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 ⑨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김현철 사건 (3) : 월간조선

한보 ‘정치인리스트’에 대한 검찰 수사로 국민의 눈길이 연일 서초동 대검찰청 ‘현관’에 쏠리던 1997년 4월 16일. 아침 일찍 김찬진(金贊鎭) 변호사가 대검 중수부장실로 전화를 걸어 왔다. 내게는 대학 및 검찰 선배인 그는 일찍이 검사 시절 능력을 인정받아 경제기획원으로 자리를 옮긴 경력의 인물이다. 그 무렵엔 여당인 신한국당의 전국구 승계후보 상위 순번에 올라 있기도 했다.

―심 부장, 그래 얼마나 바빠요. 나 김찬진이오.

“선배님께서 웬일이십니까.”

―이거 뭐 아무 것도 도와주지도 못하고…. 겸사겸사 오늘 얼굴이나 좀 볼까 해서….

“저도 뵙고 싶지만 원체 쫓겨서, 괜찮으시면 전화로 말씀하셔도….”

―아무래도 전화보다는…. 김 의장 일이라….

김수한(金守漢) 국회의장의 사자(使者)로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솔깃했다. 당시 나와 휘하 검사들은 도대체 김 의장을 어떻게 조사해야 할까, 방법을 놓고 고민하던 터였다.

국회의장은 대한민국의 입법·사법·행정 3부의 수장(首長)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런 국회의장을 검찰이 피의자로 소환, 조사한다는 것은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세상 사람이 다 쳐다보는 가운데 불러 놓고 아무런 결과도 내놓지 못한다면 검찰은 비난과 비웃음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당장 소환이나 실제 조사 과정에서 예우 문제부터 이래저래 신중해야 한다. 어떤 대목에서든 검찰이 헛발을 디디거나 실수라도 한다면…. 안 그래도 이미 한보 수사로 검찰에 몰리면서 잔뜩 독이 올라 있던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장을 뭘로 보는 거냐, 나라의 수치다, 국회 모독” 운운하며 여지없이 검찰을 되받아칠 것이었다.

국회의장 수사의 어려움

더욱이 김 의장은 당시 김명윤(金命潤) 신한국당 고문 등과 더불어 정계의 ‘어른’이자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절친한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여기다 하필이면 4월 10일부터 15일 사이 우리 국회가 국제의회연맹(IPU) 총회를 개최한 터였다. 그처럼 중대한 국제행사를 치르자마자 주최국 국회의 수장인 국회의장이 범법(犯法)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는다? 나라 체면이 어찌 될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특히 우리 검찰을 곤혹스럽게 했던 점은 김 의장이 한보로부터(그것이 정치후원금이든 뇌물이든) 돈을 받은 것이 그가 재야(在野) 인사이던 1992년 3월이란 점이었다. 그러니 설사 뇌물을 받았다 해도 이미 그것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예 조사대상에서 제외할 수는 없었다. 앞서 4월 10일 내가 조사하겠다고 밝힌 33명의 정치인 가운데는 김 의장도 분명히 포함돼 있었다. 일단 명단에 올라 있으니 조사를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의장실에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는 건네 놓은 상태였다. 그래 놓고 시간은 휙휙 지나가는데 과연 어디서 어떻게 조사할 것인가, 솔직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이었다. 그런 터에 저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으니 얼핏 반가운 마음도 살짝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 변호사에게 “얼른 오시라” 할 수는 없었다. 내 방문 앞에는 자기들 표현으로 ‘뻗치기’라 해서 기자들이 24시간 말뚝처럼 서 있는 상황. 그러면서 내가 총장실을 가거나 식당을 가거나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따라붙는다. 그런 터에 김 변호사가, 그것도 정치인 수사가 한창이던 민감한 때 나를 찾아온다? 기자들이 그 정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방법이야 어떻게 됐든 나는 김 변호사에게 “일단 오후 3시에 밖에서 뵙자”고 했다.

약속시간이 되어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 방을 나와서는 기자들 눈에 띄지 않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직원들만 출입할 수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얼마 후 미리 약속한 대로 여직원이 내 윗옷을 들고 그리로 왔다. 그러고는 시커멓게 유리가 코팅된 내 차를 타고 청사를 빠져나와 약속장소인 인근 팔레스호텔로 향했다. 오후 3시, 호텔 3층의 칵테일 바(Cocktail bar)에 들어서는데 저 앞에 평소 낯익은 기자가 앉아 있었다. 다행히 기자는 나를 못 보았다.

“의장께서 5000만원 받은 건 인정하셔야…”

아이고 놀라라, 휙 뒤돌아 호텔을 나서면서 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약속을 잡았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국립중앙도서관 앞 길가에 내 차를 세웠고 얼마 뒤 김 변호사가 그 차에 올라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뒷좌석에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의장께서 검찰이 정말 큰일을 한다고 꼭 인사를 전해 달랍니다. 그런데 의장 본인은 한보 쪽에서 뭘 받은 적이 없다는데…. 언제였는지 한일 국회의원들 모임 있을 때 어디선가 2000만원을 주기는 했는데 그것도 받았는지 말았는지 기억이 어렴풋하다시고…. 뭐 어디서든 문제가 있다 해서 조사를 받는다면 아무래도 검찰에 나가는 건 무리가 있고, 다른 데서 조사받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시고….”

이 2000만원 운운하는 사실은 나로서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오랜 정치생활 동안 후원금 등 이래저래 받은 봉투가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기억에 없는 건지는 모를 일이다. 좌우지간 저쪽에서는 지금 도대체 무슨 일로 조사를 받는 것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만큼 우리 검찰 수사팀의 보안 상황은 철통 같았다.

“한보 정태수 쪽에서 5000만원을 주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한 번 조사받는 절차는 있어야 할 겁니다. 조사받는 장소야 의장님 생각대로 제3의 장소에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 조사에 들어가기 전에 의장께서 꼭 한 가지 해 주실 게 있습니다.”

―5000만원이요? 이건 생소한 이야기 같은데, 뭐 어쨌든….

“정태수로부터 5000만원을 받았다, 자술서(自述書)를 먼저 좀 써 주셔야겠습니다.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뻔한 사실을 놓고 왈가왈부해서 의장께서도 피곤하시면 안 될 테니까요.”

―그러면 뭐 형식적인 조사 절차가 아니라, 아예 시인하라는 얘긴데…. 그건 의장께서도 전혀 원하지 않으실 게요. 꼭 그렇게 해야 하나?

반대 의사가 분명하다. 나는 그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간 ‘정태수 진술조서’를 김 변호사에게 내보였다. 물론 거기에는 정태수 총회장이 김 의장에게 5000만원을, 언제 어디서 주었는지 정황이 잘 나타나 있었다.

準몸통급 정치인 5명 기소

한보그룹 비리 관련 혐의로 검찰에 구속 수감 중이던 국민회의 권노갑 의원이 1997년 2월 17일 구속적부심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찰청에 도착하고 있다.

“이미 돈을 준 쪽에서 이렇게 명백하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장님 쪽에서도 시인하시지 않으면 피차 더 골치만 아플 겝니다. (시인하는)자술서를 쓰지 않고 (의장께서) 돈 받은 적 없다고 끝내 부인하시면 검찰로서는 언론의 몰매에 피곤하고 해서 부득이 의장님을 이번에는 검찰청으로 정식 소환해 결국 씨름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 없었는지 김 변호사는 총총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저쪽에서 예의 자술서를 써서 검찰에 보내 왔다. 그것을 들고 박상길(朴相吉) 중수1과장과 홍만표(洪滿杓) 검사가 국회의장 공관을 찾아가 조사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국회의장에 대한 조사는 조용히 마무리됐다. 국회의장의 한보 5000만원 수수 사실을 확인한 대목은, 앞서 4월 10일 시작된 한보 33명 정치인리스트 수사의 절정이었다.

이제야 밝히는 것이지만, 한보 정치인리스트 수사는 실로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성사(?)됐다.

앞서 한보 제1차 수사팀은 한보의 부도발표 24일 만에 후닥닥 수사를 일단락지었다. 이때 기소된 9명 가운데 정계 인사는 넓게 보아 김우석·홍인길·황병태·정재철·권노갑 의원 등이었다. 몸통까지는 아니라도 ‘준(準)몸통’은 될 만한 정치권 인사들 가운데 단지 다섯 명만을―국가를 뒤흔든 5조원대 사건에서―법정에 세운 것이다. 과연 누가 이 같은 처사를 납득할 수 있었을까.

민심은 들끓었다. 그러나 검찰은 요지부동, 정치인 혹은 정치권에 대한 더 이상의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내가 2차 수사를 맡은 후에도 여론은 끊임없이 ‘보다 더 큰 몸통을 밝혀 내라’며 김현철씨와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를 촉구했다.

앞서 가는 언론보도에 속앓이

이상수 의원이 1997년 4월 7일 서울구치소에서 열린 한보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정태수 한보 총회장을 추궁하고 있다.

언론은 연일 ‘정태수리스트 수사 방침’ ‘한보 정치인 50여 명 수사 임박’ ‘대가성 드러나면 사법처리’ 등등 하나같이 익명의 ‘검찰 관계자’를 소스로 한 보도들을 내놓았다. 심지어 돈 받은 정치인이 누구누구 운운하며 이니셜이나 실명이 거론되기까지 했다. 엉뚱하게 거명되어 피해를 보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검찰이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내놓지 않자 추측성, 소설성 기사들이 난무한 것이다.

그런 기사들을 매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던 나와 수사팀은 착잡했다. 사실 검찰이 당장 데려다 조사해야 할 정치인의 이름과 대충의 혐의는 일찌감치 나와 있었다. 앞서 1차 수사 때 정 총회장이 돈을 준 정치인들의 이름을 이미 다 털어놓은 터였다. 전·현직 통틀어 모두 33명, 현역 의원만 20명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검찰이 머뭇거린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솔직히 검찰로서는 정치인들에게 돈이 오간 사실을 입증하고 사법처리해야 하는 수사가 가장 부담스럽다. 어찌어찌 돈을 준 쪽의 진술을 받아낸다 해도 받은 쪽에서는 받은 적 없다고 잡아떼거나, 정치후원금이라고 주장하게 마련이다. 이런 사건에는 십중팔구 증거도 없다. 나중에 실제로 법원에서 정치자금 쪽으로 결론이 나면 설사 돈이 오갔다 해도 처벌할 수 없다. 당시 정치자금규제법에는 정치자금의 수수를 금지하는 규정만 있을 뿐 처벌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치인 한두 명을 수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다. 수사결과가 흐지부지 ‘빈손’일 때 비난과 비웃음은 여느 사건 때보다 훨씬 더 혹독하다. 한두 명에 대한 수사도 그러한데 정치인 수십 명을 한꺼번에? 설사 천지를 뒤흔드는 검사가 있다 해도 그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듣기 좋은 말로 둘러대자면, 한보 정치인 수사를 놓고 검찰로서는 ‘신중하고 신중하고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與野共同戰線 형성, 검찰에 반발

둘째, 수사결과에 관계없이 그것이 자칫 여야 간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했다. 누구누구가 돈을 받았다더라―그런 사실이 드러날 경우 설사 그것이 처벌대상 아닌 정치자금이든 혹은 실제로 범죄성 뇌물이든 간에 여지없이 상대방의 정치적 공격 호재가 될 것이었다.

세 번째로,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일 수 있었는데, 정치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검찰이 신중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주장과 이에 부응(?)하려는 검찰 쪽 분위기다. 당장 검찰 상부의 분위기가 “(딱 떨어지는 증거 없이) 정태수의 입(주장)에만 의존하는 수사는 안 된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 돈 받은 것은 어떤 대가성이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뇌물수수가 아닌 정치자금규제법을 적용해야 한다. 그럴 경우 처벌규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위에서부터 “정치인들이 한보에서 설사 돈을 받았다 해도 그것은 범죄 구성요건이 안된다”며 정치인 수사를 반대한 것이다.

물론 정치인들이 한보로부터 돈을 받았을 경우, 그것이 과연 순수한 정치자금이냐 혹은 대가성 있는 뇌물이냐 하는 것은 조사해 보고 나서 판단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검찰 윗선은 아예 정치권으로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어떤 이유에선지 그 속내는 알 수 없지만) 막았다.

당시 그것은 검찰 수뇌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청와대는 물론 집권여당인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까지, 정치인에 대한 공개수사를 원치 않는 기류가 지배하고 있었다. 음(陰)으로 양(陽)으로 내게도 그런 기류가 확연히 전달됐다.

표면상 이유야 “정치자금 문제는 현행법상 처벌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내는 말할 것도 없이 한보 정치인리스트가 공개되는 것 자체가 정치권 전체에 심각한 타격과 상처를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사를 반대하는 ‘그들’은 그저 1차 수사 때처럼 어떻게든 2차 수사도 조기 종결하고 정치인이든 김현철씨든 일단 사법처리 불발 또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사태를 끝내는 것이 최선책이란 분위기였다.

총장, 정치인 수사에 소극적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미 정 총회장의 진술(정확하게는 자술 메모지)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팀으로서는 상부에 정치인 수사 이야기를 꺼내기조차 어려웠다. 나 역시 중수부장이 된 뒤 한두 차례 정치인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슬쩍 피력했으나 다만 ‘절대불가 의지’를 확인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검찰 내부에서뿐 아니라 ‘바깥’에 대해서도 김기수 총장의 그런 의지는 확고했다. 4월 4일 국회 한보 특별위원회의 대검에 대한 국정조사 때였다.

이날 의원들은 김 총장을 상대로 정치권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되는지 따져 묻는 한편 항간에 소문으로 떠돌던 ‘정태수리스트’도 공개하라고 몰아붙이듯 요구했다. 검찰이 과연 누구를 지목하고 있는지, 칼끝을 마주보고 있는 당사자인 의원들로서는 대단히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검찰 내부에서 정치인 수사를 막고 있는 자신을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윽박지르는 국회의원들이 김 총장으로서는 적잖이 야속하기도 했을 터였다.

어쨌든 이 자리에서 김 총장은 “(정 총회장의 진술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을 해 봐서 내용이 맞는 사람만 공개하되 반드시 확인 절차를 거치겠다”는 알듯 모를듯한 대답을 내놨다. 그러면서 “확인 작업을 거쳐 옳다고 판단되면 공개하겠지만, 이 경우라도 국회 윤리위원회에 통지하는 방안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굳이 덧붙였다. 정치인 수사에 대해서는 사실상 생각이 없다는 뜻을 에둘러 말한 것이었다.

이처럼 총장의 뜻이 너무도 명백한 이상 수사팀은 속수무책 애만 끓이고 있었다. 성역 없이 모든 것을 파헤쳐야 한다는 대검 7층의 수사팀과 수사 확대는 곤란하다는 8층 수뇌부의 입장이 맞서 정치인 수사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은 또 다시 나와 검찰을 도왔다. 뜻밖에도 다름 아닌 정 총회장이 정치인 수사의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 그동안 마스크를 쓴 채 내내 입을 봉하고 있던 정 총회장이 4월 7일 열린 국회 청문회를 통해 “여야 정치인들에게 돈을 주었다”고 먼저 치고 나온 것이다.

정태수 총회장의 고마운(?) 도발

김덕룡 의원이 1997년 4월 12일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은 후 귀가하고 있다.

그 발단은 우연한 것이었다. 이날 신한국당 맹형규(孟亨奎) 의원의 질의가 계기였다. 맹 의원은 정 총회장을 향해 “김덕룡(金德龍) 의원에게 돈을 준 사실이 있습니까? 없죠? 없죠?”라며 역(逆)질문을 던졌다.

아마 정 총회장이 이전까지 노상 그랬던 것처럼 “돈을 준 사실이 없다”라거나 “모른다”라거나 침묵하는 식으로 결국 답변을 회피할 것으로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 역질문을 통해 자기 당 실세이던 김덕룡 의원은 돈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을 대변하려 했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터졌다. 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정 총회장이 “돈을 준 사실이 있다”고 답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연합의 김용환(金龍煥) 의원, 새정치국민회의의 김상현(金相賢) 의원에게도 돈을 주었다”고 묻지 않은 이들의 이름까지 터뜨렸다.

김덕룡·김상현·김용환. 이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 각 당의 실세 중 실세들이었다. 검찰에 의해 전 재산을 압류당하고 사랑하는 아들(보근씨)까지 구속된 상황에, 그렇게 몰릴 대로 몰렸는데 아무도 손을 써 주지 않는 정치권에 대해 정 총회장이 섭섭함의 역공(?)을 취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정말 모든 것을 털어놓기 전에 어서 정치권에서 액션을 취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을까.

그 속내가 무엇이든 각 당의 얼굴 격인 세 사람에게 돈을 주었다는 정 총회장의 이날 진술은 당장 언론의 톱기사가 됐다. 세 명의 김 의원은 하나같이 펄쩍펄쩍 뛰며 부인했지만 여론은 들끓었다.

내 사무실에 앉아 TV로 청문회를 지켜보던 나는 정 총회장의 폭탄발언 장면에 깜짝 놀랐다. “저자가 뭔가 지금 심경의 변화가 있구나” 싶었다. 즉시 직원들에게 “청문회가 끝나고 나서 정 총회장을 구치소 자기 방에 돌려보내지 말고 곧바로 검찰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오늘 당장 정 총회장을 털어야 한다―. 마음이 급했다.

정태수, 검찰조사 후 다시 입을 닫아

정태수 리스트에 올라 있는 정치인 중 처음으로 김용환 자민련 사무총장이 1997년 4월 11일 저녁 대검청사에 출두하고 있다.

사실 그때까지 검찰이 확보하고 있던 정치인 관련 수사자료는 정 총회장이 1차 수사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술한 내용, 곧 간단한 메모 형식의 ‘자술서’였다. 그것만 가지고는 법정증거로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정 총회장이 심경변화를 보인 오늘 무리가 되더라도‘지체없이 진술조서를 받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입을 닫아 버릴지 모른다’고 직감했던 것이다.

이윽고 정 총회장을 검찰로 데려온 뒤 그날 밤을 새워 집중 심문을 해 나갔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의 심경에 모종의 변화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심문을 맡은 검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에게서는 간간이 정치인들에 대한 원망이 나타났다. “국회의원들은 칼만 안 들었지 내게는 다 강도다. 나는 국회의원에게도 뜯기고, 여기저기에 뜯기고, 언론에도 뜯기기만 한다”고 푸념했다. 또 “검사님도 이다음에 국회의원이 되려면 어쩔 수 없을 거요. 돈 없이 지역구 관리가 되나. 결국 나한테 대롱대롱 (매달려야)하지”라고 여유까지 부렸다.

이처럼 개인적인 이야기가 오갈 만큼, 딱딱하기는커녕 화기애애(?)하다 싶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조사가 진행됐다. 그는 이날 검사의 질문에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정 총회장은 이튿날 새벽까지 자신이 돈을 준 33명의 정치인들과 액수, 심지어 돈을 주고받을 때 정황까지도 진술했다.

서둘러 진술조서를 작성해야 한다던 그날 나의 직감은 들어맞았다. 그렇게 밤새 검찰조사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던 정 총회장은―바로 그날 낮에 속개된 청문회에서는 “몸이 아파서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야 정치 실세들에게 돈을 주었다고 폭로한 지 하루 만에 또다시 실어증(失語症)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은행장은 놔두고 정치인 수사 합시다”

이날 하룻밤 동안의 조사로 우리 수사팀은 한보 리스트에 올라 있던 정치인들의 혐의에 대해 90% 이상 수사를 마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치인들에 대한 본격 수사가 이뤄지기 훨씬 전에 우리는 이미 수사에서 이겨 놓고 있었다. 소위 화투판에서 말하는 ‘꽃놀이패’를 쥔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수사팀 전원에게 정 총회장을 조사한 사실, 또 그것을 통해 검찰이 정치인들에 대한 공식 진술조서를 확보했다는 사실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확실한 무기를 갖고 있었지만 아직 전쟁, 아니 전투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정 총회장의 청문회 돌발발언으로 우리 수사팀은 두 가지 호재를 얻은 셈이 됐다. 하나는 한보 정치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혐의사실을, 그것도 법적 증거력을 가진 진술조서로 확보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검찰 외곽에서 정치인 수사에 대한 여론을 들끓게 했다. 당연히 그 같은 여론은 검찰 내부에서 정치인 수사를 반대하던 수뇌부에게는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한보 관련 은행장들의 배임 수사 여부를 놓고 내가 김 총장과 정면충돌하는 사태가 4월 8일 아침에 벌어진 것이다. 은행장들 수사마저 머뭇거리던 총장에게 “사표를 내라”며 격앙하고는 내 방으로 돌아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은행장 수사도 안 되고 정치인 수사도 안 된다. 이 난국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오후에 대검 차장이 부른다. 용건은 간단하고 선명했다. “은행장들 배임 문제 수사는 일단 보류하고 대신 정치인리스트를 공개하기로 김 총장과 얘기가 됐다”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한보 정치인리스트를 공개하고 수사하라는 여론의 압력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안에서는 내가 은행장들을 배임 혐의로 사법처리하겠다며 김 총장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평소 후덕한 성품의 김 총장으로서는 그런 상황이 몹시도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아마도 정치인리스트 공개는 그런 곤혹스런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김 총장이 어쩔 수 없이 꺼내 든 카드가 아니었을까.

김 총장, “정치인 형사처벌 대상 없다”

어쨌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로서는 솔깃했다. 정치인리스트 공개는 김 총장과 최 차장이 꺼낸 카드로는 꽤 큰 것이었고 내가 바라기도 하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겠노라, 나는 차장실을 되돌아 나왔다.

이튿날인 4월 9일 아침 정례회의, 여전히 서먹서먹한 나와 김 총장 사이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대검차장이 어제 운을 뗐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한보리스트를 공개하면 아무래도 그 파장이 엄청나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것을 그냥 놔둘 수도 없고… 그러니 이제 그쪽으로 (수사)방향을 잡아 봅시다.”

최 차장의 말을 받아 김 총장이 덧붙였다.

“아무래도 은행장들 쪽 문제는 심 부장이 이해를 좀 해서…, 일단은 연기하는 것으로 좀 하자고.”

역시 김 총장에게는 정치인 수사보다는 어떻게든 은행장들 배임 수사를 보류하는 것이 좀 더 급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지금이다 싶어 내가 그 말꼬리를 잡아챘다.

―총장님 생각이 정 그러시면 (정치인)리스트 쪽으로 방향을 틀어 보겠습니다.

그런 내 얘기가 ‘은행장 수사를 보류하겠다’는 대답으로 들렸는지 김 총장은 비로소 안도한다는 표정으로 “리스트? 그쪽 수사야 뭐…. 할 수만 있다면 한번 해 보지 뭐”라고 끝을 얼버무렸다. 확답은 아니었다.

나는 정치인 수사를 얼른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이튿날 아침 10시 기자들에게 공식 브리핑을 통해 “한보 정치인리스트에 올라 있는 33명에 대해 수사하기로 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튿날 김 총장은 또다시 수사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내놨다. 나와 함께 자리한 한 비공식 석상에서 “정치인들에 대한 공개수사를 한다고는 하지만 형사처벌할 대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수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정치자금법 아닌 뇌물수수 쪽이 없게 하라”는 지침(指針)을 내놓은 것이다.

한보 정치인리스트, 거기 올라 있는 33명에 대한 수사는 이처럼 안팎의 역풍을 뚫고 달려야 했다. 공개수사 방침을 언론에 발표하면서 나는 몇 가지 원칙을 부연했다.

거물급 정치인부터 소환

1997년 6월 30일 열린 한보 2차공판에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김상현 국민회의 고문이 입정하고 있다.

“리스트에 올라 있는 정치인 33명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빼놓지 않고 반드시 조사한다. 가급적 전원 소환할 것이며 조사장소는 대검 중수부 조사실이 원칙이다. 해당자들은 결국 검찰(대검)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다만 정치인 자신이 사생활 보호나 인권, 명예 등의 이유로 공개수사를 원치 않는다면 얼굴이 언론에 비치게는 안 하겠다. 기자들이 모르게 비공개로 소환, 조사할 수 있다. 그러나 비공개 조사라 해도 그 결과나 내용은 숨기지 않고 밝힐 것이다.”

그러면서 소속정당별 인원수, 현직 국회의원 여부, 자치단체장 여부 등 신상에 관한 부분도 덧붙여 발표했다. 수사대상이 된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중간에 바뀌거나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내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 것이었다.

그러고는 당장 이튿날부터 정치인들의 검찰 소환 및 조사가 시작됐다. 정 총회장이 공개 거명한 김덕룡·김상현·김용환 의원을 가장 먼저 불렀다. 상대적으로 거물급인 이들 세 사람부터 불러들인 것은 그 어떤 권력이라 해도 좌고우면하지 않는다는 검찰의 단호한 의지와 기세를 보이려는 것이었다. 이어 박종웅(朴鍾雄)·박성범(朴成範)·나오연(羅午淵)·서석재(徐錫宰)·김윤환(金潤煥)·권노갑(權魯甲) 의원 등 중진들, 그리고 원로 정치인인 이중재(李重載) 민주당 상임고문도 검찰에 들어왔다. 앞서 본 것처럼 국회의장에 대해서는 사전 조정을 거쳐 공관 방문조사를 진행했다.

정 총회장의 구체적인 그리고 ‘공식적인 진술’을 통해 우리 수사팀은 이미 소환대상 정치인 개개인에 대한 혐의 사실을 거의 다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과 대면한 뒤 조사 과정 자체는 쉽지 않았다. 검찰이 혐의 내용을 들이밀었을 때 소환된 정치인이 “그렇다”고 순순히 시인하는 경우는 없었다. 일단 부인하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조사실에서는 검사와 정치인 사이에 치열한 기(氣) 싸움과 두뇌 대결이 벌어졌다. 그러나 결국은 정치인 쪽에서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파악하고 있던, 돈이 오간 정황은 실로 구체적이었다. 정 총회장이 그만큼 세세하게 기억해서 이야기를 해 준 덕분이었다.

가령 ▲누구는 호텔 몇 층 객실에서 직접 돈을 건넸다 ▲누구는 그날 돈을 받고 나가다 계단에서 넘어졌다 ▲누구는 자동차 트렁크에 사과박스로 돈을 담아 실어 주었다 ▲누구는 사람을 시켜서 해당 의원의 집에 직접 돈 상자를 배달해 주었다는 식으로, 잡아떼려야 뗄 수 없는 정황들이 잘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한보의 정치자금 제공기준

문정수 부산시장이 1997년 6월 16일 한보사건 1차공판에 출정하고 있다.

나중에 수사결과를 뜯어보면, 한보 쪽에서 정치인들에게 돈을 건넬 때는 일정한 기준(?)을 적용한 것으로 보였다. 여당 실세들에게는 5000만원(1997년 당시 5000만원은 적은 돈이 아니다), 실무 권력을 쥐고 있는 장관급 실세에게는 1억 또는 2억원을 주었다. 야당 쪽에 대해서는 당시 ‘DJ계의 맏형’으로 통하던 권노갑 의원(5000만원) 외에는 아무리 실세라 해도 최대 3000만원을 주었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네거티브한(자신을 윽박지르거나 협박하는) 정치인에게는 괘씸죄를 적용(?)해 오히려 액수가 더 적게 1000만원, 어쩔 수 없을 때는 마지못해 2000만원을 건넸다.

흥미로운 것은 소환대상이 된 정치인들의 거짓말 또는 변명 행태였다. 어떤 이들은 소환되기 전 신문에 이름이 나면 일단 음해다, 음모다 하면서 반발하거나 발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이들일수록 검찰조사 후 귀가할 때는 “돈을 받기는 받았지만…”이라며 군색한 변명을 내놓기 일쑤였다.

어떤 정치인은 “내가 언제 ‘한보로부터 돈을 안 받았다’고 했느냐. ‘정태수로부터 안 받았다’고 했지”라고 해서 빈축을 샀다. 모 의원은 “(정치생활) 30년 간 정도를 걸어온 나의 명예나 정치생명에 심각한 타격을 주려는 불순한 의도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음모설을 제기하며 거센 반발을 보였다. 그러나 검찰조사 과정에서 그의 최측근이 한보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할 말이 없게도 됐다.

당초 내가 천명했던 그대로 33명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조사가 진행됐다. 검찰은 달리고 달려 5월 중순 대가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정치인 8명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1명을 불구속기소했다.

“장관과 총장이 중수부장 통제 못한다”

정치인리스트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수사의 사령관으로서 철저하게 두 가지, 서로 연결된 원칙을 고수했다. 하나는 수사내용의 보안유지, 다른 하나는 외압(外壓)의 차단이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지켜지지 않으면 정치인 수사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소환 대상자의 이름 혹은 혐의내용이 사전에 유출되면 해당 정치인은 당연히 면밀한 ‘준비와 연습’을 하고 검찰조사에 응할 것이다. 수사대상자가 이쪽에서 쥐고 있는 패를 조금이라도 미리 보고 들어오면 수사는 정말 어려워진다. 정치인 공개수사를 발표할 때, 그리고 실제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가 33명의 명단을 결코 한꺼번에 밝히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누가, 언제 검찰에 소환될 것인지조차 알리지 않았다. 그날 소환할 정치인은 바로 그날 아침 언론 브리핑 때 공개했다.

검찰총장과의 아침회의 때 공식 수사보고 외에는 청와대든 국회든 그 어느 곳에도 수사내용을 알리지 않았다. 언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사 어떤 기자가 소환될 정치인의 구체적인 혐의사실을 어디선가 미리 파악해서 질문을 해 와도 나는 결코 그것을 확인해 주지 않았다.

이처럼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 바람에 4월 10일부터 5월 초까지, 한 달 동안 정치는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가 과연 어떤 쪽으로 튈 것인지, 어떤 사태를 몰고 올 것인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던 까닭에 국회는 물론 청와대와 정부도 ‘향후 일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청와대 수석들이 참모회의에서 검찰과 중수부장에 대해 성토 일색이다”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중수부장 정도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지적과 비난이 나온다” 등등 불편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지인 등 ‘안테나’를 통해 속속 전해졌다.

장관이든 총장이든 혹은 나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선의의 피해를 봤을지도 모를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러나 당시 ‘한보 몸통’을 겨냥한 임무를 부여받은 수사팀으로서는 다른 쪽 사정에까지 눈 돌릴 겨를이 없었다.

“소환대상자 안 만난다”

내가 그토록 보안에 신경을 썼던 이유는, 수사내용이 외부에 알려지면 그것은 반드시 외압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정치인 한 사람을 수사한대도 모처 혹은 도처에서 ‘연락’이 오게 마련이다. 하물며 30여 명의 정치인을 피의자 자격으로 검찰에서 조사하는데 외압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전화로 직접, 신문방송 등 미디어를 통해, 지인을 통해, 기자를 통해, 검찰 내부인사를 통해 등등, 그 경로도 다양하다. 그러나 누가 됐든 또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든 나는 외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차단하려 했다.

당장 검찰에 소환되는 인사들과 얼굴조차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정당의 고위인사, 대통령 측근, 정치권 실세 등 거물급 인사들은 그 지위나 ‘얼굴’ 자체가 외압이 될 수 있다. 나와 평소 친분이 있던 법조계 출신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예 그들과 대면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거물 정치인들이 검찰에 들어오기 전 그들을 대신한 몇몇 변호사들은 내게 전화를 걸어 와 “누구누구는 심 부장의 앞날에도 크게 도움이 될 터이니 친분도 좀 쌓아 둘 겸 중수부장실에서 먼저 면담하고 차라도 한 잔 하는 등 예우를 갖춰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부탁마저도 분명히 거절했다. 그런 전화가 몇 차례 있고 나서는 아예 공개적으로 “소환대상자는 중수부장실을 거치거나 중수부장이 따로 만나지 않겠다” 선언하고 “소환대상자는 예외 없이 검찰청사 현관에서 조사실로 곧바로 모실 것”이라고 못 박았다. ‘국민이 맡겨 준 지금 중수부장이 검사의 끝’이라 믿던 나는 ‘앞날’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심지어 내가 모시던 검찰총장 그리고 나와 절친한 검사 동기가 인간적인 부탁을 했을 때도 나는 외압 차단에 대한 소신과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정치인 수사 과정에 문정수(文正秀) 부산시장이 지역개발 건과 관련해 2억원대를 수수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다. 돈을 받던 당시 문 시장은 부산시장에 취임하기 전이었다. (당선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먼저 돈을 받고 나서 실제 당선 및 취임 이후 한보건설에 특혜를 준 것이었다. 즉 사전수뢰(事前收賂)에 해당했다. 게다가 그때는 마침 부산에서 중대한 국제 체육행사인 동아시아대회가 개최되기 직전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문 시장에 대해서는 불구속할 만한 배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저간의 사정들을 배경으로 먼저 김진세(金鎭世) 부산지검장이 “부산 사람들의 현지 의견”이라면서 불구속 이야기를 전해 왔다. 사법시험 동기의 부탁이었지만 나는 “액수로 보나 죄질로 보나 구속이 불가피하다”고, 거꾸로 그를 설득했다. 문 시장과 절친한 김 총장도 내게 대놓고 불구속 의견을 냈다.

“심 부장, 문 시장하고 내가 고등학교 동기인 거 알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대학 동기라는 것도?”

―예. 그것도 압니다.

“그런데도…(구속할 거냐?)”

거듭 묻는 김 총장에게 나는 “그렇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겉으로야 단호하게 말했지만 속으로 그 미안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시장은 결국 불구속기소 됐다.

메모지 유출 사건

이처럼 보안유지다, 외압차단이다 하면서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도 어쩔 수 없이 실수나 허점은 생겨난다. 정치인리스트 수사 와중에 터져 나온 ‘메모지 유출’ 사건이 그것이다.

황장엽 북한 당비서가 서울로 들어오던 4월 18일 저녁 SBS-TV의 메인 뉴스 시간에 ‘한보 수사의 축소를 종용하는 외압 메모지가 나왔다’는 소식이 특종 보도됐다. SBS 검찰 출입기자가 입수한 그 메모지에는 ‘전(前) 경제수석과 은행장들 사법처리는 안 된다. 은행장들의 경우 불구속 입건도 안 된다. 검찰도 결국 국가의 일부 아니냐. 뜻대로 하려면 검찰 수뇌부가 사표를 낸 다음에 하라. 사표 내고 혼자 스타가 되겠다는 것인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항용 말로만 떠돌다 사그라지기 십상인 외압의 실체가 그렇게 ‘현물’과 함께 뚜렷이 나타난 것은 검찰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내용은 누가 보더라도 당시 검찰의 한보 수사에 대해 모처에서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왜 이 같은 압력을 가했는가, 또 이 메모가 어디서 나왔는가 등에 대해서는 보도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메모의 노출 및 보도로 인해 가장 곤혹스러워진 것은 검찰, 그중에서도 우리 수사팀이었다. 두 가지 압박을 동시에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예의 메모를 누가, 왜 작성했는지, 또 그것이 검찰에 어떻게 작용해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밝히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거꾸로 ‘검찰이 언론플레이를 하려고 일부러 흘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우선 그 진상 혹은 전말은 이런 것이었다.

앞서 (제2편에서) 자세히 보았던 것처럼, 이 메모는 우리 중수부의 김상희 수사기획관이 청와대 문종수 민정수석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내가 한보 은행장들의 배임 수사를 밀어붙이던 4월 7일 저녁, 리츠 호텔에서 문 수석과 최상엽 법무부장관, 김 총장과 김 수사기획관이 모인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다.

여기에 나 대신 참석했던 김 수사기획관이 차후 나에게 보고하기 위해 “은행장들 수사를 하지 말라”는 문 수석의 발언 내용을 꼼꼼히 메모한 것이었다. 마침 수첩을 두고 간 터여서 김 수사기획관은 그 자리에 있던 손바닥보다 작은 메모지에 일단 그 내용을 적어야 했었다.

“언론플레이 하나”

이후 김 수사기획관은 나에게 메모를 보여주고는 자기 방 문서분쇄기에 그것을 넣어 파기하려 했다. 그러나 종이가 원체 작아서 파쇄(破碎)되지 않았고, 김 수사기획관은 그것을 일단 자기 책상 위의 수첩 갈피에 끼워 두고는 잠깐 외출했다. 추측건대 아마 그 사이에 SBS 기자가 그 방에 들렀다가 우연히 메모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던 김 수사기획관은 그날 저녁 TV 뉴스를 보다 말고는 “어, 어 저거 내 글씨인데…”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고는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것이 유출된 경위나 형식이야 어쨌든 그것은 분명히 SBS가 보도한 것처럼 ‘한보 수사의 축소를 종용한 외압’이었다.

당장 이튿날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강직한 수사도 좋지만 검찰이 그렇게까지 언론플레이를 해야 하느냐”는 의혹과 원망 섞인 소리들이 들려왔다. 언론에 대한 아침 브리핑 때도 기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을 집중 요구했다. 나는 “정치적 외압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떠한 외압이나 압력이 있다 하더라도 수사결과를 보면 그런 외압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고 대응했다. 사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함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차단하려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뒤집어 보면 이 사건은 오히려 청와대의 외압조차도 내가 얼마나 단호히 차단했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라 할 것이다.

정치인 수사가 가져온 두 개의 反轉

돌이켜 보면, 정치인리스트 수사를 통해 검찰은 두 가지 큰 소득이랄까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먼저, 1차 수사 이후 줄곧 검찰을 비난하던 민심이 돌아섰다. 무려 30여 명의 정치인들, 그 이름만으로도 당대 권력을 상징하던 인물들이 검찰에 하나하나 소환되는 생생한 중계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국민들은 ‘검찰이 뭔가 하는구나’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정치인 수사가 한창 진행되면서 검찰을 독려하며 따뜻한 인사치레를 담은 편지들이 우리 대검 중수부에 속속 도착했다. 한 편지에는 ‘소환된 정치인들이 한보에서 얼마얼마를 받았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바로 그 다음 날 신문에 보도되는 걸 보면서 우리 검찰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쓰여 있었다. 불과 한 달여 전 ‘마피아 집단’이라고 성토되던 검찰이 ‘국민의 검찰’이란 칭찬을 듣게 된 것이다.

이미지뿐만 아니라 검찰은 실질적인 업무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현철씨의 사법처리에 대한 집권세력 내의 분위기가 급반전된 것이었다. 정치인리스트 수사 이전, 그리고 수사가 진행되던 중에도 청와대와 여당, 정부와 국정원 등 힘 있는 사람들과 기관들은 한결같이 ‘김현철 사법처리는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었다.

그러나 33명의 정치인 수사로 적잖은 이들이 사법처리되거나 혹은 명성과 이미지에 타격을 받게 되자 ‘김현철 때문에 아까운 정치인들 다 죽는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그러면서 집권세력 여기저기서 “더 이상의 희생 없이 한 큐(김현철)로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치인리스트 수사를 마무리한 우리 수사팀은 이제 보다 크고 강력한, 또 다른 ‘몸통’을 향해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문정수 전 부산시장의 사전수뢰’ 관련 정정보도문

월간조선은 지난 9월호 ‘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 기사에서 “정치인 수사과정에 문정수 부산시장이 지역개발건과관련해 한보건설로부터 2억원대 뇌물을 수수해 사전수뢰에 해당돼 불구속수사를 했다”는 내용으로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확인 결과, 대법원은 문정수 전 시장이 구체적인 청탁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한보건설에 특혜를 준 사실도 인정되지 않아 무죄 확정판결을 내린 것으로 밝혀져 이를 바로잡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에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