 부패를 만들어내는 사회구조를 개혁하지 않으면, 부패한 인간들을 척결하지 않으면 한국사회는 가망이 없다”며 “부패로 패망한 조선이 그 선례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다음은 강 교수가 번역한 이익 선생의 《성호사설》 중 ‘청렴과 탐오’의 한 부분이다.
<…이제 내가 본 바를 적어보겠다. 우리 마을에 높은 벼슬을 지내고 청백리로 뽑힌 분이 있었다. 그분은 청렴했기에 가난했고, 가난했기에 자손이 살던 곳을 떠나 떠돌게 되었다. 게다가 사사로운 이익의 길을 뚫지 못해 백여 년이 지나도록 박한 녹봉을 받는 기회도 가질 수 없었고 거의 모두가 굶주려 도랑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중략)… 저 대소 관원을 한번 보라. 누구를 막론하고 집은 높고 노비는 피둥피둥 살이 쪄 있다. 하지만 한 사람도 법에 걸려 죽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民本과 암행어사
이익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갑(관료)의 뱃속에 가득 찬 것은 ‘을(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려는 마음’뿐이다. 조선시대 갑의 정치는 덕치(德治)라는 이상과 달리 백성을 기쁘게 해주지 못했고 불안정한 민생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유학(儒學)은 출세의 수단이 되고, 자리(관직)는 특권을 보장받는 길이었으니 관존민비의 원인이 되었다. 또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파당(派黨)이란 높다란 울타리를 만들어 학연·지연·혈연의 고리로 묶었다. 이런 ‘호령하는 갑(관료)’과 ‘승자독식의 마음’은 현대 한국사회로까지 이어져 을을 수평관계로 보지 않고 종적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게 한 것이다.
조선은 그러나 민본(民本)의 나라였다. 왕이 선비들이 올리는 상소문이 아니라 궁 밖으로 행차해 격쟁(擊錚·징을 울리며 나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을 통해 백성의 소리를 들었다.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한영우(韓永愚) 원장은 “규장각에는 격쟁의 내용을 기록한 글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격쟁은 왕이 양반을 넘어 민에 다가가려는 많은 변화의 일례에 불과했다”고 했다. 그는 또 “조선은 당시 ‘백성을 위하여(for the people)’의 단계에서 한발 나아가 ‘백성의(of the people)’의 단계에까지 도달했다”며 “단지 ‘백성에 의한(by the people)’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인 서울대 국문학과 조동일(趙東一) 명예교수도 같은 생각이다.
“민본의 시대에는 한국이 유럽보다 앞서고, 민주 시대에 들어서는 것은 늦었으나 서양이 아닌 곳 가운데는 우리나라가 가장 앞섰습니다.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민본사상을 정립해 조선왕조 설계의 기본으로 삼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도전은 제거됐으나 민본의 설계는 그대로 남아 세종이 실행에 앞장섰습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15세기 유럽을 포함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조선왕조와 같이 민본을 기초로 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근대 유럽과 견주어 근대 이전의 한국을 매도하는 것은 한국을 몰라 유럽 추종에서 벗어나지 못한 얄팍한 지식인의 자기비하이고 자학입니다.”
공포의 갑을, 상하 관계의 부조리를 막기 위해 임금이 암행어사를 몰래 보낸 것도 조선이란 나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심재우(沈載祐) 교수가 쓴 《법률과 형벌로 읽는 조선》에 따르면, 조선 중종 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관료의 횡포를 막는 수단으로 암행어사는 400여 년간 줄곧 파견됐다고 한다.
어사의 역할은 지방관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에 있었다. 이미 처리한 민·형사 소송을 재심하는 것도 어사의 주된 업무였다. 그러나 암행어사로 파견된다는 것은 죽을 각오가 필요했다. 심 교수는 “탐관오리들의 혼백을 빼놓는 추상같은 암행어사도 임무 수행 과정에서 고초를 겪었다. 해진 도포와 망가진 갓, 변변한 여비도 없이 암행 길에 올라 좁디좁은 주막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은 다반사였다”고 했다.
암행어사는 명령을 받은 그날 출발이 원칙이었다. 역마를 타고 한두 명의 하급관리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수령의 탐오(貪汚)를 알기 위해 폐의파립(敝衣破笠·남루한 옷과 찢어진 갓)으로 변장하고 풍찬노숙(風餐露宿)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 교수는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박내겸이 쓴 《서수일기(西繡日記)》에 따르면 4개월여 걸친 업무 수행 기간 박내겸은 하루 보통 70리에서 90리를 이동했고, 말을 타는 경우가 많았지만, 신분을 숨기려고 걸어다니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고 했다.
불합리한 갑에 을이 수긍하는 심리적 이유
왜 을은 갑의 부당한 요구에 복종하는 것일까. 불합리한 권위에의 복종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현대 실험심리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전기충격 실험’을 통해 을의 복종(僕從) 심리를 소개한다.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였던 밀그램은 1963년 전기충격기를 통한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를 연구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먼저 밀그램은 지역 신문에 실험지원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고 ‘교사 역할’ 피험자를 다수 선발했다. 교사 피험자는 가벼운 충격(15볼트)부터 위험한 감전(450볼트)까지 다양하게 배열된 전기충격기를 조작했고, ‘학생 역할’을 맡은 피험자에게 단어 짝짓기 시험을 치게 해 틀릴 경우 벌로 전기충격을 주었다.
만약 교사 피험자가 전기충격기 사용을 머뭇거릴 경우, 밀그램은 계속 전기충격기를 쓸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이 실험의 관심은 두 가지로 모였는데, ‘단어 짝짓기를 못한 학생 피험자에게 가하는 전기충격(볼트)의 정도’와 ‘얼마나 많은 학생 피험자가 최대치(450볼트)의 전기충격을 받을까’였다. 그러나 밀그램은 교사 피험자가 450볼트까지 전력을 올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많아 봤자 120볼트 정도지, 450볼트는 거의 감전 수준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과학계 전체를 놀라게 했다. 교사 피험자의 62.5%가 실험자의 명령에 끝까지 복종했고, 그중 3분의 1 정도가 학생에게 450볼트까지 충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실험의 평균치도 무려 350볼트였다. 밀그램의 전기충격 요구가 부당했지만, 교사 역할 피험자는 그 부당한 요구를 따랐던 것이다.
1960년대 말에도 비슷한 실험이 있었다. 밀그램의 실험에 영감을 얻은 정신과 의사 찰스 호플링(Charles Hofling)은 대형병원에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의 관건은 부당한 의사 지시를 간호사가 거부하느냐 여부였다. 호플링은 ‘하우스’라는 정체불명의 의사를 등장시켜 간호사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게 했다. 그리곤 “위험한 약물 20mg을 환자에게 주사하라”고 명령했다.
간호사는 ‘하우스’라는 이름의 의사를 전혀 알지 못했고, 더욱이 병원 규칙상 전화통화로 처방을 내리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또 환자에게 투약도록 명령받은 정체불명의 약물은 용기 겉면에 ‘한 번에 10mg 이상 처방하지 못하도록’ 적혀 있었다.
호플링은 이 상황에서 간호사들이 의사(하우스)의 위험한 지시에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주시했다.
결과는 밀그램의 실험보다 충격적이었다. 22명의 간호사 중 무려 21명이 의사 명령에 따랐다. 물론 환자에게 전달된 약물은 무해한 용액으로 사전에 바꿔치기 되어 있었다.
이 실험에 응한 사람들은 왜 위험한 의사 지시에 복종한 것일까.
갑의 권위를 을은 학습으로 내면화
복종의 이면에 자신보다 권위적인 상사에게 무조건적 복종하는 관습적 체념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은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사회로부터 다양한 권위(갑)에 복종하도록 학습 되어 왔다. 심지어 비합리적 지시나 궤변마저 학습으로 내면화했다.
이럴 경우 행위의 주체에 자아(自我)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래서 을은 갑의 지시에 따른 행동에 전혀 책임감을 못 느낀다. 예컨대 나치 복장이나 인민복을 입고 양민을 죄책감 없이 살인할 수 있는 까닭도 이와 같다.
서강대 심리학과 김인자(金仁子) 명예교수는 “대리자(실험자)의 뜻을 집행자(교사, 간호사)가 따르기 위해서는 그 명령이 합법적이라고 인정받을 때만 가능하다고 믿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며 따른다”며 “을은 갑이 부당하다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잘못된 룰의 잘못된 갑을관계를 막는 길은 ‘무시무시한 게임’을 중단시키는 것밖에 없다. 부조리한 갑을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을이 일어나야 한다. 갑이 스스로 변하기를 기대하기보다 을이 먼저 갑과의 부당한 관계를 끊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하지만 을의 반란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대 철학과 황경식 명예교수의 말이다.
“한국사회는 약속이 지켜지는 계약사회의 훈련이 전혀 되지 않은 듯합니다. 공정(fairness)은 계약사회의 주요 덕목이 아니겠어요? 을이 기죽지 말고 계속 저항하고 고발하고 클레임을 제기해야 개선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을의 희생이 다소 요구될 겁니다. 성경에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義人) 몇 명만 있었어도 그렇게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을이 순종(順從)하면 갑의 횡포는 더욱 강고해지겠지요. 을의 순교(殉敎)를 통해서만 사소한 변화를 보이는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responsive society)’라 하기 어렵다고 봐요. 정의사회로의 길이 요원한 듯 보여요.”
김인자 교수의 말이다.
“자기 자신의 생각만 옳고 상대방은 틀렸으니까 상대방의 이유와 설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잘못된 정보와 추측으로만 판단하고 밀어붙이거나, 다른 이들을 선동해 서로에게 해(害)가 되는 것을 꾸며내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상대방을 비판 공격하는 해결 접근은 놀랍게도 학교 동료끼리, 부모 자식끼리, 상사와 부하끼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이런 것을 선택한다면 모두 파멸할 것입니다.”
김 교수는 또 “부모 자녀와 교사 학생과 그리고 노사관계나 여타의 조직 안에서,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 남의 행동을 비난, 비관, 비교, 잔소리, 벌하기, 매수하기, 핑계 대기를 더 많이 하고, 존중하며 믿고 지지하기, 그리고 경청하기나 협상하기는 거의 할 줄을 모르는 문화 속에서 사는 이가 많다”며 “우리는 달라이 라마 스님 말씀대로 ‘자기 종교는 신념으로, 남의 종교는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라’는 말을 새겨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갑이 을을 존경심으로 대하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갑을관계를 청산하는 법
명백한 악인은 없다. 갑이 항상 갑일 수도 없다. 을이 갑이 되는 기회가 열린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고, 부지런한 동시에 게으르다. 엄격한 동시에 관대하고 밝은 성격 이면에 어두운 과거가 숨어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중성(二重性)을 지니고 있다.
인간관계의 참된 매력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가 지녔다는 것을 인정할 때 생긴다. 갑을관계도 마찬가지다. 갑은 을이 지닌 장점에 주목해서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
간편하고 손쉬운 약자로 여겨선 곤란하다. 을의 가치와 장점을 보지 않는 갑은 외눈박이와 마찬가지다. 한쪽 눈을 감고, 일방의 이익을 강요하면, 을은 고통에 가까운 노력을 하게 되고, 둘 사이 신뢰는 쌓이지 않는다. 이런 관계는 을의 희생으로 이뤄질 뿐 갑의 가치는 결국엔 훼손될 뿐이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김비환 교수는 “서유럽의 근대사는 빈곤한 자들의 좌절과 절망감을 없애줄 수 있는 제도와 도덕성의 구비가 귀족과 평민, 노예라는 운명적인 결정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필수조건임을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한국사회는 다수 빈민의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안전판도 턱없이 모자라며, 사람들이 서로 존엄성을 존중해 주고 보호해 줄 수 있는 관심과 배려의 정신도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아마도 이것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지상과제로 추구했던 성장제일주의 근대화 및 이를 뒷받침했던 경쟁적인 입시제도와 정부의 성장 이데올로기의 확산, 그리고 만연된 물질주의 풍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과 집단의 탐욕과 경쟁심을 부채질함으로써 사회의 양극화를 가속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도 적지 않은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겁니다.”
김 교수는 또 갑을관계를 ‘정치의 실패’이자 ‘민주주의의 실패’로 규정했다.
“우리 사회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갑을관계는 정당하지 못한 사회경제적 권력관계를 용인할 수 있거나 감내할 수 있는 정도까지 개선하지 못한, 혹은 민주화하지 못한 정치의 실패, 민주주의의 실패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합니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운명(運命) 탓으로 믿었던 사회에서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존재방식이나 위치를 운(運)이 근본적으로 규정한다고는 볼 수 있지만, 민주주의 시대는 부당한 사회구조나 권력관계를 다수의 연대를 통해 상당 정도 개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운의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제적 불평등과 다양한 사회적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없는 수준으로 심화하는 것은 특히 민주주의 시대에는 바로 그 실패만큼 정치가 실패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장의 실패, 사회적 관계의 왜곡 혹은 모순은 정치의 직무유기 혹은 자본이나 사회권력에 의해 정치권력이 포획된 결과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갑을관계를 청산할 민주주의는 어떠해야 할까.
김인자 명예교수는 “부자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로빈후드 정신’을 배척한다”며 “그러한 시도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모두의 심리적 욕구 충족 경험을 할 수 없게 한다”고 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더욱 황폐하게 하여 결국에는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지나간 인류사회 속에서 그런 시도들이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공산주의, 권력의 싸움, 전쟁, 질투, 미움, 모두 부와 힘을 더 뺏고 가지고 싶어서 비롯된 것들일 것입니다. 뺏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협동과 나눔의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인간적이고 성공가능성이 큰 길일 것입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옆으로만 기어다니는 게들을 상자 속에 넣었을 때 게들은 서로를 잡아끌어 내리는 속성 때문에 상자 밖으로 한 마리도 못 나온다고 해요. 이는 가족이나 집단끼리 서로 격려와 지지를 해주어야 함께 발전한다는 뜻이지요. 흑고래들은 아무리 멀리 가족 고래가 있어도 서로 상대방의 노래를 알아들을 수 있고, 또 다른 고래가 노래할 때도 방해하지 않는다고 해요. 좋은 관계는 의사소통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경청(傾聽)입니다.”⊙
불공평이나 불평등을 논의하기 위해 서구의 마르크시즘이나 종속·지배이론을 빌려올 생각은 없다. 모르긴 해도 당대(當代)에 사는 누구나 자신이 불공정하고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여길지 모른다. 불평등(양극화)은 21세기 자본주의 국가가 안는 공통된 모순이지만, 좁게는 한국적 현상으로 징후를 해석할 수도 있다. 바로 ‘갑을(甲乙)관계’에서다.
‘갑과 을’은 계약당사자를 나타내는 한국식 법률용어지만 지금은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상징한다. 갑은 상대적으로 권력과 자리의 윗부분, 을은 갑 아래에 있는 이들을 말한다. 그러나 대기업 임원의 KAL 여승무원 폭행사건이 터지고 남양유업 사태가 이어지면서 ‘꿈틀한 을’의 반란이 활화산(活火山)처럼 번지고 있다. 덩달아 정치권도 불평등한 갑을 구조를 완화할 수단을 마련한다며 부산하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6월 5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갑을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대통령과 여야 지도자, 경제주체들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타협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김 대표는 “경제권력으로부터 불이익을 강요당하는 을의 입장에 설 것”이라며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처리도 약속했다.
공포를 매개로 한 上下관계
법으로 갑을의 복잡한 불편관계를 해소할 수 있을까. 학계에서는 갑을에 담긴 한국적 상하관계, 관존민비(官尊民卑)식 승자독식(勝者獨食)의 뿌리깊은 ‘공포(恐怖)’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갑을의 부조리를 풀 수 없다고 말한다.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한국사회는 무수한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申壬癸)…’의 구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엉켜 있다. 기자는 한국인의 생각 속에 담긴 갑을의 심리,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갑을의 역사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서울대 이부영(李符永) 명예교수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관찰되는 사회 병폐로 형식주의적 완전무결주의(완전하게 보이기 위한 완전성), 획일주의, 경직된 관료주의, 공포를 매개로 한 상하관계를 들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의욕상실, 안일 무사, 책임 회피, 불신, 거짓말, 체면 유지에 급급한 임시변통이라는 윤리적 문제성을 제고하고 있다”고 했다.(《한국인 성격의 심리학적 고찰》 참조)
상하관계를 갑을관계로 치환하고 ‘공포’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자. 상하 혹은 갑을은 어느 가족, 사회에서나 존재한다.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편이다. 어려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엄정한 상하의 질서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구성원 간 갈등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상하의 문제가 원인이다. 누가 윗사람이고 누가 아랫사람인지 상하관계가 모호하면 불필요한 갈등이 생긴다. 오죽하면 한 살이라도 나이 먹은 것을 증명하기 위해 “민증(주민등록증)부터 까자”라는 말이 나왔을까.
상하관계가 획일적이 되면 그 조직이나 구성원 간 관계는 공포 그 자체가 된다.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과 상관없이, 출생에 의해 정해지는 적서(嫡庶)와 반상(班常)의 대조적인 인생전망’(성균관대 김비환 교수)은 폐쇄적 갑을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같은 경직된 신분제의 정신적 틀이 상하, 갑을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한국인의 의식 속에 내재화시킨 것은 아닐까.
상(甲)이 하(乙)에 윽박지르거나 고함을 쳐도, 부당한 요구(거래)를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하(乙)를 얕잡아 보고 불평등을 강요하는 상(甲)의 심리는 쉽게 학습(전염)돼, 하(乙)는 또 다른 하(丙)에게, 또 다른 하(丙)는 또또 다른 하(丁) 등에게 고스란히 전수된다. 경북대 철학과 신오현(申午鉉) 명예교수의 《한국인의 윤리관》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충·효·열(烈)과 같은 희생정신은 마조히즘에 가까울 정도로, 그리고 하급자, 약세(弱勢)자, 천(賤)신분에 대해서는 사디즘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악착스럽게 가혹하다.…>
혈연(血緣)·학연(學緣)·지연(地緣)이 엉킨 한국사회에서는 상사나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 없으면서도 비굴하게 굽실대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서양과 같은 횡적(橫的)인 수평관계가 아니라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종적(縱的) 서열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요구하는 관행이 갑을관계에서 재현(再現)된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甲 중의 甲’
한국에는 ‘갑 중의 갑’, ‘슈퍼 울트라 갑’이 있다. 권력에서는 국회의원, 재계는 삼성그룹, 학계는 서울대가 갑을 연쇄고리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국회의원은 모든 정부부처의 예산과 인사를 감시한다. 국회 회기 중에는 범법행위를 해도 잡아가기 어렵다. 관료(장차관)를 마음대로 부를 수 있고 예사로 호통치고 훈계할 수 있다.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에서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사정(司正)의 권능을 지닌다. 삼성(사진: 재계의 갑인 삼성전자 본사 건물)은 재계의 왕이다. 한국경제에 삼성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면서 ‘대한민국=삼성공화국’이란 말이 회자한다. 10년 전인 1993년 29조원이었던 그룹 전체 매출액은 2012년 380조원으로 13배로 늘었다. 국내 기업 최초로 작년 ‘200조원 매출-20조원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월간조선》이 2005년에 보도한 ‘삼성 X파일’로 삼성이 정·관계에 그동안 미쳐온 부정적인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학계의 울트라 갑은 서울대다. 한국인 부모라면 자식을 반드시 대학에 진학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목표대학을 서울대로 정한다. 서울대를 나와야 성공하는 삶이라고 여긴다. 지난 3월 13일 현재, 정부 차관급 이상 37명과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 52명, 국가정보원장·금융위원장 등 권력기관장 2명을 포함한 91명 중 33명(36.3%)이 서울대 출신. 성균관대가 10명(10.9%)으로 2위를 차지했다. 어쩌면 서울대는 병리(病理)현상의 하나일지 모른다. 한국인은 서울대에 못 갔기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심지어 서울대에 입학한 사람도 법대(로스쿨이 생기면서 지금은 신입생을 뽑지 않는다) ·의대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열등감에 빠진다. 서울대 출신이 일을 못 하면 ‘이름값 못 한다’고 손가락질하고, 직장이라도 잃으면 ‘서울대 백수’라고 비꼰다. 그러니 서울대는 한국인에게 부러움과 동시에 질시의 대상이다. |
아랫사람에게 극단적으로 엄하고 가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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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권익위는 5월 6일 박근혜 정부의 새로운 국민권익위 비전(‘국민권익 보호,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겠다’)을 선정하고 비전 선포식을 개최했다. |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시어머니 며느리 적 모른다’는 게 한국인입니다. 이는 거창하게 사회정의니 공정성이니 하는 거대 담론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쉽게 모순을 설명할 수 있어요. 저는 도덕의 기본은 역지사지(易地思之)에 있다고 봅니다. 칸트의 ‘보편화’ 가능성을 들먹이지 않아도, 기독교의 황금률(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유교의 은백률(네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등은 도덕의 기본 발상입니다. 아동심리학자 피아제(Piaget)에 따르면 6~7세가 되면 역지사지를 이해할 수 있어 도덕교육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그런 식으로 따지면 도덕지수가 10세 미만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상하와 갑을 간 질서를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잔인하고 탐욕스런 갑의 ‘승자독식’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비행기 비즈니스클래스에 탄 한 대기업 계열사 상무가 ‘라면을 제대로 못 끓인다’며 항공 승무원을 폭행한 사건, 제빵회사 회장이 호텔 도어맨 뺨을 지갑으로 때리거나 남양유업 직원이 대리점 주인에게 폭언을 퍼부은 일이 갑의 당연한 권리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갑을의 부조리한 관계를 한국적 현상이라 가정할 때,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권위와 질서를 강조하는 고차원적 유교이념과 양반 중심의 관료사회가 내포한 관존민비식 뿌리깊은 공포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한국 역사에서 갑의 권능은 어느 정도였을까. 조선시대 대표 갑인 양반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조선 후기 사회모순을 직시했던 성호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을 연구해 《성호, 세상을 논하다》를 펴낸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姜明官) 교수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남긴 문집을 보라. 위로 고관대작부터 아래로 벼슬 없는 유생까지 글줄깨나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만들어주자고 말한다”며 “하지만 단 한 가지도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다”고 했다. 을(백성)의 마음속에 갑(양반과 관료)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게 틀림없다.
강 교수는 “부정직하고 부패한 자가 출세하고 양심을 지키고 올곧게 사는 사람이 궁핍한 것은 지금도 똑같지 않은가. 부패를 만들어내는 사회구조를 개혁하지 않으면, 부패한 인간들을 척결하지 않으면 한국사회는 가망이 없다”며 “부패로 패망한 조선이 그 선례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다음은 강 교수가 번역한 이익 선생의 《성호사설》 중 ‘청렴과 탐오’의 한 부분이다.
<…이제 내가 본 바를 적어보겠다. 우리 마을에 높은 벼슬을 지내고 청백리로 뽑힌 분이 있었다. 그분은 청렴했기에 가난했고, 가난했기에 자손이 살던 곳을 떠나 떠돌게 되었다. 게다가 사사로운 이익의 길을 뚫지 못해 백여 년이 지나도록 박한 녹봉을 받는 기회도 가질 수 없었고 거의 모두가 굶주려 도랑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중략)… 저 대소 관원을 한번 보라. 누구를 막론하고 집은 높고 노비는 피둥피둥 살이 쪄 있다. 하지만 한 사람도 법에 걸려 죽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民本과 암행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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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공신으로 민본(民本)사상을 토대로 조선의 이념적 토대를 만들었다. |
조선은 그러나 민본(民本)의 나라였다. 왕이 선비들이 올리는 상소문이 아니라 궁 밖으로 행차해 격쟁(擊錚·징을 울리며 나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을 통해 백성의 소리를 들었다.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한영우(韓永愚) 원장은 “규장각에는 격쟁의 내용을 기록한 글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격쟁은 왕이 양반을 넘어 민에 다가가려는 많은 변화의 일례에 불과했다”고 했다. 그는 또 “조선은 당시 ‘백성을 위하여(for the people)’의 단계에서 한발 나아가 ‘백성의(of the people)’의 단계에까지 도달했다”며 “단지 ‘백성에 의한(by the people)’ 단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인 서울대 국문학과 조동일(趙東一) 명예교수도 같은 생각이다.
“민본의 시대에는 한국이 유럽보다 앞서고, 민주 시대에 들어서는 것은 늦었으나 서양이 아닌 곳 가운데는 우리나라가 가장 앞섰습니다.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민본사상을 정립해 조선왕조 설계의 기본으로 삼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도전은 제거됐으나 민본의 설계는 그대로 남아 세종이 실행에 앞장섰습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15세기 유럽을 포함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조선왕조와 같이 민본을 기초로 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근대 유럽과 견주어 근대 이전의 한국을 매도하는 것은 한국을 몰라 유럽 추종에서 벗어나지 못한 얄팍한 지식인의 자기비하이고 자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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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행어사는 조선 중종 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관료의 횡포를 막는 수단으로 400여 년간 줄곧 파견됐다. 연극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암행어사로 출두해 변학도를 꾸짖는 장면. |
어사의 역할은 지방관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에 있었다. 이미 처리한 민·형사 소송을 재심하는 것도 어사의 주된 업무였다. 그러나 암행어사로 파견된다는 것은 죽을 각오가 필요했다. 심 교수는 “탐관오리들의 혼백을 빼놓는 추상같은 암행어사도 임무 수행 과정에서 고초를 겪었다. 해진 도포와 망가진 갓, 변변한 여비도 없이 암행 길에 올라 좁디좁은 주막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은 다반사였다”고 했다.
암행어사는 명령을 받은 그날 출발이 원칙이었다. 역마를 타고 한두 명의 하급관리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수령의 탐오(貪汚)를 알기 위해 폐의파립(敝衣破笠·남루한 옷과 찢어진 갓)으로 변장하고 풍찬노숙(風餐露宿)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심 교수는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박내겸이 쓴 《서수일기(西繡日記)》에 따르면 4개월여 걸친 업무 수행 기간 박내겸은 하루 보통 70리에서 90리를 이동했고, 말을 타는 경우가 많았지만, 신분을 숨기려고 걸어다니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고 했다.
| 대한민국 대표 ‘갑’(관료)의 부패 수준 현재의 한국 관료사회의 부패는 어느 정도일까. 정부가 한국행정학회에 용역의뢰해 작성한 〈부패방지 추진 정책 성과 및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동안 국민권익위원회(부패방지위, 국가청렴위의 後身) ‘부패신고센터’에 접수된 신고건수는 모두 2만2102건. 월평균 186건이 신고됐다. 중앙행정기관 및 소속기관이 가장 많은 7382건이다. 이 가운데 조사기관에 이첩한 사건은 10년간 822건이었다. 내부신고는 어느 정도일까. 2002년부터 10년 동안 각 기관에 접수돼 부패행위 조사기관에 이첩한 822건 중 내부신고는 44.5%(366건)로 집계됐다. 이첩 사건 중 부패혐의가 적발된 총 541건을 조사해 이 가운데 1641명을 기소하고, 1050명을 징계, 38명을 고발 및 의원면직하거나 사직 처리했다. 기관 주의는 107건, 제도개선 38건이었으며 추징·환수액은 1803억원이었다. 책임연구를 맡았던 한국방송대 행정학과 윤태범(尹泰範) 교수는 “부패공직자에 대한 사면이나 감형을 줄여서 엄격한 법 적용이 가능하도록 하고 특히 중립적이고 독립적 입장에서 권력형 비리를 수사할 수 있는 전담부서 설치를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부패방지기본계획(2002년)에는 고위공무원의 사면 및 복권에 관한 기준만 제시됐을 뿐, 부패행위자에 대한 형사처벌의 강도와 구체적 양형 기준, 그리고 전담부서에 관한 로드맵은 제시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형사정책연구회의 판례분석 결과, 1981~1999년 사이 1급 이상(국회의원 포함) 고위 공직자 부패행위자의 41.4%가 사면, 38.4%가 복권되었다. 윤 교수는 “2002년까지 공무원의 뇌물죄의 최종심은 대부분 집행유예에 그치고 있으며 적절한 양형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
불합리한 갑에 을이 수긍하는 심리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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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리 밀그램 교수의 전기충격기를 통한 ‘권위의 복종’ 실험 포스터. |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였던 밀그램은 1963년 전기충격기를 통한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를 연구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먼저 밀그램은 지역 신문에 실험지원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고 ‘교사 역할’ 피험자를 다수 선발했다. 교사 피험자는 가벼운 충격(15볼트)부터 위험한 감전(450볼트)까지 다양하게 배열된 전기충격기를 조작했고, ‘학생 역할’을 맡은 피험자에게 단어 짝짓기 시험을 치게 해 틀릴 경우 벌로 전기충격을 주었다.
만약 교사 피험자가 전기충격기 사용을 머뭇거릴 경우, 밀그램은 계속 전기충격기를 쓸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이 실험의 관심은 두 가지로 모였는데, ‘단어 짝짓기를 못한 학생 피험자에게 가하는 전기충격(볼트)의 정도’와 ‘얼마나 많은 학생 피험자가 최대치(450볼트)의 전기충격을 받을까’였다. 그러나 밀그램은 교사 피험자가 450볼트까지 전력을 올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많아 봤자 120볼트 정도지, 450볼트는 거의 감전 수준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과학계 전체를 놀라게 했다. 교사 피험자의 62.5%가 실험자의 명령에 끝까지 복종했고, 그중 3분의 1 정도가 학생에게 450볼트까지 충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실험의 평균치도 무려 350볼트였다. 밀그램의 전기충격 요구가 부당했지만, 교사 역할 피험자는 그 부당한 요구를 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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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과 의사 찰스 호플링의 간호사에 대한 ‘권위 복종’ 실험 장면. |
간호사는 ‘하우스’라는 이름의 의사를 전혀 알지 못했고, 더욱이 병원 규칙상 전화통화로 처방을 내리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 있었다. 또 환자에게 투약도록 명령받은 정체불명의 약물은 용기 겉면에 ‘한 번에 10mg 이상 처방하지 못하도록’ 적혀 있었다.
호플링은 이 상황에서 간호사들이 의사(하우스)의 위험한 지시에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주시했다.
결과는 밀그램의 실험보다 충격적이었다. 22명의 간호사 중 무려 21명이 의사 명령에 따랐다. 물론 환자에게 전달된 약물은 무해한 용액으로 사전에 바꿔치기 되어 있었다.
이 실험에 응한 사람들은 왜 위험한 의사 지시에 복종한 것일까.
갑의 권위를 을은 학습으로 내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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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리 밀그램 예일대 교수. |
이럴 경우 행위의 주체에 자아(自我)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래서 을은 갑의 지시에 따른 행동에 전혀 책임감을 못 느낀다. 예컨대 나치 복장이나 인민복을 입고 양민을 죄책감 없이 살인할 수 있는 까닭도 이와 같다.
서강대 심리학과 김인자(金仁子) 명예교수는 “대리자(실험자)의 뜻을 집행자(교사, 간호사)가 따르기 위해서는 그 명령이 합법적이라고 인정받을 때만 가능하다고 믿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며 따른다”며 “을은 갑이 부당하다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잘못된 룰의 잘못된 갑을관계를 막는 길은 ‘무시무시한 게임’을 중단시키는 것밖에 없다. 부조리한 갑을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을이 일어나야 한다. 갑이 스스로 변하기를 기대하기보다 을이 먼저 갑과의 부당한 관계를 끊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하지만 을의 반란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대 철학과 황경식 명예교수의 말이다.
“한국사회는 약속이 지켜지는 계약사회의 훈련이 전혀 되지 않은 듯합니다. 공정(fairness)은 계약사회의 주요 덕목이 아니겠어요? 을이 기죽지 말고 계속 저항하고 고발하고 클레임을 제기해야 개선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을의 희생이 다소 요구될 겁니다. 성경에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義人) 몇 명만 있었어도 그렇게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을이 순종(順從)하면 갑의 횡포는 더욱 강고해지겠지요. 을의 순교(殉敎)를 통해서만 사소한 변화를 보이는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회(responsive society)’라 하기 어렵다고 봐요. 정의사회로의 길이 요원한 듯 보여요.”
김인자 교수의 말이다.
“자기 자신의 생각만 옳고 상대방은 틀렸으니까 상대방의 이유와 설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잘못된 정보와 추측으로만 판단하고 밀어붙이거나, 다른 이들을 선동해 서로에게 해(害)가 되는 것을 꾸며내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상대방을 비판 공격하는 해결 접근은 놀랍게도 학교 동료끼리, 부모 자식끼리, 상사와 부하끼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이런 것을 선택한다면 모두 파멸할 것입니다.”
김 교수는 또 “부모 자녀와 교사 학생과 그리고 노사관계나 여타의 조직 안에서,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 남의 행동을 비난, 비관, 비교, 잔소리, 벌하기, 매수하기, 핑계 대기를 더 많이 하고, 존중하며 믿고 지지하기, 그리고 경청하기나 협상하기는 거의 할 줄을 모르는 문화 속에서 사는 이가 많다”며 “우리는 달라이 라마 스님 말씀대로 ‘자기 종교는 신념으로, 남의 종교는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라’는 말을 새겨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갑이 을을 존경심으로 대하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갑을관계를 청산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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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유업 영업직원의 대리점주에 대한 폭언 논란 등으로 기업 간 갑을관계 논란이 불거졌다. |
인간관계의 참된 매력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가 지녔다는 것을 인정할 때 생긴다. 갑을관계도 마찬가지다. 갑은 을이 지닌 장점에 주목해서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
간편하고 손쉬운 약자로 여겨선 곤란하다. 을의 가치와 장점을 보지 않는 갑은 외눈박이와 마찬가지다. 한쪽 눈을 감고, 일방의 이익을 강요하면, 을은 고통에 가까운 노력을 하게 되고, 둘 사이 신뢰는 쌓이지 않는다. 이런 관계는 을의 희생으로 이뤄질 뿐 갑의 가치는 결국엔 훼손될 뿐이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김비환 교수는 “서유럽의 근대사는 빈곤한 자들의 좌절과 절망감을 없애줄 수 있는 제도와 도덕성의 구비가 귀족과 평민, 노예라는 운명적인 결정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필수조건임을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한국사회는 다수 빈민의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안전판도 턱없이 모자라며, 사람들이 서로 존엄성을 존중해 주고 보호해 줄 수 있는 관심과 배려의 정신도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아마도 이것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지상과제로 추구했던 성장제일주의 근대화 및 이를 뒷받침했던 경쟁적인 입시제도와 정부의 성장 이데올로기의 확산, 그리고 만연된 물질주의 풍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과 집단의 탐욕과 경쟁심을 부채질함으로써 사회의 양극화를 가속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도 적지 않은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겁니다.”
김 교수는 또 갑을관계를 ‘정치의 실패’이자 ‘민주주의의 실패’로 규정했다.
“우리 사회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갑을관계는 정당하지 못한 사회경제적 권력관계를 용인할 수 있거나 감내할 수 있는 정도까지 개선하지 못한, 혹은 민주화하지 못한 정치의 실패, 민주주의의 실패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합니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운명(運命) 탓으로 믿었던 사회에서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존재방식이나 위치를 운(運)이 근본적으로 규정한다고는 볼 수 있지만, 민주주의 시대는 부당한 사회구조나 권력관계를 다수의 연대를 통해 상당 정도 개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운의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제적 불평등과 다양한 사회적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없는 수준으로 심화하는 것은 특히 민주주의 시대에는 바로 그 실패만큼 정치가 실패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장의 실패, 사회적 관계의 왜곡 혹은 모순은 정치의 직무유기 혹은 자본이나 사회권력에 의해 정치권력이 포획된 결과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갑을관계를 청산할 민주주의는 어떠해야 할까.
김인자 명예교수는 “부자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로빈후드 정신’을 배척한다”며 “그러한 시도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모두의 심리적 욕구 충족 경험을 할 수 없게 한다”고 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더욱 황폐하게 하여 결국에는 서로 미워하고 싸우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지나간 인류사회 속에서 그런 시도들이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공산주의, 권력의 싸움, 전쟁, 질투, 미움, 모두 부와 힘을 더 뺏고 가지고 싶어서 비롯된 것들일 것입니다. 뺏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협동과 나눔의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인간적이고 성공가능성이 큰 길일 것입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옆으로만 기어다니는 게들을 상자 속에 넣었을 때 게들은 서로를 잡아끌어 내리는 속성 때문에 상자 밖으로 한 마리도 못 나온다고 해요. 이는 가족이나 집단끼리 서로 격려와 지지를 해주어야 함께 발전한다는 뜻이지요. 흑고래들은 아무리 멀리 가족 고래가 있어도 서로 상대방의 노래를 알아들을 수 있고, 또 다른 고래가 노래할 때도 방해하지 않는다고 해요. 좋은 관계는 의사소통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경청(傾聽)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