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점검] 단골시위꾼들의 국책사업 반대, 그 후 - ① 천성산 터널공사 그 후 : 월간조선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는 말 그대로였다. 등산객의 출입이 금지된 경남 양산시 하북면 천성산 고산습지로 발을 옮길수록, 꼭꼭 매복해 있던 자연의 경외감이 꿈틀 살아났다.

기자는 그렇게 천성산 해발 750m의 화엄늪 속으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천성산 도롱뇽을 둘러싼 불협화음과 무모한 갈등이 떠올랐다. 걷기가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억새와 진퍼리새(높이 1m 정도의 여러해살이 풀)를 단숨에 넘어뜨린 바람이 천성산 줄기를 거슬러 본색을 드러냈다. 봄을 시샘하는 심술이었다. 그러나 화엄늪은 생물의 생명력이 일 년 중 가장 왕성한 오뉴월을 앞두고 땅기운을 빨아먹으며 진화(進化)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엄늪 어디서나 도롱뇽 알주머니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동행한 낙동강유역환경청 자연환경과 이성규(李成圭)씨와 오기철(吳琪澈) 박사는 “1개의 알주머니에는 보통 30~75개의 알이 들어 있다”고 알려줬다. 물웅덩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도롱뇽 알주머니와 북방산 개구리알이 무더기로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었다.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꽈배기처럼 생긴 알주머니를 만져보았다. 몰캉한 느낌, 생명이 탄생하는 절정의 순간을 며칠 앞둔 녀석들이 완두콩처럼 몸을 돌돌 말고 있었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연방 셔터를 눌렀다. 그가 찍은 사진 속에는 변덕스런 바람과 마를 것 같지 않은 남빛 물감의 하늘, 스멀스멀 깨어날 만삭의 생명이 뒤엉켜 있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가 피사체와 더불어 맛보았을 생명의 숨소리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도롱뇽 알주머니… 스멀스멀 깨어날 만삭의 생명

이성규씨는 “지난해 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없다. 하늘과 늪이, 부는 바람이, 도롱뇽과 북방산 개구리, 가재, 무당개구리알 등이 그대로”라고 설명했다. 오기철 박사는 “4월 초라 본격 싹을 틔우는 왕성한 생육 상태가 아니다. 한여름이 돼봐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특이한 현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늪 속에 손을 넣어보았다. 물이 얼음같이 차가웠다. 손에 뭔가가 잡혔다. 조심스레 손을 펴보았다. 주둥이가 둥글고 옴팡진 콧구멍, 눈은 툭 불거진 ‘그놈’이었다.

그랬다. 도롱뇽이었다. 몸길이가 7cm 정도 됐을까. 동면(冬眠)에서 깨어난 녀석은, 추운 날씨 때문인지 매끈한 피부를 늪 속에 단단히 감추고 있었다. 흐르는 물로 씻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금방이라도 손바닥을 빠져나갈 기세였다. 사진기자가 셔터를 누르는 사이 녀석이 줄행랑을 쳤다. 눈 깜빡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다른 웅덩이에 조심스레 손을 넣어보았다. 움찔거리는 것이 손에 느껴졌다. 살그머니 손바닥을 펴보았다. 역시 그놈이었다.

녀석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율스님은 고속철 터널로 천성산 도롱뇽이 다 죽게 됐다며 단식 ‘고행’을 했다. 스님이 아니더라도, 기계가 산을 뚫고 산허리를 자르며 굽은 길을 펴서 직선으로 만드는 ‘길 닦기’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러나 환경이냐, 개발이냐의 논리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물과 인간이 공생하는 동행의 길을 만들기란 불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천성산 화엄늪이 지율과 많은 환경론자의 우려와는 달리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이다. 고산습지 생태안내원인 김태한(金泰漢)씨는 “‘작은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천성산은 원효스님이 화엄강의를 한 산으로 유명하다. 적어도 아직은 천성산을 휘도는 바람이 법문을 읊고, 넘어진 억새와 진퍼리새가 법문을 외며, 켜켜이 쌓인 이탄(泥炭)층의 진흙덩이가 법문을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의 이름이 ‘원효터널’이다.

이탄층은 낙엽과 풀잎들이 쌓여 물먹은 스펀지 같은 늪을 이루는 곳을 말한다. 일단 한번 망가지면 원상태로 회복이 불가능하다. 보통 1cm 두께의 이탄층이 쌓이려면 100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천성산 늪의 이탄층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쌓아놓고 있었다.

일행은 천성산에서 내려와 차량으로 20분가량 이동했다. 무제치늪에 가기 위해서였다. 무제치늪으로 가는 입구에선 거대한 토목공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김태한씨는 “화장장과 공원묘지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했다.

무제치늪은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정족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다. 4개의 늪지 중 2개의 늪지가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었다. 가는 길에 산토끼의 똥과 멧돼지 발자국, 암수 꿩이 보란 듯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사진기자가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무제치늪에 도착하니 역시나, 도롱뇽알과 북방산 개구리알 무더기를 볼 수 있었고, 꿈틀거리는 어린 도롱뇽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백, 수천의 올챙이가 꼼지락꼼지락

또 다른 늪지에서는 갓 부화한 올챙이 수백 마리, 아니 수천 마리가 꼼지락꼼지락거렸다. 저런 꿈틀거림 만큼 평화적이고 다정한 몸부림이 또 있을까. 녀석들에게 이 늪지는 원체험의 공간이었다. 낙동강유역환경청 이성규씨는 “지난해 3월과 비교해 특이점은 없다. 당시에도 습지 내외부에 멧돼지 족적이 다수 확인됐고, 도롱뇽과 산개구리 알도 확인됐다”고 말했다. 오기철 박사는 “작년 9월에는 이곳에서 식충식물 끈끈이주걱을 비롯해 멸종위기 2급 식물인 자주땅귀개, 땅귀개, 이삭귀개가 무제치늪 4곳 중 2곳에서 발견됐고 참개구리, 아무르장지뱀, 멧돼지 등 야생동물의 서식도 확인됐다”고 했다.

질펀한 습지, 꼬불꼬불한 흙길을 돌아 산을 내려왔다. KTX가 2010년 11월부터 하루 48~57차례 인근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고 한다. 그 영향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체감하긴 어려웠다. 다만 정족산 아래, 삼덕공원묘지 옆에 또다시 거대한 공원묘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거대한 불도저가 산을 깎고 있었고 토사를 가득 실은 덤프트럭이 쉼 없이 움직였다.

기자는 취재 도중 지난해 관찰한 무제치늪과 화엄늪의 모니터링 결과보고서를 입수했다. 보고서는 적어도, 그리고 아직까지, 천성산과 정족산 주변 늪지는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곳은 도롱뇽과 멧돼지, 고라니, 두더지가 뛰놀고 두꺼비와 쇠살모사가 억새 사이를 기어다니며 국내 서식하는 민물조개 중 가장 작은 ‘산골조개’가 사는 생태계의 보고(寶庫)였다. 그곳은 또 문명이 파괴되지 않은, 사람과 짐승의 동행을 부추기는 원시(原始)의 늪이 손짓하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