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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공개

北 혁명조직원과의 死生決斷 대화록 ⑧ 김정은의 할아버지(김일성)와 아버지(김정일)는 미타(찜찜)한 남조선 출신 교화 안 된다며 모조리 숙청

글 :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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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이 만든 정치범수용소의 실체
⊙ 김일성, 연좌제 적용 아이들에게는 글만 알아볼 수 있는 교육시켜
⊙ ‘모두 죽여야 한다’는 김일성의 사상소멸이론
⊙ 심화조 사건 관련자 숙청 위해 단독 정치범수용소 만든 김정일
⊙ 김일성이 정치보위부 부장 김병하를 반당반혁명분자로 몰아 죽인 이유

도희윤
1967년생. 연세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도대체 TV 대표, 한국자유전선 사무총장, 뉴라이트 전국연합 북한인권특별위원장,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역임

[편집자 註]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는 2019년 5월 16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내부 혁명조직원 김씨와 2014년 중반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도 대표는 인터뷰에서 “혁명조직 일원은 ‘김정은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방법은 그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며 “김씨는 새로운 지도자가 또 독재를 하더라도, 그건 개발독재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신격화된 독재보다 낫다. 박정희 같은 사람으로 북조선을 끌고 가다 통일을 이루면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도 대표는 《월간조선》 기고를 통해 혁명조직원과 나눈 대화 내용 등을 자세히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도 대표가 보내온 ‘北 혁명조직원과의 사생결단(死生決斷) 대화록’ 제목의 글에는 그가 혁명조직원 김씨(닉네임 ‘최이상’)와 메신저를 통해 나눈 대화 등이 담겼다.
  이번 호를 준비하면서 북한의 아우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사악한 악령에 사로잡힌 무리가 벌인 적폐청산이라는 난동이 남북한이 예외가 아니라는 차원에서도 그렇고, 그런 악(惡)의 무리가 남북으로 들어선 지금 아우 같은 인물과 조직이 너무나 절실히 요구되기에 더욱 그랬다.
 
  한없이 자애로운 인민의 어버이로 알려지길 원한 김일성. 그의 손자는 얼굴까지 성형하면서 몸짓과 어투까지 그를 따라 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글이 감춰진 악의 화신 김일성의 실체와 더불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반(反)대한민국 반역 정권과의 연계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본다.
 
  다시금 느끼지만 북한의 아우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해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의 보위를 염려하며) 무엇이 독재 체제를 작동시키며 운용되는 핵심인지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파괴해야만 김씨 왕조를 끝장낼 수 있다는 데 명확한 확신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참다운 지식인의 자세는 국민의 아픔과 고통, 분노를 자신의 아픔, 고통, 분노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북한의 아우가 남긴 공포와 인권 유린의 대명사인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 드러나는 야만의 종언을 위해, 세상 모든 지성인이 함께 행동하기 바라며 아우와의 대화를 이어가고자 한다.
 
 
  정치범수용소 시작
 
  최: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권 유린 행위를 자행하면서도 전혀 동정하거나 량심상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도 다 자기 딴의 리유가 있습니다. 수용소에 대하여서도 대표님과 의견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도: 잘 알겠습니다.
 
  최: 정치범수용소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우선 북한에 있는 여러 가지 수용소 중에서 어떤 것까지 수용소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우선 어떤 나라에나 다 있는 일반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로동교화소가 있고, 보안부(경찰)가 관리하는 로동단련대(남한의 삼청교육대와 비슷한 것)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과 함께 들어가 있어야 하는 농장관리소가 있고, 본인만 들어가 있는 관리소가 있으며, 또 집결소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 어떤 범죄자들을 관리 수용하는 수용소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엔에서 상정되고 있는 정치범수용소는 농장관리소와 관리소를 말합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의 교정시설은 대부분 구치소와 교도소로 구분되어 있다. 형(刑)을 확정받지 않은 미결수의 경우가 구치소에 수용되고 형이 확정된 기결수의 경우 교도소에서 본격적인 수형 생활에 들어간다. 하지만 북한과 같은 공산 체제는 일반적인 교정시설 외 특히 정치범 같은 경우, 우리로서는 민주 인사들이 해당하는데 이들은 모두 정식 재판 등을 거치지 않고 국제사회가 표현하는 정치범수용소, 북한식 명칭으로는 관리소에 수용되며, 영원히 사회와는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한다.
 
  최: 정치범수용소 문제는 저희 조직에서도 깊이 있게 연구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도 그리고 지금의 조건에서 수용소의 철폐 문제도 실상은 유엔이나 대표님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표님이 이끌고 계시는 단체가 다루는 게 랍치 피해자 문제와 탈북자 문제, 북한의 인권 문제인데 그 운동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 만큼 북 주민들의 생각과 일치해야지 만일 차이가 난다면 대표님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으로 될 수 있습니다.
 
  대표님도 아실 것입니다. 정치범수용소의 공식 명칭은 ‘국가안전보위부 농장관리소’입니다. 처음 생겨나기는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전원회의에서 당시 북한의 당과 정부의 과반수 각료가, 김일성에게 집중된 권력을 민주주의공화국의 성격에 맞게 독단으로 집중 처리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으로 모든 내각성원의 의견을 수렴하고 집체적 토의를 거쳐 과반수가 찬성하면 가결하여 집행하는 체제를 세우자고 회의 안건으로 제출하였다가 생겨난 것입니다.
 
  회의 안건은 인민경제 수행과 관련한 문제를 토의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회의를 통하여 김일성의 독재를 저지시키는 체제를 세울 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자고 미리 약속한 과반수의 각료가 회의 안건과는 다른 문제를 들고나와 토론을 벌이자 회의를 휴회하고 슬그머니 회의장을 빠져나간 김일성이 군대를 동원하여 안건 제기자와 안건을 지지한 각료 모두를 체포하여 일어난 사건이 8월 전원회의 종파사건입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 종파사건
 
1956년 8월 전원회의 종파사건은 김일성이 정치범수용소를 만든 계기가 됐다. 1953년 7월 27일 오후 2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가운데)과 조선노동당 중앙위 서기 박정애(오른쪽)가 둘러선 가운데 김일성이 휴전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 종파사건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주요한 정치 사건 중 하나다. 북한의 아우는 위와 같이 표현하고 있지만, 국제사회에 알려진 8월 종파사건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전후 복구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김일성이 소련과 동유럽 국가 순방 길에 오르자(6월 1일~7월 19일) 그 틈을 타서 반(反)김일성 세력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련 대사 이바노프가 그 배후에 있었던 것도 잘 알려진 사항이다.
 
  당황한 김일성이 조기 귀국하여 8월 2일 예정되었던 중앙위 전원회의를 8월 30일로 연기하며 사전에 대비했고, 1956년 8월 30일에 평양예술극장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다. 상업상 윤공흠이 토론자로 나서서 갑자기 김일성 지도부를 공격했는데 그 내용은 너무나 당연한 실정(失政)에 대한 비판이었음에도 이들 모두는 당직을 박탈당하고, ‘반당종파분자’로 몰렸다. 대부분의 중앙위원이 김일성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윤공흠, 서휘 등은 당에서 쫓겨났으며 연안 독립동맹 계열의 지도자 최창익과 소련 계열인 내각 부수상 박창옥 등은 당직을 박탈당했다. 이렇게 되자 윤공흠 등은 서휘, 리필규와 함께 중공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상황은 김일성에게도 만만치만은 않았다.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평양으로 들어와 반대파의 손을 들어주었으며, 반대파를 뒤에서 부추겼던 소련 측도 부수상 미코얀을 보내 이들을 도와주었다. 김일성은 일단 한발 물러서서 이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 김일성은 본격적으로 반대파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숙청 작업은 1958년 3월까지 진행되었다.
 
 
  김일성 “반혁명분자들의 씨를 말려라”
 
일본의 후지TV가 2004년 2월 27일 공개한 북한 함남 요덕 정치범수용소. 정치범들이 경비대와 보위부원들의 주택가를 돌며 인분을 퍼내 나르는 모습이다.
  최: 그때 체포한 각료 중에서 소련과 북한의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소련으로 추방하고 나머지는 처형하거나 감금하였습니다. 이때 련좌죄 법을 만들어냈는데, 체포된 각료들의 관련 부서에서 그들과 련계됐다고 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 친척들까지 모조리 체포하였습니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전원회의에 참가할 급이 안 되는 산하부서의 관리들과 그와 련관된 가족, 친척들이 절대다수였는데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체포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처음 체포할 때 회의 참가자만 해당하였는데 후에 김일성의 지시로 본인들의 가족, 친척과 련관됐다고 의심되는 사람들, 그리고 또 그들의 가족, 친척까지 모조리 씨도 없이 체포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 그 지시를 집행한 내무성이 ‘가족, 친척이라고 하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하고 묻고, 그들을 감금하면 그 인원이 대단할 텐데 어디다 수용하며, 또 그들의 형량은 어느 만큼 적용해야 하는가’ 하고 구체적인 지시를 줄 것을 김일성에게 요구했습니다.
 
  이때 김일성이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이 영원히 바꿀 수 없는 북한의 수용소 관리 규정으로 되었습니다. 김일성의 이 지시는 북한의 내부기밀문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주민등록 체계가 서 있지 않은 북한의 내무성(경찰)으로서는 친척관계를 규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보위부가 없었고 내무성 안에 정치보위부서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김일성은 가족은 본인과 부모, 형제인 경우 아들이든 딸이든 가정을 이루어 갈라져 나와 살아도 해당하며, 친척으로는 친켠으로 8촌까지의 모든 형제, 숙질들과 그의 안해(아내)까지, 외켠으로는 4촌과 그의 안해까지, 미혼의 4촌 누이까지, 처켠으로는 장인, 장모, 처남, 처남의 안해, 미혼의 처제까지 속하며, 고모켠으로는 고모 4촌, 미혼의 고모 4촌 누이동생까지, 고모 4촌의 안해까지, 이모와 이모부, 이모 4촌 형제와 그의 안해까지, 미혼의 이모 4촌 누이까지가 친척으로 된다며 그 범위를 대단히 넓게 잡아주었습니다.
 
 
 
얼굴 모르는 친척도 연좌제 적용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한없이 인자한 모습으로 자애로운 어버이 수령으로 알려지고, 이곳 남한에도 그를 추종하는 무리가 영원한 수령으로 모시는 김일성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권 유린의 대명사인 정치범수용소의 창안자였음이 북한 내부의 반체제 조직에 의해 밝혀지는 지금, 소위 주사파 무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권력까지 빼앗긴 대한민국은 무엇을 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최: 우리 조선 민족의 경우 이렇게 친척관계를 잡으면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절반이 넘고, 친척들을 통하여 이름이나 들은 적 있다는 친척들이 30% 이상 됩니다. 그러니 거의 대다수가 영문도 모르는 애매한 사람들로 됩니다.
 
  또 여기서 친켠은 대단히 넓게 잡고 외켠은 상대적으로 작게 잡았는데, 이것은 김일성 자신이 성장과정에 외켠 친척들의 래왕이 별로 없이 자란 환경과도 관련됩니다.
 
  이런 규정으로 체포하면 본인 한 사람당 가족, 친척이 사생아가 아닌 다음에야 100명에서 150명 정도 되는 인원으로써, 그것을 집행하는 보위부의 고위층 관리로부터 하급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몸서리쳐야 하는 범위입니다.
 
  이런 규정은 아무리 김일성에게 충실해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걸려들지 누구도 모르는 범위이고, 1부류 계층으로부터 4부류 계층에 이르기까지 공포에 떨게 하는 범위로써, 만일 이런 련좌죄법이 철폐되면 김정은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만세를 부를 공포의 범위입니다.
 
  실지 1997년엔가 황장엽이 남한으로 망명하였을 때 북한이 그의 가족, 친척 150여 명을 처형했다고 제 입으로 발표하였습니다.
 
 
  “반혁명 범죄자는 영원히 교화되지 않는다”
 
  최: 형량은 어느 정도로 적용해야 하느냐는 지시사항에는 ‘반혁명 범죄자는 영원히 교화되지 않습니다’라는 지시를 내려, 그들 모두를 종신 징역자로 규정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그들을 지금 있는 교화소가 아니라 깊은 산속에 닫긴 구역을 만들고, 여기서 영원히 나올 수 없게 하며, 그 존재는 북한 사람들에게도 알려지지 않게 하며, 그 안에서의 결혼으로 인한 인구 증가는 철저히 막으며, 그렇게 되면 그들 모두는 점차 늙어 사망하게 되며 나중에는 농장은 없어지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최소한도의 식량과 피복만을 공급하며, 그 자녀에 대한 교육도 극히 글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 하며, 농장 운영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내무성이 소비하라’고 그 관리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하였습니다.
 
  도: 정말이지 말문이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내용입니다. 제가 찬찬히 열람하고 의견을 남겨두겠습니다.
 
  최: 수용소의 철폐는 김씨 왕조가 무너지면 자연히 없어질 것이지만, 김씨 왕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수용소 철폐운동을 벌리자면 그 집행자들의 사상동향 상태와 리해 관계를 잘 파악한 데 기초하여 전략과 전술을 세워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장문의 설명이지만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악의 화신, 김일성의 사상소멸이론

 
미국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가 2019년 말 북한 함경북도 청진의 정치범수용소인 ‘25호 관리소’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된 수감자들을 촬영한 민간 위성사진을 공개했다.
  북한의 아우는 정치범수용소 철폐운동이 얼마나 중요하고 이것을 위해 필자가 노력해달라고 당부하는 것이 또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날의 아우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날은 일과가 없는 휴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그만큼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이리라. 생사조차 모르는 아우에게 미안함이 한없이 몰려온다.
 
  최: 우리 조직은 김일성이 왜 이렇게 잔혹하게 정치적 반대세력과 그 관계자들의 범위를 넓게 잡아, 그들의 육체를 말살하여 그들의 정신 상태가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닫긴 구역을 만들었을까에 대한 토론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것은 김일성의 정치적 사상 상태의 성장과정과 관련됩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민족주의자로써 반일독립운동을 벌인 사상운동가입니다. 그의 정신 상태가 자란 시기는 리씨 왕조의 마지막 시기였고, 국권 회복 후 나라의 통치 방식은 봉건적 군주제였습니다.
 
  김형직이 식민지 반체제 사상운동을 하다 체포되었을 때 김일성이 평양감옥에서 감옥살이를 하는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이 7살 때인 1919년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아버지를 보면서 그를 감금한 일제에 대한 반항의식이 크게 자라났고, 또 자기는 거기에서 경험과 교훈을 얻어 새롭고 과감한 반일투쟁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졌다고 회고록에 밝혔습니다.
 
  결국은 ‘아버지를 체포하거나 처형할 때 아들을 살려놓으면 자기의 경험으로 보아 반항의식이 더 크게 자라기 때문에, 아예 모두 죽여 없애야 사상이 소멸된다’는 김일성의 ‘사상소멸리론’에 따라 이러한 련좌죄 처벌 방식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의 성장과정이 리씨 왕조의 통치 방식이 지배하던 시기이므로 그는 처음부터 왕을 꿈꾸는 절대 봉건 군주주의자였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일성, 수용소 운영 실체 철저히 비밀에 부쳐
 
국제사회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북한 요덕 정치범수용소 전경. 요덕 수용소 입구에 있는 국숫집 앞에 군인들이 서 있는 모습(왼쪽)과 요덕 정치범수용소 입구. 사진=피랍탈북인권연대 제공
  북한의 아우는 실로 놀라운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쏟아냈다. 북한의 골수 빨갱이가 하는 말을 남한에서 김일성을 추종하는 악의 무리가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했다. 계속 따라가보자.
 
  최: 그는 ‘모든 사람은 자기의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없으며, 오직 한 사람의 사상과 지도를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며 그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처형은 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세계관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정책 수립에 대한 의견이나 찬반을 물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김일성의 통치관을 리해하지 못한 것은 그가 자기의 속생각을 잘 감출 줄 아는 성격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전원회의 참가자들이 그가 이러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미리 생각했다면 다른 전술을 썼을 것입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유일사상 체계를 세우는 과정에 유일사상 체계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자기의 견해를 말하던 수많은 사람들과 가족, 친척들, 그리고 6·25전쟁 당시 적 기관이나 치안대에 가담하여 살인 만행을 한 사람들, 남조선 출신들로서 사상 상태가 미타(찜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국군포로 중에서 미타한 사람들, 인민군 포로 귀환병 중에서 그러한 사람들, 그전에 8·15광복 이전에 국내, 국외에서 활동한 정치적 적수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수용소에 감금되어 수용소의 수도 늘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김일성이 처음에 지시했던 수용소 인원들의 노화로 인한 수용소 범위 축소 및 폐지는 집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났으며, 그 실체에 대한 비밀 보장도 국내의 북한 주민들은 물론 국제사회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의 위치나 수용소의 수용인원, 수용소 안의 구체적 인권 상황 등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렬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대한 자료는 우리 조직의 관심 밖의 일이고 또 그 자료를 알 수도 없습니다. 수용소의 인권 상황은 이미 나와 있는 진술로도 충분하며 관계자라 해도 그 이상 더 잘 알 수 없습니다. 수용소의 수용인원에 대한 통계는 극비사항이므로 몇 명의 관계자 외에는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김일성 시대에 그가 직접 만들어놓은 수용소는, 그 운영 실체에 대한 것이 북의 일반 주민들에게 알려질 경우 나타나게 될 부정적 결과 때문에 김일성은 생전에 그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부치라고 수차에 걸쳐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번식(출산)을 막으면 나중에 수용소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용소의 인원은 계속 늘어났고 김정일 시대에 와서 사회안전성 농장관리소라는 것이 새로 또 생겨났습니다.
 
  8월 종파사건과 같은 큰 사건 때 말고는 개별적으로 잡혀 들어오는 사람들과 거기서 죽어 나가는 사람의 수가 대체로 균형을 이뤄 이후 수용소는 더는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시대 때 있은 여러 가지 정치적 반대파나 적수들을 제거하기 위한 대숙청으로, 3차례 내지 4차례에 걸쳐 수용소의 개수가 늘어나고 더는 김일성의 통치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어진 김정일 시대에 들어서서는 수용소가 늘어날 일이 없어졌습니다.
 
 
  심화조 사건으로 자체 수용소를 만든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 관련자 조사를 위해 수용소를 만든 김정일.
  최: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심화조 사건이라는 것이 김정일 통치 시기에 들어서면서 있었는데, 이 사건을 당시 사회안전성(현 인민보안성)이 진행하였는데 이때 체포한 관련자들과 그 가족, 친척들을 수감하느라고 국가보위부와는 별도로 안전성이 자기의 농장관리소를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인민보안성 10국(교화국) 소속의 관리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보위부 소속의 수용소와 보안부 소속의 수용소 모두 일단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최: 원래 김일성이 체계를 세워놓기는 수용소는 정치범 사건을 다루는 보위부가 운영하고, 일반 사회범을 다루는 경찰(보안성)은 세계 모든 나라에 다 있는 교화소(교도소)만을 10국이 운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심화조 사건과 같은 정치적 사건은 자기들이 실마리를 잡았다고 해도 보위부에 넘겨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기능을 초과하여 보위부의 기능에 속하는 심화조 사건을 도맡아 진행하여 나중에는 단독 정치범수용소까지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그럴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심화조 사건은 김정일 통치에 들어서면서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자 경제 파탄의 책임을 김일성 시대 때 등용되었던 로간부들에게 씌우려 서북청년회의 북파된 간첩으로 몬 김정일의 지시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입니다. 원래 그 사건의 조작은 국가안전보위부가 해야 하는데, 사건을 조작하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보위부 상층의 간부들이 무언의 항변으로 거부하여 하는 수없이 안전성이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도: 정말 좋은 자료입니다. 아우님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제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명도 설명이거니와 수용소 문제에 이렇게까지 상세한 사항들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북한을 넘어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려지면 엄청난 파장이 있으리라 봅니다. 인권운동을 하는 많은 분을 대신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최: 제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조직의 고심 어린 연구 결과입니다.
 
  도: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 성원들의 역량과 땀이 소중히 느껴집니다.
 
 
  北 국가보위부도 김씨 왕조의 피해자
 
지난해 말 김정은이 묘향산의료기구공장을 시찰하며 담당자들을 질책하는 모습.
  최: 계속하겠습니다. 마지막에 토론합시다.
 
  김일성 시대 때부터 수용소의 2차 피해자는 보위부였습니다. 초대 부장이였던 김병하를 내세워 김일성은 유일적 지도 체제를 세우기 위하여 말과 행동을 충성스럽게 하지 못하는 수많은 4부류에 속하는 인민들과 1, 2, 3부류의 간부들을 대량 체포하여 수용소에 보냄으로써,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공포심을 주어 사상의 일색화와 유일령도 체계를 세워놓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말 한마디의 실수로 잡혀가 인민들 속에서 불만이 생겨날 조짐이 보이자, 그 집행자인 국가정치보위부 부장 김병하를 반당반혁명분자로 몰아 처형하고 보위부 상대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여 인민들의 불만을 모두 보위부에 넘겨씌웠습니다. 김일성은 자기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김병하가 수령도 모르게 수많은 사람을 수용소로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숙청된 보위부의 간부 중 국가정치보위부 내 장령(소장) 1명만이 살아남고 모두 처형된 사실은 대량 체포가 있을 때마다 보위부도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후에 중앙방송위원회 론설원 사건으로 대량 숙청의 피해를 본 보위부의 상층부 간부들은 심화조 사건이 마지막에는 자기들에게 어떤 피해로 돌아오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김병하가 반당반혁명분자라면 그가 체포한 수용소의 수많은 사람을 석방하여야 하지만, 그의 처형으로 끝났지 석방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김씨 왕조가 할아버지 때부터 속임수를 잘 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김씨 왕조를 추종하는 남한의 주사파 출신들이 속임수에 능하다는 게 우연일까 필연일까. 김일성의 감춰진 사악함에서 지금 남북 정권을 같이 보노라면 초록이 동색이라는 느낌이 떠나질 않는다. 6·25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도 이런 악령의 세력과 싸우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 이러한 풍부한 경험을 가진 보위부의 상층부는, 1998년 국가보위부를 비밀리에 방문한 김정일이 4대 보위부장 김영룡의 계급을 상장에서 대장으로 승격시켜주면서 심화조 사건을 추진시키라고 지시를 주었으나, 알았다고 대답만 하고는 무언의 항변으로 그 집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결과에 대한 대접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화가 난 김정일은 당시 중앙사로청위원장이였던 최룡해의 뢰물 및 부화(섹스 스캔들) 사건을 자기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그를 반당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하고(사무실에서 음독자살), 보위부 안의 거의 모든 장령을 안기부와 결탁한 간첩집단으로 몰아 보위사령부로 하여금 체포, 취급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그 사건 날조를 안전성(경찰)이 하게 된 것입니다.
 
  도: 이런 사실들을 ○○○이 인민들에게 알려준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지겠습니다. 보위부 안에서도 김씨 왕조에 대한 반감이나 저항의식이 장난 아니겠습니다. 보위부의 상대가 보위사인가요?
 
  최: 대단합니다. 제일 높다고 봐야지요. 아, 그건 서로 계통이 다릅니다. 평시에는 서로 상대에 대한 체포 권한이 없으나 김정일의 지시가 있으면 상대를 누를 수 있습니다.
 
  북한의 아우는 국제사회의 일반적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을 하고 있었다. ‘김씨 왕조의 유지에 가장 앞장서 있는 보위부가 김씨 왕조에 대한 반감이 가장 높다’고 말이다. 평소 보위부에 대한 악감정을 내가 쏟아놓을 때 아우가 ‘너무 보위부를 미워하지 말라’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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