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은, 김원홍에게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듣고 싶다”
⊙ ‘Remove Group of Mr. JHANG’
⊙ 장성택 죽음의 시작, 수산기지 이관
⊙ 장수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최룡해, 그를 아끼던 장성택 겨냥
⊙ 북에서 ‘하인리히 뮐러’로 불렸던 김원홍… 토사구팽의 대명사
도희윤
1967년생. 연세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리베르타스 대표, 행복한통일로 대표, 한국자유회의 사무총장, 뉴라이트전국연합 북한인권특별위원장,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역임
⊙ ‘Remove Group of Mr. JHANG’
⊙ 장성택 죽음의 시작, 수산기지 이관
⊙ 장수길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최룡해, 그를 아끼던 장성택 겨냥
⊙ 북에서 ‘하인리히 뮐러’로 불렸던 김원홍… 토사구팽의 대명사
도희윤
1967년생. 연세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리베르타스 대표, 행복한통일로 대표, 한국자유회의 사무총장, 뉴라이트전국연합 북한인권특별위원장,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역임
- 사진=조선DB
R.G.J 작전이란 영문으로 ‘Remove Group of Mr. JHANG’으로 지칭된다. 장성택 일당 제거 작전을 일컫는다. 북한식 영문 표기에도 나와 있듯이 장성택 개인만 표적이 된 것이 아니라 조직(그룹) 차원에서 일망타진(一網打盡)이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이 같은 비화를 공개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챙겨야 할 내용도 많았고 공개 이후 계획을 세워야 하는 점도 있었다. 확언컨대 이번에 공개되는 내용은 풍문이나 장성택 제거 과정에서 북한 당국이 발표한 3000자 판결문 등에 기초한 참고자료가 아니라, 실제 제거 작전에 돌입했던 국가안전보위부가 보유한 ‘사건처리 문건’에 기초하였음을 우선 밝힌다. 일부 언론 보도에서는 북한 고위간부의 증언을 토대로 장성택 제거 작전은 ‘국가안전보위부’의 작품이 아니라 노동당 조직지도부 내 특수부서에서 진행했다고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한 진위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 사건 자료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나온 것으로 이에 근거하여 사실관계를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하인리히 뮐러’ 김원홍
전 세계가 목도하는 가운데 국가보위부 특별재판부가 장성택 일당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 장면을 고스란히 외부에 노출했다. 내부에서 어떤 비밀작전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국가안전보위부가 최종 결론을 내고 사건을 종결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필자가 최종 사건처리 문건을 어떻게 입수했는지 등에 대한 것은 보안상 밝히지 않겠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문건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당시의 권세가도 손에 넣지 못했던 문건이다. 다시 말해 하늘이 돕지 않았으면 문건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어쨌든 북한 공산 전체주의 역사상 최고 권력자가 가슴 졸이며 추진했을 정적 제거 작전의 언저리를 조금만이라도 세상에 공개하게 되어 참으로 다행으로 생각한다.
장성택 제거 작전의 총책임자는 당시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원홍이었다. ‘북한의 하인리히 뮐러(나치 게슈타포 총책)’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충실한 권력의 주구로서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김원홍은, 2019년 6월 황병서와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최고 존엄조차 긴장케 했던 장성택 일당을 제거하는 데 제일의 수훈자는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사건처리 문건을 별도로 보관해 나중에라도 세상이 그 비망록(備忘錄)을 알기를 원했던 것일까. 사건처리 문건을 꼼꼼히 살펴본 필자의 북한 내부 협력자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장성택의 반혁명 전복 기도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실제 장성택이 정변(政變)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김정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장성택의 처형
도대체 2013년 12월, 평양 권력의 심층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다음은 장성택과 관련한 사건 전개 일지다. 여러 언론에서도 보도한 바가 있기에 간략히 발췌, 기술한다.
〈2013년 11월 18일 북한 권력의 심장부에 있던 장성택이 가택 연금되고, 그의 측근인 노동당 행정부의 리룡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체포되었다. 리룡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은 ‘월권’과 ‘분파행위’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거부’ 등의 혐의를 받았으며, 11월 27일 경 노동당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됐다. 12월 8일, 노동당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장성택을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정치국 확대회의는 장성택을 유일영도체계 저해, 당의 노선과 정책 왜곡, 부정부패행위, 도덕적 해이 등의 죄목으로 비판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4일 후인 12월 12일, 장성택은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 회부돼 국가전복 음모행위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장성택의 최측근이었던 리룡하와 장수길의 처형 대목이다. 일부 언론을 통해 장수길 부부장과 군부 세력이 수산업 기지 등으로 다툼을 벌인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는 언급이 있는데, 내용은 사실이지만 이면을 제대로 보지 못한 부분이 있어 이것부터 짚어보도록 하자.
‘전략로케트군인들과 54부 군인들 간의 유혈충돌’
수산업 기지가 무엇이기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장성택 몰락의 원인이 된 것일까. 당시 현장으로 가보자. 지금부터 일부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현장감을 더할 수 있도록 ‘대화’ 형식을 빌려 기술한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북한식 표현을 그대로 썼다). 이런 방식은 북한 내부 협력자가 원했던 점임을 말씀드린다. 이 내용 또한 사건처리 문건에 기초했음은 물론이다.
〈2013년 5월 어느 날, 평안남도당위원회에서는 온천군당위원회에서 통보한 “전략로케트군인들과 54부 군인들 간에 류혈충돌”이라는 자료를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일보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온천군에 위치한 참조개 양식을 전문으로 하는 54부(승리무역회사) 소속 수산기지로, 기지 소유의 건물과 양식장 구역을 조선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의 타격훈련장으로 넘길 당시 최고사령관의 명령서를 가지고, 그 집행을 위하여 전략로케트군의 참모장을 비롯한 몇몇 군인이 찾아왔는데, 수산기지 책임일군들과 군인들은 직속 상급으로부터 그런 내용을 전달받지 못했다면서 상급에 문의하겠으니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하였고, 전략로케트군 참모장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어떻게 관철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따위 소릴 줴쳐대냐고 서로 옥신각신하던 끝에 류혈적인 란투극을 벌렸다는 것이였다. 54부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부 소속 무역부의 대내 명칭이며 승리무역회사는 대외 명칭이다.
200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 악화되고 후계자 추대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김정일 위원장은 후계자로 될 국방위원회 김정은 제1부위원장의 통치를 보좌하기 위한 비상설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따라 통치 전반을 보좌할 장성택, 김경희를 중심으로 분야별로 전문적인 보좌를 담당할 인물들이 선출되었는데, 그 인물들로서 고위 간부들의 인사 조치를 보좌할 김평해 간부부장, 군사 보좌에 리영호 총참모장, 쿠테타 예방을 위하여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발탁되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은 장성택이였다. 그것은 장성택이 예나 지금이나 김정일 위원장이 믿을 수 있는 동지이기 전에 매부였고, 또 독재 가문의 일원으로써 세습정치의 원리와 묘리를 제대로 터득하고 체제 유지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였기 때문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그런 장성택에게 혁명자금의 금고 힌트까지 넘겨주었던 것이다. 또한 행정부 소속이 아니더라도 장성택이 요구하는 무역기관이나 외화벌이 단체는 즉시 그의 지도하에 넣도록 체계를 세워줬다.
이런 리유로 공화국의 일부 기관과 잘나가는 무역업체들이 행정부의 지도를 받는 기관으로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기관들로써 대외에 널리 알려진 대성지도국, 대흥관리국, 모란지도국 등 당 38, 39호실 산하 지도국들과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기관이었던 세관총국, 그리고 총정치국 조직부 산하의 54부였다.
54부 소속 수산기지 이관을 둘러싸고 전략로케트군과 54부 군인들 사이에 류혈적인 란투극이 벌어진 다음 날, 김정은은 집무실에서 사건에 대한 총정치국장 최룡해의 보고를 청취하였고, 이어 장성택과 장수길을 함께 불러 사건에 대한 질책과 함께 수산기지 이관에 대하여 지시했다. 김정은의 집무실을 나와 장성택의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장수길은 장성택에게 물었다.
“이상한 예감이 듭니다. 무슨 군사비밀에 속하는 문제가 있다고 부장 동지도 모르게 지시했단 말입니까? 혹시….”
대흥지도국 보고서
장수길은 이렇게 말하며 장성택을 바라봤다. 장수길을 꾸짖은 장성택은 그가 사무실에서 나가자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문건을 집어 들었다. 대흥지도국에서 올린 제의서였다. 평안북도 동창군에 있는 대흥지도국 산하 대휴동 광산 지역에서 자체로 개발하여 운영되고 있는 여러 무역회사 광산들이, 수출용 정광을 자체 생산물에 의거하지 않고 현금을 지불하면서 원천 동원하는 탓에, 대휴동 광산의 일부 로동자들이 돈에 환장하여 광산에서 생산한 고품위 금광석과 정광을 훔쳐다 팔아먹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하여, 정광 생산에 적지 않은 지장을 끼치고 있으니 대책을 세워달라는 대휴동 광산 지배인의 보고 내용이 씌여져 있었다.
장성택은 제의서를 읽고 나서 대흥지도국을 제외한 38, 39호실 산하의 다른 지도국장들에게 전화로 이 같은 현상이 산하 광산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는지 물었다. 다른 지도국들에서도 이와 류사한 현상들 때문에 지장을 받는다고 보고하자, 장성택은 즉시 보안상에게 전화를 걸어 “비법적인 광석가공설비를 차려놓고 돈벌이를 하는 단체, 공민들을 엄벌에 처할 데 대하여”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낼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최고검찰소 7국장에게 직접 전화하여 전국적으로 국영광산들을 제외한 무역회사 산하 광산들의 광산 개발로부터 경영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없는지 철저히 조사하고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성택의 방심
바로 이 지점이 다음 순으로 살펴볼 최고검찰소와 최고재판소 관련 사건들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아마도 장성택은 자신의 이런 지시가 자신의 목줄을 끊어놓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장성택은 지난 수산기지에서 벌어진 사건을 오래전부터 이 나라 고위층 간에 자주 발생하곤 했던 이권싸움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예사롭게 생각했다. 이전에 리용무와 오극렬이 다투곤 했던 것처럼, 김일철과 김영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자기를 상대로 김정은을 꼬드긴 놈이 최룡해인지 리병철인지 괘씸하기 그지없고 어이없기도 했지만,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김정은의 권위와 위신을 세워줘야 했으며, 그를 위해 장수길의 수산기지를 버리는 것쯤은 장성택에게 있어서 일도 아니었다.
가재는 게 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김정은과 자기는 가족이며 한통속일진대 이런 초개념적인 인간사도 모르고 김정은에게 이번 수산기지 이관을 부추긴 놈들이나, 자기와는 일절 상의 없이 관할 부문을 전략로케트군에 이관케 하는 비정상적인 지시 체계를 빗대고 수산기지를 내놓지 않으려는 장수길이 가소롭기 그지없다고 장성택은 생각했다. 게다가 자기는 김정은을 어째 볼 생각이 꼬물만큼도 없으며, 김정은 역시 자기를 칠 생각은 꿈에도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또한 김정은도 자기와 같은 그런 초개념적인 가족관과 공생 리치를 알고 있을 것이며, 인간적으로 정치적으로 철이 든 젊은이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김정은은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원홍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의 집무실로 호출했다. 김정은은 왜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원홍을 호출한 것일까. 앞서 언급한 대로 최룡해가 뭔가를 꾸미고 있었음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원홍을 호출한 김정은은 다음과 같이 지시를 내린다.
“지금 간부들의 동향에 대한 감시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김정일) 장군님께서 서거하신 이후로 일부 간부의 일상에서 이전 때와는 다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이 배신자들이 머리를 쳐들기 적합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의 속심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간벽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들어야겠습니다.”
그러고는 서류 한 부를 김원홍에게 건네주면서 돌아가서 읽어보고 자기에게 다시 오라고 말했다.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원홍은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지난 2012년 11월 5일,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의 동상 제막식을 진행하던 날 제막식에 참가했던 김정은이 자기에게 조용히 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수령님들의 동상을 제일 먼저 모신 기관은 국가안전보위부가 처음입니다. 국가안전보위부장 동무는 국가안전보위부를 유사시 내가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수령의 보위대로 잘 준비시켜야 하겠습니다.”
김정은이 건네준 서류
김원홍은 김정은이 건네준 서류를 펼쳤다.
서류에는 “최고검찰소 수사국장 방창수의 불건전한 사생활 자료”라는 제목 밑에, 수사국장 방창수가 최고검찰소의 당적 지도를 책임진 중앙당 행정부 과장 리용국을 등 대고 검찰소 당위원회는 안중에도 없이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으로 놀아대고 있으며, 최근에는 평양시 평천구역에 있는 “안산정봉사소”의 단골손님으로 출입하면서, 봉사소 안에 있는 식당 책임자와 마약을 사용하며 부화방탕한 짓을 일삼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국가의 법을 어기며 돈벌이를 하는 일부 장사꾼과, 상업망들의 위법행위를 눈감아 주고 보호해주는 대가로 고급 승용차를 뇌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십만 달러의 현금까지 상납받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엄중한 것은 자신과 공무관계로 자주 마찰을 빚곤했던 최고재판소 전 책임판사 심영일을 시기하고 중상하다 못해, 리용국과 결탁하여 그에게 갖은 감투를 씌워 끝끝내 사형케 했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최고재판소 사건에 대해 김정은이 지시를 내리자 김원홍은 의아했다.〉
사건의 시작점인 최고재판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2012년 3월 어느 날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위치한 최고재판소에서는 중앙당 행정부의 몇몇 일군과 최고재판소와 최고검찰소, 보안성의 책임일군들의 참석하에 최고재판소 전 책임판사 심영일의 범죄에 관한 재판과 함께 판결 집행이 진행되었다. 기소문 낭독을 심영일의 사건을 담당했던 최고검찰소 방창수 수사국장이 하였다. 그에 따르면, 심영일이 책임판사의 직권을 이용하여 혁명과업 수행에서 본의 아니게 과오를 범한 일부 책임일군에게 어마어마한 감투를 씌워, 그들이 과오를 씻고 다시 혁명대오에 설 수 없도록 무기노동교화형 또는 사형과 같은 극형을 선고하여 그들을 육체적으로 정치적으로 영영 매장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심영일의 이 같은 행위는 수령, 당, 대중이 혼연일체를 이룬 북한의 사회주의 일심단결을 파괴하는 고의적인 반당, 반국가적대행위이며, 당에서 품들여 키운 아까운 일군들에 대한 살인테러행위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심영일은 공화국 형법 158조에 의하여 사형을 언도받았고 판결 집행은 교수형으로 즉시 집행됐다.
그때로부터 14개월 후인 2013년 5월 ‘전략로케트 군인들과 54부 군인들 간의 유혈충돌’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최고재판소 사건과 수산업 기지에서의 충돌은 무슨 연관관계가 있을까. 여기에 왜 최룡해의 농간이 있었을 거라는 의혹이 있는 것일까.
김정일, 장성택 건의로 상업 활동 허용
사건의 중심부로 들어온 최룡해와 장성택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이의 핵심 고리가 바로 장수길이다. 그렇다면 장수길은 어떤 인물인가.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사이에 북한에는 국가무역을 선도하는 쌍두마차 격인 인물들이 있었다. 그 쌍 기둥을 이루고 있던 인물들은 흥성무역회사와 강봉무역회사를 이끌었던 최영국과 승리무역회사 사장이었던 장수길이었다. 이들 모두가 군부 무역업체 수장들이었고 석탄 수출의 대부들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같은 해에 사망했는데, 최영국은 2013년 7월에 간암으로 사망했고 장수길은 11월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최영국이 병사하지 않았다면 장수길처럼 처형당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되어 처형됐거나 처형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불명예스러운 최후가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인 듯 말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노동당에서 무역업자들을 보는 눈길은 곱지 않으며 그들에 대한 평가 또한 인색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당에서 무역업자들을 나라의 질서가 한동안 마비됐던 지난 고난의 행군 시기에 대두한 혁명도 반혁명도 아닌 중간계급으로 보고 있으며, 오직 저들의 금전적 이해관계에 따라 혁명의 편에 설 수도 있고 반혁명의 편에 설 수도 있는 결코 독재체제에 이롭지 못한 존재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300만 명이 굶어 죽었던 지난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일 위원장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당시의 비극을 몰아왔다고 인정했으며, 장성택의 꾸준한 건의로 마침내 시장을 중심으로 인민들이 벌이는 각종 형태의 상업 활동을 허용했다. 하여 공화국을 파멸 직전의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었으며 이전 계획경제 시대보다 향상되고 안정적인 생활을 향유하는 백성들이 외치는 “김정일 장군 만세!”의 환호를 다시금 들을 수 있었다. 노동당에서는 혁명의 편에서 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열차에 선참으로 몸을 실은 무역업자들이 혁명이 맡겨준 과업을 저들의 이익이 침해당하지 않는 선에서만 수행하려 하는 보신주의자들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장수길과 최룡해
이와 같은 북한 노동당의 편협한 견해로 인해 무역업자들이 당과 국가의 요직에 승진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이 극히 드문 사례의 주인공이 바로 장수길이었다는 것이다. 본래 장수길의 직속 상급은 장성택이 아니라 총정치국 조직부장이었던 리룡하였다. 리룡하의 직속 상급 역시 장성택이 아닌 당시 최룡해 총정치국장이었다. 당시 장성택은 모든 무역회사의 경영실태를 살펴보면서 수중에 장악할 여러 무역업체를 체크하였다. 그 과정에 54부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총정치국장 최룡해에게 54부 책임일군을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장성택은 리룡하를 먼저 만나 장수길과 54부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를 듣고, 최룡해 총정치국장과 토론하겠으니 당생활 총화를 비롯한 정치 조직생활은 당분간 총정치국에서 하고, 행정적 지시는 자기에게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리룡하는 장수길이라는 부하 덕분에 무능하기로 소문난 최룡해로부터 장성택이라는 핵심 권력자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군 당사업을 지도했던 경력으로 인해 당시 인민보안성의 당적 지도를 담당하는 행정부 부부장으로 승진되게 되었던 것이다.
장수길은 2000년대 초엽에 참조개 양식업을 시작으로 무역업의 첫발을 뗐으며, 그 첫발을 뗀 곳이 바로 전략로케트군에 이관해야 할 온천군의 그 수산기지였다고 한다. 운이 좋아 사업을 시작한 그해에 큰 수익을 거두고 여러 가지 물품의 수출입 허가를 받아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특히 석탄 수출길을 먼저 열었고 그 수출액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장성택, 장수길 발탁
54부가 노동당 행정부에 소속되기 전 2006년 어느 날, 장수길은 당시 직속 상급이었던 리룡하 총정치국 조직부장과 함께 장성택을 처음 만났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장수길의 손을 잡으며 장성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장 동무의 지난 시기 사업성과에 대해선 보고를 받았소. 많은 일을 했더구먼. 그런데 말이요, 당에서는 동무가 지난 시기 거둔 사업성과에 만족하지 않았으면 하오. 지금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는 국가경제발전계획실현을 위한 대규모적인 공사와 건설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소. 이런 진군 속도에 발맞춰 그에 필요한 자금이 원만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소. 그래서 우리 당에서는 무역 분야의 일군들이 수출품의 값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국가발전강화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대규모 투자를 거래업체나 기타 외국 사업가들로부터 유치해낼 것을 바라고 있소. 장 동무, 좀 생각해보시오. 우리는 혁명가들이요. 이제부터는 동무가 보신적이고 리기적인 장사치의 근성을 털어버리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대인으로서의 새 모습으로 일해줬으면 하오.”
장수길은 장성택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으며, 그동안 자기를 장사꾼내지 하인 대하듯 했던 당 기관, 감독통제기관에 당했던 지난날의 설움을 잠시 회상하고는 장성택에게 심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부부장 동지, 외람된 질문이지만 말씀하신 대로 제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대인이 된다면 당에서는 제게 어떤 대인다운 옷을 입혀줍니까? 예를 들어 제가 무역 분야에서 벗어나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이 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장성택은 장수길이 뭘 바라는지 그의 질문을 듣고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자기와 같은 무역업자들에 대한 대접을 바로 해달라는 뜻이었다. 국가경제발전에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이들을 대하는 당의 입장과 태도가 조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 동무, 내 동무의 바람이 뭔지 알았고 그것을 꼭 이뤄주겠소.”
그러고는 서기를 불러 사진을 찍게했다.
장수길은 중국 거래자들을 투자처로 유도하는데도 장성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적극 활용했다. 중국공산당의 일부 권력가들은 부정축재한 거액의 현금을 세탁할 목적으로 하수인들을 내세워 장성택이라는 큰 배경을 업은 장수길과의 각종 무역거래에 응하였다. 그들은 석탄이나 정광, 수산물 등 각종 수출품의 대금을 장수길에게 거액의 현금과 각종 설비와 자재 등으로 후불하였고, 그 상환에 대해 독촉도 하지 않았으며 그런 무질서한 거래는 회계를 하는데도 혼란이 미치는 정도였다. 이러한 이상한 무역거래의 흐름 속에 장수길이 단 일주일 동안 수출한 무연탄 46만t을 구매한 중국의 어느 한 에너지 생산업체는, 석탄대금 전액을 지불하고도 대규모적인 타일 생산기지를 건설해준다는 투자결정까지 한다. 이렇게 되어 대동강 타일공장이 생겨나게 되었다. 장수길에게는 노력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최룡해의 앙심
장수길을 총정치국이란 닭장 속에 사는 암탉에 비유한다면, 그가 낳는 달걀에 대한 소유주는 최룡해가 아닌 장성택이란 현실을 쓰든 달든 최룡해로서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장성택과 최룡해는 일반 사회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숙원(宿怨)이 장수길과 리용하로 말미암아 존재했던 것이다. 능력은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아버지 최현(崔賢)으로부터 이어온 보스 기질을 타고난 최룡해가, 수십 년간 장성택의 위세에 눌려 기세 한 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르상티망[원한(怨恨), 앙심(怏心)]이 종국적으로 장성택 일당의 제거로 나타났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당시 사건을 두고 조연(助演)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 이웃 나라 중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언급들이 타전되었다. 중국 공산당교(黨校)의 핵심 인사가 한 전언(傳言)이다.
“잠잠하던 조선에서 또 상황이 벌어졌다. 김정일이 죽기 전에 젊은 아들이 권력의 기초가 부족하고 정치 경험이 없어서 8대 장관들이 김정은을 도와줄 수 있도록 안배했다. 그중 조선인민군 총장 리영호와 장성택이 권력의 제일 높은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김정은이 권력을 잡고 1년이 되지 않은 시간에 반혁명죄로 리영호를 청소했다. 이 사건을 공작한 사람이 바로 장성택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1년이 지나 장성택 또한 리영호와 같은 운명이 되었다.”
이번 작전을 주도했고 토사구팽(兔死狗烹)의 대명사가 된 김원홍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살펴보면서 마무리를 지어보자. 북한의 김원홍을 하인리히 뮐러라 칭하는 것은,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3대 수장(首長)이었던 뮐러와 직책도 같고 저지른 악행도 비슷해서라고 한다.
지난 시기 북한에서는 소련의 ‘푸룬제 아카데미’로 유학했던 군장성급들을 쿠데타 세력으로 모조리 처형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이를 실행했던 보위사령부의 반탐국장이 바로 김원홍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 공로로 보위사령관이었던 조명록이 총정치국장으로 승진하면서 보위사령관이 되었다.
보위사령부 숙청
원래 북한의 공식 권력기관 중에 국가안전보위부의 위상은 보위사령부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최고권력자의 의중에 따라 부침(浮沈)이 많다 보니 상당 기간 보위부의 위상이 보위사령부에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이 최고통치자가 되면서 보위사령부 소속이었던 김원홍을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하면서 보위부에 힘을 실어줬는데, 그 첫 번째 조치로 그간 득의양양하던 보위사령부 상층부의 부정부패행위들에 대한 척결을 단행케 했다.
2012년 5월의 일이다. 어느 날 새벽, 만수대 거리에 새로 선 아파트 옆을 지나던 김정은이 아파트 주차장에 군 번호판을 부착한 승용차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주차장의 승용차들은 어느 군부대 차들인가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수행하던 간부 중 한 명이 상황을 알아보고 보고하기를, 주차장에 세워진 차량들은 모두 보위사령부 소속 차량이고 사는 사람들도 보위사령부 일군들이라고 하자, 대로한 김정은이 옆에 서 있던 김원홍에게 당신 밑에 있던 사람들이니 당신이 직접 조사해보라고 호령했다는 것이다.
불호령을 받은 김원홍은 즉시 ‘횃불 체포조’를 출동시켜 그 아파트에 사는 보위사령부 일군들을 모조리 체포했으며, 그런 후 영화, 예술인들에게 압수한 아파트들을 선물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보위사령부를 총정치국에서 직접 관할하는 인민군보위국으로 개편시켜버렸다. 김원홍 앞에는 더 이상 견줄 대상이 없어진 셈이었다. 김원홍은 자신의 심복 부하에게 장성택 사건처리 문건을 별도로 보관토록 하고, 일단은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서서히 조여져 오는 ‘덫’
하지만 최고권력은 이마저도 알고 있었던 걸까. 김원홍의 처형에 대한 소식은 별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사건처리 문건을 소지했던 김원홍의 심복에 대한 근황 또한 더는 나온 것이 없는 실정이다. 비운의 권력자 장성택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54부 수산기지에서부터 북한 전역의 막강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당대의 실력자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에는, 일반 상식을 넘어서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서서히 조여져 오는 ‘덫’이 존재했음을 여기서도 확인된다.
사건처리 문건 말미엔 이렇게 적혀있다.
“당에서는 장성택 일당의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알고 주시해오면서 여러 차례 경고도 하고 타격도 주었지만 응하지 않고 도수를 넘었기 때문에 더는 수수방관할 수 없어 장성택을 제거하고 그 일당을 숙청함으로써 당 안에 새로 싹트는 위험천만한 분파적 행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기었다.”⊙
필자가 이 같은 비화를 공개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챙겨야 할 내용도 많았고 공개 이후 계획을 세워야 하는 점도 있었다. 확언컨대 이번에 공개되는 내용은 풍문이나 장성택 제거 과정에서 북한 당국이 발표한 3000자 판결문 등에 기초한 참고자료가 아니라, 실제 제거 작전에 돌입했던 국가안전보위부가 보유한 ‘사건처리 문건’에 기초하였음을 우선 밝힌다. 일부 언론 보도에서는 북한 고위간부의 증언을 토대로 장성택 제거 작전은 ‘국가안전보위부’의 작품이 아니라 노동당 조직지도부 내 특수부서에서 진행했다고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한 진위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 사건 자료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나온 것으로 이에 근거하여 사실관계를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하인리히 뮐러’ 김원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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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제거 작전의 총책임자는 당시 국가안전보위부장이었던 김원홍이었다. 사진=조선DB |
장성택 제거 작전의 총책임자는 당시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원홍이었다. ‘북한의 하인리히 뮐러(나치 게슈타포 총책)’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충실한 권력의 주구로서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김원홍은, 2019년 6월 황병서와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최고 존엄조차 긴장케 했던 장성택 일당을 제거하는 데 제일의 수훈자는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사건처리 문건을 별도로 보관해 나중에라도 세상이 그 비망록(備忘錄)을 알기를 원했던 것일까. 사건처리 문건을 꼼꼼히 살펴본 필자의 북한 내부 협력자는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장성택의 반혁명 전복 기도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실제 장성택이 정변(政變)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김정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장성택의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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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장성택 처형 5일 만의 김정은 모습. 사진=조선DB |
〈2013년 11월 18일 북한 권력의 심장부에 있던 장성택이 가택 연금되고, 그의 측근인 노동당 행정부의 리룡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체포되었다. 리룡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은 ‘월권’과 ‘분파행위’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거부’ 등의 혐의를 받았으며, 11월 27일 경 노동당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됐다. 12월 8일, 노동당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장성택을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정치국 확대회의는 장성택을 유일영도체계 저해, 당의 노선과 정책 왜곡, 부정부패행위, 도덕적 해이 등의 죄목으로 비판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4일 후인 12월 12일, 장성택은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 회부돼 국가전복 음모행위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장성택의 최측근이었던 리룡하와 장수길의 처형 대목이다. 일부 언론을 통해 장수길 부부장과 군부 세력이 수산업 기지 등으로 다툼을 벌인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는 언급이 있는데, 내용은 사실이지만 이면을 제대로 보지 못한 부분이 있어 이것부터 짚어보도록 하자.
‘전략로케트군인들과 54부 군인들 간의 유혈충돌’
수산업 기지가 무엇이기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장성택 몰락의 원인이 된 것일까. 당시 현장으로 가보자. 지금부터 일부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현장감을 더할 수 있도록 ‘대화’ 형식을 빌려 기술한다는 것을 유념하기 바란다(북한식 표현을 그대로 썼다). 이런 방식은 북한 내부 협력자가 원했던 점임을 말씀드린다. 이 내용 또한 사건처리 문건에 기초했음은 물론이다.
〈2013년 5월 어느 날, 평안남도당위원회에서는 온천군당위원회에서 통보한 “전략로케트군인들과 54부 군인들 간에 류혈충돌”이라는 자료를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일보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온천군에 위치한 참조개 양식을 전문으로 하는 54부(승리무역회사) 소속 수산기지로, 기지 소유의 건물과 양식장 구역을 조선인민군 전략로케트군의 타격훈련장으로 넘길 당시 최고사령관의 명령서를 가지고, 그 집행을 위하여 전략로케트군의 참모장을 비롯한 몇몇 군인이 찾아왔는데, 수산기지 책임일군들과 군인들은 직속 상급으로부터 그런 내용을 전달받지 못했다면서 상급에 문의하겠으니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하였고, 전략로케트군 참모장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어떻게 관철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따위 소릴 줴쳐대냐고 서로 옥신각신하던 끝에 류혈적인 란투극을 벌렸다는 것이였다. 54부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부 소속 무역부의 대내 명칭이며 승리무역회사는 대외 명칭이다.
200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 악화되고 후계자 추대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김정일 위원장은 후계자로 될 국방위원회 김정은 제1부위원장의 통치를 보좌하기 위한 비상설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따라 통치 전반을 보좌할 장성택, 김경희를 중심으로 분야별로 전문적인 보좌를 담당할 인물들이 선출되었는데, 그 인물들로서 고위 간부들의 인사 조치를 보좌할 김평해 간부부장, 군사 보좌에 리영호 총참모장, 쿠테타 예방을 위하여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발탁되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은 장성택이였다. 그것은 장성택이 예나 지금이나 김정일 위원장이 믿을 수 있는 동지이기 전에 매부였고, 또 독재 가문의 일원으로써 세습정치의 원리와 묘리를 제대로 터득하고 체제 유지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였기 때문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그런 장성택에게 혁명자금의 금고 힌트까지 넘겨주었던 것이다. 또한 행정부 소속이 아니더라도 장성택이 요구하는 무역기관이나 외화벌이 단체는 즉시 그의 지도하에 넣도록 체계를 세워줬다.
이런 리유로 공화국의 일부 기관과 잘나가는 무역업체들이 행정부의 지도를 받는 기관으로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기관들로써 대외에 널리 알려진 대성지도국, 대흥관리국, 모란지도국 등 당 38, 39호실 산하 지도국들과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기관이었던 세관총국, 그리고 총정치국 조직부 산하의 54부였다.
54부 소속 수산기지 이관을 둘러싸고 전략로케트군과 54부 군인들 사이에 류혈적인 란투극이 벌어진 다음 날, 김정은은 집무실에서 사건에 대한 총정치국장 최룡해의 보고를 청취하였고, 이어 장성택과 장수길을 함께 불러 사건에 대한 질책과 함께 수산기지 이관에 대하여 지시했다. 김정은의 집무실을 나와 장성택의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장수길은 장성택에게 물었다.
“이상한 예감이 듭니다. 무슨 군사비밀에 속하는 문제가 있다고 부장 동지도 모르게 지시했단 말입니까? 혹시….”
대흥지도국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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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일자로 보도된 북한 조선중앙TV 뉴스에서 김정은이 대동강 타일공장을 방문, 현지 지도하는 가운데 장성택의 측근으로 공개처형되었다는 장수길(맨 왼쪽)이 안내하며 김정은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장성택은 제의서를 읽고 나서 대흥지도국을 제외한 38, 39호실 산하의 다른 지도국장들에게 전화로 이 같은 현상이 산하 광산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는지 물었다. 다른 지도국들에서도 이와 류사한 현상들 때문에 지장을 받는다고 보고하자, 장성택은 즉시 보안상에게 전화를 걸어 “비법적인 광석가공설비를 차려놓고 돈벌이를 하는 단체, 공민들을 엄벌에 처할 데 대하여”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낼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최고검찰소 7국장에게 직접 전화하여 전국적으로 국영광산들을 제외한 무역회사 산하 광산들의 광산 개발로부터 경영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없는지 철저히 조사하고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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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장성택을 죽이기 위해 그가 방심한 틈을 타 계략을 꾸몄다. 사진=조선DB |
〈장성택은 지난 수산기지에서 벌어진 사건을 오래전부터 이 나라 고위층 간에 자주 발생하곤 했던 이권싸움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예사롭게 생각했다. 이전에 리용무와 오극렬이 다투곤 했던 것처럼, 김일철과 김영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자기를 상대로 김정은을 꼬드긴 놈이 최룡해인지 리병철인지 괘씸하기 그지없고 어이없기도 했지만,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김정은의 권위와 위신을 세워줘야 했으며, 그를 위해 장수길의 수산기지를 버리는 것쯤은 장성택에게 있어서 일도 아니었다.
가재는 게 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김정은과 자기는 가족이며 한통속일진대 이런 초개념적인 인간사도 모르고 김정은에게 이번 수산기지 이관을 부추긴 놈들이나, 자기와는 일절 상의 없이 관할 부문을 전략로케트군에 이관케 하는 비정상적인 지시 체계를 빗대고 수산기지를 내놓지 않으려는 장수길이 가소롭기 그지없다고 장성택은 생각했다. 게다가 자기는 김정은을 어째 볼 생각이 꼬물만큼도 없으며, 김정은 역시 자기를 칠 생각은 꿈에도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또한 김정은도 자기와 같은 그런 초개념적인 가족관과 공생 리치를 알고 있을 것이며, 인간적으로 정치적으로 철이 든 젊은이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김정은은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원홍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의 집무실로 호출했다. 김정은은 왜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원홍을 호출한 것일까. 앞서 언급한 대로 최룡해가 뭔가를 꾸미고 있었음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원홍을 호출한 김정은은 다음과 같이 지시를 내린다.
“지금 간부들의 동향에 대한 감시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김정일) 장군님께서 서거하신 이후로 일부 간부의 일상에서 이전 때와는 다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이 배신자들이 머리를 쳐들기 적합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의 속심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간벽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들어야겠습니다.”
그러고는 서류 한 부를 김원홍에게 건네주면서 돌아가서 읽어보고 자기에게 다시 오라고 말했다.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원홍은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지난 2012년 11월 5일,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의 동상 제막식을 진행하던 날 제막식에 참가했던 김정은이 자기에게 조용히 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수령님들의 동상을 제일 먼저 모신 기관은 국가안전보위부가 처음입니다. 국가안전보위부장 동무는 국가안전보위부를 유사시 내가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수령의 보위대로 잘 준비시켜야 하겠습니다.”
김정은이 건네준 서류
김원홍은 김정은이 건네준 서류를 펼쳤다.
서류에는 “최고검찰소 수사국장 방창수의 불건전한 사생활 자료”라는 제목 밑에, 수사국장 방창수가 최고검찰소의 당적 지도를 책임진 중앙당 행정부 과장 리용국을 등 대고 검찰소 당위원회는 안중에도 없이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으로 놀아대고 있으며, 최근에는 평양시 평천구역에 있는 “안산정봉사소”의 단골손님으로 출입하면서, 봉사소 안에 있는 식당 책임자와 마약을 사용하며 부화방탕한 짓을 일삼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국가의 법을 어기며 돈벌이를 하는 일부 장사꾼과, 상업망들의 위법행위를 눈감아 주고 보호해주는 대가로 고급 승용차를 뇌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십만 달러의 현금까지 상납받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엄중한 것은 자신과 공무관계로 자주 마찰을 빚곤했던 최고재판소 전 책임판사 심영일을 시기하고 중상하다 못해, 리용국과 결탁하여 그에게 갖은 감투를 씌워 끝끝내 사형케 했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최고재판소 사건에 대해 김정은이 지시를 내리자 김원홍은 의아했다.〉
사건의 시작점인 최고재판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2012년 3월 어느 날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위치한 최고재판소에서는 중앙당 행정부의 몇몇 일군과 최고재판소와 최고검찰소, 보안성의 책임일군들의 참석하에 최고재판소 전 책임판사 심영일의 범죄에 관한 재판과 함께 판결 집행이 진행되었다. 기소문 낭독을 심영일의 사건을 담당했던 최고검찰소 방창수 수사국장이 하였다. 그에 따르면, 심영일이 책임판사의 직권을 이용하여 혁명과업 수행에서 본의 아니게 과오를 범한 일부 책임일군에게 어마어마한 감투를 씌워, 그들이 과오를 씻고 다시 혁명대오에 설 수 없도록 무기노동교화형 또는 사형과 같은 극형을 선고하여 그들을 육체적으로 정치적으로 영영 매장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심영일의 이 같은 행위는 수령, 당, 대중이 혼연일체를 이룬 북한의 사회주의 일심단결을 파괴하는 고의적인 반당, 반국가적대행위이며, 당에서 품들여 키운 아까운 일군들에 대한 살인테러행위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심영일은 공화국 형법 158조에 의하여 사형을 언도받았고 판결 집행은 교수형으로 즉시 집행됐다.
그때로부터 14개월 후인 2013년 5월 ‘전략로케트 군인들과 54부 군인들 간의 유혈충돌’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최고재판소 사건과 수산업 기지에서의 충돌은 무슨 연관관계가 있을까. 여기에 왜 최룡해의 농간이 있었을 거라는 의혹이 있는 것일까.
사건의 중심부로 들어온 최룡해와 장성택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이의 핵심 고리가 바로 장수길이다. 그렇다면 장수길은 어떤 인물인가.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사이에 북한에는 국가무역을 선도하는 쌍두마차 격인 인물들이 있었다. 그 쌍 기둥을 이루고 있던 인물들은 흥성무역회사와 강봉무역회사를 이끌었던 최영국과 승리무역회사 사장이었던 장수길이었다. 이들 모두가 군부 무역업체 수장들이었고 석탄 수출의 대부들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같은 해에 사망했는데, 최영국은 2013년 7월에 간암으로 사망했고 장수길은 11월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최영국이 병사하지 않았다면 장수길처럼 처형당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되어 처형됐거나 처형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불명예스러운 최후가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인 듯 말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노동당에서 무역업자들을 보는 눈길은 곱지 않으며 그들에 대한 평가 또한 인색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당에서 무역업자들을 나라의 질서가 한동안 마비됐던 지난 고난의 행군 시기에 대두한 혁명도 반혁명도 아닌 중간계급으로 보고 있으며, 오직 저들의 금전적 이해관계에 따라 혁명의 편에 설 수도 있고 반혁명의 편에 설 수도 있는 결코 독재체제에 이롭지 못한 존재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300만 명이 굶어 죽었던 지난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일 위원장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가 당시의 비극을 몰아왔다고 인정했으며, 장성택의 꾸준한 건의로 마침내 시장을 중심으로 인민들이 벌이는 각종 형태의 상업 활동을 허용했다. 하여 공화국을 파멸 직전의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었으며 이전 계획경제 시대보다 향상되고 안정적인 생활을 향유하는 백성들이 외치는 “김정일 장군 만세!”의 환호를 다시금 들을 수 있었다. 노동당에서는 혁명의 편에서 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열차에 선참으로 몸을 실은 무역업자들이 혁명이 맡겨준 과업을 저들의 이익이 침해당하지 않는 선에서만 수행하려 하는 보신주의자들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장수길과 최룡해
이와 같은 북한 노동당의 편협한 견해로 인해 무역업자들이 당과 국가의 요직에 승진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이 극히 드문 사례의 주인공이 바로 장수길이었다는 것이다. 본래 장수길의 직속 상급은 장성택이 아니라 총정치국 조직부장이었던 리룡하였다. 리룡하의 직속 상급 역시 장성택이 아닌 당시 최룡해 총정치국장이었다. 당시 장성택은 모든 무역회사의 경영실태를 살펴보면서 수중에 장악할 여러 무역업체를 체크하였다. 그 과정에 54부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총정치국장 최룡해에게 54부 책임일군을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장성택은 리룡하를 먼저 만나 장수길과 54부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를 듣고, 최룡해 총정치국장과 토론하겠으니 당생활 총화를 비롯한 정치 조직생활은 당분간 총정치국에서 하고, 행정적 지시는 자기에게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리룡하는 장수길이라는 부하 덕분에 무능하기로 소문난 최룡해로부터 장성택이라는 핵심 권력자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군 당사업을 지도했던 경력으로 인해 당시 인민보안성의 당적 지도를 담당하는 행정부 부부장으로 승진되게 되었던 것이다.
장수길은 2000년대 초엽에 참조개 양식업을 시작으로 무역업의 첫발을 뗐으며, 그 첫발을 뗀 곳이 바로 전략로케트군에 이관해야 할 온천군의 그 수산기지였다고 한다. 운이 좋아 사업을 시작한 그해에 큰 수익을 거두고 여러 가지 물품의 수출입 허가를 받아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특히 석탄 수출길을 먼저 열었고 그 수출액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장성택, 장수길 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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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김정일 생일 때 열린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과 장성택. 사진=조선DB |
“장 동무의 지난 시기 사업성과에 대해선 보고를 받았소. 많은 일을 했더구먼. 그런데 말이요, 당에서는 동무가 지난 시기 거둔 사업성과에 만족하지 않았으면 하오. 지금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서는 국가경제발전계획실현을 위한 대규모적인 공사와 건설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소. 이런 진군 속도에 발맞춰 그에 필요한 자금이 원만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소. 그래서 우리 당에서는 무역 분야의 일군들이 수출품의 값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국가발전강화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대규모 투자를 거래업체나 기타 외국 사업가들로부터 유치해낼 것을 바라고 있소. 장 동무, 좀 생각해보시오. 우리는 혁명가들이요. 이제부터는 동무가 보신적이고 리기적인 장사치의 근성을 털어버리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대인으로서의 새 모습으로 일해줬으면 하오.”
장수길은 장성택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으며, 그동안 자기를 장사꾼내지 하인 대하듯 했던 당 기관, 감독통제기관에 당했던 지난날의 설움을 잠시 회상하고는 장성택에게 심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부부장 동지, 외람된 질문이지만 말씀하신 대로 제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대인이 된다면 당에서는 제게 어떤 대인다운 옷을 입혀줍니까? 예를 들어 제가 무역 분야에서 벗어나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이 될 수 있는가 말입니다.”
장성택은 장수길이 뭘 바라는지 그의 질문을 듣고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자기와 같은 무역업자들에 대한 대접을 바로 해달라는 뜻이었다. 국가경제발전에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이들을 대하는 당의 입장과 태도가 조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 동무, 내 동무의 바람이 뭔지 알았고 그것을 꼭 이뤄주겠소.”
그러고는 서기를 불러 사진을 찍게했다.
장수길은 중국 거래자들을 투자처로 유도하는데도 장성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적극 활용했다. 중국공산당의 일부 권력가들은 부정축재한 거액의 현금을 세탁할 목적으로 하수인들을 내세워 장성택이라는 큰 배경을 업은 장수길과의 각종 무역거래에 응하였다. 그들은 석탄이나 정광, 수산물 등 각종 수출품의 대금을 장수길에게 거액의 현금과 각종 설비와 자재 등으로 후불하였고, 그 상환에 대해 독촉도 하지 않았으며 그런 무질서한 거래는 회계를 하는데도 혼란이 미치는 정도였다. 이러한 이상한 무역거래의 흐름 속에 장수길이 단 일주일 동안 수출한 무연탄 46만t을 구매한 중국의 어느 한 에너지 생산업체는, 석탄대금 전액을 지불하고도 대규모적인 타일 생산기지를 건설해준다는 투자결정까지 한다. 이렇게 되어 대동강 타일공장이 생겨나게 되었다. 장수길에게는 노력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최룡해의 앙심
장수길을 총정치국이란 닭장 속에 사는 암탉에 비유한다면, 그가 낳는 달걀에 대한 소유주는 최룡해가 아닌 장성택이란 현실을 쓰든 달든 최룡해로서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장성택과 최룡해는 일반 사회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래된 숙원(宿怨)이 장수길과 리용하로 말미암아 존재했던 것이다. 능력은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아버지 최현(崔賢)으로부터 이어온 보스 기질을 타고난 최룡해가, 수십 년간 장성택의 위세에 눌려 기세 한 번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르상티망[원한(怨恨), 앙심(怏心)]이 종국적으로 장성택 일당의 제거로 나타났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당시 사건을 두고 조연(助演)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 이웃 나라 중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언급들이 타전되었다. 중국 공산당교(黨校)의 핵심 인사가 한 전언(傳言)이다.
“잠잠하던 조선에서 또 상황이 벌어졌다. 김정일이 죽기 전에 젊은 아들이 권력의 기초가 부족하고 정치 경험이 없어서 8대 장관들이 김정은을 도와줄 수 있도록 안배했다. 그중 조선인민군 총장 리영호와 장성택이 권력의 제일 높은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김정은이 권력을 잡고 1년이 되지 않은 시간에 반혁명죄로 리영호를 청소했다. 이 사건을 공작한 사람이 바로 장성택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1년이 지나 장성택 또한 리영호와 같은 운명이 되었다.”
이번 작전을 주도했고 토사구팽(兔死狗烹)의 대명사가 된 김원홍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살펴보면서 마무리를 지어보자. 북한의 김원홍을 하인리히 뮐러라 칭하는 것은,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3대 수장(首長)이었던 뮐러와 직책도 같고 저지른 악행도 비슷해서라고 한다.
지난 시기 북한에서는 소련의 ‘푸룬제 아카데미’로 유학했던 군장성급들을 쿠데타 세력으로 모조리 처형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이를 실행했던 보위사령부의 반탐국장이 바로 김원홍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 공로로 보위사령관이었던 조명록이 총정치국장으로 승진하면서 보위사령관이 되었다.
보위사령부 숙청
원래 북한의 공식 권력기관 중에 국가안전보위부의 위상은 보위사령부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최고권력자의 의중에 따라 부침(浮沈)이 많다 보니 상당 기간 보위부의 위상이 보위사령부에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이 최고통치자가 되면서 보위사령부 소속이었던 김원홍을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하면서 보위부에 힘을 실어줬는데, 그 첫 번째 조치로 그간 득의양양하던 보위사령부 상층부의 부정부패행위들에 대한 척결을 단행케 했다.
2012년 5월의 일이다. 어느 날 새벽, 만수대 거리에 새로 선 아파트 옆을 지나던 김정은이 아파트 주차장에 군 번호판을 부착한 승용차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주차장의 승용차들은 어느 군부대 차들인가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수행하던 간부 중 한 명이 상황을 알아보고 보고하기를, 주차장에 세워진 차량들은 모두 보위사령부 소속 차량이고 사는 사람들도 보위사령부 일군들이라고 하자, 대로한 김정은이 옆에 서 있던 김원홍에게 당신 밑에 있던 사람들이니 당신이 직접 조사해보라고 호령했다는 것이다.
불호령을 받은 김원홍은 즉시 ‘횃불 체포조’를 출동시켜 그 아파트에 사는 보위사령부 일군들을 모조리 체포했으며, 그런 후 영화, 예술인들에게 압수한 아파트들을 선물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보위사령부를 총정치국에서 직접 관할하는 인민군보위국으로 개편시켜버렸다. 김원홍 앞에는 더 이상 견줄 대상이 없어진 셈이었다. 김원홍은 자신의 심복 부하에게 장성택 사건처리 문건을 별도로 보관토록 하고, 일단은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서서히 조여져 오는 ‘덫’
하지만 최고권력은 이마저도 알고 있었던 걸까. 김원홍의 처형에 대한 소식은 별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사건처리 문건을 소지했던 김원홍의 심복에 대한 근황 또한 더는 나온 것이 없는 실정이다. 비운의 권력자 장성택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54부 수산기지에서부터 북한 전역의 막강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당대의 실력자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에는, 일반 상식을 넘어서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서서히 조여져 오는 ‘덫’이 존재했음을 여기서도 확인된다.
사건처리 문건 말미엔 이렇게 적혀있다.
“당에서는 장성택 일당의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알고 주시해오면서 여러 차례 경고도 하고 타격도 주었지만 응하지 않고 도수를 넘었기 때문에 더는 수수방관할 수 없어 장성택을 제거하고 그 일당을 숙청함으로써 당 안에 새로 싹트는 위험천만한 분파적 행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