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자들은 개혁이나 변화, 진보 같은 개념들을 모두 진보주의자들에게 빼앗겨 “지금의 보수는 수구와 꼴통만 남았다”는 진보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보주의자들 역시 소모적인 정쟁에 골몰하며 반(反)정치, 분열의 정치, 불신의 정치를 낳았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 정당이 좌우이념으로 ‘장사’하기 어려워져… 여야 모두 과거의 잘못들로부터 ‘오염’됐기 때문
⊙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시민사회 후보 등장은 정당정치를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
⊙ ‘청바지’와 ‘랩톱’, ‘티셔츠’를 상징하는 獨 해적당, 좌우이념 거부하며 기성 정당 위협
⊙ “민주당이 이명박 반대세력을 이끌어나갈 구심력이 될 수 없다”는 회의론 일어
⊙ “깊이 있는 검증 한 번 못 받은 몇몇 사회명망가들에게 市政을 맡길 수 없어”
⊙ 정당이 좌우이념으로 ‘장사’하기 어려워져… 여야 모두 과거의 잘못들로부터 ‘오염’됐기 때문
⊙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시민사회 후보 등장은 정당정치를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
⊙ ‘청바지’와 ‘랩톱’, ‘티셔츠’를 상징하는 獨 해적당, 좌우이념 거부하며 기성 정당 위협
⊙ “민주당이 이명박 반대세력을 이끌어나갈 구심력이 될 수 없다”는 회의론 일어
⊙ “깊이 있는 검증 한 번 못 받은 몇몇 사회명망가들에게 市政을 맡길 수 없어”
시대가 하수상하다. 기성 정당정치를 위협하는 요즘과 같은 이상기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거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대는 대개가 난세(亂世)였다. 우리가 사는 지금이 바로 정당정치의 실종시대, 난세 중의 난세가 아닐까.
그런 만큼, 시대를 제대로 읽는 일은 중요하다. 안철수(安哲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노무현재단의 문재인(文在寅) 변호사, 아름다운가게의 박원순(朴元淳) 변호사,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 시골의사 박경철(朴慶哲) 등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은 무림고수의 새로운 등장은 한국판(版) ‘앙시앵 레짐(프랑스 혁명 이전의 제도) 붕괴’의 서곡(序曲)일까.
의회와 정당을 통한 대의(代議)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정당제도 자체가 불신받는 현실은 많은 해석을 낳게 한다. 당장 내년 총선에 출마하려는 유력 후보들이 여야를 대표하는 정당의 공천을 받으면 불리한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나라당과 이석연(李石淵) 전 법제처장이 서울시장 후보 출마문제를 둘러싸고 한나라당 입당이냐, 시민단체 추천이냐를 놓고 벌인 힘겨루기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석연 전 처장은 입당을 거부하다가 사흘 칩거 후 결국 “날 과대평가했는지 모르겠다”며 뜻을 접었다. 박원순 변호사 역시 민주당 손학규(孫鶴圭) 대표가 입당을 권유하자 “국민의 생각은 현재의 정당질서가 아닌 새로운 변화”라며 거절했다.
이들이 한사코 기성 정당의 유혹을 뿌리친 것은 제도권 정당으로선 여간한 충격이 아닐 것이다.
한나라당은 299석 국회의석의 절반을 넘는 169석의 원내 1당이다. 민주당은 87석의 원내 2당이자 제1 야당이다. 그런 매머드 정당이 자존심을 굽혀가며 매달렸는데도 거부당한 것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金皓起) 교수는 “다른 국가와 비교해 우리나라에서 사회운동이 크게 성장한 이유는 정당정치의 미성숙에 있는 만큼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회운동의 정치는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정당정치가 제 궤도에 서지 않는 한, 시민단체의 정당 견제 내지 시민운동가의 정계 진출이 앞으로 정치판을 기습, 점령할 것이란 얘기다.
“기성 정당은 경멸과 조롱의 대상”
정당정치에 대한 염증과 환멸 현상은 보수우파든, 진보좌파든 이념을 달리하는 정치학자들까지도 동의한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노(老) 정치학 교수는 기자와 만나 “한국의 정당정치는 오로지 권력투쟁으로 이해돼 정치권 밖의 대중에게는 일종의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폄하되거나 아니면 전적인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고 개탄했다. 한국정치학회장을 역임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한나라당은 지난 4년 동안 친이(親李)니 친박(親朴)이니 하며 날마다 서로 얼굴을 붉혀 왔지 않았나요? 그런데도 선거 때만 되면 표를 달라고 손을 벌리니 염치가 없지요. 민주당은 떳떳한가요? 민주당은 지난 10년 정권의 계승과 극복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10년의 한계와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10년의 공과(功過)를 성찰한 적도, 자기 노선의 정비도, 정체성도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명박(李明博) 정권의 반대투쟁에 주력해 왔을 뿐입니다. 반대를 통해 과거의 실패를 은폐하려 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싫증을 내기 시작했어요.”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민호(金珉湖) 교수는 “지금까지 시민사회 인사들이 개별적으로 정치권에 몸을 담거나 입각(入閣)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이번처럼 조직을 갖춰 공직선거에 후보를 낼 정도로 정치세력화를 꾀한 일은 매우 드물다”고 했다. 그의 주장이다.
“당리당략에 따라 이전투구를 일삼는 정당이나 자신의 재선(再選)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 정당개혁과 정치인의 의식전환에 중대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어요.”
동국대 법무대학원 김상겸 원장은 “이번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정당 간의 다툼에서 무소속 후보의 비중이 커지면서 정당정치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소위 정치꾼에 의해 정치판이 형성되던 기존의 관념을 무너뜨리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이다.
“한국정당은 오로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과실(果實)만 챙기고 헤쳐모이기를 반복하는 소위 정치꾼들로만 구성된 집단으로 보이기 일쑤였지요. 이번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처럼 정당의 후보보다 무소속의 소위 시민운동가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도 그동안 기존 정당들이 보여준 결과물인지 모릅니다.”
“한국 정치인들은 독일에서 답을 찾아야”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은 비단 한국적 현상만은 아니다. 최근 ‘인터넷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독일의 ‘해적당’이 베를린 지방선거의 승리를 발판으로 전국 정치 무대로 성큼 올라섰다. 해적당은 지난 9월 18일 치러진 베를린 지방의회 선거에서 8.9%의 득표로 지방의회에 처음 자리를 만들었다.
베를린자유대 박성조(朴聖祚) 종신교수는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해적당의 지지율이 7%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집권 연정(聯政) 파트너인 자유민주당(FDP)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고 분석하며 “인터넷 환경에서 자라고 SNS로 소통하는 청년들이 주축이 된 이 정당은 탈산업사회, 정보화사회를 대변하는 모임으로 특정 이념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 교수의 말이다.
“해적당은 유럽 산업사회에서 등장한 ‘좌우이념정당’의 틀을 거부합니다. 중앙통제를 싫어하죠. 간단히 말해 기존 정당에 반대하는 집단입니다. 그들의 상징은 ‘청바지’와 ‘랩톱 컴퓨터(노트북)’, ‘티셔츠’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정당을 ‘인터넷 정당’이라 부릅니다. 지지층의 대부분이 학생, 대학생, 노동자, 회사원 등이죠. 차기 총선에서 유권자의 약 20% 정도를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봅니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 후보가 정치에 뛰어드는 현상과 맞닿아 있다고 보나요?
“관련성이 높다고 봅니다. 당 대표는 28세 청년이고 베를린 시당 원내대표는 33세, 중앙당 정치감독은 23세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일시적인 유행과 같은 ‘신기루 정당’이 아닌가요?
“20~30대 젊은이가 주축이고 청바지 차림을 즐겨 입는다고 ‘괴짜 당’으로 보긴 곤란하지요. 해적당은 보수와 진보의 분류, 기존 정당정치의 틀도 거부합니다. 지지율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정당에도 강력한 메시지가 되겠네요.
“권력자의 의사에 좌우되는 정당, 특정 인물 중심의 계파와 심각한 지역적 기반의 정당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당원들의 의사와 괴리된, 비민주적이고 독선적인 정당으로는 정당의 기반조차 위태로울지 모릅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독일을 지켜보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낯설고 이상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시민단체와 시민운동가의 정당기습’ 사건으로 한나라당보다 민주당 쪽이 더 충격을 받았다. 서울시장 야권 단일 후보 경선에서 패배하자 박영선 의원의 당선을 위해 뛰었던 민주당 당직자, 당원들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대표직까지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주위의 만류로 뜻을 접었다.
지난 10월 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서울시장 야권 단일후보 국민 참여경선’은 가히 놀랄 만하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조선일보》 박국희(朴國熙) 기자에 따르면, 1만7878명의 민주당 지지자들과 박원순 후보 지지자들의 모습은 완전히 판이했다고 한다. ‘단체 손님’ 중 장년층은 민주당이 동원한 인물로 짐작됐지만, 박원순 변호사에게 투표하러 온 듯한 사람은 20·30대 및 유모차를 끈 가족 단위 유권자가 적지 않았다.
서울대 조국(曺國) 교수, 소설가 공지영씨, 인터넷 패러디 방송 ‘나는 꼼수다’ 진행자 김어준(딴지일보 총수)씨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공지영 작가는 ‘투표 인증 샷 놀이’라고 쓴 팻말을 찍어 트위터에 올리며 투표를 유도했고 조국 교수 역시 “오전에는 어르신들이 매우 많다. 오후에는 20·30대 청년들이 많이 오시면 좋겠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경선 결과 발표를 앞둔 오후 8시. 손학규 대표가 체육관에 들어서자 함성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박원순 지지자들이 “김어준, 김어준”을 외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쾌한 반란이라고 할까, 손 대표는 당혹스러워 했다. 박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민주당 관계자들은 ‘낯설고 이상한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했어요. 40대 민주당 당직자는 ‘20·30대 젊은층의 정치 문화로부터 우리 민주당이 완전히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지요. 한 민주당 의원은 ‘민주당은 그간 한나라당과 겨루는 각종 선거에서 젊은층이 얼마나 투표장에 나오느냐에 승패가 걸려 있다고 보고, 젊은층은 우리 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젊은층에 팽(烹)당한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경선 결과,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여론조사와 배심원 평가에서 모두 10% 이상의 격차로 박원순 변호사에게 크게 뒤졌다. 조직력을 바탕으로 크게 유리할 것으로 예상했던 국민참여 경선에서도 5%밖에 앞서지 못했다.
“민주당은 反이명박 구심력이 될 수 없다”
손학규 대표는 최근 지지율이 5% 안팎으로 내려앉았다. 지난 4월 분당 보궐선거 승리 후 10%를 넘기도 했지만, 문재인 변호사의 대선출마설이 일면서 주춤하더니 안철수 교수가 등장하면서 다시 떨어졌다. 손 대표는 여전히 민주당 내에선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다. 이런 현상에 대해 민주당 관계자는 “민주당 출신이란 점이 장점이 되기보다 오히려 구태 정치와 기득권 상징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며 “대선후보마저 내지 못하는 정당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민주당 이석현(李錫玄) 의원은 “민주당은 확실히 패배했다. 네 탓, 내 탓 공방으로 허송세월하지 말고 시대 흐름에 맞게 변화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했고, 우제창(禹濟昌) 의원은 “민주당이 시장 후보를 내지 못한 채 여론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현실에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야권 단일후보 수락연설에서 박원순 후보가 ‘아무것도 없는 저에게 돈과 조직을 만들어주신 시민 여러분께 감사한다’고 한 것은 2002년 노무현 후보가 국민에게 전했던 메시지인데 10여 년이 지난 오늘, 이 메시지를 민주당이 아닌 민주당을 이긴 박원순 후보가 말하고 있습니다. 경선에서의 패배보다 우리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뺏겨버린 현실에 참담함을 느낍니다. 이번 경선이 흥행했다고 애써 자위하는 것도 부끄럽습니다.”
결국 민주당이 살길은 야권통합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친노 세력 등 이탈 세력들을 재(再)결집시켜 몸 불리는 것을 생존의 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야권 단일화 후보 경선 패배로 “민주당이 반(反)이명박 세력의 구심력이 될 수 없다”는 회의론이 일기 시작했다. 자칫 당 밖의 세력에 흡수당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민주당, 거리정치 몰두하다 신상품인 시민단체에 밀려
이에 대해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김형준(金亨俊) 교수는 “민주당이 각종 촛불집회, ‘희망 버스’ 등에 동참하며 ‘거리 정치’에 열중했고, 국민은 이런 민주당이 시민단체와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됐다”며 “똑같은 물건이라면 신상품을 사겠다는 심정 아니겠느냐”고 했다.
놀라운 것은 민주당이 간판을 내릴지 모를 상황에 처하게 됐지만, 뼈를 깎는 쇄신과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낡은 진보’ 병이 얼마나 심각한 증세인지 보여준다. 진보의 재구성 없이는 진보세력이 이명박 정권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자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는 있지만 이도저도 못하는,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것이다.
민주당 박병석(朴炳錫) 의원은 “새로운 진화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못 내 ‘야권 대통합론’의 주도권을 잃었다는 지적은, 저희로서는 무척 뼈아프고 반성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진화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지금까지의 한계를 반성하고 그야말로 국민의 요구를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당 김효석(金孝錫) 의원은 “그동안 민주당이 통합과 개혁을 주장했지만, 통합에 무게를 두고, 개혁을 소홀히 다뤄온 게 사실”이라며 “박원순 변호사의 등장으로 민주당이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혁신하지 않으면 혁명적인 변화가 우리를 몰아칠 수도 있다”고 했다.
―민주당의 개혁과 혁신을 풀어서 설명하면요?
“정책과 노선의 혁신, 당 운영과 조직의 혁신을 뜻합니다. 지난 10월 3일 국민참여경선이 열린 서울 장충체육관에 가보고 깜짝 놀랐어요. 민주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나이들고, 동원된 사람이 많은 것처럼 보였어요. 반면 박원순 지지자들은 전부 자발적으로 찾아온 젊은이들이었고 경선을 축제로 즐기더군요. 민주당이 언제부터 낡은 정당이 돼버렸나, 충격을 받았어요. 물론 한나라당은 우리보다 더 놀랐을 겁니다.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망할 수도 있다는 경종을 울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진보, 좌파세력의 야권 대통합은 이미 빨간 불이 켜진 상태다. 사분오열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진보신당 조승수(趙承洙) 전 대표는 10월 6일 당을 뛰쳐나갔다. 그는 ‘탈당의 변’을 통해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의 창당을 통해 진보의 혁신과 재구성을 추진하면서 진보정치의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고자 했던 저의 노력이 좌절됐다”며 탈당배경을 설명했다. 이날 전·현직 시·도위원장 12명이 조 전 대표와 동반 탈당했다. 앞서 지난 9월 23일에는 노회찬·심상정 전 대표가 탈당했다. 노·심 전 대표 탈당 이후 한 달간 전국적으로 500여 명의 당원이 빠져나간 상태라고 한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정치 엘리트 충원 막아”
여야 모두 정당위기를 극복할 참신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 고민거리다. 새로운 인물의 수혈이 쉽지 않고, 설령 찾았다고 하더라도 당적을 거부하는 현실이 절망적이다.
이런 현상은 여야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와 정파 이익에 골몰해 왔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보수주의자들은 개혁이나 변화, 진보 같은 개념들을 모두 진보주의자들에게 빼앗겨 “지금의 보수는 수구와 꼴통만 남았다”는 진보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보주의자들 역시 소모적인 정쟁에 골몰하며 반 정치, 분열의 정치, 불신의 정치를 낳았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정당이 더는 좌우이념으로만 ‘장사’하기 어려운 것은 자명해 보인다. 여야 모두 과거의 잘못들로부터 ‘오염’됐기 때문이다. 좌우의 이념에 기대어 서로 싸우며 한편으론 공생(共生)관계를 이룬 결과, 국민은 정치 불신 내지 정당 비관론에 빠져버린 것이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조윤영(曺允榮) 교수는 “사실 엘리트 중심의 정당은 열성적 당원의 저변확대에 미흡한 점이 있고, 이데올로기 등의 대립이 정치 엘리트의 충원에 많은 제약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이다.
“정당이 가치의 실현과 그 실현과정에서 이익과 갈등의 조정 및 타협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당의 이해와 정파적 대립에 몰두한 결과, 정당제도에 대한 위협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중의 동원 및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유능한 정치 엘리트 증원에 주력해 정당의 가치실현을 효과적으로 모색하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여야가 이데올로기 중심의 대결정치를 고집할 경우 새로운 인재영입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원대 사회과학교육계열 김주성(金周晟) 교수는 “앞으로 정당을 우회하는 시민사회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현상은 더욱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의 말이다.
“구시대적이고 이념적인 정치성향을 내세우는 후보보다는 다양한 탤런트로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후보가 국민의 관심을 더 끌 것입니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당선되든 이번 선거는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국민설득의 공론정치가 실험되는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좌우논쟁의 대결과 증오에서 벗어나야”
한나라당 원희룡(元喜龍) 의원은 “좌우논쟁의 대결과 증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쓴 논문 <한나라당과 보수에 바란다>의 일부다.
<한국의 보수정당에는 정치적 대결상대를 좌익, 친북으로 몰아세우는 것만으로 충분히 정치적 이익을 챙기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이 이른바 색깔론에 가지는 거부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중략) 좌와 우를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실제로 원론적인 의미에서 좌와 우는 선악으로 나눌 수 있는 개념도 아니다. 국민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살기 편한 나라를 만드는 것에 도움된다면 ‘기업 살리기’도 해야 하고, ‘복지’도 강화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정치권도 좌우논쟁에서 비롯되는 소모적인 대결과 증오의 정치싸움에서 벗어나 정책의 생산성과 구체성을 추구해야 한다.>
원 의원은 기자에게 “‘안철수·박원순 현상’은 탈이념이라고 규정하기보다 과거에 고정된 이념의 틀을 벗어나는 생활정치, 국민의 고된 삶을 해결하는 정치로 초점이 옮겨졌음을 의미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민심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대한 탈이념, 탈정당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국민의 바람이 구체화되진 않았지만, 생활을 반영한 새로운 이념과 대안,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리더십, 정치적 네트워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특정 이념의 논리에 머무른 기존 정당의 틀로서는 고정지지층 외에 외연 확장이 어려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요.”
―탈이념이나 탈정치란 의미는 이념을 거부한다는 게 아니라 정당체제에 대한 변화를 요구한다는 의미군요.
“저는 한나라당 의원이나 당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국민이 우리에게 사전에 문제지를 유출해 준 것’이라고요. 답은 우리가 찾아야 하고, 그걸 국민이 채점해 줄 겁니다. 국민은 정체불명의 탈이념, 탈정당의 질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과거 낡은 정당과 이념, 정치 리더십에 대해 국민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여전히 목말라 하며 찾고 있어요. 그 찾는 과정이 ‘안철수 현상’처럼 일시적으로 열광하다가 식을 수도 있고, 또 해답을 찾는 과정이 복잡해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지만, 대안을 찾으려는 욕구와 방향성 자체는 이미 폭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 보수진영에는 정치실종, 정당위기를 반전시킬 참신한 인물이 없나요?
“서점에 가면 소위 보수 내지 우파 지식인이 펴낸 베스트셀러가 없잖아요. 왜 그럴까요? 결국 보수라는 게 스스로 ‘여기까지가 보수’라고 선을 그어 배척하는, 보수의 이념이나 이론적인 폭을 좁고 편협하게 설정해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내부의 다양한 토론과 개방적인 경쟁이 안 이뤄지는 겁니다. 민주당의 경우도 당 내부에서 (토론과 경쟁이) 자꾸 제한되다 보니 결국 지금처럼 당이 쪼그라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당 밖 ‘친노 노선’이나 ‘안철수 노선’에 기회를 주고 토론과 경쟁을 벌이면 어떻게 될까요? 국민이 볼 때 새로운 다양성과 역동성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한나라당이 기득권 내지 안정추구 위주로, 과거와 같은 ‘반공(反共)이냐, 아니냐’는 대결적인, 방어적인 방향에 계속 갇히면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리는 불모지가 될 겁니다.”
원 의원은 “한나라당과 보수 우파는 변화를 주도하느냐, 변화에 이끌리느냐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결국 타의에 의해 재편당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념 과잉의 정치를 반성하게 만들어”
민주당의 위기의식도 한나라당에 못지않다.
김효석 의원은 “‘안철수·박원순 현상’은 여야 정당으로 하여금 이념 과잉의 정치는 없었는지 반성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김 의원의 말이다.
“우리 정치는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분법적인 접근이 정당정치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니 어떤 문제가 생겨도 토론할 필요가 없었어요. 답이 이미 나와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정책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어요. 예를 들어 비정규직, 재벌, 복지문제에서 보수냐 진보냐의 이념적 접근을 떠나, 시대에 맞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를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시대적 해법이 진보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지만, 이념의 과잉은 없었는지도 반성해야 합니다.”
―야권 대통합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여러 층위의 야당이 모이면 기존 민주당의 정체성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요?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통합에 임해야 한다는 확고한 원칙이 필요합니다. 다른 야당들과 통합논의를 하면서 일방적으로 내주는 식의 논의는 정치 공학적으로 가능할 수는 있어도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노당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는 종북주의(從北主義)라든지, 지나친 친노조 성향, 반시장주의는 거부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장경제가 보완돼야 하지만, 시장경제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향후 정당정치가 이념 중심 대결을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하나요?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할 것입니다. 정당의 구조와 운영방식이 과거와 전혀 다른, 정책과 비전 면에서도 보수·진보 하던 이념 과잉 정치에 대한 반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조직을 만드는 것이 정당인데, 이제는 조직이 없어도 SNS로 동원이 가능하다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결실을 볼 것인가는 지켜봐야겠지만 혁명적인 변화가 도래할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당 박병석 의원은 “대중은 이념적으로 사고하지 않지만, 대중이 지향하는 가치는 이념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며 “현재의 변화를 탈이념, 탈정당이라 규정하는 것은 변화의 방향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박 의원의 말이다.
“탈이념이 아니라 이념을 뛰어넘는 가치의 문제를 더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당장 양극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건전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내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분명한 것은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 프레임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박 의원은 ‘안철수·박원순 현상’의 원인이 단순한 정당과 이념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대중의 의사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는 낡은 정당체제에 대한 거부라는 것이다.
“지난 8월 국회 예산결산위에서 김황식(金滉植) 총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영국의 폭동과 그리스의 대규모 시위 원인이 무엇이냐’고요. 강 건너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시민사회가 정치에 뛰어드는 현상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실업문제, 교육과 보육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더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봅니다. 국민은 이념보다 생활정치와 현실적인 문제를 더욱 갈망하고 있습니다. 진보정당이 진보적 대중을 제대로 견인하지 못하고, 보수정당이 보수적 대중을 만족시키지 못한 정당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 것이지요.”
‘左클릭’ 한나라당에 실망한 보수 우파
이념 과잉의 정치가 몰락할 것이라는 견해를 두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한국정당에서 아직까지 노선과 이념이 뚜렷한 정당이 민주노동당을 제외하고 없기 때문이다. 현재 보수우파의 지지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열심히 좌향좌(左向左)를 하고 있고, 중도좌파의 민주당은 야권통합을 서두르며 더 왼쪽으로 공간이동 중이다. 여야 정당이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 불신을 초래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탈이념이 아니라 본격적인 이념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0·26 서울시장 보선에서 이석연 전 법제처장에 이어 새로운 보수진영 후보로 거론됐던 전원책(全元策) 변호사는 “한나라당은 이미 우파정당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한나라당은 영국의 노동당 정강정책보다도 더 왼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
“과거 좌우이념을 통틀어 선명성이 가장 뚜렷한 정당은 민노당입니다. 스스로를 좌파라고 밝히며 마르크시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정당정책으로 천명할 정도였으니까요. 한나라당과 옛 민주당(새천년민주당)은 정당정책이나 강령이 거의 비슷한데도, 한쪽은 보수라고 말하고 한쪽은 진보라고 외쳤지요. 사실 좌우 대립은 광복 이후부터 시작됐지만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정권 때는 정당 간 이념대립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민노당이 좌파성을 드러내고, 유럽에서 진보정당이 집권하면서 ‘진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전 변호사는 “이후 출범한 노무현 정권의 열린우리당은 이념투쟁을 열심히 했다”며 “이념노선이 뚜렷하면 정당정치가 책임정치가 구현되는 장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는 바람직한 몸짓이었다”고 지적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당내 이념적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었고, 그러다 보니 그 정당을 이념정당이라 하기에 조금 모호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념으로 뭉쳤다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세력, 권력쟁취를 위해 끼리끼리 뭉쳤다고 봐야겠지요. 한나라당 역시 다를 게 없었습니다. 홍준표(洪準杓) 대표와 원희룡·남경필(南景弼) 의원의 경우 왼쪽에 가까운 이념적 성향을 지니며 좌우를 넘나들었습니다. 어쨌든, 열린우리당은 이념정당을 지향했고 최초로 기간당원제를 도입하는 등 상향식 민주주의를 시작했지만, 민생을 도외시했어요. 단적인 예가 부동산 정책이었습니다. 집권 5년 동안 31번의 부동산 정책을 시장에 내놓았지만 전부 다 실패했어요. 경제성장이 더뎌지고 서민의 살림이 궁핍해지자 반사이익으로 이명박 정권이 탄생했어요.”
하지만, 이명박 정권 역시 무너진 중산층을 살리지 못했고 결국 정당은 물론 정치 자체를 불신당하게 된다. 전 변호사는 “한나라당은 자기 이념의 정체성을 굳히지 못한 채 야당을 훔쳐보며 열심히 ‘좌(左) 클릭’을 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됐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보수우파의 시각에서 볼 때 한나라당 의원 중 정통 보수의 목소리를 내는 이는 정몽준(鄭夢準)·심재철(沈在哲)·장윤석(張倫碩)·전여옥(田麗玉) 의원 정도고, 나머지는 기회주의적이며 좌파적 성향이 강합니다. 특히 한나라당 소장파와 친박계 의원들은 이념보다는 기득권을 위해 좌파성향을 더 가미하고 있어요. 한나라당이 보수노선을 명확히 하면서 우파진영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면 정당으로서의 존립이 위태로울 겁니다. 이념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지 못할 경우 역사에 남을 만한 정계개편이 올 연말쯤 올 것으로 판단합니다.”
“낙천·낙선운동은 시민운동의 묘혈을 판 운동”
국회와 정당의 역할과 시민단체의 역할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며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는 국회의 역할을 보완하고 감시할지언정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 윤리교육과 박효종(朴孝鍾) 교수는 “만일 시민단체가 국회의 기능을 ‘보완’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대체’하고자 한다면, 대의 민주주의의 흠결을 넘어서는 직접 민주주의의 폐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과거 다수당을 확보하지 못한 소수정권이 자신들의 정치력과 통치력을 극대화하고 자신들의 이념적 성향과 비슷한 시민단체들과 제휴해 국회와 야당인 다수당을 포위하는 형국을 연출했습니다. 소수정권이 시민단체들을 동원해 국회나 다수당을 압박하는 이른바 ‘꼼수의 행태’는 국회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박원순 변호사가 주도한 낙천·낙선운동이었다.
선진화시민행동 상임대표인 서경석(徐京錫) 목사가 1989년 경실련을 창립하자, 박원순 변호사는 1994년 참여연대를 창립했다. 두 사람은 이념 면에서 달랐지만, 부정부패 반대, 경제정의 실현, 시민참여, 지방자치 등에서는 생각이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서 목사는 박 변호사와 다른 길을 걸었고 지금은 그와 대척점에 서 있다. 서 목사의 말이다.
“한국 역사에 낙선낙천운동처럼 크게 홍보가 된 시민운동이 또 있었을까요? 한 달 내내 모든 언론의 톱뉴스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시민운동의 묘혈을 판 운동이었어요. 이 운동 이후 시민운동은 편향적인 운동으로 간주됐고, 시민으로부터 외면당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지요. 박원순 변호사는 이 운동의 최대 수혜자지만 사실은 시민운동 몰락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입니다.”
바른사회시민회의 전희경(全希卿) 정책실장은 “시민사회 후보가 새로운 정치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표현은 지나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원순의 선대위 참여인물 면면을 보면, 대개가 손학규, 유시민(柳時敏) 등 기성 정당의 대표들입니다. 시민사회 후보의 역량만으로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기성 정치와 정당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덮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가능성이 커요. ‘정당 옷’을 안 입는 것이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지, 탈정당, 탈정치의 유의미한 현상으로 보긴 어려워요.”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민호 교수는 “깊이 있는 검증 한 번 못 받은 몇몇 사회명망가들과 실체가 불분명한 시민사회단체에 시정(市政)을 맡길 수 없는 까닭은 이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면 누가 남아 남은 문제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질 것인가요? 눈이 못났다고 하여 눈을 떼어버릴 수 없듯이 기성 정당에 염증을 느낀다고 해서 자유민주주의 요체인 정당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동국대 법무대학원 김상겸 원장 역시 “무소속 시민운동가가 두드러지는 형국은 대한민국 장래와 발전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지금 시점에서 정당제 민주주의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무소속 시민운동가가 갑자기 등장하는 식의 충격적인 방법은 국민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되돌아갈 뿐입니다. 현대 정치는 한두 명의 개인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구축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죠. 이번 보궐선거에서 보여주는 현상은 일시적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만큼, 시대를 제대로 읽는 일은 중요하다. 안철수(安哲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노무현재단의 문재인(文在寅) 변호사, 아름다운가게의 박원순(朴元淳) 변호사,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 시골의사 박경철(朴慶哲) 등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은 무림고수의 새로운 등장은 한국판(版) ‘앙시앵 레짐(프랑스 혁명 이전의 제도) 붕괴’의 서곡(序曲)일까.
의회와 정당을 통한 대의(代議)정치를 기본으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정당제도 자체가 불신받는 현실은 많은 해석을 낳게 한다. 당장 내년 총선에 출마하려는 유력 후보들이 여야를 대표하는 정당의 공천을 받으면 불리한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나라당과 이석연(李石淵) 전 법제처장이 서울시장 후보 출마문제를 둘러싸고 한나라당 입당이냐, 시민단체 추천이냐를 놓고 벌인 힘겨루기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석연 전 처장은 입당을 거부하다가 사흘 칩거 후 결국 “날 과대평가했는지 모르겠다”며 뜻을 접었다. 박원순 변호사 역시 민주당 손학규(孫鶴圭) 대표가 입당을 권유하자 “국민의 생각은 현재의 정당질서가 아닌 새로운 변화”라며 거절했다.
이들이 한사코 기성 정당의 유혹을 뿌리친 것은 제도권 정당으로선 여간한 충격이 아닐 것이다.
한나라당은 299석 국회의석의 절반을 넘는 169석의 원내 1당이다. 민주당은 87석의 원내 2당이자 제1 야당이다. 그런 매머드 정당이 자존심을 굽혀가며 매달렸는데도 거부당한 것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金皓起) 교수는 “다른 국가와 비교해 우리나라에서 사회운동이 크게 성장한 이유는 정당정치의 미성숙에 있는 만큼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회운동의 정치는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정당정치가 제 궤도에 서지 않는 한, 시민단체의 정당 견제 내지 시민운동가의 정계 진출이 앞으로 정치판을 기습, 점령할 것이란 얘기다.
“기성 정당은 경멸과 조롱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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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안철수, 박경철, 김제동.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은 시민사회 세력들이 기성 정치인들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
“한나라당은 지난 4년 동안 친이(親李)니 친박(親朴)이니 하며 날마다 서로 얼굴을 붉혀 왔지 않았나요? 그런데도 선거 때만 되면 표를 달라고 손을 벌리니 염치가 없지요. 민주당은 떳떳한가요? 민주당은 지난 10년 정권의 계승과 극복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10년의 한계와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10년의 공과(功過)를 성찰한 적도, 자기 노선의 정비도, 정체성도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이명박(李明博) 정권의 반대투쟁에 주력해 왔을 뿐입니다. 반대를 통해 과거의 실패를 은폐하려 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싫증을 내기 시작했어요.”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민호(金珉湖) 교수는 “지금까지 시민사회 인사들이 개별적으로 정치권에 몸을 담거나 입각(入閣)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이번처럼 조직을 갖춰 공직선거에 후보를 낼 정도로 정치세력화를 꾀한 일은 매우 드물다”고 했다. 그의 주장이다.
“당리당략에 따라 이전투구를 일삼는 정당이나 자신의 재선(再選)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 정당개혁과 정치인의 의식전환에 중대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어요.”
동국대 법무대학원 김상겸 원장은 “이번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정당 간의 다툼에서 무소속 후보의 비중이 커지면서 정당정치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소위 정치꾼에 의해 정치판이 형성되던 기존의 관념을 무너뜨리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말이다.
“한국정당은 오로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과실(果實)만 챙기고 헤쳐모이기를 반복하는 소위 정치꾼들로만 구성된 집단으로 보이기 일쑤였지요. 이번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처럼 정당의 후보보다 무소속의 소위 시민운동가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도 그동안 기존 정당들이 보여준 결과물인지 모릅니다.”
“한국 정치인들은 독일에서 답을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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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자유대 박성조 종신교수. |
베를린자유대 박성조(朴聖祚) 종신교수는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해적당의 지지율이 7%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집권 연정(聯政) 파트너인 자유민주당(FDP)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고 분석하며 “인터넷 환경에서 자라고 SNS로 소통하는 청년들이 주축이 된 이 정당은 탈산업사회, 정보화사회를 대변하는 모임으로 특정 이념을 지향하지 않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 교수의 말이다.
“해적당은 유럽 산업사회에서 등장한 ‘좌우이념정당’의 틀을 거부합니다. 중앙통제를 싫어하죠. 간단히 말해 기존 정당에 반대하는 집단입니다. 그들의 상징은 ‘청바지’와 ‘랩톱 컴퓨터(노트북)’, ‘티셔츠’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정당을 ‘인터넷 정당’이라 부릅니다. 지지층의 대부분이 학생, 대학생, 노동자, 회사원 등이죠. 차기 총선에서 유권자의 약 20% 정도를 얻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봅니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 후보가 정치에 뛰어드는 현상과 맞닿아 있다고 보나요?
“관련성이 높다고 봅니다. 당 대표는 28세 청년이고 베를린 시당 원내대표는 33세, 중앙당 정치감독은 23세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일시적인 유행과 같은 ‘신기루 정당’이 아닌가요?
“20~30대 젊은이가 주축이고 청바지 차림을 즐겨 입는다고 ‘괴짜 당’으로 보긴 곤란하지요. 해적당은 보수와 진보의 분류, 기존 정당정치의 틀도 거부합니다. 지지율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정당에도 강력한 메시지가 되겠네요.
“권력자의 의사에 좌우되는 정당, 특정 인물 중심의 계파와 심각한 지역적 기반의 정당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당원들의 의사와 괴리된, 비민주적이고 독선적인 정당으로는 정당의 기반조차 위태로울지 모릅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독일을 지켜보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낯설고 이상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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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3일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경선에선, 민주당 출신이란 점이 장점이 되기보다 오히려 구태 정치와 기득권 상징이 됐다. |
지난 10월 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서울시장 야권 단일후보 국민 참여경선’은 가히 놀랄 만하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조선일보》 박국희(朴國熙) 기자에 따르면, 1만7878명의 민주당 지지자들과 박원순 후보 지지자들의 모습은 완전히 판이했다고 한다. ‘단체 손님’ 중 장년층은 민주당이 동원한 인물로 짐작됐지만, 박원순 변호사에게 투표하러 온 듯한 사람은 20·30대 및 유모차를 끈 가족 단위 유권자가 적지 않았다.
서울대 조국(曺國) 교수, 소설가 공지영씨, 인터넷 패러디 방송 ‘나는 꼼수다’ 진행자 김어준(딴지일보 총수)씨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공지영 작가는 ‘투표 인증 샷 놀이’라고 쓴 팻말을 찍어 트위터에 올리며 투표를 유도했고 조국 교수 역시 “오전에는 어르신들이 매우 많다. 오후에는 20·30대 청년들이 많이 오시면 좋겠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경선 결과 발표를 앞둔 오후 8시. 손학규 대표가 체육관에 들어서자 함성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박원순 지지자들이 “김어준, 김어준”을 외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쾌한 반란이라고 할까, 손 대표는 당혹스러워 했다. 박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민주당 관계자들은 ‘낯설고 이상한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했어요. 40대 민주당 당직자는 ‘20·30대 젊은층의 정치 문화로부터 우리 민주당이 완전히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지요. 한 민주당 의원은 ‘민주당은 그간 한나라당과 겨루는 각종 선거에서 젊은층이 얼마나 투표장에 나오느냐에 승패가 걸려 있다고 보고, 젊은층은 우리 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젊은층에 팽(烹)당한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경선 결과,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여론조사와 배심원 평가에서 모두 10% 이상의 격차로 박원순 변호사에게 크게 뒤졌다. 조직력을 바탕으로 크게 유리할 것으로 예상했던 국민참여 경선에서도 5%밖에 앞서지 못했다.
“민주당은 反이명박 구심력이 될 수 없다”
손학규 대표는 최근 지지율이 5% 안팎으로 내려앉았다. 지난 4월 분당 보궐선거 승리 후 10%를 넘기도 했지만, 문재인 변호사의 대선출마설이 일면서 주춤하더니 안철수 교수가 등장하면서 다시 떨어졌다. 손 대표는 여전히 민주당 내에선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다. 이런 현상에 대해 민주당 관계자는 “민주당 출신이란 점이 장점이 되기보다 오히려 구태 정치와 기득권 상징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며 “대선후보마저 내지 못하는 정당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민주당 이석현(李錫玄) 의원은 “민주당은 확실히 패배했다. 네 탓, 내 탓 공방으로 허송세월하지 말고 시대 흐름에 맞게 변화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했고, 우제창(禹濟昌) 의원은 “민주당이 시장 후보를 내지 못한 채 여론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현실에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야권 단일후보 수락연설에서 박원순 후보가 ‘아무것도 없는 저에게 돈과 조직을 만들어주신 시민 여러분께 감사한다’고 한 것은 2002년 노무현 후보가 국민에게 전했던 메시지인데 10여 년이 지난 오늘, 이 메시지를 민주당이 아닌 민주당을 이긴 박원순 후보가 말하고 있습니다. 경선에서의 패배보다 우리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뺏겨버린 현실에 참담함을 느낍니다. 이번 경선이 흥행했다고 애써 자위하는 것도 부끄럽습니다.”
결국 민주당이 살길은 야권통합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친노 세력 등 이탈 세력들을 재(再)결집시켜 몸 불리는 것을 생존의 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야권 단일화 후보 경선 패배로 “민주당이 반(反)이명박 세력의 구심력이 될 수 없다”는 회의론이 일기 시작했다. 자칫 당 밖의 세력에 흡수당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민주당, 거리정치 몰두하다 신상품인 시민단체에 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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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박병석 의원. |
놀라운 것은 민주당이 간판을 내릴지 모를 상황에 처하게 됐지만, 뼈를 깎는 쇄신과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낡은 진보’ 병이 얼마나 심각한 증세인지 보여준다. 진보의 재구성 없이는 진보세력이 이명박 정권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자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는 있지만 이도저도 못하는,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것이다.
민주당 박병석(朴炳錫) 의원은 “새로운 진화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못 내 ‘야권 대통합론’의 주도권을 잃었다는 지적은, 저희로서는 무척 뼈아프고 반성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진화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지금까지의 한계를 반성하고 그야말로 국민의 요구를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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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김효석 의원. |
―민주당의 개혁과 혁신을 풀어서 설명하면요?
“정책과 노선의 혁신, 당 운영과 조직의 혁신을 뜻합니다. 지난 10월 3일 국민참여경선이 열린 서울 장충체육관에 가보고 깜짝 놀랐어요. 민주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나이들고, 동원된 사람이 많은 것처럼 보였어요. 반면 박원순 지지자들은 전부 자발적으로 찾아온 젊은이들이었고 경선을 축제로 즐기더군요. 민주당이 언제부터 낡은 정당이 돼버렸나, 충격을 받았어요. 물론 한나라당은 우리보다 더 놀랐을 겁니다.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망할 수도 있다는 경종을 울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진보, 좌파세력의 야권 대통합은 이미 빨간 불이 켜진 상태다. 사분오열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진보신당 조승수(趙承洙) 전 대표는 10월 6일 당을 뛰쳐나갔다. 그는 ‘탈당의 변’을 통해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의 창당을 통해 진보의 혁신과 재구성을 추진하면서 진보정치의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고자 했던 저의 노력이 좌절됐다”며 탈당배경을 설명했다. 이날 전·현직 시·도위원장 12명이 조 전 대표와 동반 탈당했다. 앞서 지난 9월 23일에는 노회찬·심상정 전 대표가 탈당했다. 노·심 전 대표 탈당 이후 한 달간 전국적으로 500여 명의 당원이 빠져나간 상태라고 한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정치 엘리트 충원 막아”
여야 모두 정당위기를 극복할 참신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 고민거리다. 새로운 인물의 수혈이 쉽지 않고, 설령 찾았다고 하더라도 당적을 거부하는 현실이 절망적이다.
이런 현상은 여야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와 정파 이익에 골몰해 왔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보수주의자들은 개혁이나 변화, 진보 같은 개념들을 모두 진보주의자들에게 빼앗겨 “지금의 보수는 수구와 꼴통만 남았다”는 진보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보주의자들 역시 소모적인 정쟁에 골몰하며 반 정치, 분열의 정치, 불신의 정치를 낳았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정당이 더는 좌우이념으로만 ‘장사’하기 어려운 것은 자명해 보인다. 여야 모두 과거의 잘못들로부터 ‘오염’됐기 때문이다. 좌우의 이념에 기대어 서로 싸우며 한편으론 공생(共生)관계를 이룬 결과, 국민은 정치 불신 내지 정당 비관론에 빠져버린 것이다.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조윤영(曺允榮) 교수는 “사실 엘리트 중심의 정당은 열성적 당원의 저변확대에 미흡한 점이 있고, 이데올로기 등의 대립이 정치 엘리트의 충원에 많은 제약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이다.
“정당이 가치의 실현과 그 실현과정에서 이익과 갈등의 조정 및 타협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당의 이해와 정파적 대립에 몰두한 결과, 정당제도에 대한 위협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대중의 동원 및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유능한 정치 엘리트 증원에 주력해 정당의 가치실현을 효과적으로 모색하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여야가 이데올로기 중심의 대결정치를 고집할 경우 새로운 인재영입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원대 사회과학교육계열 김주성(金周晟) 교수는 “앞으로 정당을 우회하는 시민사회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현상은 더욱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의 말이다.
“구시대적이고 이념적인 정치성향을 내세우는 후보보다는 다양한 탤런트로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후보가 국민의 관심을 더 끌 것입니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당선되든 이번 선거는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국민설득의 공론정치가 실험되는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좌우논쟁의 대결과 증오에서 벗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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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 |
<한국의 보수정당에는 정치적 대결상대를 좌익, 친북으로 몰아세우는 것만으로 충분히 정치적 이익을 챙기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이 이른바 색깔론에 가지는 거부감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중략) 좌와 우를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실제로 원론적인 의미에서 좌와 우는 선악으로 나눌 수 있는 개념도 아니다. 국민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살기 편한 나라를 만드는 것에 도움된다면 ‘기업 살리기’도 해야 하고, ‘복지’도 강화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정치권도 좌우논쟁에서 비롯되는 소모적인 대결과 증오의 정치싸움에서 벗어나 정책의 생산성과 구체성을 추구해야 한다.>
원 의원은 기자에게 “‘안철수·박원순 현상’은 탈이념이라고 규정하기보다 과거에 고정된 이념의 틀을 벗어나는 생활정치, 국민의 고된 삶을 해결하는 정치로 초점이 옮겨졌음을 의미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민심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대한 탈이념, 탈정당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국민의 바람이 구체화되진 않았지만, 생활을 반영한 새로운 이념과 대안,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리더십, 정치적 네트워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특정 이념의 논리에 머무른 기존 정당의 틀로서는 고정지지층 외에 외연 확장이 어려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요.”
―탈이념이나 탈정치란 의미는 이념을 거부한다는 게 아니라 정당체제에 대한 변화를 요구한다는 의미군요.
“저는 한나라당 의원이나 당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국민이 우리에게 사전에 문제지를 유출해 준 것’이라고요. 답은 우리가 찾아야 하고, 그걸 국민이 채점해 줄 겁니다. 국민은 정체불명의 탈이념, 탈정당의 질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과거 낡은 정당과 이념, 정치 리더십에 대해 국민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여전히 목말라 하며 찾고 있어요. 그 찾는 과정이 ‘안철수 현상’처럼 일시적으로 열광하다가 식을 수도 있고, 또 해답을 찾는 과정이 복잡해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지만, 대안을 찾으려는 욕구와 방향성 자체는 이미 폭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 보수진영에는 정치실종, 정당위기를 반전시킬 참신한 인물이 없나요?
“서점에 가면 소위 보수 내지 우파 지식인이 펴낸 베스트셀러가 없잖아요. 왜 그럴까요? 결국 보수라는 게 스스로 ‘여기까지가 보수’라고 선을 그어 배척하는, 보수의 이념이나 이론적인 폭을 좁고 편협하게 설정해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내부의 다양한 토론과 개방적인 경쟁이 안 이뤄지는 겁니다. 민주당의 경우도 당 내부에서 (토론과 경쟁이) 자꾸 제한되다 보니 결국 지금처럼 당이 쪼그라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당 밖 ‘친노 노선’이나 ‘안철수 노선’에 기회를 주고 토론과 경쟁을 벌이면 어떻게 될까요? 국민이 볼 때 새로운 다양성과 역동성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한나라당이 기득권 내지 안정추구 위주로, 과거와 같은 ‘반공(反共)이냐, 아니냐’는 대결적인, 방어적인 방향에 계속 갇히면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리는 불모지가 될 겁니다.”
원 의원은 “한나라당과 보수 우파는 변화를 주도하느냐, 변화에 이끌리느냐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결국 타의에 의해 재편당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념 과잉의 정치를 반성하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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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야 모두 정당위기를 극복할 참신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 고민거리다. 새로운 인물의 수혈이 쉽지 않고, 설령 찾았다고 하더라도 당적을 거부하는 현실이 절망적이다. 사진은 정쟁으로 텅 빈 국회 본회의장. |
김효석 의원은 “‘안철수·박원순 현상’은 여야 정당으로 하여금 이념 과잉의 정치는 없었는지 반성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김 의원의 말이다.
“우리 정치는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분법적인 접근이 정당정치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니 어떤 문제가 생겨도 토론할 필요가 없었어요. 답이 이미 나와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정책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어요. 예를 들어 비정규직, 재벌, 복지문제에서 보수냐 진보냐의 이념적 접근을 떠나, 시대에 맞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를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시대적 해법이 진보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지만, 이념의 과잉은 없었는지도 반성해야 합니다.”
―야권 대통합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여러 층위의 야당이 모이면 기존 민주당의 정체성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요?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통합에 임해야 한다는 확고한 원칙이 필요합니다. 다른 야당들과 통합논의를 하면서 일방적으로 내주는 식의 논의는 정치 공학적으로 가능할 수는 있어도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노당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는 종북주의(從北主義)라든지, 지나친 친노조 성향, 반시장주의는 거부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장경제가 보완돼야 하지만, 시장경제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향후 정당정치가 이념 중심 대결을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하나요?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할 것입니다. 정당의 구조와 운영방식이 과거와 전혀 다른, 정책과 비전 면에서도 보수·진보 하던 이념 과잉 정치에 대한 반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조직을 만드는 것이 정당인데, 이제는 조직이 없어도 SNS로 동원이 가능하다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결실을 볼 것인가는 지켜봐야겠지만 혁명적인 변화가 도래할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당 박병석 의원은 “대중은 이념적으로 사고하지 않지만, 대중이 지향하는 가치는 이념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며 “현재의 변화를 탈이념, 탈정당이라 규정하는 것은 변화의 방향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박 의원의 말이다.
“탈이념이 아니라 이념을 뛰어넘는 가치의 문제를 더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당장 양극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건전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내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분명한 것은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 프레임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박 의원은 ‘안철수·박원순 현상’의 원인이 단순한 정당과 이념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대중의 의사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하는 낡은 정당체제에 대한 거부라는 것이다.
“지난 8월 국회 예산결산위에서 김황식(金滉植) 총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영국의 폭동과 그리스의 대규모 시위 원인이 무엇이냐’고요. 강 건너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시민사회가 정치에 뛰어드는 현상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실업문제, 교육과 보육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더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봅니다. 국민은 이념보다 생활정치와 현실적인 문제를 더욱 갈망하고 있습니다. 진보정당이 진보적 대중을 제대로 견인하지 못하고, 보수정당이 보수적 대중을 만족시키지 못한 정당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 것이지요.”
‘左클릭’ 한나라당에 실망한 보수 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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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원책 변호사. |
10·26 서울시장 보선에서 이석연 전 법제처장에 이어 새로운 보수진영 후보로 거론됐던 전원책(全元策) 변호사는 “한나라당은 이미 우파정당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한나라당은 영국의 노동당 정강정책보다도 더 왼쪽으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
“과거 좌우이념을 통틀어 선명성이 가장 뚜렷한 정당은 민노당입니다. 스스로를 좌파라고 밝히며 마르크시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정당정책으로 천명할 정도였으니까요. 한나라당과 옛 민주당(새천년민주당)은 정당정책이나 강령이 거의 비슷한데도, 한쪽은 보수라고 말하고 한쪽은 진보라고 외쳤지요. 사실 좌우 대립은 광복 이후부터 시작됐지만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 정권 때는 정당 간 이념대립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민노당이 좌파성을 드러내고, 유럽에서 진보정당이 집권하면서 ‘진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전 변호사는 “이후 출범한 노무현 정권의 열린우리당은 이념투쟁을 열심히 했다”며 “이념노선이 뚜렷하면 정당정치가 책임정치가 구현되는 장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는 바람직한 몸짓이었다”고 지적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당내 이념적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었고, 그러다 보니 그 정당을 이념정당이라 하기에 조금 모호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념으로 뭉쳤다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세력, 권력쟁취를 위해 끼리끼리 뭉쳤다고 봐야겠지요. 한나라당 역시 다를 게 없었습니다. 홍준표(洪準杓) 대표와 원희룡·남경필(南景弼) 의원의 경우 왼쪽에 가까운 이념적 성향을 지니며 좌우를 넘나들었습니다. 어쨌든, 열린우리당은 이념정당을 지향했고 최초로 기간당원제를 도입하는 등 상향식 민주주의를 시작했지만, 민생을 도외시했어요. 단적인 예가 부동산 정책이었습니다. 집권 5년 동안 31번의 부동산 정책을 시장에 내놓았지만 전부 다 실패했어요. 경제성장이 더뎌지고 서민의 살림이 궁핍해지자 반사이익으로 이명박 정권이 탄생했어요.”
하지만, 이명박 정권 역시 무너진 중산층을 살리지 못했고 결국 정당은 물론 정치 자체를 불신당하게 된다. 전 변호사는 “한나라당은 자기 이념의 정체성을 굳히지 못한 채 야당을 훔쳐보며 열심히 ‘좌(左) 클릭’을 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됐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보수우파의 시각에서 볼 때 한나라당 의원 중 정통 보수의 목소리를 내는 이는 정몽준(鄭夢準)·심재철(沈在哲)·장윤석(張倫碩)·전여옥(田麗玉) 의원 정도고, 나머지는 기회주의적이며 좌파적 성향이 강합니다. 특히 한나라당 소장파와 친박계 의원들은 이념보다는 기득권을 위해 좌파성향을 더 가미하고 있어요. 한나라당이 보수노선을 명확히 하면서 우파진영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면 정당으로서의 존립이 위태로울 겁니다. 이념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지 못할 경우 역사에 남을 만한 정계개편이 올 연말쯤 올 것으로 판단합니다.”
“낙천·낙선운동은 시민운동의 묘혈을 판 운동”
국회와 정당의 역할과 시민단체의 역할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며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시민단체는 국회의 역할을 보완하고 감시할지언정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 윤리교육과 박효종(朴孝鍾) 교수는 “만일 시민단체가 국회의 기능을 ‘보완’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대체’하고자 한다면, 대의 민주주의의 흠결을 넘어서는 직접 민주주의의 폐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과거 다수당을 확보하지 못한 소수정권이 자신들의 정치력과 통치력을 극대화하고 자신들의 이념적 성향과 비슷한 시민단체들과 제휴해 국회와 야당인 다수당을 포위하는 형국을 연출했습니다. 소수정권이 시민단체들을 동원해 국회나 다수당을 압박하는 이른바 ‘꼼수의 행태’는 국회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박원순 변호사가 주도한 낙천·낙선운동이었다.
선진화시민행동 상임대표인 서경석(徐京錫) 목사가 1989년 경실련을 창립하자, 박원순 변호사는 1994년 참여연대를 창립했다. 두 사람은 이념 면에서 달랐지만, 부정부패 반대, 경제정의 실현, 시민참여, 지방자치 등에서는 생각이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서 목사는 박 변호사와 다른 길을 걸었고 지금은 그와 대척점에 서 있다. 서 목사의 말이다.
“한국 역사에 낙선낙천운동처럼 크게 홍보가 된 시민운동이 또 있었을까요? 한 달 내내 모든 언론의 톱뉴스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시민운동의 묘혈을 판 운동이었어요. 이 운동 이후 시민운동은 편향적인 운동으로 간주됐고, 시민으로부터 외면당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지요. 박원순 변호사는 이 운동의 최대 수혜자지만 사실은 시민운동 몰락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입니다.”
바른사회시민회의 전희경(全希卿) 정책실장은 “시민사회 후보가 새로운 정치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표현은 지나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원순의 선대위 참여인물 면면을 보면, 대개가 손학규, 유시민(柳時敏) 등 기성 정당의 대표들입니다. 시민사회 후보의 역량만으로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기성 정치와 정당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덮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가능성이 커요. ‘정당 옷’을 안 입는 것이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지, 탈정당, 탈정치의 유의미한 현상으로 보긴 어려워요.”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민호 교수는 “깊이 있는 검증 한 번 못 받은 몇몇 사회명망가들과 실체가 불분명한 시민사회단체에 시정(市政)을 맡길 수 없는 까닭은 이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면 누가 남아 남은 문제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질 것인가요? 눈이 못났다고 하여 눈을 떼어버릴 수 없듯이 기성 정당에 염증을 느낀다고 해서 자유민주주의 요체인 정당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동국대 법무대학원 김상겸 원장 역시 “무소속 시민운동가가 두드러지는 형국은 대한민국 장래와 발전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지금 시점에서 정당제 민주주의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무소속 시민운동가가 갑자기 등장하는 식의 충격적인 방법은 국민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되돌아갈 뿐입니다. 현대 정치는 한두 명의 개인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구축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죠. 이번 보궐선거에서 보여주는 현상은 일시적이라 생각됩니다.”⊙
김석현
(20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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